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August 28, 2011

자신의 무게에 부러진 고추branch는 결실을 의미 하지만...




부러진 고추가지는 결실을 의미 하지만.....( Aug 28th,2011)


며칠전 까지만 해도 Scorching하던 날씨가 어느새 변하여 결실을 재촉하는 쪽으로 줄달음치고 있음을, 아침마다 이슬이 잔뜩 맺혀있는 잔듸를 밟으면서, 여름내내 정성들여 물주고 비료주면서 가꾸었던 오이, 토마토, 들깨, 쥬끼니 그리고 고추들을 보고 그들과 인사하기위해 뒷뜰로 발걸음을 옮기는데서 부터 하루의 일과가 시작되곤 했었던 일상을 오늘 아침에도 하면서, 눈으로 확연히 느낄수 있었다.

이번 여름내내 아침 저녁으로 그들에게 물을 주면서, 특히 오이는 초기에 들토끼가 순을 다 잘라버려 오직 한그루만 살아 남아서 숫자를 셀수 없을 정도로 틈만 나면 물을 퍼주곤 했는데, 그성의에 감탄 했는지(?) 하루에 평균 2개 정도를 땄었고, 11개의 고추나무에서 주렁주렁 매달린 고추는, 그중에서 큰것만 밥상에 올릴만큼씩 따서 먹곤 했었다. 오이는 한입물어 씹으면 씹을수록 아삭아삭하고 단맛이 더해, 먹으면서도 고마움을 더 생각하게 했었고, 고추 또한 풋풋한 그맛은 Lunar가 그의 독특한 Recipe로 만든 된장에 찍어 먹는 풍성함을 식사를 할때마다 느끼면서, 감히 농부들이 여름내내 땡볕아래서, 자식을 기르듯, 정성들여 가꾸고 기른 곡식들을 거두어 들이는 그심정을 어렴푸시나마 감히 느낄수 있을것 같은 기분이다.

오늘 아침의 이슬은 더 차겁게 느껴지고 많은것 같다. 평상시 신었던 운동화 대신에, 겨울에 눈속을 거닐때 사용했던 목이 긴 장화를 신고 이슬을 헤치면서 그들에게, 이제는 일상(?)이 되여버린, 아침 인사를 하러 갔다. 양손에는 오이에게 줄 조그만 물통을 들고서. 오늘 아침의 느낌은 좀 미안한 생각이 든다. 만약에 그들도 우리처럼 느낌을 갖고 있다면, " 저날강도가 또 나타났네. 여름내내 매일 아침 내새끼들을 훔져 가고도....지금 매달려 있는 것들은 꼭 지켜서 잘영글게 해서 씨를 받아 내년에 후손들이 태어나게 해야 하는데...."라고 궁시렁 거리면서 나를 응시하고 있는것 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어제는 오이를 씹으면서 껍질이 두꺼워지고 있음을 느꼈고, 고추는 앞니로 한입 자르는데 그동안 부드러웠던 감각이 딴딴해졌음을 느꼈고, 파랗게 주렁주렁 매달려서, 그자체의 무게에 가지가 늘어져 바닥에 닿아 있는 토마토들이 어느새 옅은 핑크빛으로 변해 있음을 본다. 느낌이 둔한 내가 아직 느끼지 못하고 지내온 사이, 그들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다음단계의 수순을 밟아 다음세대를 준비하고 있어왔던 것이다.

그들의 비난(?)과는 상관없이 나는 나데로 계산에 맞추어 이놈들이 더늙기(?)전에, 신선하게 식탁에 올리려는 마음으로 이아침에도 그들에게 다가가서, 사냥감을 고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인간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것에 비유한다면, 그들은 방어방법을 찾을 것이고, 나는 그들을 공격하여 먹이감을 찾는......

오이가 밤사이 더 자라 2개를 사냥했고 고추는 크면서도 아직 파랗게 매달려 있는놈으로 6개를 수확했다. 토마토는 반대로 더 많이 Pinky로 변한것중에서 4개를 땃다. 밥상에서 그들을 입안에 넣으면서 어제보다 다른맛의 감각을 확실히 느낄수 있었다. 오이의 껍질이 씹힐때 조금 두꺼워 졌음을 느꼈고, 고추는 씹히는 맛이 더 단단하면서 뚱뚱해졌고, 그안의 씨들도 윤곽이 뚜렷해졌음을 감지했고 토마토는 잘익은 제맛을 선사해 주었다.

쥬끼니도 어저깨 5개를 따서 앞 뒷집의 이웃들에게도 나누어 주었고 일부는 된장찌개에 넣고 끓여서 배를 즐겁게 했었다. 오늘은 하늘도 맑고 높아 보인다. 멀리 흰구름 몇점이 떠 있는게 마치 신비에 쌓인 높은 산봉우리를 연상케 하고 있다. 여름에는 볼수 없었던, 높이 떠 있는 저 상상의 산봉우리도 결실의 계절이 오고 있는 표시이고, 조금전에 나와 한판 씨름(?)한 오이, 고추, 토마토, 쮸끼니들도 계절의 변화에 신속히 대쳐하고 있음을 느꼈지만, 나는 감각이 느린게 확실하게 느낀다. 이들을 만져보고, 먹어본후에야 계절이 바뀌어지고 있음을 깨닫고 있으니 말이다.

이들의 삶의 Cycle과 나를 포함한 인간들의 살의 Cycle의 원리는 같다고 생각되지만, 80배 이상을 더 오래사는 나는 이들보다 80배 이상 더 센스있게 살아야 하나 실상은 그반대로 80배 이상 둔한것 아닐까? 순리에 따라 이들 처럼 순응하면서 삶을 즐긴다면 그런 우둔함이 덜할수도 있을텐데....역으로 이를 꺽을려고, 정복할려는 욕심의 결과 때문일것으로 어렴푸시 느껴본다.

한구루의 고추나무에서 사고가 발생한것이 발견됐다. 건장한 가지인데, 거기에 매달린 고추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부러져 땅바닥에 걸쳐 있는 것이다. 그들 나름데로 신경이 발달되여 있을텐데..... 얼마나 아플까? 분명 괴롭다는 신호를 보냈을법도 한데, 우둔한 나는 그것을 듣지도 보지도 못하고 꺽어진 가지를 주어들고 몇개의 고추가 매달려 있나 숫자를 세어보는 재미(?)를 보고있다. 우리 인간으로 치면 건장한 사내가 팔이나 다리를 잘못하여 부러뜨린격일텐데. 사람살려달라고 아우성 소리가 우선 귀창이 떨어질듯이 들릴것이고, 그다음에는 앰블런스가 달려와서, 바로 병원으로 달려가서 X-ray를 찌고, 전문의가 달라붙어 봉합수술을 하고, 다시 수술부분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Plaster cast를 하는등의 난리 법석을 피웠을것이다. 그러나 나는 엉뚱하게도 지금 꺽어진 가지를 들고 매달린 고추를 응시 하면서 종종 썰어서 된장찌개에 넣을까? 아니면 고추장에 찍어서 밥하고 먹을까?를 생각하고 있다. 이런 Egoism이 내마음속에 흐르고 있다니......그러니 세상이 시끄러울수 밖에.

Tuesday, August 23, 2011

Jack Layton의 서거(Aug 22,2011)


Jack Layton의 서거(Aug 22,2011)를 보면서, 부질없는 인생살이라는것을 더 깊이 느낀다.

평소에는 아비인 내가 Text message를 보내야 겨우 답장을 하는식으로 연락을 하고 있던 아들녀석이 오전 10시경에 Text message를 보내왔다. 분명히 어떤 일이 벌어졌거나 아니면 내가 알아야할 뉴스가 있는것 아니겠는가?라고 생각하면서 내용을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예측한 그대로 였다.

"Dad. Tell Mom kimchi is really good. Did you hear about Jack Layton?"

엄마가 만들어준 김치는 겉으로 하는 인사치례였고, NDP당수 Jack Layton의 서거 소식을 알려 줄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Cottage 아랫층에 세들어 살고 있는 Randy에게 Jack Layton을 물었더니, 오늘 새벽 4;45분경 세상을 떠났다는 뉴스를 래디오에서 들었노라고 전해준다.

카테지에는 TV도 있지만 Cable이 연결안돼 먹통이고, 모양은 찌그러지고 cassette뚜껑도 없는 래디오가 있어서 가끔씩은 노래와 뉴스를 듣고 했지만, 요며칠 사이는 그것 마져도 꺼놓고 있었기에 뉴스를 못들었던 것이다. 앞마당에 쌓아놓은 Fire wood를 사러온 사람들이 신호를 해도 행여나 래디오소리 때문에 우리가 못들을까봐서, Lunar가 꺼놓곤 해왔기 때문에 바깥세상의 뉴스통로는, 자동차를 타면 자동으로 나오게 되여있는 AM680을 듣는것 외에는, 거의 막혀 지내는 셈이다. 바깥세상과 접촉이 뜸하게 되면, 좋은점도 있고, 나쁜점도 있고....그래도 결론은 바깥세상과 연결되여 있어야 정상적인 생활인이 될수 있다는 나의 지론에는 아직까지는 변함이 없다.

우선 그의 운명에 대해 깊은 조의를 표하고 싶다. 그의 정치철학은 내가 생각하는것과는 상반되는 정치인이었기에 선거때마다 그가 속한 정당에 표를 던진일은 없어왔고, 앞으로 그럴것이지만, 똑똑하고 나름데로 신념이 있고 유머를 잃지않았던 유망한 정치인을 잃었다는것에 나 개인적으로는 무척 아깝다. 이제 갖 61세를 맞이한 아직 젊은 청년 같은 패기가 왕성한 그였었는데, 금년도 이른봄 연방선거 유세때에도 그는 지팡이를 짚고 어려운 발걸음을 하면서 유세 하는 그를 보면서 의아해 했었는데, 그때 뉴스에 의하면 넘어져서 hip을 다쳐 현재 회복중에 있는 중이라고만 발표했었다. 선거가 끝나고 뚜껑을 열어 보았을때, 결과를 보고 캐나다인들 모두가 다 놀랐을 정도로, 선거전 제1야당이었던, Michael Ignatieff가 이끄는 자유당을 압도적으로 물리치고 NDP가 제1야당으로 부상하는 큰 업적을 일구어낸 그를 다시 보면서, 역시 인물이구나 라고 다시 보게 됐었다. 그후 불과 몇개월이 안되여 TV화면에 비친 그의 상태에서 뭔가 잘못되여 가고 있구나 라고 생각을 하면서 지켜 보았었는데 약 한달전,즉 7월 25일날, 그가 암치료 때문에 임시로 당수직을, 쾌백주에서 당선된 초선의원출신에게 넘겨준다고 발표하고 사람들의 시선에서 멀어졌었는데, 오늘 아침 이렇게 참담하고 아까운 뉴스를 접하고 만것이다.

그는 Montreal소재 McGill대학을 다녔으녀, 19세때 같은 학교에 다녔던 여자친구 Sally Halford와 전격 결혼을 해서 두아이 Sarah, Michael이 있고, 딸에 대한 얘기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아들은 현재 그의 새엄마가 시의원으로 있을때의 토론토 다운타운의 선거구를 물려받아 현재 시의원으로 재직중에 있다.

그는 1985년에 이혼하고, 현재의 부인, 당시에는 School Trustee였던, Olivia Chow와 재혼하여, 같이 정치인 생활을 해오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동시에 시의원으로, 2003년에는 연방 NDP당수 Alexa McDonough여사가 물러나자, 경선에서 당수로 선출되여, 그의 부인 Oivia Chow와 같이 연방의원에 도전하여 나란히 Ottawa에 입성 했었다. 당수로 선출당시 NDP 연방의원수는 13명이었었고, 그의 눈부신 활동으로 2004년선거에선 19명이, 그리고 금년도 5월에 실시된 연방선거에서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선전하여 103명의 의원을 당선시키는 기염을 토했었다.

그는 1972년에 토론토로 이주하여 Ryerson College에서 Urban Politic을 강의 하면서, Ph.D자격도 획득하는 노력파이기도 했다. 그후 1982년부터 정치에 뛰어들어 시의원직을 시작으로 오늘에 이르렀었다.

그의 집안은 정치가의 기질을 타고 난것 같다. 그의 할아버지 Gilbert Layton은 퀘백주의 Nationale 정부의 Maurice Dupessis 수상이 이끄는 내각에서 장관을 지냈었고, 그의 아버지 Robert Layton은,Brian Mulorney가 이끄는 연방 보수당 내각에서 동력 자원부 장관을 오래 했었다.

