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une 27, 2021

우리사회의 선행자들을 시기하고 욕보이는 사회적 병폐가 큰문제, 뽀빠이 이상용 “박정희 파안대소, 침실서 본 사람 몇이나 될까” 고생 많으셨어요.

 전세계적으로 알려진, 우리나라의 민간대사역활을 했던, 골퍼 최경주선수를 모르는 국민은, 이제 막 태어난 신생아를 빼고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PGA Championship을 한번 우승하는것만으로도 그명성은 전세계에 알려지게 되는데, 최경주 선수는 거의 10번정도 우승했고,  Major Championship에서도 우승했었던, 대한민국의 진정한 민간 외교관이었고, 현역으로 뛰고 있을때도, 그는 현지에서 봉사도 많이하고, 동양사람으로서의 미덕도 갖추고 봉사활동과 Donation도 많이 했었던, 품위를 갖춘 대한민국의 자랑이었었다. 

현역에서 뛰고 있을때, 매주 그가 출전하는 경기 4일동안은 TV에 시선을 고정하고, 그의 플레이를 보면서, 잘할때는 박수를 쳤었고, 조금이라도 실수를 할때는 아쉬움의 탄성을 지르곤했던 기억이 지금에 생생하다.

오늘 뽀빠이 이상용씨의 근황및 지나온 삶에 대한 인생 스토리를 자세히 보도한 조선일보의 기사내용을 잘 읽었다.  내용중 많은 부분은 이미 내가 알고 있는 내용들이었는데, 그중에서 첫번째로 기억나는 프로그람은 "우정의 무대"로 군 위문공연이었었다. 이상용씨만큼 훈련에 지쳐있는 군장병들의 사기를 북돋아준 연예인이나, 대통령이나, 장관도 없었다.  나이도 한참어린 군후배들의 사기를 북돋우기위해 노력하는 그는 당시 얼마나 출연료를 받는지는 상관할바가 아니었었다.  

그가 자랑스럽게 항상 큰소리로 외쳤던 한마디는 "집은 20평, 건강은 80평, 행복은 150평"에 사는 부자입니다라고.  그런데 어느날 부터인가 "우정의 무대"에서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우리 한국사람들의 못된 시기심이 그를 하루아침에 시궁창으로 처박은 것이다.

"1996년 11월 여의도 목욕탕에서 잡혀갔어요. '우정의 무대'화천에 있는 군부대 녹화가 있던날 아침이었죠"  

죄명은 횡령의혹이었다. '4500만원짜리 집이 아니라 40억 호화주택에 산다. 30년 고물차가 아니라 벤트 승용차를 탄다. 후원금을 빼돌려 파주에 땅 만평을 샀다'는 죄목이었다.

그전에 그는 심장병 어린이들의 병원비를 충당하기위해 출연료보다 훨씬 많은 병원비를 감당하기위해 그는 월세를 살아가는 신세가 됐었지만, 그래도 아내의 이해와 가족들의 협조로 계속 심장병 어린이 치료사업을 이어갔었다는, 내가 아니면 누가 그 천사같은 어린아이들을 살릴수 있을까?라는 집념을 갖고 지금까지도 이어가고 있다는, 기부행위를, 이상용의 명성(?)을 시기하는 어느 개새끼가 밀고하여,  방송에 출연하는 모든 프로그람을 다 빼앗겼었다.  그렇게 해서 그의 남에게 잘 보여지지 않았던, 정치꾼들이나 사회의 저명인사들은 감히 엄두도 못내는, 그의 선행은 길이 막힌것도 문제였지만, 살길이 막막하여, 그를 잘 알고있는 미국에 살고있는 친지가 미국으로 불러들여 그곳에서 생계를 유지할수 있었던 인내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었다.

