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ZWq8Ex6j0Jg
몇년전 Nepal에 있는 Lumbini 탐방을 했을때, 인도에서 출생한 석가모니의 출생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왜 인도에서 이곳 먼곳인 Lumbini까지 와서 출생하게 됐을까?라는 의문을 떨치지 못했었다. 부처님의 유적지인 Sanarth 유적공원앞에는 처음보는 Hand Crafts들을 파는 상점이 눈에 띄어 한컷해 봤다.
Sanarth 유적공원은 부처님의 모든것에 대한 유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라고 한다. 우선 이곳 유적지는 수난을 많이 겪은, 그래서 많은 상처가 남아있는, 곳이라는 점이다. 옛날 Muslim이 득세 할때, 이곳을 전부 없앨려고 인위적으로 다 땅속에 묻어 버렸었다고 한다. 그런 상태로 6백년동안 지내오다가 1815년에 영국의 탐험가이자 육군 대령이었던 Shea McKenzie에 의해 발굴이 되기시작됐는데, 그는 고고학적인 면에서 전문가가 아니었기에 고고학적인 전문지식이 도입돼지 않은채 발굴을 하면서 부작용도 많이 발생했었다고 한다.
그후 20여년이 지난 1835년경에 유명한 고고학자가 영국에서 건너와 전문적으로 발굴을 고고학적인 측면에서 조심스럽게 하면서, 다른 고고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땅속에 묻혀있던 유적들을 발굴하여 지금 보는것 처럼 조성해 놓았다는 설명이다.
부처님이 처음으로 이곳에서 해탈한 내용을 대중들에게 설파한곳으로, 부처님을 기념하여 사후 약 300년 후에 Mauryan왕국의 왕 Ashokan이 Pillar을 세웠다고 전한다. 그래서 Ashokan Pillar 라는 이름이 부쳐졌다는 것이다. 불교는 Stupa없이는 설명이 안된다. Guide의 설명에 따르면, 4가지 형태의 Stupa가 있다고 했다. Commemorative, Relic, Votive(offering), Padrabhaumik 라고 한다.
Ashokan Pillar의 기둥은 높이가 15.25미터로 옛날 석기시대의 선돌을 본딴 기둥이었다고 한다.
Ashoka 왕은 (272-232 BC) Sand Stone을 이용하여 Pillar를 만들었고, 표면을 번질번질 Polish했다고 한다. 기둥의 밑부분은 직경이 71센티미터, 윗부분은 56센티미터로, 기둥의 맨위에는 4마리의 으르렁 거리는 사자상이 새겨져 있는데 자세히 보면 웃는 모습이라고 한다. 이런 모습이 Mauryan왕조시대의 건축물의 특징이며, 이사자상은 현재 인도의 국가적 상징으로 1950년 1월 26일에 지정되였으며, 특히 100 Rupee 지폐에 인용돼고 있다. 현재 원래의 4마리 사자상은 길건너에 있는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고 했다.
Pillar는 여섯조각으로 부러져 전시되고 있었다. Ashoka왕이 만든 3개의 경고문구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첫째는 Monks와 Nun들은 Sangha(불교에 정진하는 Monks, Nun들이 함께 생활하는 공동구역)에서 분쟁을 하지 말것, 두번째는 Kaushambi의 Kushana왕에 대한내용, 셋째는 초기의 Gupta Brahmi 경전에 대한 경전과 당시 선생들에 대한 언급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이곳은 Mulagandha Kuti로 부처님에 득도후 좌를 틀고 기도에 정진한곳으로 알려져 있다. 부처님의 불상이 거의 다 좌를 틀고 있는 모습의 이유를 오늘 조금 터득하게 된 셈이다. 이곳이 부처님께서 기도에 정진한 기도원으로 더 확실하게 증명하는 기록이 있다. 중국출신의 스님 Hiuen-Tsang의 6년간의 연구와 기도후에 기록한 내용을 보면, 이기도원의 높이는 61미터였다고 한다. 마침 스리랑카 출신 Monk가 기도에 정진하고 있는 광경을 목격할수 있었다.
