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December 30, 2011

세시봉친구들이 회한의 눈물을 흘리게 한다. 12월 28일, 2011






세시봉친구들이 회한의 눈물을 흘리게 한다. 12월 28일, 2011

아주 오래오래전에 들었던 멜로디가 귓속으로 들어왔다. 소리의 진원지인 TV의 화면속으로 눈길을 돌리고.... 같이 입을 벌려 흥얼거렸다. 그때가, 그시대상이, 주마등처럼 가슴깊은곳으로 부터 멜로디와 함께 다시 세상밖으로 나오게 하는 마력을 그들에 입에서 토해내고 있었다. 토해낸 그배설물은 더러움으로 기피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도 빠짐없이 나의 머리속으로 들어와 기억을,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뇌의 중심부를 강타했다.

"넓은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개우른 울음을 우는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으랴..우...우...
질화로 재가 싫어지면 빈밭에 바람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게 자란 내마음 파란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러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달리는 어린누나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지고 이삭줍던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우....우....
하늘에는 성근별, 알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돌아, 도란도란 거리는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지난해였던가? 아니면 금년도 여름철이였던가? 40여년전에 세시봉에서 처음만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해서, 평생을 가수의 길로 들어서 당시의 시대상으로 봐서는 파격적인 Pop Song을 불렀던, 같은 연배의 노래쟁이들이 TV에서 다시만나 그때 불렀던 노래들을 그음성 그대로, 몸은 많이 변했지만, 사랑방에서 얘기하듯, 불러대는 노래쑈를, 인터넷을 통해 이곳 태평양 건너 안방에서 본기억이 있었다.

그때 그들의 쑈를 본 당대의 같은 사람들의 요청으로, 다시 팀을 꾸려 전국순회 공연을 25회 이상하고, 오늘 내가 본 그들의 쑈는 지난 7월말에 태평양을 건너 LA까지 찾아와, 한많고 고달픈 이민자의 삶을 살아가는 동시대 많은 교민들이 회한의 눈물을 짜내게 하는, 이를 본 내 마음도 그속으로 빨려 들어가 헤여 나오지를 못하고 쑈가 끝난후에야 현실의 세계로 돌아오게하는, Time Machine을 타고, 그때의 참담하고 배고프고, 아직 6/25동족 상잔의 흔적이 도시나 시골농촌의 이곳 저곳에 흩어져 있었던, 그래서 앞으로의 희망도 크게 열광적이지 않았던 서울시내의 풍경속으로, 그리고 고향땅의 그때로 달려갔었다.

그때 나는 시골에서 겨우 고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는 갈엄두를 못내고, 대신 자원하여 군대를 가서, 강원도 중부전선의 최전방 부대에서 근무를 마치고 시골고향으로 돌아와 보이지 않는 앞날에 대한 두려움속에서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지금은 돌아가신 장형님의 비좁은 전세단간방에서, 끼워 잠을 자곤 하면서, 국가에서 국비로 가르치는 학교에 다니면서, 서울이라는 눈감으면 코를 베어간다는, 한시도 방심할수 없는 사회환경속에서 사회생활과 학교생활을 했었다. 어쩌다 래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그들이 부르는 노래를 들으면서, 그들에 대한 상상은 그끝이 보이지 않게 이어지곤 했었다. 외국의 노래를 원어로 불러대는 그들을 나는 그들이 영어를 우리말 하듯이 잘 하는것으로 상상하면서 부러워 했었고, 나를 그속에 대입해 보면서 초라하고, 조그맣다는것을 가슴아파 했었다. 그렇지 않아도 밤이 되면 잠자리가 비좁아 장형님과 조카들이 고생하고 있는 그속에 나까지 끼어 들어야 했으니.....

'이미자'를 비롯한, 요즘은 국민가수로 불리는 당대의 유명한 토로트가수들이 부르는 노래와는 Theme자체가 다르게, 그래서 당대의 젊은이들중에서도, 소위 말해서 앞서가는 족들이 즐겨 부르는, 그래서 그들속에 끼어 들어 볼려는 욕심에, 귀로 듣기에는 아름다워도 실제로 따라 부르기에는 쉽지만은 않았던 멜로디가 어쩌다 담배연기 자욱한 지하다방에 앉아 있을때 디스크 쟈기가 걸어놓은 LP판에서 흘러 나올때는 괜히 아는척 흥얼거려 보기도 했었다. 그때의 다방 커피는 담배 꽁초를 끓여 만들었다는 풍설이 많이 떠돌던 때이기도 했었다. 커피한장 주문하면서 달걀노른자위를 커피속에 첨가할때는 뽀루뚱했던 다방레지의 얼굴빛이 달라지던 때였었다.

그들이 불어대는 Pop Song들은 보통 트로트 노래와는 완전히 다르게 당시의 시대를 저항하는 그래서 서슬퍼런 군사정권 당국의 감시의 대상이 되는 늬앙스를 항상 달고 다녔었다. '아침이슬' 같은 노래는 금지를 당해 지하속으로 숨어 들어서만이 들어야 하는 그때가, 긴머리를 주장하고 있었던 젊은이들이 단속 경찰들과 거리에서 쫓고 쫓기는 실랑이를 벌이는, 젊은이들만이 발산할수 있는 욕구충족과 불만에서 오는 비틀림 현상이 사회저변에 흐르고 있을 때였었다. 지금은 그때 당시의 우리나라 형편과 처해진 모든 여건상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오늘날 조국이, 특히 젊은이들이 누리는 풍요로움을 이룰수 없었을 것이라는 결론이 확실하게 마음속에 정착되여 있기에, 철부지 젊었을때의 객기였었던점도 많이 작용했었다는것을 이해가 되고, 워커발 문화속에서 갇혀 살아가는 환경에서 오는 반발심리가 맞물렸기에 더 애창되고 가슴깊이 자리매김을 했었던것같다.

짧았던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왜 우리는 이렇게 워카발 군바리들의 시달림속에서 살아가야 하는가의 깊은 뜻을 이해 할려고 했다기 보다는, 사회적 시류가 그런쪽으로 흘러가니까 휩쓸려 무조건 반대하고 저항하고 데모도 했었던것이다. 70년도 초반에 공무로 일본과 독일을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국가공무원신분인데도, 외국에 나갈때는 국무총리의 승락이 떨어져야만 가능했던 그시대에, 이들이 부른 노래들은 확실히 시대와 정권에 반항하는 노래들로 비쳐지기에 충분했었다. 그만큼 국가는 살기가 어려웠고, 한푼의 외화라도 절약해 국가 기간 산업건설에 보태볼려고 하던때였었다. 일본과 독일에서 국가 기간 산업에 필요한 기술을 배우고 돌아온 그시점부터는, 절대로 군바리 정권을 비난하거나 하는 대신에 스스로 깨달음이 있었기에, 당국의 장발단속과 여러가지로 국민들이 살아가는데 일부 제약이 뒤따르는 정책을 충분히 이해하고, 이렇게 라도 하지 않으면, 보릿고개를 없애기란 영원한 숙제로 남을 것이다라는 깨달음을 마음속에 간직했었다.

