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December 02, 2015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 - 지금 한국은 박통같은 민족지도자가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 민주화라는 미명하에, 어수선하기 그지없는 현 대한민국의 현실을 멀리서 바라보면 볼수록 , 돌아가신 박통과, 돌아가신 포항제철의 신화를 만든 두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가슴속 깊은곳에서 솟아나오고,  이들 두분들에게  다시한번 삶의 기회를 창조주께서 주셔서  생전에  못다했던 일들을  그두분들로 하여금  다시한번 하게 한다면  그래서  이렇게 정신없이 어지러운 대한민국을  정리라도 해주었으면 좋을것이라는 망상을 수도없이 해본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세계어디에 내놓고 비교해 보아도, 정치꾼 몇명을 제외하고, 민주주의를 향유하고, 국민들이 자유롭게 살아가는 나라는 많치않을것 같다고 단언한다. 서구의 잘사나는 나라? 미국, 캐나다, 유럽여러나라들도 한국과 같은, 권리만 주장하는, 그런 나라는 못된다. 과연 한국은 특권국가다.

    두분들이 지하에서 아니면 하늘나라에서 생전에 심혈을 기울여 가난의 허물을 벗고, 잘사는 나라의 터전을, 아니 튼튼한 기초를 다져 놓은 그위에서 막난이짖들을 하면서, 이들 두분에 대하여 독재자라는 누명을 씌우고 헐뜻어 대는것을 보면서도 막걸리 한잔에 "허허 그럴수도 있겠구만....더 시간이 흐르고 철들면 이해하겠지"라고 할테지만, 앞으로 전진할려고 발버둥치는 대한민국과 국민들을, 소위 말해서 국민의 대표라고하는 국회의원들이 당리당략과 다음선거에서 표를 얻기위해, 반인륜적, 반 국가적행동을, 국가의 앞날을 걱정하는것보다 앞세워 꼴깝떠는 작태를 보면은 지하에서도 벌떡 일어나 일갈할것 같다. 

    "당신들은 태생이 어느쪽이냐? 한시간, 아니 일분 일초가 사느냐 죽느냐의 길을 가름하는 중요하고 아까운 시간들인데, 잘사는 국가를 만들기위해 끌고가는 수레를 뒤에서 국민들의 대표자로서 밀어주지는 못할망정, 꺼꾸로 당겨서 뭘 얻겠다는거냐? 누구 좋으라고?"

    "내무덤에 침을 뱉어라. 그러나 나는 미래세대에 태어날 후손들에게 잘사는 나라를 만들어주는게, 나를 미워하고 욕하는 당신들에게 비위를 맞추어 주는것 보다, 훨씬 더 급하다." 

    시대와 장소가 영웅을 만들어 준다고들 말한다.

    세종대왕시대는 지금 생각하는 자유란 있을수 없었다. 곧 임금의 입에서 나오는 말한마디가 법이고 명령이었다. 그래도 후세 사람들은 그분을 대왕이라고 존경한다.

    돌아가신 박통시대에는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민주주의 보다, 우선 배고픔의 고통을 없애고, 잘사는 나라를 건설하는 명제가 최우선이었다.  경제적 밑받침과 부흥 없이 외치는 자유와 민주주의는 국민들 가슴에 헛바람만 집어넣어 결국 혼란만 가져온다는것을 깊이 간파했기에 일부 자유를 유보하고, 한때는 장발족까지 단속한 일이 있었다. 참고 견딘 그결과로 오늘의 대한민국이 건재하는 것이다.  독재자가 세상을 떠났다고, 서울에 봄이 온다 라고 좋아들 했지만, 그리고 후에 대통령까지 만들어주었지만, 그분들이 국가를 위해 한것이 무엇인가?

    며칠전 세상을 뜬 김대통령은 일제잔재를 없앤다고 역사의 산물인 중앙청 건물을 헐어내면서, 다른곳으로 이전 복원하겠다고 국민들에게 약속했었다. 들리는 말로는 약속한 복원은 온데간데 없어져버리고 지금은 옮겨온 돌조각하나 보관못하고 있다고 들었다. IMF를 불러온 망국적 행위는 거론도 안하겠다.

    이보다 먼저 떠난 김대통령은, 현재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중에서 그의 이름을 딴 가장 많은 기념관들을 만들었다. 기념관, 체육관, 도서관, 동교동아방궁 등등...국민들 몰래 다 쓸어져가는 북한의 김씨왕조에게 조공을 바쳐, 생전에 그렇게도 부르짖었던 "햇볕정책"이 적의 심장부에 꽃히게해서 결론적으로 통일의 길을 더 어렵게 만들어버린 인물이었다.

