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당시 시민군 상황실장으로 수고 했었던 박남선씨의 Reconcilliation gesture깊이 공감하고 감사해 한다.
박남선씨처럼, 잘한것은 잘했다고 하고, 잘못한것은 잘못한것이라고 구별해서 표현한 내용을 오늘 여러번 읽고 또 읽었었다. 동시에 CP24 언론사의 노태우 대통령의 장례식에 대한 뉴스도 봤었다.
부탁하고 싶은것은 정치꾼들이 아직도 내편 네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영웅을 역적 만들고, 역적을 영웅화 하는 쫌생이 짖들은 이제 과감히 탈피하고, 국가 장래를 위한 설계를 잘 해 달라는 부탁을 하고 싶다. 박남선씨는 정치꾼은 아닌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찌하여 정치꾼들의 편협한 생각은 유치원생들 보다 더 한가 말이다. 박남선씨의 기사 내용을 정치꾼들은 백번씩 이상으로 읽고 또 읽고해서 화해하는 방법을 좀 터득하라.
노태우 대통령의 '국가장' 과 그가 대통령으로서의 한 업적들을 보도한 캐나다의 CP24언론사의 Kim Tong Hyung씨가 보도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기사를 보면서, 그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표현을, 거두절미하고, S.Korea's dictator라고 표현한것에 대한,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는 Comment 몇자 적어서 신문사에 보냈더니, 고맙다는 답장과 함께, 참고하겠다는 내용도 있었다. 아래는 내가 보낸 코멘트의 내용이다.
[임민혁이 만난 사람] “5·18 정신 정치적 이용 안 돼, 특정 정파 전유물 아냐… 분단된 나라가 통일은커녕 갈라져 싸우는 현실 안타까워”
노태우 전 대통령 빈소 찾은 5·18 시민군 상황실장 박남선
지난주 노태우 전 대통령의 별세는 우리 현대사의 상처와 책임, 용서·화합에 대한 화두를 던졌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 유혈진압 책임과 관련, 노 전 대통령은 유서를 통해 “깊은 용서를 바란다”고 했지만, 5·18 단체 등에서는 “시민 학살한 책임을 덮을 수 없다”고 했다. 국가장(葬), 조기(弔旗) 게양을 놓고도 민심은 갈렸다. 그렇기 때문에 5·18 당시 시민군 상황실장이었던 박남선(67)씨의 노 전 대통령 조문은 더욱 눈길을 끌었다. 박씨는 당시 시민군을 이끌다 계엄군에 체포돼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3년간 복역했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지난 27일 노 전 대통령 빈소에서 유족들 손을 잡아주며 “이제 하나가 된 대한민국을 위해 화해하고 화합하고 용서했으면 한다”고 했다. 지난 29일 광주로 다시 내려갈 채비를 하던 그를 서울 모처에서 만났다.
빈소 조문이 상당히 주목을 받았다.
“뉴스가 나가고 여기저기서 전화 200통을 넘게 받았다. 대부분 ‘수고했다’ ‘잘했다’는 격려였다. 항의나 욕은 거의 없었다. (그는 31일 통화에서 ‘주말 새 80여 통을 더 받았다’고 했다.) 물론 5·18 유가족과 부상자들 가운데 나와 생각이 다르고 나를 비난하는 분들도 꽤 있을 것이다. 충분히 이해한다. 그분들의 한(恨)과 분노는 내가 누구보다 잘 안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텐데.
“난 5·18 당시 ‘폭도대장’으로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했다. 동생은 곤봉에 맞아 팔·다리·갈비뼈·코 다 부러졌다. 부상자·유가족 4500여명의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다. 다만 노 전 대통령이 사죄 뜻을 밝힌 상황에서 개인적으로 이제는 화합·통합의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분단된 나라가 통일되기는커녕 지금 지역·정파·계층으로 나뉘어 더 갈등하고 싸우고 있지 않나. 이런 내 뜻에 공감하는 광주 사람들도 밖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많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잘못을 다 용서했다는 의미인가.
