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March 31, 2011

14개 공항을 소유한 코딱지만한 국토에서 또 공항을 짖겠다니....

14개 공항을 소유한 코딱지만한 국토에서 또 공항을 짖겠다니....


이런 얼간이 들이 세상에 또 있을까? 자기돈이 아니라고 마구 써 버려도 되는가?
국회의원, 대통령 한번 해 보겠다고 수천억원씩 들어가는 공항 건설을 국밥 한그릇 사먹듯
하는 행패가 과연 국가의 장래를 위한 짖이란 말인가.

코딱지 만한 반도, 그것도 남한에는 현재 운용중에 있는 인천, 김해에만 있는것으로도 충분
할텐데..... 지난 10년 동안에 무려 12개 이상의 공항을 새로 건설 했었다니....
그러고도 모자란다고, 또 부산과 경남지역의 정치꾼들이 자기네 지역에 새 공항을 지어야 한다고 머리박 터지게 싸움질을 하고 있다고 한다. 누구의 돈으로? 자기네 주머니에서 단돈 1원이라도 Donation하면서 그런 패거리짖을 하고 있다면, 그런데로 들어 주기라도 해주겠건만....

전국에 고속도로와 고속철도망이 거미줄 처럼 연결되여 있어, 서울과 김해에 있는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기위해 전국 어디에서나 2시간 이상 운전을 하게 될곳은 없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몇년전 고국에서 경찰 간부로 근무 했었던, 형님이 하셨던 말씀이 생각난다. 전국의 어느 도청 소재지에서나 헬기를 타고 10분 아니면 길어야 20분 정도면 도(Province)의 경계에서 다른쪽 경계까지의 순찰이 다 이루어 진다 라고 했던말.

이러한 집단 이기주의와 지역이기주의를 없애기 위해서는 지방 자치체를 아예 없애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것이 아니라면 고속도로나 고속철도망을 없애 버리던가.....
요즘같이 하루앞을 내다 보기 어렵게 급변하는 세계의 정세를 보면, 한치의 땅이라도 아껴서
농산물을 증산할 농토로 사용되기위한 장기 대책을 세워두어도 될똥 말똥할 숨막히는 이시간에,
국제공항을 짖겠다고? 오일 보다 곡물(Crop)전쟁이 코앞에 밀려 닥치고 있는데...... 먹을것이 없어
배고픔에 허덕인다면, 공항이 무슨 소용이 있고, 자동차 기차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선거철이 다시 한반도에 다가오고 있다는 증거임을, P양의 한반도 남단의 동남권 신공항
건설은 필요한 정책이다 라고 외쳐댄, 국가의 장래 안위를 위한다기 보다는 선거철 인기용 발언을 보면서 깊이 느꼈고, 경악을 금치 못하겠다. 국제 공항이라고 이름을 부쳐 놓는다고 어느 외국 항공사가 그곳에 항공기를 띄울것인가?를 생각이나 한번 해 보았을까? 지하에 계시는 그녀의 부친께서 이러한 작태들을 보면서, 선배들이 피땀흘려 다져놓은, 그것도 인권을 무시하고 독재정치를 한다는 맹비난을, 두 김씨를 포함한 정치꾼들로 부터 귀가 아프게 들어가면서 이루어낸 경제적 기반을 뿌리채 흔들고 있는 망나니, 동네 꼬마들이나 할수 있는 철부지 정치꾼들이라고 나무라시면서 한반도가 떠나 가도록 통곡하고 계실것 같이 느껴진다.

세계의 국제공항마다, 공항의 명칭이 영어의 알파벳약자으로 표시된다. 내가 살고 있는 토론토 공항은 YYZ이다. 그리고 고국의 국제 공항을 찾아 보면, 인천이 ICN, 김포공항이 SEL 로 나타난다. 나머지 12개는 찾지 못했다. 그것은 쪼무래기 정치꾼들이 즐겨 사용하는 "국제공항"으로서의 기능, 즉 외국항공사들이 비행기를 띄우지 않는것은 물론이고, 여행객들의 이용이 전연 없기 때문인것이라고 판단된다.

아버지는 국민들의 보릿고개의 배고픔을 탈피해 보겠다고 죽는 그날까지도 완성된 삽교천 방파제의 완공식을 지켜보면서 혼신을 다했는데, '잔 다크'의 역활을 해야할 그분의 철부지 딸은 아버지의 업적에 빛을 바래게 하는 다른길로만 가고 있고.... 조국의 앞날이 못된 정치꾼들의 Magic에 놀아나고 있음을 심히 염려 하지 않을수 없다.

아래 URL을 보면 더 자세한 내용을 볼수 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3/31/2011033100229.html

http://inside.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3/31/2011033100643.html?slide

Tuesday, March 29, 2011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되는 '일부다처제'가 대법원까지 간다니...

캐나다의 BC주에 있는 Bountiful이라는 동네에는 'Mormon'교의 신봉자들이 모여 사는 동네이다.
그들은 그들의 종교적 신앙관에 의한 "일부다처제"를 고집 하면서, 우리 보통 사람들,아니 신앙을 가진 사람들로서는 이해를 할수 없는 해괴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다. 즉 한남자가 숫자에 제한 없이 수많은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여 집단 결혼생활을 하는 것이다. 손녀같은 어린 꼬마 여자 아이로 부터 할머니벌 되는 여자들이 한남자의 아내가 되여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겉으로 볼때는 오손도손 살아가는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질수 있지만, 이사건을 다루고 있는 BC주의 검찰이 밝힌 일부 내용을 보면, 성학대, 인신매매, 어린 사내 아이들은 집단 농장에 끌려 다니고....패륜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으로 보여 지는데....

보통사람들의 상식으로는 이러한 결혼 생활에 대한 얘기를 듣거나 보게 되면, 한마디로 "인간의 탈을 쓴 악마 이거나 아니면 거짖으로 꾸며낸(Fiction) 소설속에서나 있겠거니 할 사건으로 치부 될,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는 논의될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 쯤으로 여겨질 일들이다.

검찰이 이들을 붙들어 고소를 했지만, 법원은 이사건을 심리할 가치가 없다고 법원밖으로 내동댕이 쳐 버렸었다고 한다. 다시 검찰이 항고하여, 2년여를 끌어 오면서, 어제 월요일 최종 논고를 했다고 하는데, 그결과는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상식선에서 판결이 날것 같지 않고, 결국은 오타와 대법원까지 가게 될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고 한다. Mormon교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의 집단이라고 하는데, 그들이 신항생활하는면이 잘못되여가는 것으로 보이기에, 기성교단에서는 이단으로 여기고 악마들의 모임이라고 까지 몰아 부치기는 하는데..... 왜 이러한 이단들이 자꾸 우리 사회에서 기생 하는가? 그들의 눈으로 볼때는 다수의 우리가 잘못 살아가는것으로 보여지고 있을까? 법의 정의는 수학공식이 아니다는것은 세상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하는것 같다. 나자신도 그범주에 속하고 있기에.... 그러나 법의 잣대는 그반대인것 같다. 오래전에 O.J Simpson의 살인죄목으로 법정에서 긴싸움이 있었을때, 세상 사람들은 그가 그의 아내를 죽인 법인으로 심증으로 알고는 있었지만, 변론을 잘하는 변호사를 고용하여, 무죄로 풀려난 사건을 기억하고 있기에 하는 말이다. 만약에 이사건이 대법원까지 가게 된다면, 그잣대는 어디에 기준을 둘까?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아래에 신문 기사를 옮겨 놓았다.



