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November 22, 2008

80회 생일 축하연에 참석하면서.....나는 ?











인생이 모태에서 태어난 그순간 부터 숨을 멋을때까지, 요즘은 의학이 발달하고, 먹는 음식이 좋아지고, 생활환경이 무척 향상되여, 살아가는 기간이 자꾸 연장되여 진다고 한다. 성경에서도 인생 70에 강건하면 80 이라고 한 구절을 읽은 기억이 있다.
요즘의 61회 생신은 그 의미를 많이 두는것 같지 않고, 그져 또 한살을 더 살았구나 하는 정도로 보내는 경향이 많고, 또 주위에서, 또 내자신을 봐도 별 깊은 뜻을 두지 않고, 같은 또래의 아는 친지 Couples들과 같이 회식을 하면서 하루밤을 즐겼던 기억밖에 없다.
며칠전 손윗 동서분께서 80회 생일잔치를, 그것도 본인은 모르게 준비해서, Surprise Party로 그의 자손들이 준비하여, 가까운 제자 몇분과 그리고 파티를 주최한 자손의 친구들과 집안 식구들이 참석하여 축하했었다. 당사자인 형님은 80회 생일파티를 축하받는게, 뭐 그리 대단한거냐고, 오래살은것이 축하받을 일은 아니라고 하시면서, 자손들의 생일 파티 제안을 극구 사양 했었다고 한다. 그러면 식구들만 모여서 저녁 식사나 Eating out으로 하기로 일단 안심시켜 드리고 뒤에서 준비 했었다고 한다. 그준비 과정에서 이모(나의 아내)에게 테이블 장식용 꽃꽃이를, 파티를 주관하는 조카로 부터 부탁받아, 결론적으로 모의(?)에 가담한 공범자(?)가 되기도 했다. 나도 거기서 도와 준바 있다.
조촐했지만, 지금은 같이 늙어 가는 제자들과 같이 어울려 지난 얘기 하고, 또 살아온 그간의 인생 스토리를 직접 들어 보기도 하는 좋은 시간이었었다. 인생삶의 Span이 길어졌다고는 하나, 그래도 주위에서는 나와 동년배들이거나 조금위, 아니면 조금 아래의 친지들이 숨을 거두는것을 보면은 결코 80회 인생축하연을 하는것은, 사양할 미덕만은 아닌것을 느낀다. 주위로 부터 자랑스럽게 축하를 받아도 좋은, 박수 받을 충분한 의미가 있다고 재음미 해본다. 간단히 몇마디로 요약된 그형님의 인생스토리는 조국분단의 아픔을 또 느끼게 하는, 그형님만이 아닌, 수많은 이산가족들의 애처러움과 이데올로기로 인한 위정자들의 인위적인 정치이념때문에, 아니 그원치않은 선물때문에, 갈라져 살면서 시간이 다되면, 재회의 꿈을 현실화 시키지도 못한채 한많은 숨을 거두는 피해 당사자들속에 그 형님이 안타까이 삶을 지탱해 왔음을 재확인하게 하는 순간을 느끼게 하기도 했었다. 살아남아 언젠가는 꼭 다시 헤어졌던 가족 피붙이를 만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남쪽으로 넘어와 살다가, 다시 또 짐을 꾸려 이곳 캐나다 까지 와서 살면서, 80회를 어느덧 맞이 했다. 그러나 헤여졌던 가족과 재회할수 있는 기회는 점점 줄어만 가고 있다는 애절한 표현은, 반대로 나만 이렇게 편하게 좋은 세상에서 살고 있는 동안, 공산치하의 가족들이,공포와 기아에 허덕이면서 초근목피로, 목숨을 연명해 가는 책임이 본인때문에 발생한것으로 회한을 토로하는 그형님의 80회 생신 축하는 그래서 본인이 극구 사양 했었음을 또 다른 각도에서 보게 하는 시간이기도 했었다.
앞으로 18년 후에는 나도 그형님과 똑 같은 길이의 세월을 살아온 인생항로에 서게 될것이다. 꼭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어떤 모습으로 나는 내자신을 지키고 있을까? 골프도 형님처럼 즐길수 있는 신체적 건장함을 유지하고 있을까? 그것도 좋을때나 괴로울때나 평생를 같이 세월을 참아온 아내와 같이....
