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November 05, 2015

“신앙인,” “학자,” “국민"으로서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찬성하는 이유?, 적과대치하고 있는 한국의 실정에...

국정교과서 이슈로 온나라가 몸살을 앓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써야 할곳에 Energy를 사용하지 못하고 그냥 Burning 시켜 하늘만 시커멓게 뒤덮는것과 다름없는 안타까운 아수라장이 되가고 있다.

국가에서 추진하고 있는 국정교과서 정책이 천번, 만번, 역사를 제대로 지키는 길이라고 나는 굳게 믿는다. 다양성이라는 미명하에 검인정으로 한국역사교과서를 만들어 지금까지 약 15년 이상을 사용해본 결과, 호시탐탐 남한의 적화를 노리는 북측 정권이 유일한 한반도 정권이라는 인식을 학생들에게 심어주었기 때문에 더이상 방치해서는 안된다는, 국가의 존위를 걱정하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국정교과서 제도를 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국정교과서 제도를 앞으로 약 15년 실시해봐서 안되면 또 바꿀수 있다는 제도가 바로 민주주의 국가임을 대다수의 말없는 국민들은 공감할것이다.

지금 고개를 들어 지구촌을 들여다 보면, 먹느냐 먹히느냐의 처절한 생존싸움이 지구촌 도처에서 매일같이 일어나고있다.  최근에는 독일의 폭스바겐이,  몇년전에는 일본의 토요타 자동차가, 존립자체가 휘청거릴 정도로 여론몰이를 절묘하게 행사한 경쟁국가및 경쟁자동차 메이커의 모함에 걸려 고생한 일을 뚜렷히 기억하고 있다.

지금 한국은 한가롭게 이슈논쟁에 휩싸여 Energy를 그냥 소진할때가 아니다.  아래 두 column은 나처럼 두눈( Two eyes)이 정상인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어서 여기에 옮겨 실었다.

http://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3&mcate=M1003&nNewsNumb=20151118662&nidx=18663

http://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3&mcate=M1003&nNewsNumb=20151118680&nidx=18681

국사 교과서, 이렇게 북한 책을 베꼈다

역대 국사 교과서 모두 분석한 정경희 교수,

" 역사전쟁 아직 끝나지 않아"

국사 교과서의 국정화를 두고 여야 공방이 치열하다. 국사 교과서의 좌편향 문제가 불거진 것은 2002년 검정을 통과한 7차 교육과정의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부터다. 정경희 전 탐라대 교수는 2013년 10월, 역대 국사 교과서를 모두 분석해 검인정 교과서의 좌편향성을 조목조목 지적한 책을 펴낸 바 있다. 2014년 1월 <조선pub>은 정경희 교수 인터뷰 기사를 내보내 독자들의 큰 관심과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정 교수와의 인터뷰를 다시 게재한다.
글 | 이상흔 조선pub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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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학사가 편찬한 한국사 교과서.
교학사 발간 역사 교과서의 채택 문제를 두고 논쟁이 격렬하다.
현재 검정을 통과한 <한국사> 교과서는 모두 8종이다. 이 가운데 교학사의 교과서를 채택한 학교는 전무(全無)한 상황. 당초에는 전국 2300여개 학교 중 20여개 학교가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했었지만, 좌파 단체와 언론, 야권의 집요한 철회 압박에 굴복해 대부분 선택을 취소했다.
현재 고등학교에서 사용되고 있는 교과서는 2010년 검정(檢定)을 통과한 <한국사> 교과서다. 국사 교과서의 좌편향 논란이 불거진 것은 2002년 검정을 통과한 7차 교육과정의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부터다. 7차 교육과정에서 <한국 근·현대사> 과목이 신설되면서 국정(國定)과 검정이 뒤섞이게 되었다. 1학년 때 배우는 <국사> 교과서는 여전히 국정이었고, 2~3학년 때 선택하는 <한국 근·현대사> 과목이 검정 교과서였다.
7차 교육과정에 따라 2002년 검정에 통과한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는 모두 6종이었다. 이들 교과서는 대한민국 정부를 부정적으로 기술하고, 북한 정권을 감싸는 바람에 처음부터 ‘좌편향’ 논란에 휩싸였다. 이는 이후 수년간의 ‘교과서 파동’으로 이어졌다. 이후 <한국 근·현대사>의 편향성을 바로잡기 위해 교육과정이 개정되면서 문제가 된 <한국 근·현대사> 과목은 폐지되었다. 그후 또 한 차례 개정이 이루어진 결과, <국사> 교과는 <한국사>로 명칭이 바뀌고 국정 체제에서 검정으로 바뀌었다.
검정 <한국사> 교과서가 처음 등장한 것은 2010년이다. 그런데 이 해 처음으로 검정을 통과한 <한국사> 교과서 6종도 편향되기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와 별 차이가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편향성을 바로잡기 위해 작년에 <한국사> 교과서가 새로 만들어졌고, 그 가운데 교학사 교과서를 포함한 8종이 검정을 통과했다.
