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February 28, 2009

Silver Creek Conservation Trail Walk













햇볕은 쨍쨍해서 봄이 정말로 왔나 싶었지만, 밤새 급강하한 기온은 체감온도가 영하 26도까지 내려갔다고 한다. 실체 온도는 영하 16도.
산행시작하는데 추워옴을 느낀다. 대원들 모두가 얼굴을 싸고 완전 무장한 느낌이다. 얼핏 보아서는 식별이 안될정도로 두건에 목도리에 .....
추위에 눌려서 많이 나올것 같지 않았는데, 41명이 참석 했단다. 용감하다고 칭찬해 주어야 한다. 나혼자서라도...용기를 주는 의미에서.
아직도 트레일에는 눈이 남아 있고, 어느구간은 녹아 내리다 갑자기 급강하한 기온에 스케이트장 처럼 얼음판이 많아 신경 쓰인다.
미끄러저 넘어 졌는데 다행히도 다친데는 없어, 그순간을 순발력(?)있게 잘 대응한 내자신에 아직도 괜찮구나 자위했다.
계곡의 물흐르는 소리는 제법 크게 들렸다. 그사이 쌓였던 눈이 녹아 내려 흘러가는 소리가 우렁차다. 계곡의 양지녘에 모습을 나타낸 바위에는 파란 이끼가 봄소식을 안고 있는것 같아 보였다. 추운데 봄소식을 전해 주겠다고 자태를 나타내는것 같아 안타깝게 보여지기도 했다.
아직 길위에 하얗게 널려 있는 눈은 밤새 추위에 꽁꽁 얼어, 그위를 밟는 발자국을 꿋꿋히 받쳐 주면서 버티고 있다.
늦은 가을에 이곳에 오면, 떼를 지어 독수리들이 농장의 지붕과 울타리에 있곤 하는것을 보았기에 지나가면서 유심히 다시 보고 또 보았지만, 한마리도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아쉬웠다. 지붕위에 일렬로 앉아 있는 모습은 장관이었었는데.... 독수리들도 철새인가? 그래서 겨울철 서식지로 날아가 버려서 일까? 농장의 건물과 울타리와 모든 모습은 그대로 겨울을 잘 보내고 있는 것 같은데....

잠시 Break time에는 어느 대원이 준비해온 시루떡과 맹고의 껍질을 벗겨, 알맹이만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와서 나누어 먹자고 권한다.
헉헉거리면서 한시간을 걸어온 후의 휴식에서 한입 먹는 맛은 적절한 표현을 할수 없을 정도로 혀끝을 녹인다. 준비해간 커피도 한잔 곁들인다.
사진을 몇컷 찍었는데, 갑자기 카메라의 스크린에 "Battery Low"라는 사인이 나오더니 그것으로 숨을 거두었다. 아쉬웠다. 좋은 Scene들이 많았는데..... 정확히 전진을 2시간 하고, 점심을 했다. 아내가 준비해준 볶음밥이 아직도 따뜻하게 입맛을 돋운다. 계곡밑의 햇볕이 내려쬐는 양지쪽에 자리를 잡고 시려운 손가락을 입김으로 불어 녹이면서.... 그렇게 하면서 뚝딱 해 치웠다. 햇볕은 따스했다. 바람도 이곳에는 없어 봄기운이 세월의 옷자락에 실려 추운것 같은데도 피부에 느껴지는 우주를 운행하시는 창조주의 힘을 두려움으로 느낀다.
같이 산행한 선배분이 오늘도 좋은 산행 후기를 적어 보내 주셨다. 여기에 같이 올려 본다. 감사하면서....

時節因緣이라 했던가요? 오는 때가 있으면 가는 때가 있다고 깊은 계곡

긴 겨울도 떠날 채비를 하는듯 합니다. 은빛 물결 찰랑이는 계곡의 물소리가 제법 크게 들렸지요.

무릎을 넘게 쌓인 눈이 오늘은 발자욱도 제대로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바위옷이 완연한 초록빛이고, 이름 모르는 넝쿨순도 파랗게 돋아나 늘어나는 흰머리칼을 매만지게

하더군요. 내일이면 春三月 시작입니다. 기지개 한 번 크게 켜 봅시다.

Sunday, February 22, 2009

봄이 오는 소리를 눈속에서 들었던 Terra Cotta Trail Walk.











