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May 31, 2015

태양광 에너지 엔진 장착 시험비행기 태평양 날아간다. Air fare에 혁명 일어날까?


대륙간 인간의 이동을 전담해 온 비행기 여행도 머지않아 지구의 대기권을 오염시키지 않을 에너지를 이용하게 될날이 꿈만은 아닌것 같다.  대형 여객기들이,지상 11키로 상공을 떠서 날아갈때 하얗게 구름처럼 내품는 배기개스에 대한 대기오염도는 아직까지 측정되여 발표된 자료는 본 기억이 없는것 같다.

Wright Brothers가 하늘을 날을수는 없을까?라는 공상을 현실화 시켜 처음으로 비행기를 라는 날으는 물체를 만들어 1903년 12월 17일에  잠시동안 하늘을 날아본 이후 눈부시게 발전하여 음속보다 더 빠른 비행기를 제작하여 상용화 시키기까지 발전 했었으나, 이제는 청정 에너지만을 사용하여 하늘을 날으는 꿈의 비행기를 시험제작, 태평양 상공을 날게된다는것이다. 

아직 초기 단계이고, 날씨의 변동과 태양이 없는 밤하늘을 날아갈때의 태양열 에너지를 어떻게 축적하여 사용할것인가?라는 숙제가 남아 있긴 하지만,  지구에서 가장 큰 태평양을 건너 비행하는 도전이 성공한다면 이를 발판으로 해서 눈부신 발전이 이어질 것으로 기대되고,  나자신도, 더 늦기전에 태양열 에너지를 상용화 해서 여행객들을 실어 나르는 여객기를 타고 여행을 즐길수 있는 시대에 동참 할수 있게 되기를 꿈꾸어본다.  더 기대되는것은 비싼 항공유를 사용하지 않을것이기 때문에 Air Fare가 무척 저렴할것 같은데.....

태양열 에너지를 이용하여 하늘을 날으는 비행기의 시범 비행이 진행되고 있다는 뉴스 보도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과 기대를 걸게 할것 같다.

http://www.bbc.com/news/science-environment-32946874

스위스 출신의 파이럿 Andre Borschberg씨가 중국본토에서 하와이까지 완전히 태양광 에너지만을 이용한 비행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가는 도전을 시작했다.

날개의 길이가 점보기보다 더 길지만, 무게는 큰차보다 약간 무거운 이시험용 비행기는 중국의 Nanjing 시간으로 새벽 2시39분에 이륙했다고 한다. (18:39GMT)

파이럿 Mr.Borschberg씨는 태평양 가운데의 Hawaii까지 날기위해 5일내지 6일동안 계속해서 비행을 해야하는 도전을 감수해야 한다.  비행기간동안에 그는 아주 짧은 시간의 고양이 잠을 잘뿐, 항상 깨어 있도록 해야 한다.

그의 비행내용은 전과정을 Monaco에 있는 Control Room에서 모니터링 하게 된다.  기상 관측관들과 비행기 항해사들은 계속해서 비행경로를 업데이트한 변동상황을 그에게 알려주게 될것이다.

좌석 1개의 비행기를 태양광 에너지만을 이용하여 프로펠러를 돌려 지구를 장시간 항해를 하게되는, 일곱번째의 과정(Seventh-leg)인셈이다.  이번 프로젝트는 지난 3월에 중동의 아부다비에서 출발하여 꾸준하게 진행돼 왔었지만, 중국의 동쪽 해안기지에서 태평양상의 기후조건을 관측하면서 한달 이상을 기다렸었다.

태양광 에너지를 이용하여 항해 한다는것은 바람의 영향을 많이 이용하여 도움을 얻는것 뿐 아니라, 비행기 날개에 설치된 17,000개 이상의 태양열 발전장치가 최대의 효과를 내여 전기를 발전할수있게 하는데 결정적인 요건인 청명한 하늘이 관건이기도 하다.

이전극판은 리디움-이온 밧테리를 비행날개위에 설치하여 에너지를 충전시켜두었다가 어두운 밤중에 비행을 계속하여 다음날 새벽까지 날아갈수 있도록 설계되여 있다.

Tough ask


조종사 Mr. Borschberg씨는 비행경력이 많고, 또 훈련을 많이 받아 이비행기의 성능을 잘 알고 있는 엔지니어이기도 하다.
설명할 필요도 없이, 그는 이번 비행이 얼마나 어렵고 긴장되는 미션인가를 잘 알고 있다.

"이번 비행은 내 자신에 달려 있다. 내의지속에서 비행을 하는것이다. 이번 비행은 내가 어떻게 적응 하는지를 새로 발견하게 되는 비행이며,  내자신이 5-6일간 계속되는 비행에서 내자신을 어떻게 적응 유지하는가에 달려 있다" 라고 BBC와의 회견에서 심경을 토로했다.

태양광 에너지를 이용하여 항해를 해본 경험이 있는 Bertrand Piccard씨는 BBC에서 설명 하기를 "파일럿 혼자서 비행하기 때문에 비행중 모든것을 혼자 다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날개의 길이가 굉장히 길고, 기류에 매우 민감하고 또 매우 저속으로 날아가는 덩치가 큰 비행기 이다.
기류가 심할때는 이를 피해가는게 무척 어렵기도 하다.  그러나 비행기에는 자동항법장치가 설치되여 있고, 변소, 그리고 며칠동안 먹을수 있는 식품과 음료수외 기타 필요한것들이 준비되여있고, 또한 우린 많은 훈련을 받았다"

중국에서 이륙하여 착륙지인 하와이의 O'ahu섬에 있는 Kalaeloa 비행장까지는 장장 8,000 키로 미터의 장거리이다.(5,000마일)

만약에 비행을 시작하자마자 일기불순이나 비행기의 기술적 결함이 발견되면, Pilot Borschberg씨는 상황을 판단하여 일본이나 중국으로 되돌아 갈수 있는 선택을 할수 있다.

그러나 그의 비행변경 시도가 먹혀들어가지 않을 경우가 발생하게되면, Mr Borschhberg씨와 지원팀은, 만약에 비행기에 심각한 결함이 있어날경우 태평양 물결위에 곤두박질할 경우를 매우 치밀하게준비해 두고 있다.

파이럿은 그의 비행기와 함께 물속으로 내려앉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면 물과 접촉하게되면 전기충격의 위험이 뒤따를것이기 때문이다.  대신에 소형 보트를 이용하여 위험한 순간을 벗어난후 구조선을 기다리게 될것이다.

순항해서 하와이 Kalaeloa공항에 안착하게되면, 그는, 좌석 1개의 배행기로 가장 긴 논스톱 비행을 한것외에도 여러개의 새로운 항해 기록을 세우게 된다.

태양열 에너지를 이용한 시험배행은 장차 새로운 항해술을 보여주는것 뿐만이 아니고, 전체적으로 환경오염에 대한 새로운 기술을 보여주는 시험대가 될것이다.

Leg 1: 3월9일. Abu Dhabi(UAE)에서 Muscat(Oman) - 441키로를 13시간 1분간 달아 성공.

Leg 2: 3월10일. Muscat(Oman)에서 Ahmedabad(인도) - 1,468키로를 15시간 20분 날아 성공.

Leg 3: 3월18일. Ahmedabad(인도)에서 Varanasi(인도) - 1,215키로를 13시간 15분 날아 성공.

Leg 4: 3월 19일. Varanasi에서 Mandalay(미얀마) - 1,398키로를 13시간 29분 날아 성공.

Leg 5: 3월29일. Mandalay에서 Chongqing(중국) - 1459 키로를 20시간 29분 날아 성공.

Leg 6: 4월 21일. Chongqing(중국)에서 Nanjing(중국) - 1,241키로를 17시간 22분 날아 성공.

Friday, May 29, 2015

토론토 명물,역사적증인, 선상 식당, Captain John's 역사 속으로 사라지던날.May 28th, 2015.


나에게는 추억이 함께한 토론토의 명물이자, 선상식당이었던, Captain John's 가, 그동안 많은 비난과 옹호를 받아 오다가, 오늘 드디어 40년 이상을 머물러 있던 Harbour Front Port를, 다른배에 이끌려서 Niagara Pennisula 끝쪽에 있는 Port Colborne의 Wrecking Yard를 향해 Towing 됐다. CP24 TV는 실황중계까지 하면서, 지난 40여년의 발자취를 영상에 담아 주기도 했다.

http://www.cp24.com/news/captain-john-s-removed-from-waterfront-will-be-taken-to-scrap-yard-1.2394870
 지금은 장성하여 자기네들 나름데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두 아이를 데리고 오래전 어느날, 그배가 정박해 있는 Port를 찾아 선상 배안에 꾸며져 있는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했었던 기억이 난다.  엄마는 그때, 꼭 참석 했어야 했는데, 형편이 허락치 않아 합석을 못했었던 점도 가슴을 아리게 하는 추억이 있다.

초기 한인이민자들의 대부분은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왜 엄마는 그래야만 했었는가를 경험으로 금새 이해했을 것이다.
선상식당이었기에 주문한 음식은 물론 Sea Food 였다.  그러나 기대했던 만큼, 다시 한번 와보고 싶다는 기대감을 갖게 할수 있는 Gourmet는 아니였었다.  상징적인 의미가 더 강했었다.

Towing하는 배에 이끌려 항구를 떠나가는 배갑판위에서 Captain복장을 한 John Letnik의 모습에서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40년전 그가 Owen Sound에서 끌고와서 Harbour Front에 정박 시켰을때는 비상하는 꿈으로 흥분 했을텐데..... 이렇게 해서 역사는 만들어진다는 것을 조금은 알것 같다.


한때는 토론토 항구의 명물이었던, 물위에 떠 있는 선상식당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던 Captain John's 선상식당은 낡고 초라한 모습으로 퇴색된채 항구를 빠져나가 온타리오 호수 저편이 있는 야적장을 향해 최후의 항해를 진행 중이다.

이번달초에 선박재활용회사에 팔린 Captain John's(M/V Jadran)은 Yonge St. 의 시발점의 항구에서 오늘아침 10:30분경에 2척의 인양선에 이끌려 Centre Islands지역을 지나 토론토시내를 뒤로하고 시야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현재 선상 식당은  Pt. Colborne에 있는 Scrap Yard를 향해 항해중이고, 도착하자마자 바로 고철로 분해될것이다.

1975년부터 토론토시내의 끝자락 호수에 정박되여 갖은 수난을 겪으면서 식당을 해왔던 것으로 유명했던 이배는 한때는 전수상 Brian Mulroney와 Mel Lastman 전 토론토 시장이 자주 들렀을 정도로 자랑스러운 날들도 있었다.

