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August 29, 2014

중국 공산당원들, 간통금지법 있으나 마나-오직 선전용일뿐.


중국 공산당은 수백만명이 당원으로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정치집단이다. 회의 광경.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사람들이나 정권들의 허구를 오늘 다시 또 본다.  대중을 현혹하는 그들의 상투적인 문구는 모두가 서로 공유하면서 풍요로운 삶을 산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쏘련을 비롯한 지구상의 공산주의 정권들은 그최후가 거짖말 투성이로 국민들을 현혹 했었고, 그들 자신들은 배가 터지도록 도둑질 해서 그들의만의 천국을 만들어 향락을 즐겼다는 증거를 보여주는것으로 끝을 맺고 하는것을 기성세대들은 거의 다기억하고 있다.  아직도 환상에서 깨어나지못한 바보천치같은 한국의 몇몇 먹물들과 정치꾼들은 예외로 치고.....

오늘 BBC의 뉴스를 보면서 새삼 실감을 더하게 된다.  지금 중국에서는 경제적 붐이 일어나 국민들이 밥걱정없이 삶을 살아갈수있는 터전이 마련되자, 이를 통솔하는 공산정권의 간부들이 공산주의 속성을 그대로 또 답습하는 부정과 패륜을 일삼자, 이를 척결하겠다고 중앙당의 서슬퍼런 Decree가 거의 매일 관리들에게 하달 되지만, 실상을 거꾸로 돌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뉴스는 충격적이다.  뉴스의 대강을 요약해 본다.

마누라 몰래 바람피운다고? 만약에 당신이 공산당의 관리라면 간통하기전에 다시한번 깊이 생각해 보시길...최악의 경우엔 짐싸서 그직을 떠나야 한다.

http://www.bbc.com/news/blogs-china-blog-28346932

중국공산당 '시진핑'대통령의 강력한 반부패 척결의지 추방운동에 대해 수없이 미디아는 보도하고 있다.  이러한 부패추방운동이 공산당원들에 취해진 조치는 거의 실적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들에게는 예외인것 같다.  중국인들에게 간통은 어느 나라와 마찬가지로 기분좋치 않은 일로 여기지만, 일반인들에게는 간통자체가 불법이 아니다.


그러나 중국에서 발행되는 영자신문"China Daily"에 의하면 간통은 공산당원들에게 절대적으로 금지시키고 있다라고 보도하고 있다.  신문보도에 따르면 중국공산당내의 감시자들은 지난 6월에 일반국민들에게 적용하는것보다 훨씬더 강한 "Higher moral standards"를 준수해야 할것이라는 경고를 보내고 있다고 한다.   이미 6명의 공산당원들이 "간통"을 저지른 죄목을 보도 했었다. 그러나 어떤 죄명을 적용할지는 언급된 적이 없었다.

가장큰 도덕적 해이는 고위공산당 간부들이 최소한 3명 이상의 애첩을 두고 삶을 즐겼다는 것다.  돈과 권력의 맛을 알았으니, 막강한 힘을 이용하여 무엇인들 못할것인가.
국민들의 눈에 비친 가장큰 부패중의 하나는 여자들이 관련되여 있다는 점으로 본다.  이들이 애첩들에게 거액의 돈을 들여 고급차와 집을 사주는데 사용된 돈은 모두 공급횡령으로 충당된 것이라고 한다.

2007녀도 정부 보고서에 따르면,  몰락한 공산당 간부들의 90%는 놀랍게도 법으로 강하게 금하고 있는 애첩을 두었던 비밀이 탄로 나면서 쫓겨난 것이라고 한다. 그들의 대부분은 최소한 한명 이상의 애인을 두고 있었다고 한다.

강력하게 부패척결을 하겠다고는 하나, 이것은 일종의 "propaganda" 그이하도 이상도 아니다.
지금은 감옥에 있는 고위간부중의 하나였던 Bo Xilai는 처음에는 부정부패죄로 기소됐었으나 그후 담당검사들은 그가 여러명의 여자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발견하고, 추가로 여성관련 스캔달을 덧붙혔다.

고위간부들의 비위 사실은 대부분 충분한 증거가 있으나  부적절한 남녀관계로 기소된 고위간부들에 대해, 담당직원들은 기소된 고위간부들의 첫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에,고위 정치꾼들의 이름을 시커멓게 지울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낼려고 혈안이라고 한다.
중국공산당은 국민들이 그들을 쳐다볼때, 당전체의 이미지를 나쁘게 보기 보다는 개인의 잘못된 행동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에 초점을 두었으면 하기를 바란다.



Tuesday, August 26, 2014

기막힌 운명 - 1986년에 사망한것으로 선고된 온주출신 아버지 미국에서 새 가정꾸려 살고 있었다니...

오늘이 9월14일,2014. Jeff Walton에 대한 후속 얘기가 Toronto Star 신문의 Head Line으로 장식을 했다.  현재 London,Ont.에 살고 있는 그의 첫번째 아내는 스타신문의 기자회견 요청에 거절하고 일체 응하지 않고, 그의 아들 또한 똑같은 심정이라고 한다.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30대 중반의 여성을 만나, 새가정을 꾸리기위해 결혼증명서를 발부 받기위해 죽은 사람의 ID를 도용하여  Security Number를 얻고 미국에서는 생활을 시작 했었다고 한다.  그곳에 살면서도 뒤에 두고온 부인과 아이들을 잊지못해, 가끔씩은 전화를 했었으나 상대쪽에서 전화를 받으면 아무말도 하지않고 그냥 끊곤 했었다고 한다.  아래 링크를 연결하여 자세한 내용을 읽어 보면 기구한 인생의 항로를 탐구해 볼수 있을것 같다.

http://www.thestar.com/news/gta/2014/09/14/inside_the_secret_life_of_ronald_stan_lust_lies_and_a_new_identity.html


세상에 이런일이 정말로 있을까 싶다?  실종되여 사망선고됐던 아버지를 만난 아들의 운명이 애처롭다.  그것도 40여년이 지난 지금,  그의 아버지는 치매와 심장질환으로 고생하기에 그의 아들도 못알아보고, 이엄청난 사실을 알게된 아버지의 현부인, 즉 step mother는 이충격으로 이혼소송을 제기해 놓고 있다고 하는 뉴스는 차라리 친족들과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었더라면.... 하는 안타까움마져 일게 한다.