기도원벽의 두께는 이건축물의 무게를 충분히 지탱할수있는 규모였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기도원의 구조는 정사각형의 형태였으며 각면의 길이는 18.29미터였고 출입문은 동쪽을 향해 직사각형의 Mandaya 였었다. 또한 기도원의 앞에는 길게 만들어진 Court Yard가 있었다고 한다. 기도원 건물의 구조는 역시 벽돌로 쌓았으며, 시대적 배경으로는 Gupta왕조시대에 건축된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Guide 의 설명은 귀를 더 바짝 기울이게 해줬다. 부처님의 어머니가 임신하여 아이를 낳기위해 친정집으로 가던 도중에 Lumbini에서 부처를 해산하게 된다. 지금은 인도와 Nepal로 국경이 나뉘어 있지만, 그때 당시는 각지역의 토후들이 왕권을 잡고 통솔하던때라 그지역이 부처님의 아버지인 왕의 통치하에 있었을 때였다. 부처님이 세상에 태어나자 마자 7발짝의 걸음마를 했다는 것이다. 그때 갑자기 하늘에서 7개의 연꽃이 지상으로 내려와 부처님의 출생을 환영하고 그곳에서 자라게 됐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Hindu 혈통의 Prince로 태어난것이다. 득도하기전의 이름은 Siddharth Gautam 이었다.
부처님의 생애에 대해 설명을 해준다. 그는 Kalpilvastu 의 Sokyan혈통으로 당시 그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계급인 Worrior의 왕자로 태어나서, 해탈하기전까지는 Siddharth Gautam으로 불렸다. 아버지 Suddhodna는 현재의 Nepal 일부와 인도북부지역을 통치하는 왕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Siddharth는 기원전 563년에 Lumbini Garden(현재 Nepal의 Rummindei)에 있는 Sola Tree 밑에서 태어나 났는데, 그때 어머니 Mayadevi는 Siddharth를 낳기위해 그녀의 친정집이 있는 Devadoha로 가던 중이었었다고 한다.
Lunar와 Guide, Nihal이 서있는 이곳은 Monastery가 있었던 곳으로 당시에 수행중이던 Monks들이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부처님 교리터득에 정진했었다고 한다.
유적지내에서 가장큰 이 Stupa는 Dhamek Stupa로 주로 Memorial을 뜻한다고 했다. Ashoka왕은 이 Dhamek Stupa를 건축했는데, 이유는 부처님께서 이곳에서 처음 대중 Sermon 한것을 기념하기위해 건축한것인데 세월이 흘러가면서 후세사람들이 더 Expension해서 지금처럼 엄청나게 큰 Stupa가 됐다는 것이다.
마침 일요일인데도 현장 실습을 나온 이곳의 학생들이 우리 부부와 Encounter했는데 사진을 같이 한컷하자는 제안을 해와 그들과 함께 잠시 동심을 즐겼다. 이들이 지금의 상태처럼 잘 자라서 사회적 기둥이 되기를 속으로 염원해 주기도 했었다. 동행한 선생님이 더 좋아하셨다.
많은 Stupa들의 Base는 모두 벽돌로 구성되여 있고, 기능은 부처님에 대한 Votive(헌신, Offering)를 의미한다고 했다. 그런데 벽돌사이에 시멘트를 사용한것을 보면서 의문이 생겼다. 당시에 시멘트를 이용할수는 없었을텐데 하면서. Guide의 설명은 땅속에 묻혀있는 것들이 지상으로 나오면서, 구경온 사람들이 너나 할것없이 하나씩 기념으로 들고 가는것을 더이상은 방치할수 없게 하기위해 새로 Remodeling하면서 시멘트를 사용하게 됐다는 것이다.