이선상 식당은 최근 몇년동안은 매우 어렵게 운영됐었고, 토론토시는 $750,000달러의 밀린 세금 때문에 2012년부터 수돗물을 공급하지 않아 결국 문을 닫은채로 오늘에 이르렀었다

그동안, 법원의 집행 명령으로 Auction을 지난해 7월달에 시행하여 새주인을 맞았었으나 법원이 지정한 날자내에 배를 이동 시킬수 없어 실패한것을 포함하여, 여러번 이배를 항구로 부터 옮길려는 시도를 했었지만 번번히 실패하다, 오늘 마침내 항구를 떠나게 된것이다.

전주인 John Letnik은 그의 딸과 함께 마지막으로 배의 갑판에 올라 기념 사진도 찍었는데, 아버지와 딸은 어떤 감정이었을까?  삶과 부귀영화는, '화무 십일홍'이라는 말을 실감 했을까?

이배를 고철로 분해할 Marine Recycling 회사는 구체적인 인수인계에 대한 설명은 발표하지 않았다.  무슨 밀약이 있어서 였을까?

목요일 아침 이회사는 Captain John's배를 고철로 분해계획을 CP24에 설명하면서 이회사 주인은 Captain John's 배의 완전분해는 약 1개월 정도 걸릴것 같다고 설명해주었다.

"먼저 배의 일정 부분에서 샘플을 수집하고, 무거운 메탈을 먼저 점검하고, 페인트와 PCPs, 아스베스토(석면)을 배에서 먼저 떼어내는 시험을 약 10일동안 한다음, 배의 헤채가 시작될 것이다.  2층으로 된 갑판이 먼저 처리되고 그다음에 엔진을 헤체하게 된다.  그다음에 배의 밑부분을 다시 Towing해서 남쪽에 있는 처리장으로 옮겨 그곳에서 약 10일에 걸쳐완전 해체 작업은 끝난다."라고 Wayne Elliott는 설명했다.

Thursday, May 28, 2015

한국 성공 신화를 생활현장에서 보여주고있는 5명의 삶과 이야기들

한국은 지구촌의 표본이 되고 있다.  반세기전만 해도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중의 하나였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지구상에서 가장 번창하고 있는 나라중의 하나이다. 수도 서울은 비즈니스로 활력이 넘친다.  고층빌딩들은 뉴욕 맨하탄과 경쟁할 정도다.


Time and tide was on time for Korea to be developed toward for a prosperous country having charismatic unique leadership that was so lucky for Koreans.  At that time no options available but procedure to get out of starvation that visited Koreans early Spring every year.
한국은 매우 특이한 방법으로 개발해 왔다.  식민지로 전락하기도 했었지만 그것으로 머물지 않았다.  1960년대에 한국의 지도자는 기업가들을 독려하여 산업을 육성시키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였었다.어떻게 해서 그런 방식의 개발이 가능했을까? 무엇을 교훈으로 얻었던가?
BBC의 서울 특파원  Steve Evans는 한국의 성공신화를 현장에서 뛰면서 보여주고 있는,성공한 신화의 주인공 5명을 접촉하여 그들이 하는 얘기를 들어 보았다.

http://www.bbc.com/news/world-asia-32811864

사업가로 변신한 주부.
Romi Haan, 그녀는 꼭 필요한 발명의 어머니 였다.
그녀는 딱딱한 마루바닥을 무룹꿇고 손으로 청소하는게 그렇게도 싫었다. 그래서 그런 괴로움을 해결하면서 청소하는 걸레를 만들었다.
이기상 천외한 구원의 신기술은 조그만 물탱크와 마루바닥에 스팀을 뿌려주기위한 열장치를 취합하여 보통의 걸레에 연결한 작품이다.  이걸레는 너무도 성능이 좋아 대량으로 만들어서 시장에 팔기로 결정했다.

그녀가 회사를 차려 운영중에 있는 Steam-mop(스팀 걸레)는 Haan회사의 효자 품목이 됐다. 지금은 80명이 근무하고 있으며, 년 총매상은 1억 2천만 달러에 달한다.
이사업은 집안일을 전담하고 있는 여성들의 고민을 풀어주는 정확한 해답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주부들이 가장 하기 싫어하는 일이 마루 바닥을 무뤂꿇고 닥는 일이다"라고 그녀는 설명한다.

"대부분의 가정주부들은 내자신을 포함해서,바닥을 매일 무뤂꿇고 손으로 청소해야만 했다. 이에 진절머리가 나서 뭔가 해결책을 찾아야만 했었다.  이런 집안일에서 한국의 주부들을 해방 시켜야 겠다는 생각에서 였다."

한국의 가옥 구조는 온돌 기능을 갖추고 사람들은 그위에 밥상을 차려놓고 음식을 먹는 습관이 있다. 그리고 잠잘때는 같은 바닥에 요를 깔고 그위에서 잠을잔다.

따라서 바닥을 청소하는일은 집안청소하는 큰일중의 하나이며, 허리가 부러질 정도로 힘든 일인데, 이런일은 대부분 가정주부들이 도맡아서 한다.  Romi Haan은 말하기를 그녀의 남편은 많은 집안일을 도와주곤 하지만, 바닥 청소만은 예외라고 설명한다.

"남자들은 손과 무릅을 이용해서 하는일은 잘할수없는 구조로 되여있다."라고 우겨댄다고 그녀는 웃는다.

그녀는 생각하기를 대부분이 남자일 기술자들은 여자들의 고충을 잘 모르는것 같다.

"특히나 한국에는 여자 기술자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 대부분 남자들이 기술자들이기도 하지만, 그들은 여자들만큼 가정일에 필요함을 알지 못한다. 가정주부로 오랜시간을 이런일들과 부딫치면서, 나는 필요한 기술을 어떻게 응용할수있는가를 터득하게 됐고, 그래서 내가 필요한곳에 적용해서 기술적으로 해결을하는데 결론을 얻은 것이다."

여자가 문제점을 발견하고 그자신이 이문제를 해결하여 결국 사업으로 연결시킨 신화가 된것이다.  지금  그런신화를 또다른 여성이 쓰고 있다. 그녀는 선생님이지만 일년에 5억원 이상의 수입을 올리는 사업가이다.

선생님 사업가


Gwen Lee씨는 일년에 5억원 이상을 벌어들이는 선생님이다. 어떻게 하면 수입을 늘릴수 있는가를 배우기위해 목말라 하던차에 그녀는 사업에 투신하여 수입을 올린것이다.  그녀는 교실에서 한달에 약 1,000명에게 영어를 가르친다.   그녀는 중국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학습을 접목시킨것이다.

한국인들은 - 중국사람들 마찬가지 - 영어를 구사할수 있는것은 좋은 직장을 구할수 있다는점에 착안하여 그요구를 채워주게 된것이다.

그녀의 직원들은 검은색의 차로 그녀를 학생들 교실로부터 강남의 비즈니스 구역까지 그녀를 운전해주는 운전사도 포함되여있다.

인터넷을 통해서 그녀가 필요한곳을 선정한다.  그녀가 근무하는 사무실의 한곳은 그녀와 TV 카메라맨이 매주 온라인에서 가르치게되는 내용을 녹화하는 공간으로 이용된다.

확실히 그녀의 브랜드뿐만이 아니고 이미지 또한 매우 중요하다.  외모에서 떨어지는 선생님은 비즈니스를 확보할수 없다. 그래서 그녀는 매일아침 7:30분경부터 머리를 매만지고 화장을 한다.  하루동안에  그녀는 최소한 10번 이상의 얼굴 화장을 한다.

그녀는 하루좋일 쉴새없이 대중상대의 퍼포먼스를 한다.  그녀 자신도 가끔씩은 진짜 나를 나타내는 모습은 어떤것인가를 놓고 황당해 할때가 있다 - 대중앞에서 당당히 자신있게 서 있기 위해서 화장을 해야하거나 또는 다른 변장을 하기도 하고, 가능하면 베일에 싸이도록 계속적인 노력을 하기 때문이다.

"집에 있을때는 많은 구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생각하기를 ' 왜 내가 대중들 앞에 서지 않으면  않되는가 그리고 성공을 해야만 하는가?  그러기위해서 무엇을 추구해야 추구해야 하는가? 대중들에게 보여주기위해서 나는 어떻게 노력을 해야 하는가?'

"어떤때는 갑자기 나는 텅빈 껍데기같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생각하기를 ' 내가 하는일이 과연 옳은 선택을 한것인가?'

"그러나 내가 화장을 잘하고 곧바로 내강의실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서있으면서, 나는 자신감을 트끼고, 평온해짐을 때때로 느낀다.  그두가지 모두가 나자신을 나타내는것이라고 생각한다"라고.

한국에서는 영어가 생활에 많은 연관성을 갖고 있다. 미국인들은 1945년경부터 한국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으며 또한 많은 한국인들의 가족들이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인들이 영어를 배울려고 하는 진짜 이유는 더 좋은 직장을 구할려는 목적과 자신감을 얻기 위해서다.
개인적 성취도를 이루는것 못지않게 전한국이 이런 분위기속에 있다.  

선박제조의 산증인

오늘날, 한국은 세계에서 조선업이 가장 앞선 나라로 가장 넓은 선착장과 수많은 선박주문이 쌓여 있다.   이러한 산업의 성공은 무에서 시작됐던 것이다.

이상복 기술자는 16세때 부터 한반도 남쪽끝에 있는 울산 현대 조선소에서 일해온 기술자이다.  그는 1974년 현대 조선소가 막 사업을 시작했을때 이회사에 입사 했었다.

그의 하는일은 배를 제작하는데 용접부분이 표준에 맞게 잘 용접이 됐는지의 여부를 검사하는 검수관이다.
대형 액화 LNG천연개스 운반선을 제조하는데 티끌만큼이라도 누수가 있어서는 안되는 특수선박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길이 300미터가 넘는 대형선박에서 누수가 발생한다고 가정해보자.  결과는 재난을 만난것 처럼 치명적이이다. 액체에서 개스로 변환 시키기 때문에 액화천연개스는 폭발성이 매우 강하다.

이상복씨는 이회사에서 근무하는게 매우 자랑스럽다. 수입이 좋아 그는 가족들과 안정된 생활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 있는 시설들은 '현대'로 묘사된다.  내가 운전하고 다니는 고속도로는 현대 창업주의 이름으로 명명되여 있다.  병원과 대학도 현대가 재정적으로 도와주어 설립된것이다.  그래서 우스개 소리가 있다. 이곳은 '현대왕조'라고.

