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uly 29, 2012

한국을 보면서 걱정했는데...세계인구는 계속 폭발한다고

http://www.latimes.com/news/nationworld/world/population/#maps

고국의 언론에서,요즘 젊은층 특히 결혼 적령기의 사람들이 결혼을 하지 않고, 인생을 즐기고 있어, 이대로 가면 인구가 줄어 들게돼, 국가적인 대책이 있어야한다는 뉴스를 보면서, 아직 이민보따리를 싸지 않고 살고있을때,  국민적인 Campaign으로 "아들 딸 구별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고, 산아제한을 국가적 시책으로 홍보했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오늘 LA Times의 기사는 내가 생각했던 기우에서 너무나도 동떨어진 내용이어서 또 한번 내머리속을 흔들어 놓는것 같았다.  내용을 간추리면 지난 2세기 동안에 전세계의 인구는 기아급수적으로 폭발하여 70억명이 넘었다는 것이다.  미국의 인구도 3억명이 훨씬 넘었단다.

고국 대한민국에서는 신부감이 없어서, 동남아시아에서 젊은 여성들을 며느리로,아내로 맞아들여 살아가고 있는 다문화 가정이 많다는 뉴스를 많이 들어왔다.  한가지 이상한것은 남녀의 성비가 거의 50대 50으로 비슷한데, 한국의 안방규수와 여자들은 어디로 잠적했다는 말인가?

몇년전의 통계를 보면 성비가 남자 110명에 여자 100 명 정도라고 들었다.  조사를 어떤 방식으로 했는지는 잘 알수 없으나, 인구통계를 하는데도, 한국식의 빨리빨리 패턴이 적용됐던가 아니었을까?라는 의문도 던져 본다.  그만큼 남아선호 현상의 전통이 그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현대화의 물결에서 뒤쳐지는 한국인들의 또 다른면을 확실히 보여 주었었다.  몇년후에는 신부감이 모자라 노총각으로 평생을 살아야할 그날이 올수도 있다고 허들갑을 보았었다.

불과 몇년밖에 지나지 않은 요즘의 고국에는 딸 선호 현상이 역으로 일어나고 있다고 하는 뉴스도 가끔씩 본다.   이현상 또한 경제적 가치와 연결지어서 생각하는 한국사회의 배웠다고하는 지성인들의 Ego현상을 단면적으로 나타낸것으로 이해된다.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개방되면서, 돈벌이면에서 쓸모가 더 있어 보이고, 여성고유의 세밀함과 보살핌면에서 부모로서의 계산이 딸을 생산하는게 더 이익이 된다고 보는 면이 가세된것 같다.  속담에 '나무를 보지말고 숲을 보라'는 말의 뜻을 이해 할려고 한다.  내가 귀엽고 돈잘버는 딸이 있으면, 내가 똑똑하고 경제적 자립이 강한 아들이 있으면, 숲전체를 고르게 형성시키기 위해서는 상대적이라는면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창조주는 Unbalance를 용납하지 않기에,  다른 가족들에서  평준화를 시켜 주기 때문이다.  절반의 인구가 예쁘고 똑똑하면, 짝을 찾기위해서 그렇치않은 쪽을 넘봐야 한다.  숲을 놓고 봤을때 그렇다는 얘기이다.

농촌의 남자들이 결혼을 해야하는데, 상대자가 없어  신부감을 수입해오기 시작한지가 한두해 전의 일이 아니다.  사회생활의 맛에 푹빠져 결혼을 기피하는 여성들이 늘고있다.  몇년후에는 여성이 숫자적으로 우위를 차지하여,  이또한 사회적 골칫거리를 만들 가능성이 보인다.  전쟁을 치른 나라에서나 볼수 있는 기현상이 한국사회에 곧 나타날수도 있다는 논리다.

캐나다는 인구의 증가율에 비해 땅이 너무나 넓어 이민을 매년 약 25만 내지 30만명을 받아 들인다.  조국 대한민국은 땅덩이도 좁은데,  짝을 찾기위해 신부감을 수입해 온다. 뭔가 nosense가 그속에 존재하고 있어, 웃긴다는 소리밖에 더 표현할 방법이 없다.

사회가 변하고 개혁이 일어나고..... 그런 와중에 일어나는 일시적인 현상을 고국의 언론은 장거리는 보지 않고, 단거리만을 보는 시각을 마치 사회전체가 큰 문제에 직면해  있는것 마냥 떠들어 댄 그책임을 몇년후에는 어떤식으로 답해 줄것인가?   이러한 현상을 잘사는 서구사회에서는 남녀평등이니, 여권신장이니 하면서 2차대전 전후를 통해서 이미 겪었다.  일시적인 현상이었음을 한국의 언론은 왜 사실데로 독자들에게 전해 주지 못하고 호들갑을 떨어 댔을까?

현대를 살아가는 한개인이나, 국가는 혼자서는 자립이 힘들다.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지구의 인구가 팽창한다면, 그속도만큼 맞추어 정책을 펴고 홍보해야한다. 

인위적으로 잠시동안은 인구조절이 가능하다고 믿을수 있겠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그것은 인위적으로 조절할수있는 영역밖의 창조자의 권한이라고 본다.   그렇타면, 요즘 고국의 시골에가보면, 폐쇄한 학교들이 있음을 보았다.  헐리기도하고 용도를 바꾸어 시장으로, 아파트 단지로 변하는것을 보았다.  너무나 빨리 바꾸는것만이 최선책이 아님을 생각해 봤으면 한다.   뒤늦게 깨닫고 다시 되돌리려고 하면, 그비용을 누가 감당할것인가?  후손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주는 선조들이 되지 말아야 한다.

혼자 잘살아도 세상은 살맛이 없어진다.  상대적이어야하니까.   보릿고개를 갖 넘긴지 몇년 안된 뒤의 풍요로움속에서 커가는 젊은이들이여, 너무나 계산적으로만 사고하는 방식을 지양하라.  캐나다나 미국처럼 이민으로 형성된 나라가 아닌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에서 살아가는 나라의 국민들중에서, 한국에서 처럼 여자가 없어서 신부감을 외국에서 데려오는 나라가 있다는 소식은 못들었다.  절대로 여자가 없어서가 아니다.  자신의 능력을 고려치 않고, 과대망상에 빠져 있는 자신들도 문제지만, 뒤에서 부추키는 부모들의 잘못이 큰 몫을 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언제부터 부모님들이 딸들을 지금처럼 받들어 키우고 상대 했던가? 그래서 딸들을 한국최고의 남자들한테만 시집 보내겠다는 망상을 가지게됐는가?

유엔의 통계를 보면, 한국의 인구가  줄어들었다는 표시는 없다.  한국의 언론에서 그렇게 추정하고 섣부른 예측을 했을 뿐이다.  아무리 결혼을 회피하고 독신주의를 부르짖는다 해도 말없는 majority는 남녀간에 접촉을 갖게되고, 이치적으로 다음세대를 생산하게 되여 있다. 그것이 종족 보존의 철칙인것을, 머리에 먹물이 들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뒤흔들고 바꿀수는 없기 때문이다.   인구 감소정책의 해결이 문제가 아니라 팽창하는 인구의 대책을 장기적으로 세워두는 혜안을 갖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Saturday, July 28, 2012

7/27 Armistice day 행사를 치르면서....mannerism이 두렵다.








또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금년에도 7/27 Armistice Day 행사를,한국전에 참전한 한국군과 캐나다군들과, 재향군인회원들 그리고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땡볕속에서,한국전에서 목숨을 달리한 캐나다군들의 위패가( Wall of Remembrance) 모셔져 있는, Meadowvale Cemetery에서 엄숙히 진행 됐었다.  온주 총독도 참석한것을 보면 분명히 국가에서도 이행사의 의미를 깊이 깨닫고, 역전의 용사들에게 감사의 표시를 하고 있는것은 분명한것 같다.

