정말로 이애란 탈북동포에게 얼굴들어 똑 바로 처다볼 염치가 없다. 공산주의로 부터 우리남한을 지키기위한 탈북동포들의 노력에, 문재인, 노무현 좌파 정부가 무엇을 도와준적이 있었는가?
탈북동포들이 주동이 되고, 남한동포들이 이에 뜻을 같이 하여, 이북동포들에게 이북밖의 세상이 돌아가는 뉴스와 먹거리들을 조금이나마 보내고져, 대형풍선을 임진각을 중심으로 해서 매년 날려보냈던 행사를, 문재인 정부가 법을 정해서 다 막아 버린 행위를 과연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이런 행위는 문재인씨가 과연 남한 동포를 위한 정책이었는지? 아니면 이북의 LittleMan에게 충성하느라 한 정책이었는지? 상상은 독자들에게 맡긴다.
이북의 LittleMan이 대형풍선 띄우는것을 북괴에 대한 간접침략행위로 간주하고, 띄우지 못하도록 문재인에게 공갈 협박을 쳐서 막을려고 했는데, 처음에는 이를 심각히 여기지 않고, 대형풍선띄우는것을 자제해달라고 말렸으나, 이를 무시하고 계속 띄우자, 개성연락사무소에 있는 남북연락사무소 건물을, 한마디 통보도 없이 폭파해 버렸었다. 그폭파로 우리국민들의 세금 700억원을 공중에 날려 버린 셈이됐었다.
더욱 이해를 못하겠는것은, 연락사무소 폭파를 당했는데, 한마디 비난이나 항의 한마디 하지 못하고, 불야 불야 법을 만들어 대형풍선을 띄우지 못하게해서 원천 봉쇄하는 바보짖을 했다. 이런 상황을 이애란 탈북 동포가 봤을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다행인것은 이제 좌파 대통령이 더이상은 최소한 앞으로 5년은 눈에서 사라질것이라는 점이다.
앞으로는 대형풍선띄우는 대북동포에게 보내는 대형풍선 띄우는 캠페인이 다시 재개 되기를 기대해도 좋을것 같다는 생각이다. 이애란 탈북동포를 비롯하여 많은 탈북동포들도 북에 있는 가족들에게 소식을 전할수 있는 대형풍선 띄우는 작업이 다시 재개될수 있을것이라는 희망이 보인다.
뇌물받고 걸려서 자살한 노무현정신은 무엇인가요?
위대한 이승만정신은 언급하는 지도자가 없네요
슬픈현실속에 위대했던 그러나 잊어버리려고밀어내 버린 건국대통령이야기를 다시 새겨봅니다
(30년전에 작고한 여사가 88세에 남긴 멋진 뒷이야기)
프랜세스카여사의 눈에 비친 이승만1. 첫 만남
내나이 어느덧 올해로 만 여든여덟, 나 자신 내세울만한 공덕도 없이 아들 인수내외와 국민들의 보살핌 속에 이토록 행복한 여생을 보낼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이제는 어서 동작동의 남편 곁으로 가야될텐데 염치없이 더 오래 살고 싶은 핑계가 생긴다. 남편의 소원이던 남북통일, 우리 손자들이 더 장성하여 장가가는 것, 그리고 남편의 사료 및 유품전시관과 기념도서관이 건립되는 것 등을 지켜보고 싶은 욕심 때문이다.
사실을 그동안 많은 분들이 나에게 글을 써 달라고 부탁을 했었지만 나는 늘 사양해 왔다. 그것은 내가 "여자란 말이 적어야한다." (Woman should be seen not be heard)는 남편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 온 때문이다.
그러나 옆에서 며느리가 [건강장수 하셨던 아버님을 보필하시는 중에 그 생활이나 식사관리, 건강상의 비결같은 것을 이야기해 주실 수 있다면 우리 국민의 건강을 위해 여러가지로 도움이 될듯 싶은데요]하고 조르는 바람에 나의 두서없는 말을 며느리가 받아 쓰기로 하여 이글을 시작한다.