여기에 스타신문의 기사 내용을 요약해서 옮겨 본다.

http://www.thestar.com/news/canada/2014/08/25/ontario_man_declared_dead_in_1986_found_alive_in_us_police_say.html

40여년전에 갑자기 사라져 버린 아버지가 그동안의 행적에 대해 비밀을 지킬려고 했었는지의 여부에 대해,39세의 아들 Jeff Walton 2세는 어이없어해 하고 있어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왜냐면 현재 그의 아버지는 치매에 걸려 사물분간이 안되는 식물인간이 되여, 물어보거나 증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아버지는 현재 살고 있는 남쪽 미국의 Oklahoma의 조그만 시골에서 살고 있다.  그는 그곳에서 새로 가정을 꾸려 그동안 살아왔는데, 이런 사실을 그의 stepmom과 3명정도의 Grandchildren이 이번에 알게된 유일한 혈육이라고 한다.

아버지 Walton은 1977년 9월 29일, 그가 살고 있던 온타리오 북부지역,Middlesex County 농장 창고가 이유모를 불에 타 없어지면서,  실종된것으로 경찰에 보고 되여, 사망선고까지된, 서류상으로는 이세상 사람이 아닌것으로 등록된 상태로 오늘에 이른것이다.

온타리오 경찰은 지난 7월에 이사건을 재검토 하면서, 1977년 당시에는 기술적으로 검증이 안되는 여러 정황들을 Middlesex 지역의 온주경찰들과 자료를 받아 다시 퍼즐 마추듯이 검토하여 그의 아버지가 생존해 있음을 확인하게 된것이라고 한다.

실종당시 32세였던 그의 아버지 Stan Walton은 캐나다에서는 사망한 것으로 신고되여 있다.
경찰은 왜 그가 그런 행동을 했는지에 대해 전혀 풀길이 없다는식으로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1986년에 온주법원으로 부터, 그가 실종된지 약 10여년만에, 아직도 모든게 확실한 정황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사망판결을 받았었다고 한다.

1977년 화재가 났을 당시의 상황을 기억을 더듬어 설명하는 이가 있는데, 그의 이름은 Bert Toonen으로 화재가 나던날 저녁에 그의 동생 Peter와 Stan이 함께 외출을 했었다고 기억한다. 당시 Toonen은 경찰을 도와 화재원인 파악에 많은 협조를 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농장의 창고에는 우리 아버지가 기르던 많은 돼지들이 사육되고 있었다. 우리식구들은 다음날 모두 출동하여 경찰과 함께 빈틈없이 화재 현장과 주변을 살폈으나 사람이 타죽은 흔적은 발견할수 없었다"라고 회상한다.

Toonen은 현재 Stan이 소유했던 농장주인으로 있다.  그가 살고 있는 인근에는 화재가 난후 이지역으로 이사왔던 Stan의 삼촌 Edward Stan도 같이 살고 있다.

이들 두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Stan은 당시 부인도 있었다고 한다.  이들 부부는 두아이를 낳았었다고 한다.  그러나 삼춘 Edward는 그가 사라진후 그의 아이들 즉 조카식구들과 왕래를 거의 안했었다고 한다.  이뉴스를 보도한 Star Paper관계자들은 이들 유족들과 접촉을 시도했으나 이들이 신원을 파악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었다고 한다.

삼촌 Edward는 법원에 의해 그가 사망자로 신고된 내용도 알지 못하고 있었으며, 다만 그가 죽지않고 살아 있다는것만 확실히 알고 있었다고 한다.  왜냐면 1997년 그의 조카가 살아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때가 바로 그의 아버지가 사망했을시 잠시 되돌아 왔었을때 그를 보았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한다.

삼촌 Edward는 조카 Stan에 대해 자세한 설명 하기를 꺼려 하는데, 이유는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그에게 행여나 누를 끼치지 않을까에서 라고 한다.  미국에서 Stan의 삶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게 없고, 다만 얼마전에 온주 경찰이 수집한 정보를 토대로 해서 미국의 어느지역에 살고 있는지만 알고 있을 뿐이라고 한다.

2002년도에 온타리오는 실종된자의 사망선고를 더욱 복잡하고 어렵게 한 법을 제정했다. 이법, 즉 Declarations of Death Act법이 입법되기전, 법원은 실종자에 대한 사망선고를 쉽게 할수 있었다. 이렇게 사망선고를 할수 있었던이유는 생명보험관계, 또는 유서등에 사용될 목적 때문에 재판에 회부될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은 배우자, 또는 사망자의 직계로 인정된 사람은 두가지 조건을 들어 사망선고를 요청할수있다.  첫째는 실종된날로 부터 최소한 7년이 지나야 하고, 또하나는 정상적인 신체조건이 아닌 상태에서 실종됐을 때이다.  사망자로 선고된 결과는 매우 중요하다, 이경우  사망자로 선고된자는 자기 소유의 재산에 대한 권리를 전부 잃어 버리기 때문이다.

실종신고를 한사람은 주위에 아무도 이실종사건에 연관된 자가 없음을 제시해야 하며, 실종자의 당시 지점을 충분히 납득할수 있도록 자료를 제시 해야 하고, 실종자가 생존해 있을 가능성에 대한 이유가 전혀 없어야 한다. 또한 실종자의 사망이 확실하다는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Jeff Walton 2세는 아버지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것이었을까에 대한 비난은 하지 않는다. 다만 이사실을 알게된것에 대한 충격을 소화하기가 힘들어 할뿐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에 대한 상황이나 실종됐던 가능성에 대해 상세한 설명 하기를 꺼려 하고 있을뿐이다.

아버지 Stan은 현재 69세로 치매와 심장질환으로 고생을 하고 있다고 한다.  경찰이 그를 찾았을때는 그는 노인 보호소에(Nursing home) 있었으며,아버지의 새로얻은 미국부인 Debora Proctor는 이엄청난 사실을 알면서 이혼을 신청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아들 Jeff는 설명한다.

"현재 나는 매우 괴롭다.  그래도 그는 나의 아버지이지않는가. 지난 35년간 내가 알고 있었던 나의 아버지대한 것은 하나도 변한게 없다" 라고 그는 심경을 토로한다.

65남선교회원들의 Brighton나들이 - 기분전환.


65 남선교회원들 Brighton 나들이 및 월례회(Aug.24,2014)
믿음의 교제를 나누는 교회에서 매주 만나는 얼굴들이지만, 토론토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Cottage에서 만나는 기분은 완전히 다른 마치 오래 헤여져 있었던 친지나 식구들이 다시 만나는 또다른 반가움과 기쁨을 느끼게 해주고 정감이 더 가게 하는 만남이다.




예측했던데로 반가운 얼굴들이 아침 1045분경에 Cottage 뒷뜰에 무사히 도착하여, 멀리 떠나있던 자식들이 시골에 살고 계시는 부모님을 오랫만에 찾아와서 반가히 맞이하는 그런 기분을 느끼게 했다. 명칭이 남선교회원들의 모임이지, 시골 나들이 이기에 부부동반과 다른 여자분들도 많이 오셨다.

