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April 24, 2020

"그땐 민주화운동인줄 알았지만, 퇴영적 이념투쟁이고 역사후퇴시켜"- 주사파들이 선거법급조로 청와대와 여의도 점령했으니...

뒤늦게 라도 철들어 옳바른 삶의 길을 택하신 민경우씨에게 안심이 된다.  청와대 문재인과 그찌라시들처럼, 국민들에게 사기 공갈 협박을 하지않고, 자기 능력껏 열심히 일해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삶을 살아가는 이분의 변신에 일단은, 앞날에 순탄한 삶이 펼쳐지시기를 기원드린다.

행여라도 당시의 동료들로부터 변절자라는 모욕을 듣지 않기를 기원해 드린다. 4.15총선으로, 요즘 완전부정 선거였다고 고소 고발사태로 검찰이 무척 바쁘게 움직인다고는 하지만, 세상에 무서울것없이 맘만 먹으면 권력의 칼날을 그들이 싫어하는  정적들에게 무소불위로 휘두르게 된,  주사파와 전대협출신들에게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순진한 사람들이 고통을  당할까?를  생각만 해도 앞이 꽉 막힌다.

이제는 드러내놓고, 북찬양질 하는 주사파놈들의 굿판을 보게 생겼으니...벌써 부터, 이북에 퍼줄 준비하느라 통일부는 눈코뜰새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모양세인데, 그렇타고 북한에서 화답을 했느냐? 절대로 아니올시다. 짝사랑 하는식으로, 아니면 메아리없는 허공에 소리쳐본들, 그것은 국민들에게 잘 보일려고 연극하는 쑈일뿐.... 문재인 정부의 실질적 목적은 그들만이 주머니를 채울수 비밀속에서 진행되고 있을것이다.

남북공동행사, 이산가족상봉등등.... 지금까지 수십번 해왔지만, 알맹이가 정말로 있었는지?
몇년전에는 금강산에서 이산가족 상봉한답시고, 커다란 여객선에 대한민국에 사는 이산가족들을 싣고, 금강산 항구에 정박하여 만나게 했었지만, 지금은 돌아가신 김희갑 선생님도 합류했었는데, 북한에서 불허하여 결국 상면도 못하고 되돌아오는, 상봉과정도 전부 북괴측에서 주장하는데로 해서, 우리쪽의 주장은 하나도 받아들여진게 없었다. 분명히 이산가족상봉자 명단에 김희갑씨가 들어있었다.  그리고 서울에서 올라간 이산가족머리수당 수천달러씩 지불하면서도, 계속 북쪽에서만 상봉하게 하고, 서울쪽에서는 한번도 상봉의 기회를 갖어본적이 없는, One sided game 으로, 빛좋은 개살구식의 상봉이었었다. 이런식의 이산가족상봉은 호혜원칙에 위배되고있다는것 알면서도...

상봉시에도 맘놓고 가족들만의 만남도 허락해주지 않고, 북괴 감시병들의 감시하에서 대화를 주고 받으니, 무슨 말을 진심으로 나눌수 있었겠는가? 이건 완전 사기행위요, 북괴에 남측정부가 아부하는, 굴종의 외교라고 생각한다.

남북경협의 근본 목적은 무엇이며, 지금까지 북한으로 부터 진정으로 경협대화에서 그들의 진정성을 보여준적이 있었는지? 명색은 그렇게 해놓고, 그과정에서 Hyena같은 주사파, 전대협출신의 관련자들이 주머니에 챙길것을 생각하면, 경제가 회생되기는 커녕  더폭망할것같아, 걱정이 끝이 없다.

https://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4/24/2020042401904.html

더욱히, 추미애와 이인영이 같은 전대협출신은, 토지공개념을 도입하여 사유재산제도를 없앨려고하고,
한발 더 나아가서, 한국의 경제를 그나마 버티고있는 대기업들을 국가소유로 할려는 흉계를, 민노총 빨간무리들과 머리를 맞대고, 꾸미고 있을텐데 .... 국민들을 편안하고 잘살게 할려는 앞날이 파랗게 보이는것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이번 4.15총선결과를 보면서, 민경우씨는 나보다 더 실망을 많이 느꼈을 것이다. 세상에 부정투표를 할려는 계획하에 "연동형 비례대표제"라는 회괴망측한 선거법을 급조하여,유권자들이 선거방법조차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어, 폭망하게 된 민주당 후보들이 막판에 기사회생하게되도록 개표조작 한것을 보면서. 그러나 지금 불평해 본들, 죽은자식 뭐만지는 식이니까, 접어두고, 앞으로가 문제인데, 민선생에게 부탁하나 할려하오.  제발 잘사는 서구사회의 국회의원 선출 선거법을 연구하시여, 한국에서 그대로 선거를 하도록 말입니다.

