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택동 집권시에 중국대륙을 휩쓸었던 홍위병의 문화혁명은 지금 들어도 소름이 끼치도록 무시무시한 Genocide의 극치를 이룬, 인류역사상 일찌기 볼수 없었던, 모택동을 중심으로한 인간 Butcher들의 만행이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십대아이들을 "홍위병"이라는 그럴듯한 장식용 단어를 하나 부쳐주고, 홍위병의 대장정이 동에서 서로, 북에서 남으로, "문화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발길 닿는데로 동족을 죽이는 살인 광란을 몇년간 펼치면서, 모택동 정적들을 다 몰살시킨, 모택동다운, 영원히 역사의 한페이지를 장식 시키고 말았었다.
그어렵고 무서운 광란의 살인극이 매일 몇년간을 휩쓸고 중국대륙을 덮치고 있는 그순간들을 목숨걸고, 후세에 모택동의 잔악상을 알려주겠다는 일념으로 사진들을 찍어서 모아둔 그자료들이 이제 중국대륙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알려지고 있어, 그분의 헌신적인 노고에 감사함을 더하게 됐다. 그분은 Li Zhensheng씨다.
Mr. Li의 지난날에 대한 보도 내용을 보면서, 한국의 현재 상황이, 겉으로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속에서 사람들이 자유롭게 살아가는것으로 포장되여 있지만, 정치적 반대편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박해를 당하고, 같은편에 있는 범죄혐의자들은 법의 심판과 상관없이 승승장구하고, 대법원판결에서 징역형을 언도받고 형기를 마치고 풀려난 범죄자가 억울하게 옥살이 했다고, 판결이 잘못됐다는 억지를 씌워 법으로 결정난 범죄행위를 뒤엎으려하는 무서운 흉계를 꾸미고, 어떤 권력가의 새끼들은 좋은 학교에 입학시키기위해 거짖 Certificate를 만들어 제출하고, 합격 시키고, 장학금까지 받아 챙기게 했던 애비 애미의 범죄행위에 대한 법의 심판이 억울하다고 법정에서 판사를 갖고 흥정까지 하고있는 범죄자들을 옹호하는, 한국의 앞날이 홍위병의 문화혁명과 같은 지옥을 만들지 않을까? 걱정이 두렵기만하다.
Li Zhensheng 씨는 중국의 문화혁명을 필름에 담기위해 그의 목숨을 담보로 맡겨야 할정도로 위험을 무릎쓰고 카메라를 돌렸었다. 중국공산당 신문사에서 사진기자로 근무했었던 Li는 20세기에 가장 비참하고 괴로웠던 시기에 일반대중들과 지역들을 탐방하거나 만나는일은 거의 없이 살았었다. 그는 수천장의 사진들을 찍었었고, 그중에서 일부는 언론에 발표돼기도 했었고, 대부분의 사진자료들은 외부에 알려지면 처벌받을 것을 두려워 방바닥을 뜯고 그속에 감추어 두었었다.
그가 당시에 미쳐 깨닫지못했던점은 그러한 사진들이 훗날 당시의 사람들이 두려움과 무서움속에서 살아왔던 상황을 세계에 알리게 될수있을 거란점이었었다.
미국에 거주중인 79세의 그는 뇌출혈로 이번주에 세상을 떴다라고 홍콩대학의 뉴스 프레스가 보도한것이다.
"나는 문혁동안 모든것을 지켜봤던 증인이자, 내삶의 모든 역사를 기록하기위해 모든것을 다 바쳤었다. 이제 역사속에서 나는 쉬련다"라고 그의 인생기를 기록한 출판사가 펴낸 책자속에서 밝히고 있다.
붉은 공산당의 선전병사였었다.
그는 중국내 Liaoning성에서 가난한 집안에서 1940년에 태어났었고( Chinese province of Liaoning), 아주 어려운 환경속에서 성장 했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3세였을때 세상을 떠났었고, 10세가 될때까지 농사짖은 아버지를 도와주면서 성장 했었다. 나이에 비해 어렵게 늦게 학교에 입학했으나 금방 학급에서 톱을 차지하는 우수한 학생이 되였다. 그는 장춘 영화학교에서 한 스팟을 얻게된다. 그후 그는 중국의 동북성에 있는 Heilongjiang
Daily 신문사의 사진기자로 근무하게된다. 중국의 역사상 가장 잔인했던 기간에 그는 이직업을 갖게 된거이다. 문화혁명이 1966년에 시작되면서, 모택동이 공산당 총서기가 되면서 정적들을 제거하는 캠패인을 벌이기 시작했었다.
모택동은 중국의 오래전수되여 내려오던 풍속중 4개를, 수만명의 중국의 젊은이들을 동원하여 때려 부시기를 시작한 것이다. 즉 옛풍습, 습관, 문화 그리고 생각하는것이 퇴폐성이 있다고 때려 부시기 운동을 벌인 것이다. 각대학들은 폐쇄시켜, 학생들이 "혁명"대열에 집중적으로 참여할수 있도록했으며, 이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 나가면서 그들은 닥치는데로 때려부시고, 공격하고, 특히 정부관료라고 버티고 서있는 자들이 혁명군의 타겟이 된것이다.
어린학생들은 그들의 부모에게, 학생들은 그들의 선생님들에게 혁명을 해야한다고 공격해댔으며, 정보전문가들은 전부 쫒겨 났었다. 그결과 수십만명이 맞아 죽거나, 자살을 하도록 몰아 부친 것이다. Li가 새로 맡은직분은 그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폭력과 무자비한 폭거를 기록하게되는 특별한 위취에서 근무하게 했다.
그는 근무하면서, 공격적인 학생들로 구성된 홍위병들이 그가 촬영한 모든것들을 맘데로 접근하여 볼수있는 광경에 직면하면서, Li씨는 "붉은 공산당뉴스병사"라는 완장을 만들어 팔에 부착하기로 결정한다. "나의 일상작업은, 아무런 괴롭힘당하는일없이 박해를 당하는 사람들의 사진을 찍는 일이었었다."라고 그는 BBC와 처음에 인터뷰할때 당시의 상황을 설명한 것이다.
"나는 지금 일어나고있는 격동의 시대상황을 기록으로 남겨야한다는것을 터득했었다. 비록 사진을 모으기 시작했었지만, 과연 이일을 하는것이 혁명군을 위해서, 내자신을 위해서, 또는 장래를 위해서 하는것인지 전연 깨닫지 못하고 그냥 기계적으로 일을 한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문화혁명에 관련된 예민한 순간의 사진들 때문에 어쩌면 내가 그타겟이 될수 있을수 있다는것을 알게되면서, 그는 약 20,000점 이상의 사진필름을 방바닥밑에 감추기 시작했던 것이다.
1968년에 그는 결국 반혁명행동을 했다는 비난을 받게됐는데, 그가 거처하고있는 방은 혁명위원회의 간부들에 의해 완전히 까발려졌었지만, 필름은 다행히도 발각되지 않았었다. 만약에 그때 숨겨둔 필름이 발각됐었다면, Mr.Li는 아마도 심한 범죄혐의를 받았을 것이고 필름은 완전히 파괴됐었을 것이다.
"정말로 아찔한 순간이었었다. 이사진들을 소지하고 있을때 그것들이 과연 얼마나 유용하게 사용될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는 않았었다."
Li의 사진들은 모두 안전하게 보관될수 있었지만 그자신은 그렇치 못했었다. 그는 많은 비난을 받았으며 그의 아내역시 많은 비난을 받아, 결국 2년간의 중노동 형벌을 받아야만 했었다.
2년간의 중노동형을 마치고 그의 단칸방으로 되돌아와서 그가 숨겨두었던 사진들의 형상이 그대로 잘 보존되여 있었음을 발견하게된다. 그는 베이징의 한 대학교 교수로 근무하게 됐고, 1980년대 - 중국이 중간정도의 언론자유가 실시되고 있을때 - 베이징에서 있었던 사진전시회에서 그의 사진들이 전시될수 있었다.
그의 사진들은 CPI(Contact Press Images)의 Robert Pledge 씨에 의해서 그가치가 재발견됐는데, 이인연으로 후에 Mr.Li의 인물사진과 함께 앨범으로 출간되기도 했었다. 책의 제목은 "붉은공산당의 선전병사"였다.
"우리 모두는 Mr.Li씨가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운좋게 그가 찍은 사진들을 보존할수 있었다는데 오랫동안 그에게 감사하지 않을수 없게 될것이다. 그때 당시에 그와 같이 근무했었던 동료들은,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부분이기도 했던 사진들의 필름을, 두려움에 못견디고, 다파괴했었는데 Mr. Li씨는 억세게 운이 좋았던것 같다."라고 Pledge씨는 설명한다.
그는 또 설명하기를 Mr. Li씨의 모든 사진들은 조그만 갈색봉투들속에 잘 간직되여 있었다고 설명해주기도 했다. 각봉투에는 붓글씨로 자세한 설명을 써 놨었다. 공동체와 여러지방, 사람들의 이름들, 근무시의 관직 그리고 특별한 상황설명들이 아주 정교하게 설명되여 있었다. 그의 사진작품은 지금 세계 여러나라에서 순회 전시중에 있다.
2013년도에, 사진분야에서는 전세계적으로 Oscar 상으로 비유되는 Lucie Award상이 그에게 수여됐었다. 그리고 2018년도에는 그가 촬영한 사진들과 그의 업적이 중국어로 처음으로 활자화됐었고 홍콩에서는 책자로 발간됐었다.
"Mr. Li처럼, 문화혁명당시의 처절한 상황을 자세히 촬영하여 보관한 사진기자는 아무도 없었다"라고 CPI(Contact Press Images)사는 그가 사망한후에 발표한 성명서에서 밝히고 있다.
"그는 어느것과도 비교할수없는, 문화혁명의 잔혹상을 상세히 그리고 훌륭하게 촬영한 작품을 남겨 주었다. 그는 우리곁을 떠났다. 앞으로는 다시 볼수없게된것이다."
By Yvette TanBBC News
28 June 2020
Li Zhensheng risked his life in his determination to capture China's Cultural Revolution on film.
As
a staff photographer working for a state-run newspaper, Li Zhensheng
had rare access to people and places during one of the most turbulent
periods of the 20th Century.
He took tens of thousands of photos,
some of which were published, others stored in the floorboards of his
flat for fear of punishment.
What he didn't know then was that these hidden images would one day find their way out into the world.
The
79-year-old died earlier this week of cerebral haemorrhage in the US,
said his Hong Kong publisher, the Hong Kong University Press.
"I
have pursued witnessing and recording history all my life," his
publisher records him as saying before his death. "Now I rest in
history."
His
mother died when he was three and he grew up helping his father in the
fields until he was 10. Only then did he start school, but quickly rose
to the top of his class.
He earned a spot at the Changchun Film
School and eventually became a staff photographer for the Heilongjiang
Daily newspaper in north-eastern China.
This job came during one
of the most brutal periods in China's history. The Cultural Revolution
began in 1966 when Communist leader Mao Zedong began a campaign to
eliminate his rivals.
Mao mobilised thousands of Chinese youth to destroy
the "four olds" in Chinese culture - old customs, habits, culture and
thinking.
Colleges were shut so students could concentrate on
"revolution", and as the movement spread, they began to attack almost
anything and anybody that stood for authority.
Children turned on
their parents and students turned on their teachers, intellectuals were
exiled. Thousands were beaten to death or driven to suicide.
Li's new job left him in the unusual position of being able to record the violence and brutality that was happening around him.
