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November 23, 2009

당시에는 쳐다 보기도 싫었던 .'시래기'를, 오늘은 보물 모시듯...


과거속의 추억은 그내용이 풍부한것이나, 그렇치 않은 것이라 할지라도 미화되여 되살아나게 마련이다.
며칠전 한국식품점에 아내를 따라 들렸었다. 김장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규모가 적지만, 그래도 닥아오는 겨울을 그냥 보내기는 뭔가 허전하기에, 배추 한상자를 구입했었다. 그리고 무우 한상자를 구입했는데, 무우상자가 훨씬 적은데도, 값은 배추보다 2배를 더준것같다. 그것으로 김장에 필요한 재료는 다 구입한줄 알았는데, 아내가 수북히 쌓여 있는 '시래기'진열대에 가더니 몇개를 집는다. 나는 옛날 생각을 하면서, 고맙게도 이렇게 고객들에게 무료로 공급해주나 싶어, '이걸 뭐에 쓸려고? 아무리 공짜라지만 나는 별론데...' 아내가 나를 뻔히 쳐다본다. 그러면서 가격표시가 있는곳을 손으로 가르킨다. 아뿔사 순간 내가 착각을 해도 너무나 많이 하면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것을 직감했다. 공짜로만 생각했던 시래기는 얼른 머리를 굴려 계산해 보았을때, 배추보다 더 비싸다는것을 알았다. 기억에서 아스라히 떠오르는, 시래기에 대한 추억이 뇌리를 스친다. 서리가 하얗게 내린 늦가을 아침에 어머니에게 끌려 텃밭에 나가 땅속에 깊이 몸둥이를 쳐박고 있는 '왜무시'를 고사리 같은 두손으로 힘껏 뽑아 당겨, 광주리나 지게 바작에 쌓아, 집으로 나르던 생각이 가슴 저리게 생각난다. 손은 시렵고 무시(무우)잎에 달린 하얀털같은 가시가 손등을 스치면 따끔하게 아파해 했던 생각도 난다. 집앞마당에 다 부려 놓으면 어린마음에서 보는 무시더미는 산처럼 크게 보였였다. 형제가 많았던 우리집은 먹는입이 참 많았었다. 겨울을 나기 위해서는, 수도 셀수 없을 정도로 많은 김장 배추를 하루종일 동네 아주머님들과 어머니는 품아시를 해가면서 소금에 절이고 씻고, 김치를 담았고, 형들은 부엌뒷켠에 있는 장독대 옆에 구덩이를 파고 김장 항아리들을 묻고, 그위를 영을 엮어 덮어주어 겨울에 동파하지 않도록 했었다. 무시에서 떼어낸 시래기는 지붕을 이는 날개 엮듯이 묶어 처마밑이나 집뒤 언덕의 감나무가지에 매달아 말려, 겨울양식으로 보관하곤 했었고, 동네에서 우리보다 못사는 사람들은 그것을 얻어다 그들나름데로 겨울양식에 보태곤 했었다. 그래서 시래기는 의례히 나도먹고 남에게 나누어 주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한, 값이 안나가는 그런정도로만 지금까지 생각해 오고 살았었다.
1950년대 중반기부터 기억되는 지긋지긋한 가난은 아직 어린 나에게는 정말로 기억하기 조차 싫은 시간이다. 겨울중반이 되면 의례히 식량이 떨어져, ,안방 윗목에 겨울양식대용으로 쌓아놓은 고구마를 먹어야 했었고, 간혹 밥을 하게되면, 쌀과 보리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대체품으로, 고구마밥, 무시밥 그리고 시래기를 같이 밥솥에 넣고 삶아 시래기밥을 만들어 먹었었다. 철모르는 어린나이였기에 왜 이렇게 먹기싫은 밥을 우리 어머니는 만들어서 주는가? 결론도 없는, 투정도 부리곤 했었던, 그럴때마다 대답은 '너는 아직 배가 덜고파서 배부른 타령을 하고 자빠졌구나' 라고 속으로는 귀한자식들(?) 맘껏 못먹여 아파해 하시면서도,겉으로 나무라시던 모습이 오늘따라 기억에 생생하다. 오늘 아내는 그렇게 천대받고 괄시받았던 무시래기를 거금(?)들여 사와 정성스레 삶아 물기를 짜낸후 말려서 시래기를 만들겠다고 정성스럽게 손질한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곳은 개인집이 아니고 베란다가 없는 콘도이기에, 삶으니 부피가 줄어 몇개 안되는 무시래기를 손에 들고 말릴곳을 찾느라 전전 긍긍이다. 아내가 갑자기 세탁물을 맡겼다 찾아올때 끼어오는 철사로된 옷걸이 하나를 옷장에서 꺼내 오더니 그위에 몇가닥의 시래기를 걸친다. 아직 물이 뚝뚝 떨어지기에 부엌싱크대에서, 시래기 밑부분을 내가 손으로 꾹짜서 물기를 일부 제거하니 물이 떨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더니 그옷걸이를 창문쪽으로 들고 가더니 창문을 열고 그가운데, 통풍이 잘되는곳에 걸어 놓는다. 바람에 조금씩 흔들린다. 물방울이 떨어져 마루바닥을 적실까봐 그밑에 아내는 목욕타올을 깔아서 물이 떨어지는것을 흡수하게 한다. 그광경 뒤로는 Yacht들이 클럽야드에, 겨울을 보내기 위해 정박해 있는 모습이 약간은 서로 격이 맞지 않은 모습으로 어루러진다. 이광경을 호수가를 지나는 산책객이라도 보게 된다면? 어쨋던 아내의 그모양이 너무나 정성스럽다. 남편인 나를 대하는것 보다 더 정성을 쏟는것 처럼 보인다. 보물이 별거더냐? 바로 이런것을 보물 모시듯 한다고 하는것 아닐까? 불과 60 여년 사이에 이렇게 세상살이가 변했음을 오늘 이순간을 통해서 본다. 우리의 두아이가 이런 광경을 보면 엄마나 아빠를 어떻게 생각할까? 다 말려서 다시 시래기를 먹게 되는날 다시 그옛날 그시절을 생각하게 될것이다. 감사.

