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December 31, 2017

다시 되돌아보는 2017년 한해. 인생들이 겪는 예측안되는 삶속의 내면.

2017년도 한해도, 천국과 지옥속을 헤매는 우리 인간들의 부질없는 삶의한편들.

스포츠, 정치, 그리고 뉴스.... 결론적으로 한마디로 요약하면, "내가 살기위해 상대방을 때려눕혀야한다" 였다.




아래의 링크 클릭하면, 자세한 내용이 나타난다.

http://www.cnn.com/interactive/2017/12/specials/year-in-pictures/?cat=0


전직 경찰총수,정치꾼들 캐나다의 자유당 대마초 장사에 합류 - 지조를 버리고 민초들의 마음 울리는 전직경찰총수들.

Julian Fantino씨의 살아온 삶에 대한 얘기를 들은 기억이 있다.  10세때 이태리에서 부모님 따라 캐나다로 이민와서, 경찰 총수(런던지역에서 토론토지역)를 하면서 인기를 많이 얻었었고,그후에는 온타리오 경찰총수직을 2006-2010까지 했었다.
퇴임후에는 보수당에 뛰어들어 2010-2015년까지 연방의원을 하면서, 은퇴자 노인들을 돌보는 Minister of state for Seniors과 그외 여러장관직을  지냈었다. 2013-2015까지 재향군인장관직을 맡아 근무하면서는 인기를 잃기도 하고, 그다음 선거에서 패배의 쓴잔을 마셨었다.

이민자로서의 성공 스토리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었다.  그래서 인기를 더 많이 얻었었는데, 특히 경찰총수 당시에는 대마초 복용근절을 위해 많은 성원을 얻기도 했었는데, 정치꾼으로 옷을 바꾸어 입으면서 그의 신념을 180도 바꾸는 오염된 인물이 되고 말았다.


2015년 그가 재향군인담당 장관으로 재직할때, 재향군인회원들이 많은 신체적 고통을 받는것을 보면서, 대마초를 조건을 걸어, 합법화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실토했다.  정치꾼이 되면서 그의 신념이 유권자의 표의식을 염두에 둔 제스쳐였는데, 앞으로 두고 볼일이다.

대마초 애용을 주장하기로 유명한 Dana Larsen씨는 주장하기를,  Fantino씨가 대마초 시장에 뛰어 들기로 결정한것은, 정말로 "유치하고 절대로 용납안돼는 추잡한 행동이다"라고 독설을 퍼부어 대고 있다.  그의 후임자 토론토 경찰총수를 지냈고 은퇴후 자유당에 뛰어들어 현재 Scarborough 지역에서 연방의원직을 하고있는 Bill Blair씨역시 방법은 다르지만, 대마초 합법화 지지로 정치꾼으로서의 변절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실망이다. 

지금 캐나다의 많은 젊은이들은 물론이고, 기성세대들도 많이 그동안 마약으로 취급되여온 대마초를 숨어서, 피우곤 했는데, 이제는 마음놓고 상점에 가서 구입할수 있어, 커가는 어린 아이들을 양육하고 있는 부모들의 마음은 더 무겁고, 두려워 질것 같다. 왜 마약을 합법화 시켜야 하는지, 그 당위성을 이해할수없다.

그렇치 않아도 청소년들 사이에서는 마약때문에 부모들 고통이 무척 커지고, 심한 경우에는 집안에 풍파가 
발생하고 가정이 깨지는 경우까지도 있다. 마약 단속은 국가에서 책임지고 지속적으로 시행해서, 주고 사춘기 어린생명들을 보호해도 모자랄판인데, 그위에 대마초까지 합법화 시킨 연방 자유당 정부의 정책으로 청소년들은 그유혹에 더 쉽게 빠지게 됨으로 사회는 더 불안해지게됐다.

의학용을 사용하게해서 치료를 한다고 하는데..... 그말을 믿을 사람은, 대마초를 합법화 시키는데 동조하는 마약중독자들 외에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많은 유권자들이 General Election이 Call 됐을때 냉소를 던지는 이유중의 하나인것 같다.  BBC 의 비꼬는듯한 내용의 아래의 기사를 읽어 보자.