새벽부터 부산을 떨었다. 아직도 밖의 기온은 영하 10도를 가르키고, 또 오후에는 눈도 내릴거라고 일기예보관은 열을 올리는 그런 토요일 아침, 하던데로 짐을 꾸리고, 카메라도 주머니에 잘 넣고, 같이 가고싶어하는 아내가 몸이 불편하여 참석못함에 한쪽으로는 미안함을 가슴에 간직하고, 차를 몰았다. 춘설이라고 어려서 부터 옛어른들께서 하시던 말씀의 뜻을 지금은 알것같은, 추운 속에서도 뭔가 보이는것, 느끼는것은 봄이
우리근처까지 와서 겨울을 몰아내기위한 기 싸움을 하고 있음을 느낄수 있는 자연의 섭리에, 추위를 이겨 내려는 산행을 위해 고속도로를 달려 모이는 장소를 향하는 마음은 산뜻하다. Terra Cotta Forest Conservation Area를 우리멤버들은 오늘 걸으면서, 피부에 와 닿는 그어떤 새로움 감각을 느끼게 될것을 기대하면서, 심신을 더 살찌울 힘찬 발걸음을 한발 한발씩 옮길것이다. 벌써 부지런한 대원들은 와서 자리를 하고 커피를 마시면서 대원들이 다 도착하기를, 창문밖으로 시선을 집중시키면서 응시하고 있었다.
큰길은 깨끗했으나, 산행의 출발점에 가까운 좁은 길은 아직도 눈에 덮혀 있어, 인적의 발길이 뜸함을 알려 주는듯 했다.
토론토에서 북쪽으로 백리 이상을 올라온 오늘의 산행루트는 아직도 백설로 두껍게 덮혀 있어, 발길이 미끄러지기는 지난주와 별반 다를게 없었다. 수증기로 변한 대원들의 콧김의 하얀 흔적은 아직도 파란나뭇잎을 보기에는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멀었음을 설명해 주는것 같이 느껴졌다.
긴겨울의 턴넬을 거의다 통과는 했다고 하지만, 그래서 힘찬 약동의 산천을 볼 그때가 손끝에 잡힐것 같은 바로 옆에 와 있음을 참석한 많은 대원들을 보면서 느낀다. 긴 대원들의 행렬이 장관이다. 눈속에 묻히는 대원들의 발길은 마치 긴 기차를 연상케 하고도 남는다. 그것도 하얀 설원을 달리는 기차를.....추운 겨울날에 기관차에서 뿜어내는 수증기가 어쩌면 대원들의 콧김에서 뿜어내는 힘찬 삶의 고동소리처럼 말이다.
기관차에 길게 매달린 차량들은 검정색이었지만, 오늘 기차처럼 길게 이어지는 대원들의 모습은 원색이다. 빨강, 노랑, 검정 그리고 코발트색...
하얗게 덮힌 산행길에 더 강한 삶의 행렬로 비쳐진다. 오늘의 산행에서 기관차 역활은 어느대원이 할까?라고 상상해 본다. 누군지는 구분되지 않는다. 대원들의 맨마지막에서 걸으면서 신호들 역활은 어느대원이 할까? 기관차가 힘의 원천이 되는 수증기를 만들어 내기위한 중간 지점에서의 급수는 어디지점에 가면 하게 되는것 처럼, 오늘은 어디쯤서 에너지 축적을 위한 급수, 즉 휴식을 하게될까? 괜시리 걱정이(?)머리에서 맴돈다. 계곡의 물흐르는 소리가 정겹다. 겨울내 얼어 붙었던 얼음속으로 흐르던 물소리가 제법 장단을 맞춘다. 언제나 얼음을 깨고 흐르는 물줄기를 볼까?하면서 걸었던 그때가 아직 기억속에 깊이 묻혀 있는데, 어느새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하는 물소리가 얼음을 제치고 도도히 흐름을 시원하게 보여 준다. 그위로 놓인 징검다리를 걸으면서 아직 다 녹지 않아 쌓여있는 눈에 미끄러져 몸의 균형을 잃어 하마트면 Gaiters까지 동원하여 단단히 준비한 두다리가 물속에 첨벙할 어려움도 부딪혔다. 눈쌓인 Trail Walk을 하는데, 2주전에는 동토의 그모습을 그대로 발로 밟으면서 걸었었는데, 오늘은 그때와는 다른 봄이 오는 소리를 한걸음 옮겨밟는 소리에서 느낀다. 들이쉬는 공기의 맛도 더 신선한것 같은 기분이다. 스냅사진을 누른다. 오늘은 산을 집삼아 살아가는 짐승들의 발자국도 간혹 보인다. 월동을 끝내고 서서히 기지개를 펴고 있다는 신호로 보여 진다.
잠깐 휴식을 취하면서 준비해간 따근한 커피를 한모금 마시는 향은, 커피하면 Tim Horton을 연상케하는 곳에서 마시는것과는 비교가 안되게 향이 좋다. 복잡한 세상살이를 잠시 다 잊고, 옹기종기 모여 휴식을 취하는 대원들의 얼굴에서도 봄을 느낄수 있었다. 평안해 보인다.
지금의 이런 모습들이 평상시의 삶에서도 이어졌으면 하는 바램이 마음속에 새겨진다. 더 나이 먹지도 말고, 아프지도 말고.....그냥 이렇게.
평지에서도 18킬로를 걷는것은 대단한 결심을 하고 걷기전에는 쉽지가 않는법인데, 거의 절반에 가까운 20여명의 대원이 오늘 해냈다. 그것도 4시간이 넘은 긴 시간을 걷는 동안 내내 지루하다는 느낌을 전연 느껴 보지 못한채 말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일상의 얘기들을 나누면서 한발씩 옮기고....때로는 파안 대소를 하면서.... 때로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서로 나누면서.... 무거웠어야 할 발길은 그래서 가볍게, 시간을 망각한채 산행을 완수했다. 다음주를 또 기대하면서.....창조주에 대한 의지와 정확히 계절을 움직여 주는 그분의 오묘한 섭리를 감사하며.

Thursday, February 19, 2009

총칼 없는 조용한 혁명의 큰힘 - 김 추기경님의 서거에서 본다.


혁명하면, 머리에 떠 오르는 첫번째 생각은 총칼과 위장복( Camouflaged)을 입고 군화발로 짖밟는 군인들을 연상하게 된다.
그런데 이번 김 추기경님의 선종을 보면서, 혁명의 뜻을 다시 재정립해야만 한다고 나의 짧은 생각을 더듬어야 했다.
지금 고국 한국에는 혁명이 그것도 전 국민들이 함께 동참하는 혁명이 매일 일어나고 있고, 그것을 뉴스를 통해 보고 있는 나를 비롯한 많은
교민들이 숙연한 자세로 마음속에 깊이 새기고 있음을 본다. 그분은 우리 인간들이 극히 평범하면서도, 걸어야할 길을 실천으로 평생을 통해 보여주시는 혁명을 하셨고, 마지막 가시는 길에서는 전국민이 그혁명의 길에 동참하시게 하셨다.