바깥세상을 경험한 나는 그때 통기타 가수들이 부르는 소리를 당국에서 해석하는 방향에서가 아니고, 젊은이들만이 발산할수 있는, 이해할수 있는 무궁한 가능성을 내포한 그런 건전한 노래로 나는 따라 부르고, 그속에서 어울렸었다. 속담에 '자라보고 놀란 사람,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라는 비유를 당시의 사회상과 많이 비유 했었다. 그런속에서 살면서, 밖의 세상을 보고온 나는 더이상 좁은 한반도에서 안주 하면서 살기에는 조국이 좁아 보였고, 뭔가 불편하여 이민짐을 싸서 김포공항 검색대를 거쳐 이곳 토론토까지 굴러와 살아 왔는데 어느새 나는 은퇴한 노인이 되여 그들이 부르는 그때에 불렀던 똑 같은 노래를 들으면서, 오늘은 회한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아직 이십대를 지나 삽십대를 넘길무렵, 이민짐을 풀은 이후로 지난간 세월을 지금 잠시 되돌아 본다. 이들이 부르는 노래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공무원 신분으로 외국에 나갔을때와, 이민자로서의 외국에 와서 짐을 풀었을때의 신분은 완전히 달랐다. 언어와 문화가 전연 통하지 않았고, 머리당 $200.00만이 허용된 당시에 우리가 들고온 돈은 합계 $600.00이 전부요, 공항에서 일부 친지들이 주머니에 넣어준 몇푼이 전부인 나의 가족 신세는, 괜히 이민짐을 싼것은 아닐까?라는 후회를 갖게 하기에 충분한 형편으로 전락하고 말았었다. 직업을 찾을려고 resume를 들고 헤매였으나, 그때마다 "You don't have any Canadian experiences, so it's not for you" 라는 대답뿐으로 고민하고 헤매이면서도 우선 먹고 살아야 하니, 임시로 Landscaping을 하는곳에서 처음 대하는 Lawn mower로 궁전처럼 큰 저택의 가파른 언덕에서 풀깍다가 넘어졌던일, 배로 부쳤던 이민짐이 오지 않아, 한푼도 새로운판에 임시로 구입한 조금만 냄비 하나를 이용하여 밥도하고 반찬도 만들어 나의 도시락을 만들어 주느라 고생했던, 그때는 젊었던 아내의 모습, 몇년 먼저와 Down pay조금하고 처음 집을 구입한 친지가 그집을 담보해서 은행으로부터 대출받아, 당시로서는 거금인 돈을 빌려주어 생판 처음 사업이라는것을 했는데, 뜻데로 안되여 전부 털어먹고, 우리 때문에 친지의 집이 날아가 버리면? 하는 생각으로 세상을 원망했었던 기억, 학교때 잠시 과외활동에서 배웠던 화초에 대한것 외에는 Plant라고는 전연 생소했던 아내가 소매를 걷어 부치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꽃가게를 시작하면서, 언어소통의 어려움에서 겪었던 일, 팔았던 꽃나무가 금방 죽었다고 들고와 Refund해달라고 하던 Jewish와, 우리의 정당함을 주장하기위해 재판소에 까지 갔었던 기억... 여름방학이면 으례히 부모들과 넓은 북미 대륙 이곳저곳에 여행가서 즐겼던 얘기들을 나눌때, 우리집 아이는 그대열에 끼지 못해 가슴아파 했던일, 그외 손으로 다 꼽을수 없을 정도로 우리를 괴롭혔던 신체적 정신적으로 어려웠던 기억들.... 경제적 기반을 세워야, 그리고 아이들 잘 가르쳐야 이민의 목적이 이루어진다는것 외에는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이 현장에서 일년 365일을 하루같이 뛰어온 그긴세월앞에, 우리는 벌써 머리가 빠지고, 백발이 성성한 노인으로 변해, 지금 이들이 부르는 그때의 노래소리에 뭐가 서럽고 그리워서인지 잘 살아오지 못한, 한번밖에 기회가 없는 젊은날들의 삶을 뒤돌아 보면서 회한의 눈물을 감추고 있다.

LA공연은 Shrine Auditorium에서 열렸었다고 한다. 이공연을 보기위해 멀리 Ohio주에서, Texas주에서, Arizona주에서 비행기 타고 날아온 같은 연배의 여인들이 모처럼만의 나들이를 하는 장면과 인터뷰도 보였다. 입장하기위해 길게 늘어선, 나와 같은 처지의 어렵고 서러운 삶을 살아가는 교포들의 마음을 나는 금방 읽을수 있었다. 겪어본자만이 이해할수 있는 교포들의 삶의 정신적 공허함을 나는 공유하고 있다. 아침새벽부터 저녁 별이 보일때까지 삶의 터전에서 일만 하면서 지내온 세월의 기억을, 오늘 당대를 같이 살아온 통기타 가수들의 멜로디속에서 되찾고, 그들 또한 회한의 세월에 젖은 눈물을 자신도 모르게 스르르 쏟아낼 것이다. 고국에서 살았다고 한들 어찌 살아온 세월에 대한 회한이 없을까마는, 우리들 인간들은 항상 울타리밖의 세상을 더 그리워 하면서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그냥 고국에서 살았더라면..... 하는 미련이 가슴에 있는것이다.

옆에서 같이 TV를 보면서 돋보기를 끼고 옷손질을 하고 있는 아내에게 흐르는 눈물이 얼굴로 흘러 내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게 하기위해 딴청을 부리는 내자신이 외소하게 느껴진다. 늙어서는 여자가 더 강하다는 말이 맞는것 같다. 마음고생을 나보다 훨씬 더 많이 했을 그녀는 태연한척 한뜸한뜸 바늘을 단추와 천속으로 옮겨가면서 그들이 부르는 멜로디에 귀를 대고 있는것으로만 보인다. '하얀 손수건' 멜로디가 지금 흘러 나온다. 통기타 소리와 함께.....

http://www.joovideo.com/ViewMedia.aspx?Num=736&ep=2

Friday, December 23, 2011

공산주의 종주국 쏘련이 붕괴되면서 들떴던 그기쁨과 기대는 어디에......2011,12월 23일.






공산주의 종주국 쏘련이 붕괴되면서 들떴던 그기쁨과 기대는 어디에......2011,12월 23일.

지금도 1985년 당시, 미국 ABC방송의 Barbara Walters가 크레물린 궁전데 들어가 당시 공산주의 종주국의 최고수장이었던
Mikhail Gorbachev당서기장과 담판 짖는 모습으로 단독 기자회견을 하면서, 그때까지만 해도 크레물린궁의 내부가 비밀에 쌓여 있었던것을 처음으로 서방세계에 알려 주었던 역사적인 순간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그때 들었던 쏘련말의 두단어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쏘련의 경제정책실패로 인민들의 생활상이 어려워지고 있음을, 비밀에 쌓여 있어왔던 공산주의 정책으로 국민들의 자유를 다 빼앗아 공포에 떨게 했던 정치로선으로서는 서방 세계와의 경쟁에서 앞설수 없음을 깨달은 Gorbchev가 미국 ABC 방송의 앵커를 크레물린궁안으로 끌어 들여, Perestroika,즉 자유경제체제, 그리고 Glasnost(정치적 개방, Political Openness)을 선언했었다. 미국사회에서 유명 앵커로 인기가 절정에있었던 그녀는 이인터뷰로 또 한번 전세계에 '역시 그녀답다'라는 꼬리표가 또하나 붙었던 기억을 하고 있다. 체르넹코로 부터 쏘련방의 수장을 그가 물려 받았을때만 해도, 권력의 암투를 통해 정권을 장악하고, 미,쏘간의 냉전의 기류는 계속 흐를것으로, 즉 특별한 의미를 부여 하지 않았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인터뷰를 통해서 그가 개방정책과 경제개발 정책을 발표 했을때도, 그의 말을 100% 진심으로 믿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공산주의의 상투적인 흑색선전쯤으로 치부하면서 그추이를 주시하고 있을뿐이었었다.

그러나 그의 정책변화선언은 시간이 흘러 가면서, 서방세게로 부터 믿음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었다. 1988년 발틱 3국인, Lithuania,Latvia, 그리고 Estonia가 독립을 외치면서 쏘련방체제의 기틀을 흔들기 시작했었다. 과거 정권 같았으면 당장에 탱크를 앞세워 밀어 부쳐 꼼짝 못하게 했을만도 한데, 그는 때가 온것을 알고, 지켜만 보고 있었다. 즉 억압으로 누르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바로 이어서, Gorbachev가 개혁한 정치적 제도위에서 1989년 실시된 러시아의 선거에서 Boris Yaltsin이 국회에 진출하면서, 쏘비에트 공화국은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베를린 장벽도 무너지고 만다. 벨린 장벽이 무너질때의 역사적 순간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이에 앞서 당시 미국대통령 Ronald Regan은, Gorbachev에게 베를린 장벽을 허물고, 인민들에게 자유로히 동,서독을 왕래할수 있도록 하라고, 그렇치 않으면 중대한 결과를 피치 못할것이라고 위협아닌 현실의 절박함을 강조했던, 그역사적 순간의 TV연설이 눈에 선하다.

