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때에 군에서 3년 만기 제대하고, 시골집에 돌아와 앞으로 살아갈 계획이라기 보다는, 목구멍에 풀칠을 어떻게 해야하나?라고 고민하면서 약 2개월쯤,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부모님의 마음을 더 조리게 하고 있었던 때였다.
공비침투가 있은후, 군에서 제대를 앞두고 고향에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면서, 세월을 죽이고 있었던, 제대 말년의 후배들로 부터 편지가 오기 시작하는데, 김신조일당(당시는 그렇게 불렀었다. 죄송)의 공비침투로, 제대특명이 다 취소되고, 6개월 근무 연장이 실시되여, 휴전선 155마일 방어를 잘못한 책임을 탓하기전에, 우선 김신조 일당이 "우리 신세를 조졌다"라는 농담반 진담반의 내용을 적은 편지들을 보내왔었고, 나는 그편지를 읽는 재미속에 잠시나마, 앞날을 걱정하는 고민속에서 해방되는, 당시의 젊은청년들이 거의 대동소이하게 앞날을 걱정 했었던, 그대열속의 하나 였었던 기억이 아련히 이아침에 떠오른다.
그때에는 선배가 제대를 하고 떠나면, 서로간에 소식을 주고받을수있는 연락처를 꼭 남기는게 하나의 오래된 전통이었었다. 그렇게 하면서, 세상살이에 바빠지면, 연락은 자연적으로 기억속의 한장면으로 끝나곤 했었지만....
1968년,1/21공비 사태가 나기전에도, 남과 북사이에는 피아간에 간첩조직을 보내곤 하던 때였었다. 전방에서는 가끔씩 총격전이 벌어지기도 했었고.... 그러나 대부분 김일성 체제하의 북괴 병사들이 남방한계선을 뚫고 우리쪽으로 기습작전을 해와 피해를 주고, 다시 되돌아가는 일종의 게릴라 작전을 벌려, 남한 사회를 심리적으로 교란 시키는 작전이었던것 것이다.
그때는 휴전선의 남방 한계선 우리측에서는, 목책을 사람키보다 약 1.5배정도 높게 스크럼 짜듯이 촘촘히 세워, 쉽게 목책울타리를 뚫지 못하도록 설치 하느라, 장병들이 고생을 참으로 많이 했었다. 목책선 바로 밑에는 모래를 약 2미터 넓이로 덮어, 만약에 김일성 병사들이 목책을 넘어 뛰어 내려 침투했을때, 모래에 발자국이 새겨지기에, 우리는 누군가 침투했다는것을 쉽게 알수 있었고, 그때부터 추적이 시작되곤 했었다.
지금은 이북의 간첩 또는 병사들의 침투를 감시하는 설비가 잘되있어, 좀더 편하고 쉽게 발견할수 있는 조건에서 우리 젊은 병사들이 근무하고 있다는 뉴스에 만족한 느낌을 받곤 하지만, 그래도 걱정은 다른 차원에서 더 늘어만 가는것 같다.
물리적으로 방어망을 설치하는데는 철책선을 이용하는것도 많이 있지만, 발달된 컴퓨터기술과, Cyber World의 발달로, 공격보다 더 힘들게 방어를 하고 있다는점이다.
공비들의 능란한 위장술에 전방의 주민들은 물론이고, 군이나 경찰에서도 많은 고생을 했었다. 휴전선에서 서울까지 침투하는데는 수많은 군경합동의 Check Points가 있어서 많이 filtering이 됐지만, 공비들은 길을 이용하지 않고, 야산, 능선, 구릉지, 농토등등의 인적이 다니지 않는곳을 선택, 주로 밤에 침투하곤 했었다.
방어하는 장비는 열악하고, 탐지장비 역시 당시에는 전적으로 미군의 원조에 의지하던 시절이었기에, 대통령 부터 일개 병사에 이르기까지, 침투하는 간첩들과의 싸움은 항상 Attention상태에서 진행됐었고, 그래서 침투 간첩들의 검거소식이 거의 주기적으로 언론에 보도되곤 하면서, 국민들에게 반공, 애국심을 함양 시키는 효과도 있었고, 간첩신고하는 국민들의 열의도 대단 했었다.
박정희 대통령께서, 작전중 순직한 최규식 종로경찰서장을 물심양면으로 온정의 손길을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뻗쳤었다는 뒷얘기도 들은 기억이 있다.
