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November 22, 2008

80회 생일 축하연에 참석하면서.....나는 ?











인생이 모태에서 태어난 그순간 부터 숨을 멋을때까지, 요즘은 의학이 발달하고, 먹는 음식이 좋아지고, 생활환경이 무척 향상되여, 살아가는 기간이 자꾸 연장되여 진다고 한다. 성경에서도 인생 70에 강건하면 80 이라고 한 구절을 읽은 기억이 있다.
요즘의 61회 생신은 그 의미를 많이 두는것 같지 않고, 그져 또 한살을 더 살았구나 하는 정도로 보내는 경향이 많고, 또 주위에서, 또 내자신을 봐도 별 깊은 뜻을 두지 않고, 같은 또래의 아는 친지 Couples들과 같이 회식을 하면서 하루밤을 즐겼던 기억밖에 없다.
며칠전 손윗 동서분께서 80회 생일잔치를, 그것도 본인은 모르게 준비해서, Surprise Party로 그의 자손들이 준비하여, 가까운 제자 몇분과 그리고 파티를 주최한 자손의 친구들과 집안 식구들이 참석하여 축하했었다. 당사자인 형님은 80회 생일파티를 축하받는게, 뭐 그리 대단한거냐고, 오래살은것이 축하받을 일은 아니라고 하시면서, 자손들의 생일 파티 제안을 극구 사양 했었다고 한다. 그러면 식구들만 모여서 저녁 식사나 Eating out으로 하기로 일단 안심시켜 드리고 뒤에서 준비 했었다고 한다. 그준비 과정에서 이모(나의 아내)에게 테이블 장식용 꽃꽃이를, 파티를 주관하는 조카로 부터 부탁받아, 결론적으로 모의(?)에 가담한 공범자(?)가 되기도 했다. 나도 거기서 도와 준바 있다.
조촐했지만, 지금은 같이 늙어 가는 제자들과 같이 어울려 지난 얘기 하고, 또 살아온 그간의 인생 스토리를 직접 들어 보기도 하는 좋은 시간이었었다. 인생삶의 Span이 길어졌다고는 하나, 그래도 주위에서는 나와 동년배들이거나 조금위, 아니면 조금 아래의 친지들이 숨을 거두는것을 보면은 결코 80회 인생축하연을 하는것은, 사양할 미덕만은 아닌것을 느낀다. 주위로 부터 자랑스럽게 축하를 받아도 좋은, 박수 받을 충분한 의미가 있다고 재음미 해본다. 간단히 몇마디로 요약된 그형님의 인생스토리는 조국분단의 아픔을 또 느끼게 하는, 그형님만이 아닌, 수많은 이산가족들의 애처러움과 이데올로기로 인한 위정자들의 인위적인 정치이념때문에, 아니 그원치않은 선물때문에, 갈라져 살면서 시간이 다되면, 재회의 꿈을 현실화 시키지도 못한채 한많은 숨을 거두는 피해 당사자들속에 그 형님이 안타까이 삶을 지탱해 왔음을 재확인하게 하는 순간을 느끼게 하기도 했었다. 살아남아 언젠가는 꼭 다시 헤어졌던 가족 피붙이를 만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남쪽으로 넘어와 살다가, 다시 또 짐을 꾸려 이곳 캐나다 까지 와서 살면서, 80회를 어느덧 맞이 했다. 그러나 헤여졌던 가족과 재회할수 있는 기회는 점점 줄어만 가고 있다는 애절한 표현은, 반대로 나만 이렇게 편하게 좋은 세상에서 살고 있는 동안, 공산치하의 가족들이,공포와 기아에 허덕이면서 초근목피로, 목숨을 연명해 가는 책임이 본인때문에 발생한것으로 회한을 토로하는 그형님의 80회 생신 축하는 그래서 본인이 극구 사양 했었음을 또 다른 각도에서 보게 하는 시간이기도 했었다.
앞으로 18년 후에는 나도 그형님과 똑 같은 길이의 세월을 살아온 인생항로에 서게 될것이다. 꼭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어떤 모습으로 나는 내자신을 지키고 있을까? 골프도 형님처럼 즐길수 있는 신체적 건장함을 유지하고 있을까? 그것도 좋을때나 괴로울때나 평생를 같이 세월을 참아온 아내와 같이....
