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May 11, 2020

Coronavirus Pandemic이, 장례식,결혼식을 포함한 시민문화를 통째로 다 바꾸고 말았다. 조문객, 축하객수가 10명 미만이었다. 이럴수가...


Coronavirus Pandemic이 세상사람들의 일상생활을 다 바꾸어 놓았다는 증거가 여러곳에서 나타난다.
젊은이들의 사랑과 거기서 더 발달하면 결혼에 골인하는 과정도 번개불에 콩 볶아먹는식으로 진행되는, 그것도 Pandemic 방어용 Face Mask를 쓰고....
축하의 잔치는 꿈도 꾸지못하고 겨우 등기소에 가서 결혼증명서를 발급받는것으로, 일생에 한번있는 혼례식을 치러야 하는 세상.

사랑하는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들중의 한분이 Eternal Life여행을 떠나는 환송식, 장례식에도 장례를 집전하는 성직자분을 포함하여 10명만 참석하도록
Decree를 세상사를 다바꾸어 놓아, 쓸쓸한 영원의 여행을 떠나도록 해야만 하는, 이런 세상이 과연 살만한 삶의 터전이라고 할수 있을지?
며칠전 같이 신앙생활을 오래했고, Trail Walk도 오랫동안 같이 했었던, 친지의 어머님께서 96년 동안 살아오셨던 삶을 마감하시고, 영원의 나라로 여행을 떠나시는데,
10명만 허용되는 관계로, 천국으로 떠나는 환송식에 참석을 할수가 없었다. 후에 들은 얘긴데, 가족들도 다 참석 못했었다는 슬픈 소식이었다.


눈에도 보이지 않은 Coronavirus때문에 온 천지가 Lockdown된 사회속에서 모든 대인관계가 불통상태의 환경을 생각해 보면, 나를 포함한 우리 인간들의
허풍이 그얼마나 허풍인가를 70대 중반을 살아가는 내인생에서 새삼스럽게 통감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면서도 삶을 포기할수는없어,  막연한 기대감을 버리지못하고, 오늘도
나의 일상생활중 가장큰 Activity인 약1시간 30분정도 Lake Ontario를 따라 이어지는 Trail route를 걷는것이다.  그때문인지는 몰라도, calf에는 눈에 많이 띄게 Muscle
붙었다. 기분이 나쁘지 않다.  이다음 어디에 활용해 보겠다는 목적의식도없이....한가지위안이 되는것은, 나와 관계를 맺고있는 이웃사람들에게 짐이 되지는 말아야 하겠다는
신념으로 버티면서 걷고.... Social distancing을 철저히 생활화한다.  이태원이나 강남의 Night Club에서는 밤이면, 서로 엉겨붙어 꾸물대는 구데기 같은 인간들이 이곳에는
없다는게 그나마 불행중 다행이고, 법준수를 하는데는 지위의 고하에 따라, 고무줄 처럼 늘었다 줄었다하는 눈꼴 사나운 광경도 전연없어, 그런데서 받는 스트레스는 없다.

현재는 CNN의 홍콩 특파원으로 근무중인 Ivan Watson이 자기의 결혼식을, 하객도 없이, 짧은 기간 동안에 서둘러 해야만 했던 자신의 결혼 얘기를 두려움과 허탈감속에서 주의있게 에세이 형식으로 보도한것을 여기에 옮겨 놨다.



"마스크를 벗어도 될가요?" 나는 내신부와 함께 혼인신고 사무실에 들어 서면서 담당직원에게 물었다.
"예 당신들이 편하다면요" 홍콩의 담당공무원의 대답이었다. 그자신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바로 이어서 나와 신부 Rana는 결혼반지를 교환하고, 결혼신고서에 서명하고, 보통 결혼식에서 하던 식으로, 간단한 키스를 했었다. Coronavirus Pandemic이 번창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확실치 않은 상태에서, Rana와 나는 이렇게 해서 결혼식을 마친셈이다. 

지구반대편에 있는 나의 가족들과 미국에 있는 친구들과, 레바논과 그외 지구촌 어딘가에 있는 친지들은 이렇게 나의 결혼식을 Instagram이용한 생중계를 보면서 축하해준것이다. 이모지와 행복함을 미디아를 통해 만든 비디오를 주고 받으면서 가족들도 즐긴것이다.