오늘자 조선일보 사설을 여기에 옮겨 적어본다.



[사설] 추기경이 남긴 선물


근래 한 지도자의 죽음이 이토록 큰 울림을 준 적이 있었던가. 김수환 추기경을 추모하는 행렬은 길고 뜨거웠다. 지난 사흘 사이 40만 조문객이 추기경의 유해가 안치된 서울 명동성당을 찾았다. 거기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좌와 우, 지역과 나이, 정치와 이념으로 가르던 내 편 네 편이 없었다. 사람들은 새벽 2~3시부터 모여들어 조문이 시작되는 새벽 6시엔 이미 3㎞ 넘는 줄을 만들고 이 줄은 조문이 끝나는 자정까지 이어졌다. 영하 추위 속에 서너 시간씩 기다려야 하지만 그 흔한 실랑이나 고함, 새치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몸이 불편한 노인에겐 "앞으로 가시라"며 양보했다.

우리는 명절 귀성표나 아파트 청약 따위를 위해 긴 줄을 서 본 일은 있지만 이처럼 자기 이익을 초월해 한마음으로 순수한 줄을 만든 적이 없다. 살아서 사랑과 희생, 나눔을 말과 행동으로 가르쳐 준 추기경은 더 큰 가르침을 남은 이들에게 주고 갔다.

지혜로운 사회는 한 시대를 대표한 위인의 죽음을 통해 앞 시대를 정리하고 다음 시대를 준비한다. 추기경이 사제로 서품된 1951년부터 선종한 2009년까지 58년 세월은 전쟁과 폐허・분단・독재・산업화・민주화・분열까지 시련과 성취와 고뇌가 응축된 대한민국 역사 그 자체였다. 추기경은 이 어려운 시대를 사는 모든 이들을 어미닭처럼 품어 안고서 "참아라. 고통에는 끝이 있다"고 일관되게 얘기하며 살아갈 희망과 용기를 줬다.

전국 각지에서 추기경을 조문하러 내달아오는 발걸음들은 대한민국을 지탱해온 한 정신의 소멸을 아쉬워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유산에서 다음 시대를 열어갈 새 소명을 발견하고 구체화하는 노력으로 승화돼야 한다. 우리 사회는 개인과 공동체의 선진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착, 인류 공동발전 기여처럼 감당하고 해결해야 할 숱한 숙제를 남겨놓고 있다.

김 추기경은 자신의 묘를 일반 성직자와 똑같은 크기로 하고 평범한 삼나무 관을 써서 검소하게 하라고 당부했다. 추기경이 안구(眼球)를 기증해 앞 못 보는 두 사람이 새로운 빛을 찾는 것을 보고 자기 신체 일부를 내놓기로 약속하는 시민들이 줄을 잇는 등 희미하던 장기기증의 불씨가 살아나고 있다. 수(數)와 힘의 논리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조용한 혁명이 이미 우리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추기경은 자신의 부재(不在)를 통해 더 큰 존재를 드러냈다. 김 추기경의 선종을 계기로 우리 사회가 진정 달라질 수 있다면 이는 추기경이 남긴 최고의 선물이 될 것이다.
입력 : 2009.02.19 22:06

Monday, February 16, 2009

정신적 지도자, 김수환 추기경의 서거를 슬퍼한다.



추기경으로서 그분을 멀리서부터 알기 시작한것은 70년대 초반 부터 였다. 우선 대한민국국민의 한 사람인 그분이 최초로 교황청 살림과 모든 행정의 결정을 하게되는 추기경에 서품됐다는것, 그자체로 그당시에는 조용한 혁명이나 다름없는 대한민국의 경사였었다. 할아버지 같은 온화한 평상시의 모습이셨지만, 정권이 독재로 흘러 갈때는 과감하게 주위의 위협을 무릅쓰고 결연하게 국민의 살권리를 외쳐 댔으며, 정권이 부정부패로 얼룩질때는 국민을 위한다는 가면을 벗어 던지고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서 국민을 위한 공복이 되라고 설파 하셨었고..... 그리고 항상 겸손한 자세로 국민들의 정신적 지주, 아니 추기경이기 이전에 지도자 역활을 그렇게 앞장서서 하셨던 분이셨다. 세월의 흘러감에 육신의 한정된 삶은 어쩔수 없이 우리 곁을 떠나야 하지만,영적인 지도력은 우리기억속에 오래 오래 간직되고, 개인이나 국가적으로 시련이 닦칠때는 또 찾게되는 추기경으로 오래 남게 될것이다.
안녕히 가십시요. 그리고 이제는 모든 인간적 고뇌도 놓으시고, 추기경님의 모든 정신적 은혜를 우리 모두가 기억하고, 때가되면 뒤따라 갈것임을 약속합니다. 여기에 추기경님의 떠나심을 애도하는 고국의 조선일보 사설을 옮겨 적어 놓는다.



[사설] 김수환 추기경이 떠난 자리


한국 천주교의 큰 어른으로 한국 현대사의 고비마다 인권과 민주화의 횃불을 들어 이 나라를 밝혔던 김수환 추기경이 16일 저녁 87세를 일기로 선종(善終)했다. 김 추기경은 평생을 가난한 사람, 장애를 겪는 사람,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 곁에서 그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아픔을 함께 아파하고 기쁨을 함께 기뻐했다. 김 추기경은 주위에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자신의 안구(眼球)를 앞 못 보는 사람들에게 남겼다.