"지난 40년을 회고해보면, 내인생의 중심에는 선박제조를 빼놓을수 없다.  내 젊음을 바쳐 이회사에 근무했다. 현대는 나를 나타내는 분신과도 같다.  그때는 아무것도 없는 조그만 어촌에 불과 했었다.  지금은 지구상에서 가장 큰 선박제조 회사로 변해 있다."

오늘날 한국의 경제성장에 빼놓을수 없는것중 하나는 가난했던 기억이다. 겨우 한세대를 조금 넘긴 기간동안에 한국은 소달구지 문화에서 리무진을 몰고 다니는 나라로 변했다.  그러나 지독하게도 가난했던 기억은 쉽사리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다.

튀김치킨 상인

그러한 아픈 기억들이 지금은 온라인으로 주문을 받아 튀김치킨을 만드는 비즈니스까지 하게하는 원동력이 된것이다.

장현숙씨는 돈세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그녀와 남편은 그돈들을 침대머리맡 안전한곳에 보관하고 있으면서 소파에 앉아 돈을 세는 것이다.

그녀는 이튀김 닭 장사를 17년전에 시작했었다.  그녀는 새로 태어난 자식에게 먹일 우유조차 조달할수 없는 어려웠던 시절을 기억에서 지울수가 없다.  그래서 현찰을 손에 만지는것은 그녀에게는 매우 소중한 가치를 안겨준다.

속초 중앙시장에 있는 튀김닭 가게에서 아침 9시부터 밤자정까지, 주 7일동안 일하고 있다.  그녀는 가게를 비우는 일이 거의 없다. 일년에 겨우 4-5일 정도 쉴뿐이다.

그녀의 매상은 가게에서 판매된것 보다는 메일 주문이 태반이다.  주중에는 하루에 약 300 박스를 처리하고 주말에는 약 800 박스를 만들어 박스당 약 $15달러에 팔고 있다.

야구시즌이 되면 사람들은 튀김닭 박스를 구입해서 경기장으로 들고 가기 때문에 주문은 천정부지로 늘어난다. 사업에서 나오는 이익은 일년에 약 3억원이 넘는다.

그러나 그녀의 사업은 날로 번창해도, 비참하게 가난했었던 그날들이 두렵게 느껴진다. 그녀는 돈을 세면서 축복도 함께 센다.

국방은 거대한 군대조직의 병사들이.


한국은 경제 발전을 위한 외부의 원조를 많이 받은 나라는 아니다.  그러나 미군이 주둔하면서 그들이 뿌린 돈이 엄청 났었다.  지금도 한국에는 약 30,000명의 미군이 주둔해 있으며, 이와 더불어 630,000명의 한국군 병사들이 국방을 지키고 있다.

한국은 징병제로 거대한 군대조직을 갖고 있는 나라이다.

'이동혁'일병은 강철같은 두다리와 철통같은 의지의 사나이로 날씬하고 타프한 군인으로  그는 카투사( 한국주둔 미군병력의 증강을 돕기위해 미군부대에 파견된 한국군 병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다른말로 표현하면 그는 한국시민이지만 한국에 주둔해 있는 미군부대에 배속되여 병역의무를 하고있는 젊은이다.  그래서 그는 매월 140,000 원을 지급받는다.  그러면서도 모든 식사와 편의시설을 제공받는다.

담력을 기르는 훈련에 참가한다.  그는 잠을 못자고 행해지는 훈련과 산골짜기를 헤매는 장거리 행군을 하기도 하는데, 가끔씩은 사람무게에 버금가는 군장을 꾸려 메고 행군하기도 한다.

이훈련으로 튼튼한 다리와 강한의지의 사나이로 변신된 그는 오늘도 근무에 충실하고 있다.

1993년 서울태생으로, 일병 이동혁은 14세때 그의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가서 영어를 배우게 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는 징병제인 군대생활을 하기위해 한국으로 되돌아 군복무중인 것이다.

그러나 그의 뜻하는바는 여기가 아니다. 군복무를 하지만 한국에서 보다는 미군부대에서 하는것이 그의 영어사용을 부드럽게 할수 있고, 군복무후 미국으로 되돌아가 미국시민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카투사에서 군생활하는 가장 좋은점은 세계 제일의 미군들과 함께 군복무를 하는것이다. 그외에도 그들은 지도자가 갖추어야할 자질을 가르쳐주며, 그것을 이용하여 획득할수 있는 많은 기회가 있다"라고 그는 설명한다.

그는 대학에서 전기엔지니어링을 전공 했었으나, 지금은 변호사가 되기를 꿈꾸고 있다.  그는 어떻게 해서 조국 대한민국이 오늘날 이렇게 잘살게된 나라가 됐는지를 나름데로 보고 있다.

"1950년대로 되돌려 보자, 그때 한국은 전쟁페허뿐이었는데, 지금은 지구상에서 가장 번성한 나라들주의 하나가 되여 있다.  이렇게 잘살게 된것은 우리 할아버지 세대들이 당신들은 고생을 해도 후손들은 잘살게 하기위해서 해외에 나가 열심히 일해 돈을 벌었들였기 때문이다.  많은 우리 조부모 세대들은 독일로 건너가 어려운 광부일을 했었다."

"우리의 할머니들은 한국의 식구들에게 경제적 보조를 하기위해 간호사로 힘들게 일했으며,  벌어들인 돈을 쓰지 않고 고국의 가족들에게 보내, 그돈으로 우리 한국은 조국건설에 필요한 기계장비를 구입하여 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했었다."

그는 현재 한국주재 미군부대의 총지휘소(HQ)가 될 Camp Humphrey 기지에서 근무하고 있다.  그곳에서는 현재 새로운 군병원이 건설되고 있고,  그규모는 한도시를 충분히 도우고도 남을 큰 규모라고 한다.

Wednesday, May 27, 2015

미국,뇌물수수,부정에 간여한 FIFA 고위급 간부 7명 긴급체포. 스위스는 별도로 조사중. 허탈하다.

세상에 이런일들이 아무렇치도 않게 일어나고 있는 징조로 보아, 언급하고 싶지는 않지만, 지구 종말이 멀지않았다는 뜻으로 자꾸 생각이 모아진다.

스포츠는 명예와 정직이 생명이다.

세계 50억 인구의 축제인 월드컵축구경기(FIFA)를 주관하는 스위스에 있는 본부가 지금 쑥밭이 되고 있다는 충격적인 뉴스다.  고위급 간부들이 전부 도둑놈들로 채워져, FIFA의 명예를 더럽히고, 도적질 해먹고....

얼마전에는 남아프리카의 국제 심판들이 이와 비슷한 내용을 고발했다가 거꾸로 불이익을 당했다는 뉴스를 본 기억이 새삼 떠오른다.

고국의 정치판과 별다를게 없으니..... 세상의 어느단체 어느 종교를 기준삼아, 이를 보면서 양심껏 세상살게 해달라고 기도를 해야 하나?  허탈하다.  특히 축구를 좋아하는 고국의 국민들, 이제 막 축구 열기가 불어, 야구에 못지 않게 인기가 곧 높아지고 있는 북미의 어린 축구팬들과 운동선수들은 어떤 심정일까?

http://lifemeansgo.blogspot.ca/2014/06/world-cup-11.html

미국의 CNN 실시간으로 상황 중계를 했는데, 그내용일부를 옮겨 놓았다.

http://www.cnn.com/2015/05/27/football/fifa-corruption-charges-justice-department/index.html

http://www.bbc.com/news/world-europe-32895048



Washington (CNN)Latest developments:

5:56 a.m. ET: 이번에 체포된 FIFA 고위급 관리들은 그들의 직책수행을 계속할수 있게 된다 라고 FIFA의 통신책임자와 대변인 Walter De Gregorio씨는 발표했다.

5:37 a.m. ET: FIFA의 Sepp Blatter를 포함하여, 고위급 간부들은 수요일 아침에 FIFA 본부를 스위스 경찰이 급습할것이라는것을 알지 못했었다 라고  De Gregorio는 전했다.

5:30 a.m. ET: 2018년 월드컵 경기는 러시아에서 개최되고, 2022에는 Qatar에서 개최된다라고 De Gregorio씨는, 스위스 경찰에서 조사하는 부정스캔들로 인해 개최 영향에 대해 묻는 질문에 이같이 답변했다.
5:26 a.m. ET: "물론이다" 라고 FIFA운영위원회는 예정된데로 금요일에 열기게 된다라고  De Gregorio씨는 확인해 주었다.

5:13 a.m. ET: 스위스 사법당국은 이와는 별도로 FIFA 운영에 대한 자체 범죄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그조사내용중 하나는 2018년, 2022년 개최지 선정에 대한 내용들이다.  FIFA측은 2018개최는 러시아, 2022년 개최는 Qutar로 정했었다. 이두 결정에 대한 매우 강도높은 조사와 비난이 끝이지 않고 있다.

BBC뉴스는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2명의 범죄 담당 수사관이 미국의 제소에 따라 스위스 Zurich에서 월드컵 본부에 대한 수사를 진행하여, 부정에 관련된 7명의 고위급 FIFA 담당자들을 무더기로 붙잡아 구속하면서, 수사는 현재 계속 진행중이라고 한다.
이와는 별도로, 스위스 검찰은 2018년도, 2022년도에 러시아와 콰타르에서 개최되는 월드컵 축구 개최지 선정에 따른 경쟁 내용과 개최지 선정에 대한 범죄 수사를 시작했다고 발표했다.
구속된 7명은, 부정과 청탁에 연루된 혐의자로 미국에 의해 기소된 14명중의 일부이다 라고 미국 정부관계자가 설명했다.
월드컵 본부는 이와는 별도로 오는 금요일에 FIFA 회장선출을 위한 선거를 계획데로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현회장  5번째 회장 선거에 출마한 Sepp Blatter씨는 이번에 구속된 고위급 담당자 7명의 명단에는 없었다.
FIFA는 또한 수요일 설명하기를, 스위스 검찰 당국의 범죄와 부정축재 조사에도 불구하고, 2018년 러시아 개최, 2022념 콰타르 개최 결정에 대한 번복은 없을 것이다 라고 재천명했다.

이어서 CNN은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FIFA내부의 뇌물수수와 부정을 조사하고 있는 가운데, 다음 조치는 구속된 혐의자들을 미국으로 송환하는 순서를 밟는 것이다.  즉 미연방 담당자들은 이들 혐의자들을 미국으로 데리고 와서 그들이 미국은행 제도를 이용하여, 받은 뇌물들을 그들의 목적지로 보내는일들이 미국땅에서 이루어진 증거를 근거로 해서 미국에서 법의 심판 받기를 원하고, 또한 그들의 활동상을 숨기기위해 엉터리 서류를 만들었던 혐의를 집중적으로 조사하기 위해서다 라고 미연방 검찰총장 Loretta Lynch여사는 수요일 성명서를 발표한 것이다.