그의 투병생활은 처음에 Prostate Cancer수술을 받고, 요양하면서 정치생활을 겸하면서, 암과의 싸움에서꼭이기고 말것이라고 사람들에게 확신을 심어주는 의지를 보여왔었으나, 뜻하지 않게 엉덩이 뼈가 부러지는 사고가 발생하여, 지난번 선거때는 Cane에 의지하면서 유세를 했었다.

Harper연방정부 수상은 그의 장례식을 국장(State Funeral)으로 치를 것이라고 발표 했으며, 연방 정부 청사와 토론톤시 청사에서는 그의 서거소식이후 조기를 계양하고 있으며, 토론토시는 그의 장례식을 Roy Thompson Hall에서 치르기위해 현재 작업중에 있다라고 어제 오후 늦게 발표 했다.

그가 연방정치무대에 뛰어들어 활동한 기간은 길다고는 볼수 없지만, 그의 독특한 정치철학에서 나온 NDP사상은 Pro이든 Con이든 많은 캐나다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준것만은 확실한것 같다. 서민들 특히 국가의 은덕을 많이입고 사는 사람들로부터 그는 천사와 같은 존재로 여겨졌고, 존경을 받아 왔었지만, 정치적 로선이 다른 정적들도 그의 서거에는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하면서, 그가 없어진 정치무대에서 앞으로는 누가 그를 대신하여 정부에, 국민들에게 꼭 필요한 쓴소리를 해줄것인가?를 생각하면서 그의 업적을 기리는것 같다.

사람이 살인을 하면 살인범은 꼭 그대가를 받게 되여 있다. 국가마다 죄에 대한 처벌은 다르지만, 심한 경우는 사형까지 받는다. 캐나다는 종신형이 최고형이라서 사형은 없다. 그리고 이러한 질서를 지키기위해 국가는 엄청난 돈을 쏟아 붙는다. 많은 사람들이 질병의 공격, 특히 암의 공격을 받을시에는 거의 사망하고 만다. 이암(Cancer)이라는 범인을 잡기위한 노력을, 국가나 관련단체가 살인범 하나를 잡기위해 쏟아 붓는 예산의 단 몇분의 일만이라도 투자하고 노력한다면, 살인범 암을 어렵지 않게 잡아내여 세상에서 격리 시킬만도 할것 같은데.....국가나 세상은 이분야에는 너무나 관대한것 같다는 생각이, 정치적 풍운아 Jack Layton의 서거를 겪으면서 느낀다.

Jack Layton, 당신은 이제부터 고통도 없고, 질투도 시기도 없고, 오직 웃음만이 흐르고 걱정없는 다른세상에서 삶을 시작하게 됐으니, 세상짐은 남은 사람들에게 모두 남겨두고, 안녕히 가십시요. 머지 않아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그렇게 당신이 간 새로운 나라로 갈것이요. 부탁이 있다면 우리를 위해 삶의 터전을 좀 여유있게 잡아 주시요라는 말을 인사로 대신합니다.

http://www.nytimes.com/2011/08/23/world/americas/23canada.html?_r=1&ref=americas

http://www.torontosun.com/2011/08/22/layton-had-a-human-touch

http://www.theglobeandmail.com/news/politics/jack-laytons-legacy-wont-end-here/article2138288/

http://www.thestar.com/topic/jack_layton

Monday, August 22, 2011

손도 안대고 코풀려는, 신분을 앞세운 파렴치한 한인변호사 ( Aug 18,2011)



변호사라는 직업은 어떤 것일까?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는데, 특히 이민자의 삶에서는 마음에 들던 안들던, 자기 전문분야를 찾아서 뿌리를 내리기는, 이민보따리를 쌀때의 각오와는 달리, 여간 어려운게 아니다. 특히 우리 한인사회의 예를 본다면 이민자 거의 대부분이 고국에서는 자기 전문직을 갖고 사회활동과 자존심 그리고 명예를 안고 생활을 하다가, 갑자기 180도로 바뀐 사회에서 그러한 삶을 이어가기위한 적응을 하기에는 넘어야할 장벽이 한두개가 아님을 나는 경험을 통해서 많이 느끼며 살아왔다.

처음 이민와서 내가 해왔던 직업을 찾을려고 무려 3년을 헤맨 기억은 지금 생각해 봐도, 그것은 보이지 않게 속으로 Discrimination이 그렇게 벽을 높이 쳐 놓았음을 깊이 느꼈었음을 부인 하지 않는다. 그리고 언어, 고국에서 살았던 기간보다 더 긴 35년간을 이민자로 살아왔지만, 아직도 영어하면 헤맨다. 이런 저런 제약들이 발목을 꼭 잡기에, 나중에는 전문적인 언어활용이 크게 요구되지않고, 또 호구지책의 수단으로 자영업으로 눈을 돌리게 되고, 그같은 개인사업은, 우리 한인 사회의 경우, Grocery store, Dry cleaning, Restaurant, 들이 주종을 이루고 조금 전문성을 찾는다면Auto repair shop, Hair salon, 등의 자영업으로 뛰어들었던게 이민 초기의 삶이었었다. 요즘은 그러한 풍속이 바뀌어 이민온 분들의 상당수가 Real Estate Agent로 활동하는것을 많이 보고, 또 조건이 여유로운분들은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여, Accountant, Lawyer license도 따고..... 많은 변화가 있음을 본다. 좋은 현상일수도 있다고 생각되지만, 요는 그분들이 과연 얼마나 알차게 주고객인 한인들을 위해서 성심 성의껏 돌보아 주는냐?를 놓고 보았을때, 선뜻 긍정적으로 대답하기에는 생각해 볼점이 한두가지가 아닌것 같다.

오늘날의 세상살이는 갈수록 복잡해져서, 필요한 분야의 전문성을 갖춘 사람을 찾아 Consulting하는것 조차 쉽지 않은것 같다.
특히 내가 살고 있는 Toronto에는 많은 한인들이 모여 살면서, 그들의 생업의 주무대가 되기도 하고있다. 같은 이치로 토론토를 중심으로한 GTA에는 Minority 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147개가 넘는다는 통계를 본기억이 나는데, 그만큼 토론토는 소수민족 이민자들이 처음 캐나다에 이민와서, 여러가지 제약이 앞을 가로 막아 전공을 살려 Job을 잡기 어려운 상황과, 이사회의 특성을 잘 몰라도,노동력을 밑천으로 하는 개인 사업을 하면서 삶의 터전을 만드는데 가장 합당한 토양이 깔려 있는 곳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개인 사업을 시작하는데 첫번째로 접하는곳이 Real Estate Agent이고, 그다음에 Lawyer이다. 이곳 북미사회에서 lawyer에 대한 개념은 고국에서 생각했던, 즉 lawyer를 hire 하게 되는 사건이 생겨서 잘못될 경우에는 집안의 기둥뿌리가 빠져 결국에는 패가 망신할수도 있다는, 그래서 돈많은 사람이나 집안만이 lawyer를 모셔서 그들을 하늘처럼 대하고 그들이 하라는데로 굽신거려야 했던 그런 개념과는 판이하게 다르고, 집 또는 business를 사고 팔때는 항상 lawyer의 최종 서명이 있어야 법적으로 Deal이 성립되는것으로 이해하고, 그런속에서 편하게 hire하여, 고용주를 대신하여 맡은건에 대한 일을 확실히 처리해 주는 Attorney로서의 역활을 하고 있는것으로 사회전체가 이해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래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hire 하는 비용도 대개 평준화 되여 있는것으로 인식되여 있다.

며칠전 아끼고 사랑하는 인생후배가 전화를 걸어왔다. 내용인즉 현재 Business를 Purchase하기위해 lawyer를 hire 해서 Deal을 진행중인데, Vendor측의 landlord로 부터 financial security를 조사하기위해 양식(form)을 보내와 가능하면 빨리 작성해서 보내 달라기에 고용한 lawyer에게 들고가서 consulting을 하려고 했는데, 내용을 보더니, 이것은 lawyer인 내가 할일이 아닌고로 Purchaser인 본인이 직접 작성해서 보내십시요라고 하면서 되돌려 보냈는데, 이런 경우도 있는거냐고 문의 전화를 해온 것이다. e-mail로도 보냈으니 한번 보시고 조언을 부탁 드린다는 내용이었다. e-mail을 열어보니, 내용이 특별한것도 아니고, 크거나 많은 property를 갖고 있는 landlord라면은 의례히 Security차원에서 요구하는 내용으로 신상문제, financial status, crime record 여부 그리고 business experience등을 묻는것으로, 당연히 Attorney가 해줘야할 내용으로 이해가 된다고 조언을 해주면서, lawyer가 왜 그랬는지? 그것은 차후에 따지고, 차선책으로 우선 현재 거래하고 있는 회계사를 찾아가 그에게 상의 해보는것이 좋을것 같다는 의견을 말해준후, 곰곰히 생각해 보니, Attorney라는 의미가 뭔가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수 없었다. Attorney로서 의뢰인을 보호한다는 개념이 확실한 lawyer라면,법률용어의 개념이 부족한 사람 즉 의뢰인이 직접 작성한다해도 이를 말리고 직접 의뢰인과 상의 하면서 손수 작성했어야 했다. 왜냐면 법적인 면에서 행여라도 의미가 뚜렷하지 않게 기재 됐을때에 발생할수도 있는,Purchase로서의 불리한 상황을 미리 보호 한다는 의미가 저변에 깔려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고용된 Attorney는, 고용주가 Deal이 완전히 성사될때까지는 그의 수족이 되여, Deal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일은 의뢰인과 상의하고, 판단해서 일이 성사되도록 vendor측, 관공서, 기타 research가 필요한 경우등에 스스로 lawyer로서 그들과 contact하고 전문지식을 발휘하여, 법적으로 완전하게 처리해주는 역활을 해주는, 그리고 법적으로 보장을 해주는 일을 담당하는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landlord측에서 요구한 이서식은(form)당연히 Attorney가 고용주인 Purchaser와 같이 머리를 맞대고, 상의해서 법적으로 미비하지 않도록 작성하여 주었어야 옳았다고 확신한다.

우리한인 community에는 고국에서 대학교육까지 마쳤거나 또는 사회생활을 하다가 이민와서 다시 law공부를 열심히 하여 lawyer license를 획득하여, law practice를 하고 있는 유능한 이들이 간혹 있는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곳의 사회생활에 aboriginal처럼 익숙치 않아, 이곳사회의 관습이나 또는 언어표현면에서 smooth하지 못할때도 간혹 있는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많은 한인들, 특히 언어소통에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은 그래도 그러한 lawyer들을 찾아가 언어의 불편없이 일을 진행시키기위해 찾아가기도 하지만, 같은 한인이기에 더 꼼꼼히 잘 챙겨서 일을 잘 진행시켜줄것이라는 무언의 기대 때문에 모든것을 맡기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점이 일을 맡기는 우리 한인들에게는 보약도 될수 있고, 독약도 될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후배가 고용한 lawyer는 그런 lawyer들중의 하나인것으로 알고 있는데, 후배가 내밀은 양식을 보면서, '이래뵈도 내가 변호사인데 이런것 까지 해달라고 하니 날 뭘로 알고 그러는거야?'라는 권위의식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의 옹졸한 행동으로 밖에 보여지지 않는다.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손도 안대고 코풀려는, 신분을 거들먹거리는 파렴치한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진정한 Attorney가 될려면 그런 고정관념부터 하루빨리 확 뜯어 고쳐야 한다고 본다. Deal을 성사시키기위해 hire한 lawyer에게 일을 다 맡기지 못하고,이것은 lawyer할일, 저것은 내가 할일을 따져서, 그 lawyer가 말한것처럼, 구별하여 일을 진행시키는것을 정상으로 생각하는 lawyer라면, 더 늙기전에 그는 다른직종으로 전업하는게 현명할것으로 조언해 주고 싶다. 또 그정도로 의뢰인이 전문적인 식견을 갖추었다면 굳이 비싼 Fee를 지불하면서 lawyer를 고용할 필요가 있을까? 이곳사회의 aboriginal들 중에는 상상외로 글을 잘 이해 못하거나, 읽어도 내용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간혹있다. 그들이 lawyer를 hire했을때, 후배가 고용한 lawyer같은 부류의 Attorney를 만난다면 어떻게 일이 벌어질까? 그러나 이곳에서 태어나서, 공부하고 lawyer된 사람들은 자기를 hire한 고용주의 손발이 되여, 그들의 손에서 일을 처리하지, 절대로 이것은 내가 할일이 아니니 당신이 해야 한다는, 즉 자기할일을 고용주에게 슬쩍 떠 맡기는 사람은 없다는것을 확실히 얘기할수 있다.