BC주 검찰 "일부 다처제" 반대에 대한 최종 논고

검찰은 일부 다처제에 대한 합법화를 놓고, 월요일 벌인 최종 논고를 통해, 이를 합법화 시키는것은 여성의 권리, 아이들과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위해 크나큰 해를 끼치게 된다라고 논고 했다.

일부다처제를 실용화 하려는, BC남부에 있는 몰몬교의 한 신봉자로 인해 발단된 이사건의 최종 논고에서, BC주의 변호사 Craig Jones 씨는 캐나다에서 '일부 다처제'가 실용화 될때는 매우 위험한 국면에 처할수 있다고 경고 했다.

그는 BC주의 Bountiful마을에서는 극히 보편화 되여 있는 일부다처제는, 인권남용, 인간밀매, 남녀공히 희생물이 될수 있는 길을 터주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 했다.
"아직 나이어린 신부가 태어나서 한번도 만나본적이 없는 남자의 부인이 되여 그들 동네로 밀매되고 있다. 소년들은 노동캠프로 끌려가고...
이러한 일들은 우연의 일치일 뿐이라고 간단히 넘어갈 일이 아니다" 일부 다처제의 조직에 가담했었던 남자와 여자들이 2달여에 걸쳐 증언을 한뒤에 이루어진 논고에서, 변호사 Jones씨는 월요일 벌인 최종변론에서 이같이 설명했다.

"이사건에서 나타난 증거는 이러한 위험한 사건들은 "일부 다처제"의 잘못됨에서 긴인된 것임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사건에 대한 추적이 계속 이어질수 있다면 더 많은 잘못된 비리를 알아낼수 있을 것이다" 라고 설명을 덧붙혔다.

검찰들은, 일부다처제를 주장하는 Bountiful의 리더들은 어릴때 부터 아이들에게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기위해 공동결혼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믿음을 심어주기위한 쇠뇌교육을 강행하고 있는 점을 강조, 비난 했다.

일부 다처제 사람들만 사는 Latter Day Saints의 예수교회 신봉자들로 구성된 Bountiful동네 사람들은 신앙의 양심에 따라 살아가는 결혼생활을 못하게 하는것은 헌법에 위배된다 라고 항변 합니다.

일부다처제 관계를 생활화 하고 있는 사람들(꼭 결혼식을 치르지 않으면서도 합동결혼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포함된)과 '시민의 자유'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현행법이 잘못됐음을 주장하는쪽에 동조하고 있다.

전 BC주 검찰총장 Wolly Oppal씨는, 2009년도 초에, 그가 재선에서 떨어지기 몇달전에, Bountiful마을의 일부다처제의 리더인 Winston Blackmore와 James Oler씨를 최초로 헌법에 위반되는 일부다처제 죄목으로 기소 했었으나, 2009년말경에 법원이 이사건을 기각 시키게 되면서, 헌법정신에 위반여부를 가리기위한 재판을 지금까지 이끌어 오게한 단초가 된것이다.

법원은 이제, 검찰에서 논고한 일부다처제의 결혼생활 내용이, 정말로 헌행법에서 다루고 있는 성학대, 인신매매, 법에서 정의 하는 강간에 대해 충분한 보호를 받고 있는지의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공동결혼생활에 임하는 성인들의 인권을 어떻게 정의 해야 하는가에 초점을 맞추게 될것 같다.

결국 캐나다 대법원까지 가게될 것으로 보이는 이번 사건은, 법원의 재판진행상황을 투명하게 보여주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처음으로 BC주에서 생방송으로 중계 됐다는점에 의미가 있다고 본다.

만약에 캐나다가 일부다처제를 금지하는 법이 잘못된것으로 인정되여 불법화 시킨다면 이는 서방세계에서는 최초로 일부다처제의 공동결혼생활을 합법화 시키는 첫번째 나라가 될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URL을 참조 하시면 됩니다. 감사.

http://www.ctv.ca/CTVNews/Canada/20110328/polygamy-bc-bountiful-courts-110328/

Wednesday, March 23, 2011

어느 지식인의 용기있는 고백에 나는 찬사를 보낸다.


사진은 박지향 서울대 교수·서양사


오늘자 고국의 조선일보의 한 칼럼을 보면서, 그의 용기있는 고백에 가까운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느낀데로 밝힌 내용을 읽으면서, 흔히들 먹물을 먹은자들의 무조건적인 박통시대의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비하했었는가의 시류에서 빠져나와 이유와 그것이 잘못된 편견이었음을 늦었지만 깨닫고, 당시의 국가적 상황을 재인식하는 사실을 간략하지만, 의미있게 써내려간 내용이 내 마음을 훈훈하게 만들었다. 그분에게 열열한 후원을 한다고 전하고 싶다. 오늘의 조국이 부국의 대열에 서서 국민들이 보리고개 없이 편리하고,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가난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먹는것 걱정없이 살수 있도록 국가 산업의 기초를 닦아 놓은 역사적 사실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는점에, 조국의 장래에 대한 걱정이 조금은 가벼워 지는것 같다.
여기에 그 칼럼을 옮겨 놓았다.


[아침논단] 용기있는 변절과 비겁한 지조

* 박지향 서울대 교수·서양사

입력 : 2011.03.23 22:23

▲ 박지향 서울대 교수·서양사

박정희 독재를 혐오했는데 나라 밖에서 공부해 보니
한국 富의 분배·경제성장 성공 사례로 각광받아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게 지식인의 지조인가

1970년대 유신정권의 잔혹함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대학과 대학원에 다니던 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차라리 암살되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만큼 그의 독재를 혐오했다. 정부가 발표하는 눈부신 경제 성장의 수치도 믿지 않았다. 서양사를 연구하게 된 동기도 선진국들의 역사를 공부함으로써 우리 현대사가 얼마나 왜곡되고 잘못 가고 있는지를 밝혀보겠다는 심사였다.

그러나 어렵게 장학금을 받아 넓은 세상에서 공부하다 보니 깨달음이 많았다. 국내에서 듣던 바와는 달리 모든 객관적 지표는 대한민국이 부(富)의 분배에서 상당히 성적이 좋은 나라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한국의 경제 성장도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성공 케이스로 각광받고 있었다. 우리보다 훨씬 더 왜곡된 길을 가고 있는 나라들이 대단히 많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런 깨달음 뒤에야 비로소 우리 사회와 역사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국내에서는 금지되었기에 오히려 더 근사해 보이던 마르크스·레닌주의도 자세히 공부해보니 허점투성이였다. 이런 사상적 궤적을 겪은 나를 어느 좌파 성향의 네티즌은 한마디로 '변절자'라고 공격했다.

나 역시 학창 시절 사회의식이 있는 젊은이들의 필독서였던 고 리영희 교수의 저작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지조를 지키며 수형생활까지 마다하지 않은 그는 분명 용기 있는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나는 리 교수가 작고하기 전에 한 가지만은 인정해주기를 바랐다. 즉 자신이 모택동의 중국에 대해 잘못된 허상(虛像)을 퍼뜨려 많은 젊은이들을 혼란에 빠뜨렸다는 사실 말이다. 그러나 그는 말없이 떠나고 말았다.

반면 안병직 시 대정신 이사장은 1970년대까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로서 한국을 '식민지 반(半)봉건사회'로 지목하면서 비판했었다. 그러던 그가 한국의 자본주의적 성장을 찬양하는 쪽으로 입장을 바꾸었을 때 그를 따르던 몇몇 제자들은 사제지간의 연을 끊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안 교수는 자신의 '전향'을 알리면서 우리 사회의 잘못된 역사 인식을 고치고자 노력해왔다.