결혼신고식을 마치고, 우리는 각자 다시 마스크를 쓰고  사무실을 나왔는데, 마스크에는 "Mr." 와 "Mrs."라는 타이틀이 새겨져 있었다.
지난해 12월의 어느 추운날 뉴욕시에서 그녀에게 내가 사랑고백하면서 결혼해주겠느냐고 청혼했을때는 이러한 결혼식을 하게 될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그때 우리가 일하면서 살고있었던 홍콩으로 부터 긴비행을 한후여서 젯트레그 상태에 있었지만, 깜짝 사진촬영을 하기위해 나와 내누이동생과 처남과 함께 휘황찬란하게 장식용 전등불빛 앞에서 가장 행복한 포즈를 취했었다.

그렇게 좋았던 순간도 중국의 우한시에서 발견된, 전연 치료의 단서가 보이지 않는 치명적인 신종폐렴으로 4개월 반동안 우리의 삶은 Coronavirus Pandemic에 꼼짝 못하고 지냈었다.

우리부부는 이번 치명적인 위기의 Pandemic에 익숙하지는 않다. 아내 Rana는 내전중인 Beirut에서 성장했다. 내전으로 그녀는 아버지를 잃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내전에서 목숨을 잃었었다. 거기에 비하면 나의 어린시절은 무척 안락한 삶이었었다고 하겠다. 20년간 외국에서 일어난 전쟁의 참상, 자연재해 그리고 정치적 불안정을 내용으로 한 뉴스를 보도하는 기자생활을 해왔었다.  아직까지는 우리부부는 지구를 뒤덮고있는 현대판 재앙에 직접적으로 고생하지는 않았었다.

1월말에 한통의 전화가 나의 단잠을 깨웠는데, 바로 홍콩정부는 학교를 폐쇄시키고, 리크리에이션센터를 폐쇄하고, 시정부 공무원들에게 재책근무 명령을 내렸다는 내용이었다.
우한시에서 처음 발생한 Coronavirus Pandemic이 홍콩과 마카오에서 첫번째로 발견된 것이다. 홍콩주민들은 우왕좌앙하지않고, 전홍콩인들에게 마스크 착용을 실시 했었다.
우리도 마스크를 착용하고, 2월초에 출생신고, 사망신고등의 사무를 보는 등기소에 결혼날자를 신청하기위해 들렸었다.

고향의  가족이나 친구들은 나의 안부를 묻는 연락이 자주 있었다. 그러나 Coronavirus Pandemic에 대한 그들의 반응은 "아시안 나라"사람들의 문제일뿐 이곳 지구반대편에 떨어져있는 자기네들과는 하나도 상관없는것처럼, 강건너 등불식으로 얘기를 하곤 했었다.

Rana의 걱정은  날이 갈수록 더 커져만 갔지만, 나는 그반대로,  2월말에 한국에서 근무를 하라는 본사 명령이 있기까지는, 매우 긍정적이었었다.
그때에, 한국은 중국본토 밖에서 발생한 Coronavirus 전염병이  가장 많이 전염되고 있을때였었다. 3월초에 하루에 수천명씩 양성반응 확진자가 발생하고 있었다. 국제선 항공은 거의 폐쇄되고 있었고, 내가 서울에서 묶고있는 호텔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텅텅 비었었다.

3월10일, 서울에서 홍콩으로 되돌아 갈수있는 유일한 통로는 멍청하게 영국 런던을 거쳐 가는 긴 항공로 뿐이었었다. CNN의 카메라맨 Tom Booth와 내가 영국항공을 탑승하고나서 발견한것은 기내 승무원들이 마스크를 비롯한 아무런 보호장비를 사용하지 않고 근무하는것을 보고 놀랐을 뿐이었다. 런던 히드로 공항에 도착하여 통관수속하는데 아무도 승객들의 발열상태인 체온을 점검하는것을 목격하지 못했었던 점이다.  마치 영국은 이렇게 무서운 전염병이 발생하지 않을것이라는 분위기였었다.

홍콩에 도착했는데, 보건당국은 나를 당장에 2주간 강제적으로 건강관리를 탐지하는것이었다. 나는 체온을 하루에 2차례씩 점검했었고, 만약에 통증이 발생하면 즉시 보고하도록 했었다. 비록 건강관련 담당자들은 나에게 필요한 조치를 취하도록 조언을 했지만, Rana는 2주간의 격리기간동안에도 나와 함께 있겠다고 주장했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둘은 아프지 않고 무사히 격리기간을 마칠수 있었다.

그렇게 3월달을 보내는 동안, Covid-19전염병은 마치 산불이 퍼져 나가듯이, 중도지역, 유럽, 북아메리카를 덮치고 있었다. 갑자기 Rana와 나는 미국과 레바논에 있는 부모님들걱정하지 않을수 없었으며, 홍콩에서 생활하고있는 우리자신이 걱정되는 것이었다. 