짧지않은 지난 시간을 눈을 감고, 필름을 뒤로 잠시 돌려 본다. 보리쌀 서너말을 머리에 이고 십리길이 넘는 산길, 들길을 걸어 읍내 장에 가셔서 팔은 그돈으로, 추석장을 보고, 설장을 보고, 그다음에 어쩌다 검정고무신을 사오셔서, 이다음에 커서 훌륭한 사람되라고 하시면서 오래오래 잘 신어야 한다라고 말씀 하시던 어머님의 기억, 시골에서 국민학교를 다닐때, 책보자기에 책을 싸고, 허리에 들쳐메고, 동네 아이들과 들판의 논둑길을 달려 학교를 다던일, 겨울에는 추워서 마른 소똥을 주워 불을 부쳐 얼어붙은 손을 녹이던 기억, 군대에 가서 고참병들의 이유없는 기압에 녹아나, 추운 겨울밤에 보초설때는 어깨에 들쳐메고있는 소총을 이용하여 자살을 함으로써, 고난을 잊으려고 생각하기도 했었던 기억, 제대후 아직 가난했던 조국의 현실에서, 밥벌이가 막막해서 허공을 쳐다보면서, 왜 태어나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그러면서 어린 마음에 부모님을 원망(?)하기도 했었던 기억, 시골촌놈이 공무로 처음 비행기를 타고 일본, 독일로 출장가면서,상공을 날을때 설렛던 그기억, 그곳에서 세상은 살만한 무대라고 처음 느꼈었던 젊은이로서의 기상을 느꼈던기억, 강원도 산골에서 군생활할때 휴가를 맡아 고향으로 가던길에 서울 복판을 거치면서, 화려한 옷차림의 아름다운 여성들(?)을 보면서 한없이 내자신이 적고 초라하게 느끼면서, 그녀들은 모두가 하늘에서 내려온 아름다운 천사로 보여서, 나는 평생을 통해서 그런 여성중의 한명과 결혼할수 있을 자격이 있을까? 라고 용기와 희망을 포기하다시피 했었던 기억, 직장에 다녀와 보니 월세들어 막 신혼생활을 시작했던 보금자리가 무허가 건물이라고 해서, 전쟁이 지난후의 아수라장같이 변해있던 그자리에서 망연자실하고 서 있으면서 서러움에 젖어 흐느끼던 아내와 붙들고 하늘을 쳐다보던기억,....... 그만 나열 해야 겠다. 이민자로서의 새삶의 터전을 이루기 위해 육체적 정신적 소용돌이속에서 살아온 그기억들은 여기에 적고 싶지도 않게 진절머리 나는 일들이다. 선물로 얻은 두 아이들은 다 장성하여 이제 짝을 찾아 새삶을 꾸려야 할 나이가 다 차고, 지나가고 있지만, 뭐가 그리도 바쁜지, 그런 나와 아내의 바램과는 상관 없다는듯 살아가는 아이들을 보면, 마음이 무겁다. 몇년전만 해도 주위에서 친지들, 또는 인생선배들이 자신들의 손자 손녀들의 재롱에 세상사는 맛을 다시 느끼게 된다 는 소리를 들으면, 속으로 그들을 비웃곤 했었는데, 지금은 그들의 뜻을 이해 할것 같다. 내가 세상살아가는 맛을 몰랐었음을, 지금은 깨달으면서, 아이들이 짝을 찾아 새 보금자리를 만들지 않고 있음에 마음이 다급(?)해짐을 우리아이들이 알아 주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더 늦어지기전에......
그래서 동서 형님의 80회 생일은 나에게도 참 뜻있는 자리였었다고 본다. 형님 이겨울도 건강히 잘 지내시고, 내년도 시즌이 되면 다시 골프채카트를 밀고 푸른 초원을 친지분들과 어울려 걸어가는 그모습을 보여 주십시요. 지금까지 못해봤던 골프 라운딩도 내년시즌에는 형님과 같이 한번 하고도 싶고요. 우리 모두 건강하게 그리고 주위 가족들에게 부담없이 살다가 떠나는 때가 됐을때 홀련히 떠나는 그런 바램으로 남은 삶을 뜻있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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