1990년 1991년 사이에 Gorbachev는 정당정치제도를 해야 한다고 크레물린 내부를 움직이는 집단에게 요구했었는데, 이때 위성국가인 Azerbaijan과 Lithuania에서는 인민들이 독립을 부르짖으며 거리로 뛰쳐 나오자, 경찰과 군대는 이를 제압하려고 무자비하게 폭력을 휘둘러, 많은 사상자들을 내고 말았었다. 쏘련의 집단지도체제의 핵심간부들은 Gorbachev의 Openness를 환영하지만은 않았었고, 내부 갈등과 암투가 크레물린궁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1991년에는 Boris Yaltsin이 새로 기초한 정치개혁에 따라 치러진 선거에서 러시아연방의 새로운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이변을 맞는다. 그해 8월19일에, 크레물린궁내 강경파들은 쿠테타를 일으켜, 더 많은 자유를 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위성국들과의 협약 조인식을 막기위해 당시 Crimea 휴양지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던 Govbachev공산당 서기장을 붙잡아 그를 권좌에서 몰아내는 참극이 벌어졌었다. 그러나 이틀뒤인 8월 21일 Boris Yaltsin이 주도하는 대규모의 군중집회에서 요구한 Gorbachev의 석방요구에 쿠테타는 불발로 그치고 그는 가택 연금에서 풀려나는 기사회생의 기회를 맞는다.

다음날 8월22일, 이날 가택연금에서 풀려난 Gorbachev는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오지만, 이번에는, 쏘연방 공산당의 정치적 활동을 러시아 땅에서는 앞으로는 절대로 인정할수 없고, 이를 해체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는 Boris Yaltsin이 주도하는 러시아의회로 부터 맹렬한 비난을 받고 위기를 맞는다. Gorbachev는 다음날인 8월 23일, 쏘연방 공산당 서기장직에서 완전히 물러난다고 발표한다.

9월6일, 마침내 발틱 3국인, Lithuania, Estonia 그리고 Latvia가 쏘연방 위성국중 맨처음으로 독립을 인정받게 된다.

12월8일, 러시아, 백러시아(Belarus)그리고 우크라아나의 정상들이 모여 쏘연방의 해체를 논의하고, 대신에 독립국가연합(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CIS)을 형성하기위한 대책을 논의 한다.

12월25일, Gorbachev 대통령은 쏘연방의 대통령직에서 완전히 물러나며, USSR(쏘연방 공화국)은 완전해체된다고 발표한다.

참고로 1991년도에 구쏘연방내의 위성국들이 독립을 선언한 날자들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2월과 4월에는 Lithuania,Georgia, 8월 20-22일에는 Estonia, Latvia, 8dnjf 24-31에는 우크라이나, 백러시아(Belarus),Moldava,Azerbaijan,Kyrgyzstan 이었고, 9월에는 Uzbekistan, Tajikstan, Armenia 였었다. 그리고 다시 10월에는 Turkmenistan, 다시 12월에는 Kazakhstan 등이었다. 이로써 쏘연방은 완전해체되고, 새로운 독립국가들이 형성되여 이세상에는 이제 자유와 평화만이 있을 것으로 우리 모두가 거의 확신 했었고, 삶의 질이 좋아지고, 전쟁은 없을 것으로 기대를 했었다.

그후 4반세기가 흘러갔는데, 과연 이지구상에는 전쟁이 없었고, 평화와 자유와 삶의 질이 좋아졌다고 느낄수 있었던 날이 언제였던가?
최근 2-3년 동안에는 세계 경제가 곤두박질을 쳐서, 전세계가 휘청거러 거의 그로기 상태가 되다시피 했었다. 철옹성으로만 보였던 미국의 Big Three 자동차 Maker들이 정부의 긴급 수혈을 받고 이제 겨우 숨을 자생적으로 쉬고 있는 평편이 됐고, 러시아국민들은 삶에 지쳐 다시 옛날 쏘연방 시대로 되돌아 가자고 아우성을 치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지금 러시아는 낯에는 국민들이 뽑은 대통령이 국민을 다스리고 밤에는 러시아마피아들이 통치를 하는 나라가 되고 말았다고 개탄하고, 국민들은 시름에 앓고 있다라는 인식이 전세계인들에게 팽배해 있다고 한다.

우리가 발처럼 사용하고 있는 자동차는, 지금 개스값이 너무나 비싸서, 여름휴가철에는 기름값때문에 휴가를 떠나는 사람들이 무척 들어 휴양지나 관광지의 업자들이 울상이라고 한다. 냉전이 끝났으면 기름값은 더 싸져야하고 그혜택은 국민들이 가져가야할 몫이 될것으로 여겼으나, 이란과 파키스탄,아프카니탄등에서 터진 개릴라 전쟁과 중동에서 일어난 왕권정치와 독재정치에 맞서 싸우는 서민들간의 투쟁으로 기름값은 하루가 다르게 뛰어올라, 배럴당 100달러를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다고 한다. 냉전시대에는 지금의 1/3값도 안되는 저렴한 가격으로 질좋은 삶의 맛을 만끽하면서도, 미 쏘 양국의 냉전을 조소 하면서, 냉전 종식을 외쳐 댔었다. 더좋은 삶의 질이 우리를 기다릴것으로 상상하면서 말이다.

우리의 삶의 질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는것 같다. 세계속의 위계질서는 무너지고 있는것을 본다. 지구상의 모든 나라들을 앞장서서 이끌고, 때로는 힘을 앞세워 중재자 역활을 해줄 나라들이 서서히 그빛을 바래가고 있는것을 보면서, 더큰 재앙이 우리를 향해 달려 오고 있음을 똑똑히 보고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대책이 서지 않고 있는것 또한 걱정일 뿐이다.

이북의 김정일 정권이 바뀌어 그의 풋내기 아들이 정권을 불법으로 세습받아, 그의 아버지 김정일이 휘둘렀던 철권통치를, 힘없고 배고파하는 북한 인민들을 향해 휘두르기 시작하고 있지만, 세계 어느나라도 이를 직접 말리겠다고, 중재자 역활을 하겠다고 나서는 나라는 하나도 없다. 김정일이만 없어지면 북한에도 희망이 보이는 나라가 될것으로 생각하고 믿었던 많은 사람들이, 김정일이가 없어진 지금 희망은 커녕,더 무섭고 공포에 떠는 앞날을 내다 보면서, 마지못해 삶을 이어가게 됐지만, 모두가 자기나라의 어려워진 살림살이를 챙기느라 옆을 돌아볼 여력이 없이, 강건너 등불로 생각할 뿐이다. 이러한 상황을 잘 알고 있는 많은 나라들의 질나쁜 지도자들은 더 심하게 자국민들을 억누르고, 착취하여 그들과는 다른 천상에서의 삶을 즐길것이다. 이럴려고 냉전의 종식을 그렇게도 외쳐 댔었던가?.

우리 다음세대의 아이들의 삶은 어떻게 이어질것인가? 삶의 질에 불만이 많은 서구사회에서는 지금 인명경시풍조가 전성시대를 이루고 있다. 전쟁으로 죽은 숫자 이상으로 폭력사건과 총기난사사건, 강도 강간사건들로 많은 시민들이 목숨을 잃어간다. 그러나 속수무책이다. 위선으로 옷입혀진 정치지도자들이, 이러한 악에 맞서 강력히 다스려야 할 입법을 해야하나, 대신에 선한 양 인척보이기위해, 갖은 악법을 만들어 국민들을 현혹시키기위해, 존재했던 법마져도 없애 버려, 지금 온갖 서구사회가 악의 길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잘 살고 있다고 하는 서구사회의 어느곳에서도, 지금은 밤에 거리를 마음놓고 활보 할수가 없을 정도가 됐다. 누가 목숨을 금새 채갈지 불안하기 때문이다. 냉전과 공산주의사회를 꺽어놓은 서구사회의 현실이 이것이라면, 차라리 동서냉전의 시대에, 더 값싸게 자동차를 타고 다니고, 더 안전하게 밤거리를 거닐수 있었던 그때가 그리워 옛날 체제로 돌아가자고 외치는 러시안들의 고함소리를 심도있게 받아들여야 맞다고 생각을 하게된다. 두렵고 무서운 세상이 오고 있다는것을 느끼기에.......