국사 교과서가 왜 이념논쟁의 최전선에 서게 되었나?
교학사 교과서는 작년 5월 30일 1차 검정을 통과하자마자 좌파세력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다. 아직 그 내용도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좌파세력은 교학사 교과서가 ‘유관순은 깡패’ ‘김구-안중근은 테러리스트’라고 표현했다는 글을 SNS 등을 통해 전파하면서 교학사 교과서에 ‘친일(親日)’이라는 딱지를 붙이려고 그야말로 ‘기’를 썼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가르쳐야 하는 국사 교과서가 좌편향 논란에 휩싸인 것 자체가 사실은 ‘비정상’이다. 이 ‘비정상’을 정상화하겠다고 펴낸 교학사 교과서는 단 한 곳의 학교에서도 채택되지 못했다. 나라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단결의 구심점에 서 있어야 할 국사 교과서가 왜 이념 논쟁의 최전선에 서게 되었을까? 
역사 교과서를 두고 벌어지는 ‘이런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역대 대한민국 국사 교과서를 모두 분석한 학자가 있다. 바로 정경희(丁慶姬) 전 탐라대 교수이다. 정경희 교수는 지난 2년간, 1차 국사 교과서부터 현재의 한국사 교과서에 이르는 역대 국사 교과서의 내용을 모두 분석해서 그 결과를 작년 10월에 <한국사 교과서 어떻게 편향되었나>라는 책으로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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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희 교수는 지난 2년간, 1차 국사 교과서부터 현재의 한국사 교과서에 이르는 역대 국사 교과서의 내용을 모두 분석해서 그 결과를 작년 10월에 <한국사 교과서 어떻게 편향되었나>라는 책으로 펴냈다. 

정 교수는 국사 전공자가 아니다. 서울대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서양사학과에서 석ㆍ박사학위를 받은 정교수는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처음에 국사에 대해 잘 몰랐으니까 이 일을 시작했다”며 “이렇게 힘든 일인 줄 알았다면 절대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저도 교과서를 분석하기 전까지는 우리 국사 교과서가 이 정도로 심각한 상태인지 몰랐습니다. 직접 교과서를 보지 않았으면 저도 믿지 못했을 겁니다. 한마디로 우리 아이들이 십여 년 전부터 이런 교과서로 공부했다는 것이 정말 큰 충격이었습니다.
이건 대한민국의 국사 교과서라고 하기에는 사관(史觀), 용어, 기술방식 등에서 북한의 역사책과 너무도 유사한 부분이 많은 교과서입니다. 그동안 우리나라의 국사학자들이 이런 상황을 어떻게 그냥 지켜보고 있었는지 정말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사실을 알고 나니 저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더군요.”
민중사학의 등장
먼저 정경희 교수로부터 국사 교과서의 편향성을 분석하게 된 계기에 대해 들어보았다.
“러시아 대사를 지내신 이인호 교수(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 서울대 명예교수)께서 일찍부터 국사 교과서 좌편향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으시고, 깊이 우려하고 계시다가 저에게 이 문제를 연구해보지 않겠느냐고 하셨어요. 그때부터 저는 국사 교과서를 1950년대 것부터 모두 구해다 놓고 분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건국 이후의 국사 교과서를 죄다 분석해보니 국정체제이던 6차 교육과정까지는 그렇게까지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7차 교육과정이 시작되면서 모든 분란이 시작됩니다. 7차에서 이전에는 크게 다루지 않던 근·현대사 부분이 국사에서 분리되면서 검정으로 바뀌었습니다.
왜 갑자기 <한국 근·현대사> 과목이 신설되었는지, 그리고 누가 국사 교과서를 국정에서 검정으로 바꾸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정 교수는 “10년 가까이 일선 고등학교에서 사용된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6종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좌편향이 심각한 상태”였다고 말한다.
“6종 모두 편향된 교과서였는데, 그 중에서도 금성교과서는 극도의 편향성을 드러냈습니다. 금성교과서는 1987년 이전의 모든 정권을 ‘독재’라고 비판하면서 북한의 독재체제에 대해서는 전혀 아무런 비판도 하지 않습니다.
예를들면, 남한에 대해서는 ‘이승만 독재’, ‘박정희 독재’, ‘40년 독재’ 등 13번이나 독재라는 표현을 쓰면서 북한의 김일성-김정일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독재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6·25를 의도적으로 왜곡해서 북한의 남침 책임을 희석시키고, 대한민국의 성공과 성취는 부정하면서도 북한에 대해서는 매우 우호적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정경희 교수는 “교과서가 극도의 편향성을 띠게 된 것은 198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한 ‘민중사학’의 관점에서 쓰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민중사학은 북한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가 남한에 유입되면서 대두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일종입니다. 즉 마르크스-레닌의 사적유물론(史的唯物論)에 바탕을 둔 북한의 역사학과 남한의 폐쇄적 민족주의 사학이 접목되어 생겨난 것이지요. 따라서 민중사학은 한국의 근·현대사를 기본적으로 반봉건의 근대화와 반제국주의 항쟁의 과정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현대사의 주류 학풍으로 자리잡은 민중사학
정 교수는 “민중사학은 ‘역사발전의 주체가 민중’이라는 명제에서 출발하는 역사관”이라며 “한마디로 민중이 주체가 되고, 주인이 되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변혁을 모색하는 게 그 주요 목표”라고 설명했다.
