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January 26, 2012

80년후의 나는 어떻게 보여질까? Time Capsule의 발견을 보면서...


내가 살고 있는 Toronto의 다운타운 중심가에는 지금은 역사적 유물로 지정된 Maple Leaf Gardens 경기장이었던, 외부에서 볼때는 사각형으로 보이는, 별로 아름답지도 않은, 빌딩이 자리를 잡고 있다. 이경기장은 2009년도까지는 북미 Hockey League팀의 하나인 Maple Leaf팀이 Home 구장으로 사용했던 곳이다.

하키는, 캐나다사람들에게는 한국사람들이 축구하면 만사를 제치고 눈길을 돌리는것과 같은 구기종목이다. 캐나다 연방수상들까지도 현직에 있으면서 Ice Rink에서 선수들과 게임을 하는것을 자랑으로 삼는, 3살먹은 어린 꼬마들도 차량의 통행이 뜸한 자동차길에서 추운줄도 모르고 즐기는 국민운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0년대에 구쏘련의 공군기가, 300 여명 이상을 태우고 캄차카 반도상공을 날아가고 있던 KAL 007기에게 미사일을 쏘아 떨어뜨렸을때, 당시 Maple Leaf구단주이면서 반공주의자였던 Harold씨는 경기장 한복판의 천장에 달아놓은 전광판에 "Soviet Fighter Jet shot down KAL 007"라는 구호를 새겨넣은것으로도 유명세를 탔던 역사깊은 Sports Arena였다.

1999년 Maple Leaf Hockey팀이 새둥지를 찾아 떠난이후 2009년까지 비어 있던것을 Lawblaws Grocery Co.와 Ryerson University가 공동으로 사들여 내부수리 공사를 해왔는데, 이번에 Arena정문 안쪽의 바닥에서 1931년도에 묻었던 Time Capsule Box를 발견하여, 건축당시의 사회상을 유추해볼수 있는 좋은 자료를 재공해 주었었다. 정확히 그 Box를 땅속에 묻은지 80년만에 세상빛을 다시 보게 된 것이다.

1931년 당시에는 미국이 경제공황으로 북미대륙의 모든 사람들이 살기가 어려워하던 때였었다고 한다. 그런때 당시 Maple Leaf Hockey팀의 구단주였던 Conn Smythe씨는 얼마나 부자였기에 당시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웠던 큰 빌딩, 그것도 경기장을 지었었을까? 그러면서도 후세 사람들이 언젠가는 볼수 있을것이라는것을 염두에 두고, Time Capsule을 만들어 묻었을까?를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을수 없다.

크기는 겨우 가로 30센티미터, 세로20센티미터, 높이 20센티미터의 조그만 구리상자여서 많은것이 그안에 있지는 않았지만, 그나마 몇개 안되는 품목중에서, 여자들 목걸이에 장식용으로 부착하는 크기의 상아로 만든 미니 코끼리가 그안에 들어 있는 이유와 목적이 뚜렷히 밝혀지지 않고 있어, 고고학자들과 전문가들 그리고 캐네디언들을 멍청하게 만들고 있음에, 그것도 불과 80년전에 일어났던 사건(?)이었는데....수만년전에 있었다던 공룡이나, 지구상의 대륙이 원래는 하나였는데 지각변동으로 벌어져 바다와 대륙으로 나뉘어 졌다고 그럴듯하게 씨나리오를 써낸, 고고학자(?)들의 주장을 더욱 믿을수 없게되버린 내자신이 자랑(?)스럽게 여겨지는 사건이기도 했다.

보통사람으로 태어나서 보통사람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나자신을 여기에 대입해 보았다. 80년이 지난후의 나에 대한 흔적을 잘은 몰라도, 세상사람들은 물론이고 나의 후손들도 기억못하고, 바람에 흩날리는,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미세한 먼지 한조각쯤으로 흘러가 버리는 존재일것이다. 거기에 비한다면 상아로 만든 코끼리는 수천만배나 더 큰 뚜렷한 형상인데도, 그래서 세상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형상인데도, 거기에 담긴 뜻을 모른다는 현실에 나를 비추어 볼때, 행여 후손들만이라도 기억해 줄것을 희망하고 싶다는 나의 바램은 너무나 큰 욕심일것만 같다. 어쩔수 없는 보통사람으로서의 순박한 꿈이라고 해두자.

지구상의 몇십억되는 인간들은, 몇명을 제외하고, 나처럼 그렇게 왔다 갔다는 흔적을 남길 엄두도 내지 못하고 세월따라, 시류따라 살다가 때가 되면 먼지로 분해되여 영원속으로 사라져 버린다는것을 오늘 이 Time Capsule을 보면서 터득했지만, 뭘 얻겠다고 발버둥을 치고 마음 조리면서 앞만보고 달려왔나를 곱씹어 보는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다 부질없는 욕심인것을 깨달은것 같지만, 이미 쏘아놓은 화살 아닌가.


CP24뉴스에 실린 관련 기사를 옮겨 여기에 싣는다.

Maple Leaf Gardens 보수공사중 Time Capsule상자발견.

Time Capsule 상자안에는 상아(Ivory)로 만든 미니 코끼리, 4개의 신문(Toronto Daily Star, The Globe, The mail and Empire 그리고 The Evening Telegram)으로 1931년 9월 21일자이다.

신문기사의 주요내용은 영국의 통화제도에 대한 염려와, 캐나다의 실업율에 대한 걱정 그리고 중국과 일본간의 긴장감이 커지고 있음을 소개하고 있다.

Time Capsule Box의 크기는 가로 30센티, 세로 20센티,높이20센티미터의 구리상자인데 겉에는 아무런 표시가 없었다고 한다. 이상자는 당시 Hockey Team의 소유자 Conn Smythe씨가 1931년 Maple Leaf Gardens 빌딩이 건설되면서 건물앞 이북쪽에 묻었던 것이라고 한다.

Church와 Carlton St.코너에 위치한 역사적인 실내경기장 Maple Leaf Gardens는 Maple Leaf Hockey팀이 새집을 마련하여 이사가는 1999년까지 Home 구장으로 이용 했었다. 또한 보컬구룹 The Beatles와 가수 Elvis Presley 그리고 수많은 유명 배우 가수들이 이곳 무대에서 공연을 했으며, 각종 체육행사도 열렸었던 곳이기도 하다.

2009년에 이경기장은 Lawblaws슈퍼마켙과 Ryerson 대학의 부속건물로 사용키위해 보수공사를 해왔었다. 공사를 하면서 색이 많이 바랜 Time Capsule상자를 발견한 것이다. 그외 상자속에서 나온것들은 당시 Maple Leaf Gardens의 중역들이 손수만든 빌딩디자인과 건축에 대한 상세내용이 4페이지의 편지종이에 적혀 있는것도 발견됐고, 3권의 하키경기규정집과 토론토시의 조례규정이 적혀있는 책들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Maple Leaf Gardens는 수백만명의 Canadian들에게 많은 의미를 갖고 있읍니다. 또 1931년 당시의 삶에 대한 여러가지 놀라운 기록들도 갖고 있으며 1931년도에 이 Time Capsule을 땅속에 묻을때, 80년후 Lawblaws Super Market 스토어가 들어서고, 당시에는 존재치도 않았던 대학의 부속건물로 사용되리라고 상상을 할수 있었겠읍니까?"라고 Ryerson 대학교 총장 Sheldon Levy씨가 목요일 설명 했읍니다. 또 그는 설명하기를 1931년도에는 Maple Leaf Gardens가 문을 연 해이기도 했지만, 갱단두목으로 유명했던 Al Capone씨가 형 언도를 받기도 했던 해였읍니다. 개장한날 저녁에 진행된 경기에서 시카고 Blackhwaks가 Leaf팀을 2 - 1로 누르고 승리를 장식했었읍니다.