요며칠사이 날씨가 항상 시커먼 하늘을 만들고, 마치 장마처럼 가랑비가 왔다 갔다 하곤해서 많이 걱정했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먼저 일기예보를 들어 보고, 비가 오지는 않을 것이라는 예보에 다소 안심은 했었으나 여전히 하늘은 회색구름으로 뒤덮혀 있어 편치않은 마음으로 
회원들이 도착 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Lunar는 며칠전부터, 텃밭에서 자란 채소와 호박 오이 고추 쑥갓(Crown Daisy)상추들을  정성스럽게 거두어서 준비를 해두고, 어제밤에는 마지막으로 준비한것을 점검하면서 밤 3시경까지 불을켜고 부엌에서 일했는데, 그렇게 창문을 포함한 문들을 꼭 닫고 Flying Bug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었는데도, 천장에 달려 있는 형광등 주변에는 새카맣게 붙어 있는bug들을 보면서 걱정도 했었다. 행여나 만들어 놓은 음식에 떨어지는 사고가 나지 않을까 라고.






우선 먼길 오는데 피곤하고 갈증도 났을테니, 큰 Dish에, 지난해 가을에 채취했던 머루(Wild Grape)로 만들었던 원액을 이용하여 그녀가 만든  특유의 Sauce를 곁들여 Salad를 만들어 목을 즐겁게 해준다. 시큼하면서도 fresh한 맛이 입맛을 당기게 해주었다. 그런데 순서가 뒤바뀌는 조그만 사고가 났다.  회원 K 가 어느새 잽싸게 2층 Deck으로 올라가 BBQ Grill에 불을 지피고 갈비를 굽기시작하면서 예상치 않은 이른 점심이 시작된것이다.  K회원은 이런 모임에서는 항상 자원봉사자로 나서서 일을 하는 회원이다.  이번에는 그자신이 비싼 갈비를 비롯한 다른 음식까지도 준비해 왔다고 한다.

같은 음식이라 해도 뒷뜰의 넓은 잔듸밭위에서 즉석 갈비와 돼지고기를 비롯한 신선한 채소들로 꽉찬 식탁에서 Buffet형식으로 나누는 음식맛은 또 다르다. 여자분들은 멀리 나들이 했기에 좀편하게 쉬게하고 대신에 남자들이 일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질 못하고, 바로 Lunar와 함께 음식 만들어 제공 하는데 눈코 뜰사이가 없이 금새 바쁘게 움직인다.  남자회원들은 집주인인 나자신도 알지 못하고 있던 의자들까지 어느구석에서 잘도 찾아내 빙 둘러앉아 이바구 하기에 바쁘고… 그래서 나이든 한국남자들이 배우자들한테서 환영못받는 이유중의 하나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또 한바탕 웃어 제낀다.


같은 연령대의 회원들이니 허물이 없고, 격이 없어 모두가 마음도 가볍게 토론토에서는 감히 입에 꺼내기도 쉽지않은 대화들이 경쟁 하듯이 터져 나와 좌중을 웃음속에서 헤여나지 못하게 한다.  그중의 명강사가 회원 C 다.  재능이 그렇게 많은줄은 수십년을 같이 Fellowship나누면서도 오늘에야 처음 알았다.  아마도 조금 떨어져 있는 곳에서 음식준비 하시는 여자분들도 그의 명강의를 안듣는척 하면서 들었을 것이다.

집에서 부터 출발하여 대부분의 남녀 회원분들이 바로 옆에 있는 Presqu’ile Park안에 있는 Marsh Board Walk까지 산책을 나서고, 몸이 조금 불편한회원들을 위해 불고기 굽던 K 회원이 또 운전수를 자청하여 그들을 태우고 먼저 도착해서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다. 

최고 연장자 되시는 분의 무사한 Board Walking행사를 윗분에게 상고하고 기원하는 의식을 마치고 걷기 시작했다.  나는 수도 셀수 없을 만큼 왔었기에 별다른 느낌은 덜했지만, 대다수의 회원분들은 키가 무척큰 갈대밭속의 Swamp속에 만들어진 Board Walk을 걸으면서 토론토에서는 접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자연속에서 느끼는  탄성의 소리들도 나왔다.  다시 또 오겠다는 말로 다짐을 하면서 신선하고 아름다움을 표현한다.  삶이 그렇게 쉽게 기회를 주지 못한다는것을 나는 알고 있기에, 꼭 다시 오셔서 즐길수 있기를 바랜다고 응수 했다.


 

Board Walk시작점과 끝지점에는 Watch Tower가 넓게 준비되여 있다.  가을 수확철이 되면 갈대가 황금색으로 변해 마치 고국의 김제 평야를 기차를 타고 가면서 보았던 다 익은 벼이삭이 미풍에 출렁이던 광경을 연상케하고, 또 그때쯤이면 철새들이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쉬어가는곳이 바로 여기 갈대밭이라고 나는 설명을 해주기도 했다. 그설명에 그때 꼭 다시 오겠다는 다짐을  또 한다.  꼭 그렇게 되기를 어쩌면 그들보다 내가 더 바라는지도 모른다.  될수만 있으면 많이보고 오랫동안 기억속에 담아 두기를 바라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회원 S, 또다른 K는 몸이 좁 불편한 편이다.  그분들이 우리보다 훨씬 키가 큰 갈대들이 미풍에 흔들거리는 사이로 이어진 Board Walk을 완주한것이다.  K는 너무나 좋아한다. 평소 토론토에서는 이렇게 먼(?)거리를 걸어본 기억이 거의 없었다고 하면서… 그분의 건강이 다소나마 회복되였으면 하는 마음이 교차된다.  아름답게 끝없이 펼쳐져 있는 새로운 자연속 분위기가  친지들과 한데 어울려 그를 끝까지 걷게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된다.





집에 도착하니, 진수성찬(?)이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Lunar는 혼자남아 그동안 준비해 놓고 있었는데, 여자분들이 합세하여 금새 산해진미로 상을 꽉채워 맛도 맛이지만 보는눈이 즐겁게 해준다.  이래서 남자 여자가 같이 짝을 지어 한평생을 살게 되는가 보다라는 엉뚱한 생각까지 해본다.  모두가 된장국이 일품이라고 극찬이다.  Luanr가 지난봄에 Maple Tree에서 채취한 Sap을 물대신에 써서 만들었던 된장이다.  맛이 내가 먹어 보아도 특이한 다른 맛이 입맛을 감칠나게 했었는데, 오늘 모두가 시원하게 좋아 하신다.