짧지않은 지난 시간을 눈을 감고, 필름을 뒤로 잠시 돌려 본다. 보리쌀 서너말을 머리에 이고 십리길이 넘는 산길, 들길을 걸어 읍내 장에 가셔서 팔은 그돈으로, 추석장을 보고, 설장을 보고, 그다음에 어쩌다 검정고무신을 사오셔서, 이다음에 커서 훌륭한 사람되라고 하시면서 오래오래 잘 신어야 한다라고 말씀 하시던 어머님의 기억, 시골에서 국민학교를 다닐때, 책보자기에 책을 싸고, 허리에 들쳐메고, 동네 아이들과 들판의 논둑길을 달려 학교를 다던일, 겨울에는 추워서 마른 소똥을 주워 불을 부쳐 얼어붙은 손을 녹이던 기억, 군대에 가서 고참병들의 이유없는 기압에 녹아나, 추운 겨울밤에 보초설때는 어깨에 들쳐메고있는 소총을 이용하여 자살을 함으로써, 고난을 잊으려고 생각하기도 했었던 기억, 제대후 아직 가난했던 조국의 현실에서, 밥벌이가 막막해서 허공을 쳐다보면서, 왜 태어나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그러면서 어린 마음에 부모님을 원망(?)하기도 했었던 기억, 시골촌놈이 공무로 처음 비행기를 타고 일본, 독일로 출장가면서,상공을 날을때 설렛던 그기억, 그곳에서 세상은 살만한 무대라고 처음 느꼈었던 젊은이로서의 기상을 느꼈던기억, 강원도 산골에서 군생활할때 휴가를 맡아 고향으로 가던길에 서울 복판을 거치면서, 화려한 옷차림의 아름다운 여성들(?)을 보면서 한없이 내자신이 적고 초라하게 느끼면서, 그녀들은 모두가 하늘에서 내려온 아름다운 천사로 보여서, 나는 평생을 통해서 그런 여성중의 한명과 결혼할수 있을 자격이 있을까? 라고 용기와 희망을 포기하다시피 했었던 기억, 직장에 다녀와 보니 월세들어 막 신혼생활을 시작했던 보금자리가 무허가 건물이라고 해서, 전쟁이 지난후의 아수라장같이 변해있던 그자리에서 망연자실하고 서 있으면서 서러움에 젖어 흐느끼던 아내와 붙들고 하늘을 쳐다보던기억,....... 그만 나열 해야 겠다. 이민자로서의 새삶의 터전을 이루기 위해 육체적 정신적 소용돌이속에서 살아온 그기억들은 여기에 적고 싶지도 않게 진절머리 나는 일들이다. 선물로 얻은 두 아이들은 다 장성하여 이제 짝을 찾아 새삶을 꾸려야 할 나이가 다 차고, 지나가고 있지만, 뭐가 그리도 바쁜지, 그런 나와 아내의 바램과는 상관 없다는듯 살아가는 아이들을 보면, 마음이 무겁다. 몇년전만 해도 주위에서 친지들, 또는 인생선배들이 자신들의 손자 손녀들의 재롱에 세상사는 맛을 다시 느끼게 된다 는 소리를 들으면, 속으로 그들을 비웃곤 했었는데, 지금은 그들의 뜻을 이해 할것 같다. 내가 세상살아가는 맛을 몰랐었음을, 지금은 깨달으면서, 아이들이 짝을 찾아 새 보금자리를 만들지 않고 있음에 마음이 다급(?)해짐을 우리아이들이 알아 주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더 늦어지기전에......
그래서 동서 형님의 80회 생일은 나에게도 참 뜻있는 자리였었다고 본다. 형님 이겨울도 건강히 잘 지내시고, 내년도 시즌이 되면 다시 골프채카트를 밀고 푸른 초원을 친지분들과 어울려 걸어가는 그모습을 보여 주십시요. 지금까지 못해봤던 골프 라운딩도 내년시즌에는 형님과 같이 한번 하고도 싶고요. 우리 모두 건강하게 그리고 주위 가족들에게 부담없이 살다가 떠나는 때가 됐을때 홀련히 떠나는 그런 바램으로 남은 삶을 뜻있게 살고 싶다.

