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April 23, 2009

홍천 친지방문과 대명리조트 구경




















오랫만의 또 다른 친구부부와 상봉의 순간을 맞이 하기위해, 우리 부부를 포함한 3부부가 오전 11시까지, 젊음을 바쳐서 열심히 일해온 생활 터전이었던 서울 생활을 접고,지금은 홍천에서 은퇴생활을 하고 있는 친구 부부댁에 가기위해 차에 올랐다.
이번 고국 방운에서 4부부가 동시에 한장소에서 만나는 기회는 오늘이 처음인 셈이다.
매번 고국방문때마다 4부부가 모여 만남의 시간을 갖어온것은 일종의Routine이다시피 해 왔지만, 오늘의 만남은 흔퇴후 처음이기에 또 다른 기대와 그후의 삶에 대한 진지한 얘기들이 기대되기에.....
뭐가 그리 바쁜지, 모두가 은퇴후의 생활을 즐기고 있는 친지들이지만, 시간은 더 바쁘게 보내는, 그래서 좀처럼 큰마음을 먹기전에는 합류가 쉽지않음을 알았기에 더 뜻있는 상봉이 될것같다.
실제로는 나의 친지가 아니라, 아내들이 서로 친구지간인데, 그동안 살아오면서 같은 만남을 통해서 좋은 시간을 갖다보니, 지금은 아주 오랜친구이상으로 흉허물이 없기에 아주 편한 친지부부들인 것이다.
차안에서 들려준 다른 친구부부의 말에 의하면 홍천친구는 새로 거주할 집을 약 2년전에 건축했다는 것인데,전화통화는 셀수도 없이 했고, 서울에서의 만남도 셀수도 없이 했지만, 현지에서의 상봉은 오늘이 처음이라고 했다. 이해가 갈것같았다. 너무나 모두가 바삐 노후의 생활을 즐기고 있는 모습들을 이번 방문에서 보와 왔기에 말이다.
잘뜷려진 산계곡사이의 고속도로를 구비구비돌아 친지의 집에 도착했더니, 멍멍개들이 짖어대고, 요즘 유행이라는 황토벽돌로 아담히 낮으막하게 지어진 집이 편안하게 눈에 박힌다.
대머리인, 남편되시는 친지가, 환히 웃으면서, 뒷뜰에서 화단을 손질하다가 반가히 맞는다.
첫마디가 정중한 인사가 아니라, 모두를 웃기는 구수한 정경이 풍기는 어린애적인 '왜 이렇게 늦게와, 진직왔어야지...자기들끼리만 깨를 볶느라 그랬나? 이제는 그만 할때도 됐을텐데...'라는 등등....
'여기서 오늘 그시범을 보일려고 왔다네 이친구야...'대답도 걸작이다. 한바탕 웃은후에 안으로 들어가 여자친구분이 만들어 주는 향토커피와 과일을 나누면서, 다시 분위기가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이순간, 누가 이런 우리의 모습을 본다면, 손자 손녀들을 둔 할아버지 부부라고 할수 있을까 할정도로
동심의 세계로 들어가 이성적으로는 말도 안되는 소리들로 폭소를 만든다. 얼마만에 엮어지는 순간인가? 역시 캐나다에서 나오니까 만사제치고 이렇게 8명이 서로 바쁜시간들을 제치고 모이는 순간을 만들었다. 고로 캐나다 부부는 자주 나와야 된다고, 또 폭소다.
시골이라, 아직도 계곡을 통해 흐르는 시내물은 맑기가 옛정취를 느끼게 하는데 충분했다. 우리의 만남을 위해 현지에서 바로 잡은 '빠가사리'물고기를 넣고 끓인 매운탕이 기다리고 있는 시내천옆의 식당으로 가잔다. 40년이 훨씬 지난 오늘에야 시냇가에서 매운탕을 먹게 되는 것이다.
물고기의 뼈가 무척이나, 크기에 비해 억셌는데, 자연의 물속에서 자란 물고기의 특성이라고 한다.
고맙기만 했다. 이런 분위기를 만들려고 아침일찍부터 현지답사하여, 식당에 부탁을 해서 우리들을 먹일려고 했단다. 맛도 좋았지만, 정성을 더 높이 사면서, 진정한 우정의 나눔이 이런것 아니겠는가? 깊이 숨을 내쉬어 본다. 큰도시에서의 비싼 식당음식보다 훨씬 오래 간직하게될 그런 만남속의 철엽같은 음식나눔, 이친구가 이곳 홍천 산골속에 은퇴후의 삶의 터전을 마련치 않았더라면, 꿈속에서인들 상상이나 해볼수 있었을까?
이친구가 마음이 바쁜 모양이다. 다음 구경할곳으로 가잔다. 간곳은 바로 인근에 있는 대명리조트로 안내 했다. 그곳은 겨울에는 스키, 요즘에는 곤돌라를 이용해서 정상에 올라 둘러쌓인 산세의 전경을 둘러 보는 휴양지이고, 바로 스키 슬로프 밑으로는 9홀 골프코스가 있었다. 시설도 아주 훌륭해 보였고, 정상에서는 수십명의 어린 손자, 손녀들같은 학생들이 소풍을 나와 즐기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참많이 좋은 세상으로 변한 조국의 발전상을 느낄수 있었다. 건너편으로 보이는 산봉우리들을 각각 이름을 들어 설명도 해주고, 오래전에 등산하다가 길을 잃어 헤멨던 기억등등의 실수담도 들려준다. 우리일행을 산정상까지 올려다준 곤돌라의 성능도 훌륭했다. 아직은 Peak Season이 아니라서 많은 관광객은 없었지만, 그래서 파킹장에는 차들이 즐비하다. 골프코스는 모두 파3로 짧은 것 같았다. 한번 휘둘러 보고싶은 충동도 순간 일었지만.... 행동을 같이하면서, 오랫만의 만남속에 취해 있는데, 감히 어떻게 그런 얘기를 꺼낼수 있단 말인가? 리조트거너편으로 이어진 trail walk을 했다. 토론토에서 처럼 평평한 숲속길이 아닌 가파른 길을 걷는것은 또 다른 맛이 있었다. 무릎에 느껴지는 몸무게의 느낌도 더 무거워던 것 같다. 그것이 문제가 될수가는 전연 없다. 그것이 대수가 될수가 없었다. 헉헉 하면서 모두가 제각기 입을 놀려 그동안 품고있던 마음속의 생각들을 뿜어 내기에 바쁘기만 한다.

