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창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적으로 "Me Too"운동이 벌어지고 있는데, 최근에는 충남지사 "안희정"이 그물에 걸렸다고 난리 법석이었었다. 오늘 아침 친지가 보내온 카톡을 보면서, "그러면 그렇치, 그악랄한자가 Mee Too운동에서 조용하다 했더니.... 그것은 나의 그자에 대한 정보부족에서 온 무식함인것을 알게해준 내용이었었다."
박지원, 지금은 지하에서 편히(?), 아니면 원통해서 통곡하고 있을, Me Too 운동의 원흉,김대중( Out of Wedlock 에서 탄생한 따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만나주지도 않았었다 )의 혓바닥 노릇을 한 "박지원"이 가장 악랄하게, 미국과 한국을 오가면서, 한여인의 생을 망쳤다는 소식에 하마트면 들고있던 커피잔을 떨어뜨릴뻔 했었다. 그런자를 이민자생활에서 어렵게 모든 돈을 갖다 바쳤던 많은 교민들의 허탈함과 배신감은 어떻게 보상 받아야 하나.
문제는 한국의 주요 미디아에 전연 그런 엄청난, 박지원의 악마적인 행동에 대한 기사가 보도되지 못하고, 지방신문에 보도되는 것으로 그치고 있다는 점이다.
아래에 기사 내용을 옮겨 싣는다.
https://band.us/band/65795110/post/34019
박지원, 지금은 지하에서 편히(?), 아니면 원통해서 통곡하고 있을, Me Too 운동의 원흉,김대중( Out of Wedlock 에서 탄생한 따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만나주지도 않았었다 )의 혓바닥 노릇을 한 "박지원"이 가장 악랄하게, 미국과 한국을 오가면서, 한여인의 생을 망쳤다는 소식에 하마트면 들고있던 커피잔을 떨어뜨릴뻔 했었다. 그런자를 이민자생활에서 어렵게 모든 돈을 갖다 바쳤던 많은 교민들의 허탈함과 배신감은 어떻게 보상 받아야 하나.
문제는 한국의 주요 미디아에 전연 그런 엄청난, 박지원의 악마적인 행동에 대한 기사가 보도되지 못하고, 지방신문에 보도되는 것으로 그치고 있다는 점이다.
아래에 기사 내용을 옮겨 싣는다.
“저는 힘이 연약한 홀로 사는 한 여성입니다.
단지 평범한 여자가 되지 못하고 세상에 제 이름이 알려질까 두려워서 이글을 진작 올리지 못했습니다. 저는 과거에 유명 연예인 이였습니다. 제가 미국에 1977년 이민을 가서 그곳에서 N.Y. 한인회 회장이였던 박지원씨를 만나게 되었습니다(1978년경).
그분과 동거를 하면서 저희는 양가 가족들의 후원 받으면서 지낼 수 있을 정도로 그분은 저를 사랑했습니다. 한데 몇 년이 흐른 후 그의 가정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고 부인의 정체가 드러나면서 저는 헤어질 것을 결심한 후 다른 사람과 선을 보도록 권유를 받고 선을 봤습니다.
◇박지원 청부 살인업자 보내 최여인 죽이도록 교사하기도
그 사실을 알게 된 박지원씨는 사람을 시켜 청부 살인을 하려고 계획하고 어느 날 9시경 내가 경영하는 스타꽃집에 괴한 최모씨가 들어 왔습니다. 살인 청부업자인 최모씨는 가게 문을 걸게 만든 후 총을 들이 대며 죽인다고 말하고 지하실로 끌고 내려가서 밖으로 데리고 나가려고 했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차라리 나를 먼저 죽이고 딸을 데려 가라”고 최씨에게 애원하며 호소하며 매달렸습니다. 그러니까 엄마의 호소에 최씨는 우리 모녀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고 엄마의 모습에 감동되어 저의 목숨을 구해 주었습니다.
그후 그 청부업자는 또 다시 박지원 부인의 부탁을 받고 저를 또 다시 처치해야 되는 처지가 되어 (2천불) 저의 가게로 왔으나 그때도 제 약한 처지를 깊히 알고 동정을 하게 되어서 오히려 우리 모녀를 보호하는 입장으로 바뀌었지만 저는 늘 불안 속에서 공포에 질려서 박지원씨의 노예 마냥 끌려가며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최정민 서울로 도망, 탈출했는데 박지원 다시 찾아와서 성폭행, 동거
그러다가 85년 말 한국에서 영화 출연교섭이 와서 저는 그와 헤어질 수 있는 기회라고 한국에 나와 삼촌 집에 거처하고 그 길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박지원은 자신이 꿈꾸던 정치의 길이 보이자 나를 과감히 버리고 그 길을 택하려고 저가 급히 하던 모든 작품을 중단시키고 미국으로 들어가서 뉴욕서 멀리 떨어진 서부 쪽으로 이사를 보냈습니다.