Friday, December 16, 2011

친지의 손자와 친구가 되여 3킬로미터를 걸었던 의미. Dec. 15일, 2011




친지의 손자와 친구가 되여 3킬로미터를 걸었던 의미. Dec. 15일, 2011

"Timmy, you said your Mom has forced you to be a medical doctor when you've grown up that you don't like it but
you want to be a animal scientist, Any particular reason on that?"
"Yes. I love animals,especially on birds. So I want to research those guys one day as a scientist, Grand pa"

어제 오후에는 우연히 Timmy와 그의 친할머니와 Lunar 그리고 나, 모두 4명이 같이 Lakeshore 호수물가를 따라 약 3킬로를 전진 했다가 다시 되돌아 오는 Board walk위를 걸었었다. 그녀석은 이제 불과 7살짜리로 초등학교 1학년에 다니고 있는, 내가 살고 있는 옆동의 콘도에 살고 있는 친지의 친손자이다. 가끔씩 Timmy는 나의 친지인,그의 Grand parents를 방문하곤 한다. 어제는 감기로 몸이 불편하여 일찍 학교를 조퇴하고 Grand parents집으로 와서 쉬면서, 같이 걷게되는 기회를 맞았던 것이다. 내 친지의 막내 아들이기도한 Timmy의 부모들은 모두가 일을 하기에 Nanny가 그들을 돌보고 있었으나, 계약이 만료되여 또 다른 Nanny를 찾고 있는 며칠 사이 할머니가 그들을 Baby sitting을 X-mas휴가철까지 하기로 하고 돌보고 있기에 같이 걸을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던 것이다. Timmy의 여자 동생은 할아버지가 집에서 care하고 있었기에 같이 동참하지 못했지만, 하고 싶었어도 너무 어려서 안됐었을 것이다.

그의 할머니와 오랜 친구인 Lunar는 앞서 걸어가고, 나와 Timmy는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그녀석과 얘기를 하는 재미가 나를 그들의 세계로 몰입하게 하는 경험을 하게 만들었다. 그는 종종 걸음으로 나와 걸어가는 보조를 맞추느라 뛰어 걷기도 하고....때로는 나는 나란히 그의 고사리 손을 잡고 발자국을 떼기도 했었다. 둘이 손잡고 걷는 그림은 무척 한가롭고 평화로워 보였을 것이다. 나도 그런 기분이었었다.

"Grand Pa, I'm now getting tired a bit. I'm thirsty now"
"Me too, pain on my knuckle of right knee is killing me, but because of fun of talking with you on your future plan make me forget of that pain. I think you would be same feeling of not thinking of tired or thirsty just concentrating on walking,don't you?"
"Ya. you are right, I feel that way too". " We are now almost around the corner of finishing point where your Grandparents' condo is, so lets keep walking a little bit more,Timmy"

다 걷고나서 헤여질때, 내가 먼저 Timmy에게 offer해 보았다. " Timmy how did you like walking today? want to walking again tomorrow if you have a chance?"
Timmy의 대답 " I'll think about that because my feeling is still bad, so I probably skip school tomorrow and sleep over tonight at Grandparents. Than I can do probably with you".
내가 대답했다."OK, maybe see you tomorrow. bye Timmy".
Timmy가 다시 말을 이었다. " I had a really good time with you today, learning and talking some issues and my future plan that I haven't told and discussed hardly with my grandpa".

어린 아이들은 절대로 꾸밈이 없다는것을 Timmy를 통해서 또한번 터득하고 배웠다. 그가 나이먹은 사내 였었다면, 할아버지와의 대화나 할아버지에 대한 생각을 있는 그대로 말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또 피곤하다거나 목마르다는 투정(?)을 참아냈을 것이다. 그모습이 내눈에는 천사가 따로 있을소냐?로 보였고, 그래서 부모가 되여 자식을 낳고, 다시 그자손들이 또 자식을 낳고..... 자식에게 못다한 사랑을 Grandchildren에게 쏟아 붓게 되는 그심정을 오늘 Timmy와 같이 걸으면서 깊이 느낀 것이다. Timmy는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렸을때 본이후로 몇년만에 오늘 처음 만났었다. 그때도 그의 Grandparents와 우리 부부가 같이 만났었다. 그후 오늘 처음 만났을때는, 그때 가르쳐 주었던 인사하는법을 까먹고 인사를 하지 않고 멀뚱멀뚱 쳐다만 보다가, Lunar가 '인사 해야지,Timmy?' Lunar가 시범을 보이자 그때야 생각이 난듯, 마지 못해 허리를 굽혀 고개를 꾸벅 했었을 정도로 약 2년 동안만에 처음 본것이다. 처음 걷기 시작할때는 할머니 손잡고 걷기도 하다가 뒤쳐지는 그의 손을 내가 잡고 같이 천천히 걸으면서 부터 앞서 가는 두 할머니들은 잊어 버리고 둘이 친구가 되여 서로 얘기를 나누기 시작하면서 부터 친구(?)됐었던 것이다.

세월이 흘러가는 그속에서 나도 어쩔수 없이, 먼저 손자 손녀를 본 친지들이 자랑스럽게 얘기를 할때는, 속으로 할짖이 없어 그런소리를 하는가?라고 조소를 했었던때가 바로 엇그제 같았는데, 어느새 나도 그들과 같이, 자손들에 대한 생각이,바뀌어져 있음을 오늘 Timmy를 통해 느끼면서, 나의 딸 아들은 언제 결혼하여 그들이 생산한 귀여운 아이들을 통하여 이러한 삶의 기쁨을 느끼게 될수 있을까?라는, 어쩌면 잡히지 않을것 같은 바램(?)을 가슴속에 담아 보기도 했다. 연령적으로는 이미 결혼 적령기를 훨씬 지나고도 남는 나이들인데.....두아이가 일찍 독립해서 살아가고 있기에 오히려 빨리 결혼할까봐 전전긍긍 하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완전히 빗나가고 만셈이다. 지지고 볶으고 하면서 같이 살았던라면.....지금쯤 손자 손녀가 생겨 그들의 해맑게 웃는 모습을 보면서, 또 같이 걸으면서 오늘 Timmy를 통하여 느꼈던, 삶을 살아야 하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체험하는 맛을 볼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상상도 해본다.

어제 Timmy가 애기한데로, 할머니댁에서 하룻밤을 자고난 아침에 McDonald's에서 다시 만났다. 어제 친구했었다고 스스럼 없이 재롱도 부리고, 뭐라고 쉴새없이 조잘 거렸다. 옆방에 있는 Play ground에서 놀기도하고....부지런히 왔다갔다 한다. 그의 동생과 그의 할아버지는 Timmy의 5살된 여자동생을 데리고 차로 먼저 집으로 떠나고 우리 일행은 걸어서 집에가기로 하고 걷기 시작했다. 어느새 Timmy는 나와 같이 걷기 시작했고, 두할머니들은 앞장서서 걸어가고 있었다. 어제 같이 걷는것을 보았기에 할머니들이 마음 편하게 앞장서서 가는것 같았다.

"Timmy, this house looks like very small and not maintained well".
" Ya. look next house is huge and beautiful,isn't it?".
"I think so, Timmy, look next one. Still under construction but looks like huge,don't you think so?"
"Ya huge".
"Timmy,this is the consulate of Poland, you should know what the consulate is, Timmy"
"Ya,(FranCois) Chopin was born in Poland" 엉뚱한 대답을 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깜짝 놀랐다. 이어린 나이에 피아노의 천재 쇼팽을 알고 있다니? 내가 Timmy 나이였을때는 아직 초등학교 입학하기 1년전쯤된 시기이다. 그런데 그어린아이가 알고 있다는것에 일종의 쇼킹이기도 했다. 살아가는 환경이 많이 좋아졌고, 따라서 아이들의 조기 교육이 있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고 있는것보다 많이, 더 넓게 아이들이 지식을 익혀 가고 있다는것을 Timmy를 통해 또 느낀 점이다. 내 친손자 손녀 였다면 더 깊은 애정이 갔을것 같은 느낌이 솔직히 들기도 했지만, 어쨌떤, Timmy를 통해서 미래의 친할아버지 공부를 내가 하고 있고, 즐기고 있다는것에, 오히려 친지 부부에게 고마움을 표시해야 될게 아닌가?라고 생각을 곰곰히 하기도했다.
"Chopin? What is that?"
"He is the famous pianist"
"How did you know him,Timmy?"
"From my piano lesson's"
"I see. who send you to piano lessons, probably Mommy, right?"
"Ya"

