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June 30, 2011

이곳의 부모들이 자식들과 추억을 만들어가는것을 보면서...








방학동안 아이들이 부모들과 골프, 캠핑하는 모습에서 우리 아이들의 어렸던 지난날들을 생각한다.

골프장에서 엄마와 중학생 아니면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아들이 같이 골프를 즐기는 모습이 자연스럽고 여유있어 보여 보기 좋다.
우리 부부가 첫홀의 Tee Box에 올라 서려고 하는데 이들 모자( 엄마와 아들)가 Power Cart를 타고 우리쪽으로 오기에, Lunar에게
신호를 해서, 이들을 먼저 보내고 뒤따라 가는게 어떨가? 했더니 OK 싸인이 온다. 엄마 되는 여자분에게 "너희가 준비 됐으면 먼저 나가도록 기회를 주겠다" 라고 했더니 웃으면서 "Thank You"다. 방학을 맞아 엄마와 아들이 같이 나와, 그동안 수고한 아들과 함께 시간을 만들어
골프를 즐기려는 엄마의 배려(?)를 뒤따라 가면서 보고, 우리도 즐길 마음에서 였다. Tee Box에서 check in 하고 있는 마샬 Noreen도 허락해 주었음은 물론이다.

Teenager인 아들은 아직 서툴게 클럽을 휘둘러 대지만, 얼굴에는 계속해서 미소를 잊지 않는것 같다. 엄마도 치는 모습으로 봐서, 우리처럼 여름철이면 Membership을 구입해서 매일 즐기다시피 하는것 같지는 않고 아들과 모처럼 모자의 정을 나누고져 골프장에 나온것 같아 보였다. 플레이가 조금씩 Delay되곤 했지만, 그들이 밉지가 않다. 다른팀들이 이들처럼 허우적 댈때는 지루함과 때로는 신경질도 나올때가 있지만, 전연 그렇치 않고, 기억속에서나 찾아낼수 있는 나와 우리 아이들과 지냈던 지난날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서 그들을 응시 한다.
전반 9홀이 끝나고 그들과 잠시 또 마주쳤다. 먼저 엄마가 말을 건넨다. 생각보다 볼때리는게 쉽지가 않다고 하면서, 아들이 Tee shot하는것을 본다. 아들의 샷이 처음보다는 월등이 좋아진것 같다. 첫홀에서 아들이 미스샷을 했을때, 나는 아들을 향해 "You should take a Mulligan. Everybody do the same mistake at first hole,don't you think so?" 그러나 미소만 짖고, 엄마와 같이 Proceeding 했었다. 지금은 제 실력이 나오는것 같다. 샷이 길다. 물론 골프를 처음 해본 솜씨는 아닌것은 간파 했었으나, 힘이 좋기 때문이기도 하리라. 날아간 볼이 Fairway에 안착하자 엄마를 자랑스럽게 쳐다 보면서 카트에 올라, 엄마가 샷해야 하는 빨간 Tee box로 향하는 모습이 자꾸 나는 내아이들과 많이 시간을 보내적이 있었나(?)를 생각케 한다. Lunar도 그들을 쳐다 보면서, 우리 아이들과 보냈던 지난날들을 생각하는것 같다.

옆에 있는 Provincial Park에 있는 Camping site에 들렸다. 그동안 날씨가 좋치 않아 많이 비어 있던 sites들이 거의 Full로 Occupy된것을 보았다. 대부분의 캠퍼들은 부모와 아이들인것 같다. 많은 Senior들도 보이긴 했지만. 방학을 하자마자, 이렇게 달려와서, 아이들과 캠핑하면서, 같이 Bike도 타고, 또 별이 총총이 빛나는 밤에는 아이들에게 그물망을 하나씩 쥐어주고, Lake side의 얕은 물가에서 물속에서 사는 생명체와 곤충들의 밤활동을 부모와 Guide들과 어울려 직접 체험하게 하는 사랑이 깃든 자상함으로 그들에게 추억을 만들어 주는 부모들의 마음씀을 보면서, 저렇게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면서 같이 놀아주는 기회가 우리는 왜 많지 않았을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경제적으로 조금 여유가 있고 없고는 문제가 안되는 main이 될수 없는 것들이었는데, 이민자 특히 이민 일세대는 한푼이라도 더 벌어서 경제적 Foundation을 튼튼히 다져야 된다는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차있어, 이민짐을 싸들고, 정든 부모님과 형제자매, 그리고 친지들을 뒤로 하고 떠나올때는, 아이들의 앞날을 생각해서, 좀더 좋은 환경에서 기르고 싶어서라는 대답을 서슴없이 해댔던 이유가 한갖 진실성이 결여된 포장에 불과 했었다는것을 고백하면서 후회도 해보지만, 이미 활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은 돌이킬수 없는 지난날들이었음을 자책하면서 아쉬움만 가슴을 답답하게 하고, 지금은 다 커버린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만 더해지는 기분이다.

아이들이 커갈때 우린 아직 안정이 안된 이민자의 생활을 하면서, 매일 매일을 걱정 해야 했기에, 많은 시간을 아이들과 같이 지내준것 같지는 않다. 가끔씩 나이아가라 폭포를 찾았었고, Wonderland를 갔었고, 먼저 이민와서 안정된 직업을 갖고 있는 친지의 어설픈 Cottage가 있는 Perrysound에 올라가서 방학때 며칠씩 지냈던 기억들이 남아 있을 뿐이다. 같이 여행을 다녔다고 해아려 보아야 손가락에 꼽을 정도이지만 그중에서도 기억에 뚜렷한 것은 고국에 모두가 같이 가서 조상님 산소에 들렸고, 아이들의 사촌들과 어울려 며칠 지냈던 것이 전부인것 같다. 아이들이 간혹 뭘 갖고 싶다던가 아니면 어딜 같이 갔으면 하고 했을때, 가게일을 핑계 대고 다들어 주지 못했던 지난날들이 오늘따라 자꾸 마음을 아프게 한다.