저를 설득해서 아무런 위자료 없이 헤어지지 않은 것처럼 위장해 저를 동부 쪽에서 서부로 쫓아냈습니다. 못난 저는 매일 매일 찾아 줄 것을 기다리며 차 사고를 내는 엄청난 시련을 겪으며 그를 기다렸지만 매정하게 버림을 받고 저는 세월이 흘러 88년경에 N.Y.에 다시 가서 까페를 경영 했는데 그가 다시 찾아왔습니다.
◇1996년 4월 10일 부천신문에 보도된 최여인에 대한 증언기사를 보자.
“증언에 따르면 박 대변인은 77년부터 미국에서 동거하던 C씨와 85년 말경에 헤어졌다가 88년 국회의원 도전에 실패로 돌아간 후 다시 가끔 만났지만 89년 박 대변인이 한국으로 완전 귀국함에 따라 완전히 헤어 졌다는 것이다.
http://m.dcinside.com/view.php?id=drama_new1&no=1727429
단지 평범한 여자가 되지 못하고 세상에 제 이름이 알려질까 두려워서 이글을 진작 올리지 못했습니다. 저는 과거에 유명 연예인 이였습니다. 제가 미국에 1977년 이민을 가서 그곳에서 N.Y. 한인회 회장이였던 박지원씨를 만나게 되었습니다(1978년경).
그분과 동거를 하면서 저희는 양가 가족들의 후원 받으면서 지낼 수 있을 정도로 그분은 저를 사랑했습니다. 한데 몇 년이 흐른 후 그의 가정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고 부인의 정체가 드러나면서 저는 헤어질 것을 결심한 후 다른 사람과 선을 보도록 권유를 받고 선을 봤습니다.
◇박지원 청부 살인업자 보내 최여인 죽이도록 교사하기도
그 사실을 알게 된 박지원씨는 사람을 시켜 청부 살인을 하려고 계획하고 어느 날 9시경 내가 경영하는 스타꽃집에 괴한 최모씨가 들어 왔습니다. 살인 청부업자인 최모씨는 가게 문을 걸게 만든 후 총을 들이 대며 죽인다고 말하고 지하실로 끌고 내려가서 밖으로 데리고 나가려고 했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차라리 나를 먼저 죽이고 딸을 데려 가라”고 최씨에게 애원하며 호소하며 매달렸습니다. 그러니까 엄마의 호소에 최씨는 우리 모녀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고 엄마의 모습에 감동되어 저의 목숨을 구해 주었습니다.
그후 그 청부업자는 또 다시 박지원 부인의 부탁을 받고 저를 또 다시 처치해야 되는 처지가 되어 (2천불) 저의 가게로 왔으나 그때도 제 약한 처지를 깊히 알고 동정을 하게 되어서 오히려 우리 모녀를 보호하는 입장으로 바뀌었지만 저는 늘 불안 속에서 공포에 질려서 박지원씨의 노예 마냥 끌려가며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최정민 서울로 도망, 탈출했는데 박지원 다시 찾아와서 성폭행, 동거
그러다가 85년 말 한국에서 영화 출연교섭이 와서 저는 그와 헤어질 수 있는 기회라고 한국에 나와 삼촌 집에 거처하고 그 길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박지원은 자신이 꿈꾸던 정치의 길이 보이자 나를 과감히 버리고 그 길을 택하려고 저가 급히 하던 모든 작품을 중단시키고 미국으로 들어가서 뉴욕서 멀리 떨어진 서부 쪽으로 이사를 보냈습니다.
저를 설득해서 아무런 위자료 없이 헤어지지 않은 것처럼 위장해 저를 동부 쪽에서 서부로 쫓아냈습니다. 못난 저는 매일 매일 찾아 줄 것을 기다리며 차 사고를 내는 엄청난 시련을 겪으며 그를 기다렸지만 매정하게 버림을 받고 저는 세월이 흘러 88년경에 N.Y.에 다시 가서 까페를 경영 했는데 그가 다시 찾아왔습니다.
◇1996년 4월 10일 부천신문에 보도된 최여인에 대한 증언기사를 보자.
“증언에 따르면 박 대변인은 77년부터 미국에서 동거하던 C씨와 85년 말경에 헤어졌다가 88년 국회의원 도전에 실패로 돌아간 후 다시 가끔 만났지만 89년 박 대변인이 한국으로 완전 귀국함에 따라 완전히 헤어 졌다는 것이다.
http://m.dcinside.com/view.php?id=drama_new1&no=1727429
https://band.us/band/65795110/post/34019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