김 추기경은 1969년 47세로 세계에서 가장 젊은 추기경으로 우리 곁에 와 이날 세계 최고령 추기경으로 우리 곁을 떠났다.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를 사목(司牧) 지침으로 삼아 교회의 담을 헐어 사회 속에 교회를 심고 교회 안에 사회를 이끌어 오는 데 온 정성을 다했다. 김 추기경이 한국 천주교를 이끌던 기간 동안 천주교는 80만 신도에서 520만 신도로 크게 자랐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한해 천주교 성인 103위 시성(諡聖)이 이뤄지고, 세계 성체대회 개최, 해외 선교지원, 북한 동포 돕기 운동 등 한국 천주교의 새 시대가 열린 것도 그와 함께였다.

김 추기경이 떠난 자리를 보며 이토록 허전함과 아쉬움이 큰 것은 그가 한 종교의 지도자를 넘어 험한 시대에 이 나라 모든 이들의 고난을 자신의 고난으로 껴안았던 우리의 든든한 이웃이었기 때문이다. 유신과 군사 쿠데타 등 이 나라 정치의 고비고비에서 추기경은 권력에 의해 입이 봉(封)해진 사람들을 대신해 자신의 목소리에 민주화를 향한 국민의 집념과 열망을 실어 날랐다.

1971년 박정희 대통령이 비상사태를 선언하자 김 추기경은 TV로 생중계된 성탄미사에서 “국민과의 일치를 깨고 이 땅의 평화에 해를 끼칠 것”이라며 성서 속 구약(舊約)의 예언자 모습으로 국민 곁을 지켜주었다. 80년 광주민주화항쟁 때는 “물리적 힘으로만 유지되는 침묵과 죽음의 질서를 바탕으로 해서는 폭력의 악순환이 거듭될 뿐”이라고 계엄령 해제, 유혈사태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시국담화를 냈다. 87년 6월항쟁 때는 시민이 시위를 벌이던 명동성당에 경찰 투입이 임박하자 “나부터 잡아가라”고 팔을 내저어 가로막고 나섰다.

독재의 총검에 맞섰던 추기경의 힘은 강철같은 이념이 아니었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야 한다”는 상식이었다. ‘혜화동 할아버지’로 불리며 가요 ‘애모’를 열창할 줄도 알았던 추기경은 자신의 생활이 신앙에 일치하는가 끊임없이 고뇌한 하느님 앞의 약한 인간이기도 했다. 그는 경기도 시흥의 철거민 이주촌을 방문했을 때 주무시고 가라고 철거민촌 관계자들이 거처를 만들어줬지만 “공동화장실이 너무 불편해서 잠을 자고 올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이렇듯 꾸밈없고, 솔직했다. 그래서 그가 유신과 군사정부 시대 손가락으론 민주화를 향한 길을 가리키고, 입으론 인간이 존중받는 정치의 꿈을 이야기해도 누구도 그걸 종교의 정치 참여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저 시대의 당연한 목소리로 받아들였을 뿐이다. 김 추기경은 정의를 말하면서도 나만이 정의의 사도인 양 비치는 오만을 꺼렸고, 불의를 나무라면서도 혼자만이 양심의 재판관인 양 비치는 독단을 경계할 만큼 평생을 낮게 살았다.

김 추기경에 대한 그리움은 세월이 흘러도 늘 새로 돋아날 테지만 이 나라 이 시대가 다시는 그의 역할을 필요로 하지 않는 정의로운 나라, 공정한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야말로 추기경을 기리는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Thursday, February 12, 2009

Trail Walk을 연상케한 선교세미나 참석













Trail Walk은 무턱대고 할수있는, 잘 관리되고 완만한 Side Walk을 걷는것과는 다른, 산행에 맞는 신발부터 복장, 그리고 거기에 필요한 장비들을 준비하고, 그위에 신체적인 구비조건을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산행 그자체의 스릴과 의미, 그리고 성취감을 서로 나눌수 있는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런 준비나 신체적 단련없이 밀어부칠경우에는, 한두번은, 운좋게, 그맛과 성취감을 느낄수도 있겠으나, 상황이 예상했던것과는 다른 경우일때는 준비된 산행자와 그렇치 못한자 사이에는 상당한, 서로 다른 결과를 낳고, 심할 경우 희비를 회한과 후회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준비하고 계속적인 Trail Walk을 조금씩 조금씩 실행하고 쌓아 간다면, 훌륭한 Trail Walker가 돼고, 전문가로서 자질도 갖추게 된다.

우리 인간들이 세상을 살아 가면서, 성취와 실패의 연속이라는 턴넬을 통과하는 긴 여정을 달리다가 때가 되면 모든걸 놓고, 무대에서 사라지게 되는데, 후세의 평가는 어떤이는 영웅으로, 어떤이는 우리 사회의 소속원으로 태어나서는 안됐어야 하는자로 역사속에 새겨진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시고 삶을 살아가는 많은 믿음의 형제들이 동참하는 선교사업은 쉬운것 같으면서도 제일 실행하기 어려운, 믿는자로서의 도전이요, 훈련이요, 또 보람을 느끼는, 천태만상의 형태로 보여지고, 또 직면하는 믿는자로서의 사명임을 3일간 진행된 이번 선교 첫걸음 세미나를 통해서 실감했다. 산행할때의 기본 지식을 필요로 하듯, 선교는 정말로 사전에 필요한 훈련을 필수적으로 이수해야됨을 세미나를 통해서 보았다. 나같은 우둔한 두뇌로는 배운것 모두를 기억 못한것이 아쉽지만, 그래도 좋은 강사님들과 선교에 관심있는 많은 믿음의 형제 자매들과 어울려 머리를 맛대고 선교가 무엇이며, 왜 선교를 해야 하며, 왜 선교를 하는데도 계획을 세우고, 공부해서 계단식 절차를 밟아야 하는가 등등의 그림을 어렴푸시나마 그릴수 있는 모티브를 얻었음은 확실하다.