As Canada moves towards legalising recreational cannabis, there's a surprising group of entrepreneurs jumping into the market: cops and politicians. 
In 2015, former Toronto police chief Julian Fantino was "completely opposed" to marijuana legalisation and supported mandatory jail time for minor cannabis offences.
Mr Fantino, who was also a Cabinet minister in the former Conservative government, criticised the now governing-Liberals' plan to legalise the drug, saying it would make smoking marijuana "a normal, everyday activity for Canadians". 
In November, along with former RCMP deputy commissioner Raf Souccar, he opened Aleafia, a "health network" that helps patients access medical cannabis. 
He also had a change of heart on legalisation, telling the Toronto Star newspaper he now supports it as long as it keeps pot away from children and criminals. 
In an interview with the Canadian Broadcasting Corporation, he said his 2015 comments were made "in a different era". 
Mr Fantino said his turning point on medical marijuana came when he was minister of veterans affairs and met ex-soldiers who relied on it. 
Marijuana activists who have fought against prohibition for decades - and sometimes faced subsequent criminal charges for their activities - were angry over Mr Fantino's reversal on pot. 
Prominent cannabis advocate Dana Larsen called Mr Fantino's decision to enter the market "shameful" and "unacceptable".
"I would not buy from those people," he says, adding he would tell other marijuana users to do the same. 
There is also concern the pot counterculture that flourished for decades will be elbowed out of a likely multi-billion dollar industry by a new corporate sector. 
Mr Fantino is arguably among the more controversial entrepreneurs to join the "green rush". 
But a number of high-profile former police officers and politicians have jumped into the industry in recent years, including Mr Fantino's Aleafia colleague and fellow ex-MP Gary Goodyear, former Ontario premier Ernie Eves and former deputy Toronto police chief Kim Derry. 
Medical cannabis has been legal in Canada since 2001.
The industry got a boost in 2013 when federal government regulations shifted to allow licensed commercial producers to grow, package and distribute medicinal cannabis to patients. 
Registered patients have also skyrocketed from 24,000 in June 2015 to more than 200,000 in June 2017. 
Many of companies supplying that market have plans to expand into the recreational product when the product is legal next summer. 
In December, the federal statistics agency estimated Canadians consumed an estimated C$5bn ($3.8bn; £2.9bn) to C$6.2bn worth of marijuana in 2015. Canadians spend about C$7bn a year on wine.
The government is pitching the legislation winding its way through Parliament as a way to keep pot out of the hands of minors and to undercut organised crime.
Derek Ogden spent more than 25 years with the Royal Canadian Mounted Police, including as head of the force's drug squad. 
He understands the frustration of activist watching the people they battled for decades now entering the industry.
"There's absolutely no way Canada would be in this position right now as far as taking steps to legalise had it not been for the work that the activists did," he says. 
But Mr Ogden, who now runs National Access Cannabis, a consultancy that helps patients access medical marijuana, says it's no surprise that ex-cops are in demand.
Licensed producers are hungry for people with security experience who can get clearances and who understand Canadian drug laws.
"One of the ideal groups of candidates to slide into those positions were former law enforcement personnel," he says.
Mr Ogden himself got into the business around 2014, when Canadian and American producers hired him to consult on security protocols. 
His nascent consulting company was "overwhelmed" by the demand.
Mr Ogden no longer believes that people who use medicinal cannabis are simply doing so "to avoid the legal implications" of using the drug recreationally. 
He had an "aha moment" after meeting a respected physician who relied on cannabis during a bout with cancer. Mr Ogden now uses it himself for a chronic health issue. 
He concedes changing his mind on its recreational use was "a tougher one". 
Former British Columbia municipal politician Barinder Rasode "grew up thinking [pot] was a gateway drug that ruined people's lives". 
Now she's president of the new National Institute for Cannabis Health and Education, which researches cannabis production and its use in Canada. 
Marijuana activists have done "an amazing job" at highlighting problems with prohibition but with legalisation on the horizon, "having many voices at the table is really, really important", she says. 
"I don't think the fact that somebody at some point had a different opinion about cannabis should exclude them," she adds. 
"I actually think their voices are extremely valuable." 
Marijuana is the most commonly used illegal drug in Canada. Almost 60% of drug offences in the country in 2016 were cannabis-related. 
Mr Larsen says he doesn't "want to put narcs in jail". But he believes police and politicians who supported prohibition and are now entering the cannabis business should admit they were wrong. 
"I want people who were victimised by cannabis prohibition - who went to jail, who had their families torn apart, who lost their children, who couldn't access medical cannabis - I want their voices to be heard," he said.


http://www.bbc.com/news/world-us-canada-42285743?intlink_from_url=http://www.bbc.com/news/topics/cywd23g0q41t/canada&link_location=live-reporting-story

Saturday, December 30, 2017

문통 좌빠들의 국가운영보면서, 옛날 박정희,박태준 두분이 너무나 그립다.

문통정부는 집권 이제 겨우 반년 조금 넘었는데, 그기간동안에 그들의 행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입만열면 거짖말로 거짖말을 덮으려고한 저질 좌빠집단들"로 정의된다.

전정부에서 대통령들은, 국가의 안보와 경제 건설을 위해서 세계의 넓은 시장을 마치 Sales President 처럼 달려가 국익을 위한 정책을 팔았으며, 북한의 위협에 대해서는, 개성공단을 폐쇄하는 강경책을 쓰면서까지, 그들의 협박과 위협을 막아냈었다.

문통은 전직 정부의 대통령과 리더들을, 요즘은 마치 조상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철천지 원수처럼, 마구잡이로 붙잡아 감옥에 가두고, 국가정책과 운영을 마치 조폭들이 패거리 싸움을 하는것 처럼 밀어부쳐, 국가를 Inferno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당장에 내년의 국가경제 동향은, 우선 수출에 먹구름이 뒤덮고 있고, 특히 그들은 재벌총수들을 마치 부를 부정축적했다는 양심불량자라는 이유를 부쳐, 출국금지시키고, 경제활동을 아예 막아 버리고 있다. 삼성의 총수는 아예 감옥에 쳐박어놓고, 손발을 아예 잘라버렸고, 여당의 추한 여자는 아예 삼성을 국유화 시켜야 한다는 공산국가에서나 있을법한 망말을 해대고 있다.

