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May 29, 2009

지금은 은퇴한 막내와 조카의 교통편제공으로 고향의 이곳 저곳 구경




























지나간 세월을 되돌려 보는것은 항상 후회가 앞선다. 그렇게 하지 않았었더라면......그시간들을 되돌릴수 없기에 더욱 애틋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번 고국 방문에서 작고하신 작은 형님의 큰 아들이 우리의 발이 되여 교통편을 제공해 주었기에 정겨웠던, 추억속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고향의 이곳저곳을 편하게 다닐수 있게 해 주었다. 그는 조카이지만, 나와는 불과 2살 적은, 지금은 공무원에서 은퇴하여 말년을 그의 손자손녀들과 살을 부비면서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초로의 노인이기도 하다. 조카 부부는 내장산과 백양사의 중간에 있는 전라북도 산림박물관을 구경시켜 주었다. 학생들의 현장체험장으로도 활용되고 있는 이곳에서 잘진열된 옛날 우리 조상들의 생활상을 볼수 있었고, 생태계의 상호 관계를 관찰할수 있었다. 우리가, 특히 커가는 어린 학생들이 즐겨먹는 햄버거가 산림을 해치는, 그래서 산림을 죽이는 무덤이라고 설명한 내용을 보고 놀랐다. 전연 생각지도 않은 내용인데, 그렇게 무심코 먹기만 했었는데......또한 그전에는 내장산에서 백양사를 가기위해서는 산속의 오솔길을 하루종일 걸어서 가곤 했었는데, 이번에는 잘 뚫린 도로를 이용했기에 불과 몇분만에 백양사에 도착했었다. 문명의 이기를 활용하는것이 좋긴한데, 반대 급부로 환경오염은 어떻게 되는걸까? 대웅전 뒤로 높게 보이는 황갈색의 바위봉우리는 변함이 없이 그대로 내눈에 들어왔다. 황토현에 있는 전봉준 장군의 전적비와 기념관을 관람하면서, 돌아가신 박통께서 전적비 제막식에 참석했던 당시의 순간들을 기억속에서 들춰내 볼수 있는 기회를 가졌었고, 지금은 관광명소가 되여 많은 구경꾼들을 전국에서 끌어 들이고 있는, 바다를 막아 대한민국의 지도를 바꾸었다는 새만금 간척지에서 그규모의 웅대함과 갑문들을 보았고, 간척지안의 갯뻘이 여러개의 지역으로 구분되여, 어떤곳은 농지로, 어떤곳은 공원지역으로, 어떤곳은 공업단지로 그리고 또다른 용도로 이용하게될 현장을 내눈으로 확인하기도 했었다. 변산에서 시작된 새만금 뚝( Levee)은 마치 조그만 산처럼 높아 보였으며, 그위로는 4차선 도로가 건설되여 군산까지 이어진다고 들었다. 고인이 된 정주영 현대건설회장의 얼굴이 이뚝을 보면서 생각난다. 뚝을 막는데 흐르는 물결이 너무세어 추럭에 가득한 흙을 부어도 다 떠내려 가버리자, 폐선으로 있는 큰 화물선을 끌어다 물결을 막고 뚝을 막게한 그의 아이디어와 용기 그리고 뚝심, 그것이 오늘의 한국 토목공사 기술걔발에 한획을 긋게한 그의 창작품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싶다. 당시 토목기술자들은 그의 아이디어를 무모한 짖이라고 동조 하지 않았지만, 그는 그의 배짱으로 밀었다고 들었었다.
내가 태어난 고향은 많이 변했다. 우선 사람들이 변했고, 동네의 모양도 그사이 너무나 변해 있었다. 머리속에서는 어제의 일처럼 여기는 우물이 있었고, 그옆에는 미나리깡이 있었고, 그옆으로 언덕길이 있었고,...... 그러나 그러한 모습은 흔적이 없었다. 수도물이 우물을 대신했고, 미나리깡은 메워져 마을 회관이 그자리에 앉아 있었고 그옛날 코흘리개 어린 시절을 보냈던, 내가 태어난 집 뒷뜰에 있었던 대나무밭은 흔적도 없었다. 코흘리개였던 내가 지금은 환갑을 지나고도 몇년을 더 살아오면서, 그많던 새까만 머리털이 다 빠져 버리고 그나마 몇개 있는 머리털은 하얗게 변해 있는데, 어찌 다른것들은 변치 않기를 바랬다면, 그것은 나의,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착각일뿐인것이라고 마음속에 다짐했다.
지난번 방문했을때는 동네 노인회장을 맡아 열심히 봉사 하시던 큰매형께서, 얼마전에 고인이 되여 고향 선산에 모셔져 있는 산소에도 들렸다. 봉분의 흙이 흘러 내리지 않도록 검은 천으로 덮어 놓은점이 어렸을때 보았던 산소와 다른점이었다. 꿈만 같다. 오랫만에 방문한 처남을 대접하기위해 같이 노래방에 까지 가서 같이 밤새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다른 세상에 사시는 매형이 됨을 보면서, 다시한번 시간의 흐름을 가슴속에서 느낀다. 막내동생은 전주에서 부터 정읍까지 우리 부부에게 교통편을 제공하느라 직장을 빠지기도 했었다. 조카부부는 교통편은 물론이고, 토종닭을 잡아 삶아 대접한다고 고생을 많이 했다. 신세만 지고, 그들을 뒤로하고 여행을 마쳤다.