뒷집의 Barbara가 대식구가 모인것을 보고, 스낵용 빵을 구워서, 또 며느리가 사온 Turkey에서 만든 그들의 고유의 Candy한박스까지 들고와서 건네주고 간다. 고마운 이웃이다. 이런일이 있을때는 꼭 음식을 만들어 주곤해오는 고마운 친구이자 이웃이다.  이런식으로 서로 음식을 나누다 보니, 그들도 이제는 한국음식에 많이 익숙해져 있는, 많지 않은 서양사람들중의 하나가 돼여 있다. 김치같은것은 이제는 자연스럽게 잘도 즐기는 식도락가로 변한 셈이다.  그의 남편 Eugene 은 Luanr만들어주는 전부침을 그렇게도 좋아 하곤한다.





회원들이 모인김에 오랫만에 월례회를 하면 어떨까하고 물었더니 모두가 동의 한다.
걸직했던 대화들이 금새 진지한 모습으로 언어부터가 좀 딱딱하다싶게 느낄정도로 정숙해진다.  나는 어젯밤에 준비를 좀 해두었었지만, 다른임원분들은 준비해올것으로 생각도 못했었는데, 회의 자료들을 준비해 온것을 보면서, 주책없이 노는것 같아도 책임을 위한 준비들은 철저히 하는 그분들의 세밀함에 감사와 고마운 마음을 보내고 싶은 기분이었다.





선교헌금 잔고중에서 일부는 해외에 파견된 선교사분들에게 보내고 나머지 일부는 연말 총회때를 기준으로 행사에 필요한 경비로 사용키로 하는 것이 주요 회의 내용이었다.  그리고 9월말경에 있게될 선교회별 음악경연대회를 위해 Conductor역활로  수고해 주는 Elder K가 준비해온 자료를 들고 노래 연습도, 회의가 종료되자마자, 시작하여 한마디씩 덧붙이는 우스개 소리로 좌중은 노래연습도 좋지만 웃음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폭소의 연습장으로 변하기도 했다. 





다떠난 뒤의 Cottage는 찾아오는 어둠과 함께 금방 적막강산으로 변했다.  여자분들이 다 뒷마무리를 해주고 떠났지만, 그래도 Lunar는 여전히 발을 동동 구르면서 뒷정리를 하느라 바삐움직인다.  나는 그녀가 도와 달라는것을 조금 도와주는 일종의 쓸모없는(?)존재가 되여 있는 상태이고… 정리를 끝내고 한잔의 구수한 잠자리전의 커피를 한모금 넘길때는 벌써 시계는 밤 10시 30분경을 가리키고 있었다.  서로 나누고 즐긴다는것은, 그것도 서로 이해하고 즐길수 있는 친지들과 한다는것은 일종의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부부는 그래서 축복받은 사람들중의 하나가 아닐까?라는 말을 Luanr에게 건네면서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을 대신해본다.

Thursday, August 21, 2014

사람잡아먹는 호랑이로 지목돼 사살되여 멸종을 부채질 한다.

멸종되는 호랑이쪽을 생각한다면, 귀한 호랑이를 사살하는것은 안될일인것 같고, 우리 인간의 목숨을 끊어 버리는 호랑이의 행위를 생각해 볼때는 이것 저것 따질것 없이 보이는데로 사살해 버려야 당연한것으로 보여지는데, 여기서 깊이 다시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가 있는것 같다.  우리 인간과 맹수 사이에 서로의 서식구간을 침범하지 않는, 일종의 Virtual Wall을 설정해 놓고 서로 Win- Win하는 양보의 삶을 살아보면 어떨까? 동물전문가들은 멸종하는 호랑이의 번식을 위해 고민하고, 인도에서는 폭발하는 인구 때문에 고민하고....

지금으로 부터 60여년전 초등학교 3학년때쯤, 내가 살던 시골에는 높지 않은 동네 뒷산에 밤이면 호랑이가 출현한다고 하여, 밤마실을 어른들께서 자제 하셨던 일이 기억난다.  어른들의 간담 서늘했던 얘기들을 들으면, 어두워진 동네 고삿길을, 특히 혼자 걸을때는 금방이라도 호랑이가 뒤에서 나타나 으르렁 거리지는 않을까?라는 두려움으로 발걸음을 종종(Scurry)해야만 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만 해도 조국 한반도 산야에는 호랑이가 아직 서식하고 있었다는 반증이 된다.
산악지역이 많은 북쪽 한반도에는 더 많은 맹수들이 서식하고 있었다고 들었고, 특히 가을철이면 포수들이 사냥총을 메고 먼길을 떠나는 객처럼 짐보따리를 꾸려 집을 떠나는 광경을 봤던 기억도 난다.

이보다 조금 적은 살쾡이(Wild Cat)는 수없이 많이 보았었다.  집에서 기르는 닭과 토끼들을 저녁에 들이닥쳐 사냥해 가는 그들의 재빠른 행동에는 모두가 속수무책이었었다. 우리집도 예외는 아니여서, 자고나면 누구네 집 닭이, 누구네 토끼가 없어졌다는 소문들이 동네를 뒤덮었었다.

오늘 BBC의 뉴스를 보면서, 인구의 폭발과 기술의 발달로 그들이 서식처를 잃어 가면서 이제는 먹이사슬이 깨져 멸종될 날이 거의 정해져 있는것 처럼 들려, 한편 연민의 정도 느낀다.

http://www.bbc.com/news/world-asia-india-28863096

인도 서쪽 지역에서 지난 6개월 동안에 7명 이상의 사람을 죽인것으로 판명된 호랑이 한마리가 사살됐다고 산숲속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목격했다고 전한다.

일명 "사람잡아먹는 호랑이"로 당국의 관리자들에게 알려진 이호랑이는 인도의 Maharashtra지역의 Chandrapur에 있는 숲속에서 사람을 잡아먹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번 사살된 호랑이는 2007년 이후 이지역에서 사람들을 잡아먹은 호랑이들중에서 3번째로 사살된 것이라고 담당자들은 설명하고 있다. 금년에만 대략 17명의 생명이 인도에서 호랑이에게 공격당해 목숨을 잃은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지역 관리들은 100 마리의 호랑이가 서식하고 있는 Chandrapur에 3개의 수색팀을 편성하여 수색한 끝에 지난 화요일 이른 저녁에 이호랑이를 목격하고 사살하게 된것이라고 한다.

"사람과 동물사이에 서식처를 차지하기위한 투쟁이 지난 6개월 동안에만 계속 늘어나 많은 신경을 곤두세우게 하고있다.  사람들의 안전을 고려하는 차원에서 호랑이를 만나면 사살해도 좋다는 명령이 하달되였다"라고 Maharashtra 지역의 산림 담당 책임자 Sarjan Bhagat씨가 BBC Hinde 와의 회견에서 설명한다.