소년기를 지나 성인이 되면서부터 거의  외국에서만  생활해온 우리둘은 몸이 아프게되면 어떻게 할것인가에 대한 현실을 생각하게 됐었고, 비상상황이 발생했을때,  더이상 비행기를 타고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는곳으로 쉬게 날아갈수 없다는점을 실감하게 된것이다. 그러한 어려움과 두려움의 와중에 한가지 희망이 보인것이다.  이런 전염병속에서 우리는 서로 의지할수 있다는 점이었다. 사회적격리라는것은, 비즈니스여행을 할수없고 계속해서 한곳에서 근무해야 한다는것을 의미함을 알았다.

가족중의 하나인 고양이와 우리가족은 파자마 바람으로 재택근무를 하는데 익숙해졌고, 집에서 어설프게 만든 음식으로 끼니를 때워야 했었다.
Coronavirus는 우리들의 삶을 완전히 중지시키고, 우리의 축복도 거의 가로챈 셈이다. 온세상천지가 증오에찬 거대한 교훈을 가르쳐 주었고, 우리의 존재는 무력하기 짝이 없어졌고, 무슨 사건이 터졌을때 아무것도 우리맘데로 조절할수가 없다는 교훈을 준것이었다. 아무것도, 우리의 건강, 우리의 머리로서는 한계에 달했고, 밥상의 음식물을 포함하여 어느것 하나 보장된게 없다는 점이다.  그래도 우리의 삶은 계속 굴러갈뿐이었다.

"그랬어도, 너희들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2차 세계대전중에도 결혼은 했었잖나" 라고 나의 엄마는 그점을 상기시키시였었다.
엄마의 말씀은 정확했었다.  러시아의 내전으로 부터 도망쳐 나와 피난민이 됐었던 나의 조부모님은 나치독일군이 불란서를 점령했을때의 무서운 환경속에서도 가정을
이루셨었다.  그어려웠었던 환경을, 약혼후 대부분의 시간을 소파에 앉아 TV를 보는 나와 Rana가 겪는 어려움과 비교해 보면 "우리의 고생은 너무도 행복한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여기까지는 그런데로 무사히 견뎌냈다. 그런데 우리의 결혼식 1주일전에 집안에 난리가 났었다. Rana의 84세된 할머니가 스트록으로 쓰러지셨다. Beirut에 병원의 중환자실에 할머니는 입원해 있으며 뇌수술을 받으셨다.  우리는 이런 재앙앞에서 아무것도 할수없었다. 만약에 Lebanon행 비행기를 타고 그녀의 가족들한테 달려간다해도, 비행기안에서 전염병에 걸리지 말라는법이 없잖은가.  고맙게도 수술후 안정을 되찾았고, 할머니는 매우 강한 분임을 다시한번 보여주신 것이다.

마침내 우리의 결혼식날이 5월달로 잡혔었다. 우리는 의사들이 사용하는 마스크를 얼굴에 쓰고, 마스크겉에는 사인펜으로 "신랑" 그리고 "신부"라고 표시했었다.

홍콩시의 가이드라인은 결혼식에 최고 20명까지 허용하고 있었으나, 정작 우리 결혼식에는 고작 8명뿐이었었다.  15분간 진행된 결혼식에서 링을 교환하고 서약하는 순서도 없었다. 설명 가능했다해도 우린 그런 절차가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Coronavirus 전염병때문에 앞으로 어떤일들이 발생한다 해도 우리는 서로 의지하면서 같이 서있다는것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

평생잊지못할 결혼식을,  Coronavirus Pandemic때문에, 경험하게된 이들 부부에게 앞으로 행복만 있었으면 좋겠다는 나의 Pray가 응답될수 있었으면....


Hong Kong (CNN)"Can we take our masks off?" I ask, as my bride and I get into position.
"You may," responds a Hong Kong official, who is still wearing his mask.
Moments later, Rana and I exchange rings, sign government documents, and share a brief kiss. Amid the uncertainty of the coronavirus pandemic, Rana and I have just gotten married.
On the other side of the planet, our families and friends in the US, Lebanon and elsewhere watch the little civil ceremony in Hong Kong streamed live on Instagram, sprinkling the video with hearts and emojis and other social media expressions of happiness.
 