부처님, 또는 석가모니의 얼굴에는 32개의 Noble feature가 들어있어 힌두사람들은 부처님을 일컬어 그들이 믿는 9번째의 Vishnu신의 Incarnation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힌두사람들은 부처를 불교의 창시자로 공경하지 않고, 다만 그들이 믿는 Vishnu 환생의 하나일뿐이라는 것이다. 당시 부처님의 설법을 믿고 따르던 사람들은 인도에서 다른 아시안 나라들로 도망을 가서 그곳에서 불교를 전파하게 되는 반사포교를 하게된 계기가 됐다는 설명이다.
그리고 인도는 계속해서 Hindu 국가로 계속남아 현재에 이르고 있다는 Theary다.
사진에서 보는 거다랗고 둥근 모양의 Base는 당시 Dharmara Jika 가 있었던 곳으로 Relic Stupa에 속한다고 했다. 나는 설명은 들었지만 왜 이 Stupa는 Relic으로 구분되는지는 지식이 모자라 깊이 이해하지는 못했다.
부처님께서 이와같은 종류의 나무밑에서 득도 하셨다는 Nim Tree가 Sarnarth 유적공원 입구에 크게 잘 자라고 있었다. 입구에는 돌판에 새겨진 Sarnarth 에 대한 설명이 잘 기록되여 있다. 이곳의 Nim Tree는 1931년에 이곳에 Planting 되여 지금의 모습으로 자랐다는 것이다.
입구의 왼쪽에 있는 전시관에서는 유적발굴자들에 대한 사진과 설명 그리고 유적당시의 상황을 한눈에 볼수 있는 조감도가 잘 표현되여 있었다. 처음 발굴당시의 Pillar의 맨 위에 있었던 4마리의 사자상의 모습도 보인다.
Monk들의 Memorial Stupa앞에서 기도정진하는 모습도 보여주고 있어 이해 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고, 사자상과 그위에 32개의 Spoke가 새겨진 Wheel은 부처님의 몸에 나타나 있던 32개의 Noble feature를 상징한다고 한다. Museum에 전시된 부분은 사자상을 중심으로한 윗부분만이고 Pillar는 여섯부분으로 부러져, 그여섯조각을 Sarnarth유적지에 잘 보관하고 있었다.
Ashoka Pilla위에 있었던 사자상을 비롯한 각종 동물들과 연꽃의 의미를 좀 알아야 부처님의 득도의 뜻이 무엇인지를 아는데 도움이 된다는 설명이다.
4마리의사자상 아래에 있는 사자와 말을 표시한 동물들 사이에 있는 또다른 Wheel에는 24개의 Spoke가 있다. 부처님 가르침의 중심사상 즉 24개의 Doctrine을 뜻하는 것이고, 사자상 바로 아래의 Abacus에는 4마리의 사자와 Horse를 비롯한 유용한 동물 4마리씩이 있다. 사이사이에 Wheel이 조각되여 있다. 그위의 4마리 사자상은 부처님께서 터득한 고귀한 진실을 의미한다고했다. 첫째 고통(Suffering), 둘째 고통의 원인( Cause of suffering, 셋째 버릴줄 아는 지혜 즉 Cession, 넷째 고상하게 헤쳐나갈수있는 길.
Dharmara Jika Stupa의 Base가 잘 나타나 있고 그주위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유적들과 Stupa들의 위치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자리를 옮겨 Mulgandha Kuti 기도원을 원래 모습 그대로 복원시킨 분의 동상과 기도원을 탐방했다. Ceylon출신의 Simon이 선물로 보내준 것이라는 내용이다.
비문에는 이기도원을 건축한 사람으로, 인도에 불교에 대한 포교에 개척자인 Anagarika Dharmapala를 기념하는 동상이 서있었으며, 그는 1864년 Ceylon, Colombo에서 태어나 1933년 이곳 Sarnath에서 생을 마감했었다는 설명문도 이채롭다.
