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의 은빛모래사장은 주위경관이 좋기도 했지만, 모래사장 뒷편에 무성하게 우거진 송림은 시즌중에는 해수욕을 즐기는 휴양객들에게 또다른 서늘한 휴식처를 제공할것으로 보였고, 이고장의 큰 자랑임을 금새 알아볼수 있었다.
친지 Mr. Oh는 주위경관의 아름다움을 Palm보다 훨씬 더 적은 카메라에 주워 담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순간이 지나면 벌써 과거속으로 묻힐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리라.
1970년대 초에 활동했던 Vocal Group 둘다섯이 "밤배"를 불러 당시 어부로 이곳에서 삶을 살았던 선배들의 팍팍했던 생활상을 그린 노래의 비석이 잘 새겨져 있어, 당시대를 살았던 경험이 있는 나에게는 남의 일로 보여지지는 않았었다.
우리 구룹을 비롯한 여행동료들이 하룻밤 신세를 지게된 C One Resort 전경이다. 여행 동료분들도 거의 Senior들이 많아서 였는지, 새벽부터 일어나 아름다움 주위의 산자락의 Trail walk하기위해 바삐 서둔다.
이순간들은 머지 않은 훗날에, 다시 들춰 볼때는 희미한 기억속에서 "그래도 그때가 좋았었고, 인생사는 의미가 있었다"라고 음미할것이다. 짧은 인생, 부평초같은 인생살이.....
멀리 은빛모래사장, 상주해수욕장의 Beach와 송림숲이 앙상블을 이루어 곧 찾아올 휴양객들을 향해 무언의 손짖을 하고 있는것 처럼 보인다. 파란 바닷물과 Green색의 송림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은빛모래사장이 양쪽으로 부터 보호를 받고있는 모습으로 보였다.
남해금강이라 불리는 금산에 위치한 대한민국의 3대 관음기도처중 한곳인, 보리암에 오르기위해 확트인 길을 걷는 양쪽 나무들에는 며칠 남지 않은 4월 초파일 행사를 알리는 연등이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금산의 최고봉에 위치한 보리암은 사람들에게 많이 Appeal되나 보다. 평일인데도 많은 관람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순진하고, 티없이 맑은 어린이 마음으로, 은퇴생활을 즐기는 이친지가 국가를 위해 밤낯없이 젊음을 불살러 가면서, 불침번을 설때는, 그의 눈은 Laser Beam을 쏟아 내면서, 국가와 국민들의 안위를 보호하기위해 노심초사 했었다는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이친지를 포함해서 수많은 역전의 용사들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너무도 없는것 같아, 아쉬운 마음을 떨쳐버릴수가 없었다. 이런분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의 조국이 있을수 있었을 것이며, 나자신 조국방문을 하면서, 조국강토의 아름다움을 만끽할수 없었을 것이라는것을, 이친지와 함께 하면서, 블로그를 통해서나마 감사의 뜻을 보낸다.
캐나다 정부와 시민들의, 역전의 용사 즉 Veterans에 대한 대접과 감사의 표시를 잠시 보여주는 블로그이다.
"남해금산" 돌비석 앞에서 또 추억을 만들었다. 가는곳마다 관광객들로 발 디딜틈이 없을 정도였다. 여기서 한국은 안보 불감증에 깊이 병들어 있는 민족임을 느낄수 있었다. 한국 밖에서 보는 한반도의 긴장감은, 남의 나라에서 일어나는, 나와는 상관없는 일쯤으로 치부해 버리는, 타성에 젖어있는, 오히려 미국의 한반도 보호에 귀찮아 하는것 같은 심리를 대다수의 국민들로 부터 느낄수 있었고, 특히 대통령 후보로 나선 사람들의 국가 안보관과, 주적에 대한 경계심과 방어는 유치원생 정도의 수준으로 밖에 보이지 않아, 무척 안타까웠다.