"간단히 얘기해서, 이번 조사에 관련된 사람들은,  FIFA조직을 통해, TV로 경기중계와, 경기 개최지선정, 지구촌 축구경기를 관장하는 것을 위에서 지켜보는 전체통괄조직을 누가 운영할것인가 등등을 놓고 뇌물에 연관여부를 조사받게 하고져 함이다"라고 설명했다.

자세한 내용은 링크를 연결해서 보자.

Tuesday, May 26, 2015

임목사님의 감금뒤에 숨겨진 비밀 풀기 - 체제를 지키기위한 Kim's Regime의 일부 실상일뿐.

도대체 어쩌자고, 굶어죽어가는, 한피를 나눈 동포들을 먹여 살리겠다고 갖인 역경을 넘어가면서 도와준, 목회자를 감금시키고, 소재여부도 알려주지 않는 그들의 마지막 목적은 어디에 초점이 마추어져 있는 것일까?   남한 적화?, 그것은 이미 역사속으로 사라진 꿈이라는것을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은 알고 있는 환상일 뿐이다.

"인내에는 한계가 있다"라는 명언이 생각난다.  세계 50억이 넘는 인구가 살고 있는 지구촌이 그냥 가만히 앉아 구경만 할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그집단은 너무나 큰 착오를 하고 있다.
몇년전 불가리아의 "차우세스쿠"독재자가 처참하게 최후를 맞이하는 순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더 늦기전에 다 내려놓고, 지구촌의 한이웃으로 살아가기를 진정으로 바랄뿐이다.
여기에 "글로브앤드 메일" 신문의 분석 기사를 옮겨 놓는다. 지금이 아니고 젊은 후배들이 이다음에라도 보고 참고 했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http://www.theglobeandmail.com/news/world/unravelling-the-mystery-behind-the-detention-of-reverend-lim/article24481630/

임현수 목사가 이북에 도움을 주기위해 교인들의 마음과 지갑을 열게 하기위해서 그는 가끔씩 성경구절들을 인용하곤 했었다. "가난한 자를 도우는 사람은 절대로 부족한게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에 눈을 감는 사람은 많은 저주를 받게 될것이다"라고 성경잠언 구절을 설교때 마다 많이 인용하곤 했었다.

지난 20여년 동안에 임목사는 그자신을 키웠고, 지구촌 각곳으로 부터 모아진 북한을 돕기위한 성금을 보내는 통로역활을, 그가 미시사가에 세운 '큰빛장로교회'를 통해서 진행해 왔었다.
지금까지 임목사가 110번 이상 은둔의 왕국 북한을 방문하여 성공적으로 선교사업을 해온 것처럼, 성공적 선교를 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이북의 고위층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그끈을 이용하여 이북 전역을 비교적 자유롭게 여행할수 있는 자유까지도 획득 했었다.

http://lifemeansgo.blogspot.ca/2015/03/cnn.html

임목사는 수천톤에 달하는 식량을 보냈었고, 수만장의 담요와 겨울용 의복, 수만개의 안경과 수백만 달러의 성금을 전달 했었다.  그는 라면공장과 가발공장, 학교, 탁아소, 개스주유소, 공중 목욕탕, 농장과 양식장등의 사업을 하기도 했었다.  북한내의 인민들에게 가혹한 행위를 감행한 북한 정권에 압박을 가하기위해, 캐나다는 경제 봉쇄정책을 더욱 강화시키는 속에서도, 임목사는 이북에 더큰 투자사업구상을 했었다.  그는 평양에 있는 가장 좋은 호텔을 구입하기를 원했었고, 북한에 농업혁명을 이르키기를 희망하기도 했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조만간에 30,000명의 선교사들이 필요하고, 앞으로 수년내에 북한은 복음의 땅이 될것이고 과거의 영화를 되찾게 될것이다"라고 그가 2010년에 행한 설교가 지금 온-라인에 올려져 있다.

그리고 나서 지난 1월에 그는 다시 북한의 북쪽 변방땅을 밟았는데 그곳에서 사라져 버린것이다.  한달이상 조용하게 시간이 흐른후, 북한당국은 지난 3월초에 임목사는 현재 북한에 감금되여 있다라고 캐나다 정부에 통보한 것이다.  많은 추측이 난무 했었다.  그러나 아무도 왜 그가 잡혔는지를 모른다.  북한 당국이 과거에 다른 사람들을 감금 시킬때는, 통상적으로 그이유를 중앙방송을 통해 일반에게 보도하곤 했었다.

이번 임목사 사건과 관련하여 전세계적으로 펼치고 있는 '한인 디아스포라' 운동은 산산조각이 났고, 감금된 그의 앞날이 불투명한 상태로, 아무런 언급을 안하고 있다.
"지금 이시점에서 오직 우리가 할수있는일은 그를 위해 기도하는것 뿐이다. " 46년간 임목사와 교제를 해오고, 현재캘리포니아, 아나하임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큰빛교회 '현용조' 목사는 강조한다.

캐나다 정부는,  캐나다 정부 관리들이 영사업무를 할수 있도록 해서, 오리무중에 있는 임목사의 소재와 상태들을 확인할수 있도록 요청하는 내용의 편지를 적어도 2번 이상, 뉴욕에 있는 UN내 북한 대표부에 보냈었다. 지금까지 아무런 응답이 없는 상태다. 이에 대한 Globe and Mail지의 답변 요청에 대해 캐나다 외교통상부는 "영사관계 담당자들은 임목사 가족들과 접촉하고 있으며, 필요한 협조를 가족들과 하고 있다.  가족들의 보안을 위해 더이상의 설명은 할수없음을 이해해 달라"라고 설명했다.

연방수상 Stephen Harper는 개인적으로 해외에서 억류되여 있는 캐네디언들의 구명을 위해 탄원서를 제출한바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현재 중국에 억류중에 있는 선교사 부부이다.  그러나 수상의 고위 보좌관들이 지난해에 임목사를 만나기도 했었지만 공개적으로 아무런 언급은 하지 않고 있다.

임목사가 목회했던 교회의 담당자들은 언급하기를, 임목사님은 북한에서 인도주의에 입각한 북한 주민을 돕는일을 했을뿐이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익을 남기기위한 사업, 즉 보트, 컴퓨터와 다른 물품들을 북한에 수입해 가는 사업을 추진하기위해, 임목사는 들어가서는 위험할수 있는 지역을 돌아다닌점이, 캐나다 정부가 답변을 하기에 어렵게 하고 있는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서울주재 캐나다 외교관들은 오래전부터 임목사가 북한에서 진행하고 있는 일들이 북한에 대한 경제봉쇄 정책을 위반하고 있음을 보고한바 있었다고, 임목사의 감금이 매우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에 이름을 밝히기를 꺼려하는 임목사의 친지 한분이 그사유를 밝히고 있다.

소수민족들과의 관계를 유지하기위해 노력하고 있는 Harper정부의 고위급 관리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어 왔음을 한인사회는 아주 자랑스러워 해왔다.  Korean- Canadian들은 복합문화성 장관 Jason Kenny와 접촉하고 있는 구룹들중의 한 멤버로, 보수당 정부가 정권을 잡기 전인 2006년경부터 깊숙한 접촉을 해오고 있다.  3년후 Harper수상은 Yonah Martin을 한인 이민사상 최초로 상원에 임명하여 관계을 유지해 오고 있으며, 그녀를 "친구"라고 소개하곤 했었다.

Yonah Martin 상원의원의 도움을 받아, 임목사는 Harper수상을 만나 캐나다에 거주하고 있는 탈북자들을 도울 방법을 모색 하기위해 지난해 연말에 두번씩이나 만날 계획을 세웠었으나, 갑자기 다른 일들이 생겨 성사 되지는 못했었다.  그하나는 오타와 전쟁광장에서 위병을 서고 있던 Nathan Cirillo 상병이 저격당해, 장례식에 참석 하느라 무산됐었다.  그러나 임목사는 대신 수상의 측근보좌관과 만나 상의 한바 있다.

"우리는 수상의 집무실에서 미팅을 갖었었다"라고 미팅에 같이 참석했던, 온타리오 한인 교회협회 회장 '석동기'목사는 설명한다.  이의 확인을 위해 문의한바,  수상실이나 상원의원 Martin쪽으로 부터는 아무런 응신이 없다.

한인사회내에서도 임목사의 이북선교활동내역에 대해 말들이 많았었다.  교회내부사정에 밝은 일부 사람들의 전언에 따르면, 3,000명의 교인들은 헌금한 돈을 사용하여 임목사가 북한에서 할려고 하는 사업에 대해 노골적으로 반대 의견을 냈었다고 설명한다.

인간의 생명, 재난구호, 안정적인 먹거리원조, 의약품, 수술기구등, 꼭 필요한 물품들을 NGO를 통해 이북에 보내는 원조를 제외한, 경제봉쇄를 캐네디언 정부가 진행중에 있는 와중에서, 상식적으로 봤을때 인도적 차원의 원조가 이익을 만드는 사업으로 변질 된다는게 항상 의문의 대상이었었다.

임목사는 2006년도에 UN 경제봉쇄가 실시되기전부터 수년간 이북에서 원조사업을 했었다.
2013년도 들어서야  캐나다정부는 아주 강한 제제를 하기 시작했었다. 그때까지 캐나다 정부는 법적 제재를 가하지 않았었다.

"경제봉쇄에 대한 정확한 법적 가이드라인 설정이 없었기에 확실한 제재의 범위가 명확하지 않았었다.  봉쇄정책은 정치적 수단일뿐, 법적으로 제재조치를 받거나 받을 기구가 아니다"라고 Norton Rose Fulbright Canada 에서 근무하는 고위관료  Richard Wagner씨는 설명한다.

큰빛교회의 간사 Lisa Pak씨는 헌금이 이북에서 이익을 내는 사업에 도움이 많이 됐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 사업에서 발생한 이익금은 고아원과 진행중인 사업을 위해 재투자 됐었다"라고 이멜에서 밝히고 있다.  예를 들어 고기잡이 사업을위해 교회가 돕는 목적은 어부에게 고기낚는법을 가르쳐 주어, 한마리의 물고기를 주어 한번 먹는것으로 끝내는것 보다, 일생동안 벌어먹고 살수 있는 방법을 가르치는데 주안점을 두었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임목사는 북한정권의 고위층들과 깊은 관계를 맺어 VIP대접을 받는 위험한 도박을 했으며,  이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들이 북한에 입국할려 할때 필요한 비자를 얻는데 도움을 줬었고, 개인적으로는 인도적 차원의 원조범위를 넘어 다른사업을 시도 했었다.  그가 했던 모든 일들이 이북과 같이 철저히 폐쇄정책을 쓰는 전체국가에서 군사용 핵무기제조에 일조를 하지않았겠나 하는 의문점에 대해 재조명 해 볼 필요가 있는것 같다.