Sunday, November 22, 2009

Credit Valley지역의 Silver Creek Conservation Trail Walk

















Silver creek conservation지역을 관통하게 되여 있는 27 Sideroad, 남북으로 뻗어있는 Tenth Line과 Ninth Line사이가 개발 되지 않아
자칫 잘못이해하면 그곳을 찾아 가기위해 길을 헤멜수가 있어, 처음 이곳을 걸을려고 찾아오는 Hiker들에게는 신경 쓰이는 곳이다.
다행히 어제까지만 해도 가랑비가 내렸었는데, 오늘은 햇볕도 나고, 기온도 초겨울 날씨답지 않게 10도 까지 상승한다고 했다.
우리팀이 도착했을때는 벌써 다른팀이 산행을 시작하고 있었다. 우리도 일찍 움직인다고 하는데, 우리보다 더 발 빠른팀이 있는것을 처음(?)으로 목격한 것이다. 그렇게 신경 쓰이는 이유는 바로 좁은 도로 Shoulder에 주차 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작부터 가파른 계곡의 언덕을 올라야 하는, 단풍나무로 꽉 덮힌 이곳의 트레일에는, 벌써 썩어가고 있는 낙엽으로 수북히 쌓여 있었다.
지난 며칠사이 내린 가랑비가 낙엽속으로 스며들어 젖어 있는 낙엽위를 Hiker들이 밟고 지나가 어떤곳은 진창밭 같이 신발을 더럽게 하는곳도 금새 나타나곤 했다. 트레일 옆으로 보이는 단풍나무숲은 여름에는 하늘을 덮었을 위용있는 큰 나무들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고, 그나무들 Stump에는 수북히 쌓인 낙엽들이 다소곳이 노란색갈을 아직도 유지 하면서 젖어있었다. 이곳은 또한 표면이 Speyside구간처럼 이끼가 잔뜩낀 돌짝밭으로 이루어져 신발에 harm을 많이 주는것 같았고, 한발짝 띌때마다 젖은 이끼가 덮힌 돌에 미끌리지 않도록 신경이 곤두 서기도 한다. 왼쪽 계곡 밑 깊숙한 곳에서는 Silver Creek을 흐르는 물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같은 물흐르는소리이건만, 여름철에 들리는 감각하고는 판이하게 느껴진다. 여름에는 시원하게 느껴졌고, 오늘은 추워오는 겨울이 먼저 연상되게 하는 소리인것 같았다. 거의 5킬로 이상을 이렇게 가파른 계곡 낭떨어지 edge로 나 있는 트레일을 걷는다. 계곡 모서리에 우뚝 서있는 큰 나무가 유난히 달리 보인다. 맨밑쪽에 있는 가지(branch)가 L자 모야으로 거의 직각되여 휘여져 나오다가 다시 하늘을 향해 자라가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중간에는 절반정도의 가지 몸통이 썩어 곧 부러질것 같아 보였는데, 그곳을 지나 자란 부분은 하늘을 향해 힘차게 커가고 있는것 같이 보였다. 우리 인간들 같으면 병상에 누워서 도움을 받으면서, 활동을 접고 있을것 같이 느껴지는데..... 걷고 있는 Trail 오른쪽으로 커다란 원통형같은 형상의 모형이 눈에 들어온다. 가까이가서 보니, 그렇게도 크고 튼튼해 보였던 아름드리 단풍나무 한그루가 뿌리가 뽑혀 넘어지면서 그밑부분을 허공을 향해 누워있는
모습으로, 오래전부터 그렇게 있었던것 같다. 탱크로 밀어도 끄떡 하지 않을것 처럼 보였던 나무들이데, 이렇게 쓰러져 있는 그이면에는 어떤 힘이 작용해서 일까?라고 상상해 본다. 바람의 힘에 못이겨 넘어졌다면 왜 하필 이나무였을까? 그옆에는 더큰나무들도, 더 적은 나무들도 빽빽히 들어차 있는 숲인데 ...... 한가지 발견한것은 지상위로는 그렇게 크게 자랐어도 이를 지탱하기위한 땅속에서의 뿌리가 깊지 않고 옆으로만 퍼져 있어 외부에서 충격이 오면 견디지 못하고 넘어지게 되여 있음을 보면서, 뿌기가 견고해야, 마치 집을 지을때 기초를 튼튼히 하듯, 하는데 우선 영양분 보충하기에 편한 지표면을 향하다 뿌리를 깊이 깊이 땅속으로 넣는 시기를 놓쳐 버린것으로 귀결됐다. 우리의 인생살이를 다시 되돌아 보게 하는 예시인것을 암시해 주는것 같다. 보기 드문 긴 계곡임을 오늘은 새삼 느낀다. 중간에 여러개의 Side Trail들이 있었지만, 약 7킬로의 Bennett Heritage Trail은 경치도 아름답고, 그안에는 Owl Creek이 조용히 흘러 농장으로 발전 하고 있는 곳인데, 지금부터 500년 전에는 원주민들이 모여 살면서 농사짖던 곳이라고 역사학자들은 설명해주고 있는 곳이다. 오늘은 이곳을 지나지 않고 MainTrail만 걷기로 했기에 아쉽지만, 다음으로 미룰수 밖에 없다. Fallbrook과 27 Side road 가 만나는 교차점에는 하얀지붕을 한 농장 창고 같은 건물이 인상깊게 자리하고 있다. 항상 이곳을 걸을때마다 건물의 지붕과 그옆의 울타리를 주의 깊게 살펴보곤 하는 습관이 어느때부터인가 생겼음을 오늘도 반복한다. 어느해 가을철에 이곳을 산행 하면서 지나칠때 진기한 풍경을 목격 했었기 때문이다. 다름아닌 약 100 여마리가 넘을 큰 독수리때들이 지붕과 울타리에 그위용을 자랑하면서 여유있게 쉬고 있는 모습이 기억에 생생하기 때문이었다. 힌색에 약간의 Grey색을 띄고, 영화 Ten commandments에서 본 영화속의 한장면, 즉 바로왕이 자기의 신으로 모셨던 독수리 형상같은 그런 위용있는 모습들이었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모습이 전연 안보인다. 이제는 이곳이 그들이 살거나 쉬기에는 적합지 못한 오염(?)지역으로 변해서 였을까? 돌아오는 길에서는 아내가 힘들어 해 많이 뒤떨어져 걸어 갈수 밖에 없었다. 앞서간 팀들은 시야에서 사라진지 오래다.
지도를 펴보니 길을 따라 직선으로 가면 지름길이 될것 같아 그렇게 하기도 하고 약 10여분을 걸었다. 기대를 잔뜩하면서, 팀원들을 만날때는 늦었다는 인상을 주지 않을것 같아 기대를 잔뜩하면서 걸었는데, 아뿔사 예상했던 길이 나오지 않아, 다시 지도를 펴고 자세히 살펴보니, 엎친데 덮친 격이라고나 해야 할까? 지도를 잘못보고 착각했다는것을 알수 있었다. 왔던 길을 되돌아 가야 하는 괴로움(?)이 뇌리를 스친다.
아내가 오늘따라 무척 힘들어 하기에, 약 10 여명이 조금넘는 베테랑팀원들속에 끼어 반환점까지가서 점심을 먹고 되돌아 올때, 아내가 뒤쳐지는것을 보고, 그와 함께 천천히 걷기를 하면서 동행이 된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주 잘한 결정이었다 싶다. 그들과 같이 빠른 걸음으로 걸었었다면, 아내 혼자 맨뒤에서 헤매면서 더 힘들어 했으텐데..... 다시 걸었던 Road을 따라 되돌아와서 원래의 Trail을 걸었다. 얕은 수를 쓸때는 성공보다는 실패할 확률이 높다는 평범한 진실을 여기서도 느낀다. 오늘 신고간 신발이 발가락을 괴롭게 한다. 한걸음땔때마다 통증이 온다. 오래신은 신발이었지만, 정이 들어서 쉽게 버릴수 없어 얼마전에 Mountain Equipment Store에 가서 강력제 Glue을 하나 사서 신발에 부착시키고 수선을 잘 하여 오늘 처음 신고 온것인데, 이렇게 어렵게 한다. 낙엽이 잔뜩깔린 진흙탕속길을 걸어서 일까, 신발도 더럽고 수선한곳은 전부 다시 이완되여 더 어렵게하는것 같다. 집에 도착하면 당장에 쓰레기통에 던져 버려야 겠다는 생각밖에는 다른 여유가 없다. 아내가 뒤떨어져, 다시 잠깐 쉬었다. 다음산행때는 걷는것도 중요하지만, 속도조절에 더 신경을 써야 할것 같다. 아내는 걷는 속도가 그렇게 빠른편은 아니지만, 지속적으로 걷는것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주차장에 도착했을때는 벌써 다른 팀원들은 다 떠나 버렸고, 우리와 Car Pool한 Mr. Danaka부부와 Walter Liu만이 우리를 지루(?)하게 기다리고 있어, 미안함을 금치 못했었다. 그래도 심신훈련을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이 마음속에서 흐믓하게 묻어난다.