Lawblaws와 Ryerson 대학은, 시민들에게 호소하기를, 큰 코끼리의 형상을 축소하여 상아에 조각한 의미가 무엇일까?와 또 새로 만들게 된 Time Capsule안에 집어넣을 품목을 생각해 보라고 강력히 권하고 있다.

"새 Box에 넣을 품목을 선정하기위해 캐네디언들의 의견을 경청하기를 원한다"라고 Lawblaws의 재산과 사업분야담당 부사장 Jane Marshall씨가 호소하고 있다. 이번에 발견된 1931년작 Time Capsule상자는 현재 Ryerson 대학교에 전시되여 시민들에게 관람 시키고 있다.

아래 URL을 참고 하시면 더 좋은 내용을 볼수 있을것으로 믿어 옮겨 놓았다.

http://www.cp24.com/servlet/an/local/CTVNews/20120126/012612_capsule_maple_leaf_gardens/20120126/?hub=CP24Home

Wednesday, January 25, 2012

미국 대통령의 Union Address, 내용보다는 그격식이 너무나 부럽다.


나는 매년 이맘때면 미국 대통령의 연두교서를 TV를 통해 청취하고, 상하양원의원들이 의회지붕안의 하원의원실에 미리와서 모여, 대통령이 방문하기를 기다렸다가, 시간이 되여 외처대는 의회안내자의 찌렁찌렁한 목소리가 미국의 힘이 아니겠는가?라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Mr. Speaker, the President of United States" 그Announcement가 끝남과 동시에 의회의 출입문이 열리고 대통령이 등장하여 가운데 Hall을 지나 단상까지 걸어가면서, 옆에 서 있는 의원들과 정답게 포옹도하고, 짧막한 담소도 하고....그리고는 단상에 오른다. 이모습을 나는 오랫동안 기억에 담곤 해왔다. 대통령이 서 있는 단상뒤에는 상원의장( 미국 부통령)과 하원의장이 나란히 앉아있다. 곧바로 하원의장이 좌석에서 일어나 대통령의 의회 방문을 알리는 멘트를 한다.

"Members of Congress, I have high privilage distinguished honor to presenting to you
the President of united states of America"

Floor에는 여당의원, 야당의원들이 앉아 곧 이어지는 대통령의 연설을 듣기 시작한다. 대통령의 연설내용은 때로는 장내가 떠들어 갈만큼 큰 기립박수를 받기도 하지만, 때로는 야당의원들의 박수는 고사하고 따가운 시선도 보인다. 그러나 소리를 내면서 야유를 던지는, 흔히 볼수있는 고국에서의 수준이하의 연출을 벌이는 의원들의, 대통령을 향한, 시정잡배들이나 하는 행동은 전연볼수없다.

국가정책을 발표하는 내용중, 그내용이 국익에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대목에는 여,야를 떠나서, 박수를 때로는 기립까지하여 박수치면서, 대통령을 지지한다는, 의원들의 정중한 행동은 그순간 볼때마다, 불쌍한 고국의 정치판, 특히 대통령이 어쩌다 여의도 국회를 방문했을때, 의원들이 대통령을 맞이할때 보았던, 그순간을 비교해 보곤 한다. 어쩌면 그광경들이 상대적이기 때문에 더 돋보이는지도 모르긴 하겠지만 말이다.

한국의 정치꾼들, 특히 국회의원들은,민주주의를 들먹이면서 자기네들의 주장을 펼때는, 미국의 정치판에서 돌아가는 예를 곧잘 들곤 하지만, 여야 의원들이 정중하게 모시는 미의회의 아름다운 모습을 예로 들어서 외쳐대는 소리는 아직까지는 한번도 들어본 일이없는것이다. 한번은 여의도 의사당에서 대통령이 의회로 들어서는데, 야당의원들의 상당수는 기립 하지도 않고 의자에 그대로 앉아 딴전을 피우는 꼬락서니를 보면서, 절망을 한기억도 떠오른다. 자기집에 찾아오는 잘아는 손님을 대개는 밝은 얼굴로, 문밖까지 나가서 맞이하는게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이고 정서이다. 때로는 마음속에서는 받아 들이기가 불편할수도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손님으로 온 그상대를 문전박대하는식으로 받아들이는 무례함을 범하는 경우는, 여의도 국회의사당안의 정치꾼들에게서만 보았을 뿐이다.

어제밤 대통령의 연두교서 내용은 미국민들의 눈을 번쩍이게한만큼의 특히한 내용은 없는것으로 이해 했으나,
연설문 서두에서, 이락에서 마지막으로 철수한 부대가 Andrew Airport에 안착할때, 대통령이 직접 마중나가서 반갑게 맞이한 순간의 기억을 말하면서, 그기간동안에 의회에서는 상대적으로 많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헤메이고 있었음을 상기 시키면서, 분발 할것을 촉구하는 내용의 연설에서도 의원들은 열심히 경청하고 있는 광경도 나에게는 좋게만 보였었다.

미의회의 광경을 빗대어, 한국의 정치꾼들은 열을 토하곤 하는데, 연두교서를 발표할때 맞아 들이는 의원들의 모습을 어제밤에도 보았을 것이다. 조금만 넓고, 높게 눈을 뜨고, 귀를 열어서 듣고 본다면, 대통령의 체면을 챙겨주고, 의원들 자신의 체통도 지킬수 있는 방법이, 쇠톱으로 의회안의 방문고리를 자르는, 책상위에 뛰어올라 쑈를 하는, Acrobat들이나 하는 우스꽝스러운 그런 연출은 막을수 있을텐데....

양의 가면을 뒤집어쓴 300 여명의 늑대들은, 전세계가 초점을 마추어 와싱턴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그시간에도 돌아오는 4월에 치러지게될 총선에 공천을 얻기위해, 두더지들이 즐겨찾는 어둠의 길을 바삐 돌아다니면서 돈봉투를 만들거나 돌리기에 분주했을 것이다.
암튼 미국대통령의 연두교서는 감히 세계의 정치판에 귀감이 될만한 정치행동이라고 생각된다.





http://www.cnn.com/2012/01/24/politics/state-of-the-union/index.html

Monday, January 23, 2012

한국인들, 사랑하는이의 주검을 구슬로 만들어 곁에 보관 - 장례새풍조


오늘 LA Times의 한 기사에 의하면, 한국에서는 사랑하는 가족이 죽은후에도 여러번의 또 다른 과정을 거쳐서 영원한 안식처인, 즉 우리 인생이 태어났던 땅으로 되돌아가는게 아니고, 시신이 구슬로 변하여 살아있는 가족곁에 보관 되거나, 어떤 유족은 접시나 유리그릇에 넣어 집앞뜰에 매장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인천의 한장례업자가 지난 10여년 동안에 약 1000명이 넘은 유족들로 부터 주문을 받아, 화장된 유골을 다시 번쩍 번쩍 빛나는 구슬로 만들어, 유족들이 사랑하는이의 주검을 곁에 두고, 보고 싶을때 아무때고 보면서 고인을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구슬은 흰고래에서 나오는 카비알 같이, 파란빛을 번쩍번쩍 발하고 있다고 하며, 검은 구슬도 있고, 대부분은 하얀 조약돌 크기의 구슬이라고 한다.

좁은땅에 인구는 늘고, 장지로 사용되는 묘지는 재력과 후손의 명예에 비례하여 넓게 또는 좁게, 양지바른 산자락에 모시곤 했던 오랜 전통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토지의 이용도를 떨어뜨린다는 비난을 받아 왔었는데, 이제는 바쁘게 살아가는 후손들의 손길이 미치질 못해, 묘지 관리가 어려워지고 있다는 이유가 공감대를 얻어,대체장례문화라는 명목으로 국적도, 전통도 없는, 주검의 영혼이 구슬로 변해 영원의 세상으로 보내 주는것을 막고, 살아있는 유족들의 주위를 맴돌게 하고 있는 무례함을,천박함을, 모두가 알고 있는 현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한국의 현실임을 눈여겨 보지 않을수 없었다.