통일부의 혁신정책발표를 보면서 정말로 어이가 없다. 문빠의 나팔수, 카톨릭대 교수가 주관이 되여 발표한 정책중 한구절을 보면, 전정부 대통령의 개성공단폐쇄조치는 위헌이라는 주장을 펴고, 상대적으로 북한의 위협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언급도 없는, One sided 주장을 폈다.

"천주교신부"라는 가면을 쓰고, 종교의 자유가 없는 좌파세력의 앞잡이를 하고 있는 그의 개기름이 흐르는 얼굴을 보면 소름이 끼친다. 천주교의 전파를 위해 순교한 많은 선배신자들과 종교의 자유를 천명하는 천주교 신자들의 울부짖음이 로마교황청의 극단적인 조치가 있게 만들것으로 믿는다. 문통과 적와대 안방의 주사파들은 헌법은 있으나 마나한 존재로 깡그리무시하고 그위에 군림하면서 한국민들의 입에 자갈을 물려 공포정치로 돌진하고있다.



세계무대에서는 완전왕따를 당해, 국빈초청을 받아 방문한 중국에서는, 식사도 같이 해보지 못하고, 혼자 길거리 대중식당에가서 혼자 배고픔을 해결하는 망신을 당했고, 이보다 앞서 방문한 미국에서도 의전차를 타는데 미국측 관료들의 배웅은 없었던 초라한 대접이었다.  한국의 대통령 외교는 한국민들 먹여살리는 "수출"과 직결되여 있는데.....

그원인을 지금도 문통좌빠정부는 성공한 대통령의 중국, 미국 방문이었다고 자화자찬이다.
한마디로 잘못하고 무시당하는데는 얼굴에 철판을 깔아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태연한척하는, 시정깡패집단의 모습 그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개성공단, 박근혜 구두지시로 중단”… 北책임은 지적 안해

http://news.donga.com/Main/3/all/20171229/87946785/1

이런 대한민국의 현 문빠들의 국가통치 방향을 보면서, 5천년을 벗어나지 못했던 보릿고개의 배고픔을 없애고 오늘의 잘사는 대한민국의 경제적 Foundation을 만들어 준 박정희 전 대통령과 포항제철을, 포항만의 허허벌판에 세우고, 현시대의 제철산업에서 가장앞선 기술을 발휘하여 세계제일의 혁신기술로 사양길로 접어 들고 있는 제철산업의 든든한 기틀을 만들어논, 박태준 초대 사장이 뼈에 사무치도록 그리워지는것은, 초일류국가 진입을 눈앞에 두고 다시 좌절의 길로 회귀하는게 가슴 아파서이다.

아직 중국이 초라한 공산국가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때, 당시의 중국공산당 리더, 등소평은, 국교가 없는 한국을 향해, 한국을 적으로 생각하면서도, 그속에서 꼭 하나 부러운점은, 포항제철의 역군, 박태준같은 일꾼이 중국에는 없음을 한탄했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아래의 기사는 박정희와 박태준에 대한 여러 기사중 하나를 여기에 옮겨 놓았다.

  • 박정희와 박태준의 혼령이 한강을 내려다보며 막걸리를 마신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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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큰 일꾼 박태준, 그가 사양한다 할지라도 그에게 포스코 공로주를 단 한 주도 권유하거나 선사(膳賜)할 줄 몰랐던 대한민국 정부가 그의 죽음을 위하여 ‘마지막 예의’를 차렸으니, 그것은 서울 동작동 국립 현충원에 두세 평짜리 유택을 마련해준 것이었다. 국가유공자 묘역의 한 귀퉁이, 거기는 박정희의 유택과 이웃이다. 박정희를 그리워한 박태준. 저승의 박정희와 박태준을 이웃으로 맺어주는 과정에는 박정희의 외아들 박지만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박태준의 유택을 마련하는 일에 박지만은 아버지의 유택을 찾듯이 성심껏 뛰어다녔다.

2011년 12월 17일, 영하 10도의 차디찬 동토 속으로 들어가는 박태준을 지켜보며 한용운의 시 「님의 침묵」 마지막 연을 떠올리는 이들도 있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밤중에 ‘박태준 조각상’에 헌화 묵념하는 포스텍 학생들.
밤중에 ‘박태준 조각상’에 헌화 묵념하는 포스텍 학생들.
박태준의 ‘님’은 조국이었다. 그것도 일류국가인 조국이었다. 그 ‘님’을 만나려고 애를 태우는 그의 신념과 열정과 소원을 가장 북돋은 이가 박정희였다. 박태준이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에 인연을 맺었던 숱한 사내들 가운데 박정희는 그가 임종을 다투는 시각에도 그리운 사람으로 그의 영혼 속에 살고 있었다. 10시간에 가까운 대수술의 마취에서 깨어난 박태준이 구미에서 열리는 ‘박정희 동상 제막식’에 참석하지 못하는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비서에게 감추지 못했을 때, 늙은 환자의 가슴에는 그리움이 고여 있었다. 오죽했으면 비서가 미리 준비해둔 원고를 꺼내 읽어드리고 싶었으랴.