두할머니는 우리들 시야에서 사라진지 오래다. 굿이 할머니들과의 속도를 맞출필요없이 우리는 그렇게 고사리 같은 손을 잡고, 끝이 없는 대화를 나누면서, 때로는 Timmy가 어떤뜻을 갖고 질문을 하는지 잘 파악도 안되는 소리에, 되묻기도 하면서, 또 설명을 하면서, 발걸음은 계속됐다.
"I'm tired and thirsty. I wish I had a drink"
"Thirsty, do you?"
"I have one dollar in my pocket. I can buy a drink with this money"
"Can't you be patient? not far to get home. But I know there is a store under way home. If you really want it then..."
"Ya. Wow I see the store over there. let's go in"
가게로 들어가 Pop Cooler앞에 서서 7-up 한병을 손에 쥔다. 아마도 Timmy가 즐겨먹는 음료수중에 하나 같았다. 얼굴에 미소가 피어난다.
counter로 가서 올려놓고 계산을 하게 했다. 어떻게 하나 보면서. Cash를 보는 나이든 아주머니는 생김새로 보아 벌써 한국인임을 나는 느낄수 있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 둘이서 영어를 하는것을 들었기에 영어로 말을 했다.
"one dollar ninety nine cents please"
"Timmy one dollar's not enough to pay for, so I'll pay it for you, is it OK?. keep it yours"
가게를 나오면서, 한국말로 '고맙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요' 인사를 건넸더니, 조금은 놀라는 눈치로 '저는 다정하게 영어로 얘기 하시기에 할아버지와 손자가 나들이 나온모양이다라고 생각은 했었지만, 한국사람일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는데...고맙습니다 라고 인사를 하셨다.

Timmy는 병뚜껑을 못열어 낑낑 댈 정도로 아직은 어린 아이다. 그가 계속해서 열려고 노력하는것을 보면서 걸었다.
"Maybe too hard for you to open it. give me. I'll open it for you" 뚜껑을 열은 다음 그에게 건네 주었다. 우선 한모금 마시더니 금새 Thirsty가 없어졌나 보다. 마음에 여유가 생긴 모양이다.

"I'll give you my one dollar. I have to pay back"
"It's Ok. I bought it for you because I love you Timmy. Save your money for your future use. OK?'
"But I think it's not right make you pay for me"
"Timmy don't worry it. You are my grandson like since your grandpa's one of my best friends. If you want to
get other things, I would do that again, Timmy"
"Thanks so much"
이렇게 대답하면서도, 친 할아버지가 아니기에 Grandpa 단어는 항상 부치지 않는것이 조금은 나를 아쉽게 하기도 했다.

우리가 안보이자 앞서가던 두할머니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게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아마도 Timmy가 걱정이 됐던 모양이다. 여성들의 본능이었을 것이다. 가끔씩은 운동삼아 집에서 부터 McDonald's에 Lunar와 같이 걸을때는 멀어보이기도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했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Timmy와 같이 걸은 지금은 너무나 짧은 거리를 걸은것 같은 기분이다. 피곤하다고 조금 칭얼댔던 Timmy도 다음에 또 걷겠다고 먼저 약속을 하는것을 보면, 자기 친 할아버지와 또 다른 뭐를 나에게서 느꼈던 것 때문일거라고 생각을 했다. 친할머니도 우리 둘이서 같이 다정하게 쉴새 없이 얘기 하면서 걷는게 너무도 신기 하다고 했다. 할머니와 다른때 같이 걸을때는 조금 걷다가 칭얼대고, 투정부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자고 채근했었다고 한다. 또한 친 할아버지와는 별로 얘기를 하는것을 보지 못했었는데....라고 설명하면서.
이다음에 친손자 손녀가 생기면, 웅지아빠는 잘 할것 같아요 라고 한마디 더 부친다. Lunar도 의외라는듯이, 이렇게 같이 손잡고 걸으면서 칭얼대곤했던 아이와 먼길을 걷다니....웅지아빠도 늙긴 늙었다 보다라고 칭찬인지 아니면 철부지 어린꼬마와 친구가 된것이 안타까워 보여서 였는지? 그렇게 한마디 했다.

보통사람으로 태어나서 보통사람들이 평상적으로 살아가는 삶의 길을 나도 가야 하는데.....그러나 내속으로 난 자식들이지만, 이제는 장성하여 각자 자기들 갈길을 가고 있는데, 결혼 안했다고 Push할수는 없고, 또 절대로 밀어부칠 생각도 없다. 다만 곁에서 빨리 결혼해서 새끼도 낳고 안정된 생활을 하는 그모습을 보고 싶은 것뿐이다. 그런 손자 손녀들과 같이 딩굴고, 어울리고, 장난감 가게에서 쇼핑도 해보고 싶고....또 한해가 저물어가고 있다. 금년에도 아무런 결실을 보지 못하고 말이다. 아들 녀석은 오늘밤에 Business때문에 자동차로 미국 Boston으로 간다고 한다. 내생각으로는 결혼에 더 신경을 썼으면 좋으련만..... 아비의 이심정을 아들녀석은 절대로 이해 못할것이다. 그가 나의 위치에 서서 살아보기 전에는. 내가 그랬드시 말이다. Timmy가 어제 오늘 나의 삶의 참맛이 무엇인지를 잘 가르쳐 주어서 오히려 고마웠다.

Saturday, December 10, 2011

Stoney Creek Trail Walk - North Side Dec.10,2011.








Stoney Creek Trail Walk - North Side Dec.10,2011

어제밤 일기예보에서는 아침 기온이 영하 1도쯤 될거라고 해서, Trail Walk 하기에는 최적의 날씨겠구나라고 생각했었다. TV를 켜보면서 내눈과 귀를 의심 하지 않을수 없었다. 영하 7도를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은 아침 6시경. 마음이 조금은 무거워지기 시작한다. 지난달 아시아쪽 여행을 마치고 온후에 매주 Trail Walk하기로 결정했기에, 그렇치 않아도 홍보가 제대로 잘 안돼 참석인원이 Up and Down하기를 Yoyo처럼 하고 있는 판인데, 오늘 아침은 꽁꽁 얼어붙는 급강하의 기온이 회원들의 발길을 집안에 꼭 묶어둘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혼자 BackPack 을 메고 항상 모이는 Humberbay Park West의 주차장으로 발길을 옮기면서 주차장에 거의 다왔는데도, 차량은 거의 보이지 않는게 아닌가. 역시 내 예상데로 보여야할 회원들마져도 보이지 않는다. Lunar는 같이 준비를 하고 막 출발 하려고 하는데 언니로 부터 호출이 있어, 그곳으로 내가 타고갈 차를 끌고 가야만 했기에, 짧은 거리지만 나혼자 터벅터벅 주차장까지 걸어왔던 것이다. 회원중에 제일 연장자이신 R분께서 먼저와 계시다가 차안에서 나를 보고 문밖으로 나오시면서, 조금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시간이 다되였는데, 아무도 안보이니 어찌된 일인지요?" 하신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지요.", " 추우니까 차안으로 들어와서 기다리는게 좋겠네요." "예 그렇게 하겠읍니다."

L형 부부, 회원 C, R회원님 그리고 나를 포함한 5명이 오늘의 산행식구이다. 차한데로 5명이 타고 Stoney Creek 주차장에 당도 했을때는 정확히 10시였다. 윗분에게 간절한 마음을 담아 오늘의 산행을 무사히 마치게 해달라는 보고 겸 바램을 마친후 발길을 띄기 시작했다.
오늘은 지난번에 남쪽을 향해 걸었던 반대 방향, 즉 북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Main Trail까지 이어주는 Side Trail인 공원의 잔디에는 하얗게 서리가 내려 앉아 있었고, 잔듸위를 밟는 발자국소리는 살얼음위를 걸을때 나는 소리같이 바스락 거린다. 차거운 겨울 날씨가 모자를 쓰고 귀까지 막고, 손에는 장갑을 끼고 걷게 만들어버려 지난주와는 아주 다른 복장들이다.