김신조 일당의 침투 루트는 미쳐 상상도 못하는, 우리의 방어에 허점을 교묘히 뚫고 침투했었다고 생각된다. 청와대 북쪽의 인근에서, 검거작전을 펴다가, 당시 종로 경찰서장, 최규식총경의 순직은, 공비들에 대한 적개심을 한층 더 국민들 가슴속에 새기게 하는 계기가 됐었지만....
불행중 다행이었던점은, 침투한 공비들이 거의 다 사살됐는데, 김신조는 운좋게 생포되여, 이북김일성 집단의 남한적화 사업이 어떻게 진행돼왔었는가를 그후에 자세히 알수 있는 단초를 만들어준 점이었다.
생포된 삶을 살면서, 남한 주민들의 삶과, 즐기고있는 자유가 얼마나 소중하다는것을 스스로 느낀 김신조씨는 마음을 바꾸어, 우리 남한 동포들중의 하나가 되여, 반공, 북괴독재자들의 만행을 알리는 Beacon됐고, 마침내는 하나님을 마음속에 영접하여, 어려운 목회자의 길을 걷고있는, 보석같은 존재가 됐다. "남은 생애는 마음속에 더이상의 괴로움이 없이 하나님 사업에만 전념할수 있으시기를", 동시대의 인생동지가 바라는 마음이다.
이번 1.21 사태를 되돌아 보면서, 우리국민들의 북괴 김정은 공산 Regime 에, 남한적화 야욕을 분쇄하는 철저한 대비는 물론이지만, 먼저 정신적으로 자유민주주의와 그속에서 Freedom의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가를 가슴속에 새기고 생활화 하는 자세를 갖추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고 외쳤던 Patrick Henry의 외침이 항상 가슴속에서 살아 있어야 하고, 미국인들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던 Reagan 대통령의 짧막한 한마디를 우리는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
"Freedom is not free, it's possible when we have a power to keep it", 자유는 그냥 주어지는게 아닙니다. 그것을 지킬수있는 힘이 있어야 가능합니다."라는.
지금 우리 모두가 알고있다시피, 김정은이의 남한 적화 야욕은 그의 할아버지, 아버지때보다 훨씬 더 포악해졌다. 핵폭탄과 탄도미사일 개발을 완료한것이 그증거다. 그사이 북한주민들은 아직도 기아에서 허덕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분명한것은 김정은이는 그러한 무기를 단 한발도 발사해 보지 못하고 권좌에서 물러나거나, 죽을 것이라는 점이다. 문재인 정부는 김정은Regime에 단호히 대처해서, 선제제압을 준비해야 한다.
휴전선일대와 대한민국 각처에서 자유를 수호하기위해 밤낯 수고하고 계시는 우리 60만 젊은이들과 관계자분들의 노고를, 군통수권자인 대통령부터, 편가르기에 바쁜 정치꾼들은 물론, 국민모두가 다시한번씩 되새겨 보는 이아침이 됐으면 하는 마음이다.
올해 예비군 훈련은 없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이유다. 하지만 이 예비군 제도는 1968년 1월 21일 북한 무장대원 31명의 청와대 습격 사건 때문에 생겼다. 양주 노고산(496m)에 예비군 훈련장이 있다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들은 그곳을 스쳐 지나갔다.
■ 북악산 성곽 북측면 개방
68년 1월 공비 31명 30㎏ 무장
시속 10㎞로 청와대 턱밑 침투
‘철컥.’ 지난달 31일, 청와대 뒤편에서 북악산으로 향하는 철문(제1 출입구)이 열렸다. 자물쇠를 푼 문재인 대통령 옆에는 정재숙 문화재청장과 김영종 종로구청장, 산악인 엄홍길, 배우 이시영, 종로구 부암동 주민 등이 있었다. ‘1·21 사태’ 이후 52년간 닫혀있던 북악산 성곽 북측면 일부의 개방을 하루 앞두고서다. 청와대는 초청 인사로 현재 목사로 활동하는 김신조(78)씨도 검토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북한 대원 중 유일한 생존자다. 하지만 “박정희 목 따러 왔수다”라고 외친 ‘무장공비’와 문 대통령을 결부시키는 게 부담이 됐다고 한다.
북악산 새 길이 소문을 타고 떴다. 김씨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북악산이 아름다운 곳인데, 늘 미안한 마음이었고 뒤늦게 시민의 품으로 돌아와 다행”이라고 말했다. ‘김신조 루트’는 북악산에서 북쪽으로 약 39km 떨어진 곳에서 시작한다. 차로 3시간 거리를, 31명의 무장 공비들은 4박5일에 걸쳐 침투했다. 김 목사와의 인터뷰를 곁들여, 당시 상황을 재구성했다.