후배의 경우는 수임료 일부를 선불까지 했다고 들었다. 담당 lawyer가 사건의뢰인인 후배를 100% 믿지 못했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noose를 꼭 끼워 꼼짝 못하게 할려는 얕은 계략을 쓴것인지는 잘모르겠으나, 이경우도 이곳 Lawyer사회에서는 잘 실용화 되지 않는 그만의 방법인것 같은데.....lawyer라고 하면서, 이곳 사회가 신용사회라는것을 그가 알고 있었다면 좋았을것 같은 아쉬움이 끝이지 않는다. 그런 의심의 마음을 갖고 고객인 의뢰인을 대하는 lawyer로서의 그자신은 누구를 믿고 세상일을 상의하고 조언하고 Deal을 성사시켜줄까?


초기이민자중의 하나인 나자신은, Lawyer를 hire 했을때, 모든것을 맡기고, 상의 하여 Deal을 성사시킨 경험은 많으나, 후배의 경우처럼 네일, 내일 따져서 하는 Lawyer를 만난일도 없고, 또 상상도 해본일이 없어, 후배가 안타깝기만 하다. 집 또는 Business를 사고 팔때, 미리 수임료 일부를 받고 일을 처리하는 경우도 나의 경우는 없었다. 일을 맡길때 미리 수임료에 대한 협의는 하지만, 일이 다 성사된뒤에 구매값을 지불하거나 받을때는 항상 lawyer의 손을 거쳐서 하기 때문에 그때 서류를 작성하면서, 자기의 수임표를 계산해서 청구하는 순서를 밟고 있는것이 정석으로 나는 알고 있다.

이민 초창기때에 우리 한인사회가 겪었던 경험을 하나 짚고 넘어가야 겠다.
지금은 중년의 나이가 들은 경력있는 lawyer로 활동하고 있는것으로 알고 있는 그분이 아직 법학도였을때, Bloor West의 한인거리에 있는 한미장원 주인여자분은, 그법학도의 머리를 무보수로 손질해주면서 "앞으로 우리 한인사회를 위해서 열심히 일해줄 일꾼이 될 사람인데 이발료는 후에 lawyer가 되여 한인들을 위해서 일할때 값싸고 꼼꼼하게 잘 챙겨주는 정신을 갖고 일하고 있다는 소리를 듣는것으로 만족해 하면서 대신 할것입니다" 라는 간절함으로 그분에게 무료로 봉사를 오랫동안 해줬었다. 아직 한인출신 lawyer 없을 때였으니가 그간절했던 마음이 미장원 주인분만이 아니고, 얼마 안되는 한인들의 마음과 기대는 십시일반으로 다 같았었다. 그후 그가 lawyer가 되여 law practice를 할때 많은 한인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그를 찾아가 일을 맡기곤 했었는데, 그는 미장원주인의 기대뿐만이 아니고 많은 한인사회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한인들에게 수임료 바가지를 씌우고 일은 아까 위에 언급한 그 lawyer처럼 하거나 거칠게 해서 많은 한인들을 실망 시켰던 일이 있었다. 오죽 했으면, 같은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이곳의 서양계 lawyer들 사이에서 그를 가리켜 '이제 겨우 5년도 안됐는데 multi-millionaire가 됐다라는 비아냥 소리가 유행 했었을까. 그는 얼마나 한인들에게 바가지를 씌웠는가 하면, Offer to purchase를 한장 작성해주고 대가를 받기까지 했었다. Offer는 누가됐던간에 Fee가 없었고, 있어서도 안되는 일종의 규제받지 않는 통념이었는데 말이다.


한번은 오래전에 고국에서 항공기 정비사로 근무하다 이민온 친지가 가게를 찾느라 고생을 많이 하고 다녔는데 드디어 좋은 가게를 찾아서 현재 lawyer를 통해서 deal이 진행중에 있다고 연락이 왔었다. 축하한다는 인사를 건넨뒤 그에게 물어본 첫번째 질문은 lawyer는? 하고 물은것이었다. 앞서 말한 그사람이라고 했다. 그래도 이미 일을 맡기고 진행중이니 자세히 상의하고 문의해서 잘 마무리하고 돈을 벌어 하루라도 빨리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기 빌어 주겠다는 말로 통화를 끝냈었다. 며칠후 이번에는 울상이 되여 연락이 왔다. 살려고 하는 가게옆에 조그만 Street plaza가 있는데 그곳에 동종의 가게가 들어온다는 정보가 있고,또 주위여건을 계속해서 research해 봤더니, 승산이 없을것 같아서 lawyer에게 deal을 그만 둘테니 deposit한 돈을 도로 찾아 주시요라고 했더니, deal을 진행중 파기시키면 거꾸로 vendor측으로 부터 sue를 당하게 된다고 하면서 계속 진행 시킬것을 종용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를 대비해서 lawyer를 고용하는법인데.....이런것 하나 protect해주지 못하는 lawyer 라니, 그친지의 절망이 얼마나 클까를 금방 느낄수 있었다. 왜냐면 나자신도 가게를 찾느라 무척 고생을 했었기에 말이다.
내가 거래하고 있는 lawyer에게 연락하여 상황을 설명하면서, 네가 좀 도와줄수 있는 방법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라는 의견을 제시 했더니, 일단 보내 보라는 대답이었다. 친지가 그를 찾아가도록 arrangement를 해주었고, 나는 그뒤에 내가게일에 바빠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약 2주후 친지가 가게로 나를 찾아와서 하는 첫마디가 " 이형 고맙습니다. 소개해준 lawyer가 대신일을 맡아 처리해줘서 deposit한 돈을 다 되찾았고, Deal은 없었던 것으로 끝냈지요" 라고 환하게 웃었던 그를 기억하고있다. 그뒤에 한인 lawyer한테서 수임료 청구서가 날아왔다는 얘기를 듣고 너무도 어이가없어, 절대로 한푼도 지불하지 말라는 조언을 해준 기억이 있다.

이제는 세대가 바뀌어 그런 얄팍한 꼼수에 통할 사람은 별로 없는것으로 알고 있다. 언어에 많은 제약을 느꼈던 이민 1세대는 거의 은퇴 했고, 2세들은 거의가 다 이곳에서 태어냐 교육을 받았기에 이곳에서 태어나 공부한 전문인들을 찾아 가는 추세이고..... 후배가 hire한 종류의 전문한인들이 번성하면서 살아남는 길은 더 열심히 노력하여 성실하게 고객들을 대하고 실비로 Fee를 받을때만이 가능할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Tuesday, August 16, 2011

IT산업은 결국 강자가 독식하게 되는건가? Google의 Motorola Mobility인수를 보면서 (Aug 15,2011)

Google이 Motorola Mobility사업을 125억 달러에 인수 했다는 뉴스는 무엇을 의미 하는가? 얼마전에는 전화기 제조업체로, 또캐나다의 간판 기업으로 이름이 날렸던 Nortel Network이 파산을 당하여, Microsoft와 Apple이 인수해 버렸었다. Google이 이회사를 인수한 목적은 17,000 여개에 달하는 이동통신수단의 특허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Google 의 설명을 긍정적으로 받아 들이지 않고 있는것 같다. 그뒤에는 다른 목적, 즉 Hand phone전화기 제조에 뛰어들어, 현재 한국의 Samsung과 HTC를 비롯한 여러개의 Cell phone제조 회사들이 Goolge로 부터 무상으로 공급받아 전화기에 장착하여 사용하고 있는 Android를 결론적으로는 언젠가 사용중지 시키던가 아니면 다른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현재 Android를 사용하고 있는 전화기 제조회사들과 경쟁을 벌여 동업자 관계를 없애겠다는 계략인것 같다고 말한다. 그랬을경우 자칫하면 Samsung을 비롯한 동종의 전화기제조사들은 울며겨자 먹는식으로 Google의 하청업체로 전락해 버릴수도 있다는 예상도 해 보게 된다. 물론 이를 감지한 경험많은 삼성에서는 벌써 다른 조치를 취하고 있을것으로 믿고는 있지만.....

한국의 삼성과 LG가 Cell Phone의 판매에 힘입어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회사로 자리매김하고 있어, 고국의 경제 발전에 지대한 공로를 끼치고 있는데, 이번 Google의 Motorola인수를 보면서 괜히 걱정이 머리속을 떠나지 않고 있다. 몸은 비록 고국과 멀리 떨어진 캐나다에서 살고 있지만, 시집간 딸이 친정이 잘되기를 바라는 심정과 똑같은 마음으로 항상 고국의 대기업들이 좋은 제품을 많이 만들어 수출하여 조국 경제 발전에 견인차 역활을 해오는것을 보면서 흐믓해 하곤 했었는데....
어쩌면 나의 생각이 일종의 기우에 지나치지 않는, 신경쓸일이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 또한 강하게 있다. 정말로 그랬으면 얼마나 마음이 가벼울까? Google의 Motorola 인수를 삼성을 비롯한 세계의 여러 Handset 제조사들이 적극적으로 지지 한다는 성명까지 발표한 내용을 보면은, 꼭 좋아서 만은 아닌것 같은 뉘앙스가 깔려 있음을 느꼈다. 고국의 조선일보가 그내용을 보도한 것을 보면서 느낀것이다. NY Times는 그내용을 아주 자세히 보도하고 있다. 뉴욕타임스의 기사를 종합해 보면 Google이 가면을 쓰고, 이리의 본성을 감추고 순한 사슴처럼 위장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지난 몇년 사이에 잘나가던 수많은 IT관련 사업체가 소리없이 세상에서 없어져 버렸거나 다른 후발주자의 세력에 밀려 뒷방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것을 보았다. 최근에는 잘나가던 RIM이 살아남느냐 영원히 없어지느냐의 갈림길에서 헤매고 있음을 안타깝게 보고 있다. Hand Phone에서 e-mail을 주고 받을수 있는 기능을 탑재한 Blackberry가 시장에 나왔을때 전화기 한대의 가격이 $500달러가 넘었었고, 인기리에 전세계의 Businessmen들 사이에선 없어서는 안되는 일종의 신분상승의 바로미터 노릇을 했던 RIM이었었다. 2000년대초까지만 해도 전자기기하면 Sony가 연상됐었지만, 그때만 해도 초기 단계였던 전화기 사업에는 흥미를 보이지 않고 자만 하다가 실기하여 요즘에는 Ericsson과 제휴하여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신세로 전락해 버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Google이라는 이름은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었다.

통신 기기를 만들었던 역사를 보면, Motorola는 Google과는 비교가 안되게 긴 역사를 지니고 있어 왔으며, 세계 1차 2차 대전때 연합군을 비롯한 서방세계의 군대들은 거의 다 Motorola제품을 사용 했었고, 현재까지도 세계 도처에서 그제품들이 인기리에 사용되고 있지만, 지난 몇년 사이에 Cell Phone 시장에서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열차의 통신시설도 20 여년전까지만 해도 거의 Motorola제품이었었다. 인터넷의 등장으로 통신전달 수단이 상상을 초월한 무한대의 Cyber세상으로 젊은이들을 끌어 들이면서, 손바닥안에 들어오는 조그만 전화기속에 세상사람들이 즐길수 있는 모든 프로그램들을 장착시켜, 지금까지 별도로 개발되여 사용자들을 찾던 개념이 그속에 다들어가 있기에 전화기라기 보다는 IT의 집합체라고 해야할 지경에 이르렀다. 요는 어느회사가 고객들의 취향에 맞는 프로그램을 더 많이 장착시키느냐에 사활이 걸린것 같다. Google은 그들이 개발한 프로그람들이 기존업체들을 모두 물리치고, 이제는 아예 독식해 버릴려는 야망을 가슴에 안고 세계무대를 휘젖고 있다는 증거를 오늘 Google의 Motorola Mobility부분을 인수한다는 뉴스를 보면서 깊이 느꼈다. 무서운 젊은세대들...

아래의 내용은 NY Times기사 내용을 옮겨논 것이다.

Google, Handset 사업에 뛰어든다.

2004년도 당시 Google의 최고 경영자였던 Eric Schmidt는 "우리는 Handset 사업에 손대지 않으며 다만 Google이 Handphone에서 많이 이용 되기를 원할 분이다" 라고 선언한바 있다. 그러나 그선언은 일년도 채안되여 정반대 방향으로 나타났었다.

Steven Levy가 저술한 "In the Plex"에서 표현한것 처럼, Google은 Mobile전화작동에 사용되는 Android를 움켜잡고 안하무인격으로 전화사업을 확장해 왔다. 2005년도에 Android를 손에 넣은뒤에도 계속해서 지난 수년동안 전화사업에 뛰어들 계획을 구상하고 있었다. 2008년도 여름에 Apple의 Steve Jobs가 직접 Goolge본사에 들어가 Hand phone set을 점검전 까지는 이러한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었다.