방법은 간단해요. 지역구 당원들이 직접 당후보를 선출하여, 그후보들이 본선거에서 싸우도록 하는것입니다. 지역구 당원들이나, 후보들만큼 지역사정을 잘아는, 중앙당의 기득권자들이 있을까요? 중앙당 공천제도는 응모하는 후보자들로부터 불법으로 돈을 거두어 들이는, 시장깡패들이 상인들로 부터 삥거두어 들이는 방법과 똑같은 식이잖아요. 선거비용도 거의 안들어요. 그나마 그비용도 전부 Donation으로 충당하고, 후보가 필요한 돈은, 후보등록비 몇십달러뿐입니다. 지역 당원들이 주민들에게 홍보하고, 당후보들이 지역구 주민들을 중심으로 Town Hall 미팅을 여러번하면서, 선거공약을 주민들에게 판매하는, 그래서 친숙해 지거든요. 한국의 건전한 정치제도를 Overhaul해야, 건전한 사회가 될수있지만, 지금처럼 선거를 계속한다면, 매4년마다 선거법을 뜯어 고치는 악순환은 계속될것입니다.

이렇게 명색이 민주화운동출신이지만, 세상을 살아가면서, 내용적으로는 주사파와 전대협꾼들과의 사상이 시간이 흘러갈수록 같이 동거동락할수 없다는것을 간파하고, 평범한 자유시민으로 전향해서 민초로서의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민경우씨,계속해서 진정한 민주주의가 완전히 뿌리 내릴수 있도록 감시의 눈길을 보내주시기를 기원드린다. 더욱히 4.15총선후의 나라돌아가는 꼬락서니를 보면서, 귀하의 역활이 더 많아질것으로 기대한다.



[최보식이 만난 사람]
[간첩 혐의로 두 차례 수감됐던 운동권의 자기 비판… 민경우 前 범민련 사무처장]

코로나 사태가 정점 치달을 때 '더불어시민당' '열린민주당'이 헤드라인을 장식해 끔찍한 기분
진보 운동권서 지금껏 보지 못한 이상한 기류가 현 정권서 생겨나
正義 외친 이들이 부패 기득권 돼

"조국 사태에 반성한다는 더불어민주당이 조국 추종자를 공천하고, 위성비례정당인 열린민주당은 대놓고 '조국 복권(復權)'을 내세우는 걸 보면서 너무 충격을 받았다. 이들은 갈등과 증오에 기반을 둔 권력욕으로 우리 사회를 벼랑 끝으로 몰아가고 있다. 과거에 나 자신이 시대착오적 이념으로 그렇게 했던 것처럼…."

민경우(55)씨를 만난 곳은 경기도 분당에 있는 수학 입시 학원이다. 그는 '수학공부의 재구성'이라는 책을 내는 등 꽤 이름난 강사라고 한다.

내가 몰랐던 세상을 만나

하지만 그는 서울대 인문대 학생회장(1987년) 출신의 골수 좌파였다. 이적(利敵) 단체인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남측본부 사무처장을 10년간 맡았고, 김영삼·노무현 정부에서 각각 간첩 혐의로 기소돼 총 4년 2개월 감옥에서 지냈다. 출감 뒤 민노당에 입당해 '한·미 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 정책기획팀장을 맡아 반대 집회를 기획했던 인물이다.

"역설적으로 '한·미 FTA 반대 투쟁'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반대 논리를 세우려고 각계 전문가들을 만나고 숱한 연구 보고서를 읽었다. 대학 시절 '매판자본'으로 봤던 삼성전자가 소니 등을 다 합친 일본 전자업체보다 매출액이 더 크다는 걸 알게 됐을 때의 충격은 지금도 선명하다. 그동안 내가 몰랐던 세상을 만나게 된 것이다."
―감춰진 세상도 아니고, 정확히 말하면 남들은 다 아는데 당신만 안 보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부끄럽지만 그렇다. 수십 년간 퇴영적 주체사상과 민족의식에 매몰돼 있는 동안, 세상에는 스마트폰과 드론, 인공지능이 개발돼 있었다. 우리는 '민주화운동'을 했다고 여겼지만 실상은 시대착오적 이데올로기 투쟁이었고 역사를 후퇴시켰다. 우리가 해보려던 한국 사회의 재편 작업도 애초에 틀렸던 것이다."