조상님들의 묘지를 관리하고 있는 한 집안의 장자는, 자기 아이들에게는 자기가 겪었던 무거운 짐을 지워주지않기 위해, 그가 모시고 있던 조상님들의 묘를 다 파헤쳐, 유골을 한데모아 이를 정제하여 구슬로 만들어 집안에 보관하고 있다고 하는것은 편리함만 부르짖는 현대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의 얄팍한 인심을 보는것 같아 마음이 아려온다. 화장을 했으면 남은 재를 납골당에 모시던가 아니면 뜻이 있는곳에 뿌리는것으로 인연을 정리해야 하고, 장지를 사용하게될때는 이곳 서양의 장례문화를 본받아야 할것으로 생각된다.

언뜻 이기사를 보았을때는 기발한 아이디어 같지만, 전통에도 없는 것이고, 오직 편리함과 경제적 부담만을 염두에 둔, 천한 사람들이나 하는 못된 짖으로 보여지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더욱히나 조상님들을 극진히 모셔온 유교문화를 외국에 자랑스럽게 홍보하고, 또 외국의 관광객들에게 설명해왔던 지금까지의 자세가 모두 거짖으로 보여지던가 아니면 뿌리가 통째로 뽑혀 버리는것은 아닐까라는 깊은 생각을 떨쳐 버릴수가 없다.

또 구슬을 만드는 업자의 말에 의하면, 정제된 구슬사리는 죽은사람 각개인에 따라, 모양과 색갈들이 다르다고도 했다. 그렇치 않아도 옆집과, 옆사람과 또 관계되는 사람들끼리 서로 견주어 보고, 경쟁을 생활화 하다시피하고 있는 한국사람들의 정서로 보았을때, 한가지 분명한것은, 구슬사리의 광채나 모양을 놓고도, 사자의 살아있을때의 업적 또는 생활상과 연관 시키지 않을것이라는 보장이 없다는 점이다. 쟁점이 될것 같다.

아래의 내용은 LA Times의 기사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많은 한국인들은 사랑하는이의 주검후, 화장을 하여 남아 있는 유골재를 항아리에 담아 보관하던것을, 이제는 보석같은 구슬로 만들어 접시에 담아 곁에두고, 사랑하는이들의 주검을 기억하고 있는 풍조가 번지고 있다고 한다.

구슬은 조금만 조약돌 크기로, 목걸이에 사용되는것이 아니고, 유족들은 접시나 유리 그릇에 보관하여 사랑하는이의 주검을 곁에 두는데 목적이 있다고 하겠다.

한미망인은 돌아간 남편의 화장한 유골재를, 전문업체를 통해, 야얀고래에서 나오는 카비알 처럼 보이는 푸른 구슬로 만들어 곁에 두고 보관하고 있는데, 이에 소용된 비용은 약 1백만원쯤(미화 $900달러) 된다고 했다.
"남편을 먼저 보낸게 너무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라고 집앞뜰에 남편의 재를 이용하여 만든 구슬을 매장한 미망인 전씨는 설명한다.

그러나 비난의 소리도 만만치 않는것 같다. 그들의 주장은 죽은자의 마지막 남을 것을 필요이상으로 가공하여 욕되게 하는 짖이라고 설명한다.

이사업을 하고 있는 배재열씨와 동업자인 그의 부인과 함께, 지난 10여년 동안에 1,000 여명 이상의 유족들에게 구슬을 만들어 가족들 곁에 두게 했다고 한다.

배재열씨는 고객한분을 특별히 기억하고 있는데, 그분은 조상님들의 묘지를 돌보는 일을 해왔는데, 이같은 무거운 짐을 자기 아이들에게는 지워주고 싶지않아, 조상님들의 묘지를 파내어 유골을 한데모아 구슬을 만들어 지금은 집에 모셔두고 있는데, 가족들이 모든 조상님들을 아무때고 만나볼수 있다고 한다.

지금 한국의 장례문화의 변화를 보면, 2010년도에는 약 70%정도가 화장을 하고 있는데 이는 10년전에 비해 약 두배 이상으로 묘지대신 화장을 했다는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화장된 유골재는 대부분 납골당에 모시고 있으나,일부 유족은 유골재를 다시 매장하기도 한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URL을 참조 하시면 됩니다. 감사.

http://www.latimes.com/news/nationworld/world/la-fg-south-korea-death-beads-20120122,0,2686922.story

Yeremko Ridley Park Area Walk in Mount Nemo(Jan.21st,Saturday)













살을 애이는듯한 살벌한 추위를 포함한 바람은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듯 잠잠하고, 눈쌓인 Trail을 따라 발걸음을 내디딜때는 마치 양탄자위를 걷는 사뿐함 마져 느껴질 정도로 온화하다. 전체 7명의 아담한 산행 식구들. 아침 새벽의 강추위를 털어내고, 산행을 위한 준비를 한다는것은 상당한 Power를 요구한다는것을 항상 느낀다. 조금전 길가에 준비된 Parking lot에 차를 주차하고 차에서 내릴때만 해도 몸이 움추러 들정도로 마음은 사실 추웠고, 쌓인 눈위를 밟으면서 걷는것은 보통때 걸을때의 두배 세배 이상의 에너지와 소모와 주의가 필요함이 마음을 가볍게 하지는 않았었다.

어젯밤에 내렸던눈이 온천지를 덮고 있음을 이른 아침 넓은 콘도의 창문을 통해 보이는 Lake Ontario 호수가의 Marina가 있는곳의 얕은물위에 얼어붙은 얼음위에 하얗게 쌓여 있음을 보면서, 오늘 산행의 시작점인 Yeramko Ridley Park(Derry Rd.와 Twiss Rd.의 남서쪽)까지 가는데 어려움은 없을까?를 걱정 하지 않을수없는 속에서 항상 모이는 Humberbay Park West로 핸들을 돌렸었다. 대원들은 출발한 시간이 되여 2대의 차에 나누어 타고 Hwy 427과 Hwy401West를 달렸었다. 새벽의 찬공기를 가르며, 주말의 한가한 고속도로를 막힘없이 달리는 상쾌한 기분은 산행에서 즐기는 그기분 이상으로 짜릿한 맛도 느낀다.

남쪽 부분의 Bruce trail 숲속의 나무들은 대개가 단풍나무로 구성되여 있어, 이곳도 예외는 아님을 알수 있다. 쭉 하늘로 뻗은 나무들의 맨윗쪽을 때리는 바람소리는 때로는 장단을 마추어 주는듯한 강약을 나의귀에 전달해주고 있다. 꾸불꾸불 뻗어있는 Trail을 중심한 좌우로는 나무숲이지만, 더 멀리 그좌우로는 끝도없이 펼쳐져 있는 농장들이 봄 여름 가을이면 색색으로 입었던 옷들을 다 벗어 버리고, 지금은 발가벗은 상태에서 다시 옷입을 그날을 기다리고 있는것 처럼 춥게 보이곤 하는데, 오늘은 그나마 흰옷을 입혀 놓은것 같아 보는 눈과 마음이 온기를 느끼게 해주는것 같다.

농장들로 구성된 이넓은 들판의 중앙에 왜 이곳만이 숲으로 덮혀 있는가는 이제는 쉽게 그이유를 찾을수 있다. 그만큼 우리 대원들이 Trail Walk에 달인(?)이 되여 가고 있다는 증표일수도 있다 하겠다. 표면이 거의 돌짝밭으로 덮혀 있어 농장으로서의 가능성이 거의 없기에 개발을 할수없어, 오랜 세월을 두고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걷고 있는 숲으로 형성된것이다.