한나라안에서 좋은 일을 하기위해서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라고 북한인권을 위한 토론토모임의 회원 Jack Kim은 설명한다.  북한인권모임은 주장하기를, 북한을 돕기위해 보내진 돈들이 북한 Kim's Regime에게 들어가지 않았다는 보장이 없다라고 단언한다.

Touched by the famine

임목사는 서울태생으로, 그의 아버지는 공직에서 근무했고, 어머니는 임목사의 자매들이 운영하는 수퍼마켙에서 일했었다.  크리스천 가정에서 태어난 젊은 Mr. Lim은 수많은 목회자와 선교사들을 배출한 신앙심깊은 교회출신이다.  캘리포니아에서 목회중인 조목사는 그와 고등학교때부터 친분이 있었고, "우리는 성장하면 하나님 사업을 성실히 이행할것이다"라는 확고한 주관이 있었다고 그는 설명한다.

임목사는 이벤젤리칼 크리스찬 조직의 하나인 '크리스찬 Campus Crusade'에서 왕성한 활동을 했었다.  그후 1986년1월달에 "선교구룹의 일원으로" 캐나다에 오게 됐었다 라고 조목사는 설명한다.  임목사는 캐나다 장로교단이 운영하는 Knox College에서 종교학을 연구했으며, 그후 큰빛장로교회의 목사로 부임하고, 몇년후에는 원로목사로 추대 됐었다.

그의 아버지는 북한 태생이었지만,  4년간 이어진 북한의 흉년으로 500,000 내지 600,000명이 굶어죽게될때인 1996년까지는 북한에 대해 별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기근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는것은 정말로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이었다.  그참상을 목격하면서 그는 북한 선교를 하기로 결정했었다"라고 조목사는 설명한다.

"그를 알고 있는 주위사람들은 그런 그의 발상을 매우 염려 했었으며 또한 위험을 초래할수도 있다"라고 조언했지만, 임목사는 북한을 돕기로 결정하고 모인 성금으로 쌀과 옥수수를 중국에서 구입하여 기차에 싣고 북한으로 보냈었다.

효과는 금방 나타났고, 사업을 확장하여 중국에서 수입해온 곡물들을 이용하여 빵을 만들수 있는 공장을 건설하고, 해를 거듭할수록 성장하여, 딸기농장을 비롯한 농장사업은 확장시켰다.  그는 북한인들은 "피를 나눈 형제들로 여겼으며, 북한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진정으로 돕기를 원했었다.  그것이 원인이 되여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이며, 그렇게 됐을경우 이북사람들은 자력으로 살아갈수 있게 될것으로 생각했었다"라고 조목사는 설명을 이어갔다.

임목사의 이북에서 사업확장은 자연스럽게 수년간 계속됐으며, 사업의 종류를 다 열거하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여러분야에서 사업을 했었다. 큰빛교회는 그가 추진했던 사업중 12가지가 넘는 사업리스트를 보여주기도 했었다.  그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알고싶어 Globe and Mail신문사는 관련된 질문을 했었으나 아직까지 회신은 없다.  또한 교회는 임목사를 곁에서 도와 같이 일했던 사람들과의 인터뷰도 막아서 무산되고 말았다.  교회뿐만이 아니고 이북에 가서 주민교육과 인도적 도움을 주었던 여러명의 사람들과, 임목사를 도와 함께 사역했던 사람들 마져도 일체 인터뷰에 응하지 않고 있다.  이유인즉, 이사건은 매우 민감해서 함부로 발설했을경우 임목사의 신변에 위험이 따르는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Big ambitions

Globe신문은 임목사의 삶과 목회자로서의 활동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교회뉴스레터, You Tube에 올려놓은 설교내용에서, 캐나다에 머물면서 그의 설교를 들고 자세히 적어놓은 사람의 노트, 큰빛교회와 관련이 깊은 영어권 교회에서 온라인에 올려놓은 이메일 대화내용, 그리고 토론토, 캘리포니아, 한국, 러시아와 뉴질랜드에 거주하는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자세한 자료를 확보했다.

그자료를 통해서 그려진 임목사에 대한 그림은, 한국과 미국 캐나다를 포함한 전세계로 부터 모아진 많은 성금을 이북에 도와주고, 대신에 이북에서의 선교활동을 하기위한 기득권을 다른 구룹보다 먼저 확보 할려는 열정이 넘친 사람사람으로 묘사됐다.

그가운데서 임목사의 가장 큰 열망은: "평양에서 가장 좋은 대동강 호텔을 구입하는것이었다" 라고 토론토에서 발행되는 '시사한겨레'신문에 2012년도에 기고한 글에서 밝히고 있다.  그는 현지주민들의 인컴을 높이기위해 400 에이커의 농지를 구입해서 딸기종류의 과일을 재배하는것과 연관시켜 호텔을 구입할려고 했었다. "이 2개의 사업에 드는 비용은 3천만불이 넘는다"라고 그는 보고서에서밝히곤 했다.

" 다른 소규모와 대규모 사업중도 현재 진행중에 있다"

이러한 사업들 중에는 자동차연료 보급기지를 건설하면서, 여기에 세차장까지 완성 시키는 사업, 또 20,000명 이상이 함께 사용할수 있는 공중목욕탕 건설, 여기에 50척의 작은 배들로 구성된 어선들과, 예멘에서 수입된 2척의 큰배를 묵어 어선함대를 만드는 사업들이 포함되여 있다. 이 어선단을 '아덴만'으로 부터 항해해서 오는데  - '아카페 1' 과 '아가페 2' 로 명명됨 - 드는 비용이 약 $100,000 달러가 소요된다 라고 2010년 있었던 설교에서 밝히고 있다. (Agape는 그리스어로 사랑을 뜻한다.)

Globe and Mail신문은 3시간 분량의 설교 내용을, 직접 들은바 있는 사람으로 부터 입수했다. 그내용에 의하면, '일본해'로 알려지기도한 동해에서 어장 확보로 고기잡이를 할수 있는 합의문에 서명해야 하는것을 언급하기도 했다.  어업은 임목사가 추진하는 가장 핵심사업중의 하나 였다.   건강유지에 필수인 프로텐을 공급하기위한 방법으로, 쉽지않은 고기잡이 사업은 이미 시작됐었다라고 그가 목회했던 교회에서는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사업은 어떤 연유로 중단되고 말았다.  왜냐면 이를 가공할 시설의 부족과 에너지 자원의 보급이 한계점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임목사는 농작물, 즉 밀재배를 하기위한 씨앗을 구입하기위해 미국에서 가장 큰 종자를 재배생산하는 회사와 접촉하여 현재 협의 중에 있다라고 설명하기도 했었다.  그는 또한 돼지를 이북에 수입하기도 했으며, 딸기종류를 남한에 수출하기도 했다.  그리고 회사를 세우기도 했다.

그의 꿈은 원대 했으마, 과연 몇개의 사업들이 그열매를 맺었는지는 확실하게 알려진것은 없다.   그는 보석가공 공장과 보석소매점을 평양에 진출시키기위한 투자에 대해 설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호텔을 구입하는것과 맞물려, 그런 계획이 과연 진행됐었는지에 대한 확실한 내용은 알려진게 없다.  많은 사람들은 임목사의 그러한 사업계획과 욕망은, 선교와 인도적 사업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은다.

조금만 프로젝트도 규모면에서 확장하는 습관이 그에게는 있다.  라면을 조금 수입할려 했던 계획은 결국에는 중국으로 부터 추럭 600대 분량을 수입하는 결과를 초래했었다.  수력발전소 댐을 건설하는 인부들에게 먹일려고 5,000톤 분량의 식품을 들여 오기도 했었다. (이북주민들보다 훨씬 많이 먹는 미국의 보통사람 한명이 일년간 먹는 양은 1톤을 채 넘지 않는다).

임목사는 가발 만드는 공장을 도왔으며, $2천만불에 달하는 800,000개의 안경을 이북에 수입하는데도 도와주었다 라고 2012년에 발행된 신문의 칼럼란에 기고하기도 했었다.

또 그는 2개의 탁아소,3채의 노인전용 집과 초등학교 하나를 건설하는데도 도움을 주었었다.
그는 염소젖을 짜는 북한내 농장에 추럭을 보내 주었으며, 북한의 스피드 스케이트 선수들이 캐나다에서 훈련할수 있도록 도와주고, 카작스탄에서 열렸던 동계아시안게임에 참석하기도 했었다.

임목사가 추진했던 여러개의 사업중에서 그가 목회했던 '큰빛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진 프로젝트가 어떤것들인지는 확실하게 밝혀진바는 없으며, 그자신의 노력으로 된것 또한 밝혀진바는 없다.  이북에 교회성금 수백만 달러를 보내는 토론이 있었다고 밝히고 있으나, 교회가 Canadian Charitable Organization에 보고하기위해 작성한 filing에는 그가 후원하는 사업이 진행되고 있는 나라에 대한 언급이 전연 없었다.  그는 여러 교회들과 미국에 거주하는 잘사는 후원자들을 통해  많은 액수의 성금이 모아지는 확실한 발판을 갖추고 있다.

큰빛교회는 북한에서 사업을 확충하면서 이에 곁들여 인도적차원의 사업을 하는 외부구룹에 들어있지 않는 단 하나인 셈이다.  수많은 원조구룹들은 소규모 공장을 짖고 영농을 도와주고 있다.  문선명교회로 호칭 되기도 하는 '통일교'는 평화자동차공장에 합작투자하고 있다. 여기서 생산된 SUV차, 고급차 그리고 픽업추럭들은 이북에서 팔리고 있다.

임목사가 "교회 조직을 이용하여 사업을 운영하고 있는 첫번째 사람이 아니다."라고 서울에 주재하고 있는, 사업분쟁조정위원회(An anti-conflict advocacy)인  International Crisis Group의 프로젝트 부책임자인  Daniel Pinkston씨는 설명한다.

교회들은 재정적으로 또는 경제적으로 어느 장소에서 사업을 하는데 이익을 창출하는것과는 상관없이 얼굴마담역활을 하는 단제중의 하나일 뿐이다.  북한이라는곳은 사업을 해서 창출된 수익금이나 이윤을 이북 밖으로 반출하도록 허가해주지 않는 곳이다 라고 오스트리아 국립 대학에서 한국학을 전공하고 있는 Leonid Petrov씨는 설명을 한다.