그는 운동가의 삶을 접고 2012년부터 학원을 꾸려가는 생활인이 됐다. 이런 그의 일상이 꼬인 것은 조국 사태가 터지면서였다. 작년 9월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 반대' 서울대 집회에서 학생 대표의 요청을 받고 마이크를 잡게 된 것이다.

"선배였고 골수 운동권이었던 나도 조국 임명에 반대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나는 집회에서 '조국이 개혁적인지 아닌지를 떠나 그는 범법자(犯法者)다. 법에 의해 처벌받는 게 법치주의다. 지금 정권은 그걸 거부하고 있다. 법을 안 지켜도 되는 진보는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조국의 문제는 법과 상식, 팩트의 문제였다. 그럼에도 진보 진영 명망가들은 마치 미신에 홀린 것처럼 비이성적·비합리적 행태를 보여줬다.

"지금까지 보지 못한 이상한 기류가 문재인 정권에서 생겨났다. 온라인에서 이 사안을 놓고 운동권 동료·선후배끼리 논쟁이 벌어졌다. 소수 강경파는 논리에서 몰리자, 평소에 안 하던 궤변을 내놓았고 감정적 언사로 공격했다. 팩트 자체를 아예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함께 토론할 수 없는 지경이 됐다. 정의를 외쳤던 이들이 어느덧 부패한 기득권으로 변신해 있었다."


―대학 시절 조국씨와 인연이 있었나?

"동갑이지만 운동권 노선이 달라 친분이 없었다. 하지만 사노맹 조직에서 조국의 후배였던 황희석은 비교적 잘 안다. 그는 1987년 불법 집회를 주도했다가 인문대 국사학과 사무실에 며칠 숨어 있었다. 이번에 비례대표 후보가 된 그가 '조국 사태는 검찰 쿠데타'라고 말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군부 쿠데타'라는 말을 썼던 학생 시절의 사고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국의 발전 과정은 아예 머릿속에 없는 것이다."

―황희석 전 법무부 인권국장은 "억울한 희생을 당했던 '조'가 명예 회복하고 새 운명 맞이할지는 이번 총선이 결정"이라고 말했다. 조국이 이런 식으로 부활할 것 같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가 급박해 작년처럼 '조국 퇴진'을 외치며 광화문에 인파가 몰려나올 일도 없다.

"코로나 확산 사태가 정점을 치달을 때, '더불어시민당' '열린민주당' 등이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끔찍한 기분이었다. 여권은 정치 세력으로서 책임과 양심을 포기했다. 어떻게 하면 의석을 더 차지하느냐는 권력 의지의 화신들일 뿐이다."

―당신에 대한 얘기를 해보자. 1990년대 초 공산주의 동구권 붕괴는 운동권 학생들에게 충격을 줬다. 맹목적으로 추종해온 이념에 회의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당신은 1995년부터 친북 단체인 범민련에 들어갔다.

"대학 시절 '해방전후사의 인식' '전환시대의 논리' 같은 책이 독소였다. 북한에 대해 감성적 접근을 했고, '우리 민족끼리 주체적으로 하자'는 말에 현혹됐다. 돌아보면 내가 지적으로 낙후한 그룹에 속해 있었다. 시대의 흐름에 거슬러서 우리나라를 극도로 고립된 반미(反美)의 섬을 만들려고 했던 거다."

―북한에 국내 동향 문건을 전달한 간첩 혐의로 두 차례 징역형을 살았는데?

"그때는 '간첩 행위'라는 의식이 없었다. 조총련 정치국장과 200여 차례 통화하면서 그쪽에서 부탁하는 정보를 수집해 보내줬다. 남북 교류가 진행되던 시기여서 다른 라인에서는 이런 일이 더 많이 벌어졌을 것이다."

―운동권 출신은 이런 친북 활동을 '민주화운동'이나 '민족통일운동'으로 포장하고 있다. 본인도 그렇게 평가하나?

"어디에서 선을 그을지…, 조금씩 그 경계선을 무너뜨려왔다. 매우 완화된 잣대를 갖고 있다. 지하당인 중부지역당이나 김일성에게 충성 맹세를 한 사람들도 다 '민주화운동을 했다'고 주장하니까. 586 청와대 실세나 여당 의원들도 이 문제에서 다 걸린다."

돈 버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당신은 그때 민족통일운동을 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오히려 북한 주민을 탄압해온 세습 독재 정권에 봉사한 것이 아니었을까. 물론 그때는 생각이나 지적 역량이 여기까지 미치지 못했을 수 있겠지만.