해마다 행해지는 이행사를 지켜보면서, 어쩌면 흘러가는 물처럼, 때가 되니 참석하여, 위패앞에 서서 Rouse하고 그리고 헌화하고, 축사하고......
진정성이 많이 퇴색되지는 않는지?  이들의 죽엄은 정말로 숭고한 것인가?  오늘처럼 문명이 발달된 사회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이 그들의 죽엄이 나와는 무슨 상관이 있나를 한번
생각이나 하면서, 오늘을 맞이 하는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명색이 향군회장이라는, 군대를 다녀온 당사자인 나자신도 이런 망상(?)을 하는판인데,  향군과는 아무런 상관 없다고 하면서 살아가는 뭇사람들에게는, 어쩌면 생활의 리듬을 깨는것 쯤으로 치부할수도 있을것 같다는 생각을 깊이 해본다.

조국 대한민국에서는 오늘 7/27을 맞이하여 판문점에서 유엔군 사령관을 비롯한 50여명이 겨우 모여서 휴전의 뜻을 기렸다는 뉴스를 접하면서,   국민들, 특히 종북좌파들의 생각은 이미 6/25의 처절했던 비극은 뇌리에서 사라진지 오래임을 깊이 느꼈다.   어쩌면 왜 나만이 재수없게 군대에 갔어야 하고, 목숨을바쳐야 했는지에 다시 생각을 깊이 해봐야 할 정도로 조국 대한민국은 6/25나, 7/27 그날을 잊혀져 가는 풍습쯤으로 여겨지고 있음이 마음을 무겁게 한다.

그날 이후로 휴전선의 철책은 더 높아지기만 했고, 병사들의 두눈에서 나오는 빛은 더 초롱초롱 하기만 하다.  누구를 위해서 이젊은이들이 아까운 시간을 휴전선 지킴이 노릇을 해야 하는가?   멍해져 가는 나자신의 기억과 생각을 다시한번 추스리게 하는, 그래서 젊음을 바쳐 조국을 구해준 님들의 희생을 결코 잊지않겠다라는 각오를 새롭게 해주는, 아까운 글이 오늘 우리 향군 웹싸이트에 올라와서 여기에 옮겨 싣는다.  일종의 경종인것으로 나는 느꼈다.

www.kvacanadaeast.net



 
“임들은 진정 위대하셨습니다!”
- 제59주년 한국전 정전협정기념일에 즈음하여 -
박 남 석 (토론토)
 “겨레와 나라위해 목숨을 바치니/ 그 정성 영원히 조국을 지키네/ 조국의 산하여 용사를 잠재우소서./ 충혼은 영원히 겨레 가슴에/ 임들은 불멸하는 민족혼의 상징/ 날이 갈수록 아~ 그 충성 새로워라.” 지금부터 59년 전 1953년7월27일 오전10시12분, 유엔군수석대표 윌리엄 K‧해리슨 미 육군 중장과 공산군수석대표 남일 북한군 대장이 판문점에서 한국전 정전협정문서에 서명하는 11분간의 조인식에 수많은 외신기자들이 자리를 지켜보았다.
 해마다 7 월27일엔 브램튼 Meadowvale 참전용사묘역 전몰캐나다장병 516명 위패(位牌)를 모신 ‘위령의 벽’에서 한국과 캐나다 재향군인회원들이 함께 모여 한국전 정전협정기념식을 갖는다. 전쟁의 참상과 교훈을 상기시키고 반공정신을 가다듬는 한편, 참전, 전몰용사들과 그 유가족들에게 명예를 선양하는 의미를 되새겨 영령(英靈)들의 넋을 기리며 엄숙히 가슴에 손을 얹고 고개 숙여 명복을 빌어마지 않는다. 그들에게 우리들이 그냥 단순히 살아온 것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며 이끌어가야 하는가를 삼가 전해드리고 싶다.
안보가 바로서야 나라가 올바로 선다. 실제로 우리들이 경험으로 알고 있는 사회적인 교훈이지만 전쟁은 목적달성을 최우선으로 삼는다. 6‧25전쟁은 북한군의 기습공격으로 시작되어 UN군의 반격, 중공군의 개입과 후퇴, 전선의 교착상태와 휴전모색과 국면타개(局面打開)를 거치면서, 국내외적으로 복잡한 정치적인 갈등 속에서 37개월 동안이나 공방이 전개되었다. 피아간에 치열한 전쟁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명과 재산피해를 입었지만 1953년7월27일 형식상의 종지부를 찍은 정전협정이 채결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른하늘에 갈급(渴急)하는 대지(大地)를 적셔줄 빗방울이 귀해졌는지 삼복의 맹위(猛威)가 여간 아니다.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승리할 수 있다는 경구(警句)가 있다. 우리들이 겪은 굴욕의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아낼 줄 알아야한다. 전화(戰禍)에 비참했던 과거를 애써 무시하거나 모른 척 하면 더더욱 곤란한 일이다. 치욕의 부끄러움과 역사를 기억하지 않으려는 사회나 군대는 같은 이유로 다시금 겪을 고통과 그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리움 때문에 삶에는 향기가 있다”고 한다. 아침햇살에 초록 잎이 짙어졌을지언정 사랑하는 남 편과 자식이 전쟁터로 떠난 뒤 그들의 무사귀환을 손꼽아 기대했던 어느 날의 전사통보는 청천벽력이었을 테다. 피고 지는 일만이 인생은 아니었거늘… 가족들의 무너져 내린 가슴을 어이 헤아릴 수 있을까. 슬픔의 여운은 기쁨보다 훨씬 더 오래간다. 7‧27 정전(停戰)기념일은 6‧25가 ‘잊혀져간 전쟁’으로 잘못 인식되어지고 있는 우리들에게 부끄러움을 안겨준다. 겨레와 나라 위해 목숨 바치신 분들을 기억하고 고귀한 희생정신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초석이었음을 가슴깊이 새겨야하겠다.
 “이슬이 맺혀 눈 흐려지고, 차마 목이 메어 그 귀한 이름 다 부르지 못한다 해도 임들은 진정 위대하셨습니다.” 그 들의 용기와 희생이 오늘날 한국을 반세기만에 융성한 나라로서 도약하는 기틀을 구축해준 은혜를 꿈속에서라도 망각해선 아니 될 일이다. 정의와 자유가 넘치는 민주주의의 보편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싸운 참전우방국들과 용사들에게 다시 한 번 마음속깊이 우러나는 감사드린다.
 “너무 쉽 게 나를 곱다고만 말하지 말아 주세요. 한 번의 피어남을 위해 이토록 안팎으로 몸살 않는 나를 남들은 눈치 채지 못하는 혼자만의 아픔을 노래로 봉헌해도 아직 남아 있는 나의 눈물은 어떠한 향기나 빛깔로도 표현할 수가 없어요. 피어 있는 동안의 모든 움직임이 그대를 위한 나의 기도인 것처럼 시든 후에도 전하는 나의 말을 들어 주세요. 목숨을 내놓은 사랑의 괴로움을 끝까지 견디어내며 무거운 세월을 가볍게 피워 올리는 바람 같은 꽃 죽어서도 노래를 계속하는 그대의 꽃이에요” [이해인의⟪꽃의 연가⟫중에서]
2012년7월27일 KREP

Wednesday, July 25, 2012

알코홀 판매 시스템, 바뀌어야 한다. 너무 늦었다.