당시의 부처님께서 좌를 틀고 대중들에게 첫 교리를 설파 했었다는 기도원의 원래 모습을 복제해서 현재 전시중에 있었다. 기도원 안에는 부처님의 좌상이 금빛으로 도금되여 앞쪽 Altar에 모셔져 있었다.
기도원안의 벽에는 부처님이 태어나서 생을 마감하기 까지의 전과정을 벽화로 그려놓은 그림이 원래 색갈 그대로 잘 보존되여 있었다. 부처님의 어머니가 꿈에 현몽하기를 힌코끼리가 나나났었다고 한다.
이벽화는 부처님께서 생을 마감했을 당시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죽음이지만 무척 평화로워 보인다. 해탈의 의미, 득도의 의미..... 나는 어쩌면 영원히 깨닫지 못할것이다.
기도원 밖에는 부처님이 다섯 제자들을 상대로 해탈과득도한 내용을 설파하고 있는 장면을 Statue로 만들어 쉽게 인식할수 있도록 했다.
동시에 부처님께서 설파하신 내용이 영어로 설명되여 있었는데, 한가지 놀란것은 이내용을 한글로 돌판에 새겨 그 오른쪽에 전시해 놓은것을 본 것이다. 한국분들이 이곳을 많이 찾는 것으로 이해됐다.
대한민국 비구 합장께서 아마도 이런 돌판을 새겨 인도에 선물함과 동시에 이곳을 방문하는 한국의 불교신도들뿐만 아니고 한국분들의 방문에 도움을 주기위해 세운것으로 이해됐다.
한 monk가 정성드려 제단에 올리는 촛불을 점등하고 있었다. 그옆에는 개가 호위(?)를 하고 있었다. 부처님은, 왕위직을 계승하면서 호위호식할수 있는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중생들의 삶과 다음세상을 위해 할일이 뭔가를 설파하시다가 만 80세에 열반 하셨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부처님의 삶에서 5가지의 특징을 볼수가 있었다. 첫째 좌를 틀고 앉은 자세로 Preachng, 둘째 Meditation정진, 셋째 마침내 깨달음 즉 Enlightment, 넷째 항상 방어하는 자세 즉 Protection, 다섯째 손을 절반쯤 들어 축복, 즉 Blessing을 하셨다고 한다.
인도에서, 이사원을 건설한 분의 염원이 의미하는것 처럼, 불교가 많이 포교되여, 구태에 젖어 꼼짝도 안하고 있는 인도사회를 정화하고, 나눔을 실천하는 사회로 변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슴속에 새기면서 기도원(Meditating Temple)앞에서 한컷했다. 인도는 변해야 한다.
몇년전 Nepal에 있는 Lumbini 탐방을 했을때, 인도에서 출생한 석가모니의 출생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왜 인도에서 이곳 먼곳인 Lumbini까지 와서 출생하게 됐을까?라는 의문을 떨치지 못했었다. 부처님의 유적지인 Sanarth 유적공원앞에는 처음보는 Hand Crafts들을 파는 상점이 눈에 띄어 한컷해 봤다.
Sanarth 유적공원은 부처님의 모든것에 대한 유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라고 한다. 우선 이곳 유적지는 수난을 많이 겪은, 그래서 많은 상처가 남아있는, 곳이라는 점이다. 옛날 Muslim이 득세 할때, 이곳을 전부 없앨려고 인위적으로 다 땅속에 묻어 버렸었다고 한다. 그런 상태로 6백년동안 지내오다가 1815년에 영국의 탐험가이자 육군 대령이었던 Shea McKenzie에 의해 발굴이 되기시작됐는데, 그는 고고학적인 면에서 전문가가 아니었기에 고고학적인 전문지식이 도입돼지 않은채 발굴을 하면서 부작용도 많이 발생했었다고 한다.