우리보다 앞서 걸어간 Trail Walker들의 발자욱이 선명히 쌓인 눈위에 찍혀있다. 그속을 자세히 보면 동물의 발자국도 같이 있음을 본다.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개와 함께 생활을 하면서 산행을 즐기는 Westerner들임을 짐작할수 있었다. 눈위를 조심스럽게 밟으면서 전진 하지만, 가끔씩은 눈에 미끌려 온몸을 움찔하게 한다. Crampon들을 끼고 발걸음을 떼기에 미끌려 넘어질 가능성은 없다고 하나 조심스러움은 어쩌면 따라다닌다. 그것이 지혜이리라.

눈으로 뒤덮힌 조금만 Pond가 오른쪽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지나치는 우리를 반기는것 같이 보인다. 녹음이 우거진 여름철에는 물색갈이 마치 가을철 하늘에 높이 떠 있는 코발트색같이 파랗곤 했었다. 이웅덩이는 자료를 더듬어 보면, Calcium이 풍부한 Pit로 형성되여 있다고 한다. 우리가, 특히나 나이가 들면, 칼시움을 많이 섭취 하라는 충고를 주치의들로 부터 많이 듣는데, 저웅덩이에 형성되여 있는 Calcium을 Spade로 퍼서 Back Pack에 넣어가서 필요한데로 먹을수 있다면....... 그런 엉뚱한 생각도 해본다.

몸속에서 에너지가 활발히 타고 있음을 느낄수 있다. 단단히 매였던 Jacket의 윗단추를 하나씩 풀어 제낀다. 에너지가 타서 열이 발생하면, 몸속에 있는 수숩이 끓어 피부를 뚫고 밖으로 나와 땀으로 변하는것 같다. 몸의 움직임은 가벼워지는것을 느끼고.... 나를 포함한 우리 대원들은 지금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잘 활용하고 있는것이다. 에너지를 태워서 발생한 동력을 몸전체에 공급하여, 추위를 이겨내고, 그위에 발걸음을 힘차게 내딛게 하고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계속 이어지는 Trail을 따라 이어진곳은 벌써 Twiss Rd.를 가로 지르고 있다. 이곳은 이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자주 이용하는 생명선 같은 Local Road라고 한다. 이제부터 이어지는 숲속은 Crawford Forestry Tract지역이다. 이곳은 조금전에 지나쳐온 숲속보다 더 보호가 잘되고 있어, 여름철이면 가족들이 많이 찾는곳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는 잘모르겠으나, Trail이 다른곳 보다 훨씬 넓게 형성되여 있다. 그리고 평평해서 발걸음을 마음 편하게 뗄수 있어 좋다.

이번에는 교통량이 훨씬 많은 Guelph Line을 가로 건너야 했다. 이제 부터는 Crawford Lake/Rattlesanke point conservation Area를 걷는다. 대원들에게 쉴수 있다는 희망을 주기위해, 조만 전진하면 따뜻하게 쉴수있는 쉼터가 있음을 알려 주었다. 모두가 믿어지지 않은 반응이다. 이지역에서는 다른 Trail Team들과도 조우했다. 한국분들로 보이는 팀도 보이고, 이곳 Westerner들도 보인다. 그들은 꼭 가족과 같은 개들이 동행하는게 특징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마주칠때마다 Hi, 또는 눈인사를 나누면서 좁은 길은 서로 양보도하고....대자연속을 걸으면서 터득한 양보와 Share의 실천이라고 나는 보고싶다.

아담하게 모습을 들어내고 있는 쉼터가 눈앞에 들어온다. 바로 옆으로는 Crawford Lake가 보이고....
이곳 호수는 물이 circulation이 안돼, 호수의 밑바닥에 고여 있는 물속에는 산소가 없어 이물질이 썩지 않는 특징이 있다고 한다. 가끔씩 지질학자들이 호수밑바닥에서 수집되는 옥수수 알갱이를 연구하여 발표한 내용에 의하면, 이지역은 오래전에 인디언집단촌이었음을 밝혀내고, 그들이 농사도 지었었고, 사냥도 했었음을 그들 연구하여, 재건축한 초기인디언들의 집단생활을 했던 가옥이 윗쪽 언덕에 세워져 있다.

쉼터안은 따뜻했다. 안내를 맡고 있는 여자직원에게 우리가 이곳에 들어온 이유를 밝히고 Lunch를 먹어도 괜찮냐고 물었더니 OK다.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먼저 물어보는 예의를 지켜주는것이 그녀의 존재이유를 우리대원들이 인정하고 감사해 하고 있다는 뜻을 전하고져 했기 때문이다. Back Pack속에 들어있는 점심을 꺼내 다시 에너지를 보충한다. 마호병에 담아온 따뜻한 보리차의 향이 머리를 맑게 해주는것같이 느껴진다. 한술뜨는 밥맛은 어찌 더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벽에붙어있는 Locker위에 박제되여 우리를 응시하고 있는 Crow 한마리가 마치 자리를 박차고 날아갈것 같은 자세가 힘있어 보인다.

이제는 다시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가서 짐을 풀고, 차에 올라타고 McDonald's Restaurant에 갈일만 생각하면서 걸으면된다. Senior들에게만 특별히 저렴한 가격으로 제공해 주는 커피한잔의 의미는 많은것을 생각케 해주기 때문이다. 감사.

Friday, January 13, 2012

키큰것이 죄인가. 비행기탈때 요금 더 내는 설음. 팍팍한 세상살이



서구사회에서 살고있는 보통 시민들은 물론이고, 아직 경제적으로 가난한 나라의 국민들도 대개 비행기 여행을 경험 해본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10키로 이상의 고공을 날으는 비행기안에서 창문을 통해 내려다 보는 지구의 표면은 뭐라 표현이 잘 안될정도의 환상적이고도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듯이 보여주고 있음을 누구나 느꼈을 것이다.

요즘은 비행기에 소요되는 연료값이 천정부지로 뛰어올라, Air Ticket을 구입할려면, 한푼이라도 절약해 보고져 이곳 저곳 쇼핑을 하는게 일상화 되다시피한것 까지는 이해하고 수긍할수 있겠다 하지만, 여행을 하게되면 필수적으로 같이 가게되는 Luggage의 허용무게가 절반이상으로 줄어, 심한경우에는 옛날에 구입했던 큰 가방은 쓸모가 없을 정도가 되여 버렸다. 과학은 날로 날로 발전 한다고 하는데, 발전한 만큼 인간의 생활도 편해지고, 경제적이어야 앞뒤가 맞는 얘기일텐데.... 상황은 반대로 가는것을 흔히 많이 본다.

비행기 이용승객이 지난 몇십년 사이에 몇곱절로 늘어난 만큼 비행기값도 싸져야 자유경제체제에 맞는것으로 이해를 하고 있는 나는 고개만 갸우뚱 할뿐, 굳이 그원인을 찾자면, 각나라를 통치하고 있는 정치적 지도자들의 옹졸한 정치적 사상이 선량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을 어렵게 만들고 있음으로 초점이 모아진다.