박태준이 박정희 동상 앞에 바치려 했던, 이제는 그의 유언처럼 남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그 유고(遺稿)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이 뜻 깊은 자리를 빛내주시는 시민 여러분, 그리고 내빈 여러분.

어느덧 저의 인생은 황혼에 와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사무치게 그리운 얼굴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고(故) 박정희 대통령입니다. 그리운 각하. 고향 사람들과 시민들이 성의를 모아 동상을 세우고 제막하는 오늘, 불초 박태준이 가슴 속에 쌓인 회한을 불러내듯이 ‘박정희’라는 존함을 불러보고, 거듭 명복을 빕니다.
영정 앞에서 하직을 고하는 박정희 대통령의 세 자녀.
영정 앞에서 하직을 고하는 박정희 대통령의 세 자녀.
돌이켜보면, 63년 전 저 태릉 골짜기의 초라한 육사 강의실에서 저는 처음으로 박정희라는 특출한 분의 눈에 띄었고, 결국 그것은 저의 운명이 되었습니다. “나는 임자를 알아. 아무 소리 말고 맡아!” 이 한마디 말씀에 따라 저는 제철에 목숨을 걸고 삶을 바쳐야 했습니다. 지난 1992년 10월 3일, 4반세기 대역사 끝에 포항제철소와 광양제철소를 완공하고 동작동 국립묘지의 영전 앞에서 임무완수 보고를 올렸습니다. 그때, “각하께서 저를 조국 근대화의 제단으로 불러주셨다”고 토로했습니다만, 박정희라는 한 사람을 조국 근대화의 제단으로 불러낸 것은 우리의 시대였고 대한민국의 역사였습니다. 또한 그것은 각하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그리운 각하.
드디어 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 경제강국으로 일어섰습니다. ‘오천년 빈곤의 대물림’을 확실하게 끝장냈습니다. 그 물적 토대 위에서 민주주의를 성장시키고, 문화를 꽃피우고, 평화통일을 추구하고, 복지사회를 다시 설계하고 있습니다. 정치 후진성, 청년실업, 남북관계 등 거대 과제들을 안고 있지만, 우리의 역량과 자신감은 얼마든지 해법을 구할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왼쪽)과 박태준 회장.
박정희 대통령(왼쪽)과 박태준 회장.
문제는 지도력의 위기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과 다름없었던 조국 근대화의 성공 비결은, 현명하고 근면한 국민과 사심 없고 탁월한 지도력이 좋은 짝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21세기 대한민국은 국민의 역동성과 다양성을 ‘성숙한 사회’로 나아가는 힘으로 승화시킬 지도력을 부르고 있습니다. 시민의 이름으로 세운 이 동상은 하나의 기념물이 아닙니다. 한국사회에는 여전히 ‘박정희 대통령’의 공과(功過)를 따지는 시비가 있지만, 무엇보다 지도력에 대하여 진실로 고뇌하는 사람은 여기에 와서 사색해야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제 조국 번영, 민족 중흥, 민안(民安) 복지의 영원한 길잡이로서 여기 생가 곁에 서 계시는 것입니다.

각하께서 가족과 함께 포항제철을 방문하신 시절에는 아리따운 아기씨였던 맏따님이 어느덧 이 나라의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지도자로 성장해 있습니다. 참으로 장하고 자랑스러운 그 모습을 통해 한편으로는 세월이 참 빠르다는 사실도 깨닫게 됩니다. 각하, 이제는 저의 인생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재회하여 막걸리를 나누게 되는 그날, 밀리고 밀린 이야기의 보따리를 풀어놓겠습니다. 며칠은 마셔야 저의 이야기를 어느 정도는 마칠 것 같습니다. 부디 평안히 기다려 주십시오.

아마도 박정희의 혼령과 박태준의 혼령은 밤에 짝을 지어 마실 나가듯이 가끔씩 동작동 현충원을 빠져 나와서 ‘한강의 기적’의 추억을 더듬어볼 수 있는 어느 호젓한 자리에 앉아 막걸리 잔을 기울이곤 할 것이다. 한 번쯤은 국가도 민족도 다 덮어두고 이런 소박한 대화를 나누기도 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요새 막걸리는 우리 때하고는 맛이 많이 다른 거 같은데.”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는 막걸리도 아껴야 했으니 물을 엄청 타지 않았습니까? 요새는 물도 안 타는 데다 각하가 그렇게 금했던 쌀로 막걸리를 만든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아, 맞아. 그렇군, 그래.”