# 그들 안 갔던 우이령도 41년간 통제
1·21 사태 1년 전인 67년에 몇 개의 징후가 보였다. 북한은 그해 1월,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겨울에 휴전선을 통해 간첩을 남파했다. 눈에 발자국이 남을 수 있어 꺼리던 방식이었다. 또 8월에 민족보위성 정찰국 직속의 대남공작 특수부대 ‘124군 부대’를 창설했다. 4월, 8월에는 북한군이 한국군과 미군을 습격했다. 박정희 정부는 이를 통해 북한의 게릴라식 동계 작전을 예상했다. 68년 1월 6일 박 대통령은 ‘대간첩 비상치안회의’에서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1월 17일 오후 10시, 북한 124군 소속 31명이 군사분계선 철조망을 절단하고 남측으로 넘어왔다. 경기도 연천 고랑포에서 10㎞를 앉은걸음·포복·정지·은폐를 반복하며 얼어붙은 임진강을 건넜다. 고랑포 지역은 임진강이 얼어붙는 최적의 침투 코스였다. 그들이 입은 카키색 한국군 복장에는 26사단 표식이 붙었다. 각자 개머리판을 접을 수 있는 AK소총과 실탄 300발, 수류탄으로 무장했다. 이들의 당시 모습은 서울 종로 경찰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그들은 기자가 찾았을 때 사람 한 명 보지 못했을 만큼, 현재도 적막한 파평산(496m)을 지나갔다.
18일 새벽 삼봉산(282m)에 도착, 1박을 했다. 그러다가 19일 오후 들어 나무하러 온 우씨 4형제를 억류했다. 공비들은 이들의 처리를 북측에 물었으나 돌아온 암호문을 해독할 수 없어 회의 끝에 이들을 풀어줬다. 김 목사는 “무조건 죽이는 게 원칙이었고, 나는 그쪽에 찬성했다”고 말했다. 그는 “우씨 4형제가 '왜 이제야 오셨냐', '빨리 오시지' 하더라"며 "남조선에 북한 정권을 지지하는 세력이 많은 걸로 교육받았고 그런 사람인 줄 알았다”고 회고했다. 일본제 시계까지 받고 풀려난 우씨 형제는 망설임 끝에 오후 9시에 경찰에 신고했다. 3시간이나 지나서야 합동참모본부에 전달됐다. 31명에게는 결정적 실수였다. 김씨는 기자에게 '운명의 삼봉산'이라는 표현을 썼다. 나중에 중앙정보부가 해독한 암호문은 ‘원대 복귀’였다.
19일 밤 고령산 앵무봉(622m)을 통과, 양주 노고산을 거쳐 북한산에 다다랐다. 21일 밤으로 잡힌 청와대 타격과 박정희 대통령 암살을 위해 그들은 30㎏ 군장을 찬 채 시속 10㎞의 초인적 속도를 냈다. 북한산에서 내려오는 창릉천이 눈앞에 보였다. 그 너머에 구파발과 송추를 잇는 비포장도로(현재의 북한산로)가 있었다. 군경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1명씩 도로를 건넜다. 한데 그들이 도착한 곳은 지도에는 없는 진관사였다. 요새 표현으로 ‘멘붕’이었다. 1011년 세워진 진관사는 한국전쟁의 포화에 스러졌다. 마침 진관사는 6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재건 공사 중이었다. 이 때문에 진관사는 이들이 갖고 있던 한국전쟁 당시를 기준으로 만든 지도에 누락됐을 가능성이 크다. 김 목사는 “진관사에 대해서는 북에서 전혀 교육을 못 받았고, 진관사에서 개가 짖어대 위치가 노출될 것 같아 모두 불안해했다”고 밝혔다.
31명은 진관사 계곡을 지나면서 군복을 벗고 배낭에 있던 사복으로 갈아입었다. 군복은 땅이 얼어 파묻지 못하고 바위 밑에 버렸다. 사모바위를 지났다. 현재 사모바위 밑 바위의 동굴에는 당시의 상황을 전해주는 마네킹이 있다. 그들은 비봉을 거쳐 승가사에 다다랐고 휴식에 들어갔다. 20일 오후에는 청와대 뒤편, 북악산에 들어가 있어야 했다. 김 목사는 “지치고, 시간에 쫓겨 북악산 대신 세검정으로 방향을 틀었다”고 했다.