“민중사학은 대한민국을 여전히 제국주의 미국의 식민지라고 인식하고 있으며, 우리의 근·현대사를 지배계급과 기층 민중의 대립구도로 파악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역사관의 한 형태입니다. 실례로 ‘일제시대’를 북한식 용어인 ‘일제강점기’라는 말로 바꾼 것도 바로 이들 민중사학자입니다.
이는 북한이 광복 이전과 이후의 남한의 역사를 각각 ‘일제강점기’, ‘미제강점기’로 구분하는 것과 일치합니다. ‘일제강점기’는 ‘미제강점기’와 짝을 이루는 북한식 용어인데 민중사학자들이 이 용어를 선택했다는 것은 북한의 역사 해석에 동조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 교수에 따르면 1980년대 중후반에 오면서 진보좌파 성향의 소장학자들은 본격적으로 역사단체를 세워 이를 기반으로 조직적인 학술운동을 전개했다.
역사문제연구소(1986), 한국역사연구회(1988), 구로역사연구소(현 역사학연구소, 1988) 등이 바로 이 때 결성된 민중사학 연구단체이다. 이렇게 해서 1980년대 말 역사학계는 강단(講壇)사학과 반체제적인 재야(在野) 연구소로 양분되었다.
정 교수는 “민중사학이 민주화 분위기와 맞물리면서 1980년대 후반 현대사 연구의 주류(主流) 학풍으로 자리 잡아가는 동안 주류 역사학계는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들 민중사학자는 1980년대 말 민중사학 연구단체를 설립하고 나서 두 가지 일을 본격적으로 실행에 옮겼습니다. 첫째는 교과서의 국정제를 집중적으로 비판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국정 교과서를 대치할 대중용 국사 교과서를 발간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보는 우리역사><교실 밖 국사여행> 등의 민중사학 서적이 이렇게 해서 탄생했습니다. 동시에 이들은 역사교사, 대학생, 시민 등을 대상으로 한국사와 사회주의 운동사 등을 강의하는 대중교육을 통해 민중사학의 전파에 나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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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 7일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했던 전주 상산고등학교 교내에 이를 반대하는 학생들의 대자보가 붙어 있다. 대자보에는 "적어도 학교에서는 '사실'과 '정확'의 객관적인 역사가 학습되어야 하는 바, '왜곡'과 '거짓'의 주관적인 역사 교과서인 교학사 교과서의 철회를 요구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조선DB
민중사학자, 교과서 준거안 파동을 부르다
1990년 5차 국사 교과서 개편을 앞두고 민중사학자들은 ‘국정 국사 교과서가 정권의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고 홍보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반공 이데올로기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게 한다’며 집중적으로 비판했다. 이들은 또한 ‘국사교육의 문제점을 해결할 방안이 국정제 폐지’라고 주장했다.
당시 문교부의 국사 교과서 편찬을 담당했던 윤종영 편수관은 “요사이 우리 학계의 소장학자 가운데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일부 학자들은 극히 편향적인 계급 사관의 입장에서 우리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며 “만약 이러한 입장에서 교과서를 집필하고 이것이 중등학교 교재가 된다면 앞으로 우리 역사 교육에 많은 문제를 가져올 수 있다”고 예측하며 민중사학자들의 국정제 폐지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윤종용 편수관의 예측은 훗날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7차 교육과정의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좌편향 문제가 불거지면서 2002년부터 교과서 파동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7차 교육과정 개편 전까지는 국사 교과서에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제한적이긴 하지만 민중사학이 1990년에 발행된 제5차 국사 교과서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는 그동안 좌파진영이 제기해 왔던 비판이 국사 교육에 수용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1987년 6월에 5차 교육과정에 따른 국사 교과서 개편을 위해 준거안이 작성되었는데, 이 준거안에 일제시기를 ‘일제강점기’로 서술하라는 내용이 처음으로 들어갑니다.
‘일제강점기’라는 용어는, 앞서도 설명했듯이, 북한의 역사서인 <조선통사>에 나오는 것으로 북한이 만들어낸 용어입니다. 즉 일부 북한 자료에 대한 공식적 해금조치가 이루어진 1988년 7월보다 1년 이상 앞서서 국사 교과서에서 북한 용어를 쓰도록 한 셈입니다. 또한 ‘광복 이후 북한의 역사 변천에 대하여 민족사적 차원에서 필요한 내용을 설명한다’고 하면서 국사 교과서에서 처음으로 북한의 역사를 서술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5차 국사 교과서가 준거안대로 집필되었습니까.