Monday, November 10, 2008

자금성 (Forbidden City)안의 명황제의 거처가 공개된다니.....


LA times에, 중국 베이징에 있는 Forbidden City 안의 마지막 명나라 황제가 기거하던 2층빌딩이 일반 관람객에게 곧 공개될 계획이라는 기사를 읽고, 몇년전 그곳에 갔었을때의 기억이 되살아나, 그기사를 여기에 옮겨 보았다. 엄청나게 큰 규모의 궁전으로 기억되는데, 그안에 다시 황제가 거처했던 건물이 공개 된다니..... 옛날 황제의 생활은 그곳에서 어떻게 이루어 졌었을까? 궁금해 진다.

사진은 중국 베이징에 있는 Forbidden city안에 있는 2층빌딩으로, 마지막 황제가 기거한곳이엇다. 방금 보수를 마친뒤 2명의 기자가 취재하고 있는 장면이다. 이건물은 명조시대의가장 화려한 건물중의 하나라고 한다. 건물이 너무나 셈세하여, 중국자체 기술만으로 어려워
국제적 합동작업을 필요로 했다고 한다.

그동안 중국 베이징에 있는 Forbidden City가 일반에 공개는 됐어도, 마지막 황제가 기거하던
빌딩은 1924년이후 꽉 문을 걸어 잠그고 세상과 등지고 있었다.
이번에 미국과 중국의 팀들이 힘을 모아 3백만달러를 들여 보수를 마치고 곧 일반에게도
공개 된다고 전한다. 또한 이번 보수작업은 미국과 중국팀들이 앞으로도 호흡을 잘 맞추어
비슷한 역사적 건물에 대한 보수작업을 잘 할수 있을지의 시험대 이기도 된다고 한다.
오랫동안 외부와 차단되여 있었던 관계로, 바닥과 벽에는 먼지가 수북히 쌓여 있었으며, 벽에는 쌓인 먼지자국위에 붓글씨를 쓴것처럼 붓을 휘둘러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주기도 했다고 한다. 가구위에도 먼지가 수북히 쌓여, 이곳에서만은 마치 시간의 흐름이 정지 되여 있었던 것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한다.


앞으로 베이징 중국을 방문하게 되면 볼수 있게 된다는 기대감도 또한 커진다.
이궁전 관리자들은 보수를 위해 외국팀과 합동으로 보수를 해야하는데 무척 긴장했다고 한다. 이해가 갈만 하다.


Forbidden City restoration an experiment in U.S.-China teamwork

China Photos / Getty Images
Two reporters visit the studio after its renovation in the Forbidden City in Beijing, China. The tiny, two-story lodge is one of the most luxurious buildings built for Qing Emperor Qianlong.
The $3-million refurbishment of a Beijing studio belonging to one of China's most artistic emperors demanded an extraordinary international partnership.
By John M. Glionna
7:19 AM PST, November 10, 2008
Reporting from Beijing -- For Bonnie Burnham, it was like entering a Chinese version of an Egyptian tomb, a small lavishly appointed studio in Beijing's Forbidden City that had remained untouched for centuries.

On a cool autumn day in 1999, the president of the World Monuments Fund followed her local guides into an area where few had set foot since 1924, when China's last emperor vacated the palace and locked the doors to the studio behind him.


What she remembers most is the musty air and thick coat of dust that covered the floor, the delicate pieces of furniture, even the lushly paneled walls etched with their courtly lines of calligraphy.

"There was a sense that time had stopped there," she recalled.

Burnham's heart raced. Because underneath the grit lay one of the five most historically important interiors to survive China's imperial past -- a window into the private world of one of the Middle Kingdom's most artistic emperors.

Today, Burnham stood among dignitaries from the Forbidden City's Palace Museum to unveil the refurbishment of the tiny two-story lodge known as Juanqinzhai, which will soon be open to the public.

The $3-million restoration, which took nearly a decade to complete, marks an extraordinary international partnership of Chinese artisans and Western expertise.