Thursday, November 19, 2009

미국, 중국을 상대할 새로운 나라의 대통령이 탄생했단다.


지난 8여동안을 끌면서 진통을 거듭한 끝에, 오늘 드디어 EU합중국의 새로운 대통령이 탄생 했다고 뉴스는 전한다.
그동안 유럽연합으로, 먼저 통화를 하나로 묶더니 아예 미합중국처럼 유럽 합중국이 탄생시킨것이다. 미합중국의 초대 대통령은 George Washington 이었읍니다. 과연 오늘 새로 선출된 유럽합중국의 대통령은 제2의 George Washington이 되여 역사에 인물로 남겨져 후세에 전해 지게 되기를 개인적으로는 희망합니다만....모든 정황이 George Washington때와는 다르다는것은 기정사실이기에, 긍정적인면도 많고, 또 반대로 부정적인 면도 많아, 평탄하게만 보여지지 않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듭니다.
내년(2010년도 1월 1일)부터 새 대통령으로 Full time 임무를 수행할 사람은 벨지움의 현수상 Van Rompuy로서, 국제 무대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라고 한다. 새 외무장관으로는 영국출신의, 역시 국제무대에 잘 알려지지 않은, 현 유럽연합의 Trade Commisioner인 Catherine Ashton이 임명됐다고 한다.
한창 협상중에는 전 영국수상 Tony Blair이 새 대통령으로 추대될 것으로 여론이 있었지만, 최종 투표에서 그는 27 회원국의 수상이나 정부의 과반수 지지를 얻지 못해 중도 하차 했다고 한다. 새로운 유럽합중국은 민주주의를 지향 한다고 발표했었지만, 실질적으로 오늘 대통령 선출에서는 비공개로 진행되여 투명성이 결여된것으로 앞으로 까십에 휘말릴 가능성을 내포 하고 있는것 같다. 바꾸어 얘기하면, 유럽사람들은 새로운 대통령 선출에 직접 참여 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으며, 차선책으로 자기들이 선출한 의원들을 통해 의견을 나타낼 기회마져 갖지 못한 가운데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한 것이다. 새로운 중앙 청사는 현 EU 본부가 있는 브라셀에 있게 된다고 한다.
토니 블레어는, 유로달러통화 정책을 채택하기위해 각회원국들이 고군분투 할때, 그는 영국의 수상으로 재직하면서,유럽통화정책에 영국이 가입 할수 있었는데도,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않았었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었던점이 이번 새 대통령 선출에서 밀려난 계기가 된것같다.

회원국 27개국은 앞으로 중앙정부에 대해 어떤 위상을 갖게 되며, 새로운 대통령의 힘은 어디까지며, 경제, 외교, 군사, 그외 많은 난제들이 굳건한 유럽합중국을 건설 하는데 어떤식으로 영향을 미칠지? 지켜볼 일이다. 캐나다의 동부지역, 즉 캐나다의 Maritime Provinces들이 다른 Provinces들에 비해 가난한것 처럼, 새로운 유럽합중국 회원국들중, 그리스, 터키, 포투갈,발틱 3국등 가난한 나라들에 대한 중앙정부의 대접이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한 점이 될것 같다. 미국이나, 캐나다처럼 연방정부가 대표성을 띄게 될것인지?
영국의 현 파운드화 통화는 유로통화로 귀속될지? 궁금한 점이 생각해 볼수록 하나 하나 머리를 스친다.
결국은 좀더 자유롭고 평화롭고, 경제적으로 잘 살아 보자는 취지하에 새로운 국가를 탄생 시킨것일텐데..... 앞으로 이몫은 정치가들의 영향력과 시민들을 위한 헌신적인 정신 무장이 관건이 될것 같다. 또 추리해 볼수 있는것은, 영국과 불란서와의 관계일것 같다. 마치 캐나다에서 퀘백주와 다른주들과의 관계처럼 그안에 화산폭발의 위험성이 항상 내포되여 있다고 보여 진다.