언덕을 계속향하여 걸을때는 숨이차서 뿜어내는 입김이 마치 굴뚝의 연기처럼 하얗게 꼬리를 문다. 물기가 젖었던 길바닥의 한곳에는 칼날처럼 뾰쪽한 얼음날들이 지그재그로 이어져 있어 그위에 발자국을 남길때는 바스락 소리가 더 요란하다. 코끝이 조금은 벌거지고, 원치 않는 맑은 콧물도 나온다. 능선을 다올라 평지위를 걸을때는 여유가 있어, 오른쪽으로 아래를 내려다 보면서 걸었다. 민가들이 줄지어 늘어선 모습이 평화롭게 보인다. 가끔씩은 굴뚝으로부터 나오는 흰연기도 춤을 추면서 사라져가고....
이번에는 아직도 색갈은 파랗게 보이는 잔듸로 덮힌 골프장이 추위에 떠는 모습으로 눈에 들어온다. 여름철에는 군데군데 짝을 지어 클럽을 휘두르는 골퍼들이 바삐 움직였었는데.....오직 잔디만 아직 그대로 버티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것 같이 느껴졌다. Putting Green에는 흰색의 Vinyl이 덮혀져 있어 보는 눈을 더 춥고 을씨년 스럽게 만드는것 같다.

계곡의 깊은곳에는 지금도 개울물소리가 들리고, 폭포는 여전히 떨어지는 물을 흘려보내기도하고 일부는 안개로 변화시켜 흩날리고 있었다.
깊은 벼랑을 끼고 있는 Conservation Area를 걸으면서, 벼랑으로 이어지는 평지의 끝에는 보호용 울타리를 만들기위한 Foundation Post를 박아놓은 것을 볼수 있었다. 아마도 Trail Walk을 하는 사람들이 적은 계절을 이용하여 지금 작업을 하고 있는것으로 이해를 하고 싶었다. 며칠후면 의젓한 Chain link가 부착된 단단한 울타리가 제모습을 드리울것이다. 그때는 오늘보다는 덜 신경을 쓰면서 걸어도 바로 밑의 낭떠러지로 굴러 넘어질 염려는 없을 것이다. 겨울 바람에 휘몰리는 나목의 소리는 윙윙 마치 벌떼들이 날아갈때 들리는 소리같이 내귀에는 들린다. 주위 환경과는 상관없다는듯이 검정 Squirrel들만이 유유자적하면서 바삐 이나무 저나무로 오르 내리면서 뭔가를 찾아 헤매는 광경이, 도심지안에서 뭔가를 향해 바삐 움직이는 군중들을 연상케 한다. 그들이 찾고 있는 상수리와 도토리들이 내눈에는 보이지 않아 괜히 걱정도 된다. 과연 이시간에 내가 그들을 위해 걱정해야할 여유가 있는가? 숨을 헉헉 거리면서 걷는 주제에 말이다.

뭔가를 계속적으로 지속해서 행동에 옮긴다는것은 여간한 결단이 아니면 쉽지가 않다는것을 살아온 세월속에서 많이 터득하고 있다.
매주토요일 산행 하기로 몇몇회원들과 상의한후 결정을 하고 시행해온지 몇주가 지난 이시점에서 다시한번 이결정을 잘한것인지 아니면 해서는 안될 섣부른 결정을 한것인지에 대해 고민을 하지 않을수 없었다. 많은 가정주부들은 흔히 말하기를 손님을 초대하여 음식을 대접했는데, 맛있게 많이 먹어주지 않으면 괜히 섭섭하고, 혹시 음식을 잘못만들었기 때문은 아닐까?라고 마음을 쓰게 된다라는 얘기를 자주 듣고 했었다. 꼭 그런 기분이다. 모처럼 참가하셨던분들의 의견은 항상 즐거운 표정이고, 또 어떤분들은 이다음에 꼭 이코스를 다시 걷고 싶다는 의견을 말할때는 이분들이 산행의 의미를 터득하고 가는것 같아 기분이 좋았었다. Keep continuing 하기를 마음속에서 바래지만, 이어지는 비율은 극히 적다. TKPC의 특성상 독려를 하거나 왜 동참을 못하셨읍니까라고 채근할수는 더욱없다. 각자의 사정과 형편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경우는 갑자기 추워진 날씨가 원인이 된 경우가 많았으리라 믿어진다.

그러나 분명히 주장할수 있는 것은, Trail Walk을 하는것이 어느 Medicine을 먹으면서 몸을 보호 하려는 방법보다는 훨씬 효과적이라는점을 나는 강조하고 싶다. 오래전 다른 산행팀들과 어울려 산행을 할때 70 후반의 회원님이 해준말이 떠오른다. 그분은 어깨와 무릎에 관절이 와서 잘 걷지를 못하고 몸도 무거워 집안에서만 주로 시간을 보냈었는데, 어느 친지의 권유로 산행을 시작한지 6년차라고 하면서, 지금은 매주 토요일이 기다려 진다라고, 그래서 관절통의 고통을 거의 잊고 생활하고 있다라고 했었다. 산행을 할때는 항상 선두구룹에 속해서 걸었고, 또 많은 회원들이 끝까지 완주하지 않고 돌아서 오는데도 그분은 완주하곤 하는것을 지금도 나는 기억하고 있다. 나자신도 토요일 산행을 하고난후는 몸이 가벼워지는것을 확실히 느낀다. 그리고 굳었던 몸이 유연해지는 것을 동시에 같이 느낀다. 이러한 기분을 이핑게 저핑계를 대고 참석못하는 회원분들이 매주 걸으면서 피부로 느끼서 건강한 생활을 이어가는 모습들을 보고싶은 간절함이 항상 마음속에 있다.
건강한 생활속에서 건강한 생각이 떠오르고 남의 입장이 되여서 생각해 볼수 있는 여유도 갖게 되는것 아닐까?

정확히 3시간반을 걸었다. 약 15-16킬로쯤 걸은것으로 계산된다. 피곤해야할 몸의 컨디션은 가볍게만 느껴진다. 체험이 없는 사람들은 글로 표현안되는 이기분을 알거나 느낄리가 절대로 없다. 아니 불가능하다. 오늘 참석한 회원들은 이런면에서 행운아들임에 틀림없을것 같다.

McDonald's restaurant 커피의 향과 맛에 푹빠져 이제는 Trail Walk을 마치고 귀가하는길에는 꼭 들려가는 코스되다시피한다. 오늘도 예외가 아니다. 값도 Tim Horton보다 훨씬 저렴하다. 커피잔을 테이블에 놓고, 살아온 얘기들, 걸으면서 못다한 얘기들, 여행얘기들, 고국방문했을때 일어났던 얘기들...... 끝이 없이 이어지는 그 담소에서 못느꼈던 정을 더 느끼고, Fellowship은 더 진해짐을 오늘도 느꼈다. 이맛에 별수 없이 또 토요일을 기다리게 되는가 보다. 열성적으로 걷고 계시는 연로하신 그분의 하신 말씀이 다시 머리에 떠올려진다. 감사.

Tuesday, December 06, 2011

왜 미국과의 FTA는 안된다고 개거품을 품어대는가?

왜 미국과의 FTA는 안된다고 개거품을 품어대는가? 미국이라는 나라가 그렇게 못믿을 적대국인가? 한심한 사람들....

며칠전 인터넷을 통해 "백 지연"의 끝장 토론을 100 분동안 지켜 본일이 있다. 내용은 한미 FTA 비준조약 국회 통과와 MB의 최종 결재로 실행단계에 들어간것에 대한 찬반하는 쪽의 인사들이 나와서 대담하는 내용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FTA를 적극 찬성하는 쪽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조국 대한민국은 수출해서 먹고 사는 나라이기 때문에 협상내용에서 49%을 잃고 51%를 유리하게 챙길수 있다면 무조건 조약 체결해야 하고, 최악의 경우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득실이 Even 이라해도 해야 한다는 Concept을 믿는 사람이다. 그래야 일자리를 창출해서 국민들이 삶을 유지할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반대측의 의견 개진을 보면, 극히 지협적이어서, 이는 마치 넓은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한그루를 보면서 넓은 숲을 논하는 소아적 좀더 실질적으로 표현 한다면, 요즘 한창 조국 대한민국의 정치판이나, 종북주의자들의 대명사가 되여 버린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기위해 억지를 정당화 시킬려는 철부지 답답함만을 토론내내 느꼈었다.
한분은 'FTA를 시행함으로써, 자료에 의하면 35만명의 일자리를 창출하게 된다"라는 내용은 새빨간 거짖말이라고 하면서, 자기계산으로는 그숫자의 일자리를 창출 하기위해서는 약 300년이 걸린다라는 얘기를 서슴없이 토해 내는 모습을 보면서..... 지성을 갗춘 대학교수라는 분의 생각이 왜 저렇게 삐툴어져 버렸을까?를 기억속에 담아 두었고,
또 이에 반론하는, 즉 찬성하는측의 교수분은 '그숫자는 꼭 일자리 창출만을 의미하는게 아니고, 그만큼의 실질적 소득의 가치를 얻게되는것을 의미하는 내용'이라고 설명을 해 주었다.