이보다 앞서 2007년에는 이지역에서 9명의 사람을 잡아먹은 것으로 지목되는 호랑이 2마리를 사살한바 있다.

현재 인도에는 약 1,700 여마리의 호랑이만이 겨우 살아남아 있다고 한다.
약 100여년 전만 해도 인도에는 약 100,000마리 이상의 호랑이가 서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로 부터 밀엽꾼들의 불법포획과 바로 인근에 마을이 들어 서면서 호랑이 인구는 계속 줄어들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사람들이 호랑이의 서식처를 잠식하는게 늘어나면서 호랑이들도 자기네 서식처를 빼앗기지 않을려는 일종의 투쟁이 마을 사람들과 마찰을 일으키게 되는 큰 원인이 되여 왔다.

야생동물 전문가들에 의하면 호랑이에 의한 대부분의 공격은 우연히 호랑이와 마주치면 생기는데, 이공격으로 희생된 사람들은 목숨만 잃을뿐 호랑이가 먹기위해 자기네들이 거주하는 깊은 숲속으로 끌고 가는일은 드물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사람들에 대한 공격으로 목숨을 잃는일이 연속일어나 신속히 성공적으로 행해지는것은 숲속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말을 부풀려 "사람고기를 먹는 호랑이"라는 명칭을 붙여줬기 때문이며 실제로 먹이로 사용하기위해 공격하는 일은 아닌것 같다라고 한다.



Monday, August 18, 2014

한국에서 여생을?- 아서라, 나도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나자신도 이민자로서 미지의 땅에 뿌리를 박고, 자식들을 부양하기위해 새벽부터 자정까지 바삐 움직일때는, 내자신을 많이 한탄도 했었다.
" 잘 나가는 직장을 내던지고, 더 좋은 삶을 살아보겠다고 이민 보따리를 싸서 이곳까지 왔는데, 잘 살기는 커녕, 3D 업종중의 하나라고 볼수 있는 Convenience Store를 하면서, 이민자로서의 억울한 차별도 많이 당하면서, 별보고 잠자리 뛰쳐 나와서 별보고 집에 들어 가야 하는 삶이 과연 옮은 선택이었던가?  이다음 은퇴 해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편하게 살아야 겠다"라는 말을 수도 없이 되뇌었었다.


지금은 다 자라서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아이들이, 가끔씩 만나서 Eating out할때면, 되묻곤 하는 질문이 있다. 그것도 서툴은 우리 한국말로.  그래도 우리끼리니까 의사 소통은 된다.

"아빠, 그때 우리들 앞에서 했던말 지금도 생각나?"
"아니, 뭔데 그렇게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나?"
" '나 이다음에 은퇴하면 짐싸들고 다시 한국에 돌아가 여생을 보낼거야'라고 한말.."
" 미안해, 그때는 아빠가 너무나 힘들고, 아침에 눈떠서 저녁에 침대에 드러 누울때까지 아무것도 못하고 오직 가게일만 해야 했기 때문에 심신이 지친 그런 삶이 싫어서 그랬던거야. 지금은 전연 아니야. "
" 아빠 지금 얘기지만, 그때 Elementary school 다니면서 어린 우리남매, 아빠가 그런 얘기 할때마다 마음이 얼마나 조마조마 했었는지 알아.  우리도 같이 걱정 많이 했었어.  아빠, 엄마 따라서 한국에 가야되나? 아니면 여기서 살아야 하나? 우린 돈 하나도 없는데...."
"엄마, 아빠는 여생을 여기 제2의 조국 캐나다에서 보낼거야. 이봐, 카테지도 있고 .... 지금 잘 지내고 있잖니. 매년 엄마 아빠 둘이서 해외 여행 다니고....너희들 앞날일들이나 걱정해, 엄마 아빤 이제는 편하게 잘지내고 있는것 알지?"

정말이지 그때는 삶이 뭔가를 되씹어 보고 또 보고, 그러면서 이민자의 삶이 이렇게 고달퍼야 하는가?라는 생각과 다른 친지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별생각을 다하면서 나만 이런 고생을 하는걸까?라는 자책을 많이 했었다.  내눈에는 남들은 여름철 휴가때면 짐싸들고 여행을 다닐때, 연말 연시 Holiday 즐길때, 우린 똑같은 휴가나 Holiday라는 말을 잊은채 소처럼 일만 했었다 정말로 아이들한테 미안할 정도로.  지금도 아이들 학교 다닐때 온식구가 같이 캠핑한번 하지 못했던 지난날을 생각하면 그져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가슴을 여민다.  허지만 그때는 지겨운 젊은 날의 삶이었다고 표현하고 싶다.

10년 하고도 몇년이 훌쩍 넘었다.  생업에서 손떼고 은퇴생활을 하기시작한지가....
그러나 젊어서 소처럼 일만 했었던 지난날을 절대로 지금은 후회하지 않는다.
그런 희생의 댓가를 치렀기에,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무난한 은퇴생활을 하고 있다는 감사함을 가슴속에 깊이 새기면서 은퇴자로서의 하루하루를 뜻있게 보내면서 캐나다에 감사해 하고 있다.

그사이 고국을 방문하면서 이곳 저곳을  구경도 하고,  좋은 기억을 만들려고 좋은 쪽으로 많은 생각을 했었다.  사회가 잘못되여가는것을 봤을때도, 사람들의 행동이 때로는 상대방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나만을 위한쪽으로 보여도, 아직은 시기적으로 그럴수도 있겠다라고 좋게 이해 할려고 했었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에서는 거부 반응이 너무나 많이 일어나, 나같은 사람이 다시 이곳 고국에서 살게 된다면, 일년도 못가서 갖인것 다 거덜나고, 얼키고 설킨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아 어려움을 겪게 될것이라는 생각이 자꾸 커지게됐다.

내가 태어나고 조상님들의 모든것이 묻혀 있는 조국이기에 절대로 잊을수는 없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조국이 부강한 나라가 되고, 평안하게, 여유롭게 그리고 믿음이 공존하는 사회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희망을, 시집간 딸의 심정으로 빌면서 살아 가지만, 역이민을 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기회가 주어지면 방문하는것으로 족할 것이다.  역이민을 하기에는 나는 너무나 고국의 현실을 모르고, 두렵기 때문이다.

고국을 이끌어가는 정치꾼들, 먹물많이 먹은 지성인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철딱서니없는, 그리고 정부에서 일하는 고위급 지도자들, 그래서 그영향이 젊은이들과 국민들에게 어떻게 반향을 미칠지 심사숙고한 다음에 써야할 글들을 SNS에 마음데로 써 갈겨대는, 반짝 빛나는 인기위주의 까십같은 칼럼들, 언론사들의 어린아이들 작문쓰는식의 무책임한 기사들, 한치의 양보도 할줄 모르는(?) 사회구조와, 외모를 중시하는 구태를 벗어 버리지 못하는 악습이, 여생을 조국에서 보내고 싶어하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뒤집어 놓고 있다는것을 이제는 인식했으면 싶다.