Thursday, May 28, 2009

이북의 망나니들, 언제까지 반항적인 억지공갈만 칠것인가? 측은하다 못해 불쌍하다.


뉴욕타임스에서 옮겨온 기사 내용이다.
1990년대부터 불과 2년전 까지, 남한의 모든 어려움을 뒤로 제껴두고, 당시의 대통령들은 북한에 퍼주기만 하면서, 북한이 남한에 편하게 대해주기만을 바랬었다. 마치 짝사랑하듯 말이다. 그렇게 해주었는데도, 돌아온것은 핵무기를 개발하여 그기수를 남쪽으로 겨누지 않나, 정상회담을 하기로 합의하고, 좌파 김때중이가 북한에 갔었고, 김정일이는 남한을 답방하기로 약속해 놓고, 헌신짝 버리듯 했고, 그래도 혹시나 하면서, 그다음 대통령도 북한에 김정일이를 알현하러 가서, 퍼주고 왔었지만, 결과는 오늘 아래 기사에서 보듯이, 유엔군을 통해 남한과 맺은 휴전협정을 깨버리겠다는, 그래서 핵무기 설비나 물자를 싣고 공해상이나 남쪽 해상을 지나는 북한 선박이 남한해군이나 미군당국에 의해 정지당하고 해상점검을 받게 되면, 전쟁으로 간주하고 남한을 공격 할수도 있다고, 국제사회 통념상 절대로 이해가 될수 없는 망발을 해대는 북한의 최종 목적은 무엇인지? 그속셈은 뻔한 것으로 보인다. 이번 기회를, 남한정부와 미국은, 오히려 북한에게 섯부른 군사적 행동에 대한 대가라는것이 어떤것인지를 꼭 보여주고, 가능하면 김정일 집단을 권좌에서 몰아내고, 북한 주민들을 철의장막 고통으로 부터 해방 시켜야만 된다는 의무감을 기억했으면 한다. 상투적인 북한의 공갈에, 이제까지 호의적이었던 남한주민들까지도 더이상 참지 못하고, 망나니 북한을 얼르기에 이제는 지쳤다고 뉴욕 타임스는 지적하고 있다. 우리 한반도 조국이 더 크게 융성하고, 국민들의 답답함을 털어내기 위해서는 막힌 휴전선이 뚫려, 자동차를 몰고, 북을 통해 만주로, 시베리아로 그리고 유럽까지 달릴수 있도록, 위정자들은 명심하고, 지혜를 짜내고, 장애물을 제거 해야 한다. 안타깝기 그지 없다. 망원경을 통해 북쪽 산하를 쳐다보는 국민들의 모습이, 관광으로 본다기 보다는, 애잔한 마음이 더 깊게 묻어 있음을 보는것 같다. 아 조국이여, 이 염원이 언제 풀어질것인가? 이제는 감상에서 깨어나서 바짝 정신 차려야 한다.

S. Koreans Express Fatigue With a Recalcitrant North

Seokyong Lee for The New York Times
Visitors to the Unification Observatory Post in Paju, South Korea, can look into North Korea.


By MARTIN FACKLER
Published: May 27, 2009
PAJU, South Korea — Peering at North Korea in the hazy distance from the demilitarized zone, standing under an upbeat mural trumpeting improved relations between the separated countries, a visitor from South Korea struck a skeptical note.