여름이면 이곳 Cottage에 와서 골프 하면서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지만, 이미 다 커서 각자 삶의 길을 걷고 있는 아이들은 Cottage를 구입한 첫해에 잠깐 들려 보고, 몇시간 같이 있었던 기억이 전부다. 아이들이 아직 어렸을때, 아이들과 추억을 많이 만들수 있는 Fun을 찾아서 즐길수 있는 Cottage를 구입하는것을 왜 그때는 생각도 못했을까? 아직 이곳 사회를 몰라서?라고 이유를 댄다면? 이것 역시 핑계일수 밖에 없을것 같다. 모든게 경제적 안정을 추구하는 쪽으로 귀결되기 때문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지나간 과거를 돌이켜 보면서 후회를 하고 다시 기회를 되갖게 된다면....하고 다짐을 해 본다고 한다. 오늘 엄마와 아들이 같이 골프 하는것을 본순간 부터, 자꾸만 지나온 세월들이 후회 투성이로 뇌리에서 되살아난다. 아이들에게 아버지노릇 제대로 못해 주었고, 아내에게는 남편노릇 잘해주었다고 생각되는 기억은 전혀 없고, 대신에 마음 아프게 했었던 일들만 되살아 난다. 그엄마와 아들에게 앞으로 좋은 일만 있게 되기를 빌어주었다. 마치 내가 젊어서 못해 주었던 부모와 자식간의 정을 이들 모자( Mother and son)를 통해서 대리 만족이라도 해볼것 처럼....

여기 사람들은 확실히 부모와 어린 자식들간에는 참으로 많은 추억을 만들어 줄려는 그들의 생활과 행동을 많이 보고 배운다.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전광판이 가끔씩 보인다. 방학이 가까워 오면, 전광판에 " 아이들 방학이 돼어 나들이를 많이 하게되니 좀더 주의 해서 운전을 하십시요" 라는 구호를 많이 보게 된다. 어린 아이들 사랑을 행동으로 실천해 보이는 한 본보기가 아닐수 없다. 그만큼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하는 부모와 아이들이 방학이 되면 같이 행동을 하면서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을 쌓아가는 삶을 일상생활에서 실천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우리 아이들이 앞으로 결혼을 해서 자식을 얻게 되면, 나와 Lunar가 먼저 나서서 할아버지 할머니 노릇을 잘 해주고 싶은 생각이다. 그렇게 라도 해서 아이들에게 부모의 정을 흠뻑 주지 못하고 성장시킨 후회를 상쇄 하고픈 간절함을 떨쳐 버리고 싶기 때문이다. 현재로서는 이것도 머리속에서 그려보는 그림일 뿐이다. 아이들이 결혼할 연령이 이미 지났다고 생각되는 나이가 됐지만 아직 짝을 찾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뭐가 모자라서인지? 그냥 Single로 지내니 말이다. 부모라지만 그들 인생을 내가 좌지 우지 할수 없기 때문에, Push해서 결혼을 시킬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우리 아이들이 그들의 새끼를 낳아 기를때는 우리가 마음껏 못해 주었던 사랑을,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행동으로 사랑을 쌓아 가는 부모노릇 하기를 바라고, 또 내 생전에 보고 싶다. 우리 자식들이 부모인 우리부부를 어떻게 생각하든, 자식이기에 사랑하는 마음은 시간이 갈수록 더 커지는 것 같으며, 의지 하고픈 생각도 일부 있다. 이것이 천륜이라는 것일까?

Sunday, June 26, 2011

문명을 등지고 사는 사람들-Mennonite-삶의 현장방문







저녁 6시쯤 되여, 그의 집에 들어 섰을때, 우선 그들의 겉옷차림이 허술하고 볼품없이 보였던 점과는 너무도 다르게 깨끗하게 정돈되여 있었고, 마루 바닥을 비롯한 모든 살림이 허술한점이 하나도 보이지 않아 보였다.
처음 보는 그의 아내는 옛날 그대로의 의상을 입고, 모자도 쓰고, 우리의 방문을 반가워 하면서도, 한편 경계의 눈이 뚜렷히 보였다. 조금전 St Jacob에서 만났던 그의 남편(Daniel)은 보이지가 않았다. 안으로 들어오기전에 그가 타고 왔던 자전거가 분명이 집입구에 있는것을 보고 안심 했었는데.... 마지못해 안으로 들어서라고 말하는 그녀를 보면서 분명히 남편으로 부터 우리가 방문 할것이라는 소식은 들은게 틀림 없어 보이긴 한데... 농장은 규모가 엄청 커 보였다. 입구의 왼쪽에 있는 축사에는 많은 소들이 먹이를 먹고 있는 한가로운 모습이 보였고, 건너편 파란들판은 감자와 옥수수가 자라고 있고, 그 옆편 쪽으로도 Barn이 여러개 보였다.

옆방에서 우리의 소리를 듣고 Daniel이 웃으면서 우리를 맞이하러 나오면서 먼저 부엌겸 Dinning Room으로 안내 한다. 부엌에서 먼저 눈에 띈것은 작두펌푸였다. 조그만 펌푸는 앙징맞아 보이기까지 했고, 마치 수도물 꼭지 처럼 편하게 사용하고 있다는것을 알수 있었다. 마루 바닥은 enamel을 칠해 반들반들해 보였다.

식탁에는 벌써 그들이 먹을 저녁이 준비되여 있어, 오래 있을수는 없을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맨끝에 있는 방문을 가르키면서 Daniel은 지금은 Passed away한 자기 아버지가 거처하던 방으로 현재는 아직 결혼하지 않은 그의 아들중 하나가 사용하고 있다고 설명해 준다. 그의 부인은 어느새 발재봉틀에 앉아 뭔가를 만들고 있고, 그옆에서 Lunar가 유심히 보고 있는것이 눈에 들어 온다. 누군가가 물펌프의 Lever를 눌러 본다 물이 금새 수도물이 꼭지에서 나오듯 철철 흘러 나온다. 모두가 신기한듯 바라보고, 잊혀져 가는 기억들을 되살리고도 남는것 같다. 식탁에는 우리가 먹는 음식같은것들은 별로 보이지 않고, Pickled 된것같은 몇가지의 Dish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것도 아주 단촐하게 보인다. 사진을 같이 찍자고 했더니 손을 절래절래 흔들면서 사양한다. 그들만의 징스가 있는가 보다. 아쉬웠다. 작두펌푸는 꼭 사진에 담아두고 싶었는데....