“5차 교과서에서는 아직 ‘일제강점기’라는 용어가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일제 통치시기 무장독립운동과 사회주의 계열의 무장독립운동, 북한의 역사 등이 새롭게 서술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1987년 6월의 민주항쟁으로 인한 민주화 추세와 민중사학의 대두가 맞물리면서 민중사학이 처음으로 교과서에 반영된 것입니다. 문제는 6차 교육과정에 따른 국사 교과서를 준비하면서 일어났습니다.
1994년에 6차 교과서 준거안 시안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이른바 ‘준거안 파동’이 일어났는데, 당시 문제가 된 준거안 시안의 현대사 부분은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가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서 교수는 준거안 시안에서 ‘대구폭동’을 ‘10월 항쟁’으로, ‘제주 4·3 사건’을 ‘제주 4·3 항쟁’으로 기술하자고 주장했는데, 이것이 알려지면서 여론의 격렬한 반대와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것이지요.”
당시 서 교수가 준거안 시안에서 제시한 근·현대사 용어는 민중사관에 바탕을 둔 것으로, 재야세력의 역사 재조명 작업 가운데 하나로 나온 것이었다고 한다. 
“당시에 일부 보수우파 학자들은 준거안의 현대사 부분 기술 내용이 ‘편협한 민중사관에 입각한 것’이라거나, ‘혁명투사를 양산하는 데 적합하다’는 혹평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6차 준거안 시안이 좌익운동사와 북한의 주체사상을 다루도록 했다는 사실이 보도되면서 여론의 반대가 빗발쳤습니다. 파장이 커지자 교육부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 종래의 정통적 견해를 대폭 수용하는 최종 준거안을 마련하겠다고 했고, 이를 1994년 11월 발표했습니다.”
 "북한의 독재는 북한의 입장에서 이해해야"

정 교수는 “서중석 교수의 6차 준거안 시안은 보도된 내용보다 더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먼저 ‘신탁통치’ 부분입니다. 1차부터 5차 교과서는 신탁통치에 대해 ‘우리 민족’ 또는 ‘온 국민’이 ‘반탁운동’을 벌였다고 쓰여 있지만, 서 교수의 준거안 시안은 ‘우익’의 반탁운동을 서술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한 ‘공산주의자들’이 ‘찬탁’ 운동을 한 것이 아니라 ‘좌익’이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지지운동’을 한 것으로 서술하도록 했습니다.
이는 ‘공산주의자’라는 용어와 ‘찬탁’이라는 용어 자체를 교과서에서 빼려고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찬탁’이라는 용어를 빼버림으로써 해방 공간에서 찬탁운동을 하는 바람에 정국의 주도권을 상실했던 공산주의자들의 뼈아픈 과거를 국사 교과서에서 지워버리려는 노력의 일환이죠.
두 번째는 6·25전쟁에 관한 기술입니다. 6·25전쟁의 원인을 ‘남침’으로 기술하고 있는 5차 교과서와 달리 서 교수는 ‘북한이 전쟁을 일으킨 배경과 전쟁의 추이를 설명한다’라고 시안에 쓰고 있습니다. 이는 6·25 발발 원인을 북의 남침이 아니라 내전설(內戰說)의 입장에서 보는 것으로, 38선 부근에서 남북이 지속적인 물리적 충돌을 하다가 전쟁으로 번졌다는 수정주의 입장입니다.
‘북한의 남침’이라는 기본적인 역사적 사실과 상식을 깨는 서술을 새 교과서에 넣으려고 했던 것이지요. 또한 그는 6·25전쟁의 명칭을 ‘한국전쟁’으로 바꾸려 했습니다. ‘한국전쟁’이라는 용어에는 6월 25일에 북한이 남침했다는 것을 상징하는 숫자가 없을 뿐 아니라, 6·25가 국제적 냉전의 산물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6·25전쟁이 북의 남침에 의해 발발했다는 것을 희석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세 번째로 북한에 대한 서술입니다. 5차 교과서에는 ‘김일성 독재체제가 더욱 강화되어 그의 유일 지배체제가 구축되었으며, 김정일에게 세습시키려는 노력을 계속한다’고 되어 있지만, 이와 달리 서 교수는 ‘세습’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김일성 독재체제’ 대신에 ‘수령유일체제’로 기술하도록 했습니다. 더구나 수령 유일체제가 ‘북한 특유의 독재체제’라는 설명까지 덧붙였는데, 이는 북한에 대한 이른바 ‘내재적 접근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는 서중석 교수의 준거안 시안이 6차 교과서에 반영되었습니까.