이상용씨의 선행이 오해를 받아 가족들과 헤어져 살아야 하기까지 했던, 비참함을 한국의 정치꾼들은 전연 개의치 않는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선행을 하면,  미친 견새끼들의 시기로, 공금횡령, 세금탈세혐의, 위장된 선행 등등의 시기를 당해 신세를 망치는 풍토는 하루바삐 고쳐야할 국민적 고질병이고, 이를 정치꾼들이 자기네들의 명성을 위해 악용하는 꼼수는 우리 사회에서 없어져야한다.

최경주 선수가 은퇴후 귀국하여, 골프를 하고싶어하는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해 많은 프로그람을 만들어 헌신해 왔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어느 거치같은 찌라시가 "최경주는 세금을 탈세하기위해 위장 선행을 하고 있다. 당국은 철저히 수사해서 그진위를 밝혀야 한다"라고 모함하여, 당국의 조사까지 받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있었고, 그결과 오직 골퍼로 성공하겠다는 야무진 꿈을 꾸면서, 최경주가 경영하는 골프학교 또는 훈련소에서 무료로 실력을 쌓던, 어린 새싹들의 희망의 싹을 싹뚝 잘라 벌였었다.

정치꾼들이 툭하면 '미국은 어떻고....'하는 식으로 미국을 잘인용하기에 나도 미국을 인용해 보겠다. 미국은 자선을 베푸는 사람들이 비단 돈있는 부자들뿐만이 아니고, 평범한 일반시민들도 엄청나게 많다. 그러나 그분의 선행을 크게 대서 특필 하지도 않는다. 묵묵히 자선을 행할 뿐이다.

얼마전 임채무씨가 자금난으로 지난 3년간 문을 닫았다 다시 그동안 출연료를 모아 재투자하여 개방하면서, 입장료 징수를 시작했다고 했는데, 일부 남의 선행을 시기하기 좋아하는 자들이 "임채무는 위선자"라고 육두문자까지 써 가면서 공격을 했다한다.

"예전에는 직원이 15명 또는 18명이었었는데, 지금은 전부 70-80명이다. 전기세만 해도 한달에 2000만원인데.... 입장료를 받지 않으면 임채무는 두달있다 문 닫아라 이소리뿐이 안된다"라고 입장료를 받을수 밖에 없는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그유명한 연예인이 평생 벌어들인 모든 재산을 어린이 동산 건설에 쏟아부어, 자라라는 어린 새싹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고, 그들이 신나게 즐기는 모습을 보는게 낙이다라는 그의 어린이 사랑을 그는 어린이 동산을 만들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https://www.etoday.co.kr/news/view/1895281

이렇게 일반 시민으로서, 사회에 좋은 일을 하는 선행자들을 칭찬은 못해줄망정, 제발 시기 모함으로 그분들이 하고있는 선행을 막지 말기를 바란다.  물로  민주당 찌라시 정치꾼 윤미향같은 쓰레기들도 있기는 하지만, 비난을 해도 옥석을 가려서 했으면 하는, 성숙한 시민의식을 보여주었으면 하는 바램에서다. 

김희갑 선배님과 세차례 청와대 방문했던 기억을 더듬으면서, 박정희 대통령께서 힘들어 하시니 푹주무실수 있도록 우스운 개그얘기를 해드린적이 있는데, 품격있는 19금 얘기도 해드리면 피로한 하루의 피로와 함께 스르르 잠속으로 빠져들게 했던 기억이 있지요. 참으로 서민적인 대통령이셨는데....박정희 대통령이 파안대소하시는 모습을 침실에서 본 유일한 뽀빠이 였습니다. 

최근에 발탁된 청와대 문재인의 1급 보좌관 박성민양에게 부탁한다.  월급의 절반은 이상용 오빠에게 보내서 심장병어린이 치료비 납부하는데 보탬이 되도록 하시라. 부탁. 영리하고 재능이 있으니까 굳이 내가 이런 부탁안해도 준비하고 있으리라 믿지만....

지금같은 건강 계속유지하셔서, 후배들과 도움을 필요로 하시는 많은 심장병 어린이들의 계속적인 우상이 되어 주십시요.  