Google이 전화기제조 사업에 손안댄것 처럼 행동해온데는 좀 냄새나는 부분이 있다.
2006년도까지 Eric Schmidt은 Apple사의 운영이사중 한명이었으며 따라서 Google은 Apple사의 아주 중요한 동업자로 간주 되였었다. 그러나 Steve Jobs가 Google의 phone을 발견 했을때 그는 무척 당황하고 화가 잔뜩 났었으며 "그의 사기에 내가 희생됐다"라는 결론을 내렸었다라고 Levy씨는 그의 책에서 밝히고 있다. ( Mr.Schmidt는 절대로 Jobs에게 거짖말을 한적이 없다라고 주장해 오고 있다)

Google이 125억 달러에, Android를 탑재한 전화기와 TV set-top box를 생산하는 Motorola이동통신사를 인수한것을 판단해 볼때, 지난 과거에 있었던 사건들과 다분이 연관이 있는것으로 여겨진다. Google은 전화기 시장에 뛰어들기위해 Motorola를 구입한게 아니고 Motorola가 보유하고 있는 17,000 여개의 특허권을 구입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Google의 한책임자와 이분야 전문가 그리고 뉴스미디어와의 전화회견에서 말하기를, 엄청난양의 특허권 때문이라고 무려 24번씩이나 강조하면서 전화기 사업은 차후에나 생각해볼 문제라고 연막을 쳤었다.

전화기 사업보다 특허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Google의 주장에 감지되는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Google의 Android운용시스템은 누구에게나 사용이 허용되여 있으며 현재 Samsung과 HTC를 비롯한 세계적 전화제조회사들이 사용하고 있다.
이회사들은 수십억달러를 투자하여 Android의 운용장치를 강화 시켰고, 이는 Apple의 전화기 시스템보다 더 많이 Android가 사용되도록 대중화 시키는데 일조를 담당해 왔다. 이제 이전화기제조회사들이 Google에 대항하여 경쟁을 피할수없게 된것이다.

"Google이 대중앞에 떳떳히 인정하지 않고있는점은 Android의 독점권을 결론적으로 주장하게 될것이라는 것이다." 라고 Morgan Keegan Equity Research사의 분석가 Tavis McCourt씨가 주장한다. Google의 선언에도 불구하고, Mr.McCourt씨는 주장하기를 앞으로, 현재 유럽쪽에서 Samsung과 다른 회사들에 밀려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Motorola가 세력을 2-3년안에 확대시키고난 다음에 Google은 Android의 Platform을 중지하기 시작하거나 아니면 현재 그체계를 사용하고 있는 회사들의 접근을 허용치 않는, 그들 자체의 전화기에 넣기위한 새로운 사양을 제작할것이라고 설명한다.

Google은 Android는 계속 누구나 사용이 허용될것임을 확약하고 있으나, 그들이 제작하게되는 새로운 전화기는 동업자들을 매우 어렵게 할것으로 예측된다. 고객들은 Google이 제작한 전화기재산권이 Google의 Android시스템을 상하 수직적으로 연동시켜,현재 Apple사가 이와 비슷한 체계로 전화기의 Software와 Hardware에 대한 모든 사항을 직접 Control하고 있는 Iphone에 맞서 더좋은 위치에서 경쟁을 하도록 end-to-end시스템을 구축할것으로 추측된다.

Google의 Motorola전화기제조사업 인수목적에 대한 PR메세지는, 약 일년전에 Harmon Internation의 software 사업인 QNX software 시스템을 인수할때, Blackberry를 제작하고 있는 RIM이 Playbook을 제작할때의 경우와 닮았다.
Deal을 성사시킬때 RIM은 QNX의 강점이기도한 자동차,연예가방송사업에 뛰어들기위해 QNX를 구입하는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때 RIM은 QNX는 RIM의 다음세대운영시스템에 적용될것이다라고 주장했었고, 물론 그때도 메세지는 좀 이치에 맞지 않았었다. 즉 QNX는 지금 RIM의 운용체계를 만들고 있다.
"RIM의 시스템개발 기술자들은 이미 현재사용중인 Blackberry의 운영체계를 개량하는 일을 중단했을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사실을 밝힐수 없었을 것이다" 라고 McCourt씨는 말한다.

Google의 메세지는 현재 전화기를 제작하고 있는 여러회사들이 이번 Deal의 성사를 반대하고 나올경우를 대비하여 인수를 막을 방법을 찾고 있을수도 있는 규제위원들(Regulators)의 승인을 꼭 받아야 하는 필요를 수반하게 될지도 모른다. 월요일에 Android를 장착하여 전화기를 생산하고 있는 모든 회사들이, 법적 특허로 부터 Android를 보호할수 있다는 전제하에서 이번 딜에 호응하고 있다.

특허 때문에 Motorola이동통신 사업을 인수 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어보인다. 지난해에도 Google은 이동통신관련 특허를 인수 할려는 시도가 있었다. 지난달에 특허를 6000개 소유하고 있는 통신장비제작사 Nortel Network가 파산되여 공매에 부쳤을때 시도했다가 실패로 끝났었다 (Apple과 Microsoft사가 합동으로 구입). Motorola의 특허들이 경쟁사들로 부터의 제소를 막아주는데 도움을 줄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Motorola가 소유하고 있는 Domain으로 부터 17,000 여개의 특허를 Google이 소유하기 때문이다.

어쨋던 이동통ㅇ신사업을 오랫동안 꿈꾸어오던 Google의 새로운 최고 경영자, Larry Page가 이번 인수로 일단 그의 야망을 심었다고 볼수 있다. 따지고 보면 Mr.Page는 회사의 중역으로 일할때부터 Android의 인수를 주장했었고, 지금은 가장 효자노릇을 하고 있다. 지난 몇년동안에도 그는 Wireless Spectrum에 대한 연방정부의 경매에도 Google이 참여하도록 주장 했었는데, 그때 다른 경쟁사들은 이를 꺼려 했었다.
"그는 Android를 오늘처럼 키워낸 장본인이다. Larry는 야망이 큰 사내이며 큰 도박도 불사할것이다" 라고 Mr.Levy씨는 인터뷰에서 밝히고 있다.

만약에 Google이 전화기제작회사를 인수하는 명목보다 특허때문에 인수하는게 주목적이었다라고 생각한다면 이문제를 다시집고 넘어가야 할것 같다. 즉 약 8,000개의 무선전화 특허와 10,000여개의 Application을 소유한, 라이센싱회사 Inter Digital사가 경매에 부쳐졌을때 이분야의 많은 전문가들이 만약에 Google이 특허 때문이어었다면 Inter Digital회사 인수에 초점을 맞추었어야 했다라고 믿는다. 그회사의 시장 가격은 불과 약 30억 달러밖에 안되였었고, Motorola의 Handset
사업인수와는 턱도없이 적은 액수다. "만약에 이번 Deal이 특허 때문이었다면, Google은 IDCC를 구입했어야 했다"라고 Mr.McCourt씨는 Inter Digital을 연관시켜 설명한다.

월요일 Inter Digital의 주식가격이 어떻게 됐나 짐작해 보세요. 14%나 추락했지만,Google은 구매의사가 전연 없어 보인다.

http://dealbook.nytimes.com/2011/08/15/google-turning-into-a-mobile-phone-company-no-it-says/?hp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8/16/2011081600251.html?news_Head3

http://www.nytimes.com/2011/08/16/technology/google-deal-could-strain-ties-with-phone-makers.html?_r=1&hp

http://dealbook.nytimes.com/2011/08/15/googles-big-bet-on-the-mobile-future/?nl=todaysheadlines&emc=tha2

Monday, August 15, 2011

해운대 해수욕장의 풍경을 보면서, 삼팔선을 원망한다.




"아빠 이번피서는 명사십리 해수욕장으로 가자잉, 부산 해운대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있어서 난 싫어. 철이 넌 어떻게 생각해? 아빠 그렇게 하는거지?, 어서 대답해줘요. 친구들에게도 말해줘야 하니까"

"아빠 엄마는 이번 휴가는 해수욕 보다는 조용한 산속으로 들어가서 캠핑했으면 하는데.... 이곳에서 6시간쯤 북쪽으로 차를 달려, 개마고원으로 갔으면 했는데.... 정 네가 그렇게 하고 싶다면 엄마 아빠가 양보하는수 밖에. 그렇게 하자. 그러면 이번 여름 휴가는 원산이다"

이러한 나의 상상이 머리속에서만 그려지고 마는 고국의 현실을 남은 내 생애 동안에 실제로 행동에서 볼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이아침에 빌어 본다.

지금은 한국의 눈부신 경제적 성장으로, 서구문명을 접한 많은 사람들의 살아가는 방식이 바뀌어, 바캉스라는 이름으로 여름이면 거의 모두가 산으로 바다로 휴가를 가지만, 특히 바닷가는 거의 모든 국민들이 한번씩은 거쳐가는 휴식쳐 노릇을 하고 있는것 같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겨, 좀더 낳은 삶의 질을 구가하기위해 때가되면 바닷가로 산으로 짐을 챙겨 휴가를 떠나는, 캐나다인구의 두배가 넘는 한국의 많은 식구들이 갈곳은 극히 한정되여 있는것을 요즘 많이 보고 느낀다. 내가 사는 이곳 북미 대륙, 특히 캐나다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여름철이면 바닷가, 호숫가로 물놀이를 가고, 아니면 광할한 공원에 조성되여 있는 Camp site에서 캠핑을 하면서 잠시나마 세상사 다 잇고 뜨거운 햇볕 아래서 썬탠을 하고, 물놀이를 하고, 또 밤이면 돈주고 사온 Fire wood로 캠프파이어를 한가로히 즐기면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낸다.

대부분의 휴가객들은, 연인들, 아니면 온식구들이 같이, 특히 젊은 부부 또는 중년의 부부들이 그들이 사랑의 결실로 생산한 2명 또는 3명의 귀여운 아이들과 바다로, 캠핑장으로 다니는것을 보면서 무척 부러운 생각이 들곤 한다. 나의 젊은 시절을 되돌아 보면서 말이다. 그나이에 우리 부부는, 대부분의 이민자들이 같은 형편이었겠지만, 그러한 낭만적인 꿈은 꾸어 보았지만, 실행을 하지 못했었다. 아니 그럴 여유가 없이 삶의 전선에서 뛰어야만 했었기 때문이다.

고국의 좁은 땅에서, 이제는 그많은 식구들이 휴식처를 찾아 여유롭게 여름 휴가를 연인들과 또는 온식구들이 모여 즐길수 있는 장소를 찾는다는것은, 경제적 여유에 비교해 볼때, 꽉 찰대로 다 찼다는 느낌이다. 이럴때마다 한반도의 허리를 동강내고 있는 삼팔선이 원망스럽게만 느껴진다.

유럽에는 한국보다 더 작은 나라들이 수없이 많다. 그러나 그들은 국토가 좁다거나, 갈길이 막혀 가지 못한다는 푸념이나 넋두리는 없는것 같다. 마음만 생기면 이웃나라를 옆집드나들듯히 하면서 삶을 즐기고 또 휴가를 즐기기 때문이다. 캐나다 처럼 넓은 나라에 살면서도 때로는 좁다고 남쪽 미국으로 차를 몬다. 이러한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그자는 분명 알고 있을텐데..... 이다음에 다른 세상에 가서 얼마나 많은 괄시와 구박을 받을려고 그러는지? 그가 밉기이전에 불쌍타는 연민의 정이 이아침에 깊이 느껴진다.

삼팔선이 가로막지 않았다면 하고 생각해 볼때, 가슴이 뛴다. 나같은 초로의 Senior에게도 그러한 스릴을 상상해 볼수 있기 때문이다. 연인들은 그들만이 즐길수 있는 조그만 공간의 차를 이용하여 북으로 북으로 마음껏 달려, 널려 있는 해수욕장, 산림, 그것도 마음에 차지 않으면 더 올라가 시베리아 벌판과 중국대륙을 마음껏 달리면서 젊음을 불사를테고, 중년의 부부들은 그들의 아이들과 여유롭게 해수욕장, 호숫가, 그리고 캠핑그라운드를 찾아서, 그들만의 공간에서 Freesbie도 던져보고, 자전거로 한가롭게 인근의 시골마을을 달려 보기도하고.....
그렇게만 할수 있다면, 현재 벌어지고 있는 휴양지에서의 바가지 요금이라든가, 고속도로가 주차장이 되다시피하는 진풍경도 많이 줄어 들것이고, 휴가를 다녀온 사람들의 마음이 여유로워져서, 사회가 전반적으로 여유를 갖고 일상생활을 하게되는 반사이익이 엄청나게 많을 것이다.