He noticed that the Red Guards - militant students - were
getting access to photograph anything they wanted, so he decided to make
an armband emblazoned with the words "Red-colour news soldier".
"My
work meant that I could take photographs of people being persecuted
without being harassed," he told the BBC in an earlier interview.
"I
realised that this turbulent era must be recorded. I didn't really know
whether I was doing it for the revolution, for myself, or for the
future."
But he realised that the sensitive nature of the images
could make him a target, so he hid the negatives away under the
floorboards of his flat - around 20,000 of them.
When he was eventually accused of
counter-revolutionary activities in 1968, his flat was ransacked by the
authorities but the negatives remained undiscovered.
If they had been found, Mr Li would have been severely punished and they would almost certainly have been destroyed.
"It was kind of risky," he admitted. "When I took these photos I was not sure how useful they would be."
Li's
photos were safe but he was not - he was denounced and along with his
wife, was forced to undergo hard labour for two years.
Upon his release he returned to his flat, and found the images safe and preserved.
He
eventually became a professor at a university in Beijing and in the
1980s - a period of time when China saw a sliver of press freedom - his
works were exhibited at a photography event in Beijing.
It was then that his pictures were discovered by
Robert Pledge of Contact Press Images (CPI), who later went on to
publish a book with Li's images.
The book's name? Red-colour News Soldier.
"We
will be forever grateful to Li for having risked so much to doggedly
preserve his images at a time when most of his colleagues agreed to
allow their politically 'negative negatives' to be destroyed," said
Pledge.
He revealed that Li kept all his photos in small brown
paper envelopes. On each envelope he wrote detailed captions in delicate
Chinese calligraphy. Communes and counties, people's names, official
titles and specific events were all carefully noted.
His photos were eventually exhibited in dozens of countries.
In 2013, he was awarded the Lucie Award - known as the Oscars of the photography world.
And in 2018, his works were printed with Chinese text for the first time and published in Hong Kong.
"No
single photographer covered the revolution more thoroughly and
completely than Li," said Contact Press Images in a statement following
his death.
"He leaves an inestimable photographic legacy. He will be sorely missed."
매년 해오던 6.25추념 행사에 방안퉁수 문재인이 참석하고, 6.25노래까지 합창 했다는 뉴스를 봤을때, 한편으로는 반가웠으면서도, 방안퉁수와 그찌라시들의 무슨 꿍꿍이 계산이 있는것은 아닐까?라는 의심도 느꼈었다. 그래도 좋은맘으로, 마지막 가시는 영령들에게 대한민국 대통령이 참석하여 편하게 보내주시는구나 감사한 마음까지 있었다.
몇년동안 시야에서 사라졌었던 탁현민이가 몇달전에 다시 방안퉁수 밑으로 기어 들어왔다는 뉴스를 봤었다. 그자가 내가 알기로는 학교에서 전공한 Major가 행사기획하는데 관련된 공부를 했다는 뉴스는 본적이 없었다.
6.25행사는 국방부, 아니면 보훈처에서 주관하여 관련유공자 모시고 매년 해왔었던 국가적 행사였었다.
문재인이 청와대에 입성하면서부터 주관 부서를 제치고, 청와대가 독식으로 국가행사를 주관하는 이상한 나라가 됐는데, 그렇다고 청와대가 주관해서 행사가 돋보였다거나, 국민적 공감대를 얻었었다면 이해를 하겠으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추진한 목적을 이해 할수가 있을것 같다는 확신이 많이 선다.
주무부서를 로버트로 만들고, 방안퉁수 문재인의 휘하에 있는, 전직이 운동권, 전대협, 주사파출신들로 구성된 비서들이 주관하여, 결론적으로는 북한의 꼬마 남매에게 호감을 얻으려는 꼼수였음을, 이번 6.25동란 추념식에서 확실히 나타낸 것이다. 다시 언급하지만, 청와대 비서들은 문통의 정치적 사상에 맞는자면, 능력에 상관없이 OK다. 자질이 문제가 안된다. 그러나 국무위원은 어쨋던, 청문회를 거쳐 봉직하는 국민의 심복인것이 다른점이다. 그런 비서들이 장관들을 쫄병 부리듯이 주무른다.
탁현민의 정치적 사상이 자유민주주의, Freedom을 신봉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번 행사는 문통과 같은 생각으로, 겉으로는 포장을 거창하게 했지만, 알맹이는 전부 꼬마 남매가 봤을때 만족할만한 Contents로 기획한 것이라는 점이다.
전쟁에 관한 제일큰 국가적 행사를, 군수뇌부들은, 안테나를 청와대에만 마추고 군을 지휘하는자들이기에, 방안퉁수 문재인 정권이 군을 무시하고 청와대에서 주관한다고 했을때, 행사의 특성상 절대로 군이 아닌 다른 부서에서 한다는것은 용서가 안되며, 이는 군을 무용지물, 허수아비로 구색맞추기위한 일종의 Spare Parts정도로만 여길뿐, 국가안보를 지키는 간성으로서의 역활은 절대로 못하게, 국민들에게 군은 허수아비정도로만 보이게 한것으로 이해된다.
각군에는 군악대도있고, 연예 부대가 있다. 그들의 일상은 군가를 부르고 행사에 참여하여 군의 사기를 돋우는 일종의 응원역활을 하는게 주목적인데, 그들이 행사에서 부르게되는 군가를 모를리가 절대로 없을텐데.... 버젖히 가사와 곡조가 맞지않는 음악이 흘러 나왔었지만, 군수뇌부들은 모른체 하고 지나쳤었다. 청와대의 안테나를 비틀거나 수정하겠다는 의지는 애초부터 없었기 때문이다. 꼼수대장의 꼼수부하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60만 대군의 자존심을 완전히 뭉개버린, 2년간의 아까운 청춘을 국가방위에 헌신하고있는 대한의 아들 딸들의 귀와 입을 틀어막아버린 독재자의 더러운 수법에 놀아났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차라리 군대를 완전 해체 시키고, 삼팔선의 방어철책및 설비를 완전제거하면, 남북간에 긴장감도 없을 것이고, 꼬마 김정은에게 더 신임을 얻어, 방안퉁수짖을 더 맘놓고 하게 했었더라면..... 그런 conspiracy에 모두가 춤을 추었다는 생각에 분통이 터진다.
방안퉁수 문재인은 북한노래와 같은 리듬을 들으면서, 감개 무량 했을 것이다. 모든게 계획데로 하나하나씩 꼬마 김정은의 밑으로 들어가서 5천만을 배급제하에서 살게하는 공산독재체제를 만들고, Rein을 채워 통솔할수 있도로 만들어서 상납하는 그계획이 거의 완성돼 가고 있음을 이번 행사를 통해서 보면서 무척 흐믓해 했을 것이다.
그계획이 잘 되여가고 있음을 확인이라도 하려는듯이, 그는 유해운반해온 비행기에서 유해를 꺼내 다른 비행기로 옮겨서 행사장에 전시 했었다. 아무도 모르고 다 잘 넘어가는것을 보면서, 작전이 완전 성공했음을 확인했을때 또한번 그는 희죽희죽 괴상한 눈짖과 웃음을 내보냈을 것이다. 후에 조선일보에서 이문제를 끌어내자, 꼼수로 금방 변명을 해댔다. 방역상의 문제 때문에라고. 유해를 다른 비행기로 옮긴것은 방역상의 문제와 관련이 없다는 오리발을 내미는 꼼수였었다. 국민들이 바보인지? 방안퉁수 Regime의 머리가 출중했던 것인지?
여기서 나는 제안한다. 각군의 참모총장들은 물건을 떼서 낳아준 어머니에게 반납하고, 이시간부로 전부 옷벗고, 자결을 하던가? 아니면 시야에서 사라져라. 청와대에 안테나만 맞추기에 정신없는 군수뇌부에 장병들은 치를 떨고 있음을 잊지 말기를....
탁현민은 기획 잘했다는 칭찬과 부상을 받았을 것이다. 탁현민의 능력은 유치원생 정도의 자질일 뿐이다.
문통이 지난 3년 동안에 국가를 이끌어오면서, 단한번만이라도 국민들 편안하게 웃을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준적이 있었나? 좀 비난한다 싶으면 입에 자갈 물리고, 한명숙같은 늙은 whore의 반역죄를 무죄로 풀겠다고, 대법원 판결을 뒤엎을 계획을 세워 밀어 부치고 있고, 정치적 반대편에 서있는 애국자들은 전직이 대통령이던 면서기이던간에 전부 감옥에 처넣는, 공포사회를 만들어 오늘에 이르렀다. 날씨도 더운데, 그래서 더 답답하고 짜증이 난다.
트럼프 대통령은 6.25일 와싱턴 국립묘지안의 한국전참전용사묘를 영부인과 함께 참배하고 헌화하고, 진정성을 보이는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았었다. 문통의 꼼수를 쓴 추모식과 많은 비교가 되여, 부럽기만 했다. 문통의 양다리 걸치기 꼼수를 트럼프 대통령이 모를리 없건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먼저 자유를 지키기위해 산화한 선배들의 헌신에 감사함을 보내는 모습이 너무도 보기 좋았었다. 많은 비교를 하면서, 미국이 무척 부러웠었다.
G-7정상회담에 Observer로 참석하는것을 반대하는 일본의 입장을 조금이라도 생각해 봤을까? 공산독재국가의 꼬마 남매와 중국의 시진핑에 읍소하고, 미국과 일본및 서방세계의 군사적 동맹에 반대하는 짖만 해대는 방안퉁수 문재인을, 아베가 미치지 않고서는, 절대로 참석을 환영할리가 없다는 나의 생각이다. 트럼프에게 이미 반대이유를 충분히 설명 했을 것으로 이해된다.
우리 대한민국의 앞날은 어디를 향해서 떠내려 가는가? 누구 아는 사람 있으면 자세히 설명좀 해주시요.
비나이다.
서울공항 행사장, 비행기에서 내려지는 유해들 - 지난 25일 경기 성남시
서울공항에서 열린 ‘6·25전쟁 70주년 기념식’에서 국군 참전용사 유해 147구를 봉환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 국군
참전용사들의 유해는 사실 다른 비행기로 미국에서 송환된 후 사진 속 비행기로 옮겨진 뒤 이날 행사가 진행됐다. /연합뉴스
입력 2020.06.30 01:33
靑탁현민이 관여한 6·25 70년 기념식 잇단 구설수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정부가 1시간 넘게 진행했던 기념행사가 각종 구설에
휩싸이고 있다. 기념식 말미에 각군 총장이 직접 부르는 형식으로 육·해·공, 해병대가가 연주됐는데 육군가와 해병대가는 방송에
엉뚱한 가사가 자막으로 나갔다.
정부는 6·25전쟁 당시 숨진 국군 147구의 유해를 운구한 '공중급유기'에 영상을
투사하는 '미디어 파사드'를 선보였다고 밝혔지만, 실제론 다른 공중급유기를 사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기념식에서 연주된 애국가의
도입부가 북한 국가와 유사하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탁현민 청와대 의전비서관이 청와대 복귀 후 관여한 첫 대규모 행사를 두고 잡음이
커지면서 탁 비서관의 연출·기획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얘기도 나왔다. 군 관계자는 "6·25전쟁 70주년 행사에서 연주된 육군가와
해병대가의 방송 자막이 잘못 나간 것으로 파악됐다"며 "행사를 주관한 기획사가 실수한 것으로 안다"고 했다. 육군가는 지난
2014년 가사가 일부 바뀌었는데, 이번 행사에는 개사 전 가사가 자막으로 나갔다.