민족과 언어가 다른 27개국이 한나라가 되여 그들을 통치할 새로운 대통령을 뽑고 새정부 출범을 위한 준비를 하기에 여념이 없는 유럽 합중국을 보면서, 세계 지도를 펴놓고 보면 잘보이지도 않은 조그만 반도의 나라, 나의 조국은 지금 이시간에도, 젊음을 무기삼아 인생을 enjoy해야할, 한피를 나눈 젊은이들이 남북으로 나뉘어, 서로 총구를 겨누고 있으며, 며칠 전에는 서해상에서 해상충돌이 있었다는 뉴스도 있었다.
뭉쳐야 큰 힘을 발휘할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이 없건만..... 행동은 없다. 특히 고국의 정치인들과 이북의 김정일을 포함한 공산정권 통치자들은 이번 유럽합중국의 탄생을 보면서, 깊이 각성하고, 부강한 한반도 조국을 만들기 위한, 말잔치 보다는, 행동을 보여줘야 할때가 이미 늦어 지고 있음을 깨우치기를 염원해 본다.

어쨋던 새로운 유럷합중국의 탄생을 축하 할수밖에 없다.

유럽합중국의 새 대통령 선출 소식을 전하는 CNN의 뉴스를 옮겨놓는다.

Belgian PM is first 'president of Europe'
November 19, 2009 2:58 a.m. EST


Herman Van Rompuy is "well known as a consensus builder," said Gordon Brown.


Belgian PM Herman Van Rompuy appointed first "president of Europe," British PM Gordon Brown says
Tony Blair ruled out after his successor as UK PM realized Blair had insufficient support
President of EC will be first permanent chief of the European Council of Ministers
Selection conducted by heads of state and government, not by Europe's parliamentarians

Brussels, Belgium (CNN) -- Belgium's prime minister, Herman Van Rompuy, has been appointed the first "president of Europe," British Prime Minister Gordon Brown said Thursday.
Catherine Ashton of the United Kingdom is to become the EU's foreign minister, Brown said.
The leaders of the 27 member states of the European Union made the decision behind closed doors in Brussels Thursday.
Van Rompuy, a soft-spoken fan of Japanese poetry, beat out contenders including former British Prime Minister Tony Blair for a post whose duties are not yet clear.
The Belgian is "well known as a consensus builder," said Brown, who added the selection was unanimous.
Brown had realized earlier that Blair did not have enough support among key decision-makers to snag the new post, a Brown representative told CNN earlier.
The post was created by the European Union's Lisbon Treaty -- which came into force this month, after years of torturous negotiations, as a replacement for the rotating six-month presidency of the bloc.
Although the EU prides itself on being a club of democracies, the process of choosing its new leader was far from transparent or open.
The people of Europe had no say, not even through their parliamentarians.
Blair started as the favorite. He was, according his backers (who at first included President Nicolas Sarkozy of France) just the sort of glamorous figure, recognized the world over, who would win attention for the EU and enable it to exercise its weight in world affairs.
As one Indian official said before the announcement: "If the EU chooses as its worldwide representative the prime minister of Belgium or Luxembourg I am not sure our leaders will have the time to meet him."
But others were soon arguing that, as former U.S. President George W. Bush's leading ally over Iraq, Blair is a divisive figure in Europe. The one man who might have been able to take Britain into the European single currency, he had not even attempted to do so while he was Britain's prime minister.
Public backing from Italy's Silvio Berlusconi, a joke figure to much of Europe and another Bush ally, did not help.

Wednesday, November 18, 2009

이빨 빠진 호랑이 같은 미대통령의 중국방문을 보면서...




오늘자 Washington Post지의 오바마 대통령의 중국방문의 성과에 대한 분석 기사를 읽으면서, 권력과 영화는 영원하지 않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확인 하는것 같아, 미국에 대한 연민의 정이 마음에 깊이 가라앉는것을 느꼈다. 전임 미국대통령들이, 최근의 부쉬가 방문할때에도 Super Power로서의 힘을 과시 하면서 회담의제나 의전문제등도 미국식으로 거의 이끌면서 정상회담을 했었지만 결과는 그의 소신데로 받아 들여 지지 않았던, 그래서 과거속의 미국으로 바뀌어 가는 양상을 느꼈던 신문기사의 내용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그런 지난날과는 너무나도 다른 힘없는 미국대통령을 보는것 같아, 개인적으로 안쓰러운 마음까지 들었다.1998년도 당시 클링턴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때에도, 인민대회장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그는 이미 10년전에 일어났던 천안문 사태를 예로 들면서, 인권문제를 개선토록 중국측에 당당하게 요청은 했었다, 그라나 당시 주석 장쩌민은 별다른 이의없이 한마디로 인권문제는 안된다 라고 잘라 말하면서, 미국을 압박했지만, 대신에 대만문제를 물고 늘어지면서 겨우 형평을 이루는 정상회담을 했었다. 미국의 어느 전임 대통령보다 오바마 대통령은 중국의 협력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미국의 재일큰 부채국은 중국이 아닌 스페인이었고, 멕시코와의 교역량이 당시 중국과의 교역량보다 2배 이상 많았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상황이 완전히 바뀌어, 미국이 중국에 $1조 달러의 빛을 지고 있으며, 이시간에도 중국제품이 미전역을 홍수가 밀려들듯 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현실이지만, 미국은 거의 속수 무책이다. 그져 이번 중국방문 정상 회담은 중국을 달래기위한 양상을 띄고, 같은 장소인 인민대회장에서 후주석과 정상회담을 했지만, 회의 의제나 의전도 거의 중국의 주장데로 진행 됐다고 하며, 중국측의 제안으로 양정상은 정상회담후 성명문만 서로 발표하고, 정상회담후 의례히 행해졌던 기자회견에서 질의 응답은 아예 없애고 바로 퇴장 했다고 한다. 국제무역에서 공정한 거래를 위해 중국화폐 위안화의 절상에 합의를 이루어내야 하는 큰 문제에 기대를 걸었었지만, 중국은 한마디로 '아직은 아니오' 식으로 버티었다고 한다. 이러한 회담 내용을 보면서, 조국 대한민국의 최근세사중에서, 시류의 흐름에 어쩔수 없이 가세가 기울은 부자가,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지금은 신흥 부자가 된, 옛 하인이나, 상대도 해 주지 않던 중인을 찾아가, 그래도 체면은 있어서 목에 힘을 주면서 도움을 청하는, 그러나 그 목소리에는 힘이 실리지 못하고 어딘가 떨리는듯한 얘틋하고, 이빨빠진 호랑이 같은 분위기가 이어지는 장면을 연상케 하는 현실의 냉혹함을, 오바마 대통령이 중국 방문에서 겪고 있는 모습에서 느낄수 있었다. 중국에 대한 조국의 앞날도 짚어 보지 않을수 없음을 깊이 느꼈다. 중국 전역에 생중계된 후주석과의 회담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중국의 인권문제를 애원하는듯한 제스쳐로 TV에 비쳐졌었고, 상하이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행한 연설내용은 인류사에서 일찌기 볼수 없었던 경제적 성장에 대한 칭송으로 중국당국의 환심을 사기위한 내용으로 이해 됐으며, 연설후 학생들과의 대담은 전국적으로 생방송될것으로 생각됐던 예상을 뒤엎고, 오직 지역 방송에서만 볼수 있도록 하는 수모(?)를 주기도 했단다. 오바마 대통령이 잠바차림으로 '만리장성'을 오르내리면서 무엇을 생각 했을까? 아마도 중국의 어마어마한 저력을 느끼지 않았을까? 혼자걷는 모습이 당당했다기 보다는 뭔가가 그의 어깨를 억누르고 있는것 같은 왜소한 모습으로 보였음은 나만이 느꼈음일까?
백악관측은 이번 중국 방문에서 오바마는 인권문제등 민감한 문제에 과거 어느 고위 관료가 했던것 보다 더 힘차게 대쉬 했다고 주장 하지만 그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개인간이나 국가간이나 역시 힘과 돈이 기세를 좌우 한다는것을 확실히 보는것 같다.
젊었을때 쟁쟁 했던 Senior들의 남은 인생 살아가는, 전쟁무용담을 즐겨 얘기하곤 하는 노병들의 남은 인생 살아가는것과 비슷할것 같은, 그래서 마음은 있지만, 신체가 따라가주지 못하는 애잔한 느낌이 가슴을 조이는것 같다.