이러고는 둘이서 누구의 귀에도 들리지 않은, 그러나 밤하늘에 너울 같은 파문을 일으킬 만하게 한바탕 호방한 웃음을 날렸을 것이다. <完>
박정희 대통령(왼쪽부터), 육영수 여사, 박태준 사장의 함박웃음.
박정희 대통령(왼쪽부터), 육영수 여사, 박태준 사장의 함박웃음.



Friday, December 29, 2017

왜 "징기스 칸"대제의 무덤은 발견되지 못하고 미궁으로 빠져있는가? 어쩌면 몽골인들의 마지막 자존심때문에?


몽골리안들은 그들의 자랑인 "징기스 칸"대제의 무덤이, 옛날 몽고제국의 어딘가에, 수많은 보물들과 함께 묻혀 있을것으로 생각은 하면서도, 그무덤의 위치가 발견되지 않고, 지금처럼 전설로만 남아있기를 원하고 있다고 한다.


옛 몽골에 대한 이야기, 즉 영토가 무진장하게 컸었다는 역사적 얘기는 너무나 크게 부풀려진 전설일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사람들이 왕래할수있는 길은 물론 없었고, 사람들이 거주하는 빌딩들도 없었고, 다만 끝없는 하늘과 마른 초원과 찬바람만 윙윙거리는 벌판뿐이었다.  

우리 일행은 한잔의 소금기있는 우유가 섞인 차(Tea)한잔으로 목을 추기면서, 뛰어다니는 말들과 염소들을 스냅사진들로 찍기위해 그들 특유의 원형텐트에서 생활하는 몽골유목민의 가정을 방문했다. 가끔씩은 몽골의 Omnogovi 주의 끝없는 벌판을 차로 달리면서 잠시 쉬기를 끝도없이 하면서, 나는 생각하기를 이렇게 넓은 벌판을 말로 달렸을 것이라는 상상을 하는게 믿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이지역은 "징기스 칸" 대제가 말을 타고 전세계를 점령했었던 몽골나라가 아니던가. 역사는 수를 셀수도 없이, 납치,처참한 혈투,사랑 그리고 복수로 점철되여 있다. 그것이 역사이고, 전설은 그의 죽음과 함께 시작한다.

여러분들은 이런점을 생각해 볼수도 있을 것이다. 징기스 칸

.지구상에서 가장 막강했던 군대는 대륙의 어디쯤에서 호령했었을까?Where the Earth’s mightiest army roamed 
6천년 전통의 몽골 Mongolia’s 6,000-year tradition
.허허벌판의 사막에 있었던 오아시스가 흔적도없이 사라져가고있다점.
A disappearing desert oasis 


징기스 칸의 시대에는 그의 영토는 태평양에서 부터 서쪽으로 카스피안해(Caspian Sea)까지였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죽음에 임박하여 엄명하기를 무덤은 아무도 모르게 비밀로 해줄것을 당부했었다고 한다. 죽음을 슬퍼한 병사들은 그의 시체를 그의 고향 몽골로 옮기면서, 앞에 길을 막으면서 걸리적 거리는 자들은 모조리 몰살시켰다고 한다.  병사들은 마침내 장례를 치른후 1,000마리의 기마병정들은, 무덤의 주변에 흩어져 있는 흔적들을 없애기위해 그위를 달리면서 남아있던 흔적을 완전히 없앴다고 한다.  그후로 800년이 지났지만, "징기스 칸"의 무덤은 그흔적조차 없다.



징기스 칸은 단순히 몽골제국의 위대한 영웅이다.  그러나 서방세계에서는 그가 정복한 광활한 점만을 생각한다.  그러나 몽골사람들은 그가 정복한것 외에 더 크게 생각하는것은 그가 창조해낸것을 더 중시한다.
몽골제국은 동양과 서양을 연결시키면서, 실크로드를 번성시킨것이다.

그의 통치는 외교의 면책권과 종교의 자유 개념으로 고이 간직되고 있는 셈이다. 또한 그는 의지할만한 
우편제도와 종이화폐를 사용하는 제도의 기초를 만들었다. 징기스 칸은 단순히 세계를 정복하여 지배한것뿐만이 아니고, 그는 정복한곳에 문명의 개념을 전파했다고 볼수있다.


Foreign-led expeditions have pursued the grave through historical texts, across the landscape and even from space ‒ National Geographic’s Valley of the Khans Project used satellite imagery in a mass hunt for the gravesite. But most interest in locating the tomb is international; Mongolians don’t want it found.
It’s not that Genghis Khan isn’t significant in his homeland ‒ quite the reverse. His face is on the money and on the vodka; he probably hasn’t been this popular since his death in 1227. So it can be difficult for outsiders to understand why it’s considered taboo to seek his grave.
Genghis Khan did not want to be found 
The reluctance is often romanticised by foreign media as a curse, a belief that the world will end if Genghis Khan’s tomb is discovered. This echoes the legend of Tamarlane, a 14th-Century Turkic-Mongolian king whose tomb was opened in 1941 by Soviet archaeologists. Immediately following the tomb’s disturbance, Nazi soldiers invaded the Soviet Union, launching World War II’s bloody Eastern Front. Superstitious people might call that cause and effect.
But Uelun, my translator, was having none of it. A young Mongolian with a degree in international relations from Buryat State University in Ulan-Ude, Russia, she did not seem superstitious. In her opinion, it is about respect. Genghis Khan did not want to be found.