지식인들이 이념의 허상에 사로잡혀 실상을 보지 못하는 사례를 들자면 끝이 없다. 프랑스의 저명한 철학자이자 문인인 사르트르와 카뮈는 나치즘에 대항하여 함께 투쟁한 동지였다. 전후(戰後) 프랑스 지식인 사회는 좌파가 아니면 입도 뻥끗할 수 없을 정도로 좌경화가 심했다. 그러나 스탈린주의 역시 사악한 전체주의임을 파악한 카뮈는 모든 종류의 혁명적 폭력을 비판하는 '반항인'(1951)을 발표하고 공산주의와 결별했다. 카뮈의 행동은 대단히 용기 있는 결단이었지만 프랑스 지성계를 장악하고 있던 좌파 지식인들에게는 당혹 그 자체였다.

사르트르 의 신랄한 비난과 카뮈의 긴 반론이 있은 후 두 사람은 다시는 말을 섞지 않았으며 카뮈는 프랑스 지식인 사회에서 추방된 거나 다름없었다. 사르트르가 1964년에 노벨문학상 수상을 거절한 데에는 카뮈가 7년 먼저 그 상을 수상했다는 사실도 한몫했다. 1956년 자유를 갈구하는 헝가리 민중의 봉기를 소련 탱크가 무자비하게 진압한 후 서유럽의 좌파 지식인들 사이에도 회의가 일었지만 사르트르는 1980년에 세상을 뜰 때까지 '지조'를 지켰다. 그러나 그의 명예는 그전에 이미 훼손되어버렸다. 미국제국주의가 형편없다면 소련제국주의는 훨씬 더 형편없다는 사실이 확실해졌던 것이다. 그의 '지조'는 과연 무엇을 위한 지조였을까.

나 이가 들고 성숙해지면서 젊은 시절의 신념을 바꾸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그것을 변절(變節)이라고 비난하고, 자신조차 더 이상 믿지 않는 생각과 이념을 겉으로만 붙들고 있는 사람을 지조 있다고 칭송한다. 운동권에서 보수 정치가로 전향한 김문수 경기도지사를 변절자라고 비판한다든지, 우파 인사들이 손학규 민주당 대표를 위장 취업자라고 조롱하는 태도가 그렇다. 영국의 위대한 정치가 윈스턴 처칠은 두 번이나 당적을 바꾸었지만 그를 두고 변절자라고 욕한 영국 국민은 없었다. 세상이 변하고 정치적으로 성숙해짐에 따라 그의 입장이 바뀌었을 뿐임을 이해했던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지식인들 가운데는 더 이상 자신이 믿지 않는 옛 이념을 버리기 아쉬워서 혹은 추종자들을 놓치기 싫어서 혹은 변절자라는 소리를 듣는 게 두려워서 붙들고 있는 이들도 있는 것 같다. 그들은 사석에서 인정하는 사실을 공개적으로는 부인하는 특징을 보인다. 그들에게 이제 우리 모두 솔직해지자고 권하고 싶다. 그래야 후손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 수 있고 역사 앞에 떳떳해질 수 있다.

Saturday, March 19, 2011

무고한 생명, 이번에는 재해가 아닌, 인재로 우리곁을 떠난다.-리비아 사태.







The USS Barry fires Tomahawk cruise missiles from the Mediterranean Sea in support of Operation Odyssey Dawn, as seen through night-vision goggles. (Nathanial Miller / U.S. Navy via Getty Images)

사진은 연합군의 포격을 맞은 리비아의 방공망 20여개가 부셔졌는데 그중의 하나를 보여 주고 있다.


더이상은 기다릴수 없었던지, 드디어 리비아의 살인마, 커널 무하마르 카다피 Regime에 대한 연합군의 공격이 시작됐다고, CNN을 포함한 세계의 여러 미디어가 앞다투어 긴급뉴스로 내보내고 있음을 보면서, 이번에는 재해가 아닌, 인재로 또다시 수많은 목숨을 잃게 되는구나 라는 서글픔이 가슴을 조여 오는것을 느낀다.

재해로 인한 인명손실이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아직도 집계가 안된,상상하기조차 싫은 일본 Fukusima의 Tsunami의 구조작업이 한창 진행중인데..... 이러한 참상을 아는지 모르는지? 독재자 가다피는, 그에게 충성하는 군대를 풀어, 자유를 달라는 그의 국민들의 애원을, 기관총으로 폭격기로, 무참히 짖밟아 버리고, 수천명의 생명을 끊어 버리는 살인마가 되기를 자처 하면서, 끝까지 밀어 부치겠다고 엄포를 놓는 그를 더이상은 그냥 앉아서 볼수만은 없다고 판단한 유엔의 안전보장 상임이사국을 포함한 이번 회기동안의 안보리 15개국이 장시간 토의끝에 Resolution 1973호를 전원 만장일치로 가결하여 그를 재재하기 시작한지 하루만에 미,영,불을 포함한 연합군들의 재제행동이 드디어 오늘 감행된 것이라고 한다. 10개국이 투표에 참석하여 전원 찬성표를 던진반면, 러시아, 중국, 독일을 포함한 5개국이 기권을 했었다.

43년 집권 했으면, 장기집권이다. 옛날 전제 군주 시대에도 후세에 사는 우리가 성군으로 떠받드는 세종대왕 은, 당시로서는 국민들은 그의 소유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그러한 국민들의 편의를 위해서, 몇년에 걸쳐 훈민정음까지 창제하는 선정을 펴서, 지금 이시간에도 나는 그분의 은공으로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현재 시대에 43년의 장기집권, 그것도, 마치 국민들을 자신의 소유물처럼 착각하고, 온갖 행패를 다부리면서, 종처럼 부려 먹은 그의 철권정치를 더이상은 받아 들일수 없음을 하소연 하는 국민들을 그는 악마의 탈을 그위에 다시 덧입혀 쓰고, "너희들은 나의 소유물인데, 감히 주인인 나에게 도전을 해와, 죽일놈들..."하면서 무차별 총격을 가해 쓸어 버리는, 장기집권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그의 만행을 더이상은 좌시할수 없다는 세계인들의 여론을 연합군들이 대신하여, 오늘 그와 그의 Regime에게 벌을 주기 시작한 것이다. 43년 장기 집권 했으면서도 뭐가 더 하고 싶은게 있어서 물러서지 않고 귀중한 인명을 방패막이로 사용하면서 악을 쓰는것일까? 인간이기를 포기해서 일까? 그의 소유물처럼 취급되고 있는 리비아 국민들을 구출하기위한 포격이라고 하지만, 어찌 희생되는 생명이 없다고 할수 있겠는가? 그사이에서 다만 자유를 되찾고 싶어서 시위를 했던, 순진한 다수의 국민들만 값없이 생명을 잃게되는것을 또 얼마나 보아야 끝이 날것인가?

가다피와 Regime은 '십자군원정'이 시작됐다면서, 성전을 계속 할것이라고 울부짖으면서 끝까지 싸우겠다고 아우성이다. 아프리카 북부와 중동 아시아국가들은 전부 이슬람형제국이다. 이러한 줄다리기가 계속이어지면, 현재 가다피에 반대하는 형제국들도 방향을 바꾸어, 성전(?)하는 가다피쪽으로 돌아서지 않을것이란 보장은 없을것 같다. 무력을 과시하는 연합군이 그들 형제국에게는 그들이 오랫동안 통치해온 이스람국들의 왕정이 흔들릴거라는 불안을 느낄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관건으로 보여진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연합군의 명분은 희미해질것이다.

