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March 11, 2021

한국에서는 선행을 해도 색안경 끼고, “KJ, 이번 일요일 한국에 못갈거야”... 캐디의 예언처럼 기적 일어났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인생도 황혼길로 같이, 선택권없이 따라가야만 한다. 순리니까.

세계적으로 유명한 골퍼들의 잔치인 PGA tour championship에서 자그만치 8번씩이나, 그중에 Major game인 Players Championship 우승을 한것은, 한국의 위상을 한층 전세계에 드높이 올려놨었던 경사였었고, 최경주 본인에게는 평생 잊지못한 영광이기도 했었을 것이다.

대부분이 서양나라 출신들이고, 동양인은 당시만 해도 겨우 한국, 일본 선수 정도가 Qualification을 받아 참가자격이 주어져 참전할수 있는, 출전한다는것만으로도 영광일때였었다. 많은 선수들은 주로 미국출신들이고 유럽 그리고 남미선수들이 주로 였었다.

이들 선수들은 우승을 하여 상금을 받으면, 의례히 상금의 일부를, 필요로 하는 공익재단에 Donation하는게 거의 일상처럼 여겨져 왔었고,  얻은것 만큼 서로 Share하는 아름다운 전통을 보여 주었었고, 최경주 선수역시 내가 알기로는 많은 Donation을 했었다.  그리고는 시간이 흘러가면서 은퇴하고 고국으로 돌아와서, 후진들 양성을 위해 좋은 선행을 많이 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우리는 옛날 못살던 때의 잘못된 인식이 가슴깊이 박혀있어, 남이 잘되는것을 칭찬 해주기보다는 헐뜯어 짖밟아 버리는 못된 습성이 많이 남아 있는것으로 이해하고있다.  선행을 하면 오히려 두눈을 부릅뜨고 색안경을 끼고 뒷조사 하는데 아까운 시간을 보내는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몇년전 최경주가 후진 양성하면서, 사회각곳에 손길이 필요한곳에 자선행위를 한것을 뉴스보도를 통해서 봤고, 역시 PGA tour하면서 참 좋은것을 많이 배웠고, 배운것을 몸소 실행하는구나 라고 마음속으로 많은 응원을 했었는데..... 그뒤에 한 뉴스미디아를 보면서 깜짝 놀랐었다.

"최경주가 세금을 탈세하기위해 쑈를 한것이다"라고. 그내용이 전부 남이 잘되는것을 시기하는 못된 인간들의 근거도 없는 모함으로, 계속해오던 모든 선행을 접었었다는 슬픈 뉴스기억이다.

PGA에서 명성을 떨친 최경주 선수도 잊을수 없다. 귀국하여 은퇴한후, 골프를 하고싶어하는 꿈나무들을 교육시키고, 지역사회에 좋은일을 많이 했었다는 뉴스는, 국민들로 부터 많은 응원을 얻었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인지,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웬일인가 자료를 찾아 보고 깜짝 놀랐었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PGA선수로 뛰면서, 미국의 골퍼들이 벌은 돈을 혼자 독식하지 않고, 필요한 곳을 찾아가  Donation을 해서, 나누는 기쁨,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도움을 받아서 기쁨을 나누는 훈훈한 사회적 유대감을 실천하는 광경을 봤었다. 그리고 Donation을 한 선수들은 세금보고시 세금혜택을 국가로 부터 받기에, 받는쪽, 주는쪽 모두가 부담없이 살고있는 지역사회의 악어와 악어새 역활을 습관화 하는것을 최경주 선수는 보고느낀데로 실천한것으로 이해했다.

https://lifemeansgo.blogspot.com/2020/11/blog-post_21.html

말없이 소시민들이 하는 선행을, 그런 못된 인간들의 모함으로, 다 끊어 버리는 사회적 악습을 하루 속히 버리고 모두가 좋은일을 하는 선행에는 박수를 쳐주고, 같이응원해주는 풍토를 만드는게, 우리나라가 국제사회에서 왕따를 당하지 않고, 어깨를 같이하면서 살아나가는 길이라는것을 이제는 모두가 피부로 느끼고 행동에 옮기는 나라로 탈바꿈 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정치꾼들의 거창한 소리만 요란한 선행(?)은 필요가 없는사회.