It also represents a rare instance, officials say, in which the Chinese government has sought foreign assistance and know-how to restore one of its precious historical relics.

The results have been so successful that the fund, a private, nonprofit New York-based preservation group, is extending its alliance with Chinese cultural officials to restore the Qianlong Garden's 26 other pavilions and four courtyards.

The face-lift's first phase involved numerous detailed excavations of the studio's interior, trips to the U.S. by Palace Museum staff for strategy sessions and a nationwide search in China for artisans capable of the delicate renovations.

"None of us had any kind of road map. Neither the Chinese nor the American side had any experience with this specific type of restoration," said Nancy Berliner, the curator of Chinese art at the Peabody Essex Museum in Salem, Mass.

The Juanqinzhai studio was built in the 1770s by the Qianlong emperor for his personal use after his retirement -- a two-acre private retreat nestled in the northeastern corner of the Forbidden City.

He called it the "Studio of Exhaustion From Diligent Service."

Its construction came during the Qing dynasty when China, one of the world's most prosperous nations, was engaged with the West in terms of trade, aesthetics and ideas.

"No resource was spared. Every inch of design and creation was overseen by the emperor himself, who issued an edict that nothing could be altered by future generations," said Henry Tzu Ng, the fund's executive vice president.

The result is widely considered a masterpiece of design and materials: a jewel box replete with large murals, elaborate ceiling paintings and ornate flourishes of bamboo, white jade and satin.

Never open to public view, the studio fell into disrepair after China's last emperor, Puyi, was ordered from the Forbidden City in 1924. For decades, including the Communist takeover and Cultural Revolution, the emperor's refuge became a decrepit storage space.

For the World Monuments Fund, the forlorn studio was an opportunity. Seeking projects within China, the group approached Palace Museum officials about a restoration partnership.

To their surprise, the Chinese accepted, with officials acknowledging that they were open to outside guidance and funding.

"The Forbidden City is huge and . . . there was too much work to do; therefore, our country didn't have the energy, time as well as enough money to manage this part of the palace," said Wang Shiwei, senior engineer of the Palace Museum's historical architecture department.

"It is the first time the Palace Museum is cooperating with a foreign organization to repair its facilities comprehensively."

Palace officials visited the Peabody Museum and other venues to witness firsthand U.S. techniques of cultural restoration.

The pressure was palpable: They were undertaking the renovation of a sacred icon unchanged from the times of Imperial China. "It was like restoring something on the level of Notre Dame, something that's been there for centuries," said Berliner

Back in Beijing, teams of Chinese artisans began work in 2002 that Ng describes as "above-ground archaeology."

Preservationists scoured the studio for every scrap of loose paper and bits wallpaper and disintegrating mural that had fallen to the floor. Each was sealed in a plastic bag and labeled. Soon, they had amassed 35,000 plastic bags, officials say.

"The last emperor closed the door nearly a century ago," Ng said. "What we found was peeling wallpaper, incredible artifacts, furniture, objects behind objects, all as if he had just left it. There was this incredible sense of discovery."

One day, Burnham recalled, she opened a box she found sitting on a table. "Inside was this exquisite jade Buddha," she said. "There was no sense of how much time had passed. Had that piece been sitting there for 200 years, or had it been more recently stored there?"

The studio's murals presented a particular challenge. Fashioned under the guidance of Giuseppe Castiglione, a Jesuit missionary and painter who settled in China in the 1700s, the ceiling murals were painted on silk wallpaper, a combination of European aesthetics and Chinese decorative arts seen nowhere else in the entire 180-acre Forbidden City.

Neither the Chinese nor the Americans were sure how to remove them for restoration. The Chinese first tried to wet the seams to remove the wallpaper remnants. When that didn't work, the Americans introduced a dry method of scraping the fragile wallpaper from behind.

That worked, Ng said. But it didn't solve the challenge of getting the wallpaper back up.

"There were no records of how they had originally stuck the wallpaper, so the Chinese conservation team tried one method and the Western consultants tried a different way," Ng recalled.

"We worked out a compromise between the two: We put mattresses on the floor, on top of which we placed poles with tension springs to hold the wallpaper in place until it dried."

In the end, both sides are satisfied with the result.