분단 60년이 넘은 현재에도 삼팔선을 중심으로 세계에서 가장 Heavy한 방어선이 한치앞을 예측 못하게 긴장감을 주고 있는 한반도의 현실을 접하면서 누구의 잘못 때문이라고 탓하기 이전에, 경제적으로 삶의 가치를 구가할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으면, 이제는 경제적 부를 가치 있고 여유있게 이용하여 삶의 에너지를 충전 시킬수 있도록, 한반도의 막힌 길을 뚫어 주셔야 할것 아니겠읍니까?라는 넉두리를 혼자 중얼거려 본다. 뚜렷한 대화의 대상도 설정하지 않은채..... 매주 교회에 출석을 하고 있기에 나의 넋두리 대화 상대가 누구인가는 굳이 밝히지 않는다.

우연히 LA Times의 흥미반 비웃음반의 해운대 해수욕장에 대한 여러 진풍경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이기사를 보면서 한반도의 꽉 막힌 허리가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라는 확신이 더 굳어졌다. 여기에 그기사 내용일부를 옮겨 본다.

뜨거운 여름철 한국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해수욕장, 부산 해운대는 많을때는 백만명까지 모여들어 북새통을 이루고 백사장에 상인들이 장사속으로 끝이 안보이게 펼쳐놓은 비치파라솔은 또하나의 풍물이 되지만 이상하게도 아찔하게 보일락 말락하게 몇가닥의 끈으로 얽어맨 아름다운 비키니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는곳, 어떤 여인들은 백사장에서도 샌달대신 굽높은 하이힐을 고집하는 진풍이 펼쳐지는곳-해운대 해수욕장.

중국집 음식 배달부는 2킬로 넘게 펼쳐져 있는 백사장뒤의 파라솔을 찾아 헤매, 주문한 음식을, 우편부가 우편물을 가가호호 찾아서 배달하듯, 주문한 곳을 찾아 간다.
"수상감시 타워 8번, 그곳에서 세번째줄의 맨끝에 세번째 파라솔" 용케도 찾아서 배달은 완성된다.

각종색갈로 어우러진 비치파라솔, 즉 파란색 붉은색, 핑크색등으로 뒤덮혀 있는 모래사장은 많은 사람들이 뜨거운 여름철 햇볕을 피해 모여드는 곳이다.

미국에서 온 사업가 Greg Conklin씨는 "이것은 공중이 이용하는 해수욕장이 아니라 다른 별천지에 온것 같은 기분이다. 미시간주에서는 뜨거운 햇볕을 식히기 위해 물가로 가기도하고 또 썬탠을 하기도 한다. 러시아워때 차들이 꽉 붙어서 기어가는것 같은, 비치파라솔은 볼수가 없다. 내가 뜻하는것은 모래사장이 어디에 있느냐? 프리스비를 던질수 있는곳이 어디냐?" 라고 감탄을 금치 못한다.

오늘은 해운대에 약 삼십만명이 모였다고 한다. 그러나 많은 날에는 백만명이 넘게 운집 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스스로 300명이 넘는 경찰관들이 감시하는 좁아터진 감옥에 스스로 갇히는 꼴이다. 젯트스키를 타는 사람들을 주로 감시하는 200명의 해수욕장감시원들과 가끔씩은 헬기가 선회 하기도 한다.

얼마전에 해운대 해수욕장관리측은 - 썬탠은 노동자라는 인식을 주기 때문에 - 7937개의 엄청난 비치파라솔숫자를 기네스북에 등재하기위해 문의 했으나, 그분야에 대한 등재 항목이 설정된게 없다 라는 통보를 받았다고 전한다.

아찔한 비키니를 입고 수영하기에는 아직 뭔가 편치않아 짧은 바지와 T셔츠를 입은채로 해수욕을 즐기는 문화가 형성되여 있는것도 특히한 점이다.
"물은 좋아 하지만 썬탠은 좀 그럽지요" 라고 29세의 김수민씨는 파라솔밑에서 썬글라스를 끼고, 긴바지에 모자가 붙어있는 쉐터를 입고, 발목은 비치타월로 가리고 않아 있다.

유행에 민감한 한국에서는 젊은 여성들이 푸른색갈로 장식된 물줄기가 쏟아지는 미끄럼틀을 타고 곤두박질 치면서 흘러 내리는 물장구를 치는 모습은 거의 볼수 없다. 매년 백명 이상의 미아가 발생하여 경찰은 아이들에게 표시가된 목걸이를 걸어주고, 바로 무전기로 사고시 연락토록해서 찾아주는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저녁에는 백사장은 젊은이들이 cruising하는 장소로 변한다. 백사장에 연이어 있는 높은 호텔지붕에서 밝혀주는 써지 라이트가 이들과 같이 움직인다. 음주 cruising 으로 익사하는것을 막기위해 관계자들은 야간용 쌍안경을 이용하여 모래사장을 Scan하는것도 특이하게 보인다.

56세의 해운대 관광 책임자는 웬만한 중소도시의 시장(Mayor)못지않게 바삐 움직인다. '해운대'는 9세기경에 한시인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을 따서 해운대라고 불려지기 시작했으며, 그뜻은 "바다와 구름(인파?)"이라고 한다.

장사꾼들은 돈을 내고 그안에서 장사 하지만, 그렇치 않고 몰래 스며 들어와 하는 이들도 많은데, 감시의 눈을 피해 술래잡기식, 쫓고 쫓기는 게임도 연출되곤 하는데, 다만 못하도록 겁을 주기위함일뿐, 불법은 아니라고 한다.
"비치 파라솔 한개의 렌트비는 하루 약 $5달러가 공시 가격인데, 이행되지 않고 보통 약 $50달러씩 받는데, 기대했던 고객이 간혹 자기네가 들고온 파라솔을 펼칠때는 긴장감이 들곤 한다"라고 그는 설명한다.

젊은층이 서양문물에 물들어 남자들은 알몸의 가슴통을 내놓고, 여성들은 아찔한 수영복을 입긴 하는데, 미풍양속을 고려하여 노출의 한계를 정하는점도 협의 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한계에 직면하게한 장본인은 지금도 그들만의 아방궁에서, 인민의 삶은 뒷전으로 밀어둔채, 꺼져가는 삶을 연장하기위해 몸부림치면서 해운대의 광경을 나처럼 느끼고 있을까? 쯧쯧.

http://www.latimes.com/news/nationworld/world/la-fg-south-korea-beach-20110814,0,3631012.story





Sunday, August 14, 2011

한국의 증권 브로커,Black Monday 고통속, 투신자살을 보면서

한국의 증권 브로커,Black Monday 고통속 고층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보면서(Aug 08/2011)

전세계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
세계 곳곳에서 하루도 전쟁이 끝일날이 없이 아까운 무고한 생명이 목숨을 잃고, 도처에서 폭동이 일어나고
마음 편하게 하루를 지내는 일이 거의 없는 현재의 세상 사람들의 생활인것 같다.

그중에서도 금융시장의 혼돈은 그영향이 전쟁보다 훨씬 큰 것으로 받아들여 지고 있는것 같다.
지금까지 금융전문 관계자들의 설명에 의하면 은퇴자들은 노후생활의 안전을 위해 그동안 저축한 모든 재산을
은행에 맡기지 말고, 안정된 증권에 투자하여, 최소한 연 8%의 안정된 성장을 보여준 지난 20여년간의 통계를
보여 주면서, 이자도 챙기고 안정된 일정액의 소득을 연금형식으로 받아 보라고 권하면서 은퇴자들을 고객으로 끌어
모으는데 혈안이 되였었다. 그러나 그러한 전문가들의 통계와 계산은 여지없이 부서져 은퇴자들의 마음을 무척 힘들게
해오고 있는지가 벌써 5년 이상은 지난것 같다. 그래도 그들은 계속해서 새로운 상품개발이라고 하면서, 금융시작이
곤두박질을 하고 있는데도 장미빛 청사진을 그려 보이면서 은퇴자및 자산가들을 유혹하고 있다.
이러한 금융시장의 혼란은 그어느 전쟁보다도 많은 사람을 보이지 않게 멍들게하고, 목숨을 앗아 가지만 뉴스미디아에서 그통계는 발표는 하지 않는다. 이고통을 못이겨 목숨을 끊거나 병들게 된, 언론에 나오지 않은, 사람들의 숫자는 과히 천문학적일것으로 추측된다.

지난 월요일(Aug.08)은 정말로 Black Monday였었나 보다.
서울의 한증권 브로커가 몇명의 고객들에게 "정말로 면목 없읍니다. 죄송합니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고층 사무실에서 창밖으로 뛰어내려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그동안 한국은 1997년, 2008년도에 금융대란을 격으며서 고통을 무척 받아 왔었으며, 그후 지금까지 비교적 다른 나라에 비해 잘 견디고 빠져 나오고 있는 나라로, 경기회복도 다른 선진국에 비해 발빠르게 잘 움직이고 있다는 평을 받아 왔었으나, 미국발, 유럽발 금융대란의 여파에 또 치명적인 영향을 받아, 증권 브로커가 목숨까지 끊는 참사가 일어난것 같다.

유럽의 그리스와 이태리의 좌파 정권들이 사회복지 정책을 펴면서, 천정부지로 국가재정을 파탄내더니, 그여파가 전세계를 휩쓸고, 미국마져 휘청거려, 신용등급 한단계 하락( A++)하는, 한치앞을 내다 볼수 없는 혼란속에서 전세계가 헤매고 있는 것같다.

한국의 경우는 경제가 수출에 의존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더 심한 충격을 받는것 같다. 한국을 대표한다고 하는 삼성전자주 같은것은 거의 30%가 이번에 하락하여 그심각성을 나타내고 있다.

이번 금융충격은, 지금은 지구촌이라는 말 그대로 한곳에서 잘못되면 도미노 현상으로 전세계가, 그것도 잘 발달된 미디어 덕택(?)으로, 금방 같이 벙벙뛰는 웃지못할 발광을 하고, 여기에 개미같은 투자자들만 평생벌은 부의 가치를 휴지조각처럼 날려 버려, 은퇴자들의 고통을 심하게 하는것 같다. 이것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는것이다. MB를 비난 할일도 아니고..... 문제는 국민복지를 이유로 내세워 수입은 생각지도 않고 마구 써대는 좌파성격의 정권들이 세계이곳 저곳에서 나라를 운영하면서 이꼴을 만들고 있다는 점을 사람들이 인식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미국도 민주당의 오바마 정권이 들어 서면서 지출이 엄청 늘어나 신용등급 하락의 추태를 면하지 못했고, 한국은 지금 좌파들이 무상급식이다, 반값등록금이다 등등의 구호를 내걸면서 국민들의 환심을 사서 정권창출을 꿈꾸는 물결에 많은 한국인들이 같이 춤추고 있다는데 큰문제가 있는것 같다.

나자신도 은퇴후의 안정된 생활을 위해 평생모아두었던 약간의 저축을 은행에 맡겨 두고 있었는데, 은행측에서 이자가 더 잘자라는 안정된 증권에 투자하라는 권유를 3년동안이나 버티다가 결국 그들의 advise를 받아 들여 Dominion Security에 맡겨운영하여 약 4년동안 잘 자라는것 같더니 2007년에 시장이 무너지면서 곤두박질 치기시작하여, 잘한다고 하는 한국분전문가에게 자문을 받아 보았었다. 그의 결론은 위험한 회사에 투자되여 있으니 빨리 정리해야 될것 같다고 하면서, 자기가 하고 있는 매달 수입이 보장된 은퇴연금 형식의 안정된 회사에 투자를 권유하기에 그말을 따라서 오늘 현재까지 왔었으나, 그사이 시장은 계속 Up and Down하여 지금 이시간 까지도 원래투자액수에서 늘어나기는 고사하고, 10%가 줄어 있는 통계를 보면서 마음의 고통이 나를 무척 괴롭히고 있다. 이러한 환란시에는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할것 아니냐고 물으면, 연금성 투자이기 때문에 지금 당장에 매달 수령해도 앞으로 20년은 보장된 수입이고, 만 65세가 되어서 찾기 시작하면 평생동안 시장의 변동에 상관없이 매달 일정금액을 수령하는 Plan이기에 문제될것이 없다고 계속 주장하기에 그런가 보다고 지금까지 왔었다.

투자한 금액에서, 그분전문가의 설명에 의하면, 매년 성장하면 매월 지급하게되는 액수를 제하고도 계산상으로 원금이 계속 불어가게 되고, 투자한 날로 부터 7년후부터는 Penalty없이 일시에 투자금을 필요에 따라서는 다 회수할수도 있다는 제안을 따라 지금 현재에 이른 것이다.