왜 연합군은 속전속결의 행동으로 가다피와 그 Regime을 쓸어 내지 못하고, 닭싸움하듯, 공격했다가, 다시 뒤로 물러서는 감질나는 작난(?)을 하는가? 시간을 끌면 끌수록 죄없고 순진한 국민들만이 그희생을 더 크게 감당할수 밖에 없다는것을 그들이 모를리가 없다. 절대로 모를리 없다. 나의 생각이 틀린것일까? 뾰쪽하고 신속한 해결책은 어디에 있을까? 오래전에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도 리비아를 공격했던 기록이 있다. 그때도 미국은 가다피를 폭격으로 목숨을 끊어 버리던가, 아니면 최소한 권좌에서 물러나게 했어야 했다. 그때 미국은 이정도면 가다피가 정신을 차렸을 것이라고 자위 하면서 포격을 중지 했었다. 미국의 바램과는 정반대로 그의 철권은 더 빛을 발하면서, 국민들을 소유물화 하고, 목을 더 조이면서 오늘에 이르러, 목숨을 담보로 하는 위험하면서도 마지막 수단인 시위를 한것인데..... 누가 옳고 누가 그른 이치에 어긋한 행동을 하면서 순진하고 죄없는 목숨을 자르는 것입니까?, 그렇치 않아도 짧은 인생들이고 중생들인데....굽어 살피소서.


http://www.cnn.com/2011/WORLD/africa/03/19/libya.civil.war/index.html?hpt=T1&iref=BN1

Monday, March 14, 2011

일본인, 그들은 재앙속에서도 전세계인에게 많은 교훈을 남겼다.





대재앙은 일본 열도를 초토화 시켰고, 현재도 그재앙은 진행중에 있음을 뉴스보도에서 멍청히 보고 듣는다.
그난리통에서도 그들은 얄미울 정도로 질서를 지켰고, LA 폭동에서, Haiti지진의 재난속에서 나는 인간들의 본성(?)을 똑똑히 보았었고, 지금도 마음아픈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의 대재앙을 보면서, 같은 사람인 그들, 일본사람들도 별수가 있겠나? 약탈과 무질서가 난무할것을 머리속에 그리면서, 자연의 섭리에서 온 대재앙뒤에 뒤 따를 인재,모든 수송방법과 공급이 끊긴속의 배고픔에서 살아남기위해 인간의 탈을 쓴 악마들로 변한 그들의 모습을 곧 TV화면을 통해서 보게될것을 예측했던 나의 판단이 얼마나 단편적이고, 일본인들의 삶의 질을 겉으로만 보고 마음속에서 판단했던가에 대해 부끄러워, 옆에서 같이 이재난의 현장을 보고 있는 Lunar에게 까지 내가 생각했던것을 들킬까봐 딴전을 부렸었다.

지구상에 있는 여러곳에서 일어나는 사건, 사고들을 전세계에 신속하게 알려주는 유명한 뉴스 미디어들이 이번 일본의 재앙을 보도 하면서, 그들의 침착하고, 지옥같은 참상속에서도 질서를 지키고, 배고픔과 타는 목을 축이기위해 나눠주는 구호물자 Package를 나약자와 어린애들에게 양보하는 미덕과 아량을, 인간이 개발한 글자와 말로서는 그이상 수식을 할수 없을 정도의 미사여구를 최대한 동원하여 Cheer up 해주는것을 보았다. 흔히들 미국이 서구 민주주의의 상징이라고 여겨 오면서, 그들을 모델로 많이 인용하곤 했었다. 그래서 미국이 축복받고 잘 사는 나라라고 말이다. 그랬던 미국의 LA에서 폭동이 났을때, 야생동물의 세계에서나 존재하는 약육강식의 야만성을 보면서, 배고픔과 무질서 앞에서는 양심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마는 우리 인간이 간직한 두개의 얼굴을 본 기억이, 더 큰 재앙을 당하면서도 흔들림없이 질서를 지키고, 당국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일본인들의 모습이 비교 되면서 더 빛나 보였다. 특히 일본에 대해서는 필만 들었다 하면 비난과 냉소를 거침없이 해대던 고국의 언론에서 조차 인내와 공공질서 유지에 극찬하는 기사를 보았었다.

2차대전 이후 처음으로 실시하는 도쿄시내의 전력공급이 지역별로 제한 송전을 하고 있다는 뉴스에서, 처음에는 홍보의 부족으로 시민들이 잠시방황을 했었다고 전했으나, 곧이어 이를 받아 들이고, 전철역에서 걸어나와 걸어서 가고자 하는 방향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시민들의 의연함..... 토론토에서 이런 상황이 벌어졌었다면? 하고 잠시 견주어 보는 상상도 했었다. 3호기 Reactor가 Explosion됐다는 뉴스에 이를 시청하고 있는 내자신이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는데, 그들의 억장무너지는 심정을 느낄것 같다. 방사능에 노출된지의 여부를 인근 반경 20킬로에 있는 모든 주민들에게 점검을 하고, 노출됐으면,Quarantine 시켜서 조치를 취한다고 한다. 더 걱정인것은 그옆에 있는 다른 원자로가 아직도 in active한 상태라서 언제고 폭발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온 힘을 기울여 더 이상의 참상을 막을려고 하는 당국의 노력이 좋은 결과를 맺기를 바란다.

일본 역사상 이번과 같은 참상은 처음이라고 하는데, 동요없이 차분히 대처하는 그들의 마음가짐과 공공질서유지, 전세계인들의 귀감이 되고도 남는 좋은 선물을 그들은 전인류를 향해서 선사한 셈이다. 이참상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조국이 앞장서서 복구에 나서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다. 특히 일본에서 활동을 많이 하는 연예인들이 앞장서서 적지않은 거액의 성금을 했다는 뉴스는 나를 흐믓하게 한다. 나와 Lunar도 그들이 겪는 참상을 헤쳐나와 복구를 하는데 동참 한다는 뜻에서 성의를 표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더 이상의 피해가 이러나는일 없기를 바라며, 좌절하지 말고 꿋꿋히 복구시켜 원래의 생활로 돌아가는 그들을 보고 싶다.
여러 사진중, 꾸불꾸불 줄서 있는 모습이, 공공질서를 생활화 하고 있는 그들의 생활상을 보여 주고 있어 더 마음이 아련하다. 한통의 음료수를 받아 가기위해, 식수차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http://www.bbc.co.uk/news/world-12740843

Friday, March 11, 2011

재앙의 끝은 어디인가? 인간의 능력 한계 그리고 무지를 보면서.






우선 강도 8.9라는 TV의 속보에 이어, 현지생방송은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로 아비규환의 상황을 보여 주었다.
일차적으로 격한 파도를 막아 보려고 설치해 놓은 방파제는 무용지물로 됐으며, 파고 10미터가 넘는 물결은 닥치는데로 집어 삼키며 내륙으로 달려 오면서 집이고, 농장이고 자동차고, 큰 배들... 모두가 물위에 떠서 일엽편주처럼 밀리면서 삽시간에 공항을, 도시를 공장을, 보이는데로 집어 삼키는 화마같이 일본열도를 아비규환의 지옥(Inferno)으로 몇분 사이에 삼켜 버렸다. 전문가들의 분석에 의하면, 이번 쓰나미는 일본 열도뿐만이 아니고 Pacific Rim에 있는 모든 나라들에게 계속해서 달려들것이라고 걱정을 하면서, 우선 필리핀과 대만을 지목하는것이었다. 뒤이어서 알라스카, 캐나다, 미국 그리고 남미까지....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 시간으로 11일 새벽 2시40분경, 그곳 시간으로는 11일 오후 4시 40분경, 상상 할수도 없는 엄청난 지진이 일본 열도의 센다이에서 약 130킬로 떨어진 태평양에서 일어난 곳에서 발생한 쓰나미가 일본본토를 강타하여 2차 대전당시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폭의 5만배 이상의 위력으로 일본 열도를 초도화 시켰다고 한다.