생각해보면 지금으로 부터 55년전 1933년에 내가 리박사를 처음 만나게된 곳은 스위스 제네바의 레만호반에 있던 호텔 [드 라 뤼씨]의 식당이었다. 그 때 나는 어머님을 모시고 프랑스 빠리를 경유해서 스위스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당시 리박사는 일본의 만주침략이 논의의 대상이 되고있던 국제연맹에서 일제의 학정을 또다시 받게된 만주의 한국동포들의 애절한 입장을 호소하고 국제연맹의 방송시설을 이용해서 [한국을 독립시켜야만 극동의 평화가 유지된다]고 역설하며 각국대표와 신문기자들을 만나는등 각방으로 활약중이었다.
우리가 이 호텔에 여장을 푼 이튿날 저녁식사를 하려고 4인용의 식탁에 어머니와 내가 단둘이 앉아 있을때 이미 만원이 된 식당에서 리박사도 식사를 하려고 앉을 자리를 찾고 있었다. 이때 지배인이 우리에게 와서 정중하게 [동양에서 오신 귀빈이 자리가 없으신데 함께 합석하셔도 되겠습니까?]하고 양해를 구해서 우리는 승락했다.
지배인의 안내를 받으며 우리가 앉아있는 식탁으로 온 리박사의 첫인상은 기품있고 고귀한 동양신사로 느껴졌다. 그는 프랑스어로 [좌성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정중히 인사를 한뒤 앞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곧 바로 메뉴를 가지고 온 웨이터에게 높은 신분으로 보였던 이 동양신사가 주문한 식단을 보고 나는 무척이나 놀랐다.
사워크라푸트라는 시큼하게 절인 배추와 조그만 소시지 하나와 감자 2개 그것이 주문한 메뉴의 전부였다. 당시 유럽을 방문하는 동양귀빈들의 호화판 식사와는 달리 값싼 음식만 골라 주문했기 때문이다.나는 왜 그런지 이 동양귀빈의 너무도 초라한 음식접시에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숙녀들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는 서양신사들과는 달리 온화한 표정으로 말없이 앉아서 웨이터가 음식을 가져오자 식사를 하기전에 불어로 [본 아뻬띠!](맛있게 드세요!)하고 예의를 갖춘후 조용히 식사만 하고 있는 이 동양신사에게 사람을 끄는 어떤 신비한 힘이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무의식 중에 나는 이 분의 식사하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그만 눈이 마주치게 되어 무안해서 미소를 마금고 [동양의 어느 나라에서 오셨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분은 힘있게 [코리아]라고 대답했다.
나는 여행하기 직전에 우리 독서클럽에서 보내주어 읽어있던 [코리아]라는 책속의 [금강산]과 [양반]이라는 한국말이 생각났다.내가 [코리아에는 아름다운 금강산이 있고 양반이 산다지요?]하고 말했더니 그분은 무척이나 놀라면서 반가와했다.
그때만 해도 한국을 알아주는 외국인이 드물었고 또 알아도 일본의 악선전으로 잘못된 인식을 가졌기 때문에 내가 자기 조국 [코리아]를 그것도 아름다운 금강산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그분을 무척 기쁘게 한것 같았다.
그때 지배인이 베른에서 온 기자가 그를 찾아왔다고 전했다.
그러자 그 분은 [덕택에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실례합니다.]하고 급히 자리를 떳다.
다음날 나는 신문에 실린 그분의 사진과 신문 한면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장문의 인터뷰 기사를 보았다. 그분은 [한국이 독립해야 아시아의 평화는 이룩될 수 있다]고 열렬히 주장하고 있었다. 별생각 없이 나는 그 기사를 오려 봉투에 담아서 내 이름은 쓰지 않은 채 그분에게 전해달라고 호텔 안내에게 맡겼다.
그런데 답장이 왔다.
[나에 관한 신문기사를 보내주신 친절에 감사드립니다. 리승만] 다음날 다른 신문에 한국독립에 관한 기사가 또 실려서 보내드렸더니 답례로 차대접을 하겠다고 했다. 처음에는 사양하다가 나는 그분과 함께 아름다운 호수를 바라보면서 담소를 나눌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분은 어려운 여건속에서 정식국적과 여권도 없이 동분서주하며 잃어버린 조국의 독립을 회복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면서도 지칠줄 몰랐다.