“용서는 피해자가 먼저 하는 게 아니라 가해자가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칠 때 시작되는 거 아닌가. 40년 가까이 그런 일이 없었는데, 신군부 일원이었던 노태우 전 대통령은 2019년부터 아들 노재헌씨를 세 번이나 광주에 보내 사죄의 뜻을 전했다. 한참 늦었고, 아들을 통한 대리 사과이지만 그런 부분은 의미 있게 받아들였다. 미안하다고 한다고 해서 잘못이 다 없어질 수는 없지만, 용서를 비는데 받아주는 게 맞는다고 생각한다. 책임 있는 다른 당사자들도 죽기 전에 결자해지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광주에서 노재헌씨를 만났을 때 조문 약속을 한 걸로 알고 있다.
“노씨가 처음 광주에 왔을 때 나를 만나고 싶다고 연락을 했는데 만나지 않았다. 두 번째부터 만났는데 나는 ‘아들이 와서 사죄하는 것보다 당사자가 직접 와서 육성(肉聲)으로 사과하면 좋겠다’고 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이 계속 누워 있고 필담 겨우 하는 정도라고 하더라. 병상에서 끌고 내려오라고 할 순 없지 않나. 노씨는 그 후에도 계속 내려왔다. 5·18 행사 때 쓱 참배하고 가버리는 정치인들보다 진정성이 있다고 봤다. 마지막 만났을 때 노씨에게 5·18 기념 배지를 달아주면서 ‘5·18 정신 꼭 기억해라. 그리고 만약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찾아가겠다’고 했다.”
빈소에서는 유족들에게 어떤 말을 했나.
“고인이 광주 사람들 가슴에 피멍을 들게 했지만 그래도 아들 통해서 용서를 구하고 사죄한 것은 높게 평가한다고 했다. 또 고인 주변에 많은 역사적 자료들이 있을 것인데 장례가 끝나면 그런 것들을 공개해 진상 규명이 완성될 수 있도록 협조해달라고 했다. 유족들도 그러겠다고 했다.”
노 전 대통령의 장례는 논란 속에서 끝났다. 국가장 장례위원으로 이름을 올린 여당 지도부는 대부분 영결식에 불참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애도 메시지는 발표했지만 직접 조문은 하지 않았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 도입 이후 현직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 조문을 가지 않은 것은 처음이다.
장례 예우·절차를 놓고 갈등이 많았다. 광주와 5·18단체들은 국가장을 반대했다.
“광주의 아픔은 다 치유된 게 아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잃은 분들도 많고 후유증으로 인해 삶에 지쳐 극단적 선택을 한 사람만 80여 명이다. 그 책임이 있는 사람에게 국가장 예우를 해준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 나 역시 꼭 국가장을 해야 했나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정부도 많은 고민을 한 끝에 결정한 걸로 알고 있다. 총리도 ‘현대사가 거쳤던 굴곡에 대해서 한 단계를 넘어가는 일’이라고 하지 않았나.”
문 대통령은 조문하지 않았는데.
“국가장을 안 하면 모를까 정부가 예우를 갖추기로 결정했는데 그 수반인 대통령이 조문을 안 한 건 모순으로 보인다. 공과를 따지는 건 별개로 하고 화합 메시지 차원에서 조문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대통령은 특정 정파나 지역이 아닌 대한민국의 대통령이고 모든 국민을 껴안아야 하는 것 아닌가.”
노 전 대통령 별세 계기로 전두환 전 대통령도 다시 입에 오르내린다.
“길 가다 어깨 부딪쳐도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게 사람인데, 전씨는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여놓고 뉘우치는 모습이 전혀 없고 오히려 희생자들을 욕보인다. 전씨가 지금이라도 진심으로 뉘우치고 빌면 용서할 수도 있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아예 없어 보인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 사람에 대해서는 참….”
몇 해 전부터 야당 지도부가 ‘다시는 광주시민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다짐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진정성이 있다고 보나.
“작년에 김종인(당시 미래통합당 비대위원장)씨가 5·18 묘지에 와서 무릎 꿇었을 때 난 참배 막으려고 시위하다 벌금 100만원 받았다. 그가 야당 대표여서 반대한 건 아니고 신군부에 적극 협조했던 사람이어서 그랬다. 지금 야당은 5·18에 책임 있는 민정당에 뿌리를 두고 있고 과거 망언으로 광주 사람들 가슴에 못도 많이 박았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계속 찾아와 참회하고 반성하는 노력을 하는 모습은 결코 나쁘지 않다고 본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조금씩 상처가 치유되는 과정이라고 본다. 그러다 언젠가 결국 화해가 이뤄지는 것 아니겠나.”