경제적으로 작년까지 세계 2위의 강대국이었다가, 금년에는 중국에 2위 자리를 물려주고 3위로 물려나긴 했지만, 여전히 일본은 강국이었는데, 강국으로서의 흔적이 이번 쓰나미에 강타 당하여 떠내려 가는 모습은 가히 입으로 표현 할수 조차 없을 정도로 어마 어마 하기만 했다. 일본 총리는 그난리 통에도 TV에 나와서, 쓰마미로 강타당한 지역에서 발전중에 있는 핵발전소는 그대로 안전도를 유지하고 있어, 방사능의 누출은 전연 없다고 국민들을 안심 시킬려는 노력을 보여 주는 여유(?)를 보여 주기도 했지만....

산업이 발달하고 살기가 좋아 졌다고..... 자연의 섭리와 격노에는 그러한 과학의 발달과 경제적 발달은 한낱
격랑에 떠내려 가는 하나의 가라잎에 불과하다는것을 오늘 나는 똑똑히 보았다. 우리가 이세상을 살면서 앞으로는 어디에 중심을 두고 남은 생을 이어갈까?를 곰곰히 사색해 보았지만, 결론은 바람이 불면 부는데로 구름에 해가 가리면 가리는데로, 홍수면 홍수, 가물면 가문데로..... 같이 휩쓸려 떠내려 가는게 순리라고.

오래 전부터 많은 과학자나 전문가들이 지구의 온난화, 북극하늘의 이온구멍, 지구 도처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홍수과 가뭄을 포함한 재앙.... 산업화의 발달에서 부산물로 생성되는 원치않은 불순물로 지구가 몸살을 알고 있다고 경종에 경종을 울려 왔었지만, 자국의 이익에 눈이 어두어 세계 200개가 넘는 각나라들은 남의 일로만 여겼을뿐, 앞장서서 이를 시정하려는 노력을 보여준적이 없었음의 결과임을 나는 오늘 보았다.
유엔을 만들어 놓고, 그곳에서 모여 지구를 보호해야 한다는 아름다운 말들과 때로는 설전을 벌이고, 약속들을 하곤 했지만, 제나라로 돌아와서는 자국민들의 요구에 못이겨 그러한 약속은 공약(empty promise)으로 뒤로 내팽개쳐놓고, 돈 몇푼을 더 벌어 보겠다고, 지구의 환경을 파괴하는 산업시설확충에만 치중해 온 오늘의 세계는, 오늘 일어난 처참한 참상을 며칠후면 망각속에 가두어 두고, 계속 폭약을 들고 불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헛된 꿈을 안고 달려 갈것이다. 몇년전에는 인도네시아에 재앙을 내렸었다. 그후로 지구상의 인간들은 변화의 조짐을 전연 보여 주지 못했었다.

이러한 어리석은 인간들의 일상을 보면서, 우주 창조자는 경종의 뜻으로 계속해서 이러한 재난을 보여 주시다가, 그래도 안되면, 노아의 홍수시대처럼, 이지구를 완전히 Overhaul 시켜, 새로운 판을 다시 짤것 이외의 다른 방법이 없음을 곧 보여 주실것 같이 보여진다. 그렇게 생각하기조차 두렵지만....그리고 나의 짧은 생각에서 오는 하나의 기우로 끝났으면......그리고 흑백 구분없이 무조건 인명구조와 복구하는데 온 인류가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한 재앙권에서 벗어나 살고 있는 우리는 감사한 마음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그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인류애로 그들에게 달려가야 한다.




http://www.cnn.com/2011/WORLD/asiapcf/03/15/japan.nuclear.disaster.timeline/index.html?hpt=C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3150044135&code=940202

http://khross.khan.kr/71

http://www.nytimes.com/2011/03/12/world/asia/12japan.html?hp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3/11/2011031102129.html?Dep1=news&Dep2=top&Dep3=top

http://www.cnn.com/2011/WORLD/asiapcf/03/11/japan.quake/index.html?hpt=T1&iref=BN1

http://www.bbc.co.uk/news/world-asia-pacific-12709598

http://www.thestar.com/news/world/article/952316--death-toll-from-japan-tsunami-rises-to-40?bn=1

Saturday, March 05, 2011

Spencer Gorge,Trail Walk 대원들의 시산제(Sacrificial rite of peace and safety)








Shelter 중앙의 벽쪽에 제단(Altar)을 차리고, 제주를 포함한 여러 경험많은 대원들이 제단위에 제물을 정성스럽게 차려 놓고, 그중에서 제일 눈에 띄는것은 통체로 BBQ해서 올려진 젊은 돼지였다. 돼지 머리쪽에는 어느새 상당수의 대원들이 두툼한 봉투를 꽂아 놓은것도 눈에 띈다. 그들의 염원이 그봉투속에 담겨 있을것이라는것은 쉽게 짐작할수 있었다. 꼭지쪽의 껍질을 약간 깍아내고 올려진 큰직한 배와 감 그리고 사과들, 그왼쪽 옆으로는 잘 말린 북어 한마리도 접시위에 잘차려서 올려졌다. 제단 맨 뒤쪽으로는 막 꺼내온것 처럼 김이 무럭무럭 나는 떡판이 올려지고, 그리고 어느 대원이 정성스럽게 담근 곡주가 풍부하게 제단 앞쪽의 왼편에 놓여져 있다. 좀 아쉬웠던점은 날씨가 우리 산사모대원들의 손을 들어주지 않고, 반대로 방향을 잡아서 인지, 새벽부터 내리기시작했던 비가 이시간 현재도 계속 내려, 꽃샘추위의 맹위를 떨치고 있는것이었다. 치밀하게 준비(?)해온 대원들의 경험이 시산제를 올리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일사천리다. 비에젖어 질펀한 바닥에는 몇개의 Mat가 단정히 제단앞에 깔려 있다. 대원들이 제단앞에 모여들고, 지금까지 12년을 제주 역활을 해온 노련한 대원 C 씨가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드디어 축문을 읊기 시작한다. 제목은 '제 12회 시산제문'.....
어렸을적에 부모님을 따라 문중의 시제에 몇번 따라 다녔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구성진 그의 축문 낭송은 우리 조상님들의 천지신명께 모든것을 맡기고 그에 의지해서 가족과 국가의 무사 안일을 빌고 또 빌던, 지금은 희미해진, 무속의 전통을 다시 느끼게 해주고도 남은, 우리 민족만이 느낄수 있는 '한'의 의미를 느낄수 있었다. 여기에 축문의 첫구절을 옮겨 본다. " 한바퀴 돌았구나, 용의 해에 시작한 산사모 시산제가,
한바퀴 돌고 보니 토끼해가 되는구나, 지나간 세월들은 어디쯤을 흐르고, 그속에 묻힌 추억들은 어디쯤에
맴을 돌까?....."