Daniel에게 물었더니, 자식을 12명 낳아 기르고, 그중 7명은 이미 결혼해서 따로 살림을 차려 인근의 다른 농장에서 살고 있다고 하며, 5명의 아이들은 같이 살고 있는데, 우리가 방문한다는 소리를 듣고, Shy해서 다 방으로 숨은것 같다며 미소를 짖는다. 12명을 낳았다니....우리 상식으로는 선뜻 이해가 안가고, 또 설사 그렇타쳐도, 챙피(?)해서 쉽게 말하기는 어려웠을텐데.... 갑자기 장대같은 젊은 남녀 한쌍이 Daniel의 뒷쪽에 서있는게 보인다. 바로 Daniel의 어린 아들과 딸이라고 소개해 준다. 그들의 옷모습도 옛복장인것 같이 보인다. 그들의 일상은 농장에서 일하고 가사 돕는일이라고 한다. 젊어서인지 아니면 그들이 예뻐서 인지 꾸미지 않은 그들의 모습이 너무나도 순수해 보이면서 수숩어 하는것 같이, 딸의 볼이 약간 빨개지는것 같았다. 활발하게 활동하는 서구사회의 한곳에 이런 1800년대의 삶을 살아가는 문명을 등진 사람들이 있다니..
Daniel에게 내가 은퇴 했다고 했더니, 그는 61세로 은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고 설명해 주었다. 정부에 세금은 꼬박꼬박 납부해도, 연금을 비롯한 정부의 혜택은 일체 신청도, 또 받지도 않는다고 말해 주었다.

그들의 저녁식사를 더 이상 방해하고 싶지않아, 밖으로 나와서, Daniel이 우리를 빈축사중의 하나를 택하여 안내해준다. 넓은 안은 텅 비어있었고, 동물의 배설물 냄새가 코를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곳은 Turkey를 키우는 계사란다. 의문의 눈빛을 보내자 설명을 해준다. 앞으로 일주일내에 London, Ontario부근의 한 부화농장에서 부화한지 3일된 약 1850 마리의 Turkey Chick이 이곳에 도착하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사육이 시작된다고 한다. 도착하면 바로 야간에 촛불밝기보다 조금 더 밝게 조명등을 켜놓고, 새끼들에게 물과 모이를 주어, 습관적으로 때가 되면 먹이를 찾아 먹도록 훈련을 약 3일 시킨후부터는 밝은 주간에 먹이를 준다고 한다. 이과정에서 약 1.5%의 손실이 발생한다고 한다. 축사에는 시간이 되면 자동적으로 위에 매달려 있는 물통이 터키의 키에 맞도록 내려오고, 먹이통도 같은 원리로 작동된다고 했다.

그의 농장에서 생산되는 주요품목은 감자, 옥수수, 육용소 그리고 터키와 이름 봄철의 한가한때에 조금씩 만들어 놓은 Maple Syrup을 시장에 내다 파는일.... 사실 오늘 이곳을 방문하게 해준 가교(Bridge)역활을 해준게 바로 Maple Syrup이었었다. St. Jacob의 상업지역에서 장사하고 있는 그를 만나 한병을 내가 구입하면서 얘기가 시작되 이렇게 방문의 기회까지 이루어 지게 된 고마운 Maple Syrup이었었다.

신앙생활은 매격주로 출석하는 교회에 가지만, 그의 자신과 식구들은 매주 교회에 출석한다고 했다. 쉬는주에는 인근의 다른 Sister교회로 출석하기 때문이란다. 교회를 갈때나, 외부출타 할때는 말이 끄는 Buggy를 자동차 대신 현재로 생활의 방편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그나마 다행인것은 요즘은 문명의 이기를 조금씩 사용할수 있도록 Mennonite들의 공동운영체인 Council회의에서 허락해 그중에서 제일 중요한 Hydro를 사용할수 있어서 조금 생활이 나아졌다고 설명해준다. 집안에 전기불, 농장에서는 Combine을 사용해서 한결 쉽게 농사일을 하고 있는셈이라고 한다. 그러나 집안에는 TV가 안보였고, Cell Phone의 사용도 자녀들에게 허용되지 않고 있다고 설명해준다. 자녀들이 집안밖의 세상의 생활에 물들지 않게 하려는 뜻으로 해석했다.

빨래줄 처럼 보이는 줄에 하얗게 칠이 되여 있는 '쭈기니' 같기도하고, 박처럼 생긴 통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한가운데에 정구공이 들어갈만한 구멍이 뚫려 있는것이 신기해 물었더니, 제비집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철새인 기러기들이 이동하지 않고 사철 한곳에 사는것을 온타리오 호수가에서 많이 보아왔기에 제비들도 그러지 않을까?하고 물었더니 의외다. 이른 봄에 왔다가 가을철이 되면 따뜻한 남쪽으로 이동한다고 했다.
그옆에는 우뚝 솟아 있는 조그만 Windmill이 돌지도 않고 녹슬어 있는것이 보였다. 그의설명에 의하면 전에는 이풍차를 이용하여 지하수를 뽑아 농작물에 물을 주곤 했었는데, 지금은 전기를 사용하기 때문에 사용치 않게 되니까 이모양이 됐다고 한다. 전기사용의 고마움을 그가실감하고 있는것 같다.

그들의 자녀교육은 6학년 정도가 되면 그만이라고한다. 그정도의 실력이면 실생활에 불편을 느끼지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언제쯤 이들이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문명의 이기를 받아 들이고 문화생활을 즐기게 될까?