[그 때 그 사람] ‘어린이 대통령’ 뽀빠이 이상용


1970~1990년대 ‘어린이 대통령’이라고 불리며 인기를 끌었던 ‘뽀빠이 이상용’씨가 《월간조선》7월호에 근황을 털어놓았다. 이상용(78)씨는 이 인터뷰에서 어린 시절 이야기, 방송 데뷔, 한국어린이보호회 활동, 어린이보호회 후원금 횡령 의혹으로 인해 받았던 고통과 재기 등에 대해 이야기했다.

“1980년 ‘모이자 노래하자’ 녹화장으로 선생님 한 분이 어린 제자를 데리고 찾아오셨어요. 얘가 선천성 심장병을 앓고 있는데, 아버지는 천식으로 일을 할 수 없고, 어머니가 시장에서 장사하며 홀로 6남매를 키우고 있다는 겁니다. ‘수술 안 하면 죽는다, 아이 좀 살려달라’기에 두말 않고 바로 ‘그렇게 하자. 알겠다’라고 했죠.”

문제는 수술비였다. 당시 살던 집 보증금이 600만 원이었는데 수술비는 1800만 원. 회당 출연료 16만 원으로는 감당 불가능한 액수였다.

“덜컥 약속을 하고 바로 도상국 어린이를 병원에 입원시켰습니다. 이미지 관리하느라 야간 업소 출연을 고사하고 있었는데, 오비스 캐빈, 라데빵스, 로즈 가든 세 군데 출연료 3달 치를 가불(假拂)했어요. 바자회도 하고 지인 돈도 빌리고, 발로 뛰면서 겨우 수술비 만들었죠.”

본인에게도 1남 1녀 어린 자녀가 있었지만, 어린 시절 병약한 몸으로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었던 이상용에게 심장병 어린이의 비극은 남의 일이 아니었다. 수술은 성공.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감격한 도 군의 아버지가 주변에 사연을 전했고, 전국의 심장병 어린이들이 뽀빠이의 사당동 집으로 몰려왔다.

“처음에 아내가 그러더군요. ‘돈도 없는데 어떻게 할 거냐. 우리는 수술비 반도 안 되는 액수의 전셋집에 사는데…’. 나중엔 ‘아이가 죽게 생겼는데 그 부모 마음은 어떻겠냐’며 이해해 줬습니다.”

아내의 인정과 격려에 용기를 얻어, 합정동에 ‘한국어린이보호회’ 사무실을 내고 16년 동안 567명의 어린이에게 새 생명을 찾아줬다.

- 그런데 문제가 생겼죠?

“1996년 11월 여의도 목욕탕에서 잡혀갔어요. ‘우정의 무대’ 화천 군부대 녹화가 있던 날 아침이었죠.”

이른바 횡령 의혹이었다. ’4500만원짜리 집이 아니라 40억 호화주택에 산다', ’30년 고물차가 아니라 벤츠승용차를 탄다', ‘후원금 빼돌려 파주에 땅 만 평을 샀다’고 했다.

기자가 묻길래 “그런 집, 차, 땅 있으면 찾아서 당신이 가지시오”라고 했다. 수사를 받았지만 1997년 2월 무혐의로 사건이 종결되었다. 시작부터 함께했던 분신 같은 프로그램 ‘우정의 무대’(1989~1997년)는 아예 폐지되었다. 누가 왜 그랬는지 짐작은 하지만 말하고 싶지 않다. 대전역 앞에서 ‘우리 아들은 그렇지 않다’고 프린트물을 돌리던 아버지가 아들의 일에 대한 충격으로 78세를 일기로 돌아가신 것이 가슴 아플 따름이다.

“억울했죠. 한때 왼쪽 눈이 안 보였고, 수면주사 두 대를 맞아도 잠을 못 잤어요. 더 가슴 아픈 건, 수술을 기다리던 심장병 어린이들 중에서 사망자가 나왔다는 겁니다.”