비즈니스를 한다는것은 북한주민들에게 시장의 원리를 가르치는 셈인데, "그렇게 되면 북한 주민들이 북한정권에 의지하지 않고 자립할수 있다는 뜻이다.  비록 모든 한인들이 북한정권이 무너지기를 원하긴 하지만 그것은 실제로 매우 어려운일이 되고 말것이다.  왜냐면 북한 주민들에게 물고기를 잡을수 있는 능력을 주는것은 매우 나쁜 일이되기 때문이다"라고 토론토의 인권운동가 Mr.Kim은 설명한다.


Need for caution

일부교회와 인도적 차원의 도움을 주는 단체중에서도, 조심스럽게 행동해야만 하는 북한에서 임목사의 돌출 행동은 좀 도가 지나쳤었다고 얘기한다( 북한에서 선교는 불법이다)

몇년전 Auckland에 있는 장로교회 목사, Stuart Vogel씨는 북한의 학교에 컴퓨터를 사주기위해 성금을 모았었다.  목적외의 사용을 피하기위해, Vogel 목사는 뉴질랜드의 외교부 직원들과 만나 "이북에 보내는 컴퓨터는 학교 교육용으로 사용되야 하며, 절대로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돼서는 안되게 해야 한다"라고 조건을 달았었다.  컴퓨터를 보내는것은 정부의 봉쇄정책을 위반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돈을 보내 컴퓨터 대신에 교과서를 구입하는데 사용하도록 했었다.

"실질적으로나 도덕적 관습 면에서 모든것은 마음데로 할수가 없게된다"라고 Vogel목사는 말한다.

임목사의 가장 큰 프로젝트중의 하나는 평양에 5층빌딩을 건설해서 그곳에서 컴퓨터와 영어학습을 향상시키는 훈련센터를 운용하는 것이었다.  북한정권에 의해 운영되면서 컴퓨터기수술을 가르치는것이 주된 목적이었으며 이와 병행하여 영어로 선생들을 훈련한다는것이었다.
큰빛교회는 일년에 3번 또는 4번 정도 이러한 일을 돕기위해 자원봉사자들을 파견 운영 했었다.

큰빛교회 성도로 운영센터에서 북한관련 조직에 참가 했었던 Jamie Kim씨는 교회에서 했던 일들은 "상식을 벗어난 특별한 작업은 아니었었다"라고 두둔하고 있다.  그는 Harvard나 Yale대학들이 기독교에 뿌리를 두고 있었던점을 지적하면서, 서구의 선교사들이 한국의 유명 대학들을 설립운영하는데 중심역활을 했었다고라고 강조한다.

그는 강조하기를  기독교인들은 북한과 관계를 맺고 또 이해시키는 진정한 "Ambassadors"라고 강조한다.  "수많은 좋은 일들을 하는것이, 이북같은 나라를 고립시키거나 비난해서 어렵게 하는것 보다, 훨씬 좋은 결과를 창출 할수 있다"라고 그는 설명한다.

그는 여러면에서 사업을 벌이고있는  교회의 행위는 결과적으로, 자국 국민들을 괴롭히는 범죄행위를 일삼는 북한정권을 돕는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는 UN의 비난을 그는 반대한다.

"우리는 어쩌면 북한정권의 리더쉽에 동조할수는 없으나, 그렇타고 해서 우리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어린아이들, 여성들 또는 일반 사람들을 외면할수는 없지 않은가" 라고 대변한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무엇을 하는게 고난속에서 헤매는 주민들을 돕는 일이고,  또무엇을 하는게 북한통치자 김정은을 돕는일인가를 구별하는것은 매우 어렵다.  북한주민들을 인도적 차원에서 도왔던 3명의 봉사자들은 말하기를, 북한의 지방관리들은 교회로 부터 보내온 구호물자들을 지역 주민들에게 배분하면서 설명하기를 위대한 지도자동지의 은덕의 공이다 - 즉 인도적 차원의 원조를 하는 행위가 북한 정권의 흑색선전으로 둔갑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관리들이 인도적차원의 봉사자들이 할수 있는일과 할수없는 일들을 지시받아야 하는 북한에서 자원봉사하는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외부로 부터의 간섭을 요구받기도 한다.

아직도 봉사활동을 했던 상당수의 사람들은 임목사가 인도적차원에서 도왔던 사업의 그뒷면에 깔려 있는 목적을 이해을 이해 해 볼려고 몸부림 치고 있다.  그는 지방관리들의 주장에 응하기위해 공중목욕탕을 지었다 라고 2010년 설교에서 밝히고 있다.   그가 벌인 사업중 일부는 군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즉 제대군인들을 위한 병원건축하고 의료장비를 설치해주는 것들이 이에 포함된다.

북한의 제 2도시인 함흥에 유류저장소를 건설하는데 도움을 준것도 많은 의문점을 낳게한다.
2012년도에 이공사가 완공됐을때, 그지역에서는 가장큰 유류저장소였으며 자동차세척장까지 겸비했었다.   기름은 트랙터와 어선을 움직이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기본부품과 같다. 즉  깊은 뜻이 그속에 포함될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농업발전을 위해 유류배당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군사목적 다음순위에 두고 있다.

현재 북한에서도 자가용차 소유가 늘어나고는 있으나,  북한정권의 엘리트 구룹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주유소는 "인도적 차원의 도움을 주민들에게 주는것 보다는 사업에 더 많이 이용된다."라고 2007년부터 2012년까지 북한주재 러시아 대사를 역힘했고,  현재는 모스크바에 있는 국제관련 연구소에서 강의를 담당하고 있는, Valery Sukhinin씨는 설명한다.  그는 임목사가 개설한 개스 주유소에 대해서는 거의 알고 있지 않는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설명 하기를 "북한 사람들은 그들 자체의 석유를 소유하고 있다.  물론 가격이 비싸서 문제다. 그러나 만약에 돈이 있으면 필요한 기름을 구입하는데 하등의 문제가 없다" 라고 설명한다.

Difficulties for Ottawa

지난해에 '조목사'가 기도중에 받은 심상치 않은 느낌이 그를 불편하게 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 부터의 계시 같이 느껴졌었다.  임목사가 북한을 방문횟수를 줄이는게 좋겠다. 나뿐만이 아니고 많은 신도들도 또한 그러한 조언을 했었다."라고 그는 설명한다.

북한 내부사정을 파악하는것이 거의 불가능한 나라인것은 맞지만, 최근 몇개월 사이에 일어난 일들을 생각해 볼때 비록 정치적 문제 일수도 있겠지만, 그이유를 알수가 없다고  한탄이다.

평양당국은 미국의 저널리스트와 선교사들을 포함하여 그동안 감금하고 있었던 사람들을 풀어 주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도대체 이해가 안되는 일들을 저지르고 있다.  2013년에 붙잡혔던 3번째 한국의 선교사가 종신 중노동형을 언도 받고 복역중이다.  지난 4월에는 1997년부터 이북내 외곽지역에서 개발사업에 도움을 주고 있는 German Agro Action팀의 책임자를 추방시켜버렸다.

그이유는 확실히 밝혀진게 없다.  이에 대한 아무런 사유가 밝혀진게 없는 상태에서 임목사를 감금시킨 그뒷면에 뭔가 있을거라는 이론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임목사는 지난해에 캐나다 정부와 접촉하여, 탈북난민들을 위해 도움을 줄것을 요청하기도 했었는데, 그점이 평양당국을 분노케 한것으로 보인다.  Mr. Sok씨는 "임목사가 탈북자문제에 깊이 관여한것 때문에 북한당국이 그를 감금시킨것"이라고 염려하는 점이다.

그의 봉사활동역활에서 발생한 약간의 문제점이 그가 정권내부의 관계자들 또는 일부집단과의 접촉면에서 그의 위치를 이렇게 만들지 않았나 하는 점인데,  특히 내부의 권력암투에서 밀접한 관계가 끊어진것이 그를 위험에 처하게 한것으로 여겨진다.

아마도 그가 가끔씩 북한 주민들의 어려운 삶의 실상에 대해 굉장히 절망적임을 나타내곤 했던 점들이 "현정권실세들의 신경을 건드린 요인이 된것 같다"라고 전 토론토 언론인으로, 북한을 8번이나 들락 거렸던 '송광호'씨는 설명한다.  북한의 국방부장관이 지난주에 숙청됐다.  처음 보도에서는 그가  북한 지도자 '김정은'을 비난했다는 명목으로 처형됐다라고 보도 됐었다.  어쨋거나 임목사가 감금되여 있는 상태에서 오타와는 현재 딜레마에 빠져 있는 상태다.

"북한은 분명 뭔가를 요구하고 있는것 같다.  즉 그들은 연방수상 Harper가 이북으로 달려와 김정은 앞에서 공손한 태도를 보여 줄것을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라고 오스트랄리아의 석학 Petrov교수는 설명한다.   그렇치 않으면 그들은 캐나다 정부에 대해 경제봉쇄를 철회하라 그리고 북한에 투자하고 또 개발원조를 해달라"라는 주문을 할수도 있을 것이다.

반대로 평양 당국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을수도 있다.  역사를 들여다 보면 이와 비슷했던 경우가 있다.  "그들은 단지 정상적인 외교관계를 요구하고, 가능하다면 인도적 차원의 도움을 청할수 있을 것이다." 라고 전북한주재 대사 Sukhinin씨는 추측한다.

임목사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확실히 알아야 한다다.  임목사는 금년에 큰빛교회에서 물러날 의향을 나타냈었고, 그렇게 되면 교회로 부터 자유로워지게되고, 북한에서 벌인사업에 더 몰수 할수 있을것으로 희망해 왔었다.

"그는 조기 은퇴를 할려고 했었다.  그리고 나서 북한의 선교사업에 더 전념하고져 했었다.  그는 현재 벌이고 있는 선교사업과 비즈니스를 한껏 더 확장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라고 Mr.Jo는 설명한다.

Monday, May 25, 2015

구룹 나들이, Earl Rowe Provincial Park에서 즐겼다. May 23,2015.

30여년전 낙시터를 SUV를 타고 들렸더니
낙시터는 악취를 내품고 고통을 호소하는구나
아서라 인간의 자연파괴는 창조주도 포기했음을 내어찌 한탄하지 않을손가.

Earl Rowe Provincial Park은, 나로서는1979년도 여름철에, 당시에는 젊었던 친지들과 함께, 야유회겸 낙씨를 이곳에서 즐겼던 기억이 아련히 있는 공원이다.