 

 

Ontarians want modern alcohol retailing

Published on Tuesday July 24, 2012

Colin McConnell/Toronto Star The legislation that created the government-run LCBO was passed in 1927. (July 13, 2012)
Dave Bryans
The alcohol retailing system in Ontario today is essentially the same one created by the Ontario government 85 years ago. The legislation that created the government-run LCBO, and the now foreign-owned Beer Store, was passed in 1927 — that’s the same time when Al Capone and his gang were in their heyday in prohibition era Chicago. But while the rest of Canada and jurisdictions around this province have modernized their alcohol retailing systems, Ontario’s remains a relic of the past.
Ontarians look around to their neighbours in Canada and the U.S. and see convenient alcohol retailing just about everywhere but at home. Tourists coming to Ontario continue to be surprised and bewildered at the awkward and inconvenient system we have in place. Perhaps our culture of driving has made those extra 10 or 15 minute drives to get some wine for dinner part of our routine, but it’s clear Ontario wants change.
For some time Ontarians have been saying that our province should move forward and broaden the retailing system. We believe now is the time to have that discussion.
At Queen’s Park Wednesday, a petition will be unveiled that is believed to be the largest in Ontario’s history. In the petition, 112,500 Ontarians from over 220 cities, towns and villages signal their support for beer and wine in convenience stores. That’s nearly 1 per cent of the population of the province of Ontario.
The people who signed this petition aren’t special interest groups. They’re voters and community members. They’re our neighbours. They support New Democrats, Liberals and Progressive Conservatives. They’re parents and workers — they’re responsible adults who want to leave the car at home once in a while and walk to their neighbourhood convenience store to get drinks for that BBQ with friends.
In fact, the public support is even broader than what’s shown in the petition. In poll after poll, a large proportion of the population has shown support for alcohol retailing to be broadened to include convenience stores. Ipsos Reid’s study for the Ontario Convenience Stores Association (OCSA) in late 2011 showed 67 per cent of Ontarians who shop at the foreign-owned Beer Store or government-run LCBO support convenience stores selling alcohol.
Many who oppose this idea raise the spectre of careless retailers selling alcohol to minors — somehow only the government-run LCBO or the foreign-owned Beer Store could do that job. To the contrary, the case for broadened alcohol retailing in Ontario is further strengthened by the track record of convenience stores in age verification. Convenience stores sell more age-restricted products than any other retailer and OCSA members do over 36 million age checks every year to deny sales to minors.
An independent study in 2011 that looked at the job the LCBO, the Beer Store and chain convenience stores do with age checks. The study used two groups of secret shoppers, minors aged 15-18 to randomly test retailers on how well they check for age. Convenience stores scored the highest with an 87.3 per cent pass rate, The Beer Store next with 80.7 per cent and LCBO last with 74.6 per cent — meaning 1 in 4 minors successfully purchased age-restricted products from LCBO, and 1 in 5 from The Beer Store — compared to 1 in 8 for convenience stores. While convenience stores are always striving to do better, we’ve demonstrated the ability to responsibly sell age-restricted products to the highest standards in Ontario.
Last year, when the Ontario government loosened liquor laws at festivals, the premier commented the change was being made because “we’re just kind of growing up a little bit as Ontarians.” Our customers are responsible adults and they’re of the mindset the minor tweaks the government has made aren’t enough. Ontarians are speaking clearly: they’re not happy with the antiquated system we have in Ontario.
Now is the time to have the discussion on expanded alcohol retailing in Ontario. The public wants it, a number of convenience stores in Ontario already sell alcohol, and our industry has shown we can sell age-restricted products responsibly. But change is hardest where there’s history and Ontarians are facing 85 years of entrenched business, political and government interests. Our hope is the 112,500 Ontarians who are putting their voice forward at Queen’s Park can be the next step forward toward a goal that millions of people in the province support.
Dave Bryans is CEO of the Ontario Convenience Stores Association.


인생살이가  시간이 흐를수록 편리하게 바뀌어지고 있는게 오늘 지구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고 느끼는 실정이다.

여행을 다녀봐도, 알코홀을 전면금지하는 이슬람 국가를 제외하고는, 어느나라를 가든, 생활에서 뗄수 없는 음료수중의 하나인 알코홀은 쉽게 구입하여 필요시 이용할수 있다는것을 직접 눈으로 보았었다.

캐나다에서도 다른 주(Province)에서는, 특히 퀘백주같은데서는 더운 여름철에 길거리를 가다가도 목이 마려우면 금새 눈에 보이는 Convenience Store에 들어가서 맥주를, 다른 Soft Drink사서 마시듯 구입하여 목을 추기곤 한다.

유독 내가 살고 있는 Ontario주만이 아직도 LCBO에서만 구입할수 있다.  자유롭게 세상을 살아가는 다른나라에서 여행온사람들은 이러한 사회적 구조를 이해  하기 힘들어 한다.

온주정부에서는 알코홀 구입이 Convenience Store에서 가능할 경우, 남용이 사회적 혼란을 일으킬수 있다는 이유로 오늘 현재 까지도 규제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 그러한 규제를 조사한 통계를 보면, 실제로 알코홀을 독점 판매하는 LCBO의 Minor여부를 점검하는 비율이 가장 떨어져 놀라게 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15세에서 18세 사이의 Minor들을 상대로 조사한 내용에 따르면, 정부나 LCBO가 가장 걱정했던 Convenience store에서 Minor Check율은 87.3%, License를 받아  Beer를 팔고 있는 Beer Store에서는 80.7%, 그리고 가장 잘 점검하리라 믿었던  LCBO Store에서는 겨우 74.6%였다. 

이번에 온주 전체 인구의 1%가 넘는 주민들이, 정당 지지에 상관없이 Petition을 작성하여 온주 국회에 제출하여, 옛날 봉건주의 사회에서나 있을법한 낡은 법을 고쳐서,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는 것이다.  환영할 일이다.

요즘처럼 열사의 나라를 연상케 하는 폭염이 지속될때는 많은 주민들이 인근의 넓은 공원으로 뛰쳐나가 더위를 식힌다.  많은 사람들이 Ice Box에 음료수를 준비해 온다.  그속에는 어김없이
Beer can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혹시 지나치는 Police Officer에게 발각될까봐, 흰 Paper Towel이나, 신문지로 둘둘 말아서 Beer can을 보이지 않게해서 마신다.  물론 대다수의 순찰 경찰들은 이를 보고서도 모른채 지나치곤한다.  엄밀히 따지면 공공장소에서 허가없이 알코홀을 마시면 경찰의 단속 대상이 되는것을 주민들이 알기 때문에 이러한 편법을 쓰는것이다.  이러한 행동은, 주민들의 입장에서는 위법인줄 알지만, 현실적으로 갈증을 해소하기위해서이기 때문에 눈감아 달라는 신호(?)이고, 경찰이나 단속요원들은 현실에 맞지않는 실정법을 집행 하면서 모처럼만의 야외 나들이 분위기를 깨뜨리는 무뢰한이라는 낙인 찍히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엄밀히 따지면 불법이 공생하는 현실의 한단면이다.  정치꾼들 귀담아 들어라.

정치꾼들은 이제는 세상을 똑바로 볼줄 아는 혜안이 필요하다.  꼼수는 더이상 통할수 없다.
말없는 다수의 요구를 알아서 해결해 주는 진정한 나의 대변인을 다음번에는 꼭 찾아서 온주 의사당에 보내야 겠다.  지금까지 내가 투표할때는 지지 정당을 선택하여 귀중한 나의 선택을 표했었는데, 다음에는 나의 의견이 포함된 주민들의 삶을 편하게 해주겠다는, 그것도 알코홀 판매를 Convenience Store에서 자유로이 할수 있도록 입법을 추진 하겠다는 공약을 포함한 후보에게 응원을 보내면서 그의이름밑에 꼭 찍어주겠다.

http://www.torontosun.com/2012/07/26/burka-clad-teens-lcbo-purchase-surprises-mcguinty



Tuesday, July 17, 2012

Brighton의 초기 정착민의 이야기.