오늘은 정말로 황당한 기사를 보았다.  장관급에 속하는 검사장이라는 사람이, 그것도 박대통령이 주창하는 부패척결, 개혁을 앞에서 이끌어가야 할 사람중의 하나가, 이유야 어쨋던 여학생 앞에서 짐승도 하지 않을 개수작을 했다는 뉴스는, 개혁의 주체가, 바로 개혁의 첫번째 대상자임을 여실히 나타내는 한국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꼴이 됐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8/16/2014081600234.html?news_top

"내가 누군데.... 나는 개혁대상에서 예외야.... "라는 고정관념이 머리속에 꽉박혀 있는 그런사람들이 개혁을 하겠다고?  박대통령이 괜히 안쓰러워 보이게 하는  Cancer Cell같은 존재들이 지도층으로 있는한, 개혁, 부패척결은 물건너간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다.  오죽 했으면 '관피아'라는 신조어까지 탄생했을까.  '검사장'하면 울던 아이도 울음을 그치는 무서운 존재로 인식되여 있는 관직인데, 부패, 부정척결을 위해 앞장서서 분골쇄신해야할 현직 검사장이 자기 딸같은 여고생 앞에서 물건을 꺼내놓고 농락을 했다는 뉴스는 충격을 넘어, 부정부패 척결은 고사하고 호시탐탐 적화통일을 꿈꾸고 있는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존재 여부가 심히 걱정되는 현실이 너무나 불쌍하기만 하다.

국가의 공권력을 최일선에서 맡아 수고하고 있는 경찰관들을 마치 개패듯이 해대는 무지한 국민들, 법은 이들 무법자에게 너무나 관대(?)하다. 오히려 경찰관들이 욕먹는 대상이 되는 나라,  파출소가 술주정꾼들의 행패 부리는 장소로 전락한 나라.... 취중에 한 행동이라는 명분을 주어 그냥 풀어주는 나라.... 이곳 캐나다의 경찰관들이 폭력을 당한다거나, 경찰관들의 업무를 방해하는 행동은, 하나님이라도 용서를 하지 않는다. 일단 철창행이다.  이렇게 해야 국가의 기본인 질서가 유지 되기 때문이다.  고국은 선진 외국의 모방은 잘하면서도 이런 공공질서범에 대해서는 너무나(?)관대하기만 할까?  그래서 행여라도 역이민은 두렵다.

이곳 북미, 특히 캐나다에서는 많은 유럽쪽 이민자들이 은퇴후 조국으로 돌아간다.  심지어 연방정부 장관까지 했던 사람들도 은퇴후 모든것 버리고 자기 조국으로 역이민 간다.  그것이 정석(?)으로 받아들여지는 풍조다.  여기서 일생동안 일해서 모은 재산을 처분하여 자기 조국으로 가면, 편하게 살수 있는 그들 나라의 구조가 우선 나는 부럽게 느껴진다.  스페인, 포투갈, 터키, 이태리, 파키스탄, 인도 그리고 옛 동구권 유럽여러나라 사람들이 이들 범주에 속한다.

우리 조국에서 살려면, 우선 경제적으로 따져 보았을때, 있는재산 다 처분하여 되돌아 간다해도 그돈으로 반듯한 아파트 한채 사기가 힘들 정도로 생활비가 무척 비싸다고 한다.  그리고 항상 잔머리를 굴려야 하는 어려움이 함께 하는것을 많이 보아왔다.  그런점들이 여기서 오랜 이민의 삶을 살아온 사람들의 마음을 두렵게 한다.   가끔씩 역이민이 있는것을 보는데, 이분들은 이민의 역사도 짧으면서 또 여기서 이민의 삶속에 적응못하고 할수없이 되돌아가는 분들이 있긴 하다.  나는 그래서 조국의 품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낼 꿈을 깨끗히 접고, 이곳 제2의 조국 캐나다에서 이씨 가문의 시조로 남아 자손들의 번영을 도우면서, 심신이 허락하는한 조상님들과 친지들 방문으로 족할 것이다.

여기에 친지한분이 보내온 어느 외국인의 칼럼을 옮겨 놓았다.  절절히 옳은 말이다.  한편 챙피 하기도 하다. 내분수는 내가 알아야 하는데.... 남이 장에 가니 나도 구럭 짊어지고 가야 한다는 일종의 Show off하는 그런 삶의 자세는 선진국이 될려면 과감히 버려야 할때가 됐다고 본다.