선교 하시는 하나님의 선교방법은 참으로 신기하기만 하다. 배면 세계에 얽혀진 하나님의 선교사역을 이해하지 못했을때는, 이렇게 하지 않아도 될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곤 했었다. 하나님께서 보셨을때는 많은 훈련과 단련을 필요로 하는 덜된 자식중의 하나로 여기면서, 열손가락중 어느손가락을 깨물어도 아프긴 마찬가지인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참고, 지켜 보시는, 그래서 제위취에 설수 있도록 인도 하심을 선교라는 큰 그림속에서 일깨워 주셨음을 알았다.

4000년이라는, 우리가 볼때는, 긴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은 때로는 한 개인을 때로는 한 집단을 때로는 종족들을 이용해서, 세상 땅끝까지 하나님 나라를 세우도록 400년 주기로 다른 방법으로 인도하셨고, 최근에는 '선교'라는 독특한 이름을 부쳐, 얼마 남지 않은 지구의 종말을 준비 하고 계심을 읽었다. 아브라함 시대부터 오늘 지구의 종말을 앞두고 살아가고 있는 하나님 자손들을 통해서, 그시대의 상황에 맞추어서 선교하신 내용은, 선교를 꿈구며 준비하는 하나님의 자손들에게는 꼭 기억해야할 기본틀인것을 터득했다.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끌어내어, 그를 통해 선교를 시작하심을 본다. 선교(구속사)의 10시대중, 첫번째로 그를 사용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명을 따라 새로 옮겨온 터전에서 자손을 낳고 번성케 하시는데 약 400년을 보낸다. 이시대를 족장 시대라고 후세를 사는 우리는 명칭한다. 다시 아프리카 아시아 지역을 선교 하시기 위해 아브람의 자손인 야곱의 10 형제를 아프리카로 보내신다. 그곳에서 바로의 종으로 살면서 자손을 번성케 하시고, 많은 재물을 모으게 하시고, 모세라는 선교지도자를 앞세워,하나님의 힘과 뜻이 무엇인지를 '바로왕'에게 보여 주시고, 전세계를 향해서 선교활동을 해야할 전초 기지인 가나안 땅으로 이동 시키시는데 약 400년을 기다리신다. 우리는 '애굽포로시대'라고 편의상 정의한다. 우리가 볼때는 무질서하고 혼란의 시대를 흘려 보내게 하신것 같지만,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전세계를 복음화 시키기위한 선교기술을 다른 각도에서 보여 주시면서 물결을 헤쳐 나가게 하심을 본다. 우리는 이시대를 '사사시대' 그리고 그후의 400년을 '열왕시대'라고 편의상 정의하고 교훈으로 삼고 있다.

무지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세월을 보낼때, 하나님은 그들 자손들을 외부의 침략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뿔뿔히 흩어지게 만드시는데, 흩어진 자손들이 노예로 또는 정처없는 방랑객으로 떠돌면서, 하나님 나라의 선교를 삶속에서 하게 된다. 지금까지는 자기들 종족들 사이에만 선교를 했다고 한다면, 이시대에는 다른 종족들에게도 노예 또는 포로라는 어려운 삶을 살도록 하시면서, 그들의 주인격인 다른 종족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선교 하게 만드셨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는데 약 2000년을 사용하셨고, 이기간 동안에 선교의 내용을 보면, '자발적으로 선교' 그와 반대되는 '비자발적 선교'방법을 동원 하셨음을 보게 된다. 하나님의 자손들이 꼭 원해서만 하는 선교가 때에 따라서는 실행되지 못할때, 하나님은 정반대되는 방법을 쓰신 것이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 가나안으로 간것은 자발적 선교에 해당되며, 요셉이 애굽에 종으로 팔려간것과 요나가 싫어하는 선교를 하시게 한것등은 '비자발적 선교'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예수님 탄생이후 오늘에 이르는 2000년은 또다른 선교의 행하심을 보여주신다. 예수님이 이땅에 오시기전, 하나님은 로마제국의 융성함을 허락하시고, 대 제국으로 키우셨다. 이때에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것이다. 우리의 머리로 사고해 볼때는 핍박과 고통, 가난과 폭정을 로마제국은 하나님 자손들에게 통치 수단으로 사용케 하신 것이다. 바울같은 로마시대의 엘리트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선교케 하셔서, 로마황제들이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게 까지 하신다. 로마 황제들이 이시기에 헬라의 예술가및 교사들을 로마제국의 노예로 삼아 번성케 하여, 영국에서 부터 팔레스타인에 이르기까지 헬라어가 통용되게 까지 만드신다.