“They went through all that effort to hide his tomb,” she pointed out. Opening it now would violate his wishes.
This was a common sentiment. Mongolia is a country of long traditions and deep pride. Many families hang tapestries or portraits of the Grand Khan. Some identify themselves as ‘Golden Descendants’, tracing their ancestry to the royal family. Throughout Mongolia, the warrior remains a powerful icon.


The search for Genghis Khan’s tombBeyond cultural pressures to honour Genghis Khan’s dying wish for secrecy, a host of technical problems hinder the search for his tomb. Mongolia is huge and underdeveloped ‒ more than seven times the size of Great Britain with only 2% of its roads. The population density is so low that only Greenland and a few remote islands can beat it. As such, every view is epic wilderness. Humanity, it seems, is just there to provide scale: the distant, white curve of a herdsman’s ger, or a rock shrine fluttering with prayer flags. Such a landscape holds on to its secrets.


Dr Diimaajav Erdenebaatar has made a career overcoming such challenges in pursuit of archaeology. Head of the Department of Archaeology at Ulaanbaatar State Universityin Mongolia’s capital city, Dr Erdenebaatar was part of the first joint expedition to find the tomb. The Japanese-Mongolian project called Gurvan Gol (meaning ‘Three Rivers’) focused on Genghis Khan’s birthplace in Khentii Province where the Onon, Kherlen and Tuul rivers flow. That was in 1990, the same year as the Mongolian Democratic Revolution, when the country peacefully rejected its communist government for a new democratic system. It also rejected the search for Genghis Khan, and public protests halted the Gurvan Gol project.
Uelun and I met Dr Erdenebaatar at Ulaanbaatar State University to talk tombs ‒ specifically similarities between his current project and the resting place of Genghis Khan. Since 2001 Dr Erdenebaatar has been excavating a 2,000-year-old cemetery of Xiongnu kings in central Mongolia’s Arkhangai Province. Dr Erdenebaatar believes the Xiongnu were ancestors of the Mongols ‒ a theory Genghis Khan himself shared. This could mean similar burial practices, and the Xiongnu graves may illustrate what Genghis Khan’s tomb looked like.


Xiongnu kings were buried more than 20m underground in log chambers, with the sites marked above ground with a square of stones. It took Dr Erdenebaatar 10 summers to excavate the first tomb, which had already been hit by robbers. Despite this, it contained a wealth of precious goods indicating the Xiongnu’s diplomatic reach: a Chinese chariot, Roman glassware and plenty of precious metals.
Dr Erdenebaatar took me to the university’s tiny archaeology museum to see the artefacts. Gold and silver ornaments were buried with the horses sacrificed at the gravesite. He pointed out leopards and unicorns within the designs ‒ royal imagery also used by Genghis Khan and his descendants.
There already aren’t enough lifetimes for this work ‒ history is too big 
Many believe Genghis Khan’s tomb will be filled with similar treasures gathered from across the Mongol Empire. It’s one reason foreign interest remains strong. But if the Grand Khaan was buried in the Xiongnu style, it may be difficult ‒ if not impossible ‒ to know for sure. Such a tomb could be hidden by simply removing the marker stones. With the main chamber 20m down, it would be impossible to find in the vastness of Mongolia.
When I asked Dr Erdenebaatar if he thought Genghis Khan would ever be found, he responded with a calm, almost indifferent, shrug. There already aren’t enough lifetimes for his work. History is too big.
A possible lead in a forbidden locationFolklore holds that Genghis Khan was buried on a peak in the Khentii Mountains called Burkhan Khaldun, roughly 160km north-east of Ulaanbaatar. He had hidden from enemies on that mountain as a young man and pledged to return there in death. Yet there’s dissent among scholars as to precisely where on the mountain he’d be ‒ if at all.
“It is a sacred mountain,” acknowledged Dr Sodnom Tsolmon, professor of history at Ulaanbaatar State University with an expertise in 13th-Century Mongolian history. “It doesn’t mean he’s buried there.”
Scholars use historical accounts to puzzle out the location of Genghis Khan’s tomb. Yet the pictures they create are often contradictory. The 1,000 running horses indicate a valley or plain, as at the Xiongnu graveyard. Yet his pledge pins it to a mountain. To complicate matters further, Mongolian ethnologist S Badamkhatan identified five mountains historically called Burkhan Khaldun (though he concluded that the modern Burkhan Khaldun is probably correct).  
Theories as to Genghis Khan’s whereabouts hang in unprovable limbo 
Neither Dr Tsolmon nor I could climb Burkhan Khaldun; women aren’t welcome on the sacred mountain. Even the surrounding area was once closed to everyone but royal family. Once known as the Ikh Khorig, or ‘Great Taboo’, is now the Khan Khentii Strictly Protected Area and a Unesco World Heritage site. Since achieving this designation, Burkhan Khaldun has been off-limits to researchers, which means any theories as to Genghis Khan’s whereabouts hang in unprovable limbo.
Honouring a warrior’s final wishWith the tomb seemingly out of reach, why does it remain such a controversial issue in Mongolia?
Genghis Khan is simply Mongolia’s greatest hero. The West recalls only what he conquered, but Mongolians remember what he created. His empire connected East and West, allowing the Silk Road to flourish. His rule enshrined the concepts of diplomatic immunity and religious freedom. He established a reliable postal service and the use of paper money. Genghis Khan didn’t just conquer the world, he civilised it.
Genghis Khan didn’t just conquer the world, he civilised it 
He remains to this day a figure of enormous respect ‒ which is why Mongolians like Uelun want his tomb to remain undisturbed.
“If they’d wanted us to find it, they would have left some sign.”
That is her final word.