Daniel의 설명에 의하면, 이들의 신앙생활은 아주 철저한것 같다. Jesus Christ가 살아온 그방식데로 살아갈려고 하는 과정에서 천주교와 Protestant들과의 마찰과 핍박으로 고통을 심하게 받으면서도 무저항 주의로 살아가는 Mennonite들이 좀더 평화롭고 자유롭게 살고 싶어, 1800년대 중반에 미국의 펜실바니아주에서 도망쳐나와 북쪽으로 북쪽으로 올라와 캐나다 마니토바주에서 거주하기 시작하고, 그이후 이곳 온타리오 남부 지역에서 삶의 터전을 마련하기 시작한게 오늘의 Mennonite 촌락이 형성된 계기가 됐다고 한다. Mennonite의 시조격인 사람은 Menno Simons라고 한다. 원래는 독일지역에서 시작되여 다시 북미로 그리고 다시 남부 캐나다로...

집에서는 어떤 Dialect를 사용하는가 물었더니, 그의 부인이 대답해준 생각이 난다. 도이취어를 상용 한다고 했다. 영어는 어떻게 배우는가 했더니, 학교에서 배운다고 했다. 우린 대학까지 16년을 배워도 영어를 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은데, 어쩌면 이렇게 Mother tongue처럼 구사 하는가? 신기했다.

아까는 St Jacob에서는 사지 않더니, 이제는 너도나도 모두 Maple Syrup을 구입하겠다고 Daniel을 바쁘게 한다. 이렇게 라도 하니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진다. 그도 웃으면서 다시 창고로 들어가 Syrup을 꺼내오기도 했다. 더 이상은 그를 붙잡을수 없어 놓아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제 헤어져야 겠다고 인사를 했다. 아쉬운점은 사진을 같이 촬영할수가 없었던 점이다. 그들의 생활습관상 사진찍는것을 싫어 하기 때문인것 같다. 그들이 알지 못하게 몇장은 슬쩍 하긴 했지만....
알뜰하게 살아가는 그들의 생활방식은, 소중함을 잘 모르고 함부로 버리기도하는 우리들의 삶의 방식에 생각해볼점을 많이 던져주고 있는것 같다.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이들의 생활상을 본것은 큰 수확인것 같다.

Saturday, June 25, 2011

Gale선교사 생가 방문과 그의 행적 탐방























James Scarth Gale, 그는 1863년에 Alma Ontario Canada에서 태어나 1937년에 생을 마감한, 초기 한국의 기독교 복음화를 위해 헌신 하신 선교사분중의 하나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목사이다.

같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 30 여명이 그분의 행적을 탐방하기위해 그가 태어나서 자랐던 생가와 그가 아직 선교사가 되기전에 신앙생활을 했던 교회를 방문하는 귀한 기회를, UT(University of Toronto)에서 오랫동안 Gale선교사에 대한 연구를 하시면서 교수로 봉직 했고,지금은 같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한인출신 Y교수의 인도로 Elora를 향해 아침일찍 부터 차를 몰았었다.

그분이 어렸을때 신앙생활을 했었던 St. Andrew Presbyterian Church에 도착하니 자유중국계 후손으로 현재 담임목회를 하고 있는 Pastor Song이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해준다. 그분이 우리의 방문을 환영하는 내용에서 나는 속으로 충격을 받았다. 한국에서는 Gale목사님의 행적을 높이 평가하고, 여기서 살고 있는 우리들도 그분을 추앙하면서 신앙의 모델로 삼고져,그분의 업적을 탐구할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대해 마음깊은곳으로 부터 감사의 말씀을 드리지만, 정작 그가 어렸을적부터 선교사로 파송되기 전까지 신앙생활을 했던 본교회에서는 그분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선교사로서의 그분에 대한 행적을 탐구할려는 노력도 없을것입니다라고 인사말을 해주셨기 때문이다. Y교수님의 설명에 의하면, 지금 우리가 pew에 앉아 있는 이교회가 여러 정황으로 봐서, 분명히 그분이 이곳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틀림없다라고 설명을 해주었다. 이교회를 비롯한 인근의 여러교회를 둘러봐도 그분에 대한 자료가 전연 없기 때문에, 추측만 가능하다는 내용이다.

Gale은 토론토 대학을 졸업하고, 1883년 토론토대학에서 선교기금을 받아 아직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으로 파송되는 최초의 선교사가 된다. 선교중간에는 선교기금지원이 안돼, 교적을 옮겨 미국의 북장로교단으로 부터 선교지원을 받아 계속해서 선교사 생활을 하면서 한국을 알게돼고, 한국화 되면서 한국사람처럼 먹고자고 행동 했다는 설명에 고개가 숙여졌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선교사로서의 기본 자질을 그분은 먼저 행동으로 실천하고 생활화 했다는 설명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보여준 자료 사진은 이를 더 극명히보여 주고 있었는데, 어느 행사장에서 그와 그의 부인이 당시의 우리 선조들이 입고 있던 전통적인 한복을 입고, 갓을 쓰고 있는 광경이었다.

Gale선교사가 1892년 원산에서 기독교 복음을 전파 할때 '황찬식'이라는분과 같이 신앙생활을 했었는데, 그분의 후손중 한명이 일찍히 Canada로 이민와서, Medical Dr.로 평생을 살다가신 '황대연'씨라고 소개할때는 깜짝 놀랐었다. 이렇게 인연이 맺어지는것이로구나 하고. 또 오래전에 '미국의 소리'방송의 아나운서였던 '황재경'목사님도 황찬식 초기 장로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한국에 6/25전쟁 발발의 소식을 맨먼저 알려준분이기도 했다고 한다. 1988년 6/25일에 Gale선교사의 선교 100주년 기념으로 재캐나다 한인 기독교인들이 당시로서는 거금인 $3,000 달러를 모아 Gale선교사의 업적을 기리는 동판을 새겨 교회벽에 걸어둔것을 오늘 직접 목격 하기도 했다.

1892에 총각이었던 Gale선교사는, 당시 재중원의 의사로 재직하다가 병사한 Dr. Heron의 부인인 Mrs Heron과 결혼을 했다. 총각과 미망인과의 결혼은 당시로서는 흔치않은 사건과도 같았는데, 그렇게 맺어진 내용이 엉뚱했다고 한다. Gale 선교사외에도 선교팀에는 다른 두명의 총각 선교사가 있어, 일종의 경쟁이 있었는데, 결국 Gale과 맺어지게 됐었다고 하는 얘기도 해 주셨다.