그후 20여년이 지난 1835년경에 유명한 고고학자가 영국에서 건너와 전문적으로 발굴을 고고학적인 측면에서 조심스럽게 하면서, 다른 고고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땅속에 묻혀있던 유적들을 발굴하여 지금 보는것 처럼 조성해 놓았다는 설명이다.
부처님이 처음으로 이곳에서 해탈한 내용을 대중들에게 설파한곳으로, 부처님을 기념하여 사후 약 300년 후에 Mauryan왕국의 왕 Ashokan이 Pillar을 세웠다고 전한다. 그래서 Ashokan Pillar 라는 이름이 부쳐졌다는 것이다. 불교는 Stupa없이는 설명이 안된다. Guide의 설명에 따르면, 4가지 형태의 Stupa가 있다고 했다. Commemorative, Relic, Votive(offering), Padrabhaumik 라고 한다.
Ashokan Pillar의 기둥은 높이가 15.25미터로 옛날 석기시대의 선돌을 본딴 기둥이었다고 한다.
Ashoka 왕은 (272-232 BC) Sand Stone을 이용하여 Pillar를 만들었고, 표면을 번질번질 Polish했다고 한다. 기둥의 밑부분은 직경이 71센티미터, 윗부분은 56센티미터로, 기둥의 맨위에는 4마리의 으르렁 거리는 사자상이 새겨져 있는데 자세히 보면 웃는 모습이라고 한다. 이런 모습이 Mauryan왕조시대의 건축물의 특징이며, 이사자상은 현재 인도의 국가적 상징으로 1950년 1월 26일에 지정되였으며, 특히 100 Rupee 지폐에 인용돼고 있다. 현재 원래의 4마리 사자상은 길건너에 있는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고 했다.
Pillar는 여섯조각으로 부러져 전시되고 있었다. Ashoka왕이 만든 3개의 경고문구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첫째는 Monks와 Nun들은 Sangha(불교에 정진하는 Monks, Nun들이 함께 생활하는 공동구역)에서 분쟁을 하지 말것, 두번째는 Kaushambi의 Kushana왕에 대한내용, 셋째는 초기의 Gupta Brahmi 경전에 대한 경전과 당시 선생들에 대한 언급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발굴된 유적은 현재는 대부분 그 Foundation만 남아 있는데, Lumbini에서 본것처럼, 전부 벽돌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이곳은 Mulagandha Kuti로 부처님에 득도후 좌를 틀고 기도에 정진한곳으로 알려져 있다. 부처님의 불상이 거의 다 좌를 틀고 있는 모습의 이유를 오늘 조금 터득하게 된 셈이다. 이곳이 부처님께서 기도에 정진한 기도원으로 더 확실하게 증명하는 기록이 있다. 중국출신의 스님 Hiuen-Tsang의 6년간의 연구와 기도후에 기록한 내용을 보면, 이기도원의 높이는 61미터였다고 한다. 마침 스리랑카 출신 Monk가 기도에 정진하고 있는 광경을 목격할수 있었다.
기도원벽의 두께는 이건축물의 무게를 충분히 지탱할수있는 규모였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기도원의 구조는 정사각형의 형태였으며 각면의 길이는 18.29미터였고 출입문은 동쪽을 향해 직사각형의 Mandaya 였었다. 또한 기도원의 앞에는 길게 만들어진 Court Yard가 있었다고 한다. 기도원 건물의 구조는 역시 벽돌로 쌓았으며, 시대적 배경으로는 Gupta왕조시대에 건축된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Guide 의 설명은 귀를 더 바짝 기울이게 해줬다. 부처님의 어머니가 임신하여 아이를 낳기위해 친정집으로 가던 도중에 Lumbini에서 부처를 해산하게 된다. 지금은 인도와 Nepal로 국경이 나뉘어 있지만, 그때 당시는 각지역의 토후들이 왕권을 잡고 통솔하던때라 그지역이 부처님의 아버지인 왕의 통치하에 있었을 때였다. 부처님이 세상에 태어나자 마자 7발짝의 걸음마를 했다는 것이다. 그때 갑자기 하늘에서 7개의 연꽃이 지상으로 내려와 부처님의 출생을 환영하고 그곳에서 자라게 됐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Hindu 혈통의 Prince로 태어난것이다. 득도하기전의 이름은 Siddharth Gautam 이었다.