58세의 나이에 어울리지않게 넘치는 정열과 젊음을 지닌 한국의 독립투사와 얘기를 나누면서 나는 조금씩 마음이 끌려갔다. 나는 어머니의 따가운 눈총을 느끼면사도 외로운 한국 독립운동가의 바쁜 일손을 돕기로 했다. 나는 이 당시 33세로 영어통역관 국제자격증을 가지고 있었고 속기와 타자가 특기였다.
나는 어려서 의사가 되는것이 꿈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을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 부모님은 세딸중 막내인 나를 남자처럼 강인하게 훈련하여 사업을 계승 시키려고 나를 상업전문학교에 보내고 언어수업을 위해 스코틀랜드에 유학까지 가게 했었다. 그러나 나는 그동안 연마해온 나의 특기를 가지고 자금과 일손이 한없이 필요했던 이 항일 독립투사를 위해 무료봉사를 자청한 것이었다.
한편, 나의 어머님은 무엇보다도 가난한 한국의 애국자에게 마음을 쓰며 성심껏 봉사하는 딸이 못마땅하였다. 더우기 시간과 경비를 줄이기 위해 식사 대용으로 날 달걀에다 식초를 타서 마셔가며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저명인사가 별로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나의 어머님은 예정을 앞당겨 곧바로 나를 데리고 [빈]의 집으로 돌아왔다. 일부러 그분과 작별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어머니 몰래 그분이 제일 좋아하는 김치 맛나는 사워크라푸트 한병을 그분에게 전해주도록 호텔 고용인에게 맡기고 떠났다.
그 후 나는 어머니의 감시를 피해 아메리칸 익스프레스회사를 수신처로 하여 제네바의 그분과 서신 연락을 했다. 바로 그 해 7월초 모스크바로 가는길에 비자를 받으러 [빈]에 왔던 리박사와 나는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분은 한국의 독립문제로 만날 사람이 많아 늘 바빴고 나도 어머니의 감시 때문에 우리가 서로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우리는 [빈]의 명소와 아름답고 시적인 숲속을 거닐기도 했다. 어린 소년처럼 순수하고 거짓없는 그분의 성실한 인품은 나에게 힘든 선택을 하도록 용기를 돋우어 주었다.
나는 [사랑]이라는 아름답고 로맨틱한 한국말을 알게 되었고 조용한 아침의 나라를 동경하게 되었다. [나이가 지긋한 동양신사라 아무탈이 없을 줄 알고 합석을 했더니 내 귀한 막내딸을 그토록 멀리 시집을 보내게 되다니]하며 회한섞인 한숨을 지으시는 어머니와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국 나는 그분과의 결혼을 결심했다.
나는 수많은 고통의 나날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다음해인 1934년 10월8일 하오 6시 30분 뉴욕의 몬트클레어 호텍 특별실에서 윤병구 목사님과 존.헤인즈.홈즈 목사의 합동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분의 동지들과 동포들이 외국 여성과 결혼했다고 해서 그에 대한 실망과 반발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그때 우리들의 인간적 고뇌가 얼마나 깊고 컸는지 모른다.
사랑하는 가족과 동포들의 축복을 받지 못한채 결혼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남다른 고충과 애로가 한두가지가 아니었고 고생을 안해본 나는 남몰래 눈물도 많이 흘렸다. 모든것을 참고 이해와 믿음으로 극복하며 노력 함으로써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자.
"북송, 공론화 아닌 실질적 해법 찾아야""선거에 이용 말고 탈북자 국회에 보내야"
(서울=연합뉴스) 윤일건 기자 = 지난 9일 통일교육원은 18기 통일교육위원으로 지난달 위촉된 탈북자 20여 명을 초청해 간담회를 열었다.
이번에 통일교육위원으로 위촉된 탈북자 35명 중에는 탈북자단체 대표들 외에도 통일교육원의 통일강사교육과정을 수료했거나 지역통일교육협회에서 추천받은 탈북자들이 대거 포함됐다. 대부분 한국사회에 잘 정착해 인정을 받는 사람들이다.