또 반대측의 ISD 불합리성에 대한 캐나다와 미국이 마찰을 빗엇던 사례가 설명돼기도 했다.
내용은 자동차에 들어가는 부품을 값에 상관없이 미국산 부품의 반입을 불허했기 때문에 캐나다측에서 엄청난 액수의 배상을 미국에 지불했다는점을 들어, 약자가 강자의 제소에 당해낼 힘이 없다는식으로 몰아 부치면서, ISD가 독소조항임을 강조 해댔다. 처음 그설명을 들었을때는, 강자가 약자를 협약에 관계없이 힘으로 몰아 부치는것으로 이해를 하면서도 그이유가 궁금해졌다. 이어서 배상의 이유를 찬성하는쪽에서 설명해주었다. 내용은, 캐나다측에서 제작 생산하는 캐나다 업체를 보호하기위해 동종의 미국산 부품의 캐나다 진입을 막은것은 엄연한 Agreement에 나타나 있는 평등의 경쟁원칙을 위반하는것이어서 배상을 하게된것이라는 설명을 듣고서, 배상의 이유를 알게 됨과 동시에, 반대측이 그이유를 모를리 없었을텐데, 시청자들의 귀를 막고 눈을 가리는식으로 앞뒤설명은 다 빼버리고 결과만 애기해준 그저의가 무엇을 뜻하는지? 그들에게 우롱당하는 심한 불쾌감을 느끼기도 했었다.

요즘은 고국 한국이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로 위치가 격상되여 세계에 좋은 선례를 남기고 있다.
만약에 한국의 원조를 받고 잘살게된 나라가, 한국을 고마워 하기보다는 나쁜점만 들추면서 한국을 비난하고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온다면, 그 반응은 어떨까?를 상상해 보았다. 아마도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 배은망덕한 놈들이다' 라는 등등의 비난과 욕설로 그나라를 성토할것이다. 수혜국으로 부터 고마움의 찬사는 못들어도 최소한 비난하는 소리는 안들었으면 하는 마음일 것이다.

미국에 대한 과민 반응은 한국이 민주화를 부르짖으면서 비례적으로 증폭되여 나타나는것으로 이해된다. 미국에 관한 이슈에 대해서는 neutral position에서 생각지 못하고, 일단은 반대를 하고 보는식으로 인식이 되여 있는것같다. 반대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개인적으로 미국과 깊은 연관을, 일종의 안전장치로, 맺고 있는 이중적인 사람들임을 나는 잘알고있다. 그러면서도 입만 열만 거품을 품어 대면서 반미하는 유명한 정치꾼들, 연예인들, 먹물많이 먹은 사람들 등등...미국과의 관계가 앞으로도 협조적으로, 상생하기를 바라는 대다수의 국민들은 이를 지켜보면서 생업에 열중하고 있는데, 소수의 좌파와 종북세력들이, 교묘하게 시끄럽게 북치고 장구치면서 아직 세상의 살아가는 이치를 깊이 깨닫지 못하고 있는 젊은이들을 선동하여 마치 전체국민의 의견인양 떠들어대는 위험한 짖을 계속하고 있다.

미국은 한국과 혈맹의 관계를, 광복이후 맺어, 공산침략자들로 부터 방패막이를 해왔고, 앞으로도 해갈것이다. 소요된 경비는 천문학적 숫자이며, 수만병의 미군들이 한국의 최전선에서 젊음을 바쳐, 오늘과 같이 잘사는, 민주화된 한국을 건설하는데 도와왔다고 믿는다. 희생된 미군의 숫자또한 엄청나다. 그들이 한국에 주재하면서, 한국의 국토방위뿐만이 아니고, 직 간접으로 한국경제의 초석을 닦는데 기여한 공로는, 특히나 유교사상이 삶의 밑바닥에 깊이 깔려있는 한국사람들의 정서를 감안한다면, 절대로 잊어서는 안되고 서로 공존하도록 노력하고 감사해야 마땅하다.

좌파나 공산주의자들의 본성은, 필요할때는 서로협조하고 같은 행동을 하나, 그가치가 다 하면 냉혈한이 되여 제거해 버린다. 그러한 사례는 역사를 통해서, 광복이후 북쪽에서 자행된 자료를 보면 확연히 알수 있고, 또 현재도 진행형에 있다. 좌파나 종북자들은 그내용을 잘 알기에, 마지막에 가서는 제거대상에서 빠져 볼려고, 복잡한 서울도심의 거리를 점령하여 파괴를 일삼는 데모를 하면서, 그것도 모자라 이를 막으려한, 공권력의 최후보루인 경찰간부를 기습하여 때려눕히는 패악을 저지르고 있는것같다. 아마도 그러한 그들의 영웅적(?)행동이 그쪽에 영상으로 잘보여져, 최고의 충성을 하고 있다는것으로 보여 지기를 깊이 염원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단언컨데 절대로 그들생각데로는 안될것이다. 왜냐면, 좌파나 종북세력들은 대부분이 이남출신들이기에, 출신성분에서 제외대상이 되기 때문임을 직시해야 할것이다.

잘살아 보겠다고 주야로 쉬지도 않고 열심히 건설의 횃불을 켜서 일한 덕분에 오늘의 조국 대한민국이 경제적으로 우뚝서서 행진하고 있는 모습을 멀리 태평양 건너에서 바라보고 있을때는 더불어 만족감을 깊이 느낀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우리의 선배나 동료들이 활발하게 세계시장을 누비고 다니면서 수출과 수입을 했기에 가능한것이었다. 그러나 갈수록 경쟁이 심하고 Trading Barrier가높게 드리워져, 이를 헤쳐나가기위한 수단의 하나로 수출입 의존도가 높은 국가들과의 FTA를 체결해서 서로의 살길을 찾아 헤매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본다. 남미의 여러나라와 그리고 EU연합과 FTA를 체결했고, 이번에 미국과도 같은 내용의 협정을 맺은 것이다. EU FTA와 미국 FTA의 내용을 나름데로 읽어보기도 했다. 골격은 다 같은 내용인데, 왜 유독 미국은 안된다고 야단인가?

서구유럽이나 다른 대륙에서는, 북쪽에서 저지른 연평도포격사건, 천안함격침 사건, KAL기 폭파사건같은 패륜적인 행위를 저질러도, 미국만큼 민감하게 대처하거나 비난하는 경우는 없거나 심하지도 않다고 볼수있다. 따라서 그곳에 진출해 있는 고국의 무역업자나, 학자들, 민간인들의 접속이 비교적 자유롭게 이루어질수 있는 여건이 자연적으로 형성되여 있기에 FTA를 그들나라들과 체결해도 상관치 않으나, 반공을 하고 있는 미국과 자유무역 협정을 맺으면, 그만큼 좌파세력이나 종북자들의 활동반경이 좁아질 우려가 많아질것이기에 매일같이 선동으로 서울의 도심지를 어지럽히고 있다고 생각된다.

북쪽의 그들에게는 '배은망덕'이라는 사자성어를 수식어로 부쳐주는것 자체가 아깝다고 생각된다. 미국과 혈맹의 관계를 오랫동안 맺어오면서, 어찌 티격태격 마찰이 없었을수 없었겠는가마는, 이는 이성을 갖인 인간들이기에 어쩌면 당연한 과정이리고 믿는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더 깊이 알고 이해하고 서로 돕고, 신의를 쌓아왔기에 더불어 잘살아가는 최선의 방법을 찾아 오늘에 이르렀다고 믿는다. 북쪽은 그반대였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단물이 다 빠지면 뱉어내듯, 이용가치가 다하면, 그들은 형제고, 친척이고 심복이고간에 가차없이 처단해 버렸음을, 그래서 Secluded hemisphere라고 별명이 부쳐진, 이해못할 존재가 되버린 그들에게 쇠뇌된 남쪽의 일부 종북, 좌파세력들을 비난하기에 앞서 측은한 마음이 앞선다. 그들 자신은 물론이고, 거슬러 올라가 그들의 부모와 친척들이 전란후 어려운때에 미국의 혜택을 참으로 많이 입었음을 부인할수는 없을 것이다. 은혜를 입었으면 최소한 그은혜를 되갚지는 못할지언정, 헐뜯고 훼방하지는 말아야 최소한 인간적 도리를 하는것이 아닐까?