한국에서 여생을?
[너무도 잘못된 한국사회]
지난 주 서울에서 발행되는 일간에
어느 유명한 외국인 초빙교수가 한국에 살면서 목격한
한국인들의 이중인격에 대한 소감이 실렸다.
이 교수는 정신의학계의 세계적인 권위자인데,
한국을 떠나면서 후임으로 부임한 교수(외국인)에게
자신의 눈에 비친 한국인의 이미지에 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고 한다.
한국인은 너무 친절하다.
그러나 그것이 그 사람의 인격이라고 판단하면 오해다.
권력 있거나 유명한 사람에게는
지나칠 정도로 친절하지만,
자기보다 약하거나 힘없는 서민에게는
거만하기 짝이 없어 놀랄 때가 많다.
특히 식당 종업원에게는 마구잡이로 무례하게 대해
같이 간 사람이 불쾌할 정도다.
잘 나가는 엘리트일수록
이 같은 이중인격을 지니고 있어
인간적으로 사귀고 싶지가 않았다.”
공감이 가는 소리다.
서울에서 온 점잖은 사람이
미국의 코리아타운 식당에서 종업원에게
이봐” 하면서 큰 소리치는 광경을
한인들도 많이 봤을 것이다.
그 사람이 친구나 친척이면
미국서는 그러면 안돼하고 충고를 해주겠지만,
잘 알지 못하는 사이거나 VIP인 경우는 난감하다.
한국에서 엘리트 계층에 속한다면 배운 사람이다.
배운 사람일수록 겸손해야 하는데 오히려 거만을 떤다.
지식은 많은데 지혜롭지가 못하다.
말은 유식한데 행동은 무식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준법정신이 엉망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지를 어찌 알겠는가!
서울에서 내가 겪은 일이다.
어느 회사 중역과 저녁을 먹고
그의 차로 호텔에 돌아오게 되었는데,
한가한 길에서 빨간 신호등이 켜져
운전기사가 차를 멈추자
중역이 아무 차도 없잖아그냥 건너가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 후부터 그 사람을 다시 보게 되었다.
힘 있는 사람부터 법을 안 지키니
부정부패가 만연할 수밖에 없다.
대법관으로 임명된 인사가
청문회에서 위장전입을 인정할 정도니
정부 요직에 있는 다른 인사들이야 말해서 무엇 하랴.
한국 엘리트들의 또 다른 모순은
자기 잘못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 점이다.
회사에서도 뭐가 잘못되면
전부 윗사람 아랫사람 탓이고
자기반성은 조금도 없다모두가 남의 탓이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이 너무 네거티브하다.
모여 앉으면 정치 이야기인데,
완전히 흑백논리로 평한다.
호남친구들과 만나면
박정희박근혜 혹평하는 것 듣다가 시간 다가고,
경상도 친구들과 만나면 김대중을 얼마나 미워하는지
저녁자리가 피곤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한국에는 존경받는 대통령이 없다.
모두가 이래서 죽일 놈이고 저래서 죽일 놈이다.
벼락부자의 단점이 무엇인가?
국민소득은 23,000달러 수준인데,
국민의식은 500달러 수준(1970년대)이다.
경제가 눈부시게 발전했다고 자랑하지만
그것은 곧 벼락부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저 남에게 내가 이만큼 가졌다고 자랑하는 것이다.
재산이 사람평가의 기준이다.
역이민을 절대 말리고 싶다
요즘 미주 한인들 중에
한국에 가서 여생을 보내면 어떨까하고
역이민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돈 없이 한국에서 살면
사람취급 제대로 못 받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돈 없는 사람은 동창들 사이에서도
냉대 받는 곳이 한국이다.
미국에서 재산 몽땅 정리해도
한국에서는 아파트 하나 사기 힘들다.
성공의 의미가 너무 좁다.
몇 평짜리 아파트 사느냐,
강남에 사느냐 강북에 사느냐가 사람평가의 기준이다.
돈 있고 잘사는 데도
자기보다 더 잘사는 사람을 부러워하며
항상 뭔가 불만족이다.
역이민절대 말리고 싶다.
불만족의 뿌리는 정치꾼들에게 있는 것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대통령을 무시하고,
북을 찬양하는 종북자가 국민의 혈세를
빨아먹으면서 활개를 치고,
어린이들을 학대하는 걸 보고도 수수방관하고,
경찰관들을 우습게 보는 국회의원들!
국민들 위에 군림하지 말고, 임시국회를 열어서라도

법의 미비한 점을 지체하지 말고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Thursday, August 14, 2014

CNN에서 조국관광 홍보기사. 경제적 성장과 집약기술의 성공사례가 아닐까?

야간 달밤에 창덕궁 구경은 매우 인상적인 것으로  보인다. 마치 신비에 쌓인 동화에 나오는 호기심이 일게 하는 꿈의 궁전처럼 보인다.



한국은 "동방에 있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로 묘사 되기도 한다.  5000년 이상의 긴 역사를 소유하고 있는 한국의 진정한 문화를 체험 하고져 하는 사람들은 이 Package여행이 최적일 것으로 보인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http://www.goway.com/trip/asia/signature-moonlight-korea-showcase-including-international-airfare/?ef_id=U20ilAAABeF@F9pD:20140812141949:s#!itinerary%3Fnvk_medium%3Dcpc%26nvk_source%3Dgoogle%26nvk_term%3D%26nvk_campaign%3DRe-marketing-Korea-CAN%26utm_medium%3Dcpc%26utm_source%3Dgoogle%26utm_term%3D%26utm_campaign%3DRe-marketing-Korea-CAN%26s_kwcid%3DAL%214247%213%2141334875256%21%21www.cnn.com%21d%21%21__EFKW__

CNN에 기사가 올려진다는것 자체가 무척 쉽지 않은 일인데, 오늘 기사에서 고국의 알짜 관광에 필요한 기사를 실었다. 8박9일 동안에 5000년 역사의 흐름을 볼수 있는 기사와 사진들이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이제는 초로의 삶을 즐기고 있는 나의 시선을 끌었다.  이런 기사를 보면서 조국에 대한 자부심이 뿌듯 해지고, 이를 뒷받침하기위해 정치꾼들의 잔머리 굴리기가 없어지고, 좀더 성실하고 국가를 위한 조국애가 함께 했으면 하는 아쉬움도 함께 한다.

25여년만에 교황께서 아시아 나라를 순방하시면서, 조국 대한민국을 첫번째 방문국으로 꼽으신것도 전세계에 널리 알려진 조국의 경제성장과 집약기술의 혁신이 영향을 미친것으로 본다.
교황님의 한국방문도 전세계를 향한 관광홍보에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이다.




Tuesday, August 12, 2014

China-Vietnam 전쟁일보직전, 한국을 포함한 애꿏은 월남진출 해외기업들만 골탕



http://www.bbc.com/news/world-asia-27434945

남지나해역에서 해저자원 탐사를 하고 있는 중국에 항의 하여, 월남에 진출해 있는 한국기업을 포함한 많은 해외기업들이, 때아닌 역풍을 맞아 힘들어 하고 있다고 한다.

중국의 해저탐사에 월남은 자국의 영토안에서 행해지는 중국의 퇴거를 요구하고 있으나, 중국은 중국의 영토라고 우기면서, 국력을 배경으로 월남의 요구를 묵살하고 계속해서 시추를 하고 있고, 이에 화가난 월남인들은 자국에 진출에 있는 해외기업에 불법침입하여 난동을 부리는등, 화재와 기물파괴, 약탈등으로 보복을 애꿏은 월남진출 현지기업들에게 한것이다.

이번 난동으로 제철소에서 일하는 중국인 한명이 목숨을 잃고, Binh Duong성의 공업지구에 진출한 외국기업체 15곳이 월남폭도들의 기습으로 큰 타격을 보았으며, Ha Tinh성 중부지역에 있는 자유중국의 제철소를 향해 난동을 부리면서 약 150여명의 인근 사람들이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이번 월남인들의 난동은 월남과 중국간에 지난달 부터 영토분쟁을 일으키고 있는 Paracel 군도의 서쪽에서 시추를 하기위해 중국이 시추선 Haiyang Shiyou 981을 분쟁지역으로 옮기겠다는 중국의 결정이 이번 난동을 부추기게된 원인이라고 한다.

유탄을 맞아 목숨을 잃는다고, 월남에 진출해서 열심히 제조업을 하고 있는 한국의 기업들이 이번 폭동으로 많은 피해를 보았다는 뉴스는 월남에 진출해서 기업을 하고 있는 기업들에 대한 월남 당국의 확실한 보장에 석연치 않은 계약이 있었던것은 아닌지? 재발을 위한 안전장치를 재검검 해보야 하지 않을까?