와싱턴 포스트지의 분석 기사를 여기에 옮겨 싣는다.





In Obama's China trip, a stark contrast with the past
White House says U.S.-China relations are 'at an all-time high'


By Andrew Higgins and Anne E. Kornblut
Washington Post Staff Writers
Wednesday, November 18, 2009; 10:16 AM

BEIJING -- President Obama has emerged from his first trip to China with no big breakthroughs on important issues, such as Iran's nuclear program or China's currency. Yet after two days of talks with the United States' biggest creditor, the administration asserted that relations between the two countries are at "at an all-time high."

Although one concrete advance emerged -- that the United States may offer a target for carbon-emission cuts to boost climate negotiations in Copenhagen next month if China offers its own proposal -- it was a relatively small step for a new president who had campaigned on a promise to enact far-reaching change in U.S. diplomatic interactions.

If there was any significant change during this trip, in fact, it was in the United States' newly conciliatory and sometimes laudatory tone. In a joint appearance with President Hu Jintao on Tuesday, Obama hailed China as an economic partner that has "proved critical in our effort to pull ourselves out of the worst recession in generations." The day before, speaking to students in Shanghai, he described China's rising prosperity as "an accomplishment unparalleled in human history."

On a visit to the Great Wall Wednesday after his last official business, a morning meeting with Chinese Premier Wen Jiabao, the U.S. president offered yet more gushing tributes. He declared the ancient structure "spectacular" and "majestic" and told a Chinese journalist that he had "great admiration for Chinese civilization."

U.S. presidents have been trekking to China -- and also lauding the Great Wall -- since Richard Nixon visited in 1972. But, in both form and content, Obama's trip stood in stark contrast to the journeys of his predecessors.

The changes reflect not so much a policy shift by a new administration in Washington as a dramatic and much bigger change in the power dynamic, particularly in economics, over the past decade -- a change that has been the central undercurrent of Obama's swing through China this week.

In 1998, when President Bill Clinton stood before television cameras in Beijing's Great Hall of the People, the United States owed more money to Spain than to China and did more than twice as much trade with Mexico. At a freewheeling news conference, Clinton criticized China's military crackdown a decade earlier in Tiananmen Square and traded spirited jibes with President Jiang Zemin.

On Tuesday, Obama stood in the same building alongside another Chinese leader. This time, with the United States in hock to China for more than $1 trillion dollars and flooded with Chinese-made goods, it was a Chinese-style news conference. Each leader read a prepared statement and eyed the other in silence. There were no questions.

Since leaving Washington last Thursday for an eight-day tour of Asia, Obama has occasionally nudged China on issues such as Tibet and Internet censorship. But he has more often trumpeted China's achievements and pleaded with Beijing for increased help on the world stage.

China returned the effusiveness in its music selection at a state dinner for Obama on Tuesday night. The People's Liberation Army serenaded him and other U.S. officials with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 "In the Mood" and "We Are the World," as Obama and Secretary of State Hillary Rodham Clinton sat on either side of the Chinese president over a steak dinner.



In many ways, the United States and China have never been closer, as reflected in a raft of joint projects outlined during Obama's visit here. Ahead of meetings with Chinese Premier Wen Jiabao on Wednesday, Obama said the relationship is deepening beyond trade and economics to cover climate, security and other matters of international concern. Those would include previously announced and now reinvigorated efforts on stem-cell research, crime prevention and military contacts. But with the rituals and even the substance of the two nations' interactions increasingly on Chinese terms, Obama advisers insisted that their overtures and polite tone are in pursuit of long-term results, a reflection of China's growing importance.

When President Clinton visited China in 1998, the United States was still basking in its position as Cold War victor and the world's sole superpower. It sought China's help on only a narrow range of international issues, such as the spread of missile technology and North Korea. China was just shaking off the stigma of the 1989 crackdown. It was the seventh-biggest holder of U.S. Treasury securities. Today, China is the nation's biggest creditor and its trade with the United States has grown sevenfold.

Also changed are the faces in the Chinese leadership. Jiang, Clinton's 1998 sparring partner in the Great Hall of the People, was an often boisterous character who liked to sing, and also comb his hair, in public. Hu, Obama's host, is a far more buttoned-down and cautious sort.


Clinton could not tell Chinese leaders what to do. Indeed, he had to abandon a big push on human rights when China simply said no. And his challenge to Jiang over Tiananmen was paired with a significant concession over Taiwan.

But Clinton and other U.S. presidents never needed China's help nearly as much as Obama's America needs Hu's.

Whether as a creditor, an emitter of greenhouse gases or a neighbor of Afghanistan, China has clout that the United States now desperately needs. "The U.S.-China relationship has gone global," said Jon Huntsman Jr., the new U.S. ambassador to Beijing and a fluent Chinese speaker.

At the same time, however, China has been far more insistent about asserting its will, most obviously in small but symbolically significant matters of stage management. A town hall-style meeting in Shanghai that the White House had hoped would allow the president to reach out to ordinary Chinese was drained of spontaneity by Chinese-scripted choreography. Tuesday's news conference had no questions, at China's behest.