Gale목사님은, 최초로 신약성경의 대부분을 한글로 번역했었고, 또 최초로 한국에 파송된지 7년만에 영한사전을 발행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분의 선교사상은 무엇보다도 선교현지에서 토착화에 중점을 두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미국식 선교와는 완전히 분리된 것이며, 복음의 예를 들때도 한국의 풍습과 문화에서 찾을려고 무척 애를 쓴 분이라고 한다. 성경뿐 아니라 '천로역정(Pilgrims of Precessing)을 한글로 번역하여 많은 사람들이 읽게 했다고 한다. 선교사들이 제일 많이 겪는 어려움중의 하나는 음식이라고 한다. 한국도착후 3개월만에 황해도의 소래에서 한국의 토속음식을 익히기위해 때로는 코를 막고, 음식을 입에 집어넣고 꿀꺽 삼키면서 넘겼는데,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배(Stomach)에 전연 탈이 나지 않고 소화해 냈다고 하여, 사람들이 그의 배를 가리켜, 선교를 하기위해 특별히 하나님께서 제작해주신 것이었다라고 농담삼아 사람들이 신기해 하곤 했다한다. 이는 그의 철저했던 Koreanized Christian이 되기를 생활화 했었던 그의 행적의 일부분임을 알수 있었다.

월남 이상재 선생을 비롯한 다른 동료들이 Gale목사로 부터 세례를 받았으며, 이승만씨도 그에게서 세례를 받을려고 했으나, Gale선교사는 거절 했다고 하는데, 이유는 이승만씨가 장로교인이 아니고 감리교출신이기 때문이었었다고 한다.

1908년 Herriet부인이 병사 하자 2년후인 1910년 4월에 실업가의 딸인 루이스와 재혼하였다.
그는 1900년에 연동교회에서 목회를 하기 시작하여 1927년에 은퇴하고 그의 부인의 고향인 영국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37년 1월 31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성경을 우리한글로 번역할때, God을 어떻게 옮겨야 하는가를 놓고, 당시 번역에 참여했던 Underwood와 논쟁을 벌린일도 있었다 하는데, Underwood는 '천주'로 해야 한다했고, Gale은 한국사람의 정서에 맞는 '하나님'으로 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워 주장을 관철 시켰던 일화는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는것 같다.

교회에서 가까이에 있는 그의 생가를 방문했는데, 지금은 그와는 아무런 인척관계가 아닌 Farmer가 현재 3대째 살고 있다는것을 알았다. 당시의 집은 아주 조그만 했는데 현재는 본채에 잇대어 또 다시 집을 지어 상당히 커 보였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Gale발자취를 보기위해 이곳을 방문하는것 같아 보였다. 잘 가꾸어진 정원에서 한켤레의 신발에서 잘 자라고 있는 화초는 특히했고, 큰나무를 자르고 남아 있는 Stump있는 그위에 shelter를 지어 놓아 보기에 운치 있어 보이는 여유도 보았다. 일행들이 본채 건물을 보러 몰려간사이 나는 본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Garage에서 Tig Welding으로 자동차의 앞뒤 Bumper를 만들고 있는 청년과 인사를 하게됐다. 그의 설명으로는 3대째 이곳에 살고 있는데, 그의 Grand Father께서 1940년대초에 이농장을 구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시간적으로 따져볼때, 현재의 농장주인전에 또다른 사람이 이곳에서 살았었지 않았나 하는 계산이 된다. 그는 누구였을까? 어쩌면 Gale이 어떤 사람이었었나를 모른채 그에게서 직접 구입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원을 아주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 놓아 사진 몇장을 찰칵 하기도 했다.

탐방후 Elora Gorge Covservation에서 모두가 둘러앉아, 오늘의 Gale생가 및 교회 탐방에 대한 보충 설명을 Y목사님으로 부터 듣고 질문도 하면서, 준비해온 BBQ와 곁들인 점심은 일품이었다. 예상치도 않게 모든분들이 음식을 많이 준비해와 푸짐한 파티를 연상케 하는 맛있는 진미를 실컷 먹는 야외소풍의 기분을 내기에 손색이 없었다. 집에서 가꾼 상추를 얌전하게 다듬어 큰 Container에 듬뿍 담아와 돼지고기 불고기와 쌈장에 싸서 먹게 했고, 나물반찬, 그리고 밤샘하면서 말았다는 맛있는 김밥, 귀한 달래김치등등 모두가 오늘의 탐방을 위해 정성껏 준비한 그손길들을 감사할뿐이었다. 어린 아이들은 끝없이 펼쳐진 Lawn위에서 축구를 하면서 딩굴고, 항상 그렇치만 여성분들은 다시 먹고남은 뒷치닥거리를 하느라 바빳고..... 식사후 계곡을 따라 이어진 Trail을 걸었다. 바위위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들과 기암절벽들...기억에 남을 나들이였고, 이제 이고마운 모임이 좋은 열매를 맺는 모습도 머지 않아 보게 되리라 확신해 마지 않는다.

오늘의 탐구여행에서 나는 보기 드물게 내가 직접 운전을 하지 않고, 같이 간 동료 Elder분의 차에 동승하여 편하게 다녔다. 항상 운전을 하다가 승객신분으로 있으니 처음에는 뭔가 잘 맞지 않는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으나, 이내 편하고 Relax해졌다. Kitchner Waterloo 지역을 지날때는 오래전 아들이 이곳에서 학교 다닐때 가끔씩 들렸던 기억이 아렴푸시 떠 오르기도 했다. 그후로는 오늘이 이지역을 통과하는것은 처음인것 같다. 세월이 유수와 같다는 말이 실감나게 한다. 차창으로 비쳐지는 끝없이 펼쳐지는 농장의 파란 전경은 평화롭게 보이기도 한다.

현재는 Gale목사의 후손은 완전히 대가 끊기어, 캐나다에는 직계 가족이 존재치 않는다고 한다. 아쉬운 대목이다. 이것도 그분의 뜻으로 받아 들여야 하나? 잘 모르겠다.

참고: 혹시 찾아가실분들을 위해 교회 주소를 추가 합니다.