금산의 정상에 올라 바라보는 한려해상과 남해의 아름다운 비경은 그냥 우리들만 보기에는 너무나 아쉬운점이 많아 나를 안타깝게 했었고, 몇년전 탐방했었던, 월남의 Ha Long Bay를 생각지 않을수 없었다. 세계 각국을 탐방하다보면, 곳곳에 한국의 관광공사 사무실이 상주해 있음을 봤었고, 내가 살고 있는 토론토에도 사무실이 다운타움에 자리하고 있다. 그들의 임무가 무엇인가는 새삼 설명할 필요가 없지만.... 조국강산의 관광홍보를 위해 분발을 촉구해본다.
서기 683년에 원효대사가 이곳에서 초당을 짖고 수도하면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한뒤로 산 이름을 보광산, 초당 이름을 보광사라고 했다는 역사가 깊들여 있는 뜻깊은 사찰이다. 훗날 조선을 창건한 이성계가 이곳에서 백일 기도를 하고, 조선왕조를 창건할것을 결심 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그감사의 뜨승로 1660년 현종이 이절을 왕실의 원당으로 삼고, 보광산의 이름을 금산이라 칭하고, 사찰 이름도 "보리암"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한가지 이해못할 일은, 쓰레기통이 보이지 않아, 손에 들려있는 Garbage를 버릴수 없어, 지나치는 사찰의 직원으로 보이는분께 물었더니, 이곳은 국립공원이라서, 쓰레기통을 비치해두지 않고, 발생한 쓰레기는 각자가 집으로 가져가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다녀온 사찰이나 관광지에서 쓰레기통을 본적이 거의 없는것 같다는 생각이 번득인다. 웬 세상에 이런식으로 쓰레기를 수거하는 곳은, 지구상에 아마도 대한민국뿐일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매우 잘못된 발상임을 알기에 감히 주문해 보고져 한다. 당장에 쓰레기통을 관광지의 적재적소에 비치해두어야 한다라고. 그래서인지, 쓰레기가 가끔씩 음침한 곳에 처박혀 있었고, 나무가지사이에 끼워놓은 쓰레기를 여러번 보기도 했었다.
이동용 변소는 모두에게 칭송을 들을, 아주 기발한 아이디어 같았다. 다 좋을수는 없는 법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라고 한다. 쓰레기통 비치를 안하는것은, 소변이나 대변을 해결해야 하는 탐방객들에게, 변소를 제공하지 않는것과 같은 범주에 속한다고 단언한다.
독일마을을 탐방했다. 1960년대 중반에, 당시의 젊은 청춘남녀들이 독일로 날아가, 광부로 간호원으로 근무하면서, 가난한 조국에 달러를 벌여 들였던 산업역군들이 은퇴하여 독일에 살면서, 이곳에 이주해와 그들만의 전원 생활을 하고져, 이곳에 마을을 형성했다고 한다. 그러나 보니 생각보다는 생활여건이 구비되지 못해 결국 많은 사람들이 다시 독일로 돌아가고, 현재는 약 30%정도만 정착해 있고, 나머지 주택은 임대를 하고 있다고 들었다.
별로 좋은 소식은 아닌것 같아, 마음이 조금은 편치 않았다. 1970년대 중반에 독일에 연수 갔을때, 뒤셀도프에 있는 한국영사관에서, 영사로 부터 이들 광부와 간호사에 대한 얘기를 들었었기에 더 그들의 노고를 생각하게 된다. 당시의 영사관 직원들은 이들 산업역군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지 못하고, 이들이 영사업무에 귀찮은 존재로 인식하고 있음을 느꼈었다.