미국 서부로 건너가 고려대 출신이 대표로 있는 여행사에서 관광가이드로 일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하루에 관광버스를 13시간 탔습니다. 미국에 있는 동안 무혐의 판결이 났고 한국 관광객들이 ‘억울하겠다, 우린 다 안다’며 팁을 많이 주셨어요. 팁 받는 사람이 그 돈으로 도박할 순 없잖아요? 라스베이거스를 수없이 갔어도 슬롯머신 한 번 안 했습니다. 2년간 팁 9000만 원을 모아 딸을 시집보냈죠.”

그의 버스 탑승 후 후배 회사를 찾는 관광객이 두 배쯤 늘었지만, “국민들이 당신을 보고 싶어 한다”는 아내의 한 마디에 귀국을 결심했다. 돌아오기는 했지만 세상에 나갈 뜻이 없어서 전남 구례 비닐하우스에서 상추, 마늘 농사를 짓고 경남 일대에서 꽃모종을 심으며 6개월을 보냈다. 일당 3만 원. 그 돈으로는 생활이 불가능했다. 가족에게 가장의 의무를 못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귀국 후 집에 오자마자 엉엉 울었던 기억도 지워주고 싶었다. 개그우먼 문영미와 녹음한 ‘이상용의 폭소열차’(1999년)는 그렇게 세상에 나온 음반이다.

“CD를 들고 제가 직접 행담도 휴게소 화장실 앞에서 3년 동안 팔았습니다. 손님들 오시면 몇 분 앞에 두고 즉석 개그도 했죠. 지나가던 분들이 신기해하며 ‘요즘은 잘 지내냐’며 걱정도 해주시고 덕담도 해주셨습니다. 응원만 해주신 것이 아니라 물건도 많이 사주셨어요.”

현숙, 유지나, 태진아, 조항조, 송대관 등 가수들이 행사장에 가는 길에 일부러 들러 도움을 주기도 했다. 같이 CD도 팔고, ‘화장실 앞’에서 노래도 불러줬다. KBS 전국노래자랑 사회를 2년(1985~1986년) 할 때 만났던 소중한 인연들이다.

CD는 10탄까지 제작할 만큼 대박이 났지만, 생각보다 가계에 보탬을 주지는 못했다. 저작권 개념이 모호하던 시절이어서, 정본보다 복사본 판매량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CD를 만든 건 잘한 일이다. 이상용을 처음 발탁했던 유수열 PD(당시 춘천 MBC 사장)가 소식을 듣고 전화를 했기 때문이다.

“상용아, 와라. 나는 너 알아.”

매주 1시간 진행한 ‘강원 매거진’(2000)이 이상용의 방송 복귀작이다. 이후 대전 MBC의 ‘주부 가요열창’, 경인방송의 ‘청춘 노래자랑’, 전주방송의 ‘와글와글 시장가요제’, MBC ‘늘 푸른 인생’ 등을 하며 활동을 이어갔다.

한 달에 강의를 50여 차례 다니며 왕성하게 달리던 뽀빠이 열차는 하지만 지금 21개월째 발이 묶여 있다. 코로나 때문이다. 2월에는 계단에서 넘어져 다리가 부러지는 일도 있었다. 아직도 보행이 조금 불편한데, 건강과 활력의 상징 뽀빠이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일 수 없어 아파도 아픈 척을 하지 않는다. 2023년 팔순 기념으로 출간 예정인 자서전 《살아보니 인생 별 것 아니더라》 집필도 멈출 수 없다.

“제 방송이나 강연이 다 현장 중심으로 이뤄지잖아요. 그런데 집합금지 조치 때문에 일이 싹 끊어졌어요. 거짓말처럼. 먹고살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얼마 전에도 소장하고 있던 그림을 팔았죠. 저에게는 지금 일과 돈이 필요합니다. 불러주시면 어디든 달려가겠습니다!”

왜 그렇게 돈이 없나. 필요하다 싶으면 일단 지르고 보기 때문이다. 심장병만 해도 수술비 총액만 80억 원 남짓. 그래서 곳간에는 쌀이, 통장에는 돈이 늘 부족했다.