Thursday, December 28, 2017

한강 기적의 나라에서 위안부의 나라로 - 누가 이렇게 만들고 있나?


요즘의 좌빠 문통 정부와 한국 사회와 여의도 정치꾼들의 하는짖거리들이, 나라를 말아먹는,
세계의 웃음거리를 만들고 있는, 어설픈 각설이 타령도 아니고, 그렇타고 의리있는 깡패집단의 모양새도 아니고, 입만 열면 거짖말을 다시 거짖말로 덮어서, 그순간만 넘기는, 적와대와
정부의 망국적 이적행위를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에, 친지가 보내온 카톡을 여기에 옮겼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1/08/2018010802457.html#bbs


지난 27일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제1315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 및 위안부 피해자 추모제에서 정대협 관계자들이 올해 세상을 떠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 영정사진 앞에 꽃을 놓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지난 27일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제1315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 및 위안부 피해자 추모제에서 정대협 관계자들이 올해 세상을 떠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 영정사진 앞에 꽃을 놓고 있다. 

                    기적의 나라에서 위안부의 나라로
              박정희는 등소평의 스승문재인은 시진핑의 따까리
옛날의 한국은 기적의 나라였다아시아 국가들과 아프리카의 많은 국가들이 한강의 기적을 이룩한 비결을 배우려고 새마을운동에 대한 학습들을 했다새마을운동이 한국의 정신을 상징하는 금박의 신분증이었고자랑스런 수출품이었다박정희는 중국의 영웅 등소평의 스승이었지만 문재인은 시진핑으로부터 괄시받는 시진핑의 따까리가 됐다.

             할머니들만 보면 왕년의 위안부 아니었을까 상상하는 이이들
그런데 빨갱이들이 번창하면서 이 나라는 위안부의 나라가 됐다조선 땅의 어디를 가나 소녀상이 있고소녀상을 쓰다듬고 비싼 목도리 해조고 담요로 덮어주는 요사 떨고 사삭 떠는 인간들이 있다지나던 아이가 묻는다, “엄마우리 할머니도 위안부 했어나도 이 담에 저렇게 대우 받아야지
하늘의 은하수들이 한 없이 입을 조잘댄다전국방방 곡곡에 의자 놓고 앉아 있는 소녀들도 한없이 조잘대고 있다내 귀에는 이렇게 들린다. “그래도 100년 전의 일본인들은 병신 쪼다 같은 조선인들보다야 많이 잘났지그치지금 빨갱이들 하는 짓들 좀 봐옛날에 조선이 먹힌 것도 저런 쪼다 같은 인간들 이 조정을 차지하고 있어서 망했던 거야맞아 맞아바로 그거야

소녀상을 청순함의 로고로 만들려면 성에 대해 가장 문란한 나라가 한국이라는 오명부터 벗겨라
언론들에 보도된 통계로는 한국의 남녀들이 세계에서 최고로 으뜸가는 성 애호기요 성 도락가들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미국에 가면 매춘하는 한국여성이 세계에서 으뜸으로 많이 있단다동남아에 가면 한국남자들이 위안남이 되어 돌아다닌다필리핀에서는 성을 즐기다 다발로 잡힌 한국남자들이 5년 이상의 징역형을 받았다 하지 않는가 

옛날의 금송아지도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금송아지는 못 내놓을 망정 겨우 위안부인가통계 수치를 보면 지금의 한국은 지금의 일본에 비해 성에 깨끗하지 못하다소녀상을 청순하게 미화시키려거든 먼저 한국남자 한국여자들이 해외에 나가 부리고 있는 추태부터 적폐로 여기고 청산해야 할 것이다.

                                소녀상 자꾸 만들어 내는 이유

소녀상을 자꾸만 만들어 내는 빨갱이들에게는 시들지 않는 종교가 있다. “한국은 태어나서는 안 될 더러운 나라이기 때문에 망가트려야 한다는 종교다나는 생각한다세계인들이 부러워하는 한강의 기적그 기적을 이룩한 존경스런 나라를 위안부 나라로 추락시키는 자들이 바로 그런 빨갱이들이라고.
                    국가 간 맺은 협정다시 하자는 놈들이 사람자식들인가?