“몇몇 항목을 제외하고는 용어 및 역사 해석에서 서중석 교수의 시안이 상당 부분 반영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준거안을 토대로 서술된 6차 국정 교과서는 상당 부분 진보좌파의 역사 해석을 수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국정 교과서였기 때문에 민중사학이 일부 기술 외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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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1월 19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금성출판사 앞에서 뉴라이트학부모 연합을 비롯한 시민단체회원들이 역사 왜곡 교과서 출판 중단 요구 집회를 열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04년 부터 학교에서 사용된 7차 교과서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북한을 감싸는 극심한 좌편향성으로 인해 결국 교과서파동을 불러왔다. 이를 시정하겠다며 만든 현행 6종 교과서도 좌편향이 거의 시정되지 않았다./ 조선DB
좌편향이 폭발한 7차 교육과정의 국사 교과서
1994년에 준거안 파동을 불러온 서중석은 좌파 성향의 학자로 분류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가 이사장으로 있는 역사문제연구소는 서울시장인 박원순이 광복 후 남로당을 이끌었던 박헌영의 사생아인 원경이라는 승려와 함께 설립한 연구소로 알려져 있다.
역사문제연구소는 표면적으로는 민족주의 사학을 표방하고 있으나 실제 활동을 보면 사회주의 시각으로 역사를 재조명하는 학술 및 대중 활동을 병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강정구 전 동국대 교수, 박원순 서울시장 등의 인물이 활동했거나 현재도 활동 중이다.
-본격적인 좌편향 교과서라는 7차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는 어떻게 생겨난 것입니까.
“7차 교육과정의 가장 큰 변화는 기존의 <국사> 과목을 그대로 두고 심화선택 과목으로 <한국 근·현대사>를 신설하여 분리시켰다는 것입니다. 표면적인 이유는 근현대사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커졌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실제적 배경은 아직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저는 분명히 누군가의 ‘불순한 의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근·현대사> 과목은 검정과정부터 논란이 되더니 2004년부터는 교과서를 둘러싼 기나긴 분란으로 비화해서 이른바 교과서 파동이 일어났습니다.”
-7차 국사 교과서 집필을 위한 준거안도 역시 마련됐겠네요.
“그렇습니다. 문제는 7차 준거안이 서중석 교수의 6차 준거안 시안을 거의 그대로 수용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7차 준거안은 신탁통치에 대한 기술을 ‘우익의 반탁 운동’과 ‘좌익의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지지 운동’이라고 표현했습니다.
6차 교과서까지의 ‘공산주의’, 5차 교과서까지의 ‘찬탁’이란 용어 자체를 없애버린 것입니다. 또한 남한에 대해서는 ‘단정(單政)노선’(단독정부노선), ‘남한 단독선거’ 등의 표현을 서슴지 않으면서 북한 정권에 대해서는 5차 교과서까지 들어있던 ‘단독’이라는 단어를 뺐습니다.”
-7차 교과서의 준거안 작성자들은 누구입니까.
“모두 9명의 연구진이 참여했지만 근·현대사 부분은 방기중 교수와 박찬승 교수가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방기중 교수는 내재적 발전론의 선구자인 김용섭 전 연세대 교수의 제자로, 역사문제연구소 소장으로도 활동했습니다. 박찬승 교수도 현재 한국역사연구회와 역사문제연구소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5차부터 7차에 이르는 준거안의 근·현대사 부분 작성자 네 사람이 모두 역사문제연구소와 연관되어 있는 셈입니다.”
-7차 교육과정의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의 편향성은 어느 정도입니까.
“한마디로 민중사학이라는 좌편향 역사학이 ‘폭발적’으로 드러난 교과서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금성교과서가 극도의 편향성을 보였습니다. 금성교과서는 친북·반미 서술로 일관하면서 대한민국의 정통성마저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과서 파동이 시작되었고, 편향성을 바로잡는 차원에서 <한국사> 교과서가 생겨난 것입니다. 편향되기는 마찬가지였지만요.”
정 교수는 “금성교과서 극도의 편향성은 아무래도 집필진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집필자 여섯 명 가운데 세 명이 교수인데 그 가운데 두 명은 민중사학을 표방하는 단체 가운데서도 가장 급진좌파 성향을 보이는 구로역사연구소(현 역사학연구소)의 소장을 지냈고, 다른 한 명은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을 지냈습니다. 세 명의 교사 중 한 명은 전교조의 연계단체인 전역모 소속입니다.”
북한군의 잔악행위는 누락, 민간인 희생은 '학살'로 부각
2010년부터 검정을 통과해 2011년부터 교재로 사용되고 있는 현행 6종의 <한국사> 교과서는 상황이 어떻습니까.
“7차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보다 일부 개선된 것처럼 느껴지지만 편향성이 더 심해진 부분도 있습니다. 6·25전쟁에 대한 서술이 그렇습니다. 6·25 때 북한이 저지른 ‘인민재판’이라는 용어를 명시한 교과서는 단 2종뿐입니다. 6종 가운데 ‘납북’에 대해 제대로 다루고 있는 교과서는 단 하나뿐입니다.
현행 6종의 <한국사> 교과서 가운데 일부는 인민재판이나 납북 같이 대한민국의 전쟁 피해를 나타내는 용어의 사용을 회피하고, 대신 누가 가해자이며 피해자인지 알 수 없는 용어인 ‘학살’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남한이 전쟁피해자라는 사실을 희석시키고 있습니다.”