정치적으로 이념이 다르다고 전쟁을 할것 처럼, 원유(Crude Oil)생산을 중단 한다거나, 원유수송로를 차단하겠다고 위협하면, 더힘센 나라는 군사적으로 이를 저지하겠다고 으름장을 하게되면, 금방이라도 전쟁이 일어날것 처럼 분위기를 만들고, 그와중에 연료값은 천정부지로 뛰면서, 그부담을 죄없는 이용객들에게 부담시키는 악순환을 ....즉 업자들은 연료값을 하루가 다르게 인상시키면, 속담에 "뛰는놈위에 날으는놈이 있다"는 식으로, 시민들 또는 국민들의 안녕질서와 평안한 삶을 책임지겠다고 입만 열면 떠들어 대던 정부는, 얼씨구나하고 연료에 엄청난 세금을 부과하면, 업자는 정부에 지불한 이득을 다시 보상받기위해 또 값을 올리는 악순환속에서, 이제는 항공사들의 꼼수까지 등장하여 승객들을 또한번 울리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 비행기내의 서비스는 갈수록 열악해지고 있는것도 모자라, 이제는 키큰 승객들이 주로 이용하는 좌석 즉 탈출구가 있는곳의 좌석 또는 Bulkhead의 좌석은 최고 $50달러까지 더 받고 키큰 승객들에게 팔고 있다는 슬픈 뉴스가 미국의 CNN 인터넷에 떳다.

그항공사는 5시간이상을 달려가는 북미대륙에서의 비행에서, 식사도 제공하지 않는다. 미국에서 캐나다, 또는 반대로 캐나다에서 미국을 비행기 여행하는것은 분명히 국제선인데도 그들 마음데로 국내선으로 규정하고, 식사제공을 없애 버린것이다. 배고픈 승객을 위해 McDonald's에서 구입하는 싸구려 햄버거보다 더 형편없는 쌘드위치를 엄청나게 비싼가격으로 판매하고 있지만, 구입하여 먹는 승객은 거의 없는것으로 알고 있다. 연료비 상승으로, 수입을 올리기위한 궁여지책이라고 하지만, 쌘드위취를 팔아서 수입이 늘었다는 뉴스는 아직까지 들어 보지는 못했다. 그런데 오늘 키큰 승객이라고 해서 더 많은 요금을 징수하고 있는 항공사의 뉴스는 과히 충격적이다. 앞으로는 또 어떤 명목을 부쳐서 승객들의 주머니를 더 쥐어짤것인가? 비행기 제작사는 새로 제작한 비행기는 연료소비율이 20%나 줄였다고 자랑스럽게 선전하고 있지만, 비행기값이 내렸다는 소식은 없다. 답답하다.
여기에 CNN의 뉴스를 옮겨 놓았다.

"키큰것이 죄인가? 비행기값 더 내고 있다"고 불만제기

CNN - 키큰 승객이 알고 있어야 할 사항 : 즉 공간이 더 있는 탈출구쪽과 "Bulkhead"의 좌석에 앉으려면 더 많은 요금을 지불해야 한다.

그러나 Edmonton, Alberta주에 살고 있는, 6피트 7인치의 키큰 Malcolm Johnson씨는, 그곳의 좌석을 이용 하는데, 별도의 돈을 더 지불함이 없이 이용 가능토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Johnson씨는 그러한 비행기값 지불을 막기위해, 그가 주로 이용하고 있는 Air Canada를 상대로 Mission을 벌이고 있다.

그는 작년에 CTA( Canadian Transportation Agency)에 불평사항을 제출했으나, 그는 신체 장애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가 제출한 불평사항을 인정할수 없다는 통보를 지난 12월달에 받고, 이결정에 불복하여 다시 Appeal할것이라고 다짐하고 있다.

"이것은 키큰 사람에 대한 징벌일뿐입니다. 비행기안에 있는 그좌석들만이 오직 우리처럼 키큰 사람들이 이용하기에 적합한 좌석일뿐입니다."라고 그는 주장한다. 그러나 Air Canada는 이러한 주장에 명확한 답을 해주지 않고 있다.

Johnson씨는 1년에 두번정도 Edmonton에서 France를 방문하지만, 왕복비행시에는 직항이 없기 때문에 더 많은 번거로움이 있읍니다(즉 4번의 더넓은 좌석공간 확보). 그는 Extra 값을 지불하지 않고 여행을 즐겼었으나 2년전부터 Air Canada측이 규정을 바꾸어 Extra Fee를 부과 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을 바뀌었다.

Air Canada는 매비행시마다 키큰 승객의 다리를 편하게 할수 있는 그러한 좌석에 최고 $50달러까지 Up Charge를 하고 있어, Johnson씨는 결국 $200 달러를 더 지불해야만 한 것이다. 그의 부인과 깉이 여행할때면 $400달러를 더내야 하는 셈이 된것이다.

Johnson씨의 설명에 의하면 뚱뚱한 승객은, 캐나다 법에 따르면, 옆좌석을 무료로 이용하면서도 좌석한개값만 지불하는데, 키큰 승객에 대한 배려는 전연 없는것이 불만이다.
"사람들은 나에게 말하기를, 그러면 일등석을 이용하면 될것 아닌가?, 그렇치만 일등석은 10배이상 더 비싸지 않은가?. 또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조용히 입닥치고 있는게 좋을텐데... 그러면 나는 대답하기를 좋아, 그렇치만 당신들은 겨우 5피트 2인치이기 때무에 당신들에게는 문제가 될게 없을거야. 그렇치만 키큰 승객들에게는 또 다른 이야기일뿐이야" 라고 그는 설명한다.

의사의 처방을 소지했을때는 Extra Pay를 면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많은 키큰 승객들은 Johnson씨의 캠페인에 동조하기 시작했으며, 응원의 메세지를 보내고 있다.
"이메일은 매시간 저에게 전달되고 있지요" 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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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January 12, 2012

'위안부 할머니' 의 문제는 일천왕으로 부터 그원인을 찾아야 한다.( January 11th, 2011)


'위안부 할머니' 의 문제는 일천왕으로 부터 그원인을 찾아야 한다.( January 11th, 2011)

거의 70년이 흘러갔다. 해방의 감격을 맞이한 그날로 부터 계산해 보면, 정확히 67년이 흘러간 셈이다.
세계 2차대전때, 일본의 인접국 침략으로 고통과 피해를 받았었다가, 후에 독립한 나라들은 잿더미만 남아있는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
살아남기위한 호구지책이 우선하여 다른데 신경쓸 겨를없이 몇십년씩을 지내오던사이, 패전국 일본은 발빠르게 움직여, 한국전을 비롯한 인접국의 어려운 상황을 자국의 경제 발전을 이용하는데 잘 사용하여 삶의 풍요로움을 홀로 누려오면서, 선진국인양 행세를 하면서도 침략했던 한국, 중국을 포함한 동남 아시아의 여러나라에서 피해보상및 사과를 끊임없이 요구해 왔었지만, 딴전을 피우면서 무시해 버리고 21세기를 맞이했던게 지나온 과거의 실상이었었다.

같은 시기 같은 2차대전 패전국인 독일은, 침략했던 인접국에 사과를 하고 배상을 하면서 좋은 관계를 유지 해 왔었다. 지금은 동,서독이 통일되여 서로 오손도손 살면서, EU의 핵심국가들중 하나로 성장했고, 유럽과 세계무대에서 지도자 역활을 잘 감당해 내고 있는것으로 알고 있다.

동물들은 배가 채워지면, 모든 근심 걱정과 억울함을 잊어버린채 다시 배가 고파질때까지 태평성대를 누리지만, 인간은 동물과 달라서, 배고픔이 해결되면, 더많은 욕구불만해결과, 적게는 이웃과, 사회 그리고 크게는 국가간에 관계를 맺으면서 벌어졌던 나쁜일들, 즉 피해와 고통 받았던것에 대한 요구를 찾아 생각과 도전을 하게 되는 존재인 것이다.