그들의 하소연에도 이유는 있었다고 이해를 했었지만, 이들 산업역군들이 꼭 외교상의 문제점이 있을때에만 때로 몰려와서 직원들을 당황케해서 안좋게 생각하기 시작했었다고 했었다. 만리 타국에 달러를 벌어 조국의 가족에게 보내기위해 그들이 감내해야 했었던, 탄광일과 병원에서 시체를 씻어내야 하는 고된일상에서 때로는 미리 이러한 영사업무협조를 준비하지 못했음을 영사관직원들이, 이들 산업역군들의 입장에서 이해할려고 했던점이 부족하지 않았었나?라는 생각을 그때 나는 했었다.
역시 고국에서 먹는 식사는 자극성이 강해야만 입맛에 꼭 맞는다는것을 또 한번 실감했다.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를 여행하면서, 김치같은 맵고 자극적인 음식은 없었지만, 전연 어려움을 겪지 않았었는데, 여기서는 Every meal time 마다 먹어야 식사를 한기분이다.
Cable car에서 내려 정상으로 올라가는길에서, Heart모양의 조각품을 만들고 있는 직원들을 만났다. 이렇게 섬세하고 아름다운 이곳 한려수도의 매력에 취해있는 관람객들에게 또다른 의미의 친밀함을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으로 보였다.
케이블카를 타고 미륵산 정상에 올라서, 내려다본 한려수도는 잘개발해서 전세계적으로 홍보를 해서 Tourists들의 관심을 끌게 된다면, Vietnam의 Ha Long Bay보다 훨씬 더 아기자기한 남해섬들사이를 Cruise한다면....... 해외 각국에 관광공사 사무실과 직원들이 상주하고 있기에 충분히 가능하다고 나는 믿을수 있었다. 관광객은 전부 국내인들인점도 좋았지만, 기왕이면, 지금은 국제화 시대이니까, 그러한 생각을 무시할수 없어, 나의 생각을 덧부쳐 보았다.
붐비는 관광객들로 미륵산 정상을 상징하는 돌비석앞에서 사진 한장 찰칵하는데도 차례를 기다려야만 했다. 이들이 소비하는 경비가 이곳 경제 활성화에 많은 도움이 되기를 기대했다.
위의 링크를 Click하면 Ha Longbay의 Cruise 를 한눈에 볼수 있다.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남해섬들의 아기자기한, 섬세한 모습을 보면서, 감탄을 연발했었다. 섬과 섬사이를 운행하는 Cruise Course를 개발해서, 세계로 눈을 돌려, Cruise를 선호하는 Tourist에게 이렇게 아름다운 한반도의 모습을 보여줬으면 하는 아쉬움을 쉽게 떨쳐버릴수가 없었다.
이곳은 해저 터널로,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건설한 것인데, 이곳 주민들의 생활터전을 이어주는 역활을 충실히 하고 있었다.
이날의 저녁식사는 자유식이라서, 대원들 모두가 각자의 취향에 따라 식당에서 해결해야만 했는데, 우리 일행은 어시장에 들려 활어들을 직접구입해서, 들고온 생선들을 직접 현지요리해서 Serve하는 식당에서 사시미를 만들어주어, 초고추장에 찍어서 Fresh 한 생선의 진짜맛을 맘껏 음미 하고, 나중에는 매운탕 찌개까지 끓여 주어서, 오랫만에 Gourment를 먹는 추억을 만들었었다. 시중드는 식당 아주머님도 합석하여, 고국의 정취를 물씬 느끼게 해주는 "막걸리"한잔씩을 나누어 마시는, 우리만이 느낄수 있는 "정"을 나누기도 했었다.
식당을 나왔을때, 맨먼저 눈에 띄는, 거북선의 Replica 한대가 포구에 mooring되여 있어, 그옛날 이순신 장군의 애간장 태우면서, 조국을 왜구의 침략으로 부터 구해냈던, 그순간을 회상하려고 노력도 해봤다. 그러나 나같은 사람이 어찌 이순신 장군님의 깊은 애환을 꿰뚫어 볼수 있었겠는가? 어수선한 조국의 현실이 나를 그런쪽으로 생각케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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