오늘은 세월이 흘러가고, 살아온 인생항로에서 새로만나 Fellowship을 나누고 있는 친지분들과 기억을 더듬어 가면서 초여름의 하루를 이곳에서 즐기고, 낚시도 할, 거대한 계획을 세우고, 준비하여 대식구들이 모일것으로 기대를 하면서, 어떤이는 Hwy 400와 Hwy89을 이용하여, 또 어떤친지들은 Local Rd. 50, 또는 Hwy 27과 Cookstown을 거쳐 이곳에 도착한, 금년들어 첫번째, 창조주께서 만들어주신 자연동산에서 음식과 웃음을 나누는 우리들만의 모임을 실행할것이다.

모임에서 항상 보고 느끼는 것이지만,  먹는것이 빠져서는 안되고, 어쩌면 먹기위해서 이곳에 모였다 해도 과언이 아닌것 같다.   Outdoor Activity는 계획을 세울때는 많았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실행에 옮기는 몸움직임이 마음뿐이었다는것을 통탄하지 않을수 없었다.

 벌써 우리들의 모임이 앉아서 준비해온 음식을 나누면서, 입으로만 운동(?)을 하는 세대로 변해 있다는것을 눈으로 보고 확인하면서, 아련한 기억들을 더듬어 보기도 한다.  원래 오늘의 야유회는 남자들이 회원으로 있는 모임인데, 대부분 부부동반으로 온것이다.
 당연히 우리 남자들이 준비해온 음식도 써빙했어야 했는데, 어느새 그러한 일들은 동행한 내무장관님들이 바삐 움직여서 꺼꾸로 우리 진짜 멤버들에게 제공하고 있는게 아닌가?  고맙기도하고, 한편으로는 남은 세월들을 손가락으로 계산할 그지점에 와 있다는 면에서, 생은 참 짧다는 강한 느낌도 허탈감도 곁들여진다.

 1979년도 이곳에 처음왔었을때는, 세상을 호령할것 같은(물론 마음속에서만) 새파란 청년들이었었다.  나는 당시 5살이었던 딸아이와 같이 왔었고, 다른 친구들도 또래의 새끼들을 데리고 왔던 기억이 있다.  부인들은 거의 참석을 못했었다.  생업에 매달려야 했기에 기꺼이 그들이 희생을 하여 삶의 현장에서 일을 하고, 우리 남자들은 그대로 휴가(?)를 얻어 하루를 즐겼던 기억이다.

게임을 하고 낙씨를 하기에 바빠, 아이들 밀착하여 돌보지 못하고 저희들끼리 어울리도록 했었던 기억이다.   지금은 공원의 분위기도 많이 변해, 당시의 모습은 거의 기억에서 찾을수 없다.   하루를 즐기고 늦은 오후가 되여 아이들은 각자 아버지들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가야할때가 됐었다.   이제 겨우 5살된 딸아이의 얼굴이 벌겋게 Suntan 된것을 보고 깜짝 놀라고 걱정도 되기도 했었다.  햇볕은 오랫동안 쬐지 못한 연한 얼굴을 보호하기위해, 오랫만에 야외에 나와 강한 햇살을 피하기위한 모자를 착용 했으나, 역부족이었었나 보다.  지금 같으면 Sun Block Cream 도 찍어 바르는 등의 대비책을 세웠을텐데....집에 도착하여 딸아이가 엄마에게 했던 한마디가 지금도 가슴깊은 곳에 맺혀 있음을, 오늘 이곳에서 다시 생각나게 한다.

"엄마 썬가(햇볕) 나를 미워 했나봐. 얼굴이 아파"  그게 엄마를 보자마자 한 첫마디였다.  엄마는 혀를 끌끌 차면서, 엄마가 동행을 못했으니 아빠가 아이 돌보는게 오직 했으랴?라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 보았던 기억이다.  그뒤 아이는 며칠동안을 고생했었다.
 낙싯대를 Pond에 드리우고 삼삼오오 구룹을 지어, 우리는 과거 이야기를 하기에 정신없이 빨려 들어갔다.  내무장관님들은 남자들이 떠난 그자리에서 다시 뒷정리를 하고....
 Physical Exercise는 자연적으로, 남자들은  Angling 하는것으로, 여자분들은 음식먹었던 Shelter에서 모여앉아 이바구하는것으로, 굳이 끼어 부친다면, 운동을 한 셈이다.   그만큼 몸과 마음이 같이 움직이지 못한다는 뜻이다. 뛰는것 보다는 앉아서 시간 보내는게 더 편하기 때문이다.
멤버 P 는 산소호흡 보조기를 끼고 고맙게도 참여하는 열성을 보여 주기도 했다.  물론 P의 내무장관님이 그주위를 떠나지 못하고 살피는 고마운 모습도 오늘은 무척 아름다워 보였다.   이름 봄철이 되면 각종  Waterfowl들이 새생명을 잉태하여 아직 노란 솜털을 입은채, 정신없이 풀을 뜯는 그곁에서 엄마, 아빠 새들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새끼들을 보호하는 그모습과  Overlap된다.

 낙씨하다 놓쳐버린 물고기는 항상 더 커보이기 마련이다.  얘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한 친지가 낙싯대가 움직인다고 소리쳐서 모두가 그곳에 시선을 돌렸는데, 제법 Fishing Pole의 끝부분이 강하게 휘여진다.  한참을 씨름하는 진지한 모습을 보면서, 과연 큰 고기인가보다 라고 기대를 하면서 무사히 건져 내기를 모두가 빌었다(?).  Hook에 걸렸던 고기가 한수 위였던게 확실하게 나타난 순간이 왔다.  용케도 도망쳐 버린 것이다.  팔뚝길이만 하다고 외쳤던 허풍(?)을 그대로 믿고 싶다.  그래서 한판 신나게 웃는 것으로 운동을 대신 했다.

 

 추억을 만들어 오랫동안 간직하기위해 모두가 모여 한자리에 모였다.  멤버중에서 막내격인 S 가 몰아부쳐 겨우 사진한장 찍을 Formation을 만든 것이다.  다 시들어 버린 모습을 담아서 뭐 하겠느냐고 한마디씩 하면서도, 사진촬영에 빠지고 싶지는 않다는 표시이다.  그대로 밝은 얼굴들이 마치 유치원생들의 나들이에서 쪼무래기들이 티없이 뛰놀고 칭얼대면서도, 환한 웃음을 발산하는, 그런 모습들을 연상케 하는 순간이다.  손자 손녀들을 떼어놓고, 대신 그역활을 해보는 우리들만의 순간이기에 더 기억에 남을법 하다.
세월은 많이 흘렀지만, 참 좋은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거의 모두가 카메라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활의 필수품이 된  Cell Phone 을 이용하여 순간 순간을 놓치지 않고 고스란히 담기 때문이다.  멤버들 모두가 "찍사" 노릇을 번갈아 가면서 한다.  인화지 위에 새겨진 빗바랜 사진들을 보던 때가 머리속에서는 엇그제로 기억되는데.....


 멤버들 모두가 십시일반으로 오늘의 모임을 위해 먹고 마실 음료수들을 준비해 오긴 했지만,오늘 모임의 책임자이자 Leader인 R 이 멤버들을 위해 준비해왔던 식사도구들을  Packing하고 있는 모습이다.  말없이 맡은바 임무를 해내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큰 조직이나 작은 조직이나  Leader 는 먼저 앞서 움직이는 행동을 보여주고 실천 해야 조직이 활성화 되고, 건전해 진다는 평범한 진리(?)를 그는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Thank you Mr. R and your partner who had prepared quietly for our outdoor activity.   문득 고국의 여의도 정치판의 협잡꾼들이 우리의 이 조그만 모임을 보면서 뭔가를 느꼈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이얼마나 탐스러운가.  수퍼마켙에서 제일 비싸게  팔리는 버섯종류중 하나이다.  오늘 이곳에서 본 버섯은 야생종이라 더 향이 짙다. 모습이 너무도 건강해 보이고 귀여워, 채취를 못하고 카메라에만 담았다.  물론 같이온 친지들은 모른다.  나혼자 슬쩍 숲속을 헤매다 보았기 때문이다.  슈퍼마켙에서 팔리는것들은 농장에서 재배된것들이다.  그래서 이버섯은 더 귀한 것이다.

바쁜 생업을 잠시 접어두고 두시간 이상을 달려서 오늘 이야유회에 참석한 L 부부의 정성도 고마웠다.  오랫만에 자연속에 묻혀서 복잡한 인생사 뒤로하고 먹고 마시고, 살아온 얘기들을 나누고....인생이 별것이더냐.  이런 순간을 즐기는 순박한 삶이 진정 행복이 아닐까?

Sunday, May 24, 2015

국가를 반역한, 탈북한 아이들까지도 용서한 북한 정권 - 선전이 아닌 진실이었다면...

북한이라는 집단의 내막을 파고 들면 들수록, 서방의 자유세계에서 사는 사람들이 느끼는 심정은 '개 돼지'라도, 입만 열면 거짖으로 꾸며지는 그들의 "Human  Scum"에 진절머리를 치지 않을수 없는, 사람의 탈을 쓰고 살수 없는 곳이라는것을 더 극명히 알수 있게된다.  이런 참극의 끝은 언제쯤 오게 될까?  

핵무기를 개발하고 탄도 미사일을 허공에 쏘아 댄다고 그어느누가 "참 잘한다" 라고 응수 해줄 사람이나 집단이 그어디에 있을까?  우리 북조선의 안전을 위협하는 미제와 미국의 앞잡이 남조선으로 부터의 공격을 막기위한 자위책이라고 아무리 선동을 해도, 귀가 막히고 눈이 가려진 북한의 인민들도 믿지 않는다는것은, 지구상의 모든 인류가 잘 알고 있는 일이다.  오직 Kim's Regime의 일부만 모르고 있을 뿐이다.  안타깝다.

이런 Beast집단에게 인도적 차원의 원조를 쏟아붓는 남측의 Hypocrite 들에게도 문제가 너무나 많다고 본다.  

CNN의 보도팀이 이북에 재입북하여, 현지에서 보도한 내용을 옮겨 놨다.  진짜 내용은 그들이 미국으로 되돌아 왔을때, 앞서 애기했던것처럼, 가능할것으로 보인다.

http://www.cnn.com/2015/05/19/asia/north-korean-child-defectors-revisited/index.html

평양, 북조선(CNN) - 꽃제비, 문학적 의미로는 "꽃을 전달하는 제비", 마치 시를 읽는 느낌이지만 실상은 이와는 정반대의 뜻이다.