축문 낭송이 끝나고 대원들중 제단에 술잔을 올리기 원하는 인생선배들이 먼저 무릎을 꿇고서 곡주한잔씩을 정성스럽게 올려 놓았다. 그리고는 합동으로 감사의 마음을 고개숙여 올렸다. 어찌보면 웃음도 나올법한 우리 고유의 전통의식을 고국과 수만리 떨어진 이곳에서, 꼭 순서에 맞는다고는 볼수 없는 의식을 제복이 아닌 천연색의 등산복을 입은 대원들이 해내고 있는 모습이지만, 한편으로는 조국을 수호하는 신께서 이곳까지 강림 하시여 이들의 정성을 보시고, 앞으로의 산사모 대원들의 산행을 포함한 모든 행사를 앞장서서 지켜줄것이다 라는 암시를 이제단을 통해서 해주시는것 같았던 분위기 였다. 제단앞에 피워놓은 향불에서 더 그암시를 느끼는것 같았다. 향의 냄새도 분위기에 맞는(?) 구수한 고향의 맛 쑥뜸이다.

대원중 P씨가 노련한 솜씨로 통돼지를 먹기좋게 잘라 놓는다. 여성대원들은 접시위에 얌전히 정돈 시키고....
대원 L씨가 정성스럽게 담가온 곡주가 드디어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먹기좋게 잘라놓은 돼지고기와 궁합이 제대로 맞는것 같다. 너도 한잔 자네도 한잔 그리고 나도 한잔.... 시산제(Sacrificial rite of peace and safety)의 무드는 익어가기 시작했다. 어느 대원이 준비 해 왔는지? 따근한 시래기 국물이 고향의 맛과 함께 얼어붙기 직전의 몸을 사르르 녹여 주고도 남은 힘을 발휘해준다. 아직도 김이 무럭무럭 나는 한조각의 떡을 목에 넘기는데 궁합이 이렇게 잘 맞을 윤활유는 없는것 같다. 준비해간 점심은 아예 꺼낼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게 모든게 푸짐하다. 정성과 우리만의 혼이 담긴 막걸리잔이 오고 가고.... 이런축제가 바로
우리 민족만이 지켜오고 있는 서민들의 전통이라는것을..... 적어도 이순간 만큼은 대원들간에 서로 의지하고 믿는 종교의 개념을 대입시켜서는 안된다는, 다만 옛선조들이 즐겼을 이러한 의식을 수천년뒤를 살아가는 우리 대원들이 즐기고 있다는 생각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대원들 모두의 표정과 눈빛에서 똑똑히 나는 봤다.


Trail Walk 경력 25년 동안에, 오늘 처럼 Trail Walk 시작부터 끝나고 집에 도착할때까지 차가운 비바람속에서 걸어보기는 처음으로 기억될 불편한 날씨였지만, 뜻깊은 오늘의 산행이었었다. 아침부터 비바람이 몰아치면 대개의 행사는 취소되거나 시간을 조절 하는게 보편적인데, 비속에서 모이는 장소인 맥도날드에 갔을때는 벌써 상당수의 대원들이 먼저와서 커피를 마시고....이어서 평상시 보다 더 많은 대원들이 모여, 서로간에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오늘 Trail Walk후에 행해질 시산제에 대한 열정이 Dirty weather를 가볍게 물리치게 한것 같았다.

Spencr Gorge에서 시작한 산행은 대원들의 발길을 무척이나 어렵게 했다. 아직도 Trail route에 두껍게 깔려 있는 얼음위로 쉬지 않고 내리는 빗물이 윤활유 역활을 해줘, 한발 한발 옮겨지는 발걸음을 천근 만근 무겁게, 또 스케이트를 타는 어려움을 동반케 했다. Rain coat를 입었다고는 하나, 옷속으로 스며드는, 신발속으로 스며드는 차거운 빗물은 꽃시샘 추위와 함께 우리 대원들에게 끈을 누추지 않고 공격에 공격을 해오는것 같았다. 공격을 해오면, 이에 맞서 방어하는 자세 또한 중요함도 오늘 똑똑히 본다. 대원들 모두가 Crampon을 했고, 그위에 Gaiters로 중무장 하고 Ice rink로 변한 Trail을 걷는다. 아무런 사고없이, 모두가 걷기를 완료했다. 오늘은 시산제를 해야 했기에 평상시의 약 1/3 정도의 구간만을 걸었었다. 여기서 대원들의 노련미를 찬양해주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Spencer Gorge 낯은편의 넓은 공간에 Conservation Authority측에서 만들어 놓은 Shelter로 모든 대원들이 시산제 준비물을 차에서 하나씩 들고 자리를 옮겼다. Webster's Fall은 어느때 보아도 그위용이 당당하다. 폭포옆을 미끄러워 조심조심 Shelter를 향해 발길을 뗄때마다, 폭포의 굉음은 "오늘 시산제를 지난 일년내내 기다렸었다"라고 읊어 대는것 같았다. 그리고는 오늘 Trail Walk의 High light인 시산제는 막을 올린 것이다. 모든 공식적인 행사가 끝나고, 남녀 대원들이 어우러져, 여성들이 안쪽에서, 남성들이 바깥쪽에서 강강수월래를 서로 반대로 돌면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다시 이번에는 남성들이 안쪽에서, 여성들이 바깥쪽에서 돌면서 강강수월래는 무드가 깊어만 갔다. Shelter밖에서는 지금도 주룩주룩 꽃샘추위를 동반한 봄비는 멈출줄을 모른채 대지를 적시고 있다. 새봄을 준비하는 삼라만상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봄비이겠지만, 적어도 이시간 우리가 즐기는 축제인 시산제를 중심으로 봤을때는 아닌것이 확실하다. 모든게 우리 인간들이 터득할수 없는 자연의 섭리임을 어찌 하리.... 묵묵히 따라갈수 밖에. 모든 대원들의 협력으로 이루어낸 오늘의 시산제와 산행을 무사히 마침에 감사하며, 특히 이름을 빛내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준 대원들에게 무척 고맙다는 인사를 하면서, Lunar와 함께 집으로 향하는 길은 무거웠던 속에서 가볍기만 했다.



제 12회 시산제문 2011.03. 05.

한바퀴 돌았구나.
용의 해에 시작한 산사모 시산제가 한바퀴 돌고보니 토끼해가 되는 구나 지나간 세월들은
이디쯤을 흐르고 그속에 묻힌 추억들은 이디쯤에 맴을 돌까

산은 옛산 강은 옛강 산사모 마음또한 옛마음 그대론데 눈가엔 주름살이
가슴엔 이쉬움이 세월의 상흔되어 겹겹이 쌓였는가

세상살이 한철살이 인생살이 찰라생활 한잠자고 깨어보니 소꼽장난 간곳 없어
세상만사 이렇거늘 아둥바둥 살것없네 부귀영화 별거던가 부러울것 하나없다

신묘년 새해에도 봄이오는 길목에서 산사모 회원들이 신령님을 청하오니
구제역 돼지고기 조류독감 오리고기 냄새좋다 때깔곱다
현혹되지 마시옵고 정갈하고 정성담긴 제단으로 임하소서

십이년을 한결같이 신령님을 모셨으니 복을 주시려거든 복바가지 주렁주렁
넝쿨째 주시옵고 벼락을 내리시려면 백불짜리 캐쉬로 돈벼락을 내리소서

신묘하고 신묘하다 사는것이 신묘하다 겨울가면 봄이오고
꽃이지면 열매되 돌고도는 자연섭리 신묘하지 아니한가

흐르는 강물이 비바람을 피하랴 나무숲에 부는 바람 날씨를 탓하랴
즐거운것 괴로운것 마음의 장난이요 행복도 불행도 마음먹기 달렸다네
절망을 희망으로 근심걱정 행복으로 아픈마음 건강하게 아린마음 사랑으로
신묘하게 바꾸어서 신묘년 한해를 신묘하게 살아보세
모든재앙 사라지고 희망의 새싹 되어지이다.