간담회 이후 이어진 점심자리에서 한 식탁에 둘러앉은 탈북 여성들의 으뜸 화제는 단연 탈북자 강제북송 문제였다. 이날 아침 한 언론은 중국이 탈북자 31명 전원을 끝내 북송했다고 보도한 터였다.
이들 사이에서는 북송 탈북자의 인권에 대해 국제적 관심을 호소하는 것은 의미가 있지만 정부까지 중국을 공개적으로 압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정부까지 나서 중국을 압박하면 문제 해결은 고사하고 중국에 있는 탈북자들에게 더 불리한 상황만 조성된다는 게 이들의 얘기였다.
탈북여성 A씨는 "우리가 중국대사관 앞에서 그렇게 시위하고 서명운동 해도 뭔 소용이 있었느냐"며 "중국 당국이 국제적 여론에 귀 기울일만한 상식을 갖췄다면 애당초 말도 안 되는 북한의 3대 세습을 지지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개탄했다.
A씨는 "국제사회가 탈북자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의미 있는 일이지만 이번에 북한으로 송환된 사람들과 중국에 숨어 있는 탈북자들은 자신들에 대한 국제적 공론화로 말미암아 더 큰 해를 당할 것"이라며 "탈북자만 불쌍하다"고 혀를 찼다.
참석자들은 북한 당국이 이번에 송환된 탈북자들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눴다.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북한 당국이 북송 탈북자를 교화소(감옥)에 보내는 등 엄벌에 처하지만, 일부 돈 있고 '빽'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풀려날 수 있다고 말했다. 북한에서도 돈만 있으면 '뒷문'은 언제든지 열려 있다는 것.
탈북여성 B씨는 "2005년께 중국에서 붙잡혀 북송돼 1년형을 받고 평안남도 증산교화소(교도소)로 갔었다"며 "하지만 방(간수들의 사무실 등)마다 레자(장판)를 깔아주고 6개월 만에 풀려났다"고 전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함경북도 출신의 C씨는 "우리 언니는 몇 년 형을 받고 교화소에 갔지만 돈을 주고 한 달 만에 나왔다"며 "요즘 북한에선 돈만 있으면 정치범도 뽑을 수 있다더라"고 동조했다.
하지만 이번에 북으로 송환된 사람들의 경우 남한과 국제사회의 여론화 때문에 북한 당국의 강한 처벌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라는 게 이들의 공통된 견해였다.
이들은 "이번에 북송된 탈북자들도 일부는 한국에 있는 가족이 돈을 보내서 얼마든지 풀려나오게 할 수 있었다"며 "하지만 한국과 국제사회에서 너무 떠드는 바람에 한 명도 '뒷문'으로 풀려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우려했다.
또 이들은 "때가 때(김정일 애도기간)이니만치 이번에 잡혀간 사람들은 관리소(정치범수용소)에 갈 확률이 높다"며 "그러나 북한 내 여론을 의식해 공개처형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탈북여성들은 "우리 역시 북한에 잡혀갔던 경험이 있어 붙잡혀간 사람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며 "우리로선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고 중국대사관 앞에 가서 소리라도 지르면 속이 시원해 (중국대사관 앞에) 나간다"고 말했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 탈북자들 사이에 탈북자 출신을 국회에 진출시켜야 한다는 목소리는 날로 커지고 있다. 기존 정치권이 탈북자 이슈를 선거에 이용하려고만 할 뿐 탈북자의 입장을 제대로 대변하지 못한다는 게 탈북자들의 공통된 불만이다.
한 탈북자단체 대표는 12일 "우파가 탈북자 북송문제를 선거에 이용하려는 것이나 좌파가 제주 강정마을 문제를 떠드는 것이나 똑같은 맥락"이라며 "정치권에서 탈북자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할 의지가 있다면 이번 총선에서 탈북자 출신 국회의원을 최소한 한 명은 배출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그는 "탈북자 출신은 지역구에 나갈 일도 없고 비례대표를 해도 한 번뿐이라 여의도에서 자기 하고싶은 얘기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며 "탈북자 출신 의원이 티베트나 파룬궁 문제 등 중국의 정곡을 찌를 수 있는 문제에 대해 법안 발의 등과 같은 액션을 취하면 중국은 분명히 자극받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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