부처님의 생애에 대해 설명을 해준다. 그는 Kalpilvastu 의 Sokyan혈통으로 당시 그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계급인 Worrior의 왕자로 태어나서, 해탈하기전까지는 Siddharth Gautam으로 불렸다. 아버지 Suddhodna는 현재의 Nepal 일부와 인도북부지역을 통치하는 왕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Siddharth는 기원전 563년에 Lumbini Garden(현재 Nepal의 Rummindei)에 있는 Sola Tree 밑에서 태어나 났는데, 그때 어머니 Mayadevi는 Siddharth를 낳기위해 그녀의 친정집이 있는 Devadoha로 가던 중이었었다고 한다.
Lunar와 Guide, Nihal이 서있는 이곳은 Monastery가 있었던 곳으로 당시에 수행중이던 Monks들이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부처님 교리터득에 정진했었다고 한다.
유적지내에서 가장큰 이 Stupa는 Dhamek Stupa로 주로 Memorial을 뜻한다고 했다. Ashoka왕은 이 Dhamek Stupa를 건축했는데, 이유는 부처님께서 이곳에서 처음 대중 Sermon 한것을 기념하기위해 건축한것인데 세월이 흘러가면서 후세사람들이 더 Expension해서 지금처럼 엄청나게 큰 Stupa가 됐다는 것이다.
마침 일요일인데도 현장 실습을 나온 이곳의 학생들이 우리 부부와 Encounter했는데 사진을 같이 한컷하자는 제안을 해와 그들과 함께 잠시 동심을 즐겼다. 이들이 지금의 상태처럼 잘 자라서 사회적 기둥이 되기를 속으로 염원해 주기도 했었다. 동행한 선생님이 더 좋아하셨다.
부처님, 또는 석가모니의 얼굴에는 32개의 Noble feature가 들어있어 힌두사람들은 부처님을 일컬어 그들이 믿는 9번째의 Vishnu신의 Incarnation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힌두사람들은 부처를 불교의 창시자로 공경하지 않고, 다만 그들이 믿는 Vishnu 환생의 하나일뿐이라는 것이다. 당시 부처님의 설법을 믿고 따르던 사람들은 인도에서 다른 아시안 나라들로 도망을 가서 그곳에서 불교를 전파하게 되는 반사포교를 하게된 계기가 됐다는 설명이다.
그리고 인도는 계속해서 Hindu 국가로 계속남아 현재에 이르고 있다는 Theary다.
입구의 왼쪽에 있는 전시관에서는 유적발굴자들에 대한 사진과 설명 그리고 유적당시의 상황을 한눈에 볼수 있는 조감도가 잘 표현되여 있었다. 처음 발굴당시의 Pillar의 맨 위에 있었던 4마리의 사자상의 모습도 보인다.
Monk들의 Memorial Stupa앞에서 기도정진하는 모습도 보여주고 있어 이해 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고, 사자상과 그위에 32개의 Spoke가 새겨진 Wheel은 부처님의 몸에 나타나 있던 32개의 Noble feature를 상징한다고 한다. Museum에 전시된 부분은 사자상을 중심으로한 윗부분만이고 Pillar는 여섯부분으로 부러져, 그여섯조각을 Sarnarth유적지에 잘 보관하고 있었다.
Ashoka Pilla위에 있었던 사자상을 비롯한 각종 동물들과 연꽃의 의미를 좀 알아야 부처님의 득도의 뜻이 무엇인지를 아는데 도움이 된다는 설명이다.