문제는 앞으로 나의 남아 있는 수명을 계산해 보았을때, 현재 투자액으로도 매달 받게 되는 연금을 받고도 남을수 있는 금액이라는 것이다. 원래의 설명데로라면 수명을 다할때 까지 매달 수령하고도, 원금은 오히려 더 자라나 있어야 된다는 계산이다. 나의 생각은 때가 돼여 매달 연금을 수령하고도, 전문가의 설명에 따르면, 연평균 8%의 성장이 보장되는 것이기 때문에 연금 수령하면서도 투자액수는 계속 늘어 났어야 했다. 그사이 투자회사는 Maintenance Fee를 슬쩍 올려, 자기네들 몫은 시장의 변화에 관계없이 챙겨가고 있는 것이다. 또 며칠전 이멜에 의하면 회사 정책이 고객의 안전을 위하여 조금 바뀌었다고 했는데, 그내용은 오는 9월이면 만 65세가 되는데,그해의 생일날 부터 찾을 수 있는 방침을 그다음해의 1월 1일로 옮겼다는 것이다.그리고 신청 절차를 Agent사무실에 와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처음 투자할때는 무조건 만 65세전에 원하던, 그이후에 원하던 신청만 간단히 전화로 하면 된다라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궁금해서 전화라도 해 보면 아무때고 사무실에 찾아 오시라고 하던 그가, Black Monday 이틀후 전화를 했더니 다른 사람과 사전 약속이 있어 오늘은 안되겠다고 하는 대답을 듣기도 했었다.

몫돈 집어넣고 원금이 자라기는 커녕 계속해서 줄어드는것을 보면서, 마음은 더 괴로워지고, 어떻게 특단의 조치를 취할수도 없어, 경제적으로 안정된 은퇴생활을 기대했던 우리 부부를 더 괴롭게 하는 결과가 되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 투자전문가들도 이러한 상황에서 자유롭지 못하도록, 도의적 책임뿐만이 아니고, 경제적 투자 손실에 대한 책임을 물을수 있는 제도가 도입되어야 투자자와 이를 관리하는자들 사이에 공평이 이루어지는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보게된다. 이시간에도 투자한 내돈은 줄어 들고 있을테지만, 그들의 수수료는 시장의 폭락에 상관없이 매달 지출되고 있다. 우리처럼 안전하게 투자했다고 하면서 은퇴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어찌 우리뿐이겠는가? 이들의 마음아픔은 어디에서도 보상이 안된다. 이시점에서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Ron Westacatt씨의 충고의 말이 가슴을 때린다. "Paul, 너는 이다음에라도 절대로 증권회사에 투자 하지 말어라, 증권시장은 Gamble과 같아서 결국에 다 잃고 말테니까" 그의 말을 왜 믿지 않았을까라고 후회해 본들 지금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는 평생을 토론토 증권시장에서 근무하고 은퇴한 전문가 였다.

이번 증권파동으로 목숨을 내던진 그는 어떤사람인지는 잘 모른다. 더욱히 고국의 언론에는 뉴스로 나오지도 않았었다. 그래도 그는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었기에 그가 관리해오던 고객들의 고통을 같이 분담한다는 차원에서 그러지 않았을까?라고 생각을 해보지만, 그렇게 목숨을 던진다고 해서 해결이 됐다면 오죽 좋을까마는...... 인생 70-80년 살아가는데 걱정없이 살아온 날이 며칠이나 돼는가를 손가락으로 헤아려 보았을때....성경의 한귀절이 머리에 떠오른다. 젊어서는 직장잡는 고통, 자식낳아 기르는 고통, 개미처럼 일하느라 젊은 청춘시절 멋지게 지내보았다는 기억은 거의 없고, 어느새 백설은 머리에 주리틀고 앉아, 남은 생이나마 마음 편하게 지내볼까하는 희망을 안고 여기까지 왔는데....이마져도 허용이 안되는가 보다. 어찌 우리 부부뿐이겠는가? 그래도 더운 여름 카테지에서 지낼수 있다는것에 감사 하면서 마음을 추수려 본다.

http://www.latimes.com/news/nationworld/world/la-fg-south-korea-economy-20110812,0,4486389.story

Saturday, August 06, 2011

Trudeau를 내나름대로 재조명해 본다.(Aug 5,2011)

Trudeau를 내나름대로 재조명해 본다.(Aug 5,2011)

"I had absolutely no desire to give in to such a ridiculous display of violence. I detest violence. As a democrat, I will never accept that a small group of agitators can make someone invited by majority take to his heels by throwing a few stones at him."

"When you have been elected to govern,you have to do so to the best of your ability without worrying about the condemnation your actions. What was important was to prevent the situation from degenerating into chaos, and the conduct of the elected representatives of the people from being dictated by terrorists"

"The first duty of government is to govern" which means never giving in to chaos or terror.

Pierre Elliot Trudeau는 내가 처음 이곳 캐나다땅에 이민으로 왔을때 그는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정치가이면서 Playboy로 스캔달이 꼬리를 물고 있었고, 최장수 수상을 하고, 총각수상으로 명성을 떨치다가 막 결혼한지 몇년 안된 신랑으로서 신혼의 단꿈을 꾸면서,아들 3명을 년년생으로 뽑아내고, 그러면선도 캐나다 정계를 주무르고 또 미국도 아직 모택동 휘하의 중국과 정상외교를 꿈도 꾸지 못하고 있을때, 중국으로 날아가 당시의 모택동 주석과 수상 주은래를 만나서 양국의 현안을 논의 했고, 또 주은래가 안내인이 되여 중국의 유명 관광지를 구경까지했던 독특한 인물로 요약되는, 내가 미쳐 알지 못했던 삶을 살았다는것을 재조명하게 됐다. 위에 적은 문장은 그가 직접쓴 Memoirs중에서 그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잘 나타낸 문장으로 요약되기도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면과 맥을 같이 하는것 같아 옮겨 놓은 것이다.

그의 Memoirs을 읽으면서 막연히 알고 있던, 또 주위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그대로 받아들여 기억하고 있던 그에 대한 나의 편견을 깨끗히 일소하는, 그리고 그가 어떤 사람이었던가를 내나름데로 재평가할수 있는 기회를 내가 포착할수 있도록 해준 계기가 됐다고 생각한다.

그의 정치적, 인간적 사상은, 그가 카리스마적이면서도, 개인의 자유를 존중했고, 그가 수상으로 재직중, 역사에 남을 획기적인 개혁들을 했거나 지금까지 없었던 Unemployment Insurance, Health Insurance, 투표권을 21살에서 18세로 내렸고, 캐나다 국기(flag)를 공식화 시켰고, 당시
영어가 공용어였던것을 의원들을 설득하여 영어와 불어를 공용어로 하도록 하는 Bilingual language정책을 세웠었고....Minority Government를 이끌어 가면서도 장수 할수 있었던 그의 용병술등등 그의 처세와 능력은, 우연히 그가 똑똑해서 발휘됐던 것이 아니고, 학생시절때부터 이미 그는 그런길을 걷기위한 체험을 몸소 했었기 때문에 가능 했음을 알수 있었다. 마치 그가 세상에 태어난것은, 캐나다의 정치적 후진성과 캐나다가 지니고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발휘하여 선진국으로 이끌어 놓기위해 이미 점지해 놓은 삶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그의 인간적 성격과 정치적 색갈을 나는 좌파성향이고 공산주의 기질이 있어 미국의 정책에 사사건건히 반대해왔던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내 생각이 편견이었음도 이번에 깊이 깨달았다. 그의 인생관과 정치적 성향은, 미국의 공화당이 주창하는 보수색갈을 싫어하고, 그래서 좌파성향이 짙게 보이면서도 공산주의와 교류는 하되 절대로 공산주의를 싫어 했음을 알수 있었고, 절대 다수가 지지하는 정책을 소수의 극렬분자들이 반대하고 난동을 부리는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서는 군대까지 동원해서 말살시키는 단호한, 결단력있는 정치가 였음을 새삼 발견하면서, 오늘날 조국의 일부 좌파 극렬분자들이 무정부 상태를 만들정도로 난동을 부리는것을 보면서도, 강력 대처를 못하는 정부와 정치꾼들을 생각지 않을수 없었다. 그들이 Trudeau의 Memoirs를 한번 잃어 보고, 국민이 세워논 지도자로서의 갈길과 할일이 뭔가를 분명히 공부 하기를 바란다면, 지나친 나의 망상일까? 그가 걸어왔던 발자취를 뒤따라 가면서 간략히 적어 본다.

그가 아직 대학생 시절에 그는 보통의 젊은이들은 꿈도 꿀수 없었던 모험을 즐겨 하면서 담력을 키웠던 것으로 이해를 할수 있었다. 단짝 친구 Guy Viau와
Desrosier의 사촌들과 같이 어울려 Hudson Bay까지 가기로 하고 수로를 따라 Ottawa강에서 부터 시작하여 수백마일을 지나 Lake Timinskang을 거쳐 James Bay까지 도착하여 그곳에서 다시 Canoe를 타고 온타리오 북쪽 끝에 있는 Cochrane까지 가서 그곳에서 Hudson Bay까지 사투를 벌이면서 노를 저었고, Montreal대학에 다닐때 오늘날 자동차로도 하루가 더 걸리는 먼거리에 있는'가스페'반도로 배낭짊어지고 Trail Walk을 하는 끈질긴 그의 성취욕과 집념 그리고 탐험심을 볼수 있었다.

1917년에 캐나다에서 Conscription때문에 퀘백에 거주하는 불란서 계통의 주민들이 주동이 되여 폭동을 일으킨 역사를 알고 있던 그가 대학생 시절에,
퀘백주의 한 보궐선거에 집권당인 자유당에서는 당정책으로 징병제를 주장하면서 캐나다군 소장 출신을 영입하여 후보로 내세우고, 이에 맞서 싸우는 야당에서는 젊은 변호사인 Mr. Drepeau를 후보로 내세우면서 선거전을 벌일때, 그가 처음으로 대중앞에 나서서 야당후보를 지지했던 연설을 했었던 점을 보면서 그는 처음부터 Liberalism을 주창하는 자유당원 기질이 있었으면서도 야당을 지지했음도 알았다.

그가 대학생때는 원하든 원치않던 징병제도를 피할수 없었음을 알수 있었다. 징병제를 피하여 대학에 가도, COTC( Canadian Officers Training Corps)제도가 있어 일주일에 두번씩 인근의 군부대에 가서 훈련을 받지 않으면 안되였을때, 그는 훈련중 파생되는 언어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되는것을 알수 있다. 후보생 대부분이 불란서말을 하는 불란서계통의 후손들인데 교관은 영어로 훈육하는, 질문도 영어로 해야하고, 다시 자유시간에는 불란서말로 교제를 하는 모순된점에 착안하여 1/3 이상의 인구분포를 갖고 있는 불란서말을 공식적으로 아무런 구애 없이 사용할수 있는 방법을 구상했던 것으로 이해됐다.

대학을 졸업하고 Harvard로 건너가 MBA를 했고, 다시 불란서, 영국으로 가서 수학하면서, 오늘날 처럼 교통이 발달되지 않았던 관계로, 서구인들에게는 낯설기만 했던 아시아지역의 여러 나라들을 소위 말하는 배낭 여행을 하면서 가난에 찌들고 외부세계를 잘 모르는 현지인들을 만나서 그들의 삶을 이해 했고, 시리아를 방문했을때는 턱수염을 기른 모습에서 이스라엘의 스파이로 몰려 유치장에 갇히는 경험도 했었고, 한국과 일본을 제외한, 오늘날의 화약고와 같은 인도, 파키스탄, 아프카니스탄, 중동지역과 그리고 버마를 비롯한 인도 차이나 지역의 나라들을 돌면서, 이들을 포함한 전세계를 위해 그가 할일이 뭔가를 깊이 생각하는 경험을 체험하는 그의 원대하면서도 독특한 내면을 볼수 있었다. 보통 사람들의 생각이라면, 그만한 배경과 학력이라면, 귀국하여 편하게 일자리를 찾아 편한 삶을 살면서 인생을 Enjoy할만도 했을텐데....이러한 체험에서 인간 모두가 잘살수 있는 인생관과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정치적 색갈로서의 좌파성향과 Liberalism을 갖게 되지 않았을까?라는 해석도 나름데로 해봤다.