해병대가는 아예 엉뚱한 노래의 가사가 방송을 탔다. 해병대는 '나가자
해병대'라는 군가를 공식 해병대가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날 자막에는 다른 군가인 '해병대의 노래'가 나갔다. 이에 대해
행사를 주관한 국가보훈처는 "대행사 측에서 중계 방송사인 SBS에 군가 자막 파일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됐다"고 했다.
70년 만에 미국을 거쳐 송환된 147구의 참전용사 유해를 봉환하는 퍼포먼스도 구설에 올랐다.
정부는 "개식 행사로 진행된 미디어 파사드는 참전용사들의 헌신과 희생을 추모하고 마침내 조국으로 돌아온 호국영령들을 기리는 내용의
영상을 유해를 모셔온 공중급유기 시그너스(KC-330) 동체에 직접 상영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날 행사에 사용된 공중급유기는
유해를 송환한 급유기가 아니라 공군이 보유한 동일 기종의 다른 항공기였다.
정부는 이날 공중급유기에 미디어 파사드를
구현한 뒤 유해를 기체에서 가지고 나오는 퍼포먼스도 진행했다. 참전용사의 유해를 실제 운구에 쓰인 공중급유기에서 꺼내 행사를
위해 대기 중이던 다른 공중급유기에 넣어뒀던 것이다. 이에 대해 정부 관계자는 "방역 문제 때문에 유해를 모시고 온 기체를 행사에
사용할 수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군에서는 "쇼를 위해 참전 용사의 유해를 이렇게 다뤄도 되는 것이냐"는 얘기가 나왔다.
인터넷에선 기념식에 연주된 애국가의 도입부가 북한 국가와 일부 비슷하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행사를 주관한 보훈처와 편곡을 맡은 KBS 교향악단은 "교향악 등에서 자주 반복돼온 음형"이라며 북한 국가와의 연관성을 부인했다.
정부 안팎에서는 탁현민 비서관이 지난달 청와대에
돌아온 뒤 크고 작은 문제가 잇따른다는 얘기가 나온다. 지난 6일 현충일 행사에서는 천안함·연평도 관련 유족과 생존 장병을
초대하지 않아 논란이 됐다. 이번 6·25 70주년 행사 역시 "참전 용사들을 위해 저녁 시간대에 행사를 한다"고 했지만, 미디어
파사드 등 퍼포먼스적 요소에만 신경 쓰다가 정작 군가 등 기본에 충실하지 못했다는 변명이다.
홍콩의 자유민주주의는 자취를 감추게 될것인가?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로 부터 받아오던 모든 특혜도 사라지게 된다는데....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의견이 다양하게 표출되기에 때로는 시끄러운 소리로 들릴때가 많다. 그렇다고 항상 시끄러운것만은 아닌데, 그러한 Concept은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용납이 안된다. 중국이 서방세계의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와 Freedom이 어떤것인지를 절대로 이해 할수가 없다.
이번 George Floyed의 죽음으로 야기된 폭동은 전미국을 덮치고 있었지만, 그대로 자유민주주의 국가, 미국의 Freedom에 금이 갔다거나 국가로 부터 자유민주주의와 Freedom을 빼앗겼다는 소리는 없었다.
홍콩의 자유민주주의가 무너지면, 중국 본토의 International Trade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측된다.
중국인민의회는 3일간 일정으로 열리는 토론에서 홍콩법안을 재점검 하게된다고 신화사 통신이 보도했다. 중국은 이법의 실행을 결정하고, 빠르면 화요일부터 적용하게 될것이라고 한다.
미국은 이법의 시행에 대한 대응책으로 지금까지 1997년 중국에 홍콩 반환이 이루어질때 부여했던, 무역상의 특혜조치를 폐쇄한다고 경고하고있다. 미국상원은 목요일 각종 비즈니스와 경찰들을 포함한 개인들에게 부여했었던 특혜조치를 봉쇄하는 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 시켰다. 이법안통과로 홍콩주민들에게 주어졌던 자치권 또는 Freedom이 재제를 받게된다.
상원을 통과한 이번 법안은 홍콩주민들의 데모를 무자비하게 무너뜨린 경찰에 초점이 마추어져있고, 홍콩안전법 시행에 책임이 있는 중국공산당원들도 마찬가지로 재제를 받게된다. 또한 비즈니스를 하는데 이용하는 은행에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설명하고있다.
지난주에는 전직 UN 인권위원회 회장과 8명의 전직 UN특사들이 인권위원회 회장에게 홍콩에 특사를 파견하여홍콩주민들의 인권이 침탈당하는것을 조사하도록해야 한다는 진정서를 내기도했었다. 영국은 홍콩전체 인구 7.8백만명중에서 최고 3백만명 이상의 주민들에게 영국여권 발행을 허용한다고 발표까지 했었다.
이에 맞서 중국은 외부세력의 중국내정간섭을 맹렬히 비난하고 있다.
이홍콩안전법안은, 분리독립, 폭동, 테러행위 그리고 외국세력과 협잡하는 행위를 홍콩사회를 위험에 빠뜨리는범죄로 다스릴것이라고 했다. 홍콩의 합법적인 법령은 이미 한계를 넘어선 책임을 묻지 않을수 없으며, 베이징당국은 정치적반대파들을 찾아내기위한 법을 만들기로 결정한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번 베이징의 결정은, 홍콩이 영국 스타일의 민주주의법을 오늘날까지 준수해왔는데,이제는 완전히 그런 사회적 규범은 파괴되고, 공산당식 법이 지배하게 된다. 따라서 중국이 홍콩을 영국으로 부터 넘겨 받을때 약속했었던, 한 국가 두정부의 자주권을 약속했었던 자치정부는 자취를 감추게 되는 것이다. 베이징 공산당 정부가 들어선다는 뜻이다.
중국은 오랜기간동안 홍콩을 억누르기위해 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해 왔었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은 2003년 대규모 대모가 일어나면서 포기했었다. 베이징당국은 자난해에 계속된 홍콩의 항의데모에 더이상 참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고 홍콩의회 기능을 다른 방향으로 바꾸기위한 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이법을 시행함으로써 홍콩주민들의 합법적인 구심점은 약화되거나 소멸될것을 많은 전문가들은 비난하고있다.
일요일에 이법시행을 반대하는 많은 홍콩인들은 데모를 하면서, 경찰과 충돌했는데 경찰은 이들에게 최루탄을 쏘고, 불법집회를 했다는 명목을 걸어 53명을 체포 구금했다고 홍콩방송 RTHK는 보도했었다.
여기서 걱정되는것은, 이러한 홍콩상황을 한국의 문재인 사회주의 정부가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는 점이다.
문통정부 정책에 반대하여 지난해 10월에 있었던 광화문광장의 시위대를 생각해 본다. 중국이 무자비하게 자유를 지킬려고하는 홍콩주민들에게 최루탄을 쏘고, 강압적으로 인신구속하는 더러운 Play를, 문통정부는 그대로 한국에 적용할것 같다는 걱정이다. 여의도 민주당 구케의원들은 그렇게 억압하기위해 새로운 시위법을 만들것이 훤히 보이기 때문이다. 아....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Police
detain a person during a pro-democracy rally supporting human rights
and to protest against Beijing's national security law in Hong Kong,
Sunday, June 28, 2020. (AP Photo/Vincent Yu)
China's legislature begins review of controversial bill targeting Hong Kong protests
The Associated Press
Published Sunday, June 28, 2020 7:37AM EDT
Last Updated Sunday, June 28, 2020 7:40AM EDT
BEIJING -- China's legislature on Sunday began reviewing a
controversial national security bill for Hong Kong that critics
worldwide say will severely compromise human rights in the
semi-autonomous Chinese territory.
The National People's Congress Standing Committee took up the bill at
the start of a three-day session, China's official Xinhua News Agency
reported. China has said it is determined to enact the law, and its
passage is expected by Tuesday.
The U.S. says it will respond by ending favourable trading terms
granted to the former British colony after it passed to Chinese control
in 1997. The Senate on Thursday unanimously approved a bill to impose
sanctions on businesses and individuals - including the police - that
undermine Hong Kong's autonomy or restrict freedoms promised to the
city's residents.
The Senate bill targets police units that have cracked down on Hong
Kong protesters, as well as Chinese Communist Party officials
responsible for imposing the national security law. The measure also
would impose sanctions on banks that do business with entities found to
violate the law.
Last week, a former United Nations human rights chief and eight former
U.N. special envoys urged the body's secretary-general to appoint a
special envoy on Hong Kong over what they said is a pending
“humanitarian tragedy.” Britain has said it would grant passports to as
many as 3 million of Hong Kong's 7.8 million people.
Beijing has denounced all such moves as gross interference in its internal affairs.
The law would criminalize secession, subversion of state power,
terrorist activities and colluding with foreign forces to endanger
national security. Critics say Hong Kong's legal statutes already
account for such matters and that Beijing is determined to use the law
to pursue political opponents.
The central government in Beijing also would set up a national security
office in Hong Kong to collect and analyze intelligence and deal with
criminal cases related to national security.
Few details have been released, but it appears that Beijing will have
ultimate power over government appointments, further reducing the
relative independence it promised to Hong Kong in a 1984 joint
declaration with Britain that is considered an international treaty.
The measures have been widely seen as the most significant erosion to
date of Hong Kong's British-style rule of law and high degree of
autonomy that China promised Hong Kong would have under a “one country,
two systems” principle.
China has long demanded such a law for Hong Kong, but efforts were
shelved in the face of massive protests in 2003. Beijing appeared to
have lost its patience in the face of widespread and often violent
anti-government demonstrations in Hong Kong last year, moving to
circumvent the city's own legislative council and enact the law at the
national level on what critics say are weak legal grounds.
On Sunday, opponents of the bill staged a protest in Hong Kong, with
police using pepper spray and arresting 53 people “on suspicion of
unlawful assembly,” according to Hong Kong broadcaster RTHK.
비핵화 약속을 지키지 않자, 미국을 중심으로한 전세계가 북한에 대해 경제적, 외교적, 군사적인 면을 포함해 봉쇄정책을 포함한 모든 거래를 차단해 온지 꽤 오래됐다.
39호실에서 외화가 바닥이 나면, 평양시내의 앨리트 구룹들에게도 막대한 영향이 있는것으로 이해된다.
그동안 김정일은 핵무기를 미국을 비롯한 한국 및 서방세계에 위협용으로 사용하곤 했었지만, 그약발이 이제는 거의 무용지물이 되고 있기에, 그들의 외화 벌이는 갈수록 더 어렵게 돼가고 있다는것이다.
얼마전에는 김정은이(North Korea’sKim Jong Un)가 대중앞에 나타났다 다시 사라졌다 반복이 돼곤 했었는데, 다시 뚱뚱보 독재자는 다시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것 자체가 많은 의문점을 안고있다. 김정은이를 고급양주에 화려한 차를 타고 활보하게 하는, 역활을 누가 지금 관장하고 있을까?
요즘은 그의 꼬마여동생, 김여정이가 겁도없이 미국에 핵무기를 쏘겠다고 위협하면서, 독재자의 역활을 대신하고있다. 그러나 김여정이가 정말로 39호실을 장악하고 돈줄을 관리하고 있는지의 여부에 대해 알고져하는 호기심이 관심의 대상이 되고있다.
김정은과 그의 가족들의 배를 채워주는 수백 수천만 달러를 긁어 모으기 위해 지구촌에 불법적으로 만들어진 네트웍을 관장하는 본부가, 외부에 가려져있는 평양의 유명한 39호실이라는 점이다.