4마리의사자상 아래에 있는 사자와 말을 표시한 동물들 사이에 있는 또다른 Wheel에는 24개의 Spoke가 있다. 부처님 가르침의 중심사상 즉 24개의 Doctrine을 뜻하는 것이고, 사자상 바로 아래의 Abacus에는 4마리의 사자와 Horse를 비롯한 유용한 동물 4마리씩이 있다. 사이사이에 Wheel이 조각되여 있다. 그위의 4마리 사자상은 부처님께서 터득한 고귀한 진실을 의미한다고했다. 첫째 고통(Suffering), 둘째 고통의 원인( Cause of suffering, 셋째 버릴줄 아는 지혜 즉 Cession, 넷째 고상하게 헤쳐나갈수있는 길.
Dharmara Jika Stupa의 Base가 잘 나타나 있고 그주위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유적들과 Stupa들의 위치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자리를 옮겨 Mulgandha Kuti 기도원을 원래 모습 그대로 복원시킨 분의 동상과 기도원을 탐방했다. Ceylon출신의 Simon이 선물로 보내준 것이라는 내용이다.
비문에는 이기도원을 건축한 사람으로, 인도에 불교에 대한 포교에 개척자인 Anagarika Dharmapala를 기념하는 동상이 서있었으며, 그는 1864년 Ceylon, Colombo에서 태어나 1933년 이곳 Sarnath에서 생을 마감했었다는 설명문도 이채롭다.
당시의 부처님께서 좌를 틀고 대중들에게 첫 교리를 설파 했었다는 기도원의 원래 모습을 복제해서 현재 전시중에 있었다. 기도원 안에는 부처님의 좌상이 금빛으로 도금되여 앞쪽 Altar에 모셔져 있었다.
기도원안의 벽에는 부처님이 태어나서 생을 마감하기 까지의 전과정을 벽화로 그려놓은 그림이 원래 색갈 그대로 잘 보존되여 있었다. 부처님의 어머니가 꿈에 현몽하기를 힌코끼리가 나나났었다고 한다.
이벽화는 부처님께서 생을 마감했을 당시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죽음이지만 무척 평화로워 보인다. 해탈의 의미, 득도의 의미..... 나는 어쩌면 영원히 깨닫지 못할것이다.
기도원 밖에는 부처님이 다섯 제자들을 상대로 해탈과득도한 내용을 설파하고 있는 장면을 Statue로 만들어 쉽게 인식할수 있도록 했다.
동시에 부처님께서 설파하신 내용이 영어로 설명되여 있었는데, 한가지 놀란것은 이내용을 한글로 돌판에 새겨 그 오른쪽에 전시해 놓은것을 본 것이다. 한국분들이 이곳을 많이 찾는 것으로 이해됐다.
대한민국 비구 합장께서 아마도 이런 돌판을 새겨 인도에 선물함과 동시에 이곳을 방문하는 한국의 불교신도들뿐만 아니고 한국분들의 방문에 도움을 주기위해 세운것으로 이해됐다.
한 monk가 정성드려 제단에 올리는 촛불을 점등하고 있었다. 그옆에는 개가 호위(?)를 하고 있었다. 부처님은, 왕위직을 계승하면서 호위호식할수 있는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중생들의 삶과 다음세상을 위해 할일이 뭔가를 설파하시다가 만 80세에 열반 하셨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부처님의 삶에서 5가지의 특징을 볼수가 있었다. 첫째 좌를 틀고 앉은 자세로 Preachng, 둘째 Meditation정진, 셋째 마침내 깨달음 즉 Enlightment, 넷째 항상 방어하는 자세 즉 Protection, 다섯째 손을 절반쯤 들어 축복, 즉 Blessing을 하셨다고 한다.
인도에서, 이사원을 건설한 분의 염원이 의미하는것 처럼, 불교가 많이 포교되여, 구태에 젖어 꼼짝도 안하고 있는 인도사회를 정화하고, 나눔을 실천하는 사회로 변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슴속에 새기면서 기도원(Meditating Temple)앞에서 한컷했다. 인도는 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