간첩 문재인당, 서울시장 후보로 나온 박영선은 중소벤처기업 장관을 하다가, 서울시장 하겠다고 장관직 집어던지고 지금 선한 얼굴을 하고 돌아다니는 그가면 뒤를 보면, 중소벤처기업을 그녀가 장관질 하면서, 다 시궁창에 처박았던 장본인이었는데.... 참 많은 비교가 돼서 그녀를 다시한번 쳐다보게 된다.  서울시민들이 그녀에게 표를 준다면, 시민들의 의식은, 말없이 이름없이 선행을 하는 많은 소시민들에게는 귀기울이지 않는 생각이 모자라는 인간들로 밖에 취급할수가 없을것 같다.

http://lifemeansgo.blogspot.com/2021/03/blog-post_11.html

많은 국민들은 아직도 최경주 선수를 잊지 않고 있으며, 계속해서 응원을 보내고 있다는것 기억하시고, 후진들 양성에 매진하여 주시기를 바라오.  최경주 선수는 그어떤 대한민국의 정치꾼보다 훨씬 더 대한민국의 위상을 선양한 분이라는것 국민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탱크 최경주 감사하오.


2011년 제5의 메이저대회라 불리는 플레이어스 챔피언십에서 우승하던 당시 최경주가 마지막 라운드에서 팬들의 성원을 받으며 이동하고 있는 모습. /PGA투어
2011년 제5의 메이저대회라 불리는 플레이어스 챔피언십에서 우승하던 당시 최경주가 마지막 라운드에서 팬들의 성원을 받으며 이동하고 있는 모습. /PGA투어


PGA투어 다이어리, 최경주 10년전 ’제5의 메이저′ 플레이어스 챔피언십 우승 기억 지금도 생생


최경주(51)는 2011년 ’제5의 메이저대회′로 불리는 미국프로골프(PGA)투어 플레이어스챔피언십에서 한국인으로는 처음 우승했다. 오는 11일 플레이어스 챔피언십 개막을 앞두고 최경주가 당시의 감회를 전했다. 마치 눈 앞에서 벌어지듯 생생한 기억이었다. 다음은 최경주의 이야기.

2000년에 플로리다의 잭슨빌에 살면서 TPC 소그래스의 스타디움 코스에서 정기적으로 연습 라운드를 했었다. 이 때는 내가 PGA 투어 진출이라는 내 꿈을 펼치기 위해 미국으로 이사를 온 지 약 1년 정도가 흘렀을 때였다. 그때 TPC 소그래스에는 플레이어스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한 선수의 국기가 1년 동안 걸려 있는 것을 보고, 나는 종종 그 자리에 태극기가 걸려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텍사스의 휴스턴으로 이사를 간 이후에도 종종 TPC 소그래스로 연습을 하러 갔고, 그 때 마다 이런 생각이 떠올랐던 것 같다.

나의 첫 번째 플레이어스 챔피언십 출전은 2002년 이었다. 첫 출전에서 28위를 했으니, 꽤 좋은 성적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때부터 도전적이고 공략하기가 어려운 TPC 소그래스에서 매년 대회에 참가하였다.

2011년 대회를 맞이하면서, 플레이어스 챔피언십 2주 전에 열린 뉴올리언스 대회에서 공동 3위를 하고, 마스터즈를 포함하여 그 즈음에 출전한 대회에서 탑 10에 들면서 경기 감각이 좋은 상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때 재미있었던 것은, 당시 내 캐디였던 앤디 프로저가 경기 초반에 “K.J, 이번 일요일에 아마 한국으로 출발 못 할 것 같은데? 왠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내 기분이 그래,”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앤디는 그 주에 나한테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는 계시를 받았던 것 같다. 아마 그때 앤디는 내가 이런 비중 있는 대회에서 우승을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때까지 9번의 대회 출전에서 단 한번도 탑 10에 든 적이 없었었다.

대회 첫날 70타를 치고, 난 1차 목표를 컷 통과로 잡았다. TPC 소그래스에서 경기하는 것은 항상 어려웠다. 이 코스에서는 다양한 샷을 칠 수 있어야 했고, 여러 가지 전략적인 요소들을 고려한 수준 높은 경기 운영이 필요했다.

다음날 68타를 칠 수 있었고, 10위권 근처로 순위를 끌어 올릴 수 있게 되어 약간 마음의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그 때부터는 탑 10이내로 대회를 마치자는 목표를 다시 세웠고, 한 타 한 타 집중하며 플레이를 했고, 경기도 잘 풀리기 시작했다. 토요일 경기에서 나는 다시 한번 순위를 5위권으로 끌어 올릴 수 있었다. 아쉽게도 경기는 악천후로 인해 중단이 되었고, 나는 일요일에 힘든27홀 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그래도 일요일 오전에 모든 것들이 잘 맞아떨어지면서 3 라운드를 67타로 마무리할 수 있었고, 선두와 1타 차이로 최종 라운드를 시작 할 수 있었다.