“We sent them food, fertilizer, factories, more than we give our own poor people,” said the South Korean, Lee Soon-hwan, a 30-year-old office worker. “And all they pay us back with is this nuclear test.”

After years of hope that relations with the North would thaw if the South tried to coax it into engagement, regional experts and others speak of growing disenchantment. Many South Koreans reacted with exasperation and even anger to North Korea’s nuclear test on Monday, uncharacteristically harsh responses in a country that has long been more tolerant of its unruly northern neighbor than have its allies in Washington and Tokyo.

Partly, the reaction reflects the outrage here at the timing of the test, coming as South Korea was in mourning over the suicide of a former president on Saturday.

But there are also signs of fatigue with a recalcitrant North that has responded to the South’s largess by continuing to build up its nuclear arsenal.

“There has been a paradigm shift in how South Koreans view North Korea,” said Jeung Young-tai, a North Korea expert at the Korea Institute for National Unification. “The nuclear test has made people feel that North Korea has gone too far, and it’s high time for us to be tough on North Korea.”

The engagement policy followed years of enforced separation and relentless anti-North propaganda that ignored South Korea’s deep emotional bonds with the other half of the peninsula, forced apart, as they see it, by big-power politics during the cold war. The so-called sunshine policy began in the late 1990s and was broadly popular, even surviving the first North Korean nuclear test in 2006.

But Mr. Jeung said that people now felt no safer after 10 years of engagement and that the latest nuclear test, along with the North’s test-firing of a long-range rocket last month, had driven home to many in South Korea their need to build up their own military, and stick with their traditional ally, the United States.

Such a shift may bring South Korea closer in many ways to Washington. A sign came Tuesday, when President Lee Myung-bak announced that South Korea would belatedly join the Proliferation Security Initiative, an American-led program to intercept ships suspected of carrying unconventional weapons. The South had refrained from joining for fear of angering the North.

At the same time, fundamental differences with the United States remain. While Washington has in the past spoken of blockades and further isolating North Korea, few South Koreans are talking about cutting off aid and economic relations completely.

Instead, the South Korean public appears ready to accept continued engagement, but with new demands that North Korea also show good faith, particularly by curtailing its weapons program.

Still, even talk of imposing conditions on aid suggests a shift in attitudes for South Koreans, who have long viewed the North as a proud but poor cousin that should be tolerated and led toward eventually peaceful reunification. Such sentiments guided South Korean policy for a decade, as Seoul opened an industrial park and a mountain resort in the North, and extended it hundreds of millions of dollars in aid.

Those ties began to sour after the election last year of Mr. Lee, a conservative who said aid should be offered only if the North ended its nuclear program. Weariness with the North has also grown over the past year, after the North responded to Mr. Lee’s tougher stance by temporarily closing access to the Kaesong industrial park, detaining a South Korean accused of slandering the North Korean government, and test-firing a long-range rocket in April.

“South Koreans are feeling frustration and fatigue with the North Korea relationship,” said Daniel Pinkston, North East Asia deputy project director at International Crisis Group, an nonprofit organization that tries to prevent deadly conflicts. “They want more reciprocity.”

While there have been no recent public opinion polls, the shift has begun emerging in online chat rooms and newspaper opinion articles, like one in JoongAng Ilbo on Wednesday entitled “Stop Being Suckers for Kim Jong-il.”

The tougher attitudes were also apparent in more than a dozen recent street interviews with South Koreans at places like the Unification Observatory in Paju, an hour northwest of Seoul overlooking the demilitarized zone.

Many of those interviewed said they were frustrated that North Korea seemed to be pushing their country around, although the South was the one opening its pocketbook. And while no one called for cutting off the North outright, most agreed that South Korea should get more benefits, and more respect, for its money.

“I’m tired of the whole relationship,” said Kim Bong-jin, 52, who owns a machinery factory nearby. “The past administrations have supported North Korea too excessively, and the result is nuclear weapons.”

His friend, Lim Jae-hyung, 52, a technician, said, “We have the money, we should be getting more from it.”

From the observatory, the vastly different levels of wealth between the Koreas were plainly visible. In the North Korean town of Maegol, people could be seen walking along dirt roads between gray buildings with no vehicles in sight. By contrast, a busy six-lane highway cut through Paju, a popular tourist area with a go-kart track, a drive-in theater and rows of gaudy “love” hotels.