내기억으로는 1980년대 중반부터, 2차대전때 일본의 침략과 만행으로 목숨을 잃고 피해를 본 인접국가들이 우선 배고픔의 고통을 벗어나는 경제적 발전이 이루어 지기 시작하면서, 들고 일어나 일본을 향해 피해 보상과 사과를 끊임없이 요구해 왔지만, 이를 겸허히 받아들였다는 뉴스를 접했던 기억은 없다. 반대로 경제대국의 힘을 발휘하여 철저히 무시했었고, 매년 2차대전 전범들의 영혼위패가 소장되여있는 신사참배를 공식화하고, 총리가 공개적으로 방문하여, 한국을 포함한 피해국가들을 자극함과 동시에 비난을 받아오곤 했었다.

일본의 인접국 침략은, 독일과 비교해서, 치졸하기 이를데 없음이, 그들이 보여준 행동에서, 비인간적인 만행에서 두드러진다.
일본군은 점령국의 처녀들을 강제 징집하여, 군인들의 사기진작용으로, 병사들의 막사에 처넣어 욕구해소를 하는, 놀이개로 사용하고, 헌신짝 버리듯 내팽개쳐 버리곤 했었다. 당시의 한국은 '남녀7세 부동석'이라는 사회적 가치기준이 준엄하여, 처녀는 결혼하기전까지는
울타리밖의 세상을 마음데로 나다니지도 못하게 하고, 온실속의 화초처럼 고이 자라게 해서 부모님들이 짝지어주는 신랑을 따라 새삶을 살아가게 하는, 그렇게 하는 길만이 다인것 처럼, 선량하게 살아가는 사회였었다. 이러한 삶의 터전이 어느날 갑자기 천지개벽을 당하여, 부모가 보는 앞에서 이제 막 꽃봉우리를 피울려고 하는 딸들이 군화를 신은 사내놈들에게 붙들려 가는것을 두눈으로 똑똑히 보면서 몸부림 쳐야만 했던 처절함을 당했던 부모님들과 당사자인 딸들의 삶과 심정은 더 설명이 필요 없는 지옥 그이상이었었다.

캐나다는, 일본국의 인접국 침략으로 발발한 2차 대전에 응징하는 차원에서, 벵쿠버지역에 많이 모여 살고 있던 일부 Japanese- Canadian들을 수용소에 강제수용했었고, 일부 재산도 몰수하는 조치를 취한것에 대한, 잘못을 인정하고 1980년대 중반에 연방의회에서 토론을 벌인끝에, 그후손들에게 사죄하고 피해 보상을 해준것을 기억하고 있다.

지금도 매년 때가 되면 일본은 수상이 신사참배를 했다는 뉴스가 타전된다. 그행동은 한마디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한집 딸들을 도적질 해다가 위안부로 몰아버렸던 일본국의 만행에 대한 부정을 뜻한다고 하겠다. 이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일본국민들과 정부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영화로웠던 일본제국주의의 부활을 꿈꾸는 야망이 아직도 살아 존재하고 있음으로 보여지는 증거라고 생각된다. 이문제 때문에 한국의 역대 대통령과 일본의 수상들이 열손가락으로 꼽고도 남을 회담을 해온것으로 알고 있지만, 화해와 용서의 길을 찾았다기 보다는 마음속에 더 깊은 골만 만들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본다.

일본이 2차대전의 패배를 인정하고 최종적으로 항복(Capitulation)선언문을 낭독했던 대표자는 일본의 천왕이었다. 그때의 천왕제도와 왕궁은 지금도 도쿄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으며, 일본인들의 여왕벌 역활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정부의 수뇌인 총리는 임기가 지나면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다. 정치적으로는 상징적이라고 하지만, 천왕의 말한마디는 총리의 수백마디보다 위력이, 효과가 크다고 생각될때, 2차대전시 침략의 최종승인을 한사람이 천왕이였고, 연합군의 반격에 항복을 선언한 사람도 천왕이었고, 여전히 왕궁에서 천왕의 자리를 현재도 지키고 있는 그가 직접 나서서, 피해를 준 인접국에 사과와 피해 보상을 선언하고, 특히나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천번 만번이라도 고개숙여 마음속으로 부터 깉은 사죄의 발언을 해서, 인접국과 더 나아가서는 세계의 평화를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주한 일본국 대사관 길건너에는 구리로 만든 실제여인의 크기와 같은, 강제로 끌려가 한많은 삶을 위안부로 살았던 상징을 나타내는 동상이 세워져 있고, 요즘처럼 추운 겨울에는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는 의미로, 참배하고 따듯한 옷을 입히고, 장갑(Mitten)까지도 끼워준다고 한다. 이에 신경이 쓰이는 대사관측은 이의 철거를 요구하고 있지만, 이러한 행동은 민간인들이 자발적으로 하기 때문에 정부도 어쩔수 없다는 입장이라고 한다.

일본국 천왕과 그가족들은, 이제 막 꽃봉우리처럼 곱고 예쁘게 피어나는 그들의 딸들이 강간범에게 치욕을 당했을때의 심정을 상상해 보기를 권해보고 싶다. 자위대의 최신형 폭격기를 이용하여 강간범을 찾아 그일대를 폭격을 하고도 남을 행동을 했을 것이다. 궁안의 권좌에서만 삶을 살기에 딸자식을 억울하게 공출해야만 했던 힘없는 서민들의 생활상을 어쩌면 영원히 느낄수 없이 세상을 살다 사라질 존재들이수도 있겠다 싶게 느껴지지만, 높게 둘러쳐진 울타리 밖으로 나와서 세상을 보는 용기를 보여 주시기를…강력히 권한다.

이러한 용기와 결단을 내려 진심어린 사죄와 보상을 선포하지 않는한, 일본이라는 나라는 섬나라로서의 쪼잘한 나라로 쇠락하는 길만이 그들앞에 있다는것을 머지 않아 느끼게 될것이라고 믿는다. 경제적으로는 지난해 까지만 해도 세계 제2의 강한 나라였었다. UN 분담금도 미국 다음으로 많이 내고 있지만, 그들의 위치는 어떤가? 제2의 경제대국이면서도 상임이사국 자리는 고사하고 15개국 비상임이사국에 낄수 있는 자리를 때로는 획득하지 못하는 왕따(Ostracism)를 면치 못하고 있다. 이러한 좁디좁은 섬나라 일본으로 계속 남아 살지 않기를 바랜다. 꽃같은 나이에 위안부로 징집되여 삶을 포기하다시피 살아왔던 그분들은 긴세월이 흘러, 이제는 한을 품은채 세상을 하직 했거나, 생존해 계시는분들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할머니들로 변했다. 시간이 급하다. 천왕은 이 참담함을 더이상 외면 하지 말기를 부탁하고싶다.
LA Times의 기사는 시사하는바가 크다.



http://latimesblogs.latimes.com/world_now/2012/01/japanese-occupation-of-korea-comfort-women-protests-.html

Saturday, January 07, 2012

김정은, 초능력자로 미화시킨 한잡지의 기사를 읽으면서...



왜 중국과 미국을 포함한 전서방세계가 북한의 불법적인 권력승계와 북한인민들을 굶어죽게하고 있는 독재철권통치를 하고 있는 Evil들에 대한 제재와 응징은 엄두도 내지 못한채 뒷짐지고 바라만 보면서 "마치 제발 망난이 짖만 하지 말아라"라고 두손모아 허공에 대고 애원하는것 같은 인상만 전세계에 심어주고 있음을 보면서 답답함을 느끼는것은 나만이 아닐것이다.