여당 일각에서는 야당의 이런 모습을 “사죄 쇼”라고 한다. “5·18은 국민의힘 따위가 정치적으로 이용해도 되는 역사가 아니다”라고도 했다.
“사과·반성 안 한다고 욕해왔는데 사과하는 걸로 또 문제 삼는 건 너무 편협하다. 물론 민주당에는 5·18에 직접 참여했거나 그 정신을 알리고 구현하는 데 앞장서온 분이 야당 쪽보다 훨씬 많다. 하지만 그렇다고 5·18 정신이 그들의 전유물은 아니다. 5·18은 민주화 초석이 된 국민의 운동이다. 특정 정당이나 정치세력이 이를 독점하려 한다면 5·18 정신을 계승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광주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정작 현 정부가 5·18 유족들을 위해 한 것도 거의 없다.”
그는 “많은 사람이 5·18 유족들이 큰 보상을 받았고 계속 특혜를 받고 있다고 오해하고 있어 안타깝다”며 “이 부분을 꼭 써달라”고 했다.
문 대통령이 임기 첫해에 5·18 유족들 처우를 개선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나.
“실질적으로 나아진 건 없다. 5·18 동지 중에 기초생활수급자가 600명이다. 폭도로 낙인찍혀 직장도 다니지 못했고, 자녀 교육도 제대로 못 시킨 사람도 많다. ‘가산점’ 때문에 논란이 있는데 애초 그런 자리에 응시할 수 있을 만큼 교육을 받은 유가족이 많지 않다. 몇 년 전 내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빈 부의 봉투가 여럿 들어왔다. 동지들이 위로 마음은 전하고 싶은데 형편이 되지 않으니 봉투에 이름만 써서 보낸 것이다. 5·18에 참여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살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는 5·18에 대한 왜곡·폄훼가 진정한 화합을 가로막고 있다고도 여러 차례 강조했다. 일부 단체는 북한군 특수부대가 5·18에 침투했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당시 찍힌 광주 사진에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사진 속 인물은 박씨였다. 명예훼손 소송에서 법원도 박씨 손을 들어줬다.
“당시 황장엽이 56세였는데 26세인 내 사진을 황장엽이라고 우기고 그걸 또 믿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왜곡이 계속되면 용서·화합을 바라는 광주 사람들 마음도 멀어진다. 5·18이 역사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계속 현재 진행형으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
S Koreans send off former President Roh in small funeral
The hearse of deceased former South Korean President Roh Tae-woo leaves at the at the Olympic park, Saturday, Oct. 30, 2021, in Seoul, South Korea. Dozens of relatives and dignitaries gathered in South Korea’s capital on Saturday to pay their final respects to former President Roh Tae-woo, a key participant in a 1979 military coup who later won a landmark democratic election before his political career ended with imprisonment for corruption and treason. (Kim Min-Hee/Pool Photo via AP)
Kim Tong-hyung, The Associated Press
Published Saturday, October 30, 2021 7:04AM EDT
SEOUL, South Korea (AP) - Dozens of relatives and dignitaries gathered in South Korea's capital on Saturday to pay their final respects to former President Roh Tae-woo, a key participant in a 1979 military coup who later won a landmark democratic election before his political career ended with imprisonment for corruption and treason.
Pandemic restrictions limited the size of funeral services for Roh, who died Tuesday at age 88 from complications from various illnesses. Doctors said his condition worsened in recent years because of a degenerative disorder.
President Moon Jae-in's decision to hold a state funeral for Roh was controversial because of his links to the coup and a bloody suppression of pro-democracy protesters in the southern city of Gwangju in 1980 that killed around 200 people and injured hundreds of others.
Gwangju and several other cities and provincial governments refused to raise flags half-staff or set up memorial altars for Roh in accordance with state funeral procedures.
Moon, who did not visit Roh's memorial altar at a Seoul hospital before leaving for Rome on Thursday for meetings with Pope Francis and Group of 20 leaders, said through his office that Roh made “significant contributions to national development despite many historical wrongdoings.”