20일 오후 2시, 국방부는 송추 부근에서 북한 특수부대의 유실물을 발견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서울에 비상경계령이 내려졌다. 박정희 대통령은 잘 걸리지 않던 감기를 앓았다. 21일 오후 9시 30분, 북 특수부대원들은 무기를 휴대한 채 세검정으로 내려섰다. 상명대 삼거리를 지나 창의문(자하문) 고개에 다다랐다. 김씨는 “당시 남한의 경찰이나 군인을 겁내지 않았다”고 밝힐 정도로 31명은 자신만만했다. 경찰이 검문을 했다. 옥신각신하다 종로경찰서장인 최규식이 그들의 총탄에 쓰러졌다. 오후 10시 쯤이었다. 김신조는 경복고 후문으로 뛰었다. 다른 대원들도 세검정, 북악산 등으로 흩어졌다.
김씨는 “이미 우씨 4형제를 놔주고 나서 실패를 직감했다. 난 미리 도주로를 북한과 가까운 북쪽의 북악산이 아닌, 반대편인 남쪽으로 잡아놓고 있었다”고 했다. 그는 "만약 내가 북악산으로 향했다면 분명 지금 이렇게 인터뷰조차 못하고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현재 북악산의 호경암과 1·21 소나무에는 교전 흔적이 남아있다. 세검정에서 붙잡힌 김씨는 “생포 당한 게 아니라, 투항했다”고 줄곧 말해왔다. 기자가 ‘체포’라고 말하자 ‘투항’이라고 고쳐 주기도 했다. 그는 “당시 나이가 27살이었는데, 살고 싶은 마음이 오더라”고 회상했다.
# 1·21 직후 예비군 제도, 주민증 생겨
당시 중앙일보 손석주 사회부 기자와 장홍근 사진부 기자는 홍제파출소로 연행된 김씨를 인터뷰하는 특종을 터뜨렸다. 손 기자가 “왜 왔나”고 묻자 김씨는 “청와대를 까러 왔다”고 대답했다. 장홍근 기자는 사진을 찍고 바로 파출소 밖으로 나갔다. 군경에 필름을 뺏길 것을 염려해서였다.
23일까지 북한 특수대원 27명이 사살됐다. 민간인 7명, 군경 23명이 사망했다. 김씨를 뺀 나머지 3명 중 한 명은 양주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2명은 다시 북으로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 중 1명은 다시 남측으로 넘어왔다고 한다. 2000년 9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사 자격으로, 남한을 방문한 김용순 당 중앙위 비서를 수행해 남측에 송이를 전달했던 박재경(1933년생)이다.
김 목사는 “그때 함께 내려온 사람인 것 같은데, 확실치 않아서 확인을 요청한 정부 관계자에게 그 사람이라고 단언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북한 소식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박재경은 총정치국 부총국장을 끝으로 활동이 뜸한데, 지난해 5월 반제노병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 받고 노병 관련 일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1·21 사태 직후 예비군 제도가 생겼다. 주민등록증이 발급됐다. 3사관학교가 들어섰다. 군 장병들의 제대가 6개월 미뤄졌고, 실미도 부대(684부대)가 생겼다. 수십 년이 흘러 31명의 북한 특수부대원이 지난 길을 따라 ‘김신조 루트’란 이름이 붙었다. 박현욱 경기문화재단 연구사는 “루트 상의 노고산·사모바위 등에 군부대가 주둔했고, 김신조 일행이 가지 않았던 우이령도 침투로로 쓰일 것을 우려해 통제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우이령길은 폐쇄 41년만인 2009년 개방돼, 하루 1000명에 한해 예약 탐방객을 맞고 있다.
지난 10일, 북악산에서 일부 탐방객들이 ‘김신조’를 얘기하고 있었다. 새로 풀린 북악산 곡장 전망대에는 평일에도 사람이 북적거렸다. 안내소 측은 “평일 2000여 명, 주말 6000여 명이 몰린다"며 "주말에는 가급적 안 오거나 다른 코스를 이용하는 게 좋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도경재61) 도성길라잡이는 “곡장은 원래 곡성(曲城·구부러지게 쌓은 성)이 맞다”며 “이곳에서 북쪽으로 북한산과 능선으로 연결되는 구준봉까지 개방이 안 돼 아쉽기는 하다”고 말했다. 오후 4시, 거짓말처럼 탐방객들이 사라지고 찬바람이 습격해 왔다. 1·21 그때처럼. 겨울이 온다.
https://news.joins.com/article/23920181?cloc=joongang-home-newslistleft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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