예수님 탄생후 첫번째 400년의 선교를 로마제국을 통해서 하신것으로 우리는 '로마인'시대로 편의상 부른다. 하나님은 다시 이웃해 있는 야만인 족속인 고트족, 비시고트족, 반달족,앵글로 색스족들을 이용하여 이미 병들어 가는 로마제국을 침략하게 하신다. 로마제국의 약 절반을 점령한 이들 야만인족들은 로마의 발달된 문화와 종교, 즉 기독교에 정신적으로 점령당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더 넓은 종족들에게 전해 진다. 이과정에서 게르만 야만족의 후예인 살마뉴(Chalemagne)같은 지도자가 나타나 경제적,교육적 발전을 이르켜, 일시적으로 지도자 없이 혼란에 빠져 있던 유럽을 평정 하는데, 그는 선교센터 즉 수도원을 강화하여 복음화에 박차를 가한다. 그러나 북쪽에 있는 바이킹족속들에 대한 선교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 또 다른 하나님의 선교하심을 바이킹 족속들을 통해 이루신다. 이시대를 우리는 '야만인'이라고 한다. 바닷사람들인 북쪽의 바이킹족속들이 유럽 전역을 위협하기 시작하면서 정복하게 된다. 살마뉴의 시대가 물러나고 바이킹족속이 점령한 유럽에서 기독교를 바탕으로 한 찬란한 문화유산에 그들 스스로가 기독교화 되고 만다. '자발적으로 옴'의 선교를 하니님께서는 하신 것이다.

기독교는 이렇게 해서 스칸디나비아반도와 전유럽에 확산된다. 이와중에 종족과 종족들 사이에서 살육 행위는 끝이지 않아서, 영국같은 나라에서는 '주여 북방민족의 진노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소서'라는 기도가 끊이지 않았었다. 기독화된 바이킹들은 화려한 수도원을 아일랜드식에서 베네딕트식으로 변경하는 과정에서 많은 개선을 이루었지만, 비기독교적 풍요함과 화려함을 이루기도 했다. 하나님의 뜻을 어긴 빗나간 선교의 꽃을 피운시대라고 볼수 있다. 또 다른 400년을 '바이킹시대'라고 편의상 부르고 있다. 이렇게 빗나간 선교의 꽃을 피운 그들은 무슬림들이 있는 지역으로 선교와 정복전쟁을 펼친다. 그러나 한번도 선교적으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후세에 우리는 이를 십자군 전쟁이라 불렀다. 이운동은 오히려 복음의 길은 막은 셈이 된고 만다. 이러한 운동에 반항하는 세력들에 의해 르네상스와 같은 문화적 혁명과 종교개혁의 길을 트게 하는 단추가 된다. 이종교개혁으로 신교와 구교가 확연히 구분짖게 되는 분기점을 이룬다. 또한 수도원을 통한 선교도 확장되면서, 영토확장 전쟁 즉 식민지확장이 전개된다.

새로 확립된 개신교들은 신학적으로 재정비하는일에 분주하여 타민족에 대한 선교는 거의 없는 시대를 만들었다. 혼란과 대참사가 일어나곤 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선교적 신앙을 믿는 자손들을 그냥 놔 두시지 않고, 이제는 페스트라는 무서운 전염병으로 전유럽인구의 1/3를 말살 하셨다. 이전염병에 대한 학설은 여러가지로 후세 학자들에 의해 설명되여 지기도 하지만, 적어도 나는 하나님의 격노하심으로 보고 싶다.
이기간중에 바울사도가 주장한것처럼, 헬라인지역에서 선교당시 유대인이 되여야 한다고 주장 하지 않은점은 현대 선교의 시작이라고 볼수 있는 큰 한획을 그었다고 이해 했다.

또다른 400년간 이어진 이시대를 '사라센전쟁시대'라고 한다. 이후로도 카톨릭의 세력 확장은 계속되였으나, 나폴레옹 출현이후 유럽을 약탈하고, 무신론, 이신론, 인본주의등의 인기가 점점 쇠퇴하기 시작한다. 이와 때를 같이 해서 개신교의 선교활동이 '자발적으로 감'의 흐름이 마침내 시작되기 시작한다. 개신교 선교사들은 지구반대편까지 확산된다. 선교활동은 식민지 확장과 함께 전개 되기도 했지만, 이와는 상관없이 연안 지대로 확산 되기도 한다. 다시 내륙지역에 선교가 확산되여 땅의 모든 족속들에게 까지 초점이 맞추어지게 된다. 이기간중 서구문명의 꽃이 활짝피여 풍요함과 타락이 함께 융성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기간동안에 미전도 지역의 종족들에게 선교하는 실질적인 방법이 연구되고, 이용되고, 즉 선교대상지역의 문화와 언어, 습관 등등이 그대로 유지 되면서, 선교를 하기위해서는 선교를 떠나는 선교사들의 자세와 겸손 그리고 현지화 훈련에 눈을 뜨게 방법을 개선하고 적응하여, 임지에 임하도록하는 관점에 초첨을 맞추기 시작하는 눈을 뜬다. 즉 성경적, 역사적, 문화적, 전략점 관점에 중심을 두고, 이의 실천을 위한 믿음의 선배들의 노력이 현저히 눈에 띄어남을 마음 뜨겁게 느낀다.