Said Wang: "I think the emperor would be pleased."

Sunday, November 09, 2008

노란 카펫위를 걷는 기분으로 Trail Walk

















아직 아침 이슬에 젖어 카펫처럼 널려있는 노란 단풍나무 낙엽위를 밟으며 걷는, 늦가을의 산행은, 그위를 걸어보는자만이 느낄수 있는 색다른 감각을 제각기 발끝에 충분히 주고도 남는것 같다. 산행을 시작하기전, 며칠전 골프장에서 드라이브로 힘차게 때린 볼이 수북히 쌓여 있는 낙엽속으로 날아가 숨어 버리자 눈의 초점을 그곳을 향하고 걸어가서 낙엽위를 밝으며 공을 찾을때 느꼈던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오늘은 들리지 않는다. 이슬에 젖어 푹신한 감각은 풍부한데, 낙엽하면 그위를 밟고 걸을때 바스락 거리는 특유의 소리가 없는게 조금은 아쉬웠지만, 노란색갈의 끝없이 이어진 단풍나무낙엽위를 밟고 한발짝 한발짝 옮길때마다의 기분은 질좋고, 푹신하게 깔려있는 리빙룸의 카펫을 걷는 감촉좋은 기분이었다. 산행때마다 보는 정겨운 얼굴들, 오늘도 형형색색의 옷을 걸치고, 바람결이 조금은 차겁게 느껴지는 초겨울의 산행시작은, 조금은 움추러드는 그런 기분이 지배적이었다. 출발할때 화사했던 햇볕도 어느새 구름속으로 숨어 버리고, 하늘은 잿빛으로, 잎이 다 떨어져 이제는 앙상하게 가지만 회색으로 변해버린 단풍나무숲과 어쩌면 감각을 같이 하는것 같은 무거운 기분이다.
많지않은 12명의 정예회원들이 오늘의 산행에 동참했는데, 그중에는 리더의 중책을 새로 맡은 부부도 참석하여 그의미는 더 깊은것 같았다.
2대의 미니밴에 분승하여 약 50분을, 나이아가라쪽으로 QEW을 달려, Exit 64번으로 빠져, 다시 골목길같은 샛길을 구비구비 핸들을 돌려 산행 출발 지점에 도착했을때는 정확히 11시 정각이었었다. 산행때마다 꼭 참석해오신 7학년되는 고참회원으로 부터 각양각색의 회원들이, 오늘도 산행에 참석한 것이다.
오늘 걷는 Cave Springs 지역은 전구간이 이끼가 파랗게 끼여 있는 바위바닥위를 걷는 구간이다. 트레일은 구릉지 윗쪽으로 나있어, 그왼쪽으로는 멀리 Lake Ontario가 시꺼멓게 보이고, 트레일과 호수 사이에는 눈아래로 넓은 포도과수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어 아주 평화롭게 시야에 들어온다. 이끼로 덮혀있는 트레일에서 한발짝 옮길때마다 신경이 쓰인다. 미끄러워 자칫하면 밀리거나 넘어질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느구간에서는 미끄러졌던 발자국흔적이 이끼위로 뚜렷히 나타나기도 했다. 아마도 어느 회원이 삐끄덕 하여, 순간적으로 고생을 한 흔적으로 보인다. 놀라는 아우성 소리가 없었던 것으로 보아 그위기를 무사히 넘기고 계속 전진했던것 같다. 바로 산행의 경험을 말해 주는것으로 느꼈다. 대신에 가끔씩은 아름다운 여성회원들의 웃음 소리가, 높이 떠가는 비행기의 소음처럼 들리는, 휘몰아치는 바람과 회색빛으로 하늘을 향하여 뻗쳐있는 나무가지들과 부딪히는, 윙윙거리는 바람소리와 어울려 앙상블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여성회원들의 그런 웃음소리가 없었다면 발자국 옮기는 분위기는 어쩌면 조금은 더 무거웠을지도 모르겠다.