춘천에 나가서 춘천 막국수를 먹어야 제맛이 난단다. 다시 차를 달렸다.
대도시에서 먹었던 유명타고 하는 냉면 먹는것 보다 더 맛이 감칠났다. 구수한 맛이 나는 숭늉과 후덕하게 생긴 주인마님의 손길도 정답게 느껴진다. 오늘은 배가 너무나 혹사를 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한가닥의 국수가락을 남김없이 깨끗이 해 치우면서, '육군정량을....'라는 변으로 맛을 대신했다.
한밤을 이곳에서 새우고 싶었지만, 내일 아침에 다시 중국으로 여행을 떠나야 했기에 늦은 저녁 같이 이곳에 온 친지부부와 같이 그들의 서울집으로 핸들을 돌렸다. 만남은 설레이면서 좋고, 헤어짐은 아쉬움움과 기약없는 다음 만남을 마음속에 새기면서....

Wednesday, April 01, 2009

화전역, 모래내 그모습을 신문에서 보면서....



처음 직장생활을 할때 수색역뒤쪽 상암동에서 한동안 살았었다.
아직 수도물도 보급이 안돼 남의집에 있는 우물물을 퍼오기위해 물지계를 지고, 차거운 겨울날 동네 고샅을 지나던 시절이 어제 같았는데....
직장을 끝내고, 집에 오기위해서 문산선 열차를 서울역에서 타고, 아현동 굴속을 지나 화전역(모래네) 지나 수색역에 도착하면, 때로는 수색역 광장앞에서 시작되는 굴다리(아마도 하수구로 만들어 놓았던 것을 수색역뒤에 새로 형성된 상암동 주민들이 통로길로 사용 했던듯)를 지나 신세를 지고 있던 바로 윗형님의 집으로 향하곤 했던 기억이, 오늘 본국의 신문기사를 보면서, 그때의 어렵고 고달펐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그때로 부터 40년이 훌쩍 지나갔다. 모래내 시장, 그때는 간이 기차역 플렛폼이 주위 시장이나 주택가보다 더 높았었는데.....
그곳을 매일 통근열차를 타고 지나면서, 그아래로 무질서하게 널려져 있던 시장들.....자세히는 생각이 안나지만, 오늘 신문기사는
당시의기억을 되새기게 하는데 도움을 많이 주었다. 주위는 붉은 황토흙이었던 기억도 새롭다. 철길건너 언덕위에는 또한 무질서하게
들어선 주택들..... 그집주인들이 그렇게도 나를 당시에는 부럽게 했다. 나는 그런집을 살 엄두도 내지 못했던, 풋내기 직장인생활을 하고 있었던 때였으니까. 고국을 방문하게 되면, 꼭 들려 보고 싶은 곳이다. 기회가 닿을지 모르겠지만....
여기에 신문기사를 옮겨 싣는다.