On the final day of a five-day funeral procession, honor guards wrapped Roh's coffin with the national flag and placed it into the back of a limousine. The vehicle then rolled out of the hospital and followed a black convertible topped with a huge portrait of Roh in a motorcade that drove toward his house in northern Seoul.
Family members quietly toured the house, led by a grandson who carried a smaller portrait of Roh. Then they headed toward southern Seoul for a funeral service at a square at Olympic Park, a venue built for the 1988 Seoul Olympic Games held during the first year of Roh's presidency.
The funeral's participants were limited to 50 people, including relatives, government officials, religious leaders and foreign diplomats, because of COVID-19 concerns. Roh's wife, Kim Ok-suk, and their two children, Roh Soh-young and Roh Jae-heon, sat quietly in chairs distanced apart, looking solemnly at the ground.
Prime Minister Kim Boo-kyum, Seoul's No. 2, said in a speech that Roh will be remembered for his many accomplishments as president, including the successful hosting of the Olympics, expanding relations with communist nations and easing tensions with North Korea.
Kim also regretted that Roh never apologized in person over the coup and military atrocities, although his children conveyed his remorse while his health deteriorated in recent years.
“It's undisputable truth President Roh Tae-woo has an immense fault that cannot be erased,” said Kim. “Attending the funeral service today, we realize that nobody is free from the (judgement) of history.”
Roh's criminal convictions legally prevent him from being buried with other former leaders and national heroes at the country's national cemetery. His cremated remains will be kept at a Buddhist temple in Paju, north of Seoul, until his tomb is ready at nearby Paju Reunification Park, which was built during his presidency in 1989 as a symbol of peace between the two Koreas.
Gwangju Mayor Lee Yong-sup, a member of Moon's liberal Democratic Party, said the city couldn't honor Roh when he was a core member of dictator Chun Doo-hwan's military junta that massacred its citizens.
“He was the president of our country, and while it's our traditional sentiment to mourn a person who died, Gwangju cannot do that (for Roh),” Lee said Wednesday.
U.S. State Department spokesperson Ned Price said in a statement that Roh leaves a “complicated legacy” but credited him for solidifying South Korea's democratic transition as president.
Roh took office in 1988 after he became the country's first directly elected leader in decades following successive military governments in Seoul.
He was a major player in a December 1979 military coup that brought his longtime army friend Chun to power. Their takeover came months after their mentor, dictator Park Chung-hee, was assassinated by his spy chief following 18 years of rule.
Roh had been Chun's hand-picked successor, but massive pro-democracy protests in 1987 forced them to accept a direct presidential election, which initiated South Korea's transition toward democracy.
Despite his military background, Roh crafted a softer image during the presidential campaign, calling himself an “average person.” He won a closely contested vote in December 1987, largely thanks to a split in liberal votes between opposition candidates Kim Young-sam and Kim Dae-jung, who both later became presidents.
During his five-year term, Roh actively pursued diplomacy with communist nations following the fall of the Berlin Wall, establishing relations with the Soviet Union and China in the early 1990s.
He also took steps to improve relations with North Korea, which led to the Koreas jointly issuing a statement vowing a nuclear-free Korean Peninsula and joining the U.N. at the same time in 1991.
His government was also credited for successfully hosting the 1988 Seoul Olympics, which were seen as South Korea's coming-out party to the world following its rapid rebuild from the destructions of the 1950-53 Korean War.
After his successor, Kim Young-sam, investigated the coup and the crackdown in Gwangju, Roh was arrested, convicted of mutiny, treason and corruption and received a prison term of 22 1/2 years. Chun was sentenced to death.
The Supreme Court later reduced those sentences to life imprisonment for Chun and 17 years for Roh. After spending about two years in prison, Roh and Chun were released in late 1997 under a special pardon requested by then President-elect Kim Dae-jung, who sought national reconciliation.
Roh had stayed mostly out of the public eye following his release from prison. Last April, his daughter, Roh So-young, wrote on Facebook that her father had been bed-bound over the past 10 years without being able to speak or move his body.
https://www.chosun.com/opinion/column/2021/11/01/DLLPT3PLZJGNTENBLCP4MK3LSM/
https://www.cp24.com/world/s-koreans-send-off-former-president-roh-in-small-funeral-1.5645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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