While conservatives have always taken a hard line toward the North, many on the left who supported the sunshine policy also say they are fed up with the North Koreans. This was particularly evident among supporters of former President Roh Moo-hyun, who jumped to his death on Saturday. A suicide note suggested that he was despondent about a corruption investigation.

Mr. Roh had pursued friendly engagement with the North, and many of those who mourned him at makeshift altars on Wednesday expressed anger at the North over the nuclear test, which they called an unforgivable show of callous disregard.

“It is unbelievable that they would do this at such a sad and sensitive time,” said one mourner, Kang Han-seung.

KTX(고속열차)는 실패작으로 보여졌다.








고국에서도 고속열차가 운행된다는 소식은 나뿐만이 아니라, 한민족의 피를 이어받은 후손들이라면, 반가워 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항상 조국을 마음에 그리고 사는 재외국민들이라면, 고국방문시 한번쯤은 타보고, 쾌적한 공간에서, 쾌적한 속도로 쾌적한 안정감을 느끼면서, 조국의 발전상을 고속열차속에서도 느껴 보고픈 바램이 마음깊이 자리잡고 있음을 이심전심으로 느끼고 있음을 본다. 

이번 고국방문에서 꼭 한번 승차해보고, 35년전에 타보았던 일본의 고속열차인 신간센을 타면서 느꼈던, 고속으로 달리면서도 아늑하고 흔들림없이 조용했던, 그래서 선진 일본의 철도 기술을 한없이 부러워 했던, 그러면서 내가 몸담고 있는 우리 철도는 언제쯤에나? 이런 고속열차를 운행하게 될수 있을까? 운이 좋으면 우리생전에 가능하겠지? 라는 막연한 기대와 그들의 고속철도 기술을 부러워 했던, 기억을 되새기면서, 서울역이 아닌, 용산역에서 그렇게도 그리던 고속 열차를 이용할 기회를,즉 나로서는 시승할 기회를, 잡은 것이다.

대전을 거쳐 전주 까지 가는 짧지만, 기분은 35년전의 도쿄에서 오사카를 달리는 긴여정이상으로, 소풍가는 어린아이의 심정으로 차에 올랐었다. 차에 오르기전 고속열차의 맨앞 견인차를 보기위해 발자국을 그곳으로 옮기는데, 마침 기관사 차림의 Locomotive Engineer가 시간을 대기하면서, 플랫홈에 서 있어 간단한 인사를 하고, 얘기를 해 보았다.

최고 300 Km/h까지 달릴수 있지만, 그보다 낮은 속도로 달리고 있으며, 대전 지나서 부터는 선로관계로 더 낮은 속도로 달린다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고마웠다. 오래전 고속전철을 시작할 계획을 발표 할 당시의 생각이 떠 오른다. 그때는 우리조국의 고속철도 기술이 전무하므로, 국제입찰을 해서 건설할려고 할때, 최종적으로 당시의 대통령 결정을 기다리는 철도회사는 불란서의 고속열차인 TGV와 일본의 신간센을 건설한 JNR로 압축됐다는 신문기사를 본 기억이 새롭게 떠 오르기도 했다. 

현재의 서울을 비롯한 각큰 도시의 지하철이 지금은 완전히 조국의 기술로 건설 운영되고 있지만 , 1호선인 서울역 -청량리와, 서울-인천간, 그리고 서울-수원간을 처음 건설당시에는 기술도 문제였지만, 자본이 없어 일본으로 부터 차관을 들여와 그들의 기술로 건설되고, 운영되고, 또 기술이전을 받았던 생각도 새롭거니와, 당시로서는 그렇게 거대한 Project에 참여 했었다는 나름데로의 자부심을 아직까지도 마음속에 자랑스럽게 간직하고 있었기에 더욱 KTX를 어느 나라 회사가 건설하는냐에 관심을 쏟으면서, 고국의 뉴스에 귀를 기울이곤 했었다. 당시의 대통령이었던 김 영삼씨가, 어느날 프랑스와 미테랑 당시 불란서 대통령의 청와대 방문을 끝으로, 불란서로 마음을 굳혔다는 뉴스를 접하면서, 내가 당시 느낀것은, '이게 아닌데....'라고 혀를 찬 기억도 있었다.