The Obama White House said it pushed back against restrictions, and it denied that the nation's indebtedness to China has made it any less forceful.

Referring to the fact that China holds Treasury securities worth nearly $800 billion, as well as billions more in other forms of U.S. debt, Michael Froman, economic adviser on the National Security Council, said "the $800 billion never came up in conversation."

"The president dealt with every issue on his agenda in a very direct way and pulled no punches," he said.

U.S. officials insisted that, despite constraints, Obama still got his message to the Chinese public. State television provided live coverage of his Tuesday appearance with Hu, which featured an appeal by the U.S. president on human rights.

"America's bedrock beliefs that all men and women possess certain fundamental human rights," Obama said, "are universal rights" that "should be available to all people." He also urged China to resume talks with representatives of the Dalai Lama, Tibet's exiled spiritual leader.

White House officials described Obama as even more forceful behind closed doors, suggesting that the administration is more eager to engage with reality than grandstand. Obama had "as direct a discussion of human rights as I've seen by any high-level visitor with the Chinese" when he met with Hu, said Jeffrey Bader, the National Security Council's chief Asia hand, who also worked for President Clinton.

Furthermore, White House press secretary Robert Gibbs said, the administration had not expected "that the waters would part and everything would change over our almost 2 1/2 -day trip to China."

Sunday, November 15, 2009

Speyside Nature Reserve Trail Walk.
























오늘 걷는 구간은 우리 부부를 비롯한 대원들이 처음 걸어보는 Trail 이다. 지구의 온난화 현상의 덕택일까(?) 아니면 절대권자 되시는분의 도우심에서 일까? 어제 까지만 해도 일기예보는 흐리거나 비가 올수도 있을것이라고 했었으나, 오늘 아침 예보에서는 하루종일 햇볕에 맑은 날씨가 그위에 온도마져 초겨울 날씨답지 않게 13도를 오르 내릴것이라고 했다. 왜 Burce Trail 전구간을 거의 걸어 보다 시피 하면서도, 이곳만은 걸어보는 기회를 포착하지 못했었을까? 라는 질문이 머리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이구간 남쪽으로, 또 북쪽으로는 여러번 걸었었는데....
뚜렷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지도를 보면서 걸어볼 구간을 집다 보니 그렇게 이빨 빠진듯..... 그랬던 것이다.
지도를 보면 이곳도 남쪽으로 이어지고 있는 Mount Nemo 구간처럼, 지층을 뚜렷히 볼수 있는 절벽위로 길이 나 있다. Car Pool을 해서 Hwy401을 타고 서쪽으로 달려 목적지에 40분 이상을 달려 도착했다. 주차장에는 우리보다 먼저 와서 이미 산행을 하고 있을것으로 보이는 차량들이 여러대 있었다. 오늘 산행을 창조주의 보살핌속에 무사히 마치게 해 달라는, 우리의 연약한 존재를 의탁하는 기도를 연장자 되시는분이, 매번 해왔던 습관데로, 해 주시고 바로 Trail Walk은 시작됐다.
초입부터 우리보다 더 큰 억새풀들이 활짝피운 꽃수술들을 미풍에 흔들거리면서 우리를 반가히 맞는다. 오늘 처음 참석하신 대원들도 보인다.
풍상에 시달려(?) 그랬는지, Trail은 이끼가 파랗게 낀 돌짝밭들이 점령하고 있는것 같이 보인다. 처음오신분들이나, 걷기에 익숙치 못한 대원들에게는 신경이 많이 쓰이는 구간임을 걸으면서, 대원들의 걷는 속도에서 많이 느끼게 됐다. 산림보호구역이어서, 단풍나무숲이 빼빽하게 들어선 사이로 뚫린 Trail 은 방향감각을 잃게 하고 있어, Trail따라 군데 군데 표시된 흰색의 방향표시 Blade만이 우리대원들을 안심 시켜 유일한 이정표라는 감각을 주는것 같다. 여름철에 이곳을 걷게 된다면, 이곳역시 하늘을 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파랗게 시야를 뒤덮었을 것이라고 상상하는것은 어렵지 않았다.
한걸음 한걸은 옮길때마다, 바스락 거리는 낙엽 밟히는 소리는 아직도 있다. cushion역활을 하는쪽으로 좋게 이해를 하면서도, 돌짝밭길을 뒤덮어 잘못 발을 헛디뎌 넘어지거나 미끄러질 염려는 신경을 더 곤두서게 하는것 같다.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큰 길에는 Concrete벽이 길의 End표시인듯 앞을 막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것 같았다. 아까 차를 타고 달리면서 St Helena Rd.라는 길간판을 보았는데, 그길이 이곳에서 끝나는 것이다. Concrete벽 뒤로도 분명히 넓은 길은 차가 다니기에 충분하도록 만들어져 있는데..... 아차 이곳이 Nature Reserve이기 때문임을 한박자 늦게 깨닫는다. 방호벽을 지나 큰길로 계속 걷는데, 보여야 할 흰색의 Blade표시가 보이지 않아 습관적으로 나를 포함한 대원들이 눈을 주위로 두리번 거린다. Trail은 당연히 큰길로 이어지고 있으려니 방심한 결과였다. 이미 우리 대원들 뒤로 멀리 떨어져 보이는 방호벽쪽을 되돌아 본다. 그곳옆에 눈에 익은 표시가 아스라히 눈에 들어와, 잠시 대원들에게 걷기를 중단 시키고 잰 걸음으로 Back해서 몇발짝 때어 보니, 그곳으로 Trail이 이어져 있음을 알았다. 무심코 큰길이기에 표시보는것에 신경을 쓰지 않고 앞만 보고 걷가가 이런 mistake을 한 것이다. 항상 표시를 주시 하라고 마음에 다짐하고, 또 대원들에게 주의를 환기 시키지만, 엉뚱하게 이런 애피소드가 발생하곤 하는것은, 피할수가 없는가 보다. 순간적으로 어두어졌었던 대원들의 표정이 밝고 웃음기 있는 모습으로 바뀐다. 멀리 동남쪽으로 넓게 퍼져있는 농장들과 그속에 외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는 집들이 한가롭게 보인다. 그평화로운 속으로 끝과 처음이 잘 보이지 않는, 철로위를 달리는 화물열차가 굼뱅이 기어가듯 걸어가고 있는 모습도 여유롭다.
가까이서 보면 굉장히 크게 보일 빨간 지붕을 한, 마치 어렸을적에 읽은 소설속의 성터(Castle)처럼, 집한채가 멋있게 보인다. 바로 눈앞은 절벽이다. 누군가가 ' 노통이 떨어져 자살한 절벽이 여기에도 있네' 라고 대원들을 향해 소리친다. 노통이 절벽에서 떨어져 죽은 뉴스는 너무나도(?) 유명하기에 대원 모두가 금방 알아차리고 일제히 절벽 밑과 그아래로 넓리 펴져 있는 농장과 숲 그리고 토론토쪽을 쳐다 본다. 이절벽밑에서 위로 쳐다보면 Bruce Trail전구간이 Escarpment로, 마치 층층이 콩고물로 구분되여 있는 시루떡을 보는듯한 돌층을 볼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발빠른 대원은 디카를 꺼내 풍요로운 모습들을 그안에 담기위해 바삐 움직인다.
대원들의 걷는 속도가 천자 만별이다. 힘들어 하는 모습도 보인다. 원래 계획은 전진만 한시간 반쯤 할려고 했었는데....
사내아이 준혁(?)이가 Trail을 벗어나 수북히 쌓인 낙엽속을 이지 저리 뛰면서 달리더니 드디어 넘어지고 만다. 바닥은 돌짝인데.... 가까이에서 같이 걷고 있던 숙련된 대원이 얼른 그를 일으켜 세운다. 무사한것 같아 보였다. 순간적으로 아찔 했었는데. 만약에 돌모서리에 이마가 부딪히고, 팔이 잘못되거나 발이 삐걱 했었다면..... 어린 그가 무사함에 감사, 또 감사의 마음 뿐이다. 이다음에는 그런 실수(?)를 안하겠지?
무사함을 확인하고, 주위를 살펴보니 Trunk가 큰 한 단풍나무에 기형적으로 뚱뚱하게 불거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움직이는 생명체에 비한다면 분명 큰 병을 앓고 있을것 같이 느껴졌다. 그모습은 마치 '코스타리카' 해변가의 정글을 걸으면서 보았던 Turmites같이 보인다. 생명체 같으면 아파서 괴로워하고, 더 자라지도 못할것 같은데, 옆의 다른 동료나무들과 비슷하게 우뚝 서서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것 같다.