이시대에 마지막 끝자락에서 우리는 삶을 영위하면서, 하나님의 선교 사업에 동참 하기도 하고 안하기도 하지만, 이또한 하나님의 역사 하심에 의존할수 밖에 없음을 이번 선교이야기 세미나를 통해서 깊이 느꼈다. 선교는 단기간의 작전 계획이 아님을 이번 선교세미나를 통해서 배웠다. 어쩌면 대를 이어 해야하는 대위임령임을 참석자 모두가 느꼈으리라 믿는다. 이 400년의 기간을 '지구의 종말'이라고 편의상 부른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4000년이라는, 우리의 계산으로 긴 시간을, 여러각도에서 선교의 관점들을 보여 주시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를 향해 또 외치신다. 형식보다는,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보다는, 현지화된 실질적인 선교의 사명이나 삶을 살아 가라고 말이다. 같이 세미나 동안 몸을 부딪치고 시선을 마주치고 토론하고 주제를 놓고 사색하며 하나님의 선교방식을 접하는 동안에 전에는 못느꼈던 동료의식과 Fellowship을 쌓았던 점은 선교세미나를 떠나 인간적으로 더 한마음이 되게하신 하나님의 또 다른 선교방식을 몸으로 체험하고 간직하게 됐다는 확신이다. 선교세미나에 참석한 믿음의 형제 자매들에게 좋은 열매가 맺어 졌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내일이면 또 산행을 떠난다. 선교세미나에서 느끼고 배운 순서와 같은 방법을 동원해서, 실패없는 산행을 완수하기위해 준비 할것이다. 그래서 항상 나는 나의 능력 범위안에서, 산행과 선교를 따로 떼어 생각해 본일이 거의 없었던것 같다. 감사.

Saturday, February 07, 2009


Trail Walk을 연상케한 선교세미나 참석

Trail Walk은 무턱대고 할수있는, 잘 관리되고 완만한 Side Walk을 걷는것과는 다른, 산행에 맞는 신발부터 복장, 그리고 거기에 필요한 장비들을 준비하고, 그위에 신체적인 구비조건을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산행 그자체의 스릴과 의미, 그리고 성취감을 서로 나눌수 있는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런 준비나 신체적 단련없이 밀어부칠경우에는, 한두번은, 운좋게, 그맛과 성취감을 느낄수도 있겠으나, 상황이 예상했던것과는 다른 경우일때는 준비된 산행자와 그렇치 못한자 사이에는 상당한, 서로 다른 결과를 낳고, 심할 경우느 희비를 회한과 후회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준비하고 계속적인 Trail Walk을 조금씩 조금씩 실행하고 쌓아 간다면, 훌륭한 Trail Walker가 돼고, 전문가로서 자질도 갖추게 된다.
우리 인간들이 세상을 살아 가면서, 성취와 실패의 연속이라는 턴넬을 통과하는 긴 여정을 달리다가 때가 되면 모든걸 놓고, 무대에서 사라지게 되는데, 후세의 평가는 어떤이는 영웅으로, 어떤이는 우리 사회의 소속원으로 태어나서는 안됐어야 하는자로 역사속에 새겨진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시고 삶을 살아가는 많은 믿음의 형제들이 동참하는 선교사업은 쉬운것 같으면서도 제일 실행하기 어려운, 믿는자로서의 도전이요, 훈련이요, 또 보람을 느끼는, 천태만상의 형태로 보여지고, 또 직면하는 믿는자로서의 사명임을 3일간 진행된 이번 선교 첫걸음 세미나를 통해서 실감했다. 산행할때의 기본 지식을 필요오 하듯, 선교는 정말로 사전에 필요한 훈련을 필수적으로 이수해야됨을 세미나를 통해서 보았다. 나같은 우둔한 두뇌로는 배운것 모두를 기억 못한것이 아쉽지만, 그래도 좋은 강사님들과 선교에 관심있는 많은 믿음의 형제 자매들과 어울려 머리를 맛대고 선교가 무엇이며, 왜 선교를 해야 하며, 왜 선교를 하는데도