이사건을 계기로 지금 월남인들의 애국심은 최고조에 달해있다고 한다.

앞으로 국제간에 이런 유사한 분쟁은 끝없이 이어질것이다.  갖인자의 힘의 과시, 없는자의 살아남기위한 투쟁,  결론은 자국의 영토를 지키기위해서는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힘을 길러야 한다는 생각이다.  탁상공론은 비겁한자들의 수단이요, 술수일뿐이다.


Saturday, August 09, 2014

세월호가족 국가보상은 절대로 안된다.- 김지하씨의 비판 의미깊다.

세월호 참사로 인한 인명사고에 대해 국가 보상은 절대로 안된다는 나의 생각과 똑 같은 김지하 선생의 글에 적극적인  응원을 보낸다.  그래서 그분의 글을 나의 블로그에 옮겨 놓았다.
본인들과 부모들이 선택해서 여행을 하면서 난 사고를 왜 국가가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가?  이보다 더 큰 항공기 사고시 국가에서 책임진 전례가 있는가?  세월호 가족들의 괴로움은 천번 만번 이해하고 동정이 간다. 그러나 그저변에는 보이지 않는 세력이,또는 국가 이미지에 먹칠 하고 다니는 정치꾼들이, 조종하고 가족들은 이들에게 놀아나는게 걱정이 될 뿐이다.


김지하의 세월호 가족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1941. 2. 4 시인. 1970년대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반체제문인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
 
본명은 영일(英一), '지하'는 필명이다. 
원주중학교와 중동고등학교를 거쳐 
1966년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했다. 
  ▒ 대한민국의 장래가 걱정된다

세월호 피해자 ! 
도대체 왜 특별히 하늘같이 비싼 사람들일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개인목적의 여행을 가다가 
사고를 당한 사람들이다, 

 이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들은 누가 희생시켰는가? 
 세월호 선주와  사고가 나도록 원인을 제공한 
제한된 수의 공직자 들이다,

 대통령도 정부도 이들에게 안전사고를  교사한바  없다,

안전사고에 대한 배상은 기업체로부터 받아야하고, 
사고유발의 직간접인 책임이있는  
공직자들로부터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국민모두가 물어줘야 하는가? 
국민이 어렵게낸 세금을 이런데 지출해서는 안된다, 
우리 현실로 보아 그돈으로  탱그, 비행기라도 몇대 더  
사와야 한다,

사고를 당한 유족들이 대통령까지도 수사하고  기소하겠다는 
이 발상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다른 안전사고 흐생자는  껌값이고, 세월호 안전사고 희생자는 
 다이아몬드값 !

안전사고에 대해 추념인을 지정하고 추모공원과 
 추념비를 건립하는 역사도  이번이 처음이다, 
사망자 전원을 의사자로  예우한다는  것은 온 세계역사에  
그 유래가없는 일로 노벨평화상이라도  받아야 할
 가공할 인도주의에  해당 할 것이다,

도대체 이들이 국가를위해 전쟁터에 나가 싸우다가  
희생되었는가?

의사상자 !!! 
현재 국가유공자가 받는  연금액의 240배까지 
받을 수  있는  대우라한다,  
이러니 "시체장사"라는 말이 나올만도 하다.

이와 유사한,  과거 크고작은 안전사고때  이런 터무니 없는 
유족들의 행위는 한번도 없었다. 
국가에 대하여 보상을 바라지도 않았고 그런 비겁하고  
거지근성은  생각지도 않고 넘어갔다.

종북 정치인들은 이번 세월호 사건을 폭동의 불씨로 
키우고 있을 것이라는 가정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빨갱이들은  원래 받아들일 수 없는 억지 주장을  하다가  
폭동을 일으킨다는 것은 온국민들은 다 아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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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August 06, 2014

Trent Severn Waterway in Campbellford 나들이















아직 하이웨이가 발달 안됐을때는 이수로는 Transportaion부문에서 젖줄 역활을 오랫동안 했었다고 한다.  육상교통이 발달되면서 역활을 서서히 동생벌되는 고속도로와 철도에 넘겨주고 지금은 여름철에 Leisure Boating을 즐기는 사람들의 통로역활로 족하고 있다고 한다.
여러단계의 갑문(Locks)을 이용하여 윗쪽으로 배들이 항해할수 있도록  해놓은 옛날 선조들의 지혜를 보면서 나는 항상 감탄한다.  멀리는 대서양에서 St. Lawrence River를 따라 몇날을 달려 Lake Ontario에 도달하여 다시  여러 수로중의 하나인 이곳 Trent Severn Waterway를 이용하여 수백리 떨어져 있는 Parry Sound까지 갔었다고 하니..... 지금도 그발자취를 따라 이곳에서 부터 출발하여 항해하면  최소한 10여일은 족히 소요된다고 한다.



잔잔한 강줄기는 마치 유리처럼 반듯하기만 하다.  평화스럽기만 하다.
 텃밭에서 자란 오행초를 수확하여 영양식 소스를 만들기위한 작업을 서로 숙의중에 있는데
나는 한번도 먹어보지 않은 '오메가3'가 그안에 담뿍 들어 있다고 한다.  나는 어렸을적 시골에서 자랄때 밭이 이잡풀이 너무나 많이 자라 뽑아내라는 어머니의 잔소리가 그렇게도 싫었던 기억이 더 많이 Overlap될 뿐이다.












 어머님 만수무강 하세요.  어떠십니까? 흔들다리위에서 만세 부르시는 그기분 저도 조금은 이해할것 같습니다.




동생은 환자들의 생명을 책임지는 일을 하고 계시지만, 음식솜씨 또 일가견이 있는것 같다.   톳국수 냉면은 처음 먹어 보는 별미였다.  동생되시는분이 손수 이곳까지 준비해 오셔서 야외에 나온 기분이라도 내기위해 윗층 부엌에서 바로 밑에 있는 향나무숲으로 자리를 옮겨 한껏 Picnic나온 기분을 즐겼고, 맛은 과연 듣던데로 특유의 냉면, 기억에 남을 점심이었다.

여러 음식들을 준비해서 이곳까지 많이 와서 모두가 맛있고 즐겁게 매 식사때마다 즐겼는데
오늘의 점심은 유달리 톳국수로 냉면을 동생이 만들어 주셔서 향나무 밑에 테이블을 펴놓고 맛을 한껏 즐겼다.  정성이 너무나 많이 고마웠다.




 토론토집으로 출발하기전, 동생은 텃밭에서 자라고 있는 들깻잎을 Lunar와 함께 차곡차곡 따고 있다.  토론토로 되돌아가는 동생에게 줄것은 직접 씨뿌려 가꾸어서 자란 깻잎 몇개라도 나누어 먹고 싶은 마음에서 인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