승차표를 꺼내 차량과 좌석번호를 확인하고 차에 올랐다. 벌써 몇년을 운형해서인지 생각보다는 덜 깨끗해 보였고, 좌석배치도 낯설어 보이게 차량안의 가운데를 기점으로 좌석의 절반은 열차가 달리는 방향으로, 나머지 절반은 열차가 달리는 반대 방향으로 고정되여 있었다. Fare도 달리는쪽의 좌석이 더 비쌌고, 고속버스요금의 약 2.5배 이상 더 비쌌다.. 왜 좌석을 고정시켰을까? 의문이 풀어지지 않은채 열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부대시설인 서울역과 용산역의 규모와 내부설비는 손색이 없이 잘되여 있었고, 자랑스러워 보였다. 여기서도 조국의 발전상을 보게도여 마음이 흡족함을 느꼈었다. 따라서 열차는, 더욱히 서양의, 그것도 불란서가 제공한 기술이라니 기대치가 한껏 부풀어 오른 속에서 열차는 한강 철교를 건너 달리기 시작했다.

열차가 달리면서, 우선 열차내의 써비스가 거의 전무임을 보고 놀랐다. 안내 방송을 통해 필요한것이나 문의 사항이 있으면 승무원에게 문의 하라고는 했지만, 전주에 도착할때까지 거의 3시간 동안에 꼭 한번 지나가는것을 보았을 뿐이다. 필요시 승무원을 호출할수 있는 기능이 눈에는 보이지 않았었다. 써비스 개선이 시급하게 느껴졌고, 고속으로 달리는 열차안에서의 승객의 안전은 절대적임을, 비행기를 타본 사람이면 즉각 느낄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승무원 호출기능이 있는데도 내가 미쳐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내 추측으로 약 200Km/hr을 넘어서 달릴때는 차량의 진동이 있었으며, 소음도 상당이 많이 들렸었다. 어떤때는 차량의 바퀴에 달린 Flange와 레일이 부딪칠때 들리는 굉음도 들리곤 했었다. 기분이 불안하게 느껴졌다. 250Km/hr이상으로는 달리는것 같지는 않았다. 왜일까? 아직 미완성이라서? 선로가 약해서? 아니면 열차의 흔들림을 방지하기 위해서? 등등의 Questions 들이 머리에서 맴돌면서, 왜 김영삼 대통령은 불란서를 택했을까? 규장각 책한권을 넘겨준다는 그말에 넘어가 버려서 였을까? 등등.... 머리에서 일어나는 각종 의문점들이 이렇게 규장각의 책으로 까지 연결 되여 끝이없이 이어진다. 내가 왜 이런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가? 그냥 한번 타 보는것으로 족하지 않고....나도 뭔가 문제점이 있는것은 아닌지? 라고 자문자답도 해 보면서..... 계속 열차는 달린다. 대전을 지나면서 부터는 KTX 이름이 무색하게 거북이로 달린다. 왜 그런지는 당국자들이 더 잘알고 있으리라 믿어보고 싶기만 할 뿐이었다. 나의 짧은 지식과 경험으로 볼때, KTX는 실패작이라고 결론을 내릴수 밖에 없었다. 무척 실망이 컸다. 아무리 기술개발을 한다 해도 기본 골격은 TGV를 유지 할것이기 때문에 더 절망적으로 느껴졌었다.