"북한의 세습 독재에 기여한 것이다? 이런 지적을 하다니…, 심정적으로 못 받아들이겠지만…, 잘못된 사상 세례를 받고서 그때는 민주화운동이라고 여겼지만, 지금 와서 보면 우리 사회와 역사에 반동하는 행위였다."

―여전히 북한 정권에 대해 운동권 시절 감성이 남아 있는지, 아니면 전향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나는 출소한 뒤로 '보안관찰 대상'이었다. 반성과 전향을 안 했다. 민주화운동의 연장선에서 해왔기 때문에 전향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학원을 꾸려가고 현실에 부딪히면서 내 과거의 운동에 문제가 많았다는 걸 깨달았다. 문재인 정권이 들어선 뒤 전향서를 제출했다."

―임종석이나 조국의 경우 이런 질문에 신경질적 반응을 보였다. 586 운동권 세대는 퇴영적 이념에 빠져 있었던 것을 여전히 자랑스러운 훈장으로 여기고 있는데?

"나를 포함해 586 운동권은 사회에 해악을 끼친 게 아닌지 자문할 때가 됐다. 이들은 현실에서 자신의 이념을 확인해보는 절차를 빼먹었다. 현실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겪어본 적 없어 여전히 젊은 날의 관념성에 지배돼 있다. 내가 정신 차리게 된 것은 직접 학원을 꾸려 돈을 벌어보면서였다. 누군가로부터 돈을 받아내야 하고 또 돈을 줘야 하고, 그게 전쟁이었다. 돈에 얽히면서 인생을 많이 배웠다."

―권력 집단에 들어가 있는 586 세대에 대해 자기 손으로 돈을 안 벌어봐 현실을 제대로 못 본다는 비판이 있었다.

"현 정권의 586 정치 실세들은 돈 버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돈 때문에 발생하는 고통을 경험 못 한 집단이다. 이들은 최저임금이 오르면 고용이 줄어든다는 당연한 사실도 이해 못 하거나 관심이 없다. 현실의 복잡성을 알지 못하기에 '부동산 공유제' '특목고 폐지' 같은 말을 꺼내는 것이다. 돈이 움직이는 현장에서 형성되지 않은 사상과 정책 노선은 쉽게 허물어진다."

―생활인으로 돌아오면서 어떻게 수학 입시 학원을 하려고 마음먹었나?

"원래 내가 이과 출신이다. 서울대 의대에 입학했다가, 학생 운동을 하려고 이듬해 다시 시험을 쳐 인문대에 들어간 경우다. 수학 입시 학원을 시작할 때 운동권 후배들을 불러 모았다. 하지만 이들은 수학을 가르칠 실력이 안 됐다. 강의실에서 좌편향 현대사를 가르치려고 했다. 그전까지 절대 진리였던 '함께 가자 우리의 길'이라는 주사파의 대중 노선은 허구였다."

―학원 강사였던 후배들을 해고했다는 뜻인가?

"운동권에 있을 때는 부족하면 위로하고 설득하고 같이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시장은 완전히 다르게 움직였다. 2년쯤 지나 학원을 말아먹었다. 후배들을 내보내면서 법적인 갈등으로 비화됐다. 내가 마치 악덕 고용주처럼 됐다. 고발돼 지방노동청에 몇 번이나 출두했다. 우리나라 노동법이 정말 문제가 많다는 걸 알게 됐다."

그때 어떤 선배가 이런 말 해줬으면

―운동권 시절에 비해 너무 돌아선 것 아닌가?

"그전의 학원에서는 직원 10명이 있었는데 지금은 두 명이다. 하지만 생산성이 똑같다. 사회가 어떻게 조직돼야 하는지를 많이 생각하게 됐다. 현 정권이 들어서자 휴머니즘을 포장한 말들이 넘쳐났다. 운동권의 선전 구호가 그랬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런 말일수록 무책임하고 공허한 걸로 판정 난다."

―당신처럼 수학도 잘하는 사람이 그동안 세상을 왜 객관적으로 보지 못했나?

"이십 대 초반에 누군가로부터 주입받았거나 책에서 읽었던 편향된 지식에서 못 벗 어났던 것이다. 그 시절 안목 있는 선배가 이런 말을 한마디 해줬으면…. 큰 재력가였던 부모님은 이런 이념의 세계에 대해 몰랐다. 아버지가 억지로 나를 미국 유학에 보냈으면 내 삶은 달라졌을 것이다."

―뒤늦게 미국 등 바깥세상을 구경했을 때 어떻던가?

"아직도 해외에 나가 본 적 없다. 그전에는 '보호관찰 대상'이라 제약이 있었다. 이제는 의욕이 없어졌다."


https://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3/30/202003300005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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