계획했던 시간을 다 채우지 못하고, 자리를 잡고 지금까지 등에 메고 온 점심을, 삼삼오오 모여 앉아 풀었다. 더 많이 걸어 보려는 욕심 보다는 대원들의 걷는 상태와 안전이 우선하기 때문이다. 보온병에 마련해온 따뜻한 차 한모금을 먼저 넘길때, 그맛은 어디에 비교할수가 없이 보약이 되는것 같다. 따뜻한 햇볕이 더 많이 내려쬐어, 행여나 낙엽위에 앉아 먹는 점심에 어려움이 없도록 해 주려는 배려를 위로 부터 해 주시는것 같은 느낌을 본다. '이것 좀 먹어봐', ' 밤새 아빠가 만들온 김밥인데 한입 떼세요', ' 달래 김치인데 맛 보세요', ...... 대원들간에 나눔의 정은 점심을 마칠때 까지 이어지는것 같다. 이런 맛이 있기에 또 느끼면서, 친교를 나누기 위해 이험난하고 힘든 고행(?)길을 마다 않고 걷는것은 아닐까? 자문해 본다. 물론 신체적 단련이 주목적인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매주 만나는 식구들이 더 많이 참석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항상 있다. 오늘은 19명이 같이 걸었다.

산행을 마치고 Tim Horton's에서 마시는 커피향의 느낌은 오래 기억될것 같다. 무사히 마침을 다시 감사하면서....

Thursday, November 12, 2009

오늘은 현충일,11월 11일 11시에 묵념.















자유와 조국을 지키기위해 희생하신분들의 넋을 위로하기로라도 하듯, 계절에 맞지 않게 온화하고 따뜻한 날씨이다.
캐나다 동부지회의 재향군인회원신분으로 다른 회원들과 함께 Brampton에 소재한 Meadowvale Cemetery에 정해진 아침 10시30분경에 도착하니 반가운 얼굴들이 하나 둘씩 보이기 시작한다. 행사는 11시에 시작될 예정이나 미리 모인 것이다.
이제는 대다수의 회원님들이 노인이 되여, 해마다 행사때마다 참가 숫자가 줄어들고 있음을 오늘도 보느것 같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세월의 흐름속에 삶을 마감해야 하는 절박함과 현실속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하는 순리라고 생각하고 싶다.
예상 하지도 않은 기수를 맡으라고 해서, 현역 시절에도 해 보지 않았던 기수단 3명중에 한명으로 나는 태극기를 들고 행사장을 향해 선두에서 구령에 맞추어 행진하는 행운(?)을 얻었다.

오늘은 7월 27일 휴전 기념일 행사때 처럼 많은 재향군인회원들이 참석하지 못했다는것을 알수 있었다. 왜냐면, 오늘 현충일 행사는 캐나다 전국적으로 동시에 행해지는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 행사이기에 다른곳에서도 더 크게 정부고위관리들이 참석하여 치러지는 행사이기에 그곳으로 많이 참석했기 때문인것 같다.
몇명의 케네디언 참전용사, 우리 재캐나다 동부지회 재향군인회원들, 총영사를 비롯한 약간의 Dignitaries,Hickory Public School의 인솔선생님과 학생들 그리고 개인적으로 참석한 현지 캐네디언들, 아참 고국에서 특별히 이행사에 참석하여, 독경까지 해주신 10명이 넘는 스님들이 오늘의 현충일 행사 참가 식구들인것 같다.

항상 행사때마다 듣는, 순국선열에 대한 감사의 말씀들이지만, 매번 들을때마다 느끼는 감정은 다르다. 오늘의 이런 풍요로운 삶과 자유를 아무느낌없이 나혼자 잘나서 이렇게 사는것 쯤으로 생각해 왔던 잘못된 풍조들을 일깨워주는 교훈을 주는 그런 감사의 마음을 더 깊이 새기게 한다.
총영사의 케나다에 대한 감사의 말씀은 시사하느나가 컸다. 조국이 공산군들의 침략으로 풍전등화 같은 어려움에 처해 있을때,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516명의 희생자들과 그외 셀수도 없는 부상자들을 내면서, 그들의 침략을 막아 주었기에 오늘의 발전된 조국 한국이 있을수 있었음을 항상 기억하고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는 요지의 축사겸 고마움의 표시에 공감을 했다.
묘지관리 책임자와 브람튼시의원, 그리고 Hickory국민학교장의 격려와 축사, 모두가 한결같이 그내용이 순국선열분들의 희생위에 오늘 우리가 이렇게 자유속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음에 한없는 감사와 무한대의 빚을 지고 있다라는 내용이었다.