아직은 어린 영지버섯 몇송이가 단풍나무 고목에 기생하여 생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여름이면 푸른위용을 자랑하던 잡초들도, 떨어져 덮혀있는 낙엽색갈과 같이 갈색으로 변해, 볼품이 없어 보인다. 어쩌면 삶의 Cycle을 보여 주면서, 우리 우둔한 인간들에게 삶의 순환을 겸허히 받아 들이라는 신호를 보내는것처럼 나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나의 삶은 Cycle 곡선으로 봤을때, 어느매쯤에 매달려 있다고 보아야 할까? 알것 같으면서도, 나는 예외겠지?하는 어리석음이 마음 한구석을 자리하고 있음을 느낀다. 어리석기는.... 옛날에 천하를 호령하던 진시황제도 싸이클이 다하니까 모든것 다 놓고 갈곳으로 가버린 역사를 훤히 머리로는 기억하면서도.....
우리가 걷고 있는 구릉지 꼭대기에 갑자기 커다란 바위 덩위가 그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엇듯 보기에는 큰 직사각형 같기도 했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오랜세월을 두고 비방울에 패여 생겨난 수많은 구멍들이 새겨져 있고, 또한 노트에 줄이 그어져 있는것 처럼 그런 자취들이 뚜렷히 나타난다. 옛날 빙하기시대가 한창일때 빙하에 밀려 내려가다가 현재의 위치에서 안착하고 말았다는 설명이 다소 생소하게 느껴진다. 그곳을 지나자 이번에는 급경사로 이어진다. 아직 젖어있는 바닥에 낙엽까지 덮혀있어 미끄러지기 안성맞춤이다. 조심스럽게 발길들을 내딛는다. 이런경우에는 이렇게 발자국을 옮겨야 한다는 조언도 들리고, 서로 손을 잡고 의지 하면서 내려가는 모습도 보기 좋다.
트레일을 걸을때 흔히 보이는 트레일 방향표시(White Blade)가 눈에 들어 온다. 그냥 지나칠수도 있었는데, 그옆에 설명판이 붙어있어, 잠시 쉴겸해서 무심코 읽어 내려갔다. 그런데 이표시판은 아주 뜻깊은 설명을 내뿜고 있었다. 아직 우리가 걷고 있는 Bruce Trail이 공식적으로 오늘처럼 구성되여 있지않고, 구간 구간 트레일 동호인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을때, 이곳에 맨처음으로 트레일 표시판인 White Blade를 표시했던 곳이라고 쓰여있었다. 즉 1962년 3월 25일에 처음 이곳에 세워지다 라고...... 아주 역사깊은 곳을 우리는 오늘 밟은 것이다.
움추러 들려고 했던 몸에서는 어느새 땀이 옷에 젖어들고 있다. 을씨년 스러웠던 처음 기분은 온데간데없이, 이제는 모두가 단추를 풀고 바람(?)을 안으로 끌어 들여 시원함을 갈구하는 모습들이다. 활동하는 생명체들의 자연에 대한 신체의 반응으로 보여 진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잠시 멀리 초점없이 쳐다봤다. 멀리 고속도로위를 달리는 수많은 차량들이 마치 개미의 행렬처럼 보인다. 다만 다르게 보이는게 있다면 개미들처럼 검정색갈말고도 여러 다른 색갈들이었다. 우리도 지금 이곳에서 산행을 하기위해, 저 끝없이 이어지는 자동차 행렬속에 끼어서 한참을 달려 왔었다. 누군가가 우리가 타고 고속도로를 달려왔던 차를 보면서, 나와 같은 상상을 했을것 같기도 하다.
산행하면서 먹는 점심은 항상 꿀맛이다. 오늘도 똑 같이 꿀맛이다. 어느회원은 이렇게 이마에 땀을 한참 흘리고 나서 먹는 점심맛을 만끽하기위해서 산행에 동참한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한다. 그말에 동감이다. 갈증을 해소해 주는 한모금의 물맛도 여느때와는 다르다. 달다.
3시간을 걸었다. 지도상의 표시에서 거리를 재어보니 대략 12키로쯤 걸었다. 평평하지 않고, 이끼로 뒤덮힌 바윗길을 우리 회원들은 침착하게 꾸준히 걸었기에 사고없이 계획된 구간을 완주 한것이다. 7학년 회원님의 무사완주를 한 모두에게 감사 말씀을 끝으로 산행을 접었다. 총무를 맡고 있는 마음착한 회원의 배려로, 따끈한 Tim Horton커피 한잔씩을 마시는 기분은 산행의 노곤한 피로감을 말끔히 가시게하고, 끝맺음을 더 좋게 하고도 남았다. 다음 산행때 까지 모두 강건 하시기를.....