    정작 말없는 대다수의 국민들의 추앙을 높이 받고 있는 돌아가신 박통과 포철의 신화를 만든 박씨에게는 기념관 하나 만들어 놓지 못하고, 겨우 국립묘지에 안장하는것으로 끝났다.  물론 나는 확신한다. 후세에 이분들에 대한 평가는 다시 세워질 것이라고.

    뉴스에 나오는 '포항제철의 현실'을 보면 기가차서 말도 안나온다.  전부 여의도 정치꾼들의 입맛을 맞추어주느라 무쇠를 주무르는 포철도 별수없이 녹아내린 것이다.  그런자들이 민의의 전당을 독차지하고 있으니, 지하에서 두분이 통곡하다 목이 쉬었을 것이다.  정말로 미안할 뿐이다.

    당시, 대다수의 보통 서민들은 생활에 큰 불편을 느끼지 못했었다. 열심히 생업현장에서 불철주야 뛰면서 국가건설에 참여했었다. 그러나 세상물정 모르고, 얄팍하게 알고있는, 민주주의에 대한 지식을 앞세워,  이제는 이세상 사람이 아닌 두 전직 대통령들은 경부고속도로 건설당시에, 자유와 민주주의를 실시하라고 온갖 모함과 욕설을 해가면서 방해했던 대표적 인물들이었었다.  불도저앞에 드러누워 '배째라'는 식으로 고속도로 건설을 막았던 그들이었다.  '배고픔의 고통과,자유와 민주주의'라는 두개의 이슈를 놓고 택하라고 하면, 아마도 현재를 살아가는 국민들은 후자를 택할수 있겠지만,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은 배고픔의 해결을 최우선으로 삼았었다. 

    돌아가신 박통의 업적을 기리기위한 방법의 하나로, 인천국제공항을 '박정희 국제공항'으로 개명해 보자는 개인의견을 블로그에도 썼었고, 여의도 정치꾼들에게 여러경로를 통해서 개진해 보기도 했으나, 당리당략과 목에 힘주기에 너무나 바쁜 모양이다. 답장은 고사하고 댓글하나 없는것을 보면은.

    http://lifemeansgo.blogspot.ca/2011/05/516-50.html


    소설가 이대환의 글을 옮겨 놓았다.


    박정희와 박태준의 혼령이 한강을 내려다보며 막걸리를 마신다면…

  • 이대환
    소설가
    E-mail : phreser@hanmail.net
    영일만 갯마을에서 1958년 태어나 10세 때 포항제철이 들어서..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입력 : 2015.07.09 10:21
  • 스크랩 메일 인쇄
  • 글꼴 글꼴 크게 글꼴 작게
대한민국의 큰 일꾼 박태준, 그가 사양한다 할지라도 그에게 포스코 공로주를 단 한 주도 권유하거나 선사(膳賜)할 줄 몰랐던 대한민국 정부가 그의 죽음을 위하여 ‘마지막 예의’를 차렸으니, 그것은 서울 동작동 국립 현충원에 두세 평짜리 유택을 마련해준 것이었다. 국가유공자 묘역의 한 귀퉁이, 거기는 박정희의 유택과 이웃이다. 박정희를 그리워한 박태준. 저승의 박정희와 박태준을 이웃으로 맺어주는 과정에는 박정희의 외아들 박지만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박태준의 유택을 마련하는 일에 박지만은 아버지의 유택을 찾듯이 성심껏 뛰어다녔다.

2011년 12월 17일, 영하 10도의 차디찬 동토 속으로 들어가는 박태준을 지켜보며 한용운의 시 「님의 침묵」 마지막 연을 떠올리는 이들도 있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밤중에 ‘박태준 조각상’에 헌화 묵념하는 포스텍 학생들.
밤중에 ‘박태준 조각상’에 헌화 묵념하는 포스텍 학생들.
박태준의 ‘님’은 조국이었다. 그것도 일류국가인 조국이었다. 그 ‘님’을 만나려고 애를 태우는 그의 신념과 열정과 소원을 가장 북돋은 이가 박정희였다. 박태준이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에 인연을 맺었던 숱한 사내들 가운데 박정희는 그가 임종을 다투는 시각에도 그리운 사람으로 그의 영혼 속에 살고 있었다. 10시간에 가까운 대수술의 마취에서 깨어난 박태준이 구미에서 열리는 ‘박정희 동상 제막식’에 참석하지 못하는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비서에게 감추지 못했을 때, 늙은 환자의 가슴에는 그리움이 고여 있었다. 오죽했으면 비서가 미리 준비해둔 원고를 꺼내 읽어드리고 싶었으랴.

박태준이 박정희 동상 앞에 바치려 했던, 이제는 그의 유언처럼 남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그 유고(遺稿)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이 뜻 깊은 자리를 빛내주시는 시민 여러분, 그리고 내빈 여러분.