북한이 목요일 다른 선택은 없고, 미국과의 양자회담 실패에 대해 미국을 비난하면서, 미국과의 "적대적인 정책"때문에 "핵에는 핵(nuclear with nuclear)으로 맞받아 치는수밖에 없다"라고 분명히 했다.
"미국의 핵위협을 제거하기위해, 북한 Regime은 대화를 통해서 또는 마지막 수단으로 국제법에 의지 하던가 모든 방법을 동원했었지만, 모든게 헛수고였다. 마지막 남은 옵션은 오직하나, 그것은 다른게 아니라 핵공격에는 핵공격으로 맞서는 방법뿐이다"라고, 남한에 본거지를 둔 미국의 웹싸이트, NK News에 따르면 북한의 외무성이 보고서에서 그렇게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이보고서는 한국전쟁발발 70주년(Korean War)을 기념하는 그시간에 마추어 북한 매체가 발표한 것이다.
평양의 앨리트구룹은, 전세계를 상대로 해서 벌어들이던 불법유통방법이 유엔과 미국의 봉쇄정책으로 꽉막혀 옴짝 달싹 못하게 함으로써, 그들이 즐기던 호화판생활을 할수없게 됐을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은 핵무기협박으로도 안되는 것이다.
"김정은이는 그가 즐겨마시는 꼬냑, 머스데스밴츠 그리고 로렉스시계를 그가 어떻게 소유할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라고 전직 미육군 특수부대에서 대령으로 근무했던,북한전문가, David Maxwell씨가 Post지에 물었었다.
"그러한 호화판 물건들을 구입하는 모든 돈은39호실로 부터 나온다."라고 확인시켜 주었다.
마약제조, 인신매매, 위조화폐, 금괴밀수, 무기밀매 그리고 노동력착취 등등의 악행은 김정은의 아버지 김정일이 1974년도부터 만들어 관리해오던 39호실이 주관해 오던 불법행위들의 극히 일부에 속할뿐이다.
방안퉁수 문재인은 9.19 평화협정시, 그가 마치 한반도의 비핵화를 위해 운전수석에 앉아있는것 처럼 큰 소리 치면서 희죽희죽 거렸지만, 그의 존재는 이제 완전히 김정은 시야에서는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남한국민들의 재산인, 남북연락사무소건물을 그증거로 폭파시켰었다. 아직까지 김정은에 반드시 그대가를 묻겠다는 얘기한마디 못하고, 괜히 죄없는 국민들 입에만 자갈물리고, 겉으로는 자유민주주의를 포장한채, 김정은 regime보다 더 혹독하게 국민들의 귀와 입을 틀어막고 있다. 이게 바로 방안퉁수가 가족들에게 행패를 부릴지언정, 밖으로는 한마디 못하고 당고만 있다는 뜻이다. 괜히 미국에 또 몽니를 부리지 않을까? 참으로 걱정이다.
North Korea’sKim Jong Un
vanishes, then pops up. Now, the portly despot is out of sight again,
and that raises the question: Who’s minding the store — the one that
keeps him in booze and fancy wheels?
His
little sister has stepped into his role as saber-rattler, even
threatening a nuclear attack on the US. But those caught up in the
palace intrigue really want to know if she’s also the one overseeing the
money machine that keeps the mean machine running.
That would be
the shadowy, notorious Office 39 in Pyongyang, the headquarters of an
allegedly illicit global smuggling network designed to generate millions
in hard currency that fatten the coffers of Kim and his family.
Without
it, Pyongyang’s elite, hamstrung by UN and US sanctions that prevent
them from doing above-board trading with the world, would have to do
without any luxuries — not to mention nuclear weapons.
“Where do
you think Kim gets his cognacs, Mercedes and Rolex watches?” David
Maxwell, a retired US Army Special Forces colonel and North Korea
expert, asked the Post. “All the money to buy that stuff comes from
Office 39.”
Drug
manufacturing and trafficking, counterfeiting, gold smuggling, arms
dealing and slave labor are just a handful of the ultra-illegal
activities that Office 39 has sponsored since Kim’s late father, Kim
Jong-Il, launched it in 1974.
오래된 뉴스의 한문장이자만, 요즘 청와대의 수석이라는 사람들이 장관위에 군림하면서, 장관들을 하인 부리듯이 권력행패를 부리고, 장관들 또한 법적으로 신분이 보장돤 장관직을 수행하면서, 일개 비서들에게 절절 매는 꼬락서니가 못마땅해서 그실상의 일부를 다시 음미해 보조져 함에서다.
오리발이 또 나타났구먼. 청와대의 내부살림살이를 추리해 보면, 역시 문통은 A4용지에 써있는 몇자 메세지를 읽는 수준밖에 안돼고, 국민들의 심판이나 신임을 얻지못하고, 문통의 입맛에 맞는자들이 전부 '수석비서관'자리를 한개씩 꿰차고, 수렴청청하는 모습을 뚜렷히 보게된다. 그대표적 비서가, 지금은 지은죄가 많아 법의 심판을 받고있는 좃꾹이다.
대통령과 얼굴을 맞대고 국사를 를 논의하는 각부의 장관들은, 어쨋든간에 국회의 청문회를 통과한후 대통령이 임명하여 국무위원을 지위를 확보하고, 국무회의를 하고, 국가정책을 결정하는 막중한 책임을 떠안고, 대통령과 한배를 타고 임기동안 항해를 하면서, 때로는 풍랑을 만나서 휘청거리기도하고, 순풍에 오월동주까지도 하게되는 경우도 있다.
요즘 보면, 장관들이 국사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대통령을 만나는 경우는 거의 드물고, 전부 수석비서라는자들이 장관들을 호출하거나 불러놓고, 마치 하인대하듯이 하는 꼬락서니를 보면, 이게 법치국가 대한민국맞나?라는 의심이 떠나지 않는다.
국정감사에 불려나온 장관들은 왜 그렇게 왜소해지는지? 그이유를 잘 모를때가 많다. 해당국회의원들은 일년중 절호의 찬스를 맞아, 장관들 엿먹이는, 두둘겨 패기도하고, 내가 국회의원이라는것을 과시하는 기회이기도 하지만, 장관들이 소신껏 국사를 잘 이끌어 왔으면 그렇게 굽신거릴 필요도 없을것 같은데....
정진석 의원이 "냉면이 목구멍으로 넘어갑니까?"라고 방북했던 기업총수들에게 북괴의 이선권이란자가 면박을 주었다는 기사에 대해, 거의 모든 국민들은 분명히 당시 보도된 뉴스를 보고 알았고, 분노한 사건을 설명하면서 '이런 굴욕적인 대접이 어디 있을수 있는?'라고 지적했는데, 조명균 통일부 장관도 그질문에 수긍하는 식으로 답을 했었다고 하는데, 청와대와 민주당 찌라시들은 구렁이 담넘어가듯히, 국민들이 바라는 강력한 표현은 내팽개치고, "꼭 뭐 환인된건 아니다"식으로 오리발을 내밀었단다. 김정은 Regime을 두둔하는 방안퉁수짖을 했다.
더 가관인것은 국무총리, 이낙연이가 언론보도에 대해 "가짜뉴스 팩트체크 시스템을 도입하는 내용으로 행정명령까지 만들었었다고 한다. 도대체 언론을 어디까지 재갈 물릴려는 작당들인지? 이북의 김정은 Regime보다 더 쥐어짜서, 정부의 나팔수 역활만 하라고 하니... 이낙연이는 지금 국회의원으로 신분이 바뀌었고, 현재는 Coronavirus Pandemic보다 더 무서운 "정세균 (Malignant Virus)가 바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알고있다.
문제는 국감장이나, 국회질의 응답에서, 주고받는 사람들은 장관들이나 장관급 고위공직자들과 국회의원들인데, 장관들이 청와대 수석들의 입맛에 맞지 않게 질의 응답한 장관에 대해서는 마치 하급 부하를 다루듯이 하고있는 행패를 보면서, 국민들은 바라기를 대통령이 수석비서를 임명할때, Screen 잘하라는 충고를 여러 경로를 통해서 신호를 보내곤 하지만, 오직 전대협, 주사파, 사회주의자 또는 운동권 출신들만 골라서 임영을 하니, 그들이 사고를 치는것은 당연한결과라고 본다. 김의겸이는 부동산 장사로, 좃꾹이는 새끼들 부정입학시키는 꼼수를 쓰다가 지금은 법정에서 재판까지 받고있다.
수석비서관들은 국회질의응답에 나설 자격도 없는 일개 비서일뿐이다. 장관이 잘못 대답을한것을 인지했으면, 수석들은 대통령에게 설명하고, 그내용을 대통령이 직접 장관들에게 지시 또는 재고 여부를 물었어야 행정의 흐름에서 문제가 안생길텐데....대통령 제기고 수석들이 난리방구를 해대니...또 장관들은 바보같이 수석들에게 굽신굽신하고, 그리고 나서 그화풀이는 휘하 공무원들을 통해 국민들에게 고스란히 떠 넘겨진다.
이런 행정운영을 보면서, 대통령은 듣고 보았던데로 "방안퉁수"짖만 계속하고있고, 수석들은 그런 대통령을 맘데로 요리하고.... 그결과는 지금 뚜렷히 나라 구석구석에 잘 나타나고 있다.
경제는 폭망했고, 젊은이들은 일자리찾아 길거리를 헤매고 있고, 가장 큰 먹거리중의 하나였던, 원자력발전소건설 Plant 수출은 이제 완전히 시궁창에 처박혀 한국땅에서 없어졌다. 탈원전정책은, 현재 가동을 잘하고있는 월성1호기까지 멈춰세우고 말았다. 탈원전으로 일년이 수천억원씩 흑자를 내던 한전은 지금 수천억원씩 적자를 내고도, 전기료는 계속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
지난 4.15총선이후 새로 구성된 국회는 Sub Committee는, 공산당식으로 이끌어가는 민주당이 전부 독차지하고 말았다. 이런 소위원해 구성은 이승만 대통령께서 대한민국 창설이후 첫경험이다. 이북도 인민민주주의라고 자랑이다. 인민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는 하늘과 땅차이다. 한국의 국회는 인민민주주의식을 그대로 모방하여 운영한다. 김정은이의 명령을 잘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옛말에 "죽쒀서 개좋은일만 시킨다"라는 속담이 있다. 해방이후 70여년동안 5천만 모두가 열심히 개미처럼 일하여 보릿고개 없애고, 살기좋은 나라로 만들어 줬더니, 문재인과 그일당들이 국민들을 현혹하여 정권을 잡더니, 나라 곡간을 거덜내는것도 모자라, 국민들의 귀와 입을 다 틀어막아, 눈뜬 장님과 귀먹어리로 만들어 버렸다.
지금 이시간에도 청와대의 밀실에서는 비서들이 어떤 작당을 하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방안퉁수 1호, 대통령은 수석들에게 얼마나 휘둘리고 있는지?도 궁금하기만 하다.
1990년 도널드 트럼프는 타지마할 카지노에 무리하게 투자했다가 코너에 몰렸다.
'트럼프 빚더미에' 같은 기사가 나왔다. 그는 앙증맞은 입술에 힘을 꽉 주며 "악의적인 거짓 기사(false and
malicious article)"라고 했다. 그는 결국 파산했다. 복잡한 말로는 이길 수 없다는 걸 깨달은 트럼프는 대선
캠페인에서 새로운 말을 애용했다. 페이크 뉴스(fake news), 가짜 뉴스. 트럼프는 그 말의 발명자는 아니지만, 세계적으로
유행시켰다.