이들 교과서 가운데 일부는 6·25전쟁의 민간인 희생에 대해 서술하면서 ‘민간인 학살’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북한과 중공군에 의한 대한민국 국민의 학살행위는 제대로 다루지 않으면서 국군과 미군에 의해 야기되었다는 이른바 ‘거창 사건’이나 ‘노근리 사건’만을 특별히 설명하는 것은 지극히 편파적인 기술이라는 것이 정 교수의 설명이다.
“미래엔 교과서가 우리 측에 의해 ‘많은 양민이 학살되었다’고 기술한 이른바 ‘신천학살’은 미군이 저지른 만행이라며 북한이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사건입니다. 하지만 사실 신천학살은 미군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신천 지역의 기독교도들과 공산주의자 간의 대립, 즉 좌익과 우익의 상호투쟁 과정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그러면서도 미래엔 교과서는 북한이 남한 우익인사들을 대상으로 저지른 학살에 대해서는 결코 ‘학살’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북한 측은 점령한 남한 지역에서 인민재판을 행했고’라는 단 한 구절이 6·25전쟁에서 북한이 행한 학살행위를 다룬 전부입니다.”
정 교수는 “편향성이 심한 7차 <한국 근·현대사>와 현행 <국사> 교과서의 필진을 분석해보니 대부분이 민족문제연구소, 역사문제연구소, 한국제노사이드연구회, 구로역사연구소(현 역사학연구소), 한국역사연구회, 전교조(전역모) 출신들로 구성되어 있다”며 “국정인 6차 교과서까지만 해도 이런 민중사학 관련단체에 소속된 집필자는 없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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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희 교수는 역대 교과서 서술내용의 변화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히트맵(Heatmap)으로 구성했다. 붉은 색 계통의 색이 많을 수록 교과서의 서술방향이나 용어가 북한의 역사책(조선통사와 현대조선력사)과 비슷하거나 같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만큼 좌편향 되었음을 나타낸다. 이 분석표는 7차 검정 국사 교과서로 넘어오면서 6종의 교과서가 갑자기 극도로 좌편향 되었음을 알려준다. /정경희 교수 제공
현행 국사 교과서 중에서는 삼화출판사가 가장 좌편향
정경희 교수는 그동안 분석한 역대 교과서 서술내용의 변화를 사람들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히트맵(Heatmap)으로 구성했다. 즉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 주제인 ‘동학농민운동’부터 ‘김정일의 권력승계’에 이르는 한국사의 주요 항목 총 25개에 대한 역대 교과서의 서술 내용을 해석해 그 이념 성향의 변화를 히트맵이라는 통계방법을 통해서 한 장의 표로 만든 것이다.
해석의 기준이 된 책은 이기백의 <한국사신론>, 북한의 역사서인 <조선통사>와 <현대조선력사>였다. <조선통사>와 <현대조선력사>의 서술내용은 극좌파 성향을 띠고 있으므로 -5로 해석(수치화)하고, <한국사신론>의 내용은 중도우파 성향을 띠고 있어 +3으로 해석했다. 색깔은 -5로 갈수록 붉은색을, +5로 갈수록 푸른색을 나타낸다. 
이렇게 하면 교과서의 서술 내용이 북한의 역사책과 유사할수록 -5에 가까운 숫자를 얻게 되어 해당 교과서의 해당 항목은 붉은색을 띠게 되며, <한국사신론>과 서술 내용이 유사할수록 +3에 가까운 숫자를 얻게 되어 해당 항목은 푸른색을 띠게 된다.
종합된 결과를 보면, 6차 국사 교과서까지는 거의 푸른색 일색이었으나, 7차 <한국 근·현대사>와 현행 <국사> 교과서는 푸른색을 찾아보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그만큼 우리 학생들이 배우는 국사 책이 북한의 역사책과 매우 유사하다는 이야기다.
“이 분석으로 알 수 있는 것은 7차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6종이 나오면서 국사 교과서의 급작스러운 좌편향 서술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그동안 누적된 국사학계 일각의 좌편향 성향이 한꺼번에 분출했기 때문입니다.
이 표를 통해서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가운데 금성교과서가 가장 좌편향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의 좌편향을 바로 잡겠다는 목적에서 만든 현행 <한국사> 교과서 6종도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사실도 보여줍니다. 현행 <한국사> 교과서 중에서는 삼화출판사 교과서가 가장 좌편향 되어 있습니다.”
북한 역사서 <조선통사>를 베낀 '포고문' 편집
월간조선은 2004년에 7차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의 편향성을 보도하면서 “검정을 통과한 6종의 교과서가 김일성이 주도했다는 보천보 전투를 다루면서도 이승만 대통령의 젊은 시절 독립운동 사진을 게재한 교과서는 단 한 곳도 없다”는 것을 지적한 바 있다.