천막촌・물지게・재래시장 … 사라져가는 모래내의 추억 [중앙일보] 2008 풍경 담은 뉴타운 민속지 『가재울』


“거기서 나는 살았다 선량한 아버지와/볏짚단 같은 어머니, 티밥같이 웃는 누이와 함께.”(이성복 ‘모래내 1978년’ 부분)

‘가재울 뉴타운’이란 이름으로 더 익숙한 서울 북가좌동과 남가좌동 일대. 고지도에 ‘사천(沙川)’이라 표기된 홍제천 옆 이 땅을 사람들은 ‘모래내’라 불렀다. 옹기종기 집 짓고 수십 년 살았던 사람들이 재개발 때문에 이곳을 떠난다. 서울역사박물관은 가재울의 마지막 풍경과 기억을 기록한 뉴타운 민속지 『가재울』 전 3권을 냈다.


가재울 3구역 수재민 정착마을. 철거가 덜 된 빈집 앞마당에 풀이 무성히 자랐다. 멀리 새로 생긴 아파트촌이 보인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가난이 다스리던 동네=홍제천으로 가로막혀 교통이 불편했던 모래내는 가진 것 없는 이들의 땅이었다. “물이 많으면 철로 다리(경의선 철교)로 건너와야 돼. 한 반쯤 갔는데 빽빽 기적을 내잖아, 기차가. 그래서 살려고 그냥 다리 밑에 내려갔지.”(이대용・84세)

1950년대 말 이후 이촌동 수재민과 용산 철거민 천막촌이 들어섰다. 홍제천을 가로지르는 사천교가 놓이면서 ‘서울 드림’을 꿈꾸는 각지 사람들이 몰려들어 판자촌을 지었다. “송장뼈를 얼마나 내왔는지 몰라. 뉴타운 되어 밀면 뼈다귀 꽤 나올 거예요. 공동묘지였거든.”(이보금・70세)

송옥태(72)・강춘송(67)씨 부부는 상경해 모래내로 이사오던 첫 날, 미로처럼 얽힌 판자촌 골목에서 딸을 잃어버렸다 간신히 찾았다. 수돗물이 나오지 않아 빗물을 독에 받아두거나 이웃 동네에서 물지게를 져 날랐던 그곳엔 1968년 첫 대중목욕탕이 들어섰다.


방 한 칸 짓고 가재울에 정착한 수재민들 은 식구가 늘면서 다락방을 올리고, 방을 붙여 지으며 집을 늘려갔다.
◆모래내시장 사람들=1966년 모래내시장이 들어선다. 소상인들의 삶은 잡초같았다. 30여 년간 기름가게를 해온 김규섭(64)씨. 처음엔 가게 안쪽에 한평 남짓 방을 만들어 살았다. 겨울이면 소방서에서 불법 건축물 점검을 나와 해머로 방을 깨부쉈다. “갈 데가 없으니까 일주일(소방점검 기간)간 애들 두 놈 어깨쯤에다 업고 가게에 앉아 날 새 버렸어.”

42년간 포목점을 운영한 홍용선(70)씨가 갖고 있는 자는 40년이 넘었다. 1년에 한번씩 동사무소에 갖고 가 치수를 속이지 않았나 검사를 맡던 자다. 어렵던 시절에 사기꾼, 잡도둑은 더 극성이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이들에게 “첫 손님이 하루를 좌우한다”는 등의 ‘속신’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서울 서북부 최대 상권을 형성하며 남부럽지 않게 벌어먹고 살았다. 밥 먹을 시간도 없이 바쁘던 그들은 이제 일찌감치 문을 닫는다. 모래내시장 일부는 뉴타운지구에 편입돼 사라진다.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에 나왔던 그 풍경도 사라질지 모른다. 조사를 총괄한 오문선 학예연구사는 이렇게 제언한다.

“다른 재래시장들은 아치형 지붕을 단 획일적인 모습으로 리모델링 됐습니다. 번듯한 걸 좋아하는 한국인들은 가난한 시절의 풍경들이 언제 사라지는지도 모르는 채 잊어버립니다. 재래시장의 원형을 보존한 모래내시장은 산업화 시기 서울의 생활문화를 보여주는 문화콘텐트 산실로서의 가치가 높습니다. 그 공간을 생태박물관의 형태로 보존해야합니다.”

이경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