FTA는 어려워져만 가는 세계시장에서 서로 수출입하여, 결과적으로는 양질의 좋은 물건들을 당사국민들에게 더 저렴하게 공급하여 삶의 질을 높이고져 함에 있는것이 목적임을 알고 있는이상, 다른 나라와 FTA Agreement를 맺을때에 환영했던것 처럼, 모두가 현실을 직시하고 받아들여 win-win 작전에 동참해야 한다고 믿는다.

한국의 직업별 인구분포도를 보면, 오직 전체국민의 6%미만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고 한다. FTA하게 된다면 밀려드는 값싼 미국산 쌀 때문에 농민들이 망하게 된다고 좌파, 종북주의자들은 떠들어 대면서 FTA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한다. 그들에게 해주고 싶은 간절한, Simple한 말이 있다. " 나무를 보지말고, 전체를 이루고 있는 숲을 보라"라고. 농민들이 수확한 밀과 쌀로 한국전체국민을 먹일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절대 아니다.

모든 가치를, 물량을 재는데는 저울이나 잣대를 사용한다. 미국과 FTA를 하는데도, 지금까지 사용해온 그잣대를, 여기에도 대입하여 정확히 측정해야 한다. Double standard measurement는 절대로 안된다.
DJ와 노무현정권은 북쪽과 남북 평화해결을 한답시고 그들식의 FTA를 체결하고, 국민들 알게 모르게 북쪽의 Regime에게 수십억 달러의 현금과 곡물을 바쳤다. 그때에도 다수의 국민들은 조용히 지켜 보았고, 좌파와 종북세력들은 마치 금방 남북평화 통일이라도 될것처럼 찬양일색으로 환영 했었다. 그결과는 어떤 것이었었나?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거처럼, 그들은 국민들의 바라는 염원을 져 버리고 대신에 천안함폭침사건, 연평도포격사건, 금강산 관광객 총살행위, 연평해전등의 악마적인 살인행위로 그은혜를 갚았고, 앞으로도 계속 만행을 저지를것으로 예상된다. MB정부는 이것을 막기위한 조치를 취해왔는데, 종북세력및 좌파들에게는 망국적 행위로 보여졌던것 같다. 그들은 이런식으로 국제간의 거래에서 Double standard 를 거침없이 사용하면서 국민을 위협속으로 몰아가는데 혈안이 되여있다. 이것이 소위 그들이 말하는 이북과의 FTA였던가? 미국이라는 나라가 외교관계수립이후로 한번이라도 한국을, 이북의 Regime처럼 종속국가로 만들려고 흉계를 꾸몄던 적이 있었던가? 한미 FTA에 대한 이의를 더이상은 입밖에 내지 못하도록 당국은 철저히 사전조치하여, 국민들이 편안히 생업에 종사할수 있도록 최선의 방법을 택하고 실행해야 한다.

태평양 건너 멀리 북미대륙 북쪽에서 오랫동안 평범하게 생업에 종사해오면서 살아가는, 한초로의 교민이 한미 FTA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느끼고, 바라는 마음을 표현해 본것이다. 감사.

http://www.ahaidea.com/video/player.asp?idx=56511

http://www.brookings.edu/opinions/2010/10_korea_eu_lee.aspx

http://www.eubusiness.com/news-eu/1247476625.92

http://www.ustr.gov/trade-agreements/free-trade-agreements/korus-fta

Thursday, December 01, 2011

고국 한국의 종편 TV 방송 개국을 축하한다.

좌편향으로 많이 기울고 있는듯한 고국의 TV방송에 맞서, 좀더 신선하고, 실질적인 현장보고와
좌경및 진보성향에 맞서 보수와 진실만을 국민들에게 보도하겠다는 캐치 프레이즈를 걸고, 드디어 4개의 신문사들이 일제히 같은날 같은 시각에 첫전파를 띄운것이다.

동아일보는 군정이 들어서면서 강제 문을 닫게된 동아방송의 옛모습을 새로 개국한 TV방송을 통해 그맛과 정취 그리고 국민들이 알아야할 모든것을, 중앙일보 또한 같은 이치로 옛 TBC TV 방송국의 문을 닫아야만 했던 그아픔을 씻고, 5/18당시 광주사건의 진상을 카메라에 담고서도 방송을 하지 못한채 방송국 문을 닫은지 30여년이 지난 오늘, 창고속에 처박아 두었던, 참옥상을 담은 카메라의 필름을 이제는 개국의 첫작품으로 국민들에게 보여준다고 했다. 조선일보 또한 좌파와 진보에 맞서 왜 보수와 정치적 방향이 필요한것인가를 국민들에게 보여주기위해, 첫번째 대담자로 박근혜 한나라당의원을 선정, 대담 내용을 국민들에게 전파를 보냈다. 매일경제신문도 기대가 많이 된다.

정부에서 종편방송의 개국을 허가한 그진짜 내막은 무엇일까? 이들의 방송국 개국을 같은 배를 타고 간다고 할수 있는 다른 언론사들사들은 고운 시선으로 보는것 같지만은 아닌것을 보기도 했다. 내용은 차치하고, 첫개국의 전파를 내보내면서 방송화면이 끊어지고, Distortion 된것 부터가 준비가 없이 개국을 한 저의가 뭔가를 따지듯 하는듯한 기사를 쏟아냈었다. 조선일보사의 TV개국에 얼굴을 보였던 김연아도 뒷맛이 개운치 않은 표정으로 불만의 뜻을 나타냈다고 한다. 원래 대담을 섭외 할때의 근본뜻과 달리 자기를 이용한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오래전 KBS,MBC나 SBS방송들이 개국할때는 오늘처럼 비난의 글이나 방송은 전연 없었고, 모든 국민들이 덩달아 기분이 들떠 있어, 축하해주고 시선을 TV화면에 고정 시키다 시피 했었던것으로 기억하고 있는것에 비하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그때는 지금처럼 보수니 진보니 그런 파당도 없었고, 오직 순수한 시청자로서의 맑은 눈동자들만 있었다.

개국한 4곳의 TV방송국의 선전을 기대해 본다. 불과 40여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당시의 시대상을 거울에 비쳐 보면,지금은 조국 대한민국은 용이 된것이나 마찬가지다. 용이 되기까지의 밑바탕을, foundation을 든든하게 만들어준 당시의 위정자에게 많은 빛을 진자들은 누구일까? 배은망덕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대상자들이 누구인던간에 말이다. 당시의 시대상황을 오늘의 시대상에 나타난 잣대를 맞추어 측량할려고 한다면, 그자들은 민주주의라는 가면을 쓴 이시대의 악마들이라고 나는 정의 하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한글 창제를 하신 세종대왕을 우리는 민족의 영웅, 성군으로 추앙한다. 세종대왕을 오늘의 시대와 비교한다면, 그는 성군은 커녕 국민을 마치 자기의 물건인양, 마음데로 취급했던 독재자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시대는 그렇게 하는게 보편타당성이 있고, 현명했었던 것이다. 배고픈 허리띠를 졸라매고, 잘사는 나라를 건설하기위해 때로는 자유를 유보했었고, 때로는 정치적으로 반대하는 정치꾼들을 억압했던것은 당시의 시대상으로 봤을때, 잘사는 국가를 건설하기위해 다른 방법이 있을수 없었다는것을 지금 50대 이후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다 잘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속다르고 겉다르게 행동하는 위선자들... 이들의 행동을 새로 개국한 방송국들이 깊이 파헤쳐 진실을 국민들에게 알려 줄것을 기대 하기에 축복하지 않을수 없다.





앞으로의 전망을 점쳐 본다면, 색갈이 더 확연히 다르게 국민들에게, 시청자들에게 보여질것 같다.


http://news.donga.com/Culture/New/3/07/20111201/42274557/1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12/01/2011120102109.html?news_top

http://live.joinsmsn.com/issue/issue.asp?is_idx=2077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1112/h2011120121251786330.htm

http://news.mk.co.kr/newsRead.php?sc=30100049&cm=%BC%BC%C4%C1%20%C5%E9&year=2011&no=776099&selFlag=&relatedcode=000100105&wonNo=&sID=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