하지만 실제 보천보 전투에 김일성이 참가했는지 여부는 논란이 있는데다가, 보천보 전투는 면 단위의 작은 지서를 습격한 사건으로 독립투쟁사에서 그 위치가 미미한 사건이다. 당시 김일성은 중국 공산당의 지도 아래 만들어진 동북항일연군에 소속돼 있었는데 이름만 부대였지 주로 만주에서 마적질로 연명하는 수준이었다. 당시 보천보 지서 습격도 마적질의 하나로 행해졌다는 증언이 많다. 이런 하잘것없는 전투까지 교과서에서 다루면서 정작 평생을 독립운동에 몸바친 이승만의 노력은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정경희 교수는 금성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에 ‘남북에 들어온 미군과 소련군’이라는 제목 아래 실린 미군과 소련군 사령관의 포고령과 포고문을 보여주었다.
미군 사령관 맥아더의 포고령은 “(제1조) 북위 38도선 이남의 조선 영토와 조선 인민에 대한 통치의 모든 권한은 당분간 본관의 권한 하에 시행한다”로 시작한다. 반면 소련군 사령관 치스차코프의 포고문은 “……조선인민들이여! 기억하라! 행복은 여러분들 수중에 있다. 여러분들은 자유와 독립을 찾았다”로 시작하고 있었다.
“이걸 보세요. 미군의 포고령은 구체적인 방침이 담긴 딱딱한 법령이고, 소련군의 포고문은 추상적인 원칙을 나열하고 있는 문건인데, 그걸 나란히 실어놓고 비교하라는 과제를 내주고 있어요. 저는 이 서술을 보면서 ‘금성교과서 필자들이 미군은 점령군이고 소련군은 해방군이라는 인식을 학생들한테 전달하기 위해서 참 연구 많이 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북한의 역사서 <조선통사> 하권을 보니까 치스차코프의 포고문과 맥아더의 포고령이 순서만 바뀌었을 뿐 나란히 실려 있더군요. 그리고 이 두 문건을 근거로 소련군은 해방군이고 미군은 점령군이라고 강변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나라 역사 교과서의 현실입니다. 역사용어나 해석뿐 아니라 서술방식까지도 북한 역사책과 닮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교육부가 가장 영혼없는 관료집단. 교과서 문제에 관심 자체가 없어"
-이번에 나온 교학사 교과서는 보셨습니까.
“검정을 통과한 지 얼마 후에 검정본을 보았습니다. 교학사 교과서는 한국 현대사를 우리 대한민국의 시각에서 제대로 쓴 최초의 교과서일 겁니다. 좌파들은 교학사 교과서가 1차 검정을 통과하자마자 책을 읽지도 않고 각종 거짓말과 유언비어로 대중을 선동해서 이 교과서를 친일 교과서로 몰아붙였습니다.
저들의 말대로 이 교과서에 일제시기를 미화하는 내용이 있다면 어떻게 검정을 통과했겠습니까. 저들은 이 교과서가 교육부로부터 수정 명령을 받은 부실한 교과서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교육부로부터 수정 명령을 받은 것은 교학사 교과서만이 아닙니다. 나머지 7종 가운데 6종도 수정 명령을 받았으니까요. 원래 교과서는, 국정이든 검정이든, 일단 만들어진 뒤에도 해마다 계속해서 수정·보완하는 것이 관례입니다.
좌파들이 교학사 교과서를 그토록 집요하게 공격한 것은 자신들의 독무대인 국사교육 현장에 대한민국의 역사를 긍정적으로 서술한 교과서가 진입하는 것을 막으려는 수작이죠. 교학사 교과서가 채택되어 현장에서 사용되게 되면 자신들의 교과서가 얼마나 좌편향 된 것인지 확연히 드러나게 될 테니까요.”
-7차 교육과정부터 교과서가 그렇게 편향되었다면 교육부가 왜 그런 책을 그냥 두고 보는 걸까요?
“한동안 ‘영혼이 없는 관료’라는 말이 유행했었죠. 정부 관료 중에 가장 영혼이 없는 관료가 교육부 관료라는 말이 있습니다. 교과서 문제에 관심 자체가 없을 뿐 아니라 아무도 책임질 일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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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14일 서울 세종로 정부 서울청사에서 열린 교육부 국정감사에서 민주당 등 야당 의원들이 개인 노트북 덮개에 ‘친일·독재 미화하는 교학사 교과서 검정 취소’라는 문구를 써 붙였다. 미국에서도 역사표준서 논쟁이 있었지만, 국회의원들이 앞장서서 역사표준서가 '반 국가적'이라며 채택해서는 안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킨 바 있다. 우리는 이와 정반대로 대한민국 입장에서 쓰여진 교과서를 국회의원들이 나서서 배척하는 실정이다. / 조선DB
-미국에서도 비슷한 논쟁이 있었다면서요.
“미국에서도 1994~1995년에 역사표준서 논쟁이 있었어요. 학생들의 역사교육 수준을 향상시키겠다는 목적으로 거액을 들여 역사표준서를 개발한 거죠. 그런데 막상 개발된 역사표준서 열어보니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이름도 나오지 않을 만큼 미국의 건국을 폄하하면서 인디언 학살과 흑인노예제의 잔혹성만을 강조하는 좌파 성향의 책이었어요.