북한에서 쓰이는 의미는 집없는 아이들, 가족이나 국가에서 보호를 받지 못하는 아이들을 뜻한다.   이말의 어원은 한국전쟁의 참상에서 찾을수 있다.  러시아말의 "코체비"를 연상케 되는데, 그뜻은 "정처없이 헤맨다 "라는 의미가 있고, 1950-1953년사이에 있었던 한국전쟁으로 흩어진 아이들과 연관된다.

1990년대에 북한에는 수년간 매우심한 가뭄으로 농작물 수확이 현저히 줄어들어 수만명이 굶어 죽는 흉년이 이어졌었다.  온나라의 식량배급망이 깨져 버렸고, 가족들이 흩어지는 참상이 이어졌었다.  꽃제비들이 엄청나게 늘었다.


오늘날에는 그때에 비해 상태가 많이 좋아지긴 했으나, 북한은 아직도 배고픔에서 헤여나지 못하고 있다.  식량 배급상태는 여전히 큰 문제로 남아 있다.  수많은 꽃제비들은 여전히 거리를 헤메고 있다.

The Reveal


북한은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비밀에 싸여있는 사회이다.   최근에 CNN 방송팀이 북한을 방문 했을때, 우리들의 모든 스케쥴은 북한 정부 담당자들에 의해 작성되곤 했었다.  그들은 우리일행의 일거수 일투족을 밀착하여 감시 했으며,  우리의 방송계획을 미리 알려 달라는 부탁을 했었으나 결과는 허사였으며, 불과 두서너시간전에야 겨우 우리가 할수 있는 순서를 겨우 알수 있었을 뿐이다.

어느날 오후에 우리가 묶고 있는 호텔에서 모임이 있을것이라는 통보를 받았었다.  그러나 우리는 미팅룸에 누가 있는지를 알수가 없었다.  다만 탈북자들과 만난다는 내용 뿐이었다.
우리 일행이 문을 열고 들어섰을때 그곳에는 8명의 젊은 청년들이 큰 회의용 원탁테이블의 한쪽에 앉아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금방 우리는 이들이 우리가 만날 상대임을 알게 됐다.

'Human Scum'


2013년 초여름에 전세계의 언론은, 당시 14에서 19세였던 9명의 북한탈출 아이들이 '라오스'에서 붙잡혀 북한에 되돌려 보내지는 사건을 맹비난한적이 있었다.   그들은 한국출신의 선교사팀에 의해 북한을 탈출, 중국을 거쳐 한국에 들어 갈려고, 라오스 국경을 넘는 와중에 국경경비대에 붙잡혔었다.

http://edition.cnn.com/2013/09/30/world/asia/north-korea-laos-defectors-hancocks/

평양당국은 탈북자들에 대해 증오를 갖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들 탈북자들에 대해, 북한 국영 방송은 'Human Scum' 라고 몰아 부치면서, 조국과 조국의 명예와 돈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들을 버린자들이라고 거짖설명하면서,  크나큰 범죄행위라고 비난 했었다.

어린탈북 아이들을 이북으로 되돌려 보내는 사건을 전세계는 맹비난을 퍼부었었다.  그들이 닥칠 운명을 쉽게 예측할수 있었다.  즉 아이들은 북한에 보내지면 즉각 감옥에 처넣을것이다. 평생감옥생활을 하거나 심할경우 사형까지 당하게 될것이다 라고.

그러나 우리가 문을 열고 들어선 이호텔방에는 거의 2년전에 되돌려 보내졌던, 소위 '꽃제비'들이 앉아 있었던 것이다.  4명의 젊은 청년들은 파란색의 대학생교복을 입고 있었으며, 2명의 소년들과 2명의 소녀들은 고등학생 교복을 입고 있었다.  이들 모두는 우리가 묻게될 예상질문에 대한 답변을 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에 붙잡혀 북한에 되돌려 보내졌던 9번째의 아이는 평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대학에 다니고 있어, 갑자기 급조된 이번 미팅에 참가할수 있는 시간이 없어 데려 올수 없었음을 알수 있었다.   


Leaving home


그들이 중국으로 탈출할 당시 나이는 12세 - 17세로, 소구룹으로 구성되여 중국으로 넘어온 다음 선교사들이 살고 있는 집에서 모두 만났었다.  

우리는 그들이 대답하기에 매우 난처해할 첫번째 질문으로, 왜 북한을 탈출 했는가?를 물었었다.
"우리는 그때 매우 어렸었다. 우리는 그때 중국에 대한 호기심에서 단지 구경을 넘어 중국에 갔었을 뿐이다."라고 17세의 '이광혁'군은 대답했다.

좀더 구체적으로 얘기를 해줄수 있겠느냐고 물었더니 21세의 '문철'군은 모든것을 시인하면서 "솔직히 말해서, 당시 우리는 집안식구들과 문제가 좀 었었다.  우리는 한동안, 소위 말하는 '고난의 행군'이라는 어려운 시기를 지내야만 했었다.
그때 우리는 매우 어려운 생활을 했었다.  나는 어린 나이였지만 모든게 불만이었었다.  우리는 그때 중국과 북한의 국경지대인 압록강 근처에 살고 있었다.  단지 중국을 구경한후 다시 집으로 되돌아 올려고 했었다. 단지 호기심뿐이었다." 라고 설명을 했다.  우리팀은 다시 그들에게 "너희들중 몇명이 국경을 넘기전 배고픔을 당했었느냐?"라고 물었더니, 8명중 4명이 손을 들었다.

"그때는 겨울이었다.  우리는 겨울을 지낼 월동준비로 농작물을 비축해 두었었다.  그러나 충분하지는 않았었고, 우리 식구는 많았었다."라고 19세의 박광혁군은 설명을 해주었다.

국경을 넘어 중국에 도착하자마자 이들은 국경지역 도시인 '단동'에 거주하고 있는 한가옥으로 안내되였는데, 그집은 한국에서 건너온, 선교사 부부가 살고 있는 곳이었다. 우리 CNN팀은 편의상 그들 부부를 간단히 M. J.로 지난번 보도에서 밝힌바 있다.

이들 M. J.부부의 설명에 의하면, 이들 배고픔에 허덕이던 아이들은 선교사부부의 보호를 받으면서 지냈었다.  사진에서 본 이들 아이들은 매우 초췌해 있었다. 그들은 1년반동안 이집에서 같이 기거하면서 살았었다.


"이들 선교사부부는 우리에게 "자유"를 가르쳤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에게는 아무런 자유가 주어지지 않았었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알도록 강요 했으며, 성경을 암기 하도록 했었다" 라고 '문철'군은 당시를 회상했다.

"물론, 음식은 풍부 했었다.  그러나 그것 외에는 우린 다른 만족이 없었다. 아이들이 배가 부를때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뭔가를 더 필요로 하게 되는것은 당연하다"라고 그는 설명을 덧부친다.

이젊은이들 만난후 CNN팀은 M. J.과 우연히 연결됐을때, 그들은 아이들이 잘 지내고 있느냐?  그때 이후로 우린 그들을 잃어 버린게 안타깝다라고 대답하는것을 들었다.  그들의 안전을 염려하여 깊은 얘기하는것을 꺼려 하면서, 그학생들은 이북을 탈출한후 많은 도움이 필요 해서 도와 주었었다고 강조했었다.

Detained in Laos


중국은 오랫동안 북한의 동맹국이다.  그래서 북한은 불법으로 중국내에, 탈북자들을 붙잡았을때 추방시키는 시설을 갖추고 있다.  1년반동안 같이 지낸후, 이들 선교사부부는 아이들을 제 3국으로 보내기로 결정을 했다.  중국의 남쪽 국경에 접해 있는 '라오스'를 선택하고, 그곳에 도착하면 무사히 한국으로 보낼수 있을것으로 생각했었다고 한다.
거칠고 두려움속에서 수많은 날을 국경지역의 산악지대를 걸으면서 결국 라오스의 국경 수비대에 붙잡혀 그때부터 유치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들은 결국 이북으로 되돌려 보낼거라는 소식을 듣게 됐을때, 아이들은 무서움에 벌벌 떨었었다.
"선교사는 설명하기를,우리가 이북에 되돌아가면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또한 선교사들은 우리가 조국을 배반하고 탈출했기에 그죄가로 우리 식구들은 다 처형당했다"라고 '문철'군은 설명을 했다.

Return of the prodigals


그러나 죄가를 치르는 대신에, 우리는 아주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라고 설명하면서, 3년동안 허송세월 보내면서 다니지못했던 학교를 다닐수 있도록 학비까지 보조해 주었으며, 우린 지금 평양에서 가장좋은 교육시설이 되여 있는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다라고 설명까지 해주었다.

"나는 모든게 두려웠었다. 나는 죄책감을 갖고 집을 떠나서 해외에서 시간을 허비했었다.  우리는 조국을 배반한 셈이었다.  그래서 나는 처벌을 받을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평양에서 가장 좋은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있으며, 우리고 염려 했었던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망상이었던가를 알고 있다" 라고 '박광혁'군은 시인하고 있다.

그들이 이북에 되돌아 오자마자, 그들은 평양 TV에 출현해서 남한사람들의 꼬임에 빠져 탈출했었던 당시의 상황을 맹비난 했었다.  그로부터 1년 이상이 지난 지금,  그들은 다시 전시대에 진열되여 있는 꼴이 됐다.

그아이들은 북한당국의 배려로 "죄를 용서받고 잘 지내고 있다"라는 포스터 아이들이 되여 있다.  이아이들의 삶이 당시 중국을 향해 떠날때와 지금사이에는 많은 변화가 있다.  " 나는 지금 왕자가 되여있는 가난뱅이 같은 느낌이다"라고 '이광혁'군은 설명한다.


그러나 이북의 해외 선전장인 평양에서 그들의 부모는 만나지 못했다.  그들의 부모는 여전히 중국과의 국경지역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으며 그들의 삶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http://www.cnn.com/2015/05/15/asia/north-korean-foreign-workers/index.html

우리가 다시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물었다 "만약에 한국에 들어가 살게 됐더라면 어떻게 됐을까?"라고,  그의 대답은 "만약에 내가 한국에 들어갔었더라면, 식구들을 버리고 달아난 패륜아라는 낙인이 찍힌 국가 반역자가 되였을 것이다.  나는 '지구에서 있어서는 안될 패륜아'라는 낙인이 찍히고 벌써 역사속으로 사라졌을 것이다"라고 '문철'군은 설명했다.

http://www.cnn.com/2015/05/26/asia/north-korea-hula-hooping/index.html

이북을 방문중에 있는 CNN팀의 활동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