작년 6월, 트럼프 대통령을 만난 문재인 대통령이 "나도 '가짜 뉴스'로 고생했다"고 할 때부터 좀 불길했다. 정치 이념으로나, 살아온 이력에서 두 사람은 '상극'으로 보였는데, 유독 이 문제를 두고는 '찰떡궁합'이었다.
얼마
전, 이낙연 국무총리가 '가짜 뉴스에 대한 강력한 조치'를 말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가짜 뉴스 팩트 체크' 시스템을
도입하는 내용으로 문건을 만들었다가 공개하지는 않았다. '국민이 속지 않도록' 하는 명분이지만, 이게 카다피나 김정은 방식이라는 걸
스스로도 알았을 거다.
'냉면 목구멍' 발언은 지난달 29일 국정감사장에서 나왔다. 정진석 자유한국당 의원이
"리선권이 방북한 재벌 회장들에게 이렇게 면박을 줬나" 하고 묻자, 조명균 통일부 장관이 "비슷한 얘기를 들었다"고 답했다.
'이런 굴욕이 어디 있느냐'는 공분(公憤)이 일자, 정부 여당에서는 '꼭 뭐 확인된 건 아니다' 식으로 나오고 있다.
국감을
통해 알려져 다행이다. 이런 이유에서 그렇다. 〈"냉면이 목구멍으로 넘어갑니까" 리선권, 방북 기업 총수들에 면박〉 이런 기사가
특정 언론사 단독 기사로 나갔다 상상해보자. 아침 10시쯤 청와대 관계자가 "남북 관계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적의(敵意) 찬
오보"라며 신문을 흔들며 화를 냈을 것이다. 그날 정오 무렵, 진보 언론이 편들고 '문빠'들이 거들며 '가짜 뉴스' 낙인찍기
작업이 시작된다.
문제의 언론사는 '취재원 보호' 원칙 때문에 실명(實名)을 공개하지 못한다. 다른 언론들은 방북 기업 홍보 담당자들에게 열심히 전화를 돌릴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응대할 것이다. "회장께서 기억이 없다고 하신다."
결국 이건 '수구 적폐 세력의 반(反)통일적 가짜 뉴스'로 확정된다. 기자 신상을 캐고, 언론사 게시판에는 상소리가 넘쳐난다. 그 언론사가 방송이었다면 '방통위 제재'를, 신문이었다면 '정정 보도문 결정'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가짜 뉴스' 시대가 아닌, '가짜 뉴스라 낙인찍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게 어느 한쪽에 매우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남녀, 노소, 보수, 진보 할 것 없이 '불쾌한 뉴스'는 다 '가짜 뉴스'라고 주장한다.
"진리와 허위가 맞붙어 싸우게 하라. 자유롭고 공개적인 대결에서 진리가 진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존 밀턴이 출판의 자유를 촉구하며 1644년에 쓴 책 '아레오파지티카'에 나온다.
"진리에 관한 최상의 테스트는 시장에서 경쟁시키는
것." 미국의 '위대한 법사상가'라는 올리버 웬들 홈스도 1919년 판결문에 이렇게 썼다. 물론 그 위대한 분들의 시대에는
인터넷이 없었다. 진실은 자주 위협받는다. 그렇다고 권력이 '이건 가짜, 저건 진실' 통제할 수는 없다. 불가능하다. '인민
민주주의'가 아닌 '자유 민주주의'에서는 대개 사실과 거짓을 '시민의 시장'에서 다룬다. 정부는 뒤에 서라.
민주주의를 입에 달고 사는, 그자들이 바로 주사파, 전대협 운동권자들인데... 그자들이 대한민국 3권 분립의 영향있는 곳에서 똬리를 틀고 있으니....최시인의 절규가 그자들에게 먹여 들어갔으면 얼마나 좋을까만은...
국회에서 청와대에서, 그리고 사법부는 그우두머리가 방안퉁수 문재인 대통령의 하수인으로 채워졌으니....
청와대의 비서실장은 전대협회장 출신으로 문통정부의 첫번째 비서실장을 했었다. 그는 문통이 주창하는 탈원전을 밀어부치면서, 아랍 애미리트에 수출된 원자력 발전소 건설이, 문재인 대통령의 청천병력같은 탈원전 선언으로, 뒷통수를 얻어맞은 아랍애미리트의 왕조는 한국과의 원자력 발전소건설 사업을 계속해야 할까? 말까?를 망설이다가 한국에 통보를 했다. 어찌된 영문인가를 알아보고져. 그때 문통은 얼마나 급했던지, 대통령 전용기를 비서실장에게 내주고 왕조를 방문토록 했었다. 당연히 문통이 달려갔어야 했다.
대통령 전용기는 대통령만이 업무용을 사용토록 국가에서 준비해준 비행기다. 대통령이 없는 비행기를 비서실장이 타고 날아갔었는데, 방문후의 업무보고는 일체 알려진게 아직까지도 없다. 그뿐만이 아니고, 문통은 그의 부인이 인도에 혼자 방문하는데도, 대통령 전용기를 내 보냈었다. 이러한 권력남용은 국민들을 완전 허수아비로 만든 대통령의 권력남용이었지만, 아직까지 아무도 이의 부당성을 거론하는 양심적인 언론이나, 정치꾼은 없다.
이명박 대통령이 원자력발전소건설 Plant 수출 계약을 성사시키고, 국민들에게 자랑스럽게 보고 하면서 가장 자랑스러워 했던 부분은 원전건설수출도 중요하지만, 원전건설후 운영에 들어갔을때, Maintenance를 도맡아 하게될때의 이익이 훨씬 더 크다는점을 강조 했었고, 그계약은 당연히 우리 한국쪽에 맡겨지는것으로 의심치 않았었다.
그러한 경제적 횡재의 기회를, 문재인의 탈원전정책 선언으로, 아랍애미리트 왕조는 한국의 탈원전에 진정성을 믿지못해, 완전히 다른 나라(내가 알기로는 불란서)에 독점 계약을 하고 말았다. 커다란 경제적 Coffer를 뻔히 보면서 날려보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아무런 문제 재기를 하는 전문가나, 정치꾼은 하나도 없다. 만약에 어느 양심적인 인사가 이를 거론했거나, 야당의원들이 거론 했다면, 그들은 그날로부터 불편한 삶을 살아 가야만 하는 독재국가로 변한것을 이제는 국민들 거의 모두가 알고있다.
그런데도 국민들은 문통이 즐겨사용하는 포퓰리즘의 달콤한 사탕발림에 완전히 중독되여, 여론조사를 보면, 항상 50%이상의 인기를 얻고있다. 문통의 운동권들이 집권하여 눈에 띄게 한국의 경제와 외교관계에서 국민들을 안심시킨적이 있었던가? 그들이 추구한것은 북한의 비핵화 정책을 간접적으로 도와준것 뿐이었다.
최시인이 절규하는 운동권들의 국정장악을 위한 비열한 방법은 항상 양심있는 국민들의 원성을 사왔었지만, 그증거가 확실히 나타난것은, 지난번 4.15총선에서 확실히 나타났었다. 그런데도 언론은 입에 자갈이 물려져, 이를 전혀 보도하지 못하고, 여전히 문통정부의 나팔수로 전락하여 오늘에 이르고있다.
탈원전으로 원자력 발전소건설 Plant 수출은 완전히 막혔고, 관련기업들은 폐쇄직전에 처해있고, 관련 Engineer들은 실직상태거나, 보따리 싸서, 다른나라, 특히 정치적으로는 우리대한민국과 적국인 중국으로 많이 떠났다.
경쟁상대에 있는 다른 원전수출나라들은 횡재를 한셈이다. 중국, 불란서 등등이 그혜택을 받는 나라들이다.
9년만의 산문집 '아무도 하지 못한 말' 출간 80년대 운동권, 여성 인권 짓밟으면서 침묵 강요 성추행 폭로한 이유? 여성들의 강요된 희생 밝히려고
“나의 가장 밑바닥, 뜨거운 분노와 슬픔, 출렁이던 기쁨의 순간들을 기록한…. 시시하고 소소하나 무언가를 만들어냈던 시대의 일기로 읽히기 바란다.”
최영미(58)
시인은 산문집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내며 이렇게 썼다. 고은 시인의 성추행을 폭로하며 ‘미투(Me too)’ 운동을
확산시킨 그의 일기는 역사의 기록으로 남길 만하다. 지난 4~5년간 신문·잡지에 발표했던 글들,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들을 다듬고
엮어 9년 만의 산문집을 냈다.
◇운동권 성추행 폭로 이유? “80년대가 여성들에게 어떤 희생 강요했는지 말하고 싶어서”
시인으로서의
고민과 치매인 어머니를 병간호하며 느낀 것들, 일상의 소소한 기록들을 진솔하고 담담하게 써내려갔다. 미투 운동 이후의 글들은
주로 5장 ‘세상의 절반을 위하여’에 묶였다. 그는 2018년 2월, JTBC 뉴스룸 출연 후 쓴 글에서 “1992년 등단 이후
제가 원하지 않는 신체적 접촉(성추행)을 했던 남자는 네 명”이라고 밝히며 “권력을 쥔 남성 문인들의 이러저러한 요구를 거절했을
때, 여성 작가가 당하는 보복은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문단 내 성폭력을 고발했다.
문단에 나오기 전
성추행을 당했던 일들도 ‘벌레들’이란 제목의 글에서 털어놨다. 운동권 시절, 종로 일대의 대규모 시위에 참가한 후 남자 동기의
집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벌레가 기어가는 느낌에 깨어나 보니, Y가 내 몸을 더듬고 있었다. (…)지렁이 같은 손이 또 내 옷
속을 파고들려 하자, 벌떡 일어나 앉았다. 벽에 기대앉아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최영미 시인은 “내가
다시 가고 싶지 않은 그 시절을 글로 불러오는 것은, 80년대가 여성들에게 어떤 희생을 강요했는지 말하고 싶어서다”라고 썼다.
그는 1980년대 운동권의 합숙 문화 속에서 여성들이 성추행의 위험에 노출돼 있었다고 말한다.
“지금은
유명한 정치인이나 국회의원이나 법조인이 되어 우리 사회의 지도층으로 성장한 그들, 명망 높은 남성 활동가들에 가려진 여성들의
고단하며 위태위태했던 일상. 선배, 동지, 남편이라는 이름의 그들에게 유린당하고 짓밟히면서도 여성들은 침묵했다. 침묵을
강요당했다. 대의를 위해서. 민주주의? 자유? 평등? 혁명? 내 앞에서 지금 그런 거룩한 단어들을 내뱉지 마시길….”
그는 1인 출판사를 설립해 지난해 신간 시집 ‘다시 오지 않는 것들’을 출간했다.
당시 기자간담회에서 “유명 출판사에 시집을 내고 싶다고 연락했지만 부담스러웠는지 답을 받지 못했다”고 직접 출판사를 차린 이유를
밝히기도 했다. 출판사 이름 ‘이미’는 자신의 시 제목에서 따왔다. 어머니가 입원한 병실에서, 너무 아파 부끄러움도 모르고 몸을
내맡기는 환자들을 보며 떠올린 시다. “이미 슬픈 사람은/울지 않는다//이미 가진 자들은/아프지 않다//이미 아픈 몸은 부끄러움을 모른다”
마지막은
‘긴 싸움의 끝’이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2017년 시 ‘괴물’이 발표되고 고은 시인은 최 시인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지만
2심까지 패소하고 결국 상고를 포기했다. 최영미 시인은 길고 외로웠던 싸움을 돌아보며 “저는 작은 바퀴 하나를 굴렸을 뿐. 그
바퀴 굴리는데 저의 온 힘을 쏟았다”고 썼다.