건설에 대한 뉴스가 처음 나왔을때, 나는 외람되게도 교통부장관과 철도청장에게, 고속철도는 일본의 신간센을 도입해야 한다는 이유를 나름데로 적은 편지를 보낸 기억이 새롭게 떠 오르기도 했다. 물론 그편지가 그들의 손에 들어가 읽혀 졌는지는 모른다. 또한 그들한테서 회답을 기대 하지도 않았었다. 그러나 그냥 지나칠수가 없어, 그렇게라도 나의 조국사랑과 철도 사랑을 표현해 보고 싶어서 였다. 그내용을 간추려 옮겨 본다면, 첫째, 한국과 일본은 지리적으로 많이 닮았다. 즉 산악지대가 많은게 특징이다. 둘째, 같은 동양권이고 이웃나라이기 때문에 풍습과 언어와 생각이 많이 비슷하다. 셋째, 일본 철도의 기술은, 한국에서 지하철을 건설하여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기술이전도 순조롭게 진행되여 거의 100 % 국산화까지 하고 있음을 볼때, 성공적으로 볼수 있기 때문이었다. 넷째, 가장 큰 문제인 언어에서 일본기술자와 한국의 기술자 사이에, 대화나 서류를 통해 서로 이해 하는데 가장 적은 실수와 이해만 있을수 있기 때문이다. 불란서와의 경우에는, 서로 영어를 통하여 의사 소통을 해야 하는데, 불란서 언어에서 영어로 다시 한국어로 변환시켜 내용이 전달되야 하는데 그과정에서 뜻하는 내용이 변질 될 우려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외 여러 사항등을 보냈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얼마전 레일밑에 까는 침목의 일부분이 Crack 되여 큰 사고가 우려 된다는 뉴스를 본 기억이 난다. 큰 기술이 요하는 중대한 문제는 아니지만, 내 생각으로는 분명히 서로 다른 언어에서 오는 이해 차이가 커서 발생한것으로, 그결과는 엄청나게 크다고 볼수 있다 하겠다. 또 고속철도 건설은 국책사업인데, 건설이 너무나 오래 지연 된것도 한 원인이 될수 있다 하겠다.

더욱 웃기는것은 도룡용의 생활환경을 파괴한다는 명목으로 한스님이 좌를 틀고, 철로가 건설되는 곳에서 시위를 해 공사를 중단 했다는 어처구니 없는 뉴스에, 국책사업과 국익의 순서를 어떻게 정하는가?를 생각하게 하기도 했었다. 한여승 때문에 국책사업에 시행착오를 해야 한다니....그렇게 조국이 한시민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 일을 진행 시킬정도로 민주주의 제도가 성숙해서 였을까?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그무엇이 뒤에서 조정하고 있지 않았었을까?라는 의심이 지금도 떠나지 않고 있다.

10년이 훨씬 지난 오늘날에도 미완성인채로 KTX 는 달리고 있다. 구간에 따라서는 기존열차 속도로.... KTX는 잘 달리고 있는데 무슨 헛소리 하느냐고 수긍을 안하는 사람이 있다면, 혹시 해외 여행시 불란서, 일본, 또는 독일에서 한번씩 타 보기를 권하고 싶다. 그래서 비교를 해 보면 쉽게, 이해 할수 있을것으로 생각되여서다. 그래서 국가를 운영하는 Leader의 올바른 선택이 얼마나 국가 운영에 손.익을 끼치는지.... 더이상 이런 잘못된 선택은 없어야 한다라고 고국의 위정자들에게 권하고 싶은 간절한 생각에서 적어 보았다.