Brighton의 초기 정착민의 이야기.

초기 이곳 Brighton의 정착민에 대한 비문에는 이렇게 씌여 있다.






"지금  이 비석(Monument)이 세워져 있는 골짜기는 Brighton의 첫 정착민인, Simpson 가족들을 기념하기위해 후손들이 세워 놓은 것이다……."라고.

"고향떠난 10 여년에 청춘만 늙었다"  라는 우리말 유행가 가사를 떠올려 본다.  이곳에서 오랫동안 이민자로서의 삶을 살면서, 조국 한반도가 얼마나 작은 나라인지를 새삼 실감 하고, 그안에서 지지고 볶으고 …. 정치꾼들은  국민들을 향하여 되지도 않은 말로 현혹하여, 다가오는 대선에서 대통령이 되겠다고, 입에 거품을 품어대는 모양새를 볼때면, 그들의 얼굴이 얼마나 두꺼울까?라는 상상을 하게된다.

동서 고금을 통해서 오늘을 사는 후세들, 특히 정치꾼들은 초기 정착민들의 삶의 진실성을 마음속으로 부터 터득하면서, 감사 하면서 살고 있을까?  아닐 것이다. 모든게 자기가 잘나고 똑똑해서 인것으로 착각(?)을 하면서 초기 정착민들의 심정으로 살아가는 대다수의 국민들을 우습게 내려다 보면서……어떤 제스처를 써서, 달콤한 말을 해서 마음을 살로 잡을까?로 시간을 허비하고 있을 것이다. 남의 뒷조사나 해서 마치 국가의 장래를 위해서, 국가의 경제적 부흥을 위해서 큰 사건을 창출해 낸것마냥 떠들어 대면서…..그러한 열정을 갖인 그들이 이곳의 비문을 읽어 본다면 어떠한 생각을 하게 될까?  아마도, 개척자로서의 모험과 능력을 인정해 주기 보다는, 큰 잘못을 저질렀기에 도망와서 숨어 살기위해 왔겠지?라는 억지 평가절하를 해서, 어느 한곳의 사람들이 뜸한곳에 던져 버릴 것이다. 초기 정착민처럼 순수한 열정으로 오직 봉사하겠다는 마음을 갖었으면 하는 마음이 가슴을 저며온다. 남북한 합쳐 7천만 국민들이 이들 몇명의 정치꾼들, 특히 사람 목숨을 파리목숨처럼 여기는 금수만도 못한 그자들이 이비문을 보고, 마음을 확짝 열었으면 좋겠다.

열사의 나라에 파견되여 중노동을 해서 외화를 벌어들인 노동자들, 월남 전쟁터에 가서 벌어들인 외화를 재투자하여 국가의 경제 건설의 초석을 다져 놓았더니, 그들에게 수고 했다는 소리는 고사하고,정치꾼들이 하는 소리라고는, 돈 몇푼에 목숨을 바꾸는 독재자였다라고 폄하하면서, 그후광을 제일 많이 입고 있는 자들이 누구인가? 정치꾼들이다. 외화를 벌어들인 노동자들, 목숨을 담보로 해서 남의 나라에가서 싸운 용감한 군인들…. 그들이 바로 Obadiah Simpson같은 개척자들임에 틀림 없다고 높이 치겨 세우고 싶다.

시골의 농촌에서 얼굴은 새까맣고, 콧등에서는 누런 코가 흘러 내려 입안으로 들락 날락 하고, 흙투성이인 헐렁한 바지가랭이 한쪽은 걷어 올리고 다낡어 떨어진 고무신짝 앞코에는 엄지 발가락이 들락 거리던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가끔씩 여름철 방학때는 서울서 시골 나의 동네의 외할머니댁에 내려온 같은 또래의, 머리는 스포츠형으로 깔끔하게 깍은, 얼굴이 하얀 아이들을 부러운 눈빛으로 쳐다보곤 했었던 때가 있었다. 그때의 나이는 불과 10살 전후 였을것으로 기억된다.

저녁때가 되면, 나의 어머니를 포함한 조그만 시골 동네의 어머니들은 '누구야' 라고 소리를 질러대여 진흙탕속에서 세월의 흐름을 잊은채 엉켜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찾곤 했던 그런 그시절에, 같은 또래의 12살난, 초기 이곳 Brighton의 정착민이었던 Obadiah Simpson씨의 아들은 황량한 벌판에서, 혼자남아 통나무집을 지키면서 가축들을 돌보았다고 기록은 써 있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 코흘리개들은 부모님들의 사랑(?)을 너무나 많이 받았었다고 이해를 해야 될까?

 북미대륙의 북쪽, 특히 이곳은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고 춥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강추위와 폭설로 덮히기 때문에 오죽 했으면 '동토의 나라'라고 불려졌을까.  교통도 거의 없다시피하고, 겨우 말이 끄는 마차에 의지하던 시대에 미국의 South Carolina에서 이곳 동토의 나라까지 올라 왔다는 그의 Pioneer적인 개척 정신은 어디서 발원 됐을까?

기록을 보면, 그는 UEL(United Empire Loyalists)신봉자라고 했다. 미국은 당시에 영국과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던때와 맞물려, 영국왕실의 절대 신봉자인Obadiah Simpson이 미국에서 살기에는 힘들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고향, South Carolina를 일찌기 떠나 오래 살아왔던 뉴욕주에서의 삶의 터전을 다시 Adolpustown으로 옮겨 살아오면서, 열심히 몇개의 Job을 뛰어 자금을 모은후 다시 Adventure를 감행, 이곳 Brighton에  1796년 2월달에 그의 아들과 함께 안착하게 된다.  좀더 마음에 평안을 얻을수 있는 곳에서 삶을 살기 위해서.

도착하자마 Simpson씨는 아들과 함께 통나무집을 짖고, 축사를 지어 삶의 터전을 닦은후, 바로 당시 12살 아들에게 집과 가축을 돌보도록 하고, 그는 바로 Adolpustown으로 되돌아 가는 마차를 집어타고, 3개월의 약정으로, 당시로서는 황야나 다름없는 벌판을 달렸다. 요즘의 아버지들이 Simpson씨와 같은 경우를 당한다면, 그런 결단을 내릴수 있었을까? 어떻게 보면 그아들은 씨받이 정도로 귀한 혈육이었을텐데….


밤이면 칠흙같은 어둠속에서 추위와 싸우고, 사나운 짐승들의 괴성이 무서워 움추러들고, 때로는 맹수들과 싸우면서 가축을 돌보았을 당시 12세의 아들을 생각해 보면서, 어린 그의 생각은 어떠했을까?를 추측해 보기는 어렵지 않을것 같다. 엄마 아빠를 그리워하면서, 하루의 해가 서산에 지면 분명히 또 하루가 무사히 지났음을 알리는 표시를 그어디엔가 했을 것이다. 먹어야만 삶을 지탱할수 있기에, 낯에는 토끼들같은 조그만 짐승 사냥에 사용키위한 도구들을 나름데로의 지혜를 짜서 만들고, 또 벌판을 헤맷을 것이다. 불도 피웠을 것이다. 어둠을 밝히기 위해서. 요즘 우리들의 삶은 참으로 배부른것 같다.

Simpson씨 가족과 같은 개척자 정신을 갖춘 선구자들 때문에, 이곳 북미 대륙은 오늘날에는 세계의 선진국으로 발전하고, 국민들은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 본다. 또한 우리같은 이민자들을 받아들이는 넉넉함을 유지 하면서 자유를 즐기는 나라가 됐다고 생각해 본다.

여기에 비문에 새긴 내용을 옮겨 본다.

UEI Rededicated, July 14, 1991.

In Yonder Sandy Dune lie the remains of the First settlers of Brighton District.
Obadiah Simpson of North Carolina, 1755-1809, and his wife, Mary Lord of west Chester county, N. Y. 1760-1805.