신묘년 3월 5일 캐나다 토론토 Trail Walk 회원 일동.

Friday, March 04, 2011

역사적 유적지 Rideau Canal(Kingston-Ottawa)


역사적 유적지 Rideau Canal(Kingston-Ottawa)



Rideau Canal하면, 긴 겨울철에 캐나다의 수도 오타와를 가로 질러 남쪽으로 흐르면서, 자연적으로 형성되는 아이스 링크가 오타와 시민들의 겨울운동장 역활을 하는 연상을 먼저 하게 된다. Rideau Canal은 온타리오 호수의 머리라고 여겨지는 Kingston에서 시작되여 오타와 까지 이어지는 긴 운하시설의 이름이다. 그길이가 자그만치 202Km나 된다고 한다.
Kingston 하면 흔히 천섬을 먼저 연상하게 되지만, Rideau Canal의 시작점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연상하기는 쉽지가 않다. 오랫만에 가을 단풍구경차 드라이빙을 Trenton에서 시작하여 Hwy33을 동쪽으로 달려 Kingston까지 달렸다. 이길은 Hwy 401이 건설되여 교통의 동맥 역활을 하기 전까지는 Hwy2 와 함께 그역활을 감당해 왔던 역사적 길이기도 하지만, 이길은 Quinte Island 와 온타리오 호수를 끼고 이루어 졌기에 가을철 단풍과 호수의 전경이 어우러져 드라이빙 코스로는 어느곳에도 뒤지지 않는 곳이라고 여겨진다. 그래서 이길을 일명 Loyalist Road라고도 부르며, 길의 안내판에도 뚜렷히 표시되여 있다.
Kingston Rideau Canal은 원래는 구경할 계획이 없었으나, 킹스턴 여행 안내소에서 그에 대한 소개를 듣고, 흥미가 생겨, 길 안내를 받아 가게된것이다.
우 선 규모에 놀랐다. Locks(갑문)가 5개가 설치되여 그문을 이용하여 온타리오 호수에서 물줄기를 타고 이곳까지 항해해온 배들을 위로 올려 놓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갑문은 모두가 오래전에 통나무를 깍아 만들어졌다는점이 놀라게 했지만, 또한 아직도 갑문의 열고 닫는일을 연방정부 소속담당 직원이 원시적인 방법으로 핸들을 돌려 조정하고 있는점이었다. 나이아가라 Welland Canal 이나 Trent-severn Canal은 같은 규모인데도 모두가 현대화 되여 스윗치 하나로 조작되고 있는것과 비교할때, 그옛날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연방 정부에서 역사적 사적지로 지정하여 캐나다 시민을 비롯한 관광객들에게 자랑스럽게 보여주는 의미를 느낄수 있었다. Locks 위로는 철교가 건설되여 그위로 CN 철도가 달리고 있었다. 그모습 또한 갑문과 어우러져 장관인데 단풍이 곁들여 더 환상적이었다. 여러명의 담당직원들이 마침 갑문에 도착하여,2번째 갑문작동을 기다리는 3척의 유람선을 들어 올리는 와중에도, Noona가 물어보는 궁금증에 대해 친절히 설명을 해줬다. 하나의 유람선안에는 노부부와 2마리의 애견들이 거꾸로 주위에 몰려든 구경꾼들을 향해 눈을 꿈벅 기리며 꼬리를 흔든다. 오타와까지의 긴 여정에 그들은 노부부의 훌륭한 친구이자 동반자가되여 한몫을 단단히 하리라. 유람선안의 한가로운 모습에서 삶의 여유를 느끼는 그들은 어디서 부터 출발하여 이곳에 서 있을까? 궁금증이 일어난다.
이곳에서 오타와까지는 여러개의 강과 호수가 연결되여 운항하게 되는데, 이사이에 자그만치 47개소의 Locks Operating station이 있다고 설명하는데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1812 년에 갑문 건설이 시작됐는데, 그동기는, 당시에 영국군과 어메리칸(오늘의 미국)에 국경 전쟁이 한창일때, 몬트리얼에서 이곳 킹스턴까지 군사물자 수송과, St.Lawrence 강에 세워진,새로운 정착지 Upper Canada를 지키고, 또 전략적으로 중요한 해군기지가 있는 킹스턴을 어메리칸들의 공격으로 부터 지키기위해서 였다고 한다. 1826년 영국은 공병대 중령 John By 를 파견하여 건설감독을 하게 했다. 아이리쉬에서 갓 정착한 이민자들과 프랜치 캐네디언과 스코틀랜드에서 온 석공들이 울창한 숲과,늪지등의 어려운 여건속에서 이건설을 담당했다. 열악한 환경 때문에 이들의 희생이 매우 컸다고 안내서는 설명한다.
1832년에 이 공사가 완공됐는데, 이역사적 완성은 19세기에 가장 훌륭한 건설작품중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한다. 그후 이운하는 이지역의 경제건설에 젖줄역활을 해냈다고 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St.Lawrence Canal이 완성되고, 철도건설이 완공되여,상대 경제적 가치에서 사양길을 걸어와서, 오늘날에는 여름철 유람선들의 도로역할로 만족하고 있다고 한다.
오 타와와 킹스턴의 중간에 있는 Tay Canal이라고 불리는 Perth Locks는 개인 회사가 1834년에 건설하여 Upper Canada와의 교역에 큰 역활을 담당하기도 했다 한다. 47개의 갑문운영소를 거쳐 오타와 까지 가는데는 많은 시간과 물자가 필요하단다. 우리가 갔을때는 마침 3척의 배가 갑문을 통해 위로 올려져, 오타와를 가기위해 다음 갑문을 향하고 있었다.
갑문 운영사무소 주위는 공원으로 꾸며져, 식구들이 BBQ테이블에 둘어 앉아 준비해온 점심을 먹으면서, 갑문위로 올려지는 유람선을 구경하는 운치는 그만인것도 좋았고, 조성해 놓은 공원 한가운데로 지나는 맨윗쪽 갑문에서 내려다본 4단계밑의 맨 아랫쪽 갑문은 저멀리 아스라이 보이는것으로 보아 그낙차가 50미터 정도는 되지 않을까? 생각됐다. 맨윗쪽
갑문안에 갖혀있는 넓은 유원지 물속에서는 물고기들이 여유있게 활개치는 모습도 보기 좋았다. 오래오래 관광객들에게 사랑을 받게되리라.
토 론토에서 가게되면 Hwy 401을 동쪽으로 달려 킹스턴지역에 도착하게되면 나가는곳 632로빠져 Hwy 15 N.로 달려 조금가면 Kingston Mills Rd를 만나게 되는데 그곳에서 좌회전해서 곧바로 조금 달리면 Locks station 에 이르게 된다. 창조주의 헤아릴수 없는 능력을 이곳에서 또다시 깊이 느끼면서, 다시한번 감사를 나도 모르게 하게된다. 이가을에 한번 구경해 볼만한 곳이라고 권하고 싶다.

Tuesday, March 01, 2011

BTC와 '제주올레길'이 Trail 자매 결연을 맺었단다.....