1970년대초에 퀘백주에는 과격한 퀘백분리주의자들이(FLQ) 퀘백의 독립을 외치면서 폭동을 부리고, 그의 친구이자 외교관을 납치하여 살해하고, Canada 주재 영국외교관을 납치하여 협상을 요구할때, 이들의 주장을 단호히 거절하고, 수상으로서 그에게 국민들로 부터 부여된 책임과 권리를 신속히 행사하는 정책의 일환으로 군대를 투입하여 그들을 일망타진하고, 소수의 Agitator들이 터무니 없이 주장하는 결과가 어떤것인가를 극렬하게 보여준 소신있는 정치가임을 깊이 느꼈다. 민주주의라는 기치아래 유권자들을 너무 의식하여 부여된 의무와 책임을 유야무야 하는식으로 얼버무리고 그순간을 넘기는
요즘의 정치꾼들에게, 꼭 필요한 정치가로서의 그의 소신을 한번씩 연구해 보기를, 권해 보고 싶다. 특히 고국의 정치판을 보면서 몇명의 좌익 극렬분자들 때문에 수천억을 들여서 벌이는 국책사업이 흔들리거나 지연되는 현실을 보면서, 더 우스꽝 스러운것은 야당의 리더라는 자들이 이들과 합세하여 같이 북치고 장구치는 역적질을 하고 있다는데 더 큰 문제가 아닐까 생각되며, 이를 지켜만 보는 소신없는 정부와 여당 지도자들은 뭘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국민들이 그들에게 권한을 위임 했을때는 꼭 좋은역만 하라는뜻으로 준것이 아니고, 때에 따라서는 국익에 반하는 행동과 선동을 하는자들을 국민의 이름으로 척결하라는 깊은 뜻을, 다음에 닥쳐올 선거때를 의식한 한표에 너무나 매달려서, 박력있게 수행하지 못하고 대의를 그르치는 망국적인 행동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다는점이 두렵고 무섭게 느껴진다. 박통같은, Trudeau같은 국가와 국민을 위하는 마음으로 직책을 수행하는 책임자가 없다는것이 오늘날 조국의 한계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모택동 정권하의 Red Army가 중국을 통치하고 있으면서 외부세계와 단절하고 있을때, 그는 중국을 방문하게 된다. 이계획을 알게된 미국정부는 그의 중국방문을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밀어부쳐 모택동과 주은래 수상과 만나서 현안을 협의하고, 극진한 대접을 받으면서 당시만 해도 비밀에 싸여 있다시피 했던 중국의 이곳 저곳을 막 결혼한 그의 부인과 같이 관광까지 하는 외교수단을 보이면서 동서 냉전의 해빙을 위한 물꼬를 텃던것도 그의 기록으로 남을것 같다. 그후 핑퐁외교를 통해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게 된다. Trudeau의 중국방문은 당시로서는 크게 언론에 부각된 기억이 없지만, 닉슨의 중국방문은 '핑퐁외교'라는 수식어를 달면서 전세계의 뉴스 거리가 되기도 했었던 기억이있다.

그가 수상으로 2기 집권때는 소수당 정부여서, 의회에서 보내는 하루가 편한날이 없었다고 한다. 그가 중간에 좌초하지 않고 연명할수 있었던것은 그의 정책노선이 우파가 아닌 좌파성향과 liberalism이 깊은데 그이유를 들수 있을것 같다. 그가 추진하는 정책이 Casting vote를 쥐고 있는 NDP의 정책과 맥을 같이 했기에 그들의 지지을 얻어 정권을 연장 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만약에 그가 우파를 지향하는 정치색채를 띄었었다면, 9개월만에 좌초했던 Joe Clark의 보수당과 같은 운명에 처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타고 그의 정책에 다 동의 하는것은 아니다. Social Benefit을 지향하는 그의 정책추진은 지금에 와서는 정부에 큰 부담이 되고, 이를 수정할려고 하면 이미 이러한 타성에 깊이 물들여져 있는 국민들의 동조를 얻기란 하늘의 별따기 만큰이나 어렵다는점을 볼때, 결국 일하기 싫어하는 일부 국민들의 혜택을 위해 다수의 국민들이 더 열심히 뛰어야 하는 병폐가 되고 있는점은 시사하는바가 크다 하겠다. 나자신 현재 은퇴생활을 하고 있지만, 수입의 2/3 이상 정도는 직접세 간접세등으로 정부에 바치고 있음을 보면서 깊이 느끼고 있는 점이다. 그많은 세금을 내가 직접 나 자신을 쓸수 있다면 여유롭게 세계 여러나라를 구경하면서 은퇴생활을 음미할수 있을텐데..... 그러나 공산주의를 단호히 거절하는 그의 좌파성향은, 공산주의도 아니고 진보좌파 성향도 더욱아닌 애매 모호한, 그러면서 이북의 Kim's Regime에게 선을 못대어 안달을 하는 고국의 사이비 정치꾼들과는 그래서 뚜렷히 구분이 된다.


캐나다 수상으로서 세계 각국의 정상들을 만나면서 그나라 사람들의 민족성을 파악할수 있게 한점도 흥미롭다.
먼저 이스라엘민족의 거만함과 목적을 위해서는 협박도 서슴없이 한다는 면을 보여주는 예를 보면, 그가 Menachem Begin 수상과 정상 회담을 할때 이스라엘 수상이 Trudeau에게 캐나다의 대사관을 텔아비스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겨 달라는 요청을 받고, 그는 당장에 반박을 했었다. 즉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가 아니고 점령지일뿐이니, 그렇게 할수 없다고 하자, Begin이 협박을 한다. 즉 토론토에 모여 살고 있는 Jewish들에게 이러한 당신의 생각을 얘기해서 다음 선거에 영향을 주겠다고 한것이다.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몬트리얼의 내 선거구인 Royal Mount에도 Jewish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그들은 당신과 같은 의견을 갖고 있지 않음을 잘 알고 있으니 맘데로 하라고 응수 했었다. 그후 Joe Clark이 정권을 잡으면서, 대사관이 옮겨지게 됐던 것이다.

인도사람들이 정직하지 못하고 거짖말쟁이라는것을 잘 나타낸 부분도 재미있다. 캐나다가 캔두기술을 인도에 전수해 주면서 평화적 이용 즉 전력생산에만 사용하기로 '인디라 간디' 수상과 합의했었다. 그후 몇년이 지난후 인도의 원자폭탄생산의 낌새를 알고 "왜 폭탄을 만들려고 혈안인가?" 라고 하면서 힐난하자
인도수상은 "산이라도 필요할때는 옮겨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응수 당하자, 크게 배신감을 느끼고 좀더 신중했어야 했음을 시인한 점이다.

큐바의 '카스트로'는 선동적인 대중연설가로 유명하지만, 사적으로 만나면 말이 없고, Skin diving을 매우 좋아해서 큐바 방문시 같이 격의 없이 Skin Diving을 즐길 정도로 친했으나, Angola 내전시 큐바군을 파견한것에 항의 하자, 약간명의 군대가 주둔해서 그들을 도아주고, 임무가 끝나면 곧 철수 할것이다라고 말한 카스트로의 말을 믿고, 귀국하여 확인해 보니 그와는 반대로 많은 군대를 파견하여 앙골라내전에 간섭한것을 확인하고 Warning했으나, 이를 무시하자, 곧바로 모든 원조를 끊고, 인도적 차원의 원조만 남겼던 것을 보면서, 공산주의의 속성이 뭔가를 잘 보여 주는 증거로 이해 할수 있었다.

중국 방문시 모택동을 만나야 하는데, 확실한 언질없이 수상 주은래와 협상을 하는 도중에 주은래의 보좌관이 들어와 귀속말로 몇마디 속삭인후, 주은래는 오늘 정상 회담은 여기서 끝냅시다 하고 일방적으로 선언하면서, '구경 갑시다 내가 안내 하겠소'라고 하면서 상대방의 의견은 물어 보지도 않는 결례를 아무렇치도 않게 행하면서 행선지도 말하지 않은채 차를 몰았는데, 한참후 어느 큰집에 도착하여 안내 되였는데, 모택동이 거주하는 집이었다. 그는 기다렸다는듯이 Trudeau를 반기면서 예의를 차렸는데, 모든 유리창에는 커텐으로 가리워져서 밖에서는 안을 볼수 없게 했는데, 이는 사진사가 모택동의 사진을 잘 찍게 하기위한 것이었음을 알면서 공산당조직의 가면을 보았고, 당시 실각하여 초야에 묻혀 있던 등소평에 대한 트루도의 의견을 받아 들여서 였는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이틀후 등소평이 복권되였음을 알려 주었는데, 오늘날의 중국이 경제적으로 부강하게 하는 초석을 다진 영웅으로 그는 크게 쓰임을 받은 인물이 된것인데, 하마트면 그대로 목숨을 잃을번한 그를 트루도와 연결시켜서 생각지 않을 수 없었던 점도 공산주의자들의 예정에 없는, 오직 권력갖은자의 마음에 따라서 곧 법이요 국가라는점을 보여주는 장면을 보는것 같기도 했다.

그가 강력한 연방주의자임을 잘 증명하는 면을 캐나다헌법을 영국으로 부터 받아올때에 일어나는 집안 싸움에서 극명히 나타난다.
캐나다의 강력한 연방제 헌법을 영국으로 부터 가져 오는데도 연방정부와 주정부들 사이에 피터지는 싸움이 몇년동안 계속되는 어려움을 거쳐서 마침내 캐나다인들의 품에 안기게 되는, 손에 땀을 쥐게하는 내용은 Memoirs를 읽는 내내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장면이었다.
헌법을 영국으로 부터 patriation 하는데 10개의 Province 가운데, Ontario, New Brunswick주만 정면으로 맞서 싸우지 않고, 나머지 8개주 수상들은( Gang of Eight) 연대를 이루어 캐나다 헌법을 가져 오지 못하게 하거나, 가져와도 각주에 더 많은 Power를 포함 시켜야 한다는 전략아래 세가지 전략까지 만들었었다.

첫째는 Trudeau정부가 영국에 가서 협의 할때, 그들도 런던에 가서 로비활동을 한다, 특히 퀘백은 많은 예산을 들여, 공짜로 대접받기 좋아하는 영국의회의원들을 상대로 향응까지 베풀었었다. 이계획이 실패할경우에는...
둘째는 이 로비가 실현 안될때, 각주수상들은 Constitution patriation 은 불법임을 빙자로 법원에 연방정부를 제소 하는 계획을 세우고, 마니토바와 퀘백주법원은 캐나다 헌법 Patriation은 합법으로 판정을 내렸고, 뉴펀드랜드주는 불법으로 판정, 결국 캐나다최고법원에 까지 가게되는 길을 만들었고, 연방의회에서는 당시 야당으로 있던 PC가 이에 동조하는뜻으로 Filibuster를 이용하여 시간을 끌었었다. 이계획이 실패하게 될경우에는
세번째 각주수상들이 대국민 설득작업으로 유세를 편다는 전략까지 만들었었다.

그러나 이들의 계획은 실패로 끝나 마침내 1982년 4월 영국여왕의 친필서명이 들어 있는 헌법을 갖게되었다. 이 작업을 하는데 크게 기여한 3명의 여성을 그는 감사해 하고 있다고 강조했는데, 영국여왕, Margaret Thatcher 영국수상, 그리고 영국주재 캐나다의 High Commissioner Jean Wadds 이다.
이러한 어려운 고비를 거쳐 마침내 캐나다가 자체 헌법을 갖게 됐는데, 자체헌법을 받아 올려는 노력은 1927년부터 시작하여 마침내 Trudeau의 손을 거쳐 그꽃을 피우게 된것이다.

그가 수상으로 재직하면서, 지금까지 여성에게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고위직에 문호를 개방한 최초의 기록을 세운것도 흥미롭지만, Individual freedom과 남녀평등을 행동으로 보여줬다는데 그의미가 높다 하겠다. 최초의 연방국회의장, 최초의 주총독, 최초의 대법관, 최초의 고등법원장, 최초로 Jewish 출신 연방장관, 최초의 French-Canadian출신 연방 재무장관과 상무장관, 최초의 Aboriginal 장관, 헌법에 원주민의 권리와 존재인정 삽입.



은퇴후 그의 아들중 막내가 BC주의 Rocky 산맥의 스키장에서 사고를 당하여 목숨을 잃는 비극을 맞이 하기도 했는데, 이는 몸으로 부딪혀 담력을 기르는 아버지의 기질을 아들에게서 그대로 보는것 같은 느낌을 받았었다. 건강했던 그가 이런 비극을 극복하는데 많이 힘들어 했었기 때문에 그가 몇년후 믿어 지지 않게 세상을 떠나게 된 계기가 된것이 아니었을까?라는 그의 아픈면을 읽을수 있었다.
http://www.latimes.com/news/opinion/commentary/la-oe-lee-pyongyang-
ploy-20110805,0,6143195.story

http://www.cp24.com/servlet/an/local/CTVNews/20110807/110807/20110807/?hub=CP24Home

Tuesday, August 02, 2011

캐나다가 미국산 말(Horse)도축장이라니....