Hockley Valley Nature Trail Walk






떠나기전 마음부터가 무척 가볍다. 오늘은 어제와는 또 다르게 영상 6도까지 올라가는 포근한 날씨가 될거라는 일기예보 때문이다.
항상 같이 가곤 했던 마나님께서는 한인회에 할일이 생겨서 같이 참석 못하고, 아내가 새벽부터 부산을 떨며 준비해준 점심과 음료수 그리고 복장을 하고 모이는 장소까지 단숨에 달렸다.
반가운 얼굴들이 하나둘 나타나기시작하여 Tim Horton 커피 샾에서 한잔씩 모닝 커피를 하면서 지난 일주일간의 얘기들로 서로 바쁘다.
Car Pool이 끝나고, 목적지인 Hockley Valley Trail Walk에 도착, 대원수는 예상보다 많이 참석했다고 Leader분이 설명하면서, 산행은 시작됐다. 지난 가을에도 교회팀과 함께 걸어본 기억이 머리에 떠 오른다. 시작부터 언덕배기의 가파른 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데, Trail에는 아직도 잔뜩 눈이 쌓여 있어 그위를 걷는 발걸음들이 아직은 시작이라 가벼워 보이지만, 미끄러지는 어려움을 대원들의 발걸음에서 계속 본다.
눈으로 뒤덮혀 있는 계곡속을 오르고, 내리고, 숨소리 가쁘게 걸어 계곡을 올라 정상에 도달 했더니, 리더가 잠깐 쉬겠다는 신호를 보낸다.
어쨋던 반가운 소식인것은 나만이 기다린 순간이 아니었음을 대원들의 표정에서 훤히 볼수 있다.
정성스럽게 준비해온 과일들과 채소류를 고맙게도 어느대원이 담아온 container를 들고 다니면서 권한다. 한식구가 된 순간의 마음이 이런것이 아니겠는가? 고마웠다. 산행을 할때는 단 몇그람의 무게도 큰 짐이 되여 망설이는 때가 종종 있는데, 오늘처럼 눈으로 뒤덮힌, 그것도 계곡을 헤메면서 이곳까지 등에 메고 와서 나누는 마음..... 고맙게만 받아서 몇점 입에 넣고 음미할 뿐, 또 다른 어떤 말로 고마움을 표현 할수 있을까?
Walter Liu씨는 대만 태생의 캐나디언인데, 이 산행팀에 지난해 부터 합류해서 산행의 맛을 즐기면서, 건강을 지키는 비결중의 하나라고 마냥 예찬하는 70세의 청년(?)이다. 나는 그를 지난주에 이팀에 조인해서 만났는데 같이 걷는 동료가 된것이다. 오늘은 그가 노란색의 방수용 자켓을 입었다. 지난주에는 못보던 새자켓인것 같았다. 아직 미쳐 Label을 떼지 않은것으로 보아서 그렇게 판단한것이다.
아마도 지난주에 눈쌓인 등산로를 걸으면서 stray해서 고생한것을 깊이 마음속에 새기면서, 눈에 잘띄는 자켓을 구입하지 않았겠나 나혼자 생각해 보면서 대열속에 끼어 열심히 걷는다. 대원들의 대부분이 은퇴한 분들이 주류를 이루어 역시 무리를 하는것은 지향 하는것 같다.
상당수의 대원들은 회군한다고 통보하기에 시간을 보았더니 벌써 한시간 반 이상을 걸은 것이다. 이제 그대원들은 하산 하는것이다.
조금 더 걸었는데, 또 한패의 대원들이 회군한다. 나머지 약 10 여명이 계속 전진 하여 점심을 먹기위해 자리를 잡았을때의 걸은 시간은 정확히 두시간이었다. 지난주에 고생한것을 생각하면 벌써 회군 했어야 하나, 오늘은 날씨도 포근하고, 또 Trail이 앞서 이 길은 걸어지난간 셀수 없는 다른 산행객들의 덕택에 눈속의 길이 많이 좋아 졌기에, 또 명색이 수십년을 산행한 자로서의 오기도 있어, 그냥 묵묵히 따라서 이곳까지 걸어와서, 점심을 펴고 먹기 시작한 것이다. 점심의 맛이 지난주보다 훨씬 더 깊다. 양도 지난주보다 더 많이 먹었다. 양다리의 피곤함은 지난주보다 훨씬 가벼움을 느낀다. 항상 하던데로 앉지를 않고, 서서 해 치운다. 보온병에 준비해온 커피를 한모금 마시는 그맛의 표현을 어떻게 표현해야 제대로 표현이 될까? 나는 글재주가 없어, 그냥 몸의 피로를 확가시게 하는 마력을 갖은 커피라고 표현하고 싶을 뿐이다.
포근한 날씨에 눈이 녹아, 그위를 걷는 등산화에 물기가 조금씩 스며드는 감각을 느낀다. 발에서 열이 나고, 밖에서는 계속해서 등산화위로 눈이 부딪치기에 눈이 녹아 그물이 가죽속을 스며들어 양말을 젖고 있음을 느낀다. 지난주도 같은 눈속길을 걸었지만, 그때는 기온이 영하 15도쯤 돼서 그런 감각을 느끼지 못했었다. 덕택에 신발속은 건조한 상태였었는데...... 오늘은 아니다. 모든게 다 좋을수는 없음을 여기서도 느낀다. 하나가 좋으면 상대적으로 다른면에서는 그럴수 없다는것을....인생살이의 축소판을 여기서 느낀다. 오묘한 삶의 조화.
모두가 무사히 마치고 보금자리인 집으로 향하기 위해 타고온 차에 올랐을때는 정확히 4시간을 걸은후였다. 다음 산행을 기약하면서...
같이 산행한 선배님이 산행에서 느낀 감상을 보내 오셨기에 여기에 옮겨 실어 본다. 감사.

*오늘은 태고(太古)의 음향(音響)을 찾아 추억의 고향을 걸은 듯 합니다.

나목(裸木)의 여윈 가지끝 하늘만 보이는 겨울산, 바람소리 찾아 하늘을 보니

여윈 가지만 요란하게 흔들리 더이다. 교교함이 깔린 눈덮힌 계곡은 순백(純白)의

깨끗한 부드러움이 눈녹은 산골물처럼 흐르고 있더이다.

나는 잠시 자연의 아들이 되어 멈추어 서서 추억의 고향을 찾아가고 있었답니다.*

Tuesday, February 03, 2009

Trail Walk을 연상케한 선교세미나 참석

Trail Walk은 무턱대고 할수있는, 잘 관리되고 완만한 Side Walk을 걷는것과는 다른, 산행에 맞는 신발부터 복장, 그리고 거기에 필요한 장비들을 준비하고, 그위에 신체적인 구비조건을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산행 그자체의 스릴과 의미, 그리고 성취감을 서로 나눌수 있는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런 준비나 신체적 단련없이 밀어부칠경우에는, 한두번은, 운좋게, 그맛과 성취감을 느낄수도 있겠으나, 상황이 예상했던것과는 다른 경우일때는 준비된 산행자와 그렇치 못한자 사이에는 상당한, 서로 다른 결과를 낳고, 심할 경우느 희비를 회한과 후회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준비하고 계속적인 Trail Walk을 조금씩 조금씩 실행하고 쌓아 간다면, 훌륭한 Trail Walker가 돼고, 전문가로서 자질도 갖추게 된다.
우리 인간들이 세상을 살아 가면서, 성취와 실패의 연속이라는 턴넬을 통과하는 긴 여정을 달리다가 때가 되면 모든걸 놓고, 무대에서 사라지게 되는데, 후세의 평가는 어떤이는 영웅으로, 어떤이는 우리 사회의 소속원으로 태어나서는 안됐어야 하는자로 역사속에 새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