St.Andrew's Presbyterian Church

325 George St. W. Fergus, Ont. N1M 1J4.

Wednesday, June 22, 2011

Lunar가 정성을 담아 만든 미니 Garden.














Lunar가 만든 미니 Garden. 6월 22일

로벨리아의 파란색갈과 핑크빛 꽃들과 그리고 핑크빛 Two tone 칼러의 제라니움, 키가 멀쑥하게 커서 별로 모양이 좋지 않아 보였던 푸추니아의 고운 Purple색의 꽃들과 그리고 도라지꽃, 또 이름도 모르는 노란색의 꽃을 만발하고 있는 잡초같은 꽃들이 어우러져 보기가 그만이다. Lunar가 손수 spade를 들고 흙을 파고, 비료를 주고 물을 주고, 모양을 잡아 주고.... 그렇게 해서 이층의 발코니 구석에 있는 조그만 화단에 꽃들을 심어 놓아 미니 가든을 만들은 것이다. 또 오래된 기분을 내기위해 moss도 부쳐놓아 멀리서 보면 그럴듯 하게 오래된 냄새를 풍겨주는것 같이 보인다. 골프를 하고 와서 아직 이른 오후의 더운 햇볕에 땀을 흘리면서 가든을 가꿀때, 나는 별로 도와 주지도 못했고, 또 할수도 없어, 겨우 도와 준다는게 고작 물을 한 Bucket 떠와서 골로루 꽃들위에 뿌려 주는게 전부 였었다.

지난 며칠간은 Lunar와 같이 그녀가 가자는데로 No-frill의 가든센터와 Wain Garden센터를 들락 거리면서 값싸고 보기좋은 Annual Plants들을 구입 하느라 시간을 보냈었다. 이른봄에 겨울의 긴 동면에서 벗어나 집 앞뒤의 정원을 가꾸고 꽃을 심고 하는 등등의 극성을 부리는 주위 사람들을 보면서, 그때는 나와는 상관없는 일쯤으로 관심을 두지않다가, 이제는 꽃모종이 다 자라 꽃을 피우고 전성기를 지난 지금에 와서 Lunar가 꽃을 심어 보고 싶은 마음을 접어 두지 못하고 그녀가 취미로 좋아하는 미니 Garden을 만들어, 보는 눈을 시원하게 해주고 있는 것이다.

가든을 꾸미기 전에는 채소 모종을 심어놓고, 풀을 뽑고, 물도 주고 하면서 정성을 들이더니....
이제는 꽃을 가꾸어 보고 싶었는가 보다. 허긴 잘은 몰라도, 매년 시즌이 되면 아름답게 정원을 꾸며보고 싶은 마음이 그녀에게 항상 잠재되여 있어 왔다는것을 알면서도, 토론토의 집은 콘도라서 엄두고 못냈었고, 시골집은 면적은 넓은데, 계속해서 머물지 못하고, 토론토와 이곳 시골집을 왔다 갔다 해야 하는 번거로움에, 제대로 가든을 가꾸고 물주고 풀뽑아 주면서 그들을 사랑해줄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행동으로 이어지질 못하고 지내 왔었다.
작열하는 오후의 태양열 속에서도 미풍이 지나치면 잡풀처럼 보이는 로벨리아의 파란 꽃줄기들이 흐느적 거리는 모습이 마음을 간지럽게 하기도 한다. 화초들만이 보여줄수 있는 이모습때문에 때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많은 돈을 들여 정성스럽게 화단을 가꾼다는것을, 이조그만 미니 화단을 보면서도 깊이 알수 있을것 같다.

노랗게 꽃을 활짝 피운 Merry Gold의 꽃봉우리들이 이팔 청춘의 처녀처럼 최대의 풍만함과 최고의 모양을 자랑하는 모습에서 생명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느낄수 있을것 같다. 화무 십일홍이라 했다는데..... 며칠이나 그모양이 지속될수 있을까? 괜히 지금의 그발랄한 꽃모습을 할수만 있다면 꼭 붙잡아 두고 오래 오래 보면서 눈을 즐겁게 하고픈 마음속의 욕심이 발동한다. 욕심을 부리면 결과가 좋지 않는다는것은 옛어른들의 말씀과 또 경험에서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왜 이런 마음이 가슴속에서 떠나지 않는 것일까?
다년생인 Peony도 Lunar의 마음을 알았는지 때를 마추어 진한 빨간색의 꽃봉우리들이 피어 나기 시작하고 몇송이는 그우아한 자태를 나타내기 시작 한다. 향은 별로 없지만, 모양은 양귀비 이상이다. 분위기가 한층 더 풍만해 보인다. 화초들이 제자리를 잡고 꽃의 향기를 뿜어낼때에는 많은 나비들과 벌들이 모여 들어 그들의 양식을 여기서 채취 하기에 바쁘게 움직일것이다. 자연섭리의 윤회를 여기서도 볼수 있는것 같다.

내일이면 다시 또 토론토를 향해 핸들을 잡아야 한다. 그곳에서 해야 할이들이 있기에 피할수 없다. 지난주에도 토론토에 갔었을때, 계획보다 더 오래 있으면서 채소 심어 놓은것을 걱정 했었던 기억이 난다. 예상도 않았었는데 다행히도 뒷집의 Barbara가 말라죽지않게 물을 주어 잘 자라게 해주어 호박과 오이 넝쿨은 이제 제법 그모양을 보이고 있어 그것을 보는 마음이 풍부 해짐을 느낀다. 이제 막 옮겨 심어 자리를 잡아 가고 있는 화초들을 뒤로 하고 토론토를 다녀와야 한다. 걱정이 된다. 뜨거운 여름날의 태양열에 지표가 쉽게 마르기 때문에 조석으로 물을 주어야 하는데..... Barbara에게 부탁해볼 염치가 없어 차마 입을 뗄수가 없을 것 같다. 더구나 화초들이 심어져 있는 미니 화단은 그녀 집으로 부터 더 멀리 떨어져 있는 집 이층의 베란다 구석에 자리 잡고 있기에 더 망설여 지는 것이다. 우리가 없는 동안에 목말라 죽는다 해도, 오늘 현재는 그모습들이 너무도 아름답기에 그져 보기만 해도 마음이 폰근 해짐을 느끼면서, Lunar가 땀흘린 보람을 내가 대리 만족 하는 그런 기분이다. 현재 이순간에 시원스런 산들바람에 아름다운 자태를 좌우로 흔들어 대는 형형색색의 꽃들이 어우러져 보는 눈을 시원하게 해주는 이찰라를 기억 하도록 하는게 미니 가든을 꾸민 진짜의미가 아닐까?