임기를 채우는 마지막해를 맞이하고 있는 남한정부는 한술더 떠서, 지금까지 일관되게 주장해 왔던 "천안함폭침과 연평도포격에 대한 사과를 북한측으로 먼저 받아내기 전에는 남북간의 대화는 있을수 없다"라는 정책을 손바닥 뒤집듯 엎어버리고, 무조건 돌진하는 돼지처럼 생긴 김정은에게 일방적인 화해 제스처로 남북간에 대화창구를 열도록 한후, 천안함폭침과, 연평도포격에 대한 사과를 받도록 하겠다라고 발표한 뉴스를 보면서, 도대체 어떠한 위협을 받았기에, 짝사랑하는식의 대북정책으로 추파를 보내면서, 메아리없는 되울림을 기다리고 있는가? 국민들이 허리띠 졸라가면서 국가에 바친 혈세를, 국민들의 합의도 없이 북한정부에 퍼주기만 하고, 화해는 커녕 얻어 터지기만 했던 좌파정부10년에 진절머리를 내여, 보수정부를 세워 국가방위와 국민안위를 잘 해달라고 부탁했건만, 이들역시 반격한번 못하고 얻어터지기만 하더니, 이제는 아예 좌파정권처럼 김정은정권에 빗장을 풀어 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참담함을 보면서 어느누가 조국대한민국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겠다고 나서기를 바라겠는가?

이러한 겁쟁이 정부를 보면서 진보좌파인 서울시장 박원순마져 그의 아들을 군대에 보내는게 두려워 있는빽 없는빽을 다 동원하여 방위병으로 편입시켜 동사무소에 근무하게 할 계획이라고 뉴스는 전하고 있음을 보면서, 이런식으로 간다면 나같은 생각을 갖인 교민들은 앞으로 자칮하면 조상님들을 찾아 조국을 방문할 기회마쳐 막혀 버릴지 몰라 두렵다. 60만 대군을, 국민들이 낸 혈세를 들여 양성하고, 훈련시키고 있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정부와 정치꾼들이 알고나 하는 짖일까? 항간에서는 사상적으로 남한은 이미 적화됐다는 소리를 수없이 들어왔다. 그래서 새로 지휘봉을 잡은 살찐 돼지 김정은이 명령 1호로, 남한에서 암약하고 있는 그의 심복들에게 "활동을 개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뉴스가 어찌 나만의 폐부를 찔렀겠는가. 어떻게 지금까지 그들의 도발을 지켜오면서 경제적 부를 축척하기위해 배고픔속에서 허리띠를 더 졸라매면서, 청춘을 바쳐 지켜온 조국 남한인데..... 답답하다.

오른쪽 다리에 3세때부터, 암세포가 아닌 종양이 기생하여, 90Kg까지 커져 다리를 절단해야했고, 몸을 움직일수도 없었고 또 종양때문에 잠도 잘수없었던 월남인이 한미국인 의사의 집도로 무사히, 그것도 무료로, 수술을 마치고 회복중에 있다는 BBC의 뉴스가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만약에 이런사람이 북한에 있었다면, 공화국발전에 공헌은 고사하고 식량만 축내는 암적인 존재로 처리되여 벌써 생을 마감했거나, 아니면 인민들앞에 본보기로 세워,치료대신에 폐악질을 당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수 없었다.

여기에 관련기사를 옮겨 봤다.


중국의 한 잡지에 실린 김정은에 대한 기사는 감히 그가 초능력의 소유자임을 알게하는 흑색선전(Propaganda)로 도배 되여 있음을 보았다. 그흑색선전 기사에 따르면 김정은 최고 사령관은 3세때에 자동차 운전을 배웠고, 8세때는 포장도 안된 울퉁불퉁한 길을 시속 120키로(약 75마일)의 속도로 안전하게 달렸다고 묘사했다.
십대때는 4개국어를 구사했고, 현재는 다시 또다른 3개국어를 거의 마스터하고 있다고 했다.

세상사람 모두가 꾸며낸 이야기일뿐으로 치부해 버리지만, 오직 북한에서만이 진실인양 받아들이도록 인민들을 못살게 종용하고 있는 새로운 지도자 김정은에 대한 자서전에 따르면, 그는 모든걸 금새 깨우치는 능력의 소유자요, 시인이고, 사물을 정확히 꽤뚫어 보며, 경제학자에, 군사 전략가로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신비에 싸여 있는것으로 묘사 시키는 이유는, 세계에서 오직 은둔국가로 묘사되고 있는 이북을 통솔하는 권력을 불과 3주전에 손에쥔 김정은이 초능력의 소유자임을 전세계에 알려야함이 절실하기 때문인것이라고 한다. 초능력의 힘을 갖출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가 때가 되여 권력을 잡은 그의 능력을 증명 시켜야만 될 절박함과, 또 한반도 전문가들은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탐구하고 있다.

그는 할아버지 김일성이가 즐겨 입었던, 검정색 Double-breasted 코트를 즐겨 입고 있으며, 그의 아버지가 즐겨 방문했던 군부대를 즐겨 찾고 있으며 그의 생일날에도 그러한 행보는 계속되고 있는것으로 묘사했다.
전문가들조차 실제 그의 나이가 28세, 29세 아니면 30세라고 점치는 정도로 흑막에 싸여 있고, 그의 생일날에, 지난 12월 17일에 사망한 그의 아버지 김정일에 대한 애도를 하면서, 북한은 젊은 김정은을 확실한 권력후계자로서의 승계여부를 보게될 단서를 보여줄것으로 추측만 하고 있는것 같다.

김정일의 생일은 전통적으로 북한에서는 온인민이 축하했으며, 북한정권의 창설자인 김일성의 생일날은 국가공휴일로 지정하여 축하했었다. 그러나 1월8일은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축제의 날로 선포되지 않은채 맞이하고 있다고 한다. 대신에 김정은의 생일은, 북한군최고사령관으로서의 간략한 소개만을 한채 축하하고 있는것으로 보인다.

불과 몇주전만 해도 그는 화려한 직책을 수여받은채, 권력승계를 위한 훈련에 임하고 있었던 것으로 묘사됐었다. 그후 지금은 수직상승으로 승진하여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북한군을 지휘하고 있다.

미국정부관료들조차, 지금 김정은의 가족들과, 실세인 군부실력자들과, 북한에서의 조직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나를 깊숙히 파악하지못하고 겨우 어렴푸시 조금 알고 있을뿐임을 인정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그는 아버지 김정일이 통치해왔던 스타일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것으로 알려 졌으며,
지난 일요일에는, 그의 아버지 김정일이 거의 매년 방문하곤 했었던, 105탱크사단을 아들 김정은이 방문했었다. 방문현장에서 수도꼭지의 동파여부를 직접 확인했으며, 병사들의 음식과 식사, e-library를 점검하기도 했었다. "e-library에서 컴퓨터의 활용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질문하면서,그의 아버지가 계셨더라면 그들을 바라보면서 매우 흐믓해 했을 것이다"라고 북한 중앙방송이 보도했었다.


http://www.washingtonpost.com/world/asia_pacific/for-kim-jong-eun-a-choreographed-rise/2012/01/07/gIQAizmPhP_story.html

Monday, January 02, 2012

Vinemount Conservation Area Trail Walk,2011년도 마지막 산행. 12월 31일.







Vinemount Conservation Area Trail Walk,2011년도 마지막 산행. 12월 31일.

Lunar가 2개의 보온병에 볶은밥을 정성스레 집어 넣는다. 그리고 간식으로 먹을 단감(Persimmon) 물에 씻어서 닥아낸 다음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서 두봉지를 만들어 플라스틱 봉지에 넣고 Seal을 했다. 아직 약속시간까지는 약 20여분이 남았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회원 N이 먼저와 있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다. 마음이 급해졌다.

예측했던데로 다른때 보이곤 했던 회원들이 거의 보이지 않고, 우리 부부까지 모두 5명이 나의차를 타고, Nigagar쪽으로 QEW를 40여분 달려, 능선위에 있는 주차장을 향해 가파른 언덕을 깍아 만든 길을 기어 올라갈때는 자동차도 힘이 드는양 소리를 더 질러대는것 처럼 거북이 걸음으로 달려, 목적지 주차장에 도착 했을때는 하늘은 완전 회색으로 도배되여 있었으나, 겨울답지 않게 기온은 걷기에 최적이고, 바람마져도 한점 불지 않아 다행이었다.