UE Loyalists DeLangeys Regt. settles on Lot 4. Con2. Then TP
of Cramahe. Now TP of Brighton March 1796.
Erected by their decedents 1931.

당시의 상황을 설명한 Bulletin Board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이곳의 골짜기는 Brighton의 첫 정착민인, Simpson가족들을 기념하는 곳이다.
Obadiah Simpson과 그의 아들은 1796년 이곳에 안착, 바로 거쳐할 통나무집을 짖고, 가축 막사도 지었다.  그런다음 그는 남은 식구들을 데려오기위해 Adolpustown으로 되돌아 갔다.  그때 `12살인 그의 아들에게, 그들이 다시 되돌아 올때까지, 3개월간, 집을 지키고 가축을 돌보라는 부탁을 하고 떠났었다.

Simpson가족은 영국왕실의 신봉자로 영국에 끝까지 충성하기위해, 뉴욕주를 떠나고 만다.  그들은 Adolpustown에 정착후 Brighton으로 이사하기전까지, 돈을 모으기위해 가리지 않고 일을 해댔었다.

Obadiah Simpson과 부인 Mary Lord는 이곳으로 부터 남쪽에 있는 모래 언덕바지에 매장되여 있으며, 그들의 자손들은 지금도 이곳 Brighton지역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Tuesday, July 10, 2012

Edge walk on top of CN Tower. 일생에 한번은......

















그렇게도 커 보이던 Rogers Centre의 지붕이 마치 거북이 등처럼 땅 바닥에 딱 붙어 있는것 같이 보인다.  동북쪽으로 보이는 Canadian First Place는 멀리 발아래 짖눌려 있는것 처럼 보인다. 바로 발아래에 Ontario호수의 서쪽편 맨 끝에 아스라히 보이는 검정색의 점같은 모양은 멀리 Niagara Falls지역에 있는 Tower들이라고 Edge Walk Guide인 Amy가 설명해 준다.
겉으로는 태연한척 했지만, 바로 발아래를 내려다 볼때는 현기증이 일어날것 같기도 했다.

지난 3월달에 잘 알고 지내는 친지분으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었다.  Edge Walk을 해보지 않겠느냐? 라고.  "Edge Walk이 무엇이지요?". 나는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기에 언뜻 이해가 되질 않았었다.  "CN Tower 꼭대기에 있는 Guard Rail도 없는 전망대 밖에 설치되여있는 난간을 걷는것입니다" 라고 설명해 주셨다.  몇년전 뉴욕 맨허탄에 있는 Empire State Building 꼭대기에 있는 전망대에 올라가서 눈아래로 끝없이 펼쳐져 있는 뉴욕시내를 눈요기 했던게 연상됐다. 또 2년전 CostaRica를 여행 하면서, Jungle속에서 계곡과 계곡을 이어놓은 밧줄을, 길게는 약 1킬로까지 긴 구간을,도르레를 타고 정글위를 날랐던 기억도 금방 되살아나게 하는, 그분의 설명이 구미를 당겼었다. "예 참석하겠습니다. 날자가 언제지요?"

Brighton에 있는 Cottage에서 Relax하고 있다가 오늘 7월9일 오후3시에 토론토의 보금자리로 되돌아와서, 오랫만에 Street Car를 타고 CN Tower에 도착하기전, CBC본사 건물안에서 고향후배가 경영하고 있는 Sushi Restaurant에 들려 저녁을 고맙게 잘 얻어 먹고, 7시 00분 시간에 맞추어, 후배부부와 우리 부부가  CN Tower에 갔었다. 그곳에는 Edge Walk을 제안했던 친지분이 우리 부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 다른 한분도 나보다 조금 늦게 도착 했다. Lunar와 후배 부부는 별도로 입장권을 구입하여 전망대에 올라서 나를 비롯한 일행이 Edge Walk하는것을 내려다 보기로 하고 헤여졌었다.

시간이 되서, Reception Desk에 호출되여 Receptionist로 부터, 먼저 서류에 서명을 하라는 설명을 들었다.  모든 책임은 나본인이 지는 내용의 서류다.  기분이 좀 언짢게 이해된다. 잘못되여 사고를 당했을때 Edge Walk회사는 책임을 지지 않겠다고, 그러나 입장료는 세금포함해서 $200달러 상당을 거두어 가면서 말이다. 참석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러려니하고 서명을 하는데, 나라고 별 뾰쪽한 수가 있겠는가.  하나의 거쳐가는 절차쯤으로 생각하고 서명을 끝냈다.  8시 정각이 되니 옆의 방으로 안내되여, Uniform을 입고, 오래전 카누피를 탈때 몸에 동여 매었던 것과 같아 보이는 보호멜빵을 동여 메고, 폐활량을 재고, 몸속에 혹시 무기(?)를 숨기지 않았나 하는 노파심에서 금속 탐지기의 검사를 거쳤다.

우리팀은 모두 5명, 다른 2명은 여자분들로 미국 New Jersey주에서 온 관광객이라고 했다.
Amy양이 우리의 Leader겸 Guide다. 각자 소개를 부탁 받았을때, 나는 Brighton에서 왔다고 했더니, Amy양이 반가워 하면서 자기는 '벨빌'출신이라고 한다. 서로 인접해 있는 동네이다.
고속 엘리베이터에 모두가 탑승하자, 약 1분간을 달려서 차분히 정지한다. 지상 356미터란다. Amy양은 겁이 없는 모양이다. 이런 일을 매일같이 하면서 고객들과 웃음으로 시작해서 fun을 연출해 내다니… 문이 열리고 다시 다른방에 안내 됐다.

방안에는 머리윗쪽에 설치된 Rail에 밧줄이 달리 도르레가 걸려있고, 밧줄 끝을 내가 몸에 꼭 맞게 조절해서 메고 있는 멜빵의 고리에 단단히 연결 시키고, 그것도 부족하여 다시 locking을 전문으로 하는 또 다른 직원이 하나 하나 점검을 했다. 모두의 점검이 끝나니, 그때에서야  Edge로 통하는 문에 달려 있는 비밀 Button을 눌러 문을 열고, 하나씩 Edge Walk으로 Amy양이 앞장서고, 우리 일행이 뒤따라 나갔다.

Amy양의 끝없는 설명은 이어진다. 무릎을 거의 구부리고 등을 Edge쪽으로 돌리고 뒷걸음을 조금씩 쳐서 Edge 에 발바닥 절반을 걸치고, 무릎을 펴면서 일어선다음 이번에는 몸을 완전히 뒤로 젖히고 양손을 밧줄에서 떼고, 눈은 밑을 보지말고 바로 앞쪽을 응시한다. 옆에서 보면 완전히 허공에 떠 있는 모습이다.  만약에 밧줄이 끊어 진다면, 그길로 생은 끝인셈이다.
이번에는 동남쪽으로 옮겨, 반대로 등이 안쪽으로, 배가 바깥쪽으로 해서 아까와 같은 자세로
몸전체를 밧줄에 의지하고 45도 각도로 기울어진다. 한사람이 Amy양이 훈련 시킨데로 동작을 끝내면, 모두가 함성이다. 무사히 용감히 잘 해냈다는 동료의 발로이다.

남쪽으로 바로 발아래 보이는 옛날 철도기관차고가 보인다. 건물은 완전 원형이다. 건물의 가운데에는 기관차의 방향을 원하는 쪽으로 돌려주는 Turn Table이 뚜렷히 보인다. 문뜩 옛날 고국의 철도청에서 근무할 당시, 청량리 기관차 사무소에서 Turn Table을 작동시켜 1백50톤이 넘는 무거운 기관차의 방향을 자유자재로 바꾸는 현장기술원들의 일하는 모습이 ovelap 된다.  흔히 통근열차로 불리는 여객 열차가 지렁이가 기어가는것 처럼 꿈틀 꿈틀 모습을 비틀면서 Union Station으로 들어온다.  Double Deck으로 되여 있어 높이 보이곤 했었는데, 영락없이 지렁이 모습이다.  다시 방향을 동쪽으로 옮겨 또한번 묘기(?)를 연출한다.