횡령 의혹으로 몰렸을 당시 통장 잔고는 불과 40여만 원. 담당 수사관이 “형님, 왜 이렇게까지 애쓰며 사셨습니까?”라고 했을 정도다.

- 그렇다면 본인이 꼽는 대표작, 생애 최고의 프로그램은요?

“1989년부터 했던 ‘우정의 무대’죠. 나를 완성시켰고, 나의 모든 것을 녹여 넣은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군(軍) 위문 프로그램을 만들 때 제가 만장일치로 사회자 추천을 받았답니다. 장교 출신에 전방에서 제대로 군 생활했다고, 장병들이 저를 보면 좋아할 거라고요. ‘우정의 무대’는 부대 내 사고도 줄이고 병영의 즐거움도 늘린 프로그램이었다고 자부합니다.”

- 모든 유머를 직접 만든다면서요? 독서량도 어마어마하다고 들었습니다.

“지금도 일주일에 4~5권은 꼭 책을 읽습니다. 필요한 부분만 메모하고 바로 버리죠. 그렇게 모은 소재 4만 개를 금고에 넣어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저한테는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자료죠.”

- 유명인들과도 교분이 많았지요?

“그럼요. 김수환 추기경님 앞에서 ‘신부하시길 잘하셨어요. 그 얼굴에 누가 시집오겠습니까?’라는 코미디를 했고, 박정희 대통령 침실에서도 개그를 했습니다.

육영수 여사의 청으로 희극인 김희갑 선배님과 세 차례 청와대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각하가 취기가 있고, 힘들어하시니 푹 주무실 수 있도록 우스운 얘기 몇 개 해달라는 말씀이셨어요. 품격 있는 19금 이야기도 하고, 잠드시는 것 같다가 깨면 다시 들어가 또 웃겨드렸습니다. 박 대통령이 파안대소(破顔大笑)하시는 모습을 침실에서 본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 방송가(放送街)에서 산전수전(山戰水戰)에 공중전(空中戰)까지 다 겪었는데, 기회가 주어진다면 꼭 하고 싶은 프로그램이 있습니까?

“그럼요, 있죠. 100세 이상 어르신들 모시고 진행하는 프로그램이죠. 제목은 ‘너희가 100살을 알아?’ 전국에 100세 이상 어르신이 1만 5000분이 좀 넘어요. 어르신들과 가족들을 모시고 어떻게 100세를 넘겼는지, 가족 분위기는 어떤지, 자손들이 자랑하는 어르신의 모습 등을 방송에 담고 싶습니다. 장날 약장수말고는 문화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시골 오지 마을을 찾는 ‘유랑극단’도 하고 싶어요. 차 한 대에 가수, 코미디언, 마술사, 의료진을 동행하고 전국을 도는 거죠. 동네 사람들이랑 잔치국수 끓여서 나눠 먹고, 상비약, 김치냉장고도 나눠드리는 겁니다.”

10년 이상 진행한 프로그램만 일곱 편이 넘는 전설적 사회자의 소망이 꼭 이뤄지기를 바라며 마무리 질문을 던졌다.

- 이상용은 어떤 사람입니까?

“집은 20평, 건당은 80평, 행복은 150평에 사는 사람입니다.”

- 이상용에게 코미디란?

“인생의 단면이죠. 코미디로 인해 내 인생이 좌우로 나눴으니까요.”

- 이상용의 인생을 한 마디로 정리한다면?

“1억 원입니다.”

- 네?

“파란만장(波瀾萬丈) 했으니까요.”

‘파란’ 지폐 ‘만 장’이면 1만 × 1만, 그래서 1억 원이라는 이야기였다. 초구(初球) 못지않은 강력한 웃음이 터지면서 인터뷰가 끝났다.


https://www.chosun.com/culture-life/culture_general/2021/06/26/K2IW4AXIBBC4DJU242XYEG5T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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