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April 24, 2017

Korea, 4월14일(금요일),경남 진주성, 남해 삼천포, 다랭이 마을 탐방.


아끼고 존경하는 친지분 내외와 2박 3일 여정으로 "남해안"여행 Package를 구입하여 먼저 경남 진주를 향해 고급 관광버쓰에 몸을 실었다.  야탑역에서 Subway를 타고, 교대역까지 가서 그곳에서 관광버쓰를 타고, 남쪽을 향해 달리게 된다.


오래전에 들렸던 기억을 더듬어서, Tour Guide의 안내를 받아 언덕위에 있는 진주성의 정문에는 전에는 없었던 커다란 성문과 주위 경관이 완전히 바뀌어 옛기억을 되찾아 가면서 견주어 볼려고 했던 당초의 나의 생각은 접어야만 했을 정도로 잘 가꾸어져 있었다.



Tour Guide의 자세한 안내도 무척 도움이 많았지만, 예상치 않게 관광버쓰 운전사께서 해박한 지식으로 가는곳 마다 현지의 사적에 대한 설명을 해주어, 금새 새친구가 된기분으로 여행을 즐길수 있게 해주는 고마움을 한껏 느낄수 있어, 같이 추억을 만들었다.
마치 살아있는 수문장처럼 성문을 지키고 있는  마네킹을 중앙에 두고, 친지 Mr. Oh와 같이 또다른 추억을 카메라에 담았다.  우리가 나이를 많이 먹어서 였을까? 수문장의 키가 훨썬 더 커보였는데, 옛날에 정말로 병사들의 신체가 이렇게 잘 발달된 거장의 모습이었을까?라는 의구심을 떨쳐버릴수가 없었다.  허긴 요즘은 의장병들의 의젖한 모습은 평균적 병사들의 신체보다 더 훨칠한점을 감안하면, 그옛날이라고 다를리 없을것도 같다는 생각으로 귀결시켰다.

진주성의 개발과정에서, 인근에 흩어져 있는 당시의 유명인사들에 대한 기념비를 모아, 이곳 진주성안에 다시 진열시켜, 관람객들의 편의를 도모하고 있다는 운전사의 설명에서, 오늘을 사는 후손들의 살아가는 삶의 환경이 무척 많이 향상되여, 주위를 둘러볼수 있는 여유가 생겨, 이러한 집단 묘비석이 모셔져 있음을 재발견한 셈이다.







Tour Guide의 설명을 종합해 보면, 나름데로 몇마디를 곁들일수 있을것 같았다.  두부부가 추억을 만들었다.  뒤에 보이는 촉석루까지 걸어서 도착하면, 당시의 이곳 분위기를 느낄수 있기를 바래면서....왜장을 끌어안고
왜장을 끌어안고, 촉석루에서 떨어져 내려, 왜장과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던 기생 논개에 대한 나의 생각이 그동안 많이 변하여 새로운, 즉 기생이 아니라 양가집 규수로, 당시 이곳을 통치하고 있었던 현감 최경회의 첩으로 삶을 살다가, 남편 최경회가 왜군을 막아 싸움을 하다가 전사하자, 기생으로 변장하여, 왜장의 주연에 스며 들어가 꽃다운 19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했다는 설명에 잠시 그때의 사회적 풍경을 그려 보기도 했었다.

논개는 전라도 장수군 계내면 대곡리 출생으로 1574년에 선비 주달문과 부인 밀양박씨사이에서 양반의 딸로 태어났었다고 전해진다. 아버지 주문달은 머리가 뛰어나 일찍이 진사로 관직을 맡았으며, 아들하나를 두었으나, 질병으로 15세에 세상을 떠나보냈고, 40세가 넘은 늦은 나이에 딸 논개를 두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별세후 숙부집에 의탁되였으나, 벼50석에 김부호의 집에 민며느리로 보내려 했으나, 이를 피해 모녀는 경상도 안의현의 친정으로 피신하였으나, 김부호는 이들을 붙잡아 모녀를 구금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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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장수 현감 충의공 최경회의 명판결로 모녀를 석방시키고, 자기집에 거처를 마련하여 살게하면서, 후일 최경회가 성년이 된 논개를 후처로 맞아 들였다는 것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최경회가 전라우도의 의병장으로 의병을 모집하고, 군사들을 훈련시킬때, 논개는 이를 도우며 뒷바라지를 해준다.