마지막 날 경기는 정말 치열했다. 경기 내내 데이비드 톰스가 근소한 리드를 지키고 있었지만, 16번 홀에서 공을 워터 해저드에 빠뜨리면서, 상황은 미궁으로 빠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17번 홀에서 버디를 하면서 1타차 선두로 치고 나가자, 데이비드가 바로 18번 홀에서 버디를 기록하며 승부를 연장으로 끌고 갔다. 17번 홀에서 진행된 연장 승부에서 톰스가 짧은 파 퍼트를 놓치면서 나에게 기회가 왔고, 나는 마지막 퍼트를 집어 넣으며 연장 승부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드디어 플레이어스 챔피언십의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순간이었다. PGA 투어에서 총 8번의 우승을 했는데, 이 플레이어스 챔피언십 때 가장 많은 눈물을 흘렸던 것 같다. PGA투어의 대표적인 대회이자 많은 훌륭한 선수들이 출전하고, 또 그 선수들이 우승하길 간절히 바라고 있는 플레이어스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했다는 사실에 전율을 느꼈고 정말 기뻤다.

플레이어스 챔피언십에서의 우승이 내 골프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업적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우승이 벌써 10주년이나 되었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 내가 처음 PGA 투어에 진출 했을 때, 나 이외의 한국 선수는 없었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미국에서 선수 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내 고향 완도를 떠나 이렇게 골프 선수로 성공한 삶을 살게 된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 동안 나에게 많은 도움을 준 주변 사람들의 지원과 성원 없이는 이룰 수 없었던 일이다. 그래서 항상 그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 알다시피 나의 부모님은 그저 평범하게 농사일을 하시면서 사는 분들이다. 그래서 내가 골프를 시작했을 때 장비 구입이나 연습 비용 등을 경제적으로 지원을 해 주실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고향의 여러 분들이 나를 도와주셨다. 어떤 분은 쓰던 골프채와 공을 주었고, 때로는 연습 비용을 지원해 주기도 했다.

나 또한 골프 연습장과 세차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골퍼가 되는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이렇게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아 지금의 성공을 거두었기에, 이제는 내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내가 가진 것들을 나눠야 한다고 생각한다. PGA 투어에서 내가 보고 느낀 것 중에 가장 좋았던 것은, 여기에선 지역 사회를 위해 많은 선수들이 기부를 하고 선행에 앞장선 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보고 나도 최경주 재단을 설립할 생각을 하고 실천으로 옮길 수 있었다. 재단을 설립한 이후로 지금까지 약 60여명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할 수 있었다. 물론 재단의 여러 활동을 통해 기금 모금을 도와준 많은 분들의 지원이 있었기에 이 모든 것들이 가능할 수 있었다.

그리고 2011년 플레이어스에서 우승을 한 이후에 미국 남동부 지역에 태풍 피해가 났을 때에도, 기꺼이 내가 할 수 있는 기부와 지원 활동을 진행하였다.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는데, 이 일로 2013년에 지역 사회에 기부를 잘 한 사람에게 수여되는 찰리 바렛 상의 수상자가 되는 영광을 얻기도 했었다. 지금까지 내가 받은 사랑과 성원에 보답하고자, 앞으로도 계속 어렵고 도움이 필요한 학생들을 지원하는 사업을 계속 하려고 한다.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골프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내 아래 세대의 친구들에게 전해주고 싶다. 나와 인연이 있는 학생들이 성장하고 성공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 것은 언제나 즐겁고 행복한 일이다.

사람들이 나 최경주를 생각하면 떠올리는 몇 가지 이미지가 있을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퍼트 그립을 바꾼 이후에 성공을 한 일들을 떠올릴 것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내 바이저를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내 별명은 ‘탱크’를 생각할 것이다. 이 나를 둘러싼 많은 이미지들 중에서 난 사람들이 “최경주는 정말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야”라고 불러주는 것이 가장 좋다. 내가 지금의 위치까지 올라오고, 또 이것을 유지하기 위해 평생 동안 드린 노력을 인정 받는 것 같은 말이라 정말 나에게 소중하다. 이런 노력들이 내가 만든 나의 역사라고 생각한다.

https://www.chosun.com/sports/golf/2021/03/10/5TXWQBTFXBDRHKKSBZ65QLLWJ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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