Thursday, November 06, 2008

인디언 섬머, 다시 골프클럽 꺼내 달려 가게 만들었다.







약 10일 전쯤에 짐을 싸서, 여름철 살림집이었던 카테지 생활을 정리하고, 토론토 본가로 돌아 왔었다. 더 있고 싶었지만, 추워진 날씨에 골프 말고는 별로 할일이 없어서 였다. 아쉽지만, 내년 시즌을 기약하면서, 그동안 고맙게 잘쳤던 골프채를 백에 넣어, 토론토로 같이 가지고 왔었다.
카테지에 두고 와도 되지만, 한겨울 추울때, 중남미로 친지들과 캐나다의 눈많고, 긴 겨울의 지루함을 잠시 잊기위해, 골프여행을 떠나기 때문이었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낯시간도 눈에 띄게 짧아지고, 조석으로는 늦가을의 서늘함에 잠바를 꺼내 입고...... 가끔씩은 동네 친지분들과 어울려 맥도날드와 Tim Horton에서 조석으로 커피를 마시며,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이바구를 하곤 했었다. 요즘은 미국의 대통령과 국회의원들 선거에 관심이 쏠려, 나름데로의 예측과 세계정세도 화제거리의 중심에 있곤 했었다. 바로 미국 선거가 있기 이틀전에 일기 예보는 우리 부부를 포함한 골퍼들에게 낭보를 알려 주고 있었다. 이름하여 Indian Summer가 며칠간, 즉 미국대통령 선거 하루전부터(월요일) 거의 주말까지 19도 이상 기온이 올라가고, 햇볕이 쨍쨍한 날씨가 계속될거라는 예보였다. 미국이 대선을 치를때마다, 나는 항상 밤을 새워 그결과를 즐겨 보곤 했었다. 이번에도 그렇게 하는것은 당연지사로 알고 있었는데, 인디언 썸머는, 우리 부부를 그냥 있게 하지를 못했다. 아내는 정치에 관심이 나보다는 적어서 별개지만, 나는 저울질을 하지 않을수 없었다. 이곳 토론토에 남아서 대선 결과를 보아야 하느냐? 아니면 다시 골프백을 차에 싣고 카테지로 가야 하느냐?로. 왜냐면은 카테지에는 신문도, TV도 없기 때문에, 세상과는 단절되는 며칠을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아내는 카테지에 가서 골프치기를 원하고 있고, 나또한 그녀보다 더 하지만, 두개를 다 취하고 싶은 욕심으로 저울질을 하다가, 대선의 향방은 이미 알고 있는터라, 황금같은 인디언썸머를 즐기기로 작정하고 화요일 일찍, 차를 카테지로 몰려고 서둘르는데, 아내가 퉁명 스럽게 한마디 한다.
"차키만 꽂으면 다는줄 아느냐? 먹을것은? 입을것은? 다 저절로 차키만 꽂으면 되는냐?" 뭐 이런 내용이다. 머리가 머쓱 해진다. 말없이 이렇게 뒤에서 뒷받침 해주었기에 그녀의 손길이 가지 않고서는 안된다는것을 미쳐 피부로 못느끼고 살아왔음을 들키고 만 셈이다.
손빠르게 그녀의 준비로 오랜시간이 걸리지 않고, 이번에는 정말로 카키를 꽂고 카테지를 향해 고속도로를 달렸다. 하늘은 구름한점없고, 기온은 골프치기에 가장 적당하다고 하는 19도 였다. 카테지에 도착했을때, 지금은 은퇴하여 그곳 카테지촌에서 살고 있는 Barb과 Gene 부부가 우리를 보고 웃으면서 반긴다. 내년봄을 기약하면서, 작별인사를 하고 헤여진지가 불과 10여일 밖에 안됬는데 갑자기 또 만나게 되니, 반가운면서도, 한마디 던진다. "그러면 그렇지, 이날씨에 너희가 골프를 치고 싶어서 그냥 토론토에 있을것으로는 생각지 안았었다. 정말로 너희가 왔구나" 라고. 예약을 하지 않았기에, 행여나 북킹이 넘쳐 못치게 되지는 않을까? 