묵념과 함께 은은히 울려 퍼지는 음율 ' Amazing Grace'는 신앙생활하면서 매번 듣고 또 찬송했던 노래 였지만, 오늘은 마음을 아프고 애잖게 하는 음으로 내귀에 달려온다. 순간적으로 소낙비 퍼붓듯 쏟아지는 아군과 적군들의 총알속에서 살아남기위해, 적을 물리치기위해 초조와 때로는 적개심에서 절규했을 선열들을 또 한번 가슴속 깊은곳으로 부터 상상을 하게 한다.
Hickory 국민학교 학생들이 합창으로 우리의 조국 민요 '아리랑'을 부를때는 어떻게 이곳아이들이 생소한 나라의 민요을 부른단 말인가?라고 의아해 하면서도 믿기도 않기도 했지만, 발전된 조국의 위상이 이러한 데서도 나타나는구나 라는 자긍심이 일게 하는 순간 이기도 했다.

참가한 기관들이 위령탑에 헌화를 하는데, 일착으로 총영사께서 했다. 그다음 순서에 따라 헌화를 끝나가는데도, 어떻게 된 일인지, 우리 한국측 재향군인회장 명의의 헌화 순서를 발표 되지 않아 걱정 스러웠는데, 결국 순서에서 빠지고 말았다. 단체로서 참가한 회원수는 제일 많았었는데..... 표현하기는 좀 조심스럽지만, 회장단의 평소 수평적인 연락과 친교가 이곳 주최측과 이곳 캐네디언측 재향군인회와 없었다는 뚜렷한 증거로 해석되였다. 총영사를 비롯한 영사관직원들에게도 우리의 존재가 우습게 보여지지 않았을까?

저녁에 이곳 Toronto Sun지의 사설을 읽었다. 그내용이 왜 현충일을 기억해야하고,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가의 내용이었다.
여기에 그 사설을 옮겨 적는다. 우리 모두가 실질적으로 기억 했으면 좋았을것 같기에.....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왜 기억해야 하는가"

의무, 경의, 희생.

이러한것들 때문에 오늘 현충일을 맞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열한번째달의 열한번재날 그리고 열한시에, 91년전 오늘 세계일차대전을 끝
내는 휴전협정서에 서명한날, 바로 오늘을 현충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우리가 조용한 속에서 용감했던 케네디언들에게 누가 될까봐 화
려한 내용의 기념사도, 그렇타고 비탄에만 젖은 표정도 짖지는 않는다. 오히
려 우리는 그정해진 시간에 몇분간의 묵념을 조용히 올리는 올리는 것이다.

절박했던 희생, 꼭 필요했던 희생.

그묵념속에서 우리는, 꽃다운 청춘의 목숨을, Boer전쟁에서 바친 284명의 케
네디언들, 세계1차대전에서 희생된 68,000명, 세계2차대전에서 전사한
47,000명, 한국전에서 전사한 516명, 유엔 평화군으로 참전해 전사한 116명
그리고 아프칸을 지키기위한 전장에서 오늘까지 전사한 133명의 병사들이 하
나밖에 없는 목숨을 바친덕에 오늘 우리가 있음을 상기 하는 것이다.

오늘은 그런 날이기에 우리는 정치적, 또는 지역간에 서로 다른 점들을 잠시
접어두고 이날을 묵념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케네디언들은 우리를 전쟁과 평화로 부터 지키기위해, 오늘도 쉬지
않고 조국을 위해 봉사하고 있는 그들을, 우리는 오늘 하나가 되여 경의를 표
하는 것입니다. 또한 전사한 분들을 우리는 존경하고 또 기억하고 있으며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신체적, 정신적 그리고 상상하기도 싫은 끔찍한 순간들
에서 상처를 입고 기향한분들을 기억하고, 경의를 표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분들의 낙망과 슬픔 또는 부상으로 인해
완전히 삶이 바뀐채 가족의 품에 돌아온 분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기억합니다.
또한 우리는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사람하는 가족의 품에 안긴, 그분들을 존경
하고 기억합니다.
간혹 재향군인들이 말하는 전쟁영웅담이 전쟁의 화려함을 말하는것이 아닙니
다. 전쟁은 해서는 안될일이고, 마지막 수단으로 민족이 할수 없이 치러야하
는 것이고, 결과가 어떻든 우리는 그것을 통해 옮은 길로 갈려고 노력하는것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유를 지키기위한 대가로 피를 흘리지 않을수 없
는 때를 우리의 역사를 통해 우리가 배웠기에 오늘 이렇게 묵념을 하는 것입니
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값진 자유는 - 오늘 몇분간 묵념을 올리면서 우리가
경의를 표하고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무한대의 빚을 지고 있음을 기억하
자는 것입니다.


What we remember, why we remember
By LORRIE GOLDSTEIN
Last Updated: 11th November 2009, 5:38am
Duty. Honour. Sacrifice.

Those are the things we recall on this Remembrance Day - at the
eleventh hour of the eleventh day of the eleventh month, marking the
signing of the armistice that ended the First World War, 91 years ago
today.

We do so not with flowery speeches or excessive displays of grief, for
that would dishonour the quiet courage of all those Canadians we
remember today.

Rather, we do so at the appointed time with a few moments of
silence.

Ultimate sacrifice

And in that silence, we remind ourselves of the ultimate sacrifice
made for our sakes by the 284 Canadians who gave their lives serving
in the Boer War, the 68,000 who died in the First World War, the
47,000 in the Second World War, the 516 in the Korean War, the 116
on UN peacekeeping missions and the 133 who have died, to this
date, serving us in Afghanistan.

Today is the day, however briefly, we set aside our political and
regional differences.

For on this day, we are all Canadians, united in respect for all those
who have served and continue to serve us in both war and peace.

As well as those who died, we honour, and remember, those who
returned home from war, forever scarred, both physically and
emotionally, by its horrors.

We honour, and remember, the grief and despair of those who lost
their loved ones in war, or saw them return home from war forever
broken and changed.

We honour and remember, as well, the joy of all those who were
safely reunited with their loved ones.

We do this not to glorify war, for, as any veteran will tell you, war is
the worst thing and the very last thing a nation should ever embark
on, even when the cause is just and no matter how grievous the
wrongs we are trying to right.

But we do it because we realize there are moments in our history
when blood is the price that freedom demands.

The price of our freedom - to which we are forever indebted to all
those we honour, and remember, with a few moments of silence, to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