 
Before leaving the wedding registry, we put on his and hers surgical masks adorned with the titles "Mr." and "Mrs."
This was not what we expected, when I first asked her to marry me on a freezing night in New York City last December.
At the time, we were both jet-lagged after the long flight from Hong Kong, where we live and work. We were also deliriously happy, posing in front of a glowing fountain alongside my sister and brother-in-law, who conspired with me to take surprise photos of the occasion.
Basking in that happy moment, we had little clue that a deadly new strain of pneumonia had just been discovered in a city called Wuhan in China -- and the next four and a half months of our lives became our Engagement with Coronavirus.
 
 
Neither of us are strangers to crisis.
Rana grew up in Beirut in a civil war. At a young age, she suffered the loss of her father, one of many tragic victims of that conflict.
While my childhood was much more comfortable, 20 years of reporting overseas exposed me to the grim realities of war, natural disaster and political instability.
Still, neither of us had ever been confronted by a modern-day plague of global proportions.
The wake-up call came at the end of January, when the Hong Kong administration canceled schools, shut down public recreation centers and issued work-from-home orders to civil servants. The coronavirus outbreak in Wuhan had spread across China, and the first cases had been detected in the semi-autonomous cities of Hong Kong and Macau.
Hong Kongers didn't mess around. Immediately, the whole city started wearing masks.
We did too, when we went to the Births, Deaths and Marriages Registrations Office in early February to apply for a date to get married. 
 
 
Friends and family back home called to express concern about our health. But they spoke about the epidemic as if it was some distant threat, an "Asian" problem that would never reach their shores.
As Rana became more and more worried, I remained naively optimistic -- until a reporting assignment in South Korea at the end of February.
At that stage, South Korea had the most confirmed coronavirus cases outside mainland China. In early March, thousands of Koreans were testing positive on a daily basis. Governments increasingly imposed international flight restrictions. Seemingly overnight, my hotel in Seoul became eerily empty.
On March 10, the only way to get from South Korea back home to Hong Kong was to fly absurdly long distances via London. On the flight from South Korea, CNN cameraman Tom Booth and I were shocked to see British Airways crews operating without any protection. No one checked our temperature during the layover at London's Heathrow Airport. Britain apparently behaved as if this deadly disease wasn't happening.
Upon arrival in Hong Kong, health authorities put me on two-week mandatory medical surveillance. I was to check my temperature twice daily and report immediately if I came down with symptoms. Though authorities advised against it, Rana insisted on staying by my side throughout the 14 days. Fortunately, neither of us got sick.

Making the best of it

Then, throughout March, Covid-19 spread like wildfire across the Middle East, Europe and North America. Suddenly, Rana and I were far more worried about our parents in the US and Lebanon, than we were for ourselves in Hong Kong.
For two people who have lived almost all of our adult lives overseas, a sickening realization set in -- we could no longer count on jumping on a plane to fly home to our loved ones in the event of an emergency.
Yet amid the anxiety and fear, a silver lining emerged.
In this pandemic, we had each other. Social isolation meant a pause in business travel and long work deployments. 
 
With our little rescue cat, our small family settled in for weeks of working from home in pajamas followed by cozy home-cooked dinners.
The coronavirus forced us to stop and count our blessings. The entire world has been taught a giant lesson in humility, a reminder that we are subject to forces and events that we cannot control. Nothing -- neither our health, the roof over our heads, nor the food on our table -- can be taken for granted.
At the same time, life must go on.
"After all, your grandparents got married during World War II," my mom pointed out.
She is very right. My grandparents, two refugees from the civil war in Russia, started a family amid the horrors of Nazi-occupied France.
Compare that to me and Rana, who spent much of our engagement on the couch watching "Tiger King" (among other things).
 
 
 
So far, we have had it so easy. A week before the wedding, however, disaster struck. Rana's 84-year old grandmother suffered a stroke. She was taken to intensive care in Beirut and had brain surgery.
There was nothing we could do. Even if there was some way to fly to Lebanon, Rana would not dare exposing her family if she picked up an illness on the plane.
Thankfully, Rana's teta stabilized after the operation. She's a tough lady.
Finally, our wedding day arrived in May. We wore surgical masks with "bride" and "groom" written on them in marker to the registry.
 
The city's coronavirus guidelines allow up to 20 guests at a wedding. We had eight.
There is no time for vows to be exchanged during the 15-minute civil ceremony -- although in some ways, we didn't need them.
After our engagement with coronavirus, we know we will be there for each other, no matter what the future may bring.
 
 
 
https://www.cnn.com/2020/05/07/asia/coronavirus-lockdown-wedding-intl-hnk/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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