걱정하면서, 짐을 카테지에 던져놓고, 바로 골프장으로 달렸다. 토론토에서는 골프인구가 많아 북킹이 안되면 챈스 잡기가 쉽지않기 때문에, 그런 걱정이 머리에 꽉찬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아니라 다를까 골프클럽 파킹장에는 많은 차량이 보였다. 아내는 차에서 골프클럽과 카트를 내리게 하고, 나는 곧바로 프로샾으로 뛰어가, 북킹없이 왔다고 했다. 뜻밖에도 지금 나갈수 있다고 Linda(골프장 주인부인)가 Tee off 티켓을 끈어준다. 별도의 골프피를 우리는 내지 않는다. 골프장의 맴버이기 때문이다. 기분이 너무나 좋다. 골프를 즐기라고 린다가 인사까지 곁들인다. 나도 고맙다고 인사하고, 차로 갔다. 골프백과 카트를 차에서 내리고 있는 아내를 돕기 위해서 였다. 필드에는 우리처럼 은퇴한 많은 케네디언들이 부부동반으로 우리처럼 인디언 썸머에 골프를 치면서, 따뜻한 햇살을 즐기려는듯, 골프클럽을 휘둘르면서, 오랫만에 친지들과 담소를 하면서 파안대소 하는 모습들이 쉽게 볼수 있었다. 따뜻한 햇살이 너무나 좋다. 그저께만 해도 상상할수 없는, 보너스 햇살에 따뜻한 기온이다.
티막스에 올라 티를 꽂고, 힘껏 휘둘렀다. 마음과는 딴판으로 공이 날라갔다. 이게 아닌데.....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아내를 보며, Mulligan줄거야? 물었더니... 또 시작이란다. 그러면서, 며칠동안 안치다가 다시, 인디언 썸머 덤으로 기분좋게 골프를 시작하는데.... 그래 인심쓴다 하면서 자기가 볼 때린 다음에 하란다. 그녀는 반드시 볼을 날려 보냈다. 두번째 친 볼은 비교적 페어웨이 센터로, 보기 좋게 날아갔다.
주위의 나무에는 잎사귀가 거의 없이 나목이다. 나무들은 이미 겨울준비에 들어간지 상당기간이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왜 인디언 썸머라고 이름이 붙었는지는 잘 모른다. 그러나 이곳 북미에서는 그렇게 부르고 있다. 떨어지 낙엽이 바람에 날려 군데 군데 모여 있어, 친볼이 그곳을 향해 질주 할때는 볼찾기가 매우 어렵다. 그래서 가끔씩 어이없게 볼을 잊어 버리곤 한다. 그래도 기분은 좋기만 한다. 그까짖 볼이 문제가 될수가 없다. 겨울동민에 들어가야하는 이시간에 골프를 친다는것, 그자체로 만족이다. 그리고 감사 한다.
썸머타임 해제이후 낯길이가 더 짧아져 12시에 시작해도, 끝날때쯤인 오후 4시경에는 아직 햇살은 서산쪽에 걸려 있어도 볼이 날아가는 길이 잘 안보이기도 한다.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하는 증거이리라. 기후의 변화는 일기예보를 무색하게 내일(금요일) 부터는 흐린날씨에 기온도 내려가고 또 오후에는 비가 내릴거라고 수정된 예보를 해준다. 아쉽지만, 다시 짐을 꾸려 오늘(목요일) 골프를 마친후, 토론토로 되돌아 와야만 했다. 다시 인디언 썸머가 오기를 바래면서.... 누가 알랴 또 운좋게, 아니면 도우시는 분이 도움을 베푸시면.... 그동안 며칠 사이에 쌓였던 스트레스가 확 날아갔음을 피부로 느끼면서, 따뜻한 Tim Horton커피한잔을 마시면서, 달리는 차속에서 나누어 마시며, Classic Pop Song이 핸들을 가볍게 한다.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