2011년도를 역사속으로 띄워 보내는 마지막 Trail Walk이다. 참으로 다행이다 싶은것은 금년도의 마지막 날인 31일날이 토요일이라는데, 그의미가 깊을것 같았다. R회원이 모두를 위해 윗분에게 감사와 기원을 드린후, 준비를 마치고 산행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하늘을 찌를듯 쭉쭉 뻣어 있는 나무숲은 여전하다. 지난주에 보았던 같은 그나무종류들이지만, 오늘은 웬지 그들과도 2011년도를 역사속으로 같이 마주 하면서 보낸다는 또 다른 느낌을 나무들도 알고있는양, 발걸음을 떼면서 전진 할때마다 우리를 응시하는것 처럼 보인다. 그들은 우리를 응시 하면서 어떤 주문을, 아니면 여기에 온 목적이 뭔가를 물어보는 느낌이다. 왜 힘드는 산길을 매주 토요일마다 걷느냐고?

겨울답지 않게 어제까지 엎지락 뒤지락 하면서 내렸던 가랑비에, 포근한 겨울날씨에 쌓여 있던 낙엽마져도 촉촉히 젖어 자칫 실수하면 스키를 타는것 처럼 떠날려 보낼것 처럼 8부 능선을 따라 이어진 산길을 걷는 발걸음을 미끄러지게 한다. 가볍게 보지 말고, 하잖케 보이는 그들의 존재를 조심스럽게 바라보고 대해야 화가 없을 것이라는 깊은 암시를 보내는 것으로 느끼면서, 오늘 2011년도를 역사속으로 떠나 보내는 뜻깊은 응시를 나무숲으로 부터 받게 되는것으로 느껴졌다.

칼바람과 눈사태 속에서도 본래의 모습을 잃지않고 초록색의 의연한 싱싱함을 보여주는, 바위들위에 붙어 생을 유지하는 이끼(Moss)들은 여전하다. 오늘도 푸른초록색으로 보는 눈을 시원하게 해주면서, 2011년도를 뒤로하는 이시점에서 "신년도에도, 삶에 어려움이 피곤함이 닥칠텐데 그때마다 항상 그모습 그색갈 그대로 살아가는 나를 보면서 굳굳하게 삶을 살아가라"는,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이 내옆을 스치면서 발걸음을 떼는 모습을 항상 응시하고 있다는것 처럼 내눈과 마주친다. 나무숲과 Moss들을 보면서, 깨달으면서 삶의 이치를 알게 하시는 그분의 끝없이 넓고 높은 능력과 안전하게 인도하시는 깊은 느낌을 감사한 마음속에서 질퍽거리는 산행길의 발걸음은 이어진다.

이지역은 Niagara Peninsula 지역의 안쪽으로 포도생산지이자 맛좋은 Wine 생산지로 온타리오주에서 가장 적합한 곳이기도 하다. 이제 겨울의 중간지점인 1월중순경이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값또한 비싼 Ice Wine을 생산하게 될것이다. 멀리 보이는 넓은 농장들은 전부 Grape Orchard 이다. 이지역이 포도생산지로 Wine생산지로 유명하게된 이유가 있다고 한다. 초기 포도농원 소유자들은 거의가 다 유럽의 네델란드에서 이민와서 이곳에 정착하여 포도를,그리고 Winery를 운영하여 부를 축적 했고, 지금은 그후손들이 열심히 가업을 이어받아 유명한 포도주를 만들어 내고 있는 역사가 깊은 곳이기도 하다.

지난해에는 여기에 인접한 다른 구간을 Trail Walk하면서, Winery에 들려 시음도 하고 포도주를 한병씩 구입 했던기억이 있다. 오늘도 그런 생각을 해 본다. 걷는 구간에 Winery가 있으면 말이다. 시음장에서 젊고 예쁜 금발의 여인들이 포도주잔에 조금씩 종류별로 따라 주면서 마시는 방법부터 다양한 종류의 포도주에 대해 일장 연설(?)을 할때는 이를 경청하는 회원들의 두눈이 그녀를 응시 하면서, 한모금 입안에 넣고 빙빙 돌려서 향을 음미한다음 목에 넘기면서 포도주향에 취했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생각을 하면서 다시 멀리 능선아래 펼쳐져 있는 농장을 또한번 쳐다보기도 하면서 발길을 옮긴다. 이지역의 여러 Winery가 아니면 어디서 포도주를 시음, 그것도 무료로 할수 있을까? 아마도 온타리오 주에서는 없을 것 같다. Trail Walk이 이곳을 지나고 있다는것이 오늘따라 큰 의미가 있다는것을 깨닫게 한다.

지금은 이구간에 있는 고목단풍나무에 기생하여 서식하고 있는 '영지버섯'을 보기가 무척 어렵다. 몇년전만 해도 두손을 모아놓은것 보다 더 큰 버섯들을 많이 보았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지금은 보기가 힘들다. 이곳 사람들은 'Artist's mushroom' 부른다. 물론 먹지도 않는다. 버섯의 배면이 하얗기 때문에 화가들이 그곳에 그림을 그린다는데서 그렇게 이름이 부쳐진 것이라고 한다. 지금은 많은 한국분들이 Trail Walk을 즐기고 있다. 어쨋던 자취를 감추어 가고 있음이 안타까운면도 있다. 죽어 쓰러져있는 고목에 붙어있는 영지버섯에서 Spore가 왕성한 늦가을에는 소털같은 색갈로 따뜻한 감각을, 겨울에는 그위에 힌눈이 높이 싸여 있는 모습은 마치 파고다를 보는 느낌이기도 했었었다.

스낵으로 준비해온, 먹기 알맞게 짤라서 플라스틱 봉지에 넣어온 감(Persimmon)을,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손으로 훔치면서 나누어먹는 Break time은 어쩌면 모두가 기다렸던 시간이기도 하다. 입안에 한조각 넣고 아삭아삭 씹는 맛은 꿀맛이다. 멀리 눈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Lake Ontario의 호수와 인접해 뻗어 있는 QEW 고속도로에는 변함없이 바삐 움직이는 차량들이 점으로 이어지고 있는 모습도 좋다.

벌써 길게만 느껴졌던 한해가 다지나가는 시점에서, 모든것을 뒤로 접고, 시선과 마음을 한곳에 집중하면서 산행을 하는 여유를 갖고 있다는것 자체가 고맙게 느껴진다. 적지않은 계곡을 타고 졸졸 흘러가는 가느다란 물줄기 소리도 가는해를 아쉬워 하는것 처럼 느껴진다. 영원속으로 파묻히는 이순간의 발걸음…… 등에 땀이 젖어있다. 행여나 미끄러질까봐 한걸음 옮길때마다 더 많은 신경을 쓴 결과일것이다.
조금은 모든게 아쉽게만 느껴지는 오늘의 산행이다. 집으로 향하는 도중에 커피숖에 들려 갈증도 해소하고 기분전환도 시켜주는 한잔의
커피가 그리워진다.

우리 인간은 자연속에서 왔다가 자연속으로 되돌아 가는 준엄하고, 피할수 없는 길을 반복해서 걸어왔고, 걸어갈 존재임을 오늘의 산행에서 절감했고, 그자연속에서 2011년도의 마지막 Taril Walk을 할수 있었다는 지혜와 고마움을 모두가 깊이 느낀것 같이 느끼고 있음을 그들의 눈과 대화에서 읽을수 있어, 역사속으로 떠나 보내는 2011년에 가볍게 손을 흔들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