차라리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김정은 Regime의 "부속국가대한민국"으로 바꾸는게 현정부 정책에 꼭 맞는 국호일것으로 확신한다. 왜냐면, 북한이 확보하고있는 핵은 존경하는 김정은 총사령관님께서, 그의 조카인 우리 문재인 대통령을 어여삐 여겨서 머리쓰다듬으면서 사랑해 주실것이기 때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랑해 주신 꼬마삼촌 김정은 총사령관께서 굉장히 화가 나셔서, 남쪽의 조카 문재인대통령에게 여러날 동안 경고를 하면서, HankyPanky하지말고, 설자리를 확실히 하라는 질책을 했었는데.... 두려움 때문에 벌벌 떨기만 하고 어디에 서서 나라를 다스려야 할지를 몰라 양다리를 걸치는 늙은 조카에게 회초리를, 나이어린 고모 여정이를 시켜 후려갈겼는데, 그힘이 얼마나 쎈지, 조카밑에서 신음하는 5천만 머저리들이 혼비백산까지 했었다.
세상을 좀 살았다고, 잔꾀부리는 꼼수는 일찌기 터득하여, 위기가 닥쳐올때마다 요리저리 그럴듯한 사탕발림을 해서 잘도 빠져나왔었다. 탈원전할때도, 잘못되면 그위험이 너무도 크다는, 실질적인 상황도 아닌 fiction movie하나보고나서, 실제상황인양 5천만 Herd에게 설명하면서, 포퓰리즘 정책으로, 그위기를 넘김과 동시에, 7천억 들여 잘 정비한 월성1호기 핵발전소를 조기 폐쇄시키고, 그에대한 대국민 보고서도 발표 못하고 뭐 만지듯이 주물떡 거리고 있는데, 자극 받으면 벌떡 일어서듯이, 분위기를 바꾸어 볼려는 잔꾀를 생각하고 있는 꼬락서니다.
수천억원씩 흑자를 내던, 한전은 지금 수천억원의 적자를 내면서도, 대채 에너지생산설비인 태양열판 전기를 생산한다고 중금속덩어리인 태양열판을, 중국 시진핑의 압력에 못이겨, 구매해다 전국의 산야를 오염시키고, 비가오면 홍수를 나서, 옛날 보릿고개시절에 매년 행사처럼 겪었던 물난리를 되풀이하고있다.
꼬마삼춘에게, "삼춘 나 이렇게 삼춘위해서 열심히 하고 있는데, 칭찬한마디 해주이소"라고 어리광 부리다, 버릇없이 기어오른다는 경고를 주었는데도 잔꾀만 부리자, 며칠전에는 "남북연락사무소"라는 회초리를 들어 한방먹였는데도, 아직 정신 못차리고 주접은 다 떨고 있다.
회초리를 맞기며칠전에는 전세계의 비핵보유국 16개 나라가 참석하는 화상회의에 늙은 꼬마조카인 문통은 잘훈련된 부하 한명을 참석시켰었다. 금년회의는 NPT발효 50주년이 되는 해라서 그의미는, 한반도에서의 비핵화를 실현하기위한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가 노력의 결실을 맺도록, 문통의 꼬마삼춘남매에게 그동안 수백번씩이나 약속해왔던 그들이 보유하고있는 핵폭탄을 어떤 명목으로든 해체시켜야하는 절박한 상황을 NPT회원국들에게 설명하면서, 이러한 노력에 같이 동참하여 한반도에서 비핵화가 빠른 시일내에 성사되도록 함께 머리를 맞대고 노력합시다라는 앞으로 계획을 설명 했어야 했는데, 늙은 조카 문통은 꼬마삼춘의 또다른 노여움이 두려워 한마디 언급도 못하고, 회원국들의 핀잔 즉 "너나 잘해 이바보야"라는 뒷통수만 얻어터지고 마는 광대짖을 했을 뿐이다.
회원국 독일, 스웨덴, 일본, 인도네시아등의 나라들이 NPT 회원국인데....이들 나라들이 바보가 아닌, 늙은조카 문통보다 훨씬 세상돌아가는 이치를 꿰둟고 있는 나라들이다. 북의 비핵화를 위해 트럼프 대통령은 문통의 꼬마삼춘을 만나서 정상회담까지 하기위해 밤새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 싱가폴 회담까지 했었고, 그곳에서 문통의 꼬마 삼춘은 배핵화를 만천하에 공개했었다. 결과는 계속해서 반대방향으로 치닫고 있는 꼬마삼춘의 개망나니짖을 보면서도, "통일이 되면 다 우리것이 되는데...."라는 해괴망측한 논리를 펴서, 전세계로 부터 대한민국을 팽시키고 있는 한심한 방안퉁수짖만 하고 있다. 차라리 참석하지 았았으면 중간이라도 갔을텐데....
한국은 수출을 잘해야 국민들이 보릿고개없이 잘 먹고살수 있는 나라이다. 전세계가 꼬마남매의 나라가 보유하고있는 핵무기와 탄도미사일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다. 이들의 망나니짖을 맨앞장서서 막고, 이웃나라들의 협조를 얻어 비핵화를 실행해야만 하는 의무가 문통정부에 일차적으로 있다는것을 안다면, 더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없이, 미국을 비롯한 서방동맹국들의 협조가 대기하고 있을때, 실행해야 했었다. 결과는 정반대로 우리의 안전을 지켜주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들과 엇박자를 만드는 문통Regime이 정말 대한민국의 암덩어리다.
왜 한마디 경고도 못하나 "참는데도 한계가 있다 더이상 까불면 Regime Change시키겠다"라고.
다시 강조한다. 꼬마남매의 북하는 지금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배고파 쓰러질 지경에 처해있다. 그들 Regime을 몰아부쳐 비핵화를 시킬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드디어 눈앞에 와 있음을 또다시 놓치지말고, 미국과 두손잡고, 꼭 성사시키는 용기있는 행동을 보여줘, 방안퉁수라는 딱지를 떼기를, 그래서 5천만과 3천만이 다 함께 맘놓고 살아가도록 하라. 도적질해먹다 걸려 감옥살이한 늙은여자가 억울하고, 죄없다고 구명하는 어리석은 짖을 할때가 아니다.
입력 2020.06.10 18:00
| 수정 2020.06.10 18:12
핵군축·핵비확산조약(NPT) 장관급 회의 열려 이태호 외교 2차관 "한국은 NPT체제 수혜국" 하지만 '북한 비핵화' 문제제기도 안 해 김여정 담화 등 파상적 대남 압박에 위축? 눈치보기?
외교부 고위 당국자가 9일(현지 시각) 비핵화 관련 주요 국제회의인
‘핵군축·핵비확산조약(NPT) 스톡홀름 이니셔티브 장관급 회의(이하 NPT 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가했지만, 공개적으로
‘북핵(北核) 문제’를 제기조차 하지 않은 것으로 10일 확인됐다. 외교부가 이 회의 참가 결과에 대해 밝힌 200자 원고지 7매
분량의 보도자료에도 ‘북한 비핵화’나 ‘북한’이란 단어는 하나도 없었다. 최근 김여정의 대북 전단 비난 등 북한의 파상적인 대남
압박에 위축된 우리 정부가 최대 외교·안보 사안인 ‘북한 비핵화’를 이제 입 밖으로 제대로 꺼내지도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외교부에 따르면, 이태호 외교부 2차관은 9일 오후 10시 독일·스웨덴·일본·인도네시아 등 NPT 상 핵
비보유국 16개국이 참여하는 NPT 회의에 정부 대표로 참석했다. 코로나 팬데믹(대유행) 상황을 고려해 대면 회의가 아닌 온라인
화상회의로 진행됐다. 올해는 NPT 발효 50주년으로 의미가 크기 때문에 화상회의를 통해서라도 NPT의 중요성을 국제사회에
공론화하고 각 국간 협력 방안을 논의키로 한 것이다.
하지만 이 차관은 이날 회의에서 NPT 체제 덕에 한국이
번영을 이룰 수 있었다며 핵무기 확산 방지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NPT 체제를 정면으로 위협하는 북한에 대해선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외교부 자료를 보면, 이 차관은 회의에서 “한국이 핵무기 확산 방지와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보장하는 NPT
체제의 수혜국 중 하나”라면서 “NPT 평가회의의 성공과 국제 핵 군축·비확산 체제 강화에 적극 기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올해 조약 발효 50주년을 맞은 NPT가 국제 핵군축·비확산 체제의
초석으로서 그 역할을 지속하도록 해야 한다”면서 “핵 없는 세상을 목표로 핵군축이 진전되고 내년에 개최될 NPT 평가회의가 의미
있는 성과를 도출할 수 있도록 국제사회가 다 함께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미래 세대에게도 NPT 체제의 중요성을
알리자며 지난해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청년과 군축·비확산 결의’도 소개했다. 외교 소식통은 “이 차관의 발언을 보면 그는 NPT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면서 “그런데도 이 NPT 회의의 주요 이슈인 북핵의 ‘북’자도 꺼내지 않았다는 것은 의도적으로
북한 언급을 피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북한은 1985년에 NPT에 가입했지만 2003년 NPT를 탈퇴했다. 이후 3년 만에 1차 핵실험을 감행한 북한은 2017년 핵 무력 완성을 선언했다.
북한, 미국의 핵프로그램작동중지 압력에도, 여전히 핵연료 장착장 가동중이라네. 한국은 다 알고있었겠지만... 국민들에게 북한의 핵개발 프로그람의 현황에 대해서는 일체 함구하고, 비난은 고사하고, 천안함폭침은 북한의 소행이 아니라고, 북한을 우방국 취급하고 마는 망국적 행동을 하고 말았다.
46명의 영웅들의 죽음이 이제 역사의 장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다. 북한에 관한한 국민들을 완전히 눈먼 장님으로 만들어 버렸다. 제1방안퉁수 문재인 정부의 대북한 정책은 무엇이며, 혈맹인 미국과의 관계는, 청와대 입성 첫날부터 평행선을 긋고 살얼음을 걸어가는 도박을 계속하고있다.
이러한 대북한 정책을 계속 밀어부친다면, 제2의 홍콩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는데...제2의 홍콩이 된다면, 지금까지 누려왔던, 모든 무역면에서 외교면에서, 특혜지위를 잃게된다. 그말은 대미수출길이 막힌다는 뜻인데, 그래도 계속 대북정책을 밀고 나간다면,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쪽박을 찰수 있음을 알고 있을테지만, 국민들은 여전히 깜깜한 턴넬을 통과하는식으로 먹통이다. 결국은 나라경제를 말아먹는 정책인 포퓰리즘에 중독되여서....
미국이 북한에 대해 핵연료장착장 작동을 중지할것을 몇번이고 통보했지만,North Korea는 여전히 계속하고있다. 지난 3월에 촬영한 사진을 분석해 보면, 평산의 농축우라늄공장이 여전히 가동중에 있는데, 전문가들의 분석에 따르면, 핵연료 생산공장의 한곳에서 산화우라늄을 생산하고 있는것으로 믿고있다 라고 NBC News 는 보도하고 있다.