조금 오른쪽으로는  Centre Island에 있는 Local Airport의 활주로가 아주 짧게 보인다.
지난 5월달에는 아들녀석이 이곳 비행장을 통해 뉴욕에 MBA동창들을 만나러 갈때, 내가 Ride해주던 생각도 난다. 그때는 느낄수 없었던, 활주로가 저렇게 짧은데 비행기가 어떻게 뜨고 내릴까?라고 공상을 하고 있는데, 이를 증명이라도 해주듯 바로 조그만 50인승쯤 되는 여객기 한대가 활주로에 사뿐이 Landing 한다. 그리고 활주로의 1/2도 채 못가서 정지하고  Tarmac을 빠져나와 계류장으로 기어간다.

바로 멀지 않은 곳에는 토론토의 심장부인 금융가를 포함한, 마천루들이 즐비하게 보인다.
RBC의 HQ빌딩의 각창문에는 약 70달러 이상의 금으로 도금되여 있어 모든 창문이 금빛으로  번쩍인다고 Amy가 설명해준다.  정말로 그빌딩의 창문만이 금빛임을 알수 있다. 그옆에는 Scotia은행의 본점건물, 그남쪽으로는 TD Bank의 본점건물, 그리고 이름모를 skyrockets 들이 즐비하다. 바벨탑이 따로 있는게 아니다라는 생각도 든다. 내가 지금 지상 356미터 이상떠 있는곳도 일종의 바벨탑임이 분명하다.  캐나다의 경제가 이곳에서 생성되여 전국으로 퍼져 나간다고 하는데, 이곳만 숲이 없어 보인다.  하늘 높이 솟아 올라있는 시멘트 덩어리다.
그외의 시가지는 숲속에 초록색으로 파묻혀 있어 대조를 이룬다. 

Edge Walk을 하고 있는 이곳에서 부터 약 150미터 이상의 또 다른 바벨탑이 Tower 중앙에 우뚝 솟아 있다. 모두 합치면 500미터가 넘는 셈이다. 11킬로이상 높이 떠 가는 비행기를 타면서 뭐가 부족하여, 이렇게 탑을 쌓고 있는가?  사방으로 보이는 눈아래 시가지 건물솦속에는 현재 집짖는데 사용되는 crane 들이 긴 Arm을 펼친채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일행 모두가 무서워하는 기색은 전연 보이지 않는다.  지난해 Cottage에 놀러온 일행들과Campbellford에 있는 Trent Serven을 가로 지르는 Suspension Bridge를 건널때, 한분은 다리 아랫쪽 물줄기를 보면서 현기증이 나서 건너지 못하고 포기했던 생각이 난다. 그다리의 높이는 불과 10미터정도 밖에 안됐었는데…

Amy양의 설명은 계속된다. 현재 지구상에는 3개의  Edge Walk Tower가 있다고 설명한다.
우리가 서있는 CN Tower, New Zealand에 또하나, 그리고 최근에 중국이 이대열에 동참 했다고 한다.  CN Tower도 불과 1년전인 작년 8월달에 관광객들을 상대로  Edge Walk을 시작했다고 한다. 토론토의 명물이자, 관광객들을 상대로 한 세계의 명물이 되고 있음을 본다.

마음속으로 $200달러 상당의 입장료를 내고 담력을 시험해볼만한 가치가 있나?라고 여겼었는데, 더 늙기전에 누구나 한번씩은 경험해 볼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음을, 그래서 비행기 타고 움직이는 높은곳이 아닌, 356미터 정지된 지상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는 경관은 여기서만이 느끼는 특히한 경험으로 남게됐다라고 감히 누구에게나 말해주고 싶다. 기념으로 Edge Walk할때 Climax로 여겨지는 순간을 포착한 장면과 DVD를 하나씩 만들어 선물로 준다. 두고두고 기념으로 간직할것 같다.  Edge Walk을 무사히 마쳤다는 증명서까지 내이름을 넣어서 만들어 준다. Turkey의 Cappadocia 에서 열풍선을 타고 여행을 마쳤을때, Pilot 가 비행증명서를 만들어 주었던때가 갑자기 기억에서 떠오른다.

이번 Edge Walk하는중에 찍은 사진은 하나도 마음에 드는게 없는점이 아쉽다.
규정상 Edge walker들은 사진 촬영이 허용안되기 때문이었다.  내가 찍었더라면 훨씬 더
스릴있는 장면들이 이어 졌을텐데......마음에 안드는 사진에 대한 핑계가 충분히 됐을까?

감사.  

Wednesday, July 04, 2012

단 몇시간 만남과 사귐에서 아끼게된 후배들 부부가 든든하다.

 http://www.youtube.com/watch?v=EAZYQ5ZtCMk&list=UUuqYC13p_mwWHocPyzUaW7g&index=1&feature=plcp


 Warkworth golf장은 나에게는 낯선곳이 아니기에, 또 최연장자이기에 맨먼저 Teed off 기회를 나에게 주어지는 honour를 받고, 내려친 Driver는 Gallery들의 기대와는 완전히 다른, 볼에  날개를 달아주지못해 바로 추락하는 happening으로 서막을 장식하고 말았다.

지난 일요일, Canada Day(캐나다 독립 기념일)는 마침 일요일이었다.  평소 잘 알고 지내는 후배부부가 골프라운딩도 하고, 하룻밤 카테지에서 long weekend를 보내고 싶다는 의견을 며칠전에 전하기에 우리 부부는 OK하고 같이 Join해서, 바쁘게 짐들을 챙기고, 달려와 골프라운딩을 하는 첫장면이 이렇게 전복(Capsizing)하고 만것이다.

인생후배 한카플은 서로 잘 알고 있지만, 다른 4카플은 서로 알고  지내면서 인사는 하고 지냈지만, 같이 어깨를 비벼 대면서 공동(?)생활 하기는 처음이다.  연령으로 치면 우리 부부보다는 약 15년 정도, 아직은 나에 비하면 어린 인생 후배분 들이다.  

골프에 대한 나의 생각은,  넓은 Green Field에 카펫처럼 깔려 있는 푸른 잔듸위를 걸으면서 체력 단련하고, 세상살아가는 소박한 내용을 주제로 서로 담소하고,  스코어 카드 기록은 항상 뒷전으로 밀려서, 아직까지도 30년 가까운 골프 경력(?)이면서도 나의 비교적 정확한 핸디를 알지 못하고, 골핑하는 아주 희귀한 구룹에 우리 부부는 속해 있는, 그래서 골프가 늘지 않고 항상 그타령이라고 놀려(?)대는  소리를 자주 듣는것도, 우리부부가 즐기는 골프 철학의 하나이기도 하다.

내가 젊은 카플들에 대해 느꼈던 것 처럼 그들끼리도 별로 가깝게 지내지는 않았다가, 이번에 같이 행동하게 되면서 서로를 더 알게되고,  뭔가 서먹서먹했던 분위기의 장벽이 없어져 버린것 같은, 그래서 마치 동심의 세계로 돌아간듯한 포장이 없는 있는 그대로의 제모습들을 보여주고 받은,의미있는 골핑이었던것을 보았다.