오늘은 꽃들이 더 싱싱해 보였다.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한 보슬비가 그들의 목을 풍족하게 추겨 주었기 때문이리라. 매일 하다시피하는 골프를 할려고 Tee off시간에 마추어 골프장에 까지 갔었으나, 부슬비일망정 비속에서 골프를 한다는게 마음 한구석을 무겁게 하는것 같아 골프를 접고, 대신에 Trenton으로 차를 몰라 시내를 돌아보고, 넓직한 Shopping Mall에 자리잡고 있는 Garden Centre에 들려 화초들에게 줄 영양분을 조금 구입 했었다. 오늘은 채소밭과 화초밭에 물을 주지 않아도 계속 내리는 부슬비가 내가 할일을 대신 해주고 있어 육신은 조금 편한것 같았으나 정성이 안들어 갔으니 좋은점도 될수 있고, 또 나쁜점도 될수 있는것 같다. 지붕에서 흘러 내리는 빗물을 받아두는 큰 통에 물이 넘쳐 흐르고 있다. 어제 그안에 받아놓고 쓰던 빗물을 다 소비해, 비싼(?)수도물을 받아 약 2/3를 채웠두고 내일 다시 쓸려고 했었는데.... 지붕의 빗물이 다 그곳에 채워져 괜히 수돗물을 낭비한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불과 몇시간 앞에 벌어질 대자연의 움직임을 볼줄도 모르는 우리 인간의 무능함에 연약함을 깊이 느낀다. 차라리 우리가 떠나 있는 며칠 동안내내 오늘 처럼 부슬비가 내려 채소와 화초들의 목을 추겨 주었으면 좋겠다는 욕심에 가까운 바램이 마음속에서 꿈틀 거린다. Lunar가 정성들여 미니 Garden에 꽃들을 심으면서, 그들과 마치 대화라도 하듯, 이모양 저모양으로 균형을 잡아 일구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 보았기 때문에 더 애착이 가서 그런것 같다.

Monday, June 20, 2011

교회성전 뒷뜰에서 벌어진 야유회는 화합과 소통의 장이었다.















성전 뒷뜰에서 벌어진 야유회는 화합의 장이었다.

각마을의 테이블에서는 풍성하게 차려진 음식들을 여자분들께서 정성으로 배식을 하시고, 즉석에서 불고기도 구워 주시고, 부침 Pan Cake도 부쳐 주시고, 갈비도 굽고, 여름 식탁의 상징인 상추도 푸짐하게 식탁에 쌓여 있어 보기만 해도 배부르게 해주는, 오늘만은 부자들 부럽지 않은 식탁이다. 이마을에 가서 주시는 음식 한입 받어먹고, 또 저마을에 가서 갈비로 한대 얻어 먹고....모두가 환영일색이다. 평상시에 우리들의 삶이 이렇게 여유로웠으면 하는 생각을 해 보면서, 될수만 있다면 이런 모임을 자주 갖어야, 즉 서로 어깨 비비고, 목소리도 높여 가면서 음식도 나누고 생각을 나눌때 진정한 교류가 자연스럽게 흘러 흘러 끝까지 웃음과 풍부한 마음들이 서로 전달된다는것을 깊이 느꼈다.

오늘만은 신앙생활을 같이 하는 모든이들의 마음이 이렇게 풍부할수가 없어 보인다. 평상시 지역별로 서로 가까운 교회식구들끼리 신앙의 공동체 즉 마을을 만들어, 정기적으로 각가정을 돌아가면서 만나서 신앙생활의 참의미와 친교를 해오곤 하던 마을들이, 오늘은 본 예배를 마치고 교회뒷마당의 주차장과 그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넓은 잔듸밭에 준비된 Picnic Table에 오손도손 모여서 일년의 한번 치르는 야유예배로 모여 초여름의 싱그러운 풀냄새를 맡으며, 각자 준비해온 음식물을 서로 나누며, 다른때 미쳐 못다한 신앙과 삶의 얘기들을 주고 받고 들으면서 부담없는 오후를 즐기는 모두의 모습들이 다정스럽게 보인다.

매주일날에는 1부,2부,3부, 4부로 나누어 보던 예배를 오늘은 1부와 2부로 모여 합동 예배를 보고, 곧바로 야외 피크닉을 한것이다. 우리 부부는 여름이 되면 토론토 생활을 접고, 시골집에서 주로 하기에 마을별로 모여서 예배와 친교를 하는 모임에 참석하질 못했기에 속해 있는 마을도 제대로 파악 못하고 지내 왔었는데, 오늘같은 야유예배시에는 평소에 마을별로 모이는 예배와 친교모임에 참석을 못했다는 증거를 내 스스로 보여주는것 같기도한 느낌을 받았었다. 또 매주 예배때는 서로 예배보는 시간이 달라, 얼굴도 못보곤 했던 친지분들이 오늘은 한자리에 모여서 정담을 나눌수 있는 징검다리 역활을 해주는 야유회의 고마움을 참석하신 모든분들이, 나처럼, 느끼고 계시는것 같이 보인다.