1593년 최경회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하게되자 동행하였었다. 진주성이 함락되고, 최경회가 왜적의 화살에 숨을 거두자, 왜장들이 촉석루에서 연회를 벌이고 있을때, 논개는 기생으로 변신하여, 왜장 "게야무러 모쿠스케"를 연회에서 유인하여 함께 촉석루에서 몸을 날려 함께 투신하여, 왜장과 함께 최후를 마쳤다는 얘기를 해줘서, 지금까지 논개는 술집에서 몸을 팔았던 기생의 신분으로 알고 있었던 나의 생각을 바꾸게 해주는 설명에 잠시 혼돈이 일기도 했었다.


촉석루 윗층에서 내려다 본 남강의 물까지는 상당히 거리가 있어, 몸을 날려 물속에 첨벙했었다는 옛얘기에는 신빙성이 떨어지고, 대신에 바로 밑에 떨어지면서 바윗돌에 부딪혀 최후의 순간을 맞이 하지 않았을까?라는 의심을 떨칠수는 없었다. 어쨋던 한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나라를 지키는데 목숨바쳐 일조했다는 그 충절에 목을 숙여 묵도하지 않을수 없었다.

훗날 그녀를 기려, 그에게 "의암"이라는 아호를 추서 했었다고 한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세대에게 많은 미안함과 어려움을 동시에 보여주는것 같았다.







새로 건설된(?) 삼천포대교로 동서간의 왕래를 쉽게 해주어 이제는 옛날의 삼천포, 또는 사천으로 생각해서는 안될 정도로 Infrastructure는 전국적으로 균형있게 잘 되여 있다는 Tour Guide 설명에 동감이 갔다.
교각을 중심으로 매달려 있는 Bridge상판은, 멀리서 봤을때 마치 하나의 멋진 조각품같이 보였다.  조국이 많이 발전해왔음을 증거로 보여주는듯 했다.


다리가 건설된 바로 옆에는 빈공간이 있었는데, 그곳에 희귀 채소를 길러, 지나는 관광객들의 발길을 유인하고 있었다.  행여나 발로 밟아 자라는 Plant의 삶을 끊어버릴까? Tour Guide의 주의가 귓전을 때린다.





생명체에게는 종족 보존의 본능이 있지만,  그본능이 삶의 최고의 훈장이라는 나의 생각에 조금이라도 훈수를 두려는듯이, 이곳 다랭이논을 탐방하는 중간지점에는 남근석과 여성의 생식기를 상징하는 한쌍의 자연석이 방문객들의 눈길을 붙잡았다.  신기하다.


유채밭에는 평화의 상징색갈인 노란색의 꽃이 만발하여, 우리 모두를 동심의 세계로 되돌려주는 마력을 발휘해 주기도 해서, 또한번 추억을 만들었다.  감사.


위에서 부터 바닷가에 이르기까지 길게 형성된 "다랭이논"은, 인도네시아의 Bali섬에서 본, 유네스코지정, 다랭이 논에 비하면 무척 엉성해 보이는, 볼품없어 보이는 천수답쯤으로 보였지만, 한국적 특수성을 감안하면, 옛 선조들의 지혜가 집약된 Rice Paddies였음을 느낄수 있었다.

http://lifemeansgo.blogspot.ca/2017/04/48-balirice-paddies-terranceholy-water.html






남해지방 여행하면서, 이제는 시골에서도 막연히 도시를 동경하면서 살았던 나의 어린시절과는 다르게,  Own identity를 자랑스럽게 발견 발전시켜, 이제는 훌륭한 관광상품으로 전국을 향해  Exhibiton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깊이 느낄수 있었다.  Lunar가 손수 가꾼 채소를 팔고있는 이곳 주민아주머님들과 삶의 얘기를 잠시 나누고 있다.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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