이 역사표준서를 둘러싸고 이념 논쟁이 격화되면서 미국사회가 시끄러우니까 마침내는 미국 상원이 나섰습니다. 상원은 논의 끝에 이 역사표준서가 반(反)국가적이므로 전국적인 표준서로 채택해서는 안 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습니다. 당시 상원은 공화당 소속이 52명, 민주당 소속이 48명이었는데, 역사표준서의 내용이 반(反)국가적이라는 게 알려지자 모든 상원의원이 정치적 이념이나 성향을 떠나 초당적(超黨的)으로 대응했습니다. 그래서 99 대 1이라는 압도적 표 차이로 결의안을 통과시켰던 것이지요.”
정 교수는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정반대 현상이 나타났다”며 “일부 야당의원은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하자마자 교학사 교과서를 공격하는 선봉에 섰다”고 말했다.
“그들은 교과서 내용이 공개되기도 전에 이 교과서가 ‘김구 선생과 안중근 의사를 테러활동을 한 사람으로 표현했다’거나 ‘5·18을 폭동으로 규정했다’고 말하는 등 거짓 선동에 앞장섰고, ‘이 교과서로 공부하면 수능에서 절반은 틀린다’며 터무니없는 정치 공세를 펴기도 했습니다. 갈등을 조정해야 할 정치인이 오히려 갈등을 증폭시키는 데 앞장선 것이죠. 심지어 한 야당의원은 교학사 교과서 필자에 대한 표적사찰까지 시행했습니다. 몇몇 정치인이 자신들의 저급한 수준과 자질을 스스로 드러내는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나라 정통성을 가르치는 게 국사"
-교학사 교과서가 우편향이라는 지적에 대해서는.
“얼마 전 조선일보 김대중 고문은 <2352 0="">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당위성을 긍정적으로 보고 대한민국의 성공과 북한의 실패를 적시한 교학사 교과서는 결코 우편향이거나 중도가 아니라 ‘정도(正道)’라고 했는데, 이는 정확한 지적입니다.
나머지 7종 <한국사> 교과서의 대부분은 대한민국의 건국과 발전은 폄하하면서 북한정권은 감싸고도는 좌파교과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들 교과서의 필자들 대부분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서술을 비롯한 좌편향 서술을 시정하라’는 교육부의 명령에 대해서 끝까지 고치지 않겠다고 저항했다는 사실이 이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국사는 자기 나라의 정통성을 가르치는 과목입니다. 대한민국에 정통성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국사 교과서로 학생들을 가르치느니 차라리 가르치지 않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김대중 고문은 제대로 된 현대사 하나 후손에게 가르치지 못하고 있는 우리는 훗날 큰 벌을 받을 것이라고 자탄(自歎)했는데, 이는 정말 가슴에 와 닿는 말입니다.”

國史 교과서의 좌편향 문제를 제일 처음 제기한 월간조선 
국사 교과서의 좌편향 문제는 <월간조선>이 가장 먼저 제기했다. <월간조선>은 2004년 4월호의 ‘고교 국사(國史) 교과서의 대한민국 때리고 김일성 부자(父子) 감싸기’(배진영)라는 기사를 통해 당시 고등학교에서 채택한 6종의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가 시종일관 북한정권을 감싸고, 한국의 역대정부를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좌파적 관점에서 써졌다고 고발했다.
<월간조선>이 교과서 문제를 기사화한 2004년은 고등학교 2~3학년 학생들이 2002년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로 <한국 근·현대사> 과목을 처음 배우는 해였다.
기사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해 10월 한나라당의 권철현 의원은 “고교 2ㆍ3학년의 선택과목인 <한국 근·현대사>의 일부 교과서가 광복 이후 남한 역사를 반미(反美), 친북(親北), 반(反)재벌 시각으로 일관되게 기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권 의원이 문제를 제기한 교과서는 당시 과반수 학교에서 채택하고 있던 금성출판사의 교과서였다. 금성교과서 집필자들은 권 의원의 주장을 색깔 논쟁으로 몰고 갔다.
이런 논란 끝에 다음해인 2005년 1월 편향된 교과서를 비판하는 지식인 모임인 ‘교과서포럼’이 창립되었다. 교과서포럼은 창립 행사에서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에 대한 각 분야 전문가들의 분석 결과를 발표했다. 교과서포럼은 “우리 젊은이들이 <한국 근·현대사>라는 검인정 교과서를 매개로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공적인 교육을 통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나라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도록 키워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2008년 9월 교과서포럼, 자유교육연합 등 여러 보수우파 단체들은 교육과학기술부에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수정을 건의했다. 교과부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저해하는 내용이 교과서에 담겨서는 안 된다’는 수정 권고안을 발표하고, 교과서의 수정을 명했지만, 집필진들은 이를 거부하며 정부와 출판사를 상대로 소송 전을 벌였다.
2011년 8월 서울 고등법원은 ‘교과부의 좌편향 역사 교과서 수정 명령은 적절하다’
라고 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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