이러한 한반도의 상황에서 문재인 방안퉁수 정부는, 미국의 북핵저지노력에 우방으로서의 할일을 확실하게 이행하고있다는 확신을 주지못하고있다. 이번 개성시에 있는 남북연락사무소건물 폭파광경을 보면서, 이들이 취한 방안퉁수식 표현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엄중히 주시하고있다"가 전부였다. 북의 꼬마남매를 좋아한다는뜻인지? 혈맹인 미국과 함께 끝까지 가겠다는 뜻인지? 색갈이 아리숭하다.
가장 걱정을 하게 하는 부분은 한국이 중국과 북한쪽에 서느냐? 아니면 미국편에 서서 자유대한민국의 Freedom을 지금까지 지켜온것 처럼, 지킬 의지가 있는지? 확실히 밝히고, 태도를 분명히 해야한다. 어물적 거릴때는, 양쪽으로 부터 토사구팽 당할것이라는 쯤은 알고 있을 것으로 믿고싶지만....
이번 6.25 사변 70주년 추념식에서 문통은 "한치의 땅도 절대로 허락치 않겠다"라고 국민들에게 선언하는식으로 추념사를 읽으셨는데.... 꼬마남매가 불법 점령한 "함박도"는 어떻게 하실것인지? 그대답듣고 싶소이다.
North Korea is pushing forward with work at a nuclear fuel plant despite calls from the U.S. to wind its program down, a report says.
Satellite
imagery taken in March depicts activity at the Pyongsan Uranium
Concentrate Plant – a site where experts think North Korea is creating uranium oxide, one of the building blocks of nuclear fuel, according to NBC News.
The
station says the images show full tanks of chemical waste, in addition
to solid and liquid waste piling up at the site. The pictures, it
added, are part of a larger report set to be released next month that
also reveals new construction at the plant.
The report is being
compiled by Joseph S. Bermudez Jr. - a senior fellow of imagery analysis
at the Center for Strategic and International Studies – and Victor
Cha, a former top Korea adviser to President George W. Bush.
CHINESE, NORTH KOREAN INDIVIDUALS CHARGED IN SCHEME TO ILLEGALLY DIVERT FUNDS TO PYONGYANG NUCLEAR PROGRAM
“The
plant’s importance to the North Korean leadership and
its critical position within the nuclear research and weapons
development programs is attested by the fact that scarce human and
financial resources have been consistently allocated to actively
maintain, refurbish or modernize the plant since 2003, and probably
since its construction,” the report reads.
Cha
told NBC News that the ongoing work indicates an "unrelenting effort”
from North Korea “to grow their capabilities despite three summits and
the utter failure of the one diplomatic negotiation that Trump has put
any effort into."
North Korea state media also reported Sunday
that the country’s nuclear program came up as a topic during
a high-level meeting between dictator Kim Jong Un and military brass. CLICK HERE TO GET THE FOX NEWS APP
“Set
forth at the meeting were new policies for further increasing the
nuclear war deterrence of the country and putting the strategic armed
forces on a high alert operation in line with the general requirements
for the building and development of the armed forces of the country,”
the Korean Central News Agency wrote.
Kim Jong Un made headlines earlier this month after disappearing from public view over several weeks, leading to rumors about the state of his health.
역사적으로 보존하고, 기억해야할 가치가 있는 인물이나, 건축물들은, 각나라마다 보존하는 방법이 다를수는 있어도 근본 목적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후손들에게 역사를 전수해주고져하는, 그래서 그들의 삶에 본보기도 돼고, 때로는 유적을 보면서, 우리는 그렇게 눈총을 받으면서 살지는 않겠다는 다짐을 하게하는 교훈을 주기위함도 그속에 포함되여 있다고 나는 믿는다.
요즘 전세계가 역사적으로 간직해야할 소중한 유적들, 특히 동상들과 건축물들이 이해가 상충돼 있는 구룹들에게, 집단들에게 많은 시련을 겪고 있어 안타깝다.
특히 지난달 미국에서 시작된 무명의 흑인시민, George Floyd를 과잉제압으로 사망하는 사고로,죽음에 항의 하는 Vandalism이, 그렇치 않아도 Coronavirus Pandemic으로 어수선하고, 분노가 쌓여있는 시점에서, 전세계적으로 퍼져, 그동안 잘보존되고, 역사적 증거로 후손들에게 교육용으로 이용되곤 했던, 많은 Statue들이 폭도들의 타겟이 되여 Tople down되는, 한번도 있어보지 않았던 새로운 Mobster들이 비툴어진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렇게 Riot가 계속되면 미국의 역사를 보여주는 증거들이 많이 훼손될것을 염려한 트럼프 대통령은 마침내 대통령 행정명령까지 내렸다.
"개인이나 집단들이 어느 동상이나 건축물들을 건축하거나 제거하는것을 평화적으로 주장할 권리주장은 보장되야 한다. 그러나 개인이나 집단이 역사적 가치가 있는 동상이나 건축물들을 과격한 행동으로 철거, 훼손, 파손할 권리는 절대로 없다."라고 강력히 행정명령을 내린것이다.
미국의 남북전쟁당시, 노예제도를 주장했던 남부군 병사들과 리더들이 전쟁에 패배했지만, 수십년후에 그들을 추모하는 동상들이 각도심에 세워졌었다. 백인우월주의 상징인, Robert E Lee의 동상이 1890년경에 Richmond, Verginia주에 세워졌고 그에대한 역사적 평가를 동상을 보면서 후손들은 평가를 할수있었다.
이번 흑인시민 죽음에 앙갚음으로 흑인 폭도들이 동원되여 동상을 때려 부시는 짖을 한것을 두고 과연 잘한것인지? 아니면 잘못한 것인지? 평가가 엇갈린다. 동상의 존재이유는 미 Federation주의에 동참하여 싸운 영웅적 행동을 뜻하지만, "노예제도"주창은 아니었었다라고, 그리고 Confederation은 연방정부에 반대한다라는 주장이었었다. 2015년 S. Carolina의 Charleston소재 Emanuel교회에서 예배보던 9명의 흑인신자가 사살된후 동상의 철거가 시작됐었다. 살인자는 후에 권총과 Confederate flag를 소지하고 있었음을 알게됐고, Sara Beetham씨가 "Confederation 동상은 인종차별의 긴역사를 품고있는 Monument를, 흑인삶의문제"와 연결시켜 흑인들에 의해 철거해 버린점을 정확히 지적하기도했다.
Gulf전당시, 바그다드시에 높이 주먹을 휘두르면서 세워져 있었던 Sadam Hussein의 동상을 이락주민들은 동상에 밧줄을 걸어 쓰러뜨리고 줄에 매달린 동상은 시민들에 의해 시내거리를 끌려다니며 순회했었다. 지금은 독재자 Sadam Hussein 에 대한 역사적 증거물이 전연 없다. 후손들에게는 어떤식으로 그의 정치적 실적과 사상을 가르쳐야 할까?
독일은 전쟁이 끝난후 바로 추모식을 하지는 않았었다. 1960-70년대 부터 나치독일시대의 어려웠던 과거를 회상하기 시작한것이다. 지금은 "유태인대학살"과 Nazi시대에 대한 역사공부는 학교에서 필수과목으로 가르치고있다. 대부분의 학생들을 집단수용소와 유태인대학살 또는 이와 관련된 박물관을 방문해서 현장교육받는다.
동상을 지키는것 보다는, 독일은 범죄행위와 그들의 희생자들에 초점을 맞추어 후세에 참상을 전해주고있다.
인도를 거의 400여년간 통치했던 영국을 상징하는, GeorgeV왕의 동상을 70ft높이로, 수도 Delhi에 있는 Indian Gate로 연결된 고관대작들의 집이 있는 도로상에 세웠었다. 인도독립후 수십년이 지나자 인도인들은 영국왕의 동상을 인도인의 심장부에 더이상 보존할 가치를 느낄 필요가 없다고 다철거하여, 1911년 인도제국의 왕이 되기위해 방문한적이 있었던 Delhi Dunbar로 옮겨, 완성시키지도 못한채 방치 상태로 있다.
여기서 우리 대한민국은 어떻게 해왔는가를 비교하면서 회상해 볼 필요가 절대적으로 있다고 믿는다.
대한민국의 창시자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이 남산에 있었던것으로 기억하고있다. 4.19혁명후 시민들은 그를 "독재자"라 몰아부치고, 동상을 철거해 버렸다. 그리고 그의 흔적은 대한민국땅에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김영삼 대통령은, 일제식민지 통치의 상징인 "중앙청건물"이 서울시의 중앙에 있다는것은 절대로 용납못할 일이라고 정의하고, 석조건물인 중앙청을 철거해 버렸다. 그건물을 위에서 보면 일본을 상징하는 "날일자"형태로 지어진, 독일인이 설계한 건물이었다.
김영삼의 별명은 "돌대가리"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다. 그는 중앙청 석조건물을 철거시키면서, 그가 자랑스럽게 설파한 얘기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일제 식민지통치 시대를 후손들에게 역사적 증거로 보여주기위해, 뜯어낸 모든 건물재료는 돌 하나도 버리지않고, 전부 새로 Replica건물을 짖게 될곳으로 옮겨 원형건물과 똑같은 모양으로 재건축하여 후손들에게 역사공부의 현장으로 이용하게 하겠다."
그러나 그약속은 선거운동할때 공약으로 내세웠던 속이 텅빈 공약으로 끝나고 말았다. 자료를 보면 독립기념관 본관 건물옆에 조그맣게 총독부 철거부재 전시공원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 장식물들의 전시 목적은 능욕과 보존을 동시 추구(…)한다는 것이라, 어떠한 보호 설비나 장치도 없이 사실상 방치되어
있으니 비바람과 햇볕에 그대로 노출되어 부식되고 관람객들의 오물 세례 속에 부식되고 있다. 심지어 낙서도 있다. 그 외에도 해당 장식물은 5m 반매장해서 모든 사람들이 내려다 볼 수 있게 만들었고, 부지 또한 해가 지는 방향인 서쪽에 배치해서 일제의 몰락을 상징적으로 표시했다.
그의 지론데로라면, 현재의 건물 "한국은행, 서울시청"은 외부에서 보기가 철거된 중앙청 건물보다 더 흉물이다.
김영삼은 철거지시를 한후에는 새까맣게 그약속을 다 내동댕이 치고 말았다. 그후 아무 의미도없는 현재의 조그만 원형공원안에 중앙청건물중앙에 있었던 푸른색 철탑윗부분만 전시하고있는데, 이마져도 몇명의 뜻있는 관계자들이 주선하여 전시하고 있다는 슬픈 소식이다. 그래서 정치꾼들은 한사람도 진실성이 있는 행동을 하면서 국사를 돌본다는 소리를 들어본 기억이 없다. 그런데도 많은 정치꾼들은 여전히 그를 민주투사라고 Respect하고 있는 꼬락서니를 보면, 한국의 정치적 앞날은, 오랜 가뭄에 말라서 황노랗게 변한 고사직전의 잔디같이 희망이 없어 보인다.
오죽했으면, 많은 부모님들이 자식들이 공부는 안하고 말썽만 부리고 속을 썩일때, 자식들에게 화풀이하는 욕설을 하는 말중에 "저놈은 이담에 국민들 등쳐먹을 국회의원 할놈이야"라고 분노를 폭발한다.