어느덧 저의 인생은 황혼에 와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사무치게 그리운 얼굴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고(故) 박정희 대통령입니다. 그리운 각하. 고향 사람들과 시민들이 성의를 모아 동상을 세우고 제막하는 오늘, 불초 박태준이 가슴 속에 쌓인 회한을 불러내듯이 ‘박정희’라는 존함을 불러보고, 거듭 명복을 빕니다.
영정 앞에서 하직을 고하는 박정희 대통령의 세 자녀.
영정 앞에서 하직을 고하는 박정희 대통령의 세 자녀.
돌이켜보면, 63년 전 저 태릉 골짜기의 초라한 육사 강의실에서 저는 처음으로 박정희라는 특출한 분의 눈에 띄었고, 결국 그것은 저의 운명이 되었습니다. “나는 임자를 알아. 아무 소리 말고 맡아!” 이 한마디 말씀에 따라 저는 제철에 목숨을 걸고 삶을 바쳐야 했습니다. 지난 1992년 10월 3일, 4반세기 대역사 끝에 포항제철소와 광양제철소를 완공하고 동작동 국립묘지의 영전 앞에서 임무완수 보고를 올렸습니다. 그때, “각하께서 저를 조국 근대화의 제단으로 불러주셨다”고 토로했습니다만, 박정희라는 한 사람을 조국 근대화의 제단으로 불러낸 것은 우리의 시대였고 대한민국의 역사였습니다. 또한 그것은 각하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그리운 각하.
드디어 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 경제강국으로 일어섰습니다. ‘오천년 빈곤의 대물림’을 확실하게 끝장냈습니다. 그 물적 토대 위에서 민주주의를 성장시키고, 문화를 꽃피우고, 평화통일을 추구하고, 복지사회를 다시 설계하고 있습니다. 정치 후진성, 청년실업, 남북관계 등 거대 과제들을 안고 있지만, 우리의 역량과 자신감은 얼마든지 해법을 구할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왼쪽)과 박태준 회장.
박정희 대통령(왼쪽)과 박태준 회장.
문제는 지도력의 위기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과 다름없었던 조국 근대화의 성공 비결은, 현명하고 근면한 국민과 사심 없고 탁월한 지도력이 좋은 짝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21세기 대한민국은 국민의 역동성과 다양성을 ‘성숙한 사회’로 나아가는 힘으로 승화시킬 지도력을 부르고 있습니다. 시민의 이름으로 세운 이 동상은 하나의 기념물이 아닙니다. 한국사회에는 여전히 ‘박정희 대통령’의 공과(功過)를 따지는 시비가 있지만, 무엇보다 지도력에 대하여 진실로 고뇌하는 사람은 여기에 와서 사색해야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제 조국 번영, 민족 중흥, 민안(民安) 복지의 영원한 길잡이로서 여기 생가 곁에 서 계시는 것입니다.

각하께서 가족과 함께 포항제철을 방문하신 시절에는 아리따운 아기씨였던 맏따님이 어느덧 이 나라의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지도자로 성장해 있습니다. 참으로 장하고 자랑스러운 그 모습을 통해 한편으로는 세월이 참 빠르다는 사실도 깨닫게 됩니다. 각하, 이제는 저의 인생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재회하여 막걸리를 나누게 되는 그날, 밀리고 밀린 이야기의 보따리를 풀어놓겠습니다. 며칠은 마셔야 저의 이야기를 어느 정도는 마칠 것 같습니다. 부디 평안히 기다려 주십시오.

아마도 박정희의 혼령과 박태준의 혼령은 밤에 짝을 지어 마실 나가듯이 가끔씩 동작동 현충원을 빠져 나와서 ‘한강의 기적’의 추억을 더듬어볼 수 있는 어느 호젓한 자리에 앉아 막걸리 잔을 기울이곤 할 것이다. 한 번쯤은 국가도 민족도 다 덮어두고 이런 소박한 대화를 나누기도 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요새 막걸리는 우리 때하고는 맛이 많이 다른 거 같은데.”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는 막걸리도 아껴야 했으니 물을 엄청 타지 않았습니까? 요새는 물도 안 타는 데다 각하가 그렇게 금했던 쌀로 막걸리를 만든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아, 맞아. 그렇군, 그래.”

이러고는 둘이서 누구의 귀에도 들리지 않은, 그러나 밤하늘에 너울 같은 파문을 일으킬 만하게 한바탕 호방한 웃음을 날렸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왼쪽부터), 육영수 여사, 박태준 사장의 함박웃음.
박정희 대통령(왼쪽부터), 육영수 여사, 박태준 사장의 함박웃음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7/07/2015070701597.html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