캐나다가 말(Horse)도축장이라니....

캐나다가 말(Horse)도축장이 되고 있어 여론이 뒤끓고 있다고 한다. 미국에서 임무를 다한 말들이 수천킬로 북쪽에 있는 캐나다로 실려와 도축장에서 도축되여, 유럽,아시아 그리고 북미대륙에 식용고기로 팔려, 시민들의 식탁에 올려지고 있다고 하는데, 캐나다에서는 특히 퀘백주가 주로 식용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소,돼지 기타 동물들이 식용으로 널리 이용돼고 있는데, 왜 하필 말고기만은?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것일까? 개고기하면 고개를 흔드는것 처럼, 말고기 역시 식용으로 먹는다는 개념이 다르게 보여지기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는것으로 보이지만, 그보다는 식용으로 테이블에 올랐을때는, 인간에게 여러가지의 건강상의 문제가 제기 될수 있어서라는 문제가 일어나기 때문이라고한다. 거의 모든 말들은 자라면서 발생하는 Pain을 줄이기위해 특수약을 먹이면서 사육하는데, 말이 도축되여 식탁에 오를때에도 그약의 성분이 남아 있어, 그것이 인체에 흡수되면 건강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해, 심한경우 몸속의 피를 생성시키는 골수세포의 성장을 방해하여, 피가 몸속에서 엉키는 작용을 할수 있다는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미국에서는 2007년부터 말고기의 식용을 금하고 있어, 캐나다의 일부 도축업자들이 그반사 이익을 챙기고 있다는데, 이들은 도축된 말을 주로 유럽과 아시아지역으로 수출하고 있는데, 매년 그물양이 늘어 나고 있다한다.
이들 도축업자들이 말을 도축할때, 보통 소나 돼지를 도축할때 처럼 하지 않고, 소총(Rifle)으로 말의 두눈사이의 머리통을 겨냥해서 사격하듯이 하여 쓰러트린다는 것이 바깥세상에 알려 지면서 시민들의 분노를 사고 있는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잠깐 신문기사의 내용을 간추려 본다.

Shipshewana, Indiana - 아름다운 어메리칸 Amish 부족의 시골풍경이 캐나다의 가장 추한 비밀들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
포장이 안된 이시골길을 말들이 덜거덕 거리는 마차를 견인하고, 아이들은 곱게 단장된 포니를 타고, 윤기도 없는 말들은 캐나다의 도축업자에게 구매자들 앞에서 선을 보게되는 불행을 맞기도 한다. 이러한 농장으로 부터 말들은 1,300여 킬로를 북쪽으로 이송되여 캐나다의 4개의 도축장중 하나로 팔려간다. 이러한 긴여행끝에 도착한 말들은 22구경 칼리버 소총으로 두눈사이를 관통당하여 생을 마감한다. 말고기는 캐나다, 유럽 그리고 아시안사람들의 저녁상에 올려진다.

스타기자가 지난 금요일 한경매장에 들렸는데, 60 여마리의 말들이 35도의 찜통 더위속에서 건초나 물도 없이 조그만 우리안에 콩나물 시루처럼 감금되여 있었다. 그안에서 말들은 서로 발길질하고, 물어뜯는 등의 싸움을 하면서 여러시간 대기하고 있었다. 어떤 말들은 너무나 빈약하여 싸움도 못하고 있었고, 등뼈와 갈비가 상처를 당하기도 했고, 우리안의 희미한 불빛아래로 깊고 붉은 반점이 들어나 보이기도 했다. 영물로 통하는 말들이 도축되여 식탁에 오르는것은 이맛살을 찌뿌리게 하며 비인간적인 행동이라고 많은 캐네디언들 사이에서 분노가 일어나고 있다.

말을 팔려고 하는 주인들은 지난 180일 동안에 말이 약이나, 백신 또는 병을 앓았는지의 여부를 양식에 맞춰 작성토록 요구한다.
그러나 이서류는 형식에 불과하고, 기자가 말주인으로 위장하고 경매장에 갔는데, 아침 경매에 부칠려면 빨리 첨부할 서류를 작성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Veterinarian들은 "말주인들이 간직하고 있는 작성된 서류에 있는 병력에 거의 의존하지만 이내용이 과연 얼마나 정확한지는 의문으로 남을수 밖에 없다."라고 도축장에서 일하는 수의사 노조대표 Gary Corbett 씨는 설명하면서, 이를 단속할 적법한 규정이 없다고 말하면서 "파는 사람의 양심에 의존할수밖에 없다"라고 말한다.

한편 동물애호가들은 수천마리의 미국산 말들을 캐나다 또는 맥시코행의 긴여행을 좁은 추럭안에서 견디어 내야 하는데 이는 고문이나 마찬가지이며 때로는 추럭안에서 죽기도 한다고 한다. 말들은 소와 달라서 자기영역 보존을 중시하는 동물로 "34마리의 소를 추럭에 싣고 이동을 해도 아무런 사고가 없지만, 말의 경우는 서로 발로 차고 물어 뜯기고하고 운송이 끝날 즈음에는 최소한 2마리 이상의 죽은 말이 발생한다. 캐나다는 이러한 사고 때문에 사람들의 인식히 굉장히 부정적이다. 미국의 도축장을 폐쇄하면서 캐나다가 이를 대신하는 것으로 장소로 이용돼고 있다" 라고 설명한다.

Shipshewana의 'Kill' 경매가 시작되자 농장건물의 경매장에 약 50 며명의 사내들이 몰려 들었다. 그들이 경매장을 빙둘러 싸고 있는 사이로 한마리씩 말들이 그들앞을 지날때마다 경매장의 값흥정 소리가 계속됐다. 30초도 채 안되여 해당 말에 대한 경력을 설명하고, 새주인이 쓸쩍 흩어본뒤 다른곳으로 이송되여 바로 팔려갔다. 이절차를 거치는중 말의 이력서나 나이 또는 혈통에 대한 질의는 전연 없었다. 아무도 그러한점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것 같았다. 이절차가 끝나면 수많은 말들이 추럭에 실려 북쪽으로의 긴 여정이 시작된다. Mr. Gold씨는 말들이 경매장에 들어오면 그말에 대해 관심이 있다는 신호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경매가 끝났을때는 20여마리의 말을 그는 이미 구입한 것이다. 한마리의 말 값은 보통 $200달러가 넘지 않는다. 어떤 말은 단돈 $30달러에 거래 되기도 한다. 이들 업자들은 말의 무게(Weight)와 시장(Market)사정에 따라 $450 - 600 달러의 이득을 챙긴다. 다시 이고기가 소매점에서는 파운드당 $12달러에 거래된다.

Shipshewana "Kill"경매가 끝난지 4시간쯤 후에 18개의 바퀴가 달린 커다란 추럭이, Gold씨가 구매한 20여 마리의 말들이 건초나 물을 먹인 흔적이 없이 굶고 있는 경매장 뒷마당에 도착했다. 추럭 운전수는 이말들을 싣고 Gold's Roping농장이 있는 미시간주로 가기위해 북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포장도 안된 자갈밭길을 달려 디트로이트를 거져 이곳에서 국경도시인 Sarnia를 거쳐 캐나다로 보내진다. 고속도로를 달려 한 주유소에 정차 하면서 운전수는 말들이 실려져 있는 추럭을 심하게 흔들었다. 4시간을 달린후 농장에 도착하여 말들을 농장의 우리에 내려 넣고 먹이와 물을 먹였다.

일요일 10:50분경에 농장우리에서 말들을 끌어내여 추럭에 다시 싣고 북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국경 통가를 마치고 다시 Gas Station에서 하룻밤을 묶었는데 이번에는 추럭안에서 그대로 밤을 새우고 먹이도 주지 않았다. 국경통과시 검역관(수의사)에 의해 노란색의 밴드를 추럭 뒷문에 부쳤는데 이노란 밴드는 도축장에 도착하여 최종적으로 또다른 검역관에 의해 점검을 받을때까지 부착된 노란색의 밴드를 원형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 인터뷰에서 Gold씨는 자기는 말(Horse)을 포함한 동물들을 사랑하여, 말주인들의 무관심으로 더이상 사욕을 못하고 내팽개쳐져 있는 말들을 구조하는 동물 애호가라고 말했다.
신문기사 내용은 더이어진다. 아래 URL을 참조하면 더 상세한 내용을 볼수 있다.

지구상의 인간세계에는 그들 각자의 문화와 전통 그리고 언어를 보유하고 있다. 특히 먹는 음식에서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어떤 지역에서는 Gourmet로 고급음식에 들어가는것이 어떤 지역에서는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다. 1970년대 중반에 불란서를 방문 했을때, 고급요리를 대접 받은일이 있었다. 다름아닌 개구리 뒷다리를 이용하여 만든 음식이었는데, 미안하게도 난 잘 먹지를 못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대접한 회사의 중역에게는 미안했지만.... 결국 Vomit하고 마는 추태까지 발생하고 말았었다. 중동지역의 이슬람 국가에서는 돼지고기를 금한다. 돼지고기 삼겹살하면 소주한잔이 간절히 생각나는, 다른 서구나라에서도 즐겨찾는 고기인데, 그들에게는 혐오의 대상이 된다. 개고기는 아시아 국가들중 중국과 한국 그외 여러나라에서 여름철 보신용으로 사랑을 받아왔었지만, 문명이 발달된 서양사람들에게는 혐오의 대상을 넘어 야만인이라는 질타와 손가락질을 받아오고 있는게 현실이다. 물론 요즘은 중국과 한국의 삶의 질이 향상되면서 그들 Society내에서도 개고기하면 혐오의 대상으로 치부되는 경향이 늘고 있기는 한다. 동양에서는 말고기가 식탁에 오른다는 얘기를 들어본 기억이 거의 없다. 유럽국들 특히 불란서에 갔을때, 그들은 말고기를 많이 먹는것을 알았다. 처음 이곳에 이민와서 치즈에서 나오는 독특한 냄새가 발에서 나는 고린내와 똑 같아 골치를 아프게 했었다. 서양사람들의 식탁에는 없어서는 안되는 치즈인데.... 반대로 김치를 먹고난 다음에는 양추질을 하는 법석까지 떠는 이민 초기의 아픈 기억도 생각난다. 오죽 했으면, Lunar는 처음 이민와서 김치를 담을때 마늘을 넣지 않고 담았을까. 물론 기본적으로 들어가야 하는 마늘이 빠졌으니 맛이 제대로 날리가 있었겠는가? 세들어 사는 집주인은 우리를 비아냥 거리듯 코를 막고, 무슨 냄새냐고 물으면 마치 큰 죄를 지은듯이 쥐구멍이라도 찾는 심정으로 괴로워 했었던 기억들... 나름데로 분석을 해보면, 문화와 전통의 밑바탕에는 그나라의 국력과 비례한다는 나름데로의 공식을 터득해 왔다. 말고기를 먹는다는 이유때문에 유럽나라들이 아시아 나라들의 비난을 받은일이 있는가? 같은 이치로 요즘은 냄새가 고약한 김치가 전세계인들의 식탁에 오를 정도로 Popular한데, 이는 조국 대한민국의 경제적, 정치적 위상이 세계무대에서 비중이 커지면서 교류를 통해 서로의 문화와 전통을 이해하고 받아 들이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이번 말의 도축과정에서 말썽이 돼고 있는점은, 건장한 말이 아니고 이용가치가 떨어지고 병약한 말들을 수집하여 비밀경로를 통해 한곳에 모아 도축하는 과정에서, 군인들이 적을 사살하기위해 사용되는 무기를 이용하여 죽인다는 끔찍함과, 또 말들에게 성장을 도와주면서 Pain을 없애기위해 Drug을 먹은 말들의 고기에서 약성분이 검출되고, 말고기를 먹은 사람들은 심한 합병증을 유발할수 있다는 전문가들의 연구결과를 무시한채 식탁에 오르고 있다는점이 더 크게 부각됐기 때문인것 같다. 어느쪽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고 없고는 돈과 함수관계로 결론내려질것 같다는 생각이다. 한가지 분명한것은 내생전에 말고기는 내입속으로 넘길 생각은 전연 없다는 점이다. 편견은 오해를 낳고, 오해는 상대방을 적대시하는 극한 상황에 까지 발전될수 있다는 삶의 진리를 서로 다른 문화와 전통권에서 사는 보통사람들이 복잡한 절차없이 수시로 오가면서 접할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기전까지는 계속될 것이다. 이를 누가 해야 하는가? 답은 나와 있다고 보겠는데, 요는 이의 실행을 위해 발벗고 나설자들의 몫인것 같다.


http://www.thestar.com/news/article/1032379--shooting-horses-canada-s-slaughter-industry-under-fire?bn=1 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