골프장에서 먹은 저녁은 토론토에서는 그값에 즐기기 힘든, Beef Steak 9온스의 맛좋은 고기였었다.  언뜻 약 한달전에 있었던 향군의 토너멘트에서 저녁으로 먹었던,  Steak와 비교가 된다. Blue cheese 로 dressing된 Salad와 곁들여 씹는 고기가 일품이라고 모두가 맛있게 먹는다.
Grill에 굽는 방법도 달랐겠지만, 연한 고기맛이 푸짐한 시골의 인심을 더 깊이 느끼게 해주고도 남는것 기분이었다.   Birdie를 두번씩이나 했다는 죄(?)로 Mr. 권은 같이 골프를 즐긴 12명의 식구들에게 Draught Beer를, freezer에서 얼린후 꺼낸 유리컵에 따라서 목에 한모금 넘기면서  갈증이 금새 해소되는 짜릿한 맛을 느끼게 해준것도 기억될 순간들이다.  실상은 나도 Birdie 한번 했었는데.....나에게는 Birdie 값을 하라는 입방긋도 못하게 하면서 말이다.

젊은 후배부부들은 오랫만에 하룻밤 시골의 정취에 동심으로 돌아가고 있음도 보았다.
light bug를 마치 처음 본것 처럼 신기해 하는 모두의 탄성이, 나에게는 별로 새로운 세계를 보는것이 아니지만, 그만큼 도심지 안에서만 시간을 지지고 볶으면서 바빠 살아왔다는 증거를 입으로 토해내는 어린아이의 마음을 보는것 같아, 나는 같이 덩달아 그들처럼 젊어지는 기분이다.   하고 싶은 얘기도 많았지만, 행여나 그들만이 느끼는 분위기에 내가 뱉은 말이 찬물을 끼엊는 어색함을 만들지나 않을까?하는 노파심도 일부 있어, 말을 아끼고 주로 듣는 쪽으로, 그들의 살아온 얘기를 경청했었다.

한의사를 하는 친구가 가게앞에 차를 세우더니, 지렁이를 3 container나 구입하면서, 의아해 하는 모두에게 밤낚씨를 하기위함이라고 한다.  의외였다.  한의사하면 뭔가 정적인 면이 강하게 풍기는면과 일치하는 행동을 하는것 같이 느껴졌다.
갈대가 우거진 사이로 배들이 오르내리고 하는 Launching Ramp에 만들어져 있는 Dock에 갔을때는 밝은 보름달이 은파를 발산하고 있었다.  은파를 즐기려는듯 모기떼들의 마중도 보통이 아니다.  여기 저기서 '앗 따가워, 철석...'  낚씨에 지렁이를 끼고 있는 사이 모두 같이 출동한 남자들이   모기와의 전쟁을 시작한다. 한쪽은 고기와의 사느냐 죽느냐의 사투를 시작하고.....
나와 일부는 먼저와서 잠자리에 들었고.....

한의사친구는 확실히 낚씨광이라는것을 안것은 다음날 새벽이 되서였다.  그친구는 그곳에서 꼼짝도 안하고 밤을 세웠다고 한다.  잡은 고기의 숫자는 불과 열손가락안에 들 정도로 미미 했지만, 모기와 전쟁을 하면서 낚씨 Pole을 들고 고기와 숨바꼭질을 한 그의 인내에 존경이 갔다.   피곤한 기색도 안보였다.  밤새도록 잠한숨 안잤다는데....
여자분들은 잡아온 고기통을 들여다 보면서 도저히 이해를 못하는 눈치다.  이것 몇마리 잡을려고 밤을 새우다니....라는 뜻일 것이다. 오랫만의 밤낚씨에 그친구는 만족하는것 같았고....

왜진작에 이런 분위기속에서 삶의 애환을 나누면서,서로 필요할때 같이 어깨를 부대끼지 못했을까(?)라는 지난 시간에 대한  후배부인들의 아쉬움도 쏟아져 나온다.   며칠후에 다시 팀을 꾸려 또 와서 즐기겠다는 부인들의 꾸밈없는 그소리가 정겹게 들렸다.   그들이 스스럼 없이 하고 싶은 얘기들을 토해 낼수 있다는것은  나를 비롯한 Lunar가 그들이 행동하는데 어렵게 하지는 않았구나 하는 안도의 숨을 쉬게 해주어 편했다.   무조건 OK라는 대답이 Lunar로 부터 나온다. 나도 물론 생각이 같다.

Balcony 밑의 그늘에서 BBQ를, 좀 특히 하게 한다.  1.5 decade이상을 더 살아온 우리 부부보다 그들의 솜씨는 과히 일품이다.  BBQ하면 LA 갈비쯤으로 생각하고 살아왔는데, 오늘 이들이 하는것을 보면서, 처음에는 의아해 했다.  Beef Rib과 Pork Rib의 사이즈가 상상을 초월할정도로 크다는 점이다.   숫불에 구우면 다 타버릴것 같은, 두껍고 큰 덩어리였기 때문이다.  Seasoning도 굵은 소금이 보이고 다른 seasoning이 보인다.  통째로 BBQ Grill에 올려 놓은 다음 Rare로 익힌 다음 다시 꺼내어 이번에는 먹기좋은 크기로 잘라서 다시 Grill에 올려놓고 구웠다.  마음데로 골라 먹는 식이다.  Rare, medium, well done등등 자기 식성에 맞게 직접 젖가락을 이용해서 입으로 넣는다.  일일히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많아 보였던 갈비더미가 다 없어져 버린다.  많이들도 먹는다.  고기가 익고 있는 Grill속에서는 떨어진 기름과 숯불이 어우러져 타면서 나오는 연기가 냄새도 풍기지만, 눈속으로 들어올때는 따겁기도 하다.

 바로 뒷집에 살면서 가깝게 교류하고 있는 Barbara와Gene을 초청해서 같이 BBQ를 즐기는맛도 쉽지 않은 장면이다.  모두가 그들에게 권하고, Korean Food에 대한 설명에 입들이 바빠졌다.  Barbara는 Lunar처럼 음식 맛보는데 특이함을 갖고 있다.  김치도 잘먹고, 처음보는 한국음식이지만, 주저없이 이것 저것 맛을 보면서 신기해(?)한다.  그는 이미 김치와 만두등 한국음식에 익숙해져 있다.   Barbara는 같이 어울리게 될때는 꼭 그녀가 만든 dessert를 꼭 들고온다.  아마도 그들의 습관인것 같다.   그녀가 들고온 Tarts같은 달콤한 후식이 입맛에 꼭 맞다.
사람사는것은 그 근본은 다 같다는것을 이들과 접하면서 많이 느껴온 점이다.  Gene은 처음보는 음식에는 나와 똑 같이 조심스러워한다.  Barbara 먼저 시식하고나서, OK신호가 나면 그때부터 조금씩 맛을 보면서 즐긴다.   허긴 70대 중반의 노인이니.....  조심해야함은 당연하다.

지난해 이맘때 같았으면, 벌써 이러한 모임은 여러번 했을 것이다.  그것 뿐만이 아니고 바로 앞에 있는 공원에서 Camping하는 Camper들을 상대로 firewood와 Ice cubes도 팔고, 골프도 즐기면서 싱그러운 여름의 밤과 낯을 한가롭게 보냈을텐데......금년에는  맡은 향군일로 다른 시간을 낼 마음의 여유가 없이 헤매다가,  오늘 이렇게 젊은 친지들과 계획에도 없이 급조하여 좋은 시간을 보내게 된 행운(?)을 갖게 됐던 것이다.

Lunar도 덩달아 내가하는일에 같이 메여 있어,  그녀에게 미안하기 그지없다.  혼자서라도 시골에서 시간을 한가롭게 보내면서, firewood도, Ice cubes도 팔게 하면서 마음의 stress를 풀게 하고 싶어, supplier들 한테 주문하여 돌아오는 주중에는 나무도 아이스도 팔면서 지내게 할것이다.  나는 수시로 토론토에 왔다 갔다 하면서  볼일을 볼것이고....