http://cafe.daum.net/khykhr07/4yNv/13963

Saturday, May 23, 2009

Mt.Nemo 트레일 등반























이른 아침, 1개월 반만에 BRUCE TRAIL중 걷기 편안한 한 구간의 등산로를, 등산 동료들과 등반하기위해, 준비를 하면서, 밖에 날씨를 보았다. 토요일 이른아침, 창문을 통해 선명히 보이는 Lake Ontario물은 항상 그렇듯,잔잔한 흔들림을 그리면서 우주를 포용할듯, 넓은 가슴을 활짝 열고, 그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모습이 평화롭다. 아침에 으레히 해온던 습관데로 컴퓨터를 잠깐 열어 보고 깜짝 놀랐다. 시간은 아직 이른 아침 6시가 조금 지났었는데(토론토 시간), CNN 인터넷 뉴스에 "한국의 전임 노통, 자살"제하의 기사가 눈에 번쩍 들어 왔다. 믿어지지가 않아, 다시 고국의 조선일보 인테넷 뉴스를 클릭해 보았다. 정말이었다. 한나라의 대통령까지 지낸분이 자살을 하다니...... 봉하마을 사저 앞의 산등성이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는 뉴스는 충격이었지만, 그로인한 한국의 정치판과 국민들의 활동에 미치게 될 영향을 먼저 생각해 보면서.......전임 대통령들의 퇴임후의 평화로운 생활상이 언제 부터, 서구 선진 사회의 퇴임 대통령들 처럼 보여지게 될까? 20여년이 지난 현재에도, 이번에는 극단의 방법인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정치적 후진성을 세계 만방에 또 다시 보여 주고 말았으니...... 이유야 어쨋던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컴퓨터를 접었다.
등산 준비를 했었지만, 마음이 무거워, 노통께서 뛰어 내린 30여 밑의 낭떨어지와 비슷한 계곡이 있는 Mt. Nemo로 등산 구간을 바꾸어 걷기로 마음먹고 다시 지도를 그렸다. 3대의 차량에 13명의 대원이 참석하여, 약 1시간을 달려 목적지에 도착, 인솔지도자분의 축복 기도를 시작으로 산행을 시작했다. 하늘은 구름한점 없이 맑다. 숲속의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언덕 아래의 또 다른 숲색갈은 녹색으로 창조주의 그깊은 뜻을 느껴 볼수 있는 따뜻한 그색이었다. 마음다져먹고, 다시 잡은 등산코스인 Mt. Nemo의 Cliffs는 오늘은 그높이가 다른때 산행할때와는 다르게, 겨우 30여미터 높이지만, 깊은 낭떨어지로 보이면서, 절벽밑 바닥의 돌짝밭은 전부 뽀쭉 뽀죽 날을 세워 위로 부터 뭔가 떨어져라, 그러면 꿰뜷을 거다 라고 응시 하고 있는것 처럼 보였다. 순간, 이러한 곳에서 그럼 끔찍한 사건이 발생 했었겠구나 라고 조용히 생각해 보면서, 아래를 응시해 보았다. 대통령이 됐을때, 그이상 뭘 더 바랄 이유가 필요 하겠는가? 뭔가 꽉 짖누른 압박과 수치심의 결과가 삶을 포기해야 되겠다는 쪽으로 더 깊이 작용 했음을 느끼면서, 그순간을, 계속 걸으면서, 또 걸으면서, 또 걸었다. 떨처 버리고 오늘 산행의 근본 목적을 되찾고, 동료들과 산행의 깊은 의미와 맛을 나누어야 한다. 옆에 취나물이 몇개씩 보인다. 그렇게 엄포를 했건만, 여자 대원들은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한웅큼씩 Pick했다. 산행속에서 그렇게 나물을 뜯는 속에서 그희열을 더 느낀다면, 산행의 목적은 배로 커질것으로 생각된다면......눈감고 지나쳐야지.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Ontario 주를 상징하는 꽃들인 Trillium이 활짝 꽃을 피워 산행하는 모든이들을 반겨 주는것 같이 정겨운 모습이다. 보통 하얀색갈의 꽃이 많이 피는데 오늘은 옅은 핑크 색갈이 돋보인다. 우리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어서 일까?
그옆에 Mt. Nemo Conservation을 평생동안 정성스럽게 보살폈던 한 대원을 기리는 동판이 바위에 부착되여, 그분의 뜻을 기리고, 이곳을 지나치는 산행객들에게 두고 두고 기억하게 할것으로, 그러면서 봉사의 삶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 줄것으로 보였다. 감사.
이마에 땀이 영근다. 그동안 오랫동안, 멀이 떠나 계셨던 한 대원 부부가 다시 토론토로 정착하여 오늘 산행에 합류한 기쁨도 자못 크다. 모두가 반가히 그들은 맞이 하고, 걸으면서 삶의 얘기들 나누기에 여념이 없었다. 잠시 전망대(Look Out)에서 휴식을 취해본다. 어느 여자 대원이 빨간색의 날고구마를 예쁘게 잘라서 먹기 좋게 준비해 와서 한조각씩 나누어 먹자고 대원들에게 돌리는 마음과 손길이 이쁘다.
절벽 아래로는 평화롭게 펼쳐진 Farm Land 가 끝없이 보이고, 그사이에 푸른 초원으로 보이는 골프장이 잘 어울리는 한장의 그림처럼 보인다. 아스라히 보이는 골퍼들의 모습도 여유롭게 보이고.... 다시 발길을 옮긴다. 바위계곡 사이로 뜷린 사잇길을 타고 낭떨어지 밑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내려 간다. 산행객의 편함을 돕기 위해 절벽사이에 만들어 설치해 놓은 Stile한계단씩 밟고 내려가면서, 누군가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그분들의 수고로 우리는 이렇게 편케 걸으면서, 창조주께서 주신 자연속을 호흡하기 때문이다. 감사한다.
헤여지기전, 마셔보는 한잔의 커피향은 특이하다. 무사히 산행을 마치게 됨을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 하면서..... 또 다시 고인의 명복도 곁들여 빌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