마을장 되시는 리더분 되시는 Elder K분께서 지난주일 예배후 친교할때, 오늘의 야유회가 있음을 강조해 주셔서, 확실한 대답을 못했다가, 어제밤 늦게 Lunar와 결정을 하고 교회예배 시간에 맞추어 시골집에서 출발하여 교회를 향해 차를 몰았었다. 갑자기 참석하기로 결정한뒤, Lunar는 우리가 먹을 음식을 준비 하느라 저녁 늦게까지 그리고 이른 아침에 바삐 움직이는것을 보면서도 별로 도와 주지를 못해 미안한 마음이었었다. 일요일이라서 평상시에는 바삐 움직이는 차량들과 꽉 차있던 고속도로도 한가롭다. 마음같아서는 시속 150킬로 까지 놓고 밟아 보고픈 유혹도 있었으나, 주일날 삶을 인도해 주시는 그분을 만나러 가는 길이고, 또 일년에 한번 치르는 야유회에 참석하는 길인데..... 라는 생각이 머리에 꽉 차있어, 앞차를 뒤따라가는 얌전한 운전을 했기에 무사히 교회까지 올수 있었다고 생각하면서, 한발 뒤로 물러서서 서두르지 않았기에 가능했다고 확신을 가졌었다.

귀여운 손녀같은 아이들 서너명이 우리 마을에 와서, 고사리 같은 손에 쥬스와 Candy를 들고 내밀면서, 나를 포함한 남자 어른들이 테이블에 앉아 얘기하고 있는 곳에와서 Donation을 부탁한다. 그들의 내용은 Africa에서 수고 하고 계시는 선교사님에게 선교헌금을 보낼계획이라고 설명까지 해준다. 우선 신앙을 떠나 같은 사회라는 공동체에 살면서, 서로 도와야 한다는 그진리를 우리의 아이들이 손수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고 있다는 그 대견함이 나를 기쁘게 해준다. 그들은 각 마을을 다 돌아 다니면서 그렇게 Donation을 받고 있었다. 그들의 오늘같은 마음들이 평생동안 삶의 현장에서 자리잡고, 서로 나누는 즐거움과 또 내가 움직여서 누군가를 도와 주었을때, 주고 받는 각자의 마음이 열리고 감사할줄 알고, 마음이 풍성해 짐을 느끼는 지속적인 생활의 한부분으로 남아 있기를 기대해 본다.

넓은 주차장에서는 모든 식구들이 모여 Leader의 안내로 각종 Fun Game들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 가끔씩은 함성으로 이어진다. 멀리 떨어져 있어 그내용은 알수 없으나, 암튼 참가한 모든이들을 마음 터놓게 크게 웃을수 있도록 앞에서 이끌어 가는 리더분의 재치가 빛나 보이는것 같다. 대부분의 나이드신 남자분들은 그늘밑의 의자에 앉아 얘기들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것과는 대조적이다. 나이드신 여자분들, 그리고 어린 아이들 같이 어울려 빙빙 돌면서 뭔가를 살피다 기회가 포착되면 공격(?)을 하는것 같이 보인다. 아이들과 나이드신 할머니들이 함께 어울려 훌라 댄스를 하는 광경도 보는이들의 배꼽을 잡게 하는 연출도 보인다.
허리가 둥글어서 없는 분들이 뒤뚱거리면서 흔들어 대기는 하나 오래 가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어린 아이들은 날렵하게 잘도 춤을 춘다. 훌라가 허리 아랫쪽으로 내려가 곧 땅에 떨어지나 염려 했더니 금새 허리를 기술껏 움직여 위로 치겨 올리고 계속 빙글 빙글 돌리는 그들의 얼굴이 천사 같이 보인다.

내가 속한 마을뿐 아니고, 모든 마을의 회원분들이 이렇게 음식솜씨가 좋은줄은 예전에 미쳐 몰랐었다. 이름도 모르는 귀한 음식들, 마치 음식경연장 같은 착각이 든다. 고기는 물론이고 속에 특히한 가루을 넣어 만든 송편, 오랫만에 맛보는 묵, 여러 종류의 김치, 해물류, 푸성귀, 건강식이라는 오곡밥, 산마늘김치... 등등, 이럴때 내가 음식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지 못하는게 미안하다. 자세히 그내용을 진열 할 재주가 없기에 말이다. 서로 나누는 속에서 거리감과 겪이 없어지는것을 본다. 평상시에는 보일수 있는 계산이 지금 이순간에는 아무에게서도 발견할수가 없다. 수십년, 아니 예수 탄생 이후로 끝없이 신앙생활은 이어져 왔지만, 오늘같은 실천으로 옮겨지는 모습은 보기가 흔치 않다.

매년 이맘때쯤이면 년례 행사로 전교인 상대로 야유회를 교회밖에서 치르곤 했었는데, 금년에는 그패턴을 바꾸어 교회안의 넓은 뜰에서 간촐하게 처음 시도해 보는 일종의 Trial Case인것 같다. 지금까지는 매년 Scarborough에 있는 Morningside Park 또는 가까이에 있는 Sunny brook Park에서 했었었다. 번거로움도 많았었다. 미리 시청에 사용 허가를 맡아야 하고, 그나마 그것도 최근 들어서는, 특히나 9/11 사태 이후로는 집단으로 모여서 행하는 모임에는 허가를 해주지 않아, 아침 일찍부터 일부 대원들이 공원에 나가 자리를 맡이 지키고 있어야 하는 번거로움과 대식구가 이동하는 점도 무시할수 없는 골치거리중의 하나였었는데, 오늘은 그러한 절차가 필요없이 바로 마음 편하게 예배를 마치고 뒷뜰로 옮겨, 마치 온가족들이 여름날 집뒷뜰에서 BBQ를 하면서 하루를 즐기듯 그러한 풍경을 연출해 내였다. 속이 꽉찬 알맹이가 풍부한 야유회 잔치 였었다고 생각된다.

토론토 콘도로 가지 않고, 시골집으로 늦은시간에 차를 몰았다. 고속도로는 여전히 한가롭다. Lunar와 둘이서 오늘 즐겼던 얘기를 하고,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하고, 우리 부부가 아끼고 가깝게 지내는 교회 후배가 만들어준 CD를 들으면서 시골집뜰에 당도 했을때는 벌써 사방이 조금씩 어두어 지기 시작했었고, 이때를 기다리기라도 했듯이 차문을 열자마자 모기떼가 극성을 부리면서 우리를 공격해 댄다. 이또한 토론토에서는 겪기 쉽지 않는 시골에서만 느낄수 있는 또 다른 자연이 이속에 있다는 증거 아닐까? 뜻있게 보낸 오늘 하루 감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