좋은 사람들과 같이 시간을 보낼때는 하루시간이 불과 몇분을 보내는것 처럼 짧기만 하다.
어떤친구는 한의사로, 부인은 choir conductor로,  한친구는 Construction을 하면서 집수리를 전문으로 하고, 다른 친구는 Real Estate Agent로, 한친구부부는  Restaurant를 하는 생업에 종사하는 분야도 각양 각색이다. 하는 직업만을 본다면 모두가 딱딱하고 사무적일것 같은데...... 정반대로 수더분하고,  믿음직 스럽다.  부부는 이신동체라고 했던가?  부인들도 같이 행동을 해서, 수더분함이 오랫동안 사귀어서 서로 잘 알고 지내는 그런 기분들이다.   좋은 시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감사.




Sunday, July 01, 2012

권력자들의 친인척 관리는 정말로 어려운가 보다

요즘 고국의 대통령 일가에 대한 친인척 관리 허술(?)로 나라 전체가 대통령에게 화살을 쏘아대고 있는 뉴스를 자주 접하곤 있다.  며칠전에는 대통령의 형님이 수억원대의 대가성 뇌물을 받아 검찰에 소환되고.....  방귀(fart)깨나 뀌는 사람들, 특히 정치꾼들중에 실세들은 수억원씩 꿀꺽 하고도, 정치자금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교묘히 법망을 빠져 나가고 있는 자들이, 마치 똥묻은개가 겨묻은 개를 나무라는 식으로, 적반 하장식으로, 상대방의 죄상을 까벌리는 꼬락서니를 보아왔다.  사실 여부를 알기위해 근거를 파고 들면, 슬그머니 '아니면 말고  '라는 식으로 얼버무리고 넘어간다.  세상을 떠나기전, 노통을 불법자금 수수혐의로 검찰이 수사를 벌이자, 그는 집앞의 산위에서 몸을 던져 세상과 작별하기도하는, 세계적인 뉴스도 만들었었다.  그가 죽어 버리자, 검찰은 슬그머니 수사를 접고, 언제 그런일이 있었냐는듯이 딴청을 부리고 있다.
따라서 그의 자녀들에게 까지 수사의 불길을 지폈던 불을 완전히 꺼버리고 막을 내렸었다.

현재의 대통령이 청와대에 들어가면서, 300억이 넘는 사유재산을 사회에 환원 시키고, 불법이권개입에는 초연한, 깨끗한 정치를 하고 있는것으로 믿었었는데, 어쩐 일인지 요즘은 대통령에게 까지 조사를 해야 한다는 국민들의 아우성 소리가 이곳 캐나다 까지 들린다.  진짜냐 가짜냐의 진실 공방은 언제쯤 속시원하게 밝혀 질까?

권력을 잡은 최고실권자와 그의 친인척 관리는, 이론상으로는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실질적으로는 불가능한것으로 나는 이해한다.  성경에 보면 '죄없는자가 먼저 돌로 쳐라'라는 구절이 있다.  인간이기에 100% 깨끗할수 없다는점을 인정 한다면, 친인척을 감시 감독하는 당사자들에게도 뭔가 보여지지 않기를 바라는 부분이 있을텐데, 친인척들이 그부분을 알고 있을때는, 별수 없이 손벽을 같이 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으로 이해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다음 대통령으로 내정된, 중국 공산당의 핵심 인물인 Xi Jinping이, 친인척 관리를 잘못하여 곤경에 처해 있다는 내용의 뉴스는, 역시 공산당은 Elite구룹 몇명만이 잘 먹고 잘 사는 옥상옥의 정치체제임을 증명해준 꼴이 되고 있다. 말이 곤경에 처해 있다는 것이지, 실제로 이러한 뉴스에 그가 정말로 괴로워하고 있는지? 아니면 Curtain뒤에서 철권을 휘두루면서, 내가 가는길을 막는자는 다 쳐단 하겠다는 심정으로 발설자를 찾고 있는지? 두고 볼일이다.

조금만 부정을 해도 파직 시키거나 심한 경우에는  사형까지 집행하여, 감히 권력자들이 또는 공무원들이 직책을 이용하여 부당한 이익을 취하지 못하도록 일벌백계 주의로, 부정을 차단하고 있는것으로 보였던 중국 상층부의 비리를 밝혀낸 성명서를 보면서, 권력자를 둘러싼 친인척의 부정개입 차단은 실질적으로 쉽지 않은 것임을 본다.

중국의 다음 대통령으로 공산당 Elite구룹에서 내정되여 있는 현 부통령, Xi Jinping의 친인척들이 직간접으로 권력을 배후에 업고 석연찮게 부를 축척한 비리가 있었음을, Bloomberg가 발표한 성명서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내용을 보면 자본금이 17억3천만 달러에 달하는 회사에 3억7천6백만 달러를 투자하여, 회사 자본의 18%를 보유하고 있다고 발표 했으며, 2천만달러를  기술계통의 회사에 별도 투자 한것도 폭로되고 있다.   이숫자는 liabilities가 포함되지 않아 실질적으로 그의 가족이 소유한 재산의 가치는  여기에 반영된게 아니라고 한다.

이번달로 만 59세가 되는 Xi Jinping과 인민해방군 출신 가수였던 올해 49세인 그의 아내와 그들 부부의 딸들에 대한 재산 내역은 추적이 안되고 있다고 Bloomberg는 밝히고 있다.
그렇치만 Xi Jinping이 그의 친척들의 사업에 관여를 했는지의 여부도  밝혀진게 없고, 또 그자신과 친인척들의 불법행위 여부에 대한것도 밝혀진것은 없다고 한다.

투자 여부는 국민들이 볼때는  확실하게 나타난게 없다고 한다. 왜냐면 회사들의 깊은 경영상태에 대한 국민들의 접근을 제한하고, 어떤 경우에는 인터넷접근도 제한을 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만 수만 페이지에 달하는 파일속에서 가끔씩 발견되고 있을 뿐이라고 한다.

그런데 미국이나, 캐나다에서는 아직까지 한국이나 중국에서 처럼 권력의 핵에 있는 사람들이 부정을 저지르거나, 권력을 행사하여 부를 축적했다는 죄목으로 쫓겨나거나 감옥에 간적이 있었다는 뉴스를 본적은 없었던것 같다.     지난번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양당에서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는 과정에서 민주당 후보로 나왔던 John Edwards씨가 모금된 선거자금을 일부 불법으로 사용 했다는 혐의가 나타나 기소되여, 현재도 재판을 받고 있는중이다.

선거자금으로 모여진 일부 자금을 편법으로 사용 했다해서, 피의자 신분으로 재판을 받게 되면서 그의 정치적 생명은 막을 내렸는데, 한국이나 중국의 권력가들이 해먹은 내용과는 비교도 안되게 가벼운 것인데도 엄격하게 파헤치고 있는것을 보면서, 민주주의,또는 공산주의 정치제도가 문제가 아니고, 이를 운영하는 자들의 양심에 털이 났느냐 안났느냐에 따라서 하늘과 땅차이로 결과는 달라짐을 본다.

한국의 정치꾼들은 언제쯤에나 양심을 팔지 않고, 진정한 자세로 국민을 위하는 정치를 하게 되는날이 올까?  총선이 끝난지가 몇달이 지나가는 판인데도, 아직 국회 개원을 못하고 있는 고국의 정치판은 중국공산당의 Elite구룹보다 훨씬 더 저질들의 집합소인것을 다시 확인해 주는 총선이었다라고 평한다면 너무 과장된 평가라고 나를 나무라는 사람이 있을까?


 http://www.washingtonpost.com/business/xi-jinpings-millionaire-relations-reveal-elite-chinese-fortunes/2012/06/29/gJQAcE49AW_story.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