오늘 위안부 TF와 정부가 동시에 나서서 일본과 맺은 협정을 무효화하고 재 협상해야 한다고 했다개인 간의 구두 약속도 지켜야 하는 것이 도리요 젠틀맨십이다아무리 불리한 약속이라도 지키는 사람만이 인간 대접 받는다하물며 국가와 국가 간의 약속을 깨자는 인간들이 도대체 사람자식들인가국가는 연속성(Continuity)이 있어야 한다정권이 바뀌어도 국가 간의 약속은 철저히 지켜야 국가로서의 자격이 있는 것이다.

100년 전에도 이런 거지같고 짐승같은 인간들이 정치를 했기에 일본으로부터 멸시당하고 먹힌 것이다. 100년 전 조선이 일본에 먹인 이유가 무엇인지 가장 웅변적으로 말해주는 장면이 빨갱이들이 지금 벌이고 있는 병신 짓들이다아베가 일본을 올림픽에 참가시키면 그야말로 쓸개 빠진 인간일 것이다아베가 불참 선언하면 트럼프도 선언한다트럼프는 아베와는 동맹이고 문재인과는 적이다.

Tuesday, December 26, 2017

영화 'Sound of Music"의 셋째딸,Heather Menzies-Urich,뇌암으로 사망. 인생무상.

영화 "Sound of Music"처럼 전세계인들, 특히 50대 이후의 사람들에게 친숙한 영화는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Von Trapp의 일가족이 알프스 정상을 넘어 자유의 나라로 탈출하는 장면, 
말괄량이 딸들과 어울리려고 노력하는 새엄마 Julie Andrews.

오래되여 지금은 다 기억 못하지만, 4딸들의 새엄마 골려먹기등등

4딸들중에서 셋째로 출연했던, Heather Menzies가 어제 향년 68세의 삶을 살고 하늘 나라로 떠났다는 안스러운 뉴스가 있었다.



그녀의 영화속의 셋째딸 이름은 Louisa  Von Trapp 였었다. 그녀의 부고 소식은 Musical's creators, Rogers and amp Hammerstein로 부터 나왔다.

4주전에 건강진단에서 그녀는 뇌암으로 판명됐었는데, 영화의 한장면처럼, 크리스마스 이브에 그녀의 아들, Ryan이 그렇게 발표한것이다.  그녀는 또한 배우인동시에 발레리나로도 활동했었다고 한다.

그녀는 원래 Toronto 에서 태어나 영화에 출연했을때는 15세의 발랄한 소녀로, 1965년도에 이영화는 제작되여 무려 10개의 오스카상을 수상하기도 했었다.  그녀는 이영화에서 3째 딸로 출연하여 인기를 독차지 했었으나, 그후 TV와 다른 영화출연에서는 크게 인기를 끌지는 못했었다고 한다.

그녀는 23세 The Tender Trapp이라는 이름으로 PlayBoy잡지에 Nude Model로 나오기도했었는데, 이유는 Scotland에서 이민온, 장로교신자였던 그녀의 부모의 참담한 결정으로 그러한 혐오스런 일을 했었다는 실토를 하기도 했었다.

1975년도에 영화감독 Robert Urich와 결혼해서 살았고, 2002년도에 남편과 사별하여 혼자 살아왔었다.

그녀의 죽음 소식은, 같은 영화속에서 Von Trapp의 큰딸 Liesl이 죽은지 14개월만에, 이어진 슬픈 소식이었다.

해마다 이맘때면 Sound of Music 영화가 방영되곤 했었는데, 이번에도 TV에 방영된다면, 다시한번 꼭 보아야겠다.  


Heather Menzies-Urich, who played Louisa Von Trapp in The Sound of Music, has died aged 68.
Her death was announced by the estate of the musical's creators, Rodgers & Hammerstein, on Monday.
She was diagnosed with brain cancer four weeks ago and died on Christmas Eve, news site TMZ quoted her son Ryan as saying.
"She was an actress, a ballerina and loved living her life to the fullest," he told TMZ.
Born Heather Menzies in Toronto, she was 15 when the musical film was released in 1965. It went on to win 10 Oscars, including best picture.
She played the mischievous third Von Trapp child Louisa, but her later television and film appearances did not hit the same heights.

At 23, she posed nude for Playboy magazine under the headline The Tender Trapp, a decision she said horrified her Presbyterian parents, who were originally from Scotland.
She married film producer Robert Urich in 1975, but he died in 2002.
Among those to pay tribute were Kym Karath, who played Gretl in the film.
"Heather was part of 'the family'," Ted Chapin, of the Rodgers & Hammerstein estate, said.
"Heather was a cheerful and positive member of the group, always hoping for the next gathering. We are all lucky to have known her, and she will happily live on in that beautiful movie. We will miss her."
Her death comes 14 months after that of Charmian Carr, who played the eldest Von Trapp daughter Liesl.



http://www.bbc.com/news/entertainment-arts-424796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