역사적 증거로 만들어 놓기위해 힘들게 만들어 보존해 오던 Monument를, 오늘의 시대상에 맞지 않는다고 다 철거해 버리면, 이다음에 후손들에게 어떻게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교육시킬수 있을까? 시대에 따라 오늘은 필요없는 Monument가 될수도 있지만, 다음 세대에 정권이 바뀌면 그때는 또 영웅으로 추대 받을 찬스가 전연 없다고 단언할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번 세워놓은 Monument는 그대로 보존하던가, 아니면 다른 곳으로 옮겨 원형 그대로 복권해서 후손들에게 역사적 증거자료로 이용해야 된다고 나는 믿는다.
중앙청 자리에는 경복궁이 복원됐고, 광화문도 박정희 대통령께서 복원 하셨었다. 그리고 "광화문" 현판도 한글로 직접 써서 걸었었다. 그후 원래의 위치로 옮기느라 해제 복원하면서 현판을 다시 한문으로 바꾸어 달았다. 여기서 나는 석연치 않은점을 한마디 밝혀둔다. 만약에 현위치로 복원 했을때, 박대통령이 생존해 계셨었다면, 한문으로 다시 "광화문"을 바꾸어 달아야 한다고 진언한 충신(?)이 있었을까?. 내가 기억하기로는 처음에 박정희 대통령이 복원할때, 한문으로 된 원본 보존도 없었거니와 또 한글전용 운동을 국가적 사업으로 추진했었기에 광화문현판을 한글로 쓰셨던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우리 정치꾼들은 "조석변이"의 천재들이다. 독재를 했다는 나쁜점만 강조하고, 경제부흥을 일으켜 오늘의 잘사는, 5천년 역사이래, 대한민국의 기초를 처음으로 만들어 "한강의 기적"으로 전세계에 알려진, 역사적 쾌거는 다지우고, 소위 말해서 민주주의 투사라는 양반들의 엉터리 두얼굴 행동만을 부각시켜, 후손들에게 비뚤어진 역사를 보여주는 현실에 개탄할 뿐이다. 정치꾼들과 생각없는 국민들에게 고한다.
"인물을 평가할때는 잘한점 못한점 똑같이 서술하여 그판단은 역사를 읽는 본인들이 하도록 해야 하는것 아닌가?" 라고.
미국대통령들의 역사가 그렇고, 일본 및 서구사회의 잘사는 나라들의 역사가 공,과를 구별하여 기록하고 그기록을 후세들이 읽고 배우고 판단하도록 한다. 그래서 선조들에 대한 이해를 역사를 통해서 소화하게 되는것이다.
왜이렇게 편협한 생각을 지금도 못버리고, 오늘도 박정희 대통령이 힘들게 건축해준, 여의도 국회의사당안에서는 북한의 꼬마 남매를 도와주지 못해 안달들을 하고있는가. 이대로 가면 역사의 흔적은 보기 힘들것이다.
It was a beautiful spring day in East Baghdad in April, 2003 and
Ghaith Abdul-Ahad's neighbour came to him shouting, "The Americans are
here." Abdul-Ahad went out into the street. He saw US soldiers in
uniform pointing their guns. They were moving towards what was then
known as Firdos Square, in the middle of which was an enormous statue of
Iraq's President, Saddam Hussein, his right arm stretched into the sky,
waving to his people.
A crowd of Iraqis had now gathered in the
square. "It became clear that the city had fallen," Abdul-Ahad says.
Iraqi civilians moved towards the bottom of the statue. They tried to
knock down the thick, concrete pedestal, but to no avail. Then an
American armoured vehicle appeared. A marine got out and put a huge rope
around the statue. He climbed to the top of Saddam's head, holding an
American flag. Abdul-Ahad was watching the marine as he tried to place
the flag, thinking, "No don't do that."
The statue was pulled down by the crowd. It was
dragged through the street. And the iconic image was then captured of
men, taking their flip flops off, and using them to beat the statue of
their former ruler. They were "just breaking that domination of the
regime," Abdul-Ahad says.
Baghdad's many statues of the country's
leader had been a symbol of oppression, "the eyes and moustache of
Saddam following you wherever you go" he says. The day they fell "was
the moment, you realise that 30 years of oppressive rule has finally
collapsed, that this person who had been dominating our lives - he was
bigger than God for us - is finally gone and he's removed."
Many statues were melted down, or sold to
collectors. No-one really knows what happened to them all. They just
disappeared. The plinth where Saddam's statue once stood was empty for a
long time. As a sectarian war raged, no-one could agree what should be
in its place - would it be a Shia, Sunni or Kurdish monument? It was
finally removed altogether and is now a park.
"We come here now,
2020, we don't see any images from the Saddam era and that helps the
history to disappear," says Abdul-Ahad, now a journalist for the
Guardian.
He doesn't want the statue of Saddam to be in the centre
of Baghdad, staring down at him as it used to. But he would have a
liked it to be housed in a museum or a park in the country, otherwise he
fears that period of history will be forgotten altogether. It's
important he says that "the young generation, the children in 100 years'
time, can look at it and say, 'Oh, so that was the dictator who ruled
Iraq.'"
If you walk around German cities you will find
virtually no statues of the Nazi era. Many were destroyed by heavy
bombing during World War Two - and later melted and reused during
rebuilding. An order issued by the victorious Allies in 1946 decreed
that any manifestation of the Third Reich, including statues, were
illegal and to be destroyed.
"How can a country go on with
statues of oppressors and of dictators?" asks Daniel Libeskind, the
architect of the Jewish Museum in Berlin. "You have to get rid of
everything that offends justice and truth. And that's what Germany did."
But getting rid of statues doesn't have to mean erasing the memory of history too.
For Germany, remembrance did not happen immediately after the
war. However, in the 1960s and 70s the country began to reflect on its
difficult past. Now the teaching of the Holocaust and the Nazi era is
mandatory in German schools. Almost all students have either visited a
concentration camp or a Holocaust memorial or museum.
Rather than maintaining statues, the country chose to focus on its crimes and their victims.
Libeskind, the son of Holocaust survivors,
originally from Lodz in Poland, believes Germany has made an "amazing
statement" to the world that it's possible to face unspeakable crimes
and be a successful democracy.
In the late 1980s he entered a
competition to design Berlin's Jewish Museum. He won and felt the weight
of responsibility. "It was so much more than just the design of a
building," he says. The challenge was to work out how historical truth
could be communicated to generations who had never experienced that era.
He began by creating a void, "which is the centre of the museum,
which is an emptiness, an empty space where nothing is really
exhibited, but you feel that this emptiness speaks to you about what
happened in history, that cannot be exhibited," he says.
So
difficult history can be told without exhibiting statues. Even the word
"statue" strikes Libeskind as old-fashioned. "I think it's about more
than statues today. It's about creating spaces, public spaces that can
make people care about things they didn't know about."
In northern Delhi there is a large park. It's
slightly overgrown, stray dogs wander around, sometimes children play
cricket there. In it are statues, some covered in graffiti.
After
India won independence in August 1947, there was no clamour to remove
the statues of monarchs and viceroys from the boulevards and roundabouts
of the capital. Over time, some were sold to Britain and others moved
to this place, known as Coronation Park. It had been the site where
lavish ceremonies - known as durbars - took place when a new British
monarch took to the throne. Today it is where effigies of former
officials from the colonial era have been stored, "out of sight, out of
mind", as AGK Menon, the founder of the Indian National Trust for Art
and Cultural Heritage, puts it.
"And that's how it got the name," he says. "A graveyard of statues."
The most iconic of the statues is King George V. At
around 70ft tall, it stood in the heart of Delhi, near India Gate on the
road leading to the Viceroy's House. Well over a decade after
independence it no longer felt right to have the statue of a British
King in such a prominent position. He was dismantled and taken to the
place where he attended the Delhi durbar on becoming Emperor of India in
1911.
AGK Menon wanted to use the statues to tell the history of
Delhi. During the Delhi Durbar, George V had laid the first foundation
stone of the new imperial capital in Coronation Park. Menon's aim was to
open a new, refurbished version of the park on the centenary of this
occasion in 2011, with plaques providing historical context. "We have to
recognise the fact something happened. There was a colonial government,
there was a decision to make Delhi, and this is where it took place.
Let us celebrate the fact that this is where New Delhi started," he
says.
Work started, but then a new government withdrew
support. The park remains derelict, containing the Raj-era statues.
Perhaps it's a sign that it's still difficult for Indians to talk about
their colonial past. "Some Indians are not comfortable with it; others
are. But somehow it is still a very live political fuel," says AGK
Menon. "So it does have a sort of energy that has not ended."
There certainly still is unfinished business. The plinth of George V stands empty in the centre of Delhi.
No-one could agree what should go there.
Scattered across southern states in America are
statues commemorating Confederate leaders and soldiers, who fought in
the American civil war to continue the practice of slavery. They lost
the war, but decades later these monuments celebrating notable
Confederate veterans started to appear in town squares.
Sarah
Beetham, chair of liberal arts at the Pennsylvania Academy of the Fine
Arts, says many statues were built on county courthouse lawns, where
many African Americans would be judged. "And they very much borrow the
language of victory monuments from the ancient Roman past."
In
theory, the civil war gave equal rights to African Americans, but in
reality racial segregation persisted, so the South won what Beetham
describes as a "sort of shadow war". "These monuments are victory
monuments to winning that shadow war," she says. Statues such as the one
of Confederate general Robert E Lee, erected in Richmond, Virginia, in
1890, were central to the continuation of the Confederate movement, and a
permanent reminder of white supremacy, Beetham argues.
These monuments were never completely accepted.
Journalist John Mitchell, for example, wrote editorials in the Richmond
Planet newspaper at the time, saying prophetically "that black workers
had been conscripted to put the statue up and that one day they would
still be there to take the statue down," Beetham says.
The
southern states defended the existence of the statues, arguing that they
were paying tribute to Confederate military heroism rather than
defending slavery. They also cast the war as a defence of states'
rights, against the powers of the federal government.
It wasn't until 2015 that the movement to remove these statues
really took hold. It started after the shooting of nine black
parishioners at the Emanuel Church in Charleston, South Carolina. The
killer was later discovered with a pistol and a Confederate flag, and
Sarah Beetham pinpoints that as the moment when the Black Lives Matter
movement explicitly linked such violent attacks to the long history of
racism symbolised by Confederate monuments.
Now, with mass
protests across America following the murder of African American George
Floyd, many protests have coalesced around these statues. In Virginia a
number have been pulled down, including that of the former Confederate
president, Jefferson Davis.
Sarah Beetham says: "Statues aren't history. They
are historical objects. The fact that people are attacking them today
shows that we do care about them and that we see them in some ways as
kind of reflection of ourselves and our own values."
As long as
there have been statues, she says, there have been people who destroy
them. "There's something about a group of people taking out their anger
against much broader inequalities but focusing it on an object that
looks like a human being."
She says the statue of the British King
George III in New York is a good example. It was destroyed during the
war of independence and the metal was melted into 40,000 bullets, which
were then used against the British.
Loyalists tried to preserve parts of the statue by
burying them underground - remnants are are still occasionally unearthed
today.
Virginia's governor has said that the statue of Robert E
Lee in Richmond will now be removed and put into storage. Although
hundreds more statues remain, Sarah Beetham hopes the dismantling of
this one, and perhaps others, means the country will now start to
confront its past.
"It says that maybe finally we're going to have some
kind of reckoning about what the Civil War was actually about. And if
Robert E Lee is going to come down now, maybe we're ready to atone for
some of these things and to finally process them and figure out what
they mean for us. And I really hope that that's tr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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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 name buildings after people, or put up statues to
them, because we respect them. But what if we then discover they did
wrong? In what cases should the building be renamed, or the statue be
removed, asks the BBC's in-house philosopher, David Edmon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