BTC에서 회원들에게 일년에 4번씩 보내주는 Bruce Trail Magazine,2011년도 Spring판(Vol.48 No2)이 배달되여 내용을 보면서, 재미있는 컬럼을 하나 보았다. 다름아닌, 우리 부부를 포함한 산사모팀과, 교회팀 그리고 다른 많은 등산객들이 즐겨 걷는 BTC(Bruce Trail Conservancy)와 고국의 제주도에 있는 '올레 파운데이션"간에 자매 결연을 맺고 서로 Trail Walker들을 교환하여 서로 바꾸어 Trail을 걷고, Trail의 일정 구간을 정해 Trail sign을 바꾸어 설치하고,정보도 교환 하기로 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BTC에서 자원 봉사자로 수고하면서 자원봉사자 프로그램을 맡아 수고하는, Jackie Randle씨가 고국을 방문하고, 그때 제주에서 처음열린 국제 Trail Conference에서 세계 여러나라에서 모인 관련자들과 뜻깊은 회의를 했었다고 한다. 앞으로 고국방문 기회가 주어지면 BTC membership Card를 Backpack에 매달고 걸어보고픈 마음이다 여기에 그분의 Column을 옮겨 놓는다.

BTC, 한국의 '제주올레'와 자매결연(Friendship agreement)을 맺었다. By Jackie Randle,BTC Director of Volunteer Program.

2010년 11월에 한국의 아름다운 제주도에서 첫번째 World Trail Conference가 개최됐었다. 제주도는 한반도 끝에서 약 130킬로 남쪽으로 떨어져 있는 섬이다. 제주도섬은 화산 폭발로 흘러내린 갈색의 용암으로 형성되여 있다. 제주도는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UNESCO의 세계 자연유산으로 등재 되였으며, 지난 3년간 "제주올레"이라는 새로운 등산로를 개척하여 등산객들이 이용하고 있다. "올레"는 원래 제주도 방언으로 문밖에서 집안으로 이어지는 좁은 고삿길을 의미 한다고 한다. 또 올레는 신비에 둘러싸인 방에서 시작하여 모두가 이용하는 동네길로 이어지며 또한 전세계를 향한 길이라는 뜻도 포함하고 있다. 또 이말속에는 "어서 오십시요"라는 뜻도 포함되여 있어 결국 제주 올레는 "제주도에 오십시요"라는 뜻이 그속에 있다고 하겠다.

제주올레 Trail을 만든 서명숙씨는 스페인 방문시 "산티아고 Trail"을 걸으면서 그곳에서 감명을 받아 개척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녀는 귀국하면 등산로를 개척하여 전세계로 부터 제주를 방문하는 등산객들을 위한 Hiking Trail을 개척하기로 결심하고, 그녀와 팀원들이 의기 투합하여, 동네 사람들이 즐겨 이용하던 좁은 등산로위에 Trail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 첫번째 Trail은 2007년 9월에 완료되여 일반에게 공개하게된 것이다. 그후 '제주올레 라운데이션'은 게속해서 작업을 하여 지금은 제주도내에 약 200 Km의 Walking Trail을 개설 운용하고 있다. 현재 11개의 Trail route가 일반에게 사용되고 있으며,새 Route를 만드는 작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2010년 9월에 '제주올레 파운데이션'에서 2명의 임원이 BTC의 최고 책임자 Beth Kummling과 자원 봉사자 프로그램 담당자 Jackie Randle을 만나기위해 캐나다를 방문 했었다. 그들의 방문 목적은 BTC에 대한 많은 정보와 우리가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 더 알아보기위해서 였다. 그때 그곳과 이곳의 두 Trail을 연결시키면 좋겠다는 구상을 하게 됐던 것이다. 2010년 Jackie가 제주도에서 처음 개최된 World Trail Conference에 초대되여 참석했는데 회의 의제는 Trail에 관심이 많은 세계각처의 사람들을 한곳에 모이게 하기위한 것이었으며, 그회의에서 스위스와 영국의 Cotwold에 있는 여러 Trail과 자매 결연을 맺도록 하는 것이었읍니다.

Jackie는 '제주올레 파운데이션'의 지원을 받고 제주도에 5일간 머물렀으며, 그곳에서 그녀는 제주도의 아름다움과 주민들이 푸른 초원을 보호 하려는 주민들의 열정에 매료 되였었다고 한다. Jackie는 제주올레길의 여러 구간을 걸어볼 기회를 갖었었는데, 각 Trail코스는 제주섬을 빙 둘러 이어지는 속에서 그 특유의 전망과 제주섬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음에 매료됐었다. 이번 회의에서 자매결연을 맺는 Trail을 연결 시키자는 구상이, Trail들을 서로 연결시켜 국제적인 관광과 상호협조를 촉진 시키기위한 방법으로 서로 자매결연을 맺자는 구상이 구체적으로 논의 됐었다. 이구상의 일환으로 제주올레 파운데이션의 제주올레와 BTC간에 자매 결연을 맺고, 제주올레 Trail 두곳에 BTC의 Trail 표시를 세우기로 서로 합의 했다. 전체 17Km인 이구간은, 2개의 백사장과 동쪽편 해안선을 내려다 볼수 있는 정상(Peak)간을 연결해주며, 또 짠물이 고여 있는 호수를 통과하는 구간이다. 이에 대한 답례로 BTC는, 제주올레파운데이션에서 제공해 주는 Trail표시를 새로 개발하는 Side Trail에 부착하기로 했다. 우리는 머지않아 이 Side Trail이 개척되여 조만간에 등산객들이 걸을수 있도록 추진중에 있음을 알려 드린다.

The Bruce Trail Conservancy forms a Friendship agreement with the Jeju Olle Foundation,
South Korea.

The beautiful island of Jeju, South Korea, was the setting for the first ever World Trail Conference in November 2010. Jeju Island is located 130 kilometers south of the Korean Peninsula. The island is volcanic and is covered with dark-brown volcanic rock and soil. Jeju Island has become the first Korean natural heritage site to be added to UNESCO's World Heritage Site List and in the past three years a new trail has been created on this island called the Jeju Olle. "Olle" is the Jeju word for a narrow pathway that connects the street to the front gate of a house. Olle is a path that comes out from a secret room to an open space and a gateway to the world. It has the same meaning as "Would you come?" in Korean, therefore Jeju's Olle means "Would you come to Jeju?"

Jeju Olle's founder Suh Myungsook was inspired by the Santiago Trail in Spain. She decided to create a hiking trail in her home country that would be used by walkers from all over the world. She and her team began building trail on old paths that were used by villagers on Jeju. The first trail route was opened to the public in September 2007.
Since then the Jeju Olle Foundation has created a combined total of 200 Km of walking trails on Jeju Island. Currently eleven trail routes have been opened to walkers and they continue to work on new routes.

At the end of September 2010, two representatives from the Jeju Olle Foundation came to Canada to meet with BTC Executive Director Beth Kummling and Director of Volunteer Programs Jackie Randle. The purpose of the meeting was to learn more about the Bruce Trail, the BTC and the work that we do. At that time an idea was formed of creating a link between the two trails.

In November 2010, Jackie was invited to attend the first World Trail Conference on Jeju Island. The conference was designed to bring together people interested in trails from around the world and so far they have created friendship trails with Switzerland and the Cotswold trail in England. Jackie spent 5 days on Jeju Island, sponsored by Jeju Olle Foundation, and was impressed with the beauty of the island and the passion of the people to preserve their green spaces. She had an opportunity to hike on a few different sections of the Jeju Olle. Each section of the trail offers a unique view and perspective of the Island as it makes its way around the island's circumference.

At the conference, the idea of a friendship trail was further built upon as a way to promote international tourism and cooperation between trails. As part of the friendship agreement between the BTC and Jeju Olle, the Jeju Olle Foundation has agreed to post Bruce Trail signs on route two of the Jeju Olle. This 17 Km route connects two beaches, crosses a peak where you can enjoy views of the eastern coast line, and passes an inland salt pond. In return the BTC will create a new side trail with signage provided by the Jeju Olle Foundation. We look forward to announcing the opening this trail some day s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