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신 박통에 대한 기록은 내가 중학교 다닐때부터, 후에 사회생활을 하면서 직,간접으로 많이 보았고 또 미디아를 통해서 들었기에 비교적 소상히 알고 있다고 할수 있다.
혁명후 돈을 빌리러 미국에 갔다가 퇴자를 받고 망연자실하면서, 어떻게 하면 배고프게 살아온 반만년의 역사틀에서 국민들이 빠져 나올수 있을까를 고심하던중, 2차대전 끝난후 신생국가나 다름없었던,당시 서독( West Germany)로 부터 보내온 구원의 손길을 꼭 붙잡고, 조국 재건의 실날같은 희망을 안고, 어렵게 독일을 방문하여 현장시찰 하면서, 조국 건설이라는 과업을 실행하기위한 고뇌와 우리도 할수 있다는 희망을 보면서, 눈물로 방문소감을 쓴 기사를 여기에 링크 시켰다.
같은 대통령인데, 어쩌면 박정희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의 살아온 삶과 국가와 민족을 위한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수행한 두분의 업적이 이렇게 하늘과 땅차이로 가슴을 울리는가. 눈물로 쓴 방독소감에 대한 기사를 링크해 놓았다.
외국 여행을 하면서 현지 사람들을 만나 얘기를 하다보면, 김대중 대통령은 몰라도,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이 기억을 하고 있다는것을 알았는데, 그내용이 가슴을 아리게 하는 내용들이었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 We remember former President Park Chung Hee who developed and put the foundation of what Korea is nowadays. We now need a leader like him for our country's prosperity"
애집트, Viet Nam, Myanmar, Cambodia, Laos, Turkey 그리고 South America 등등에서 들었던 얘기들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더 자세히 박통에 대한 얘기를 해주기도 했었고, 그들은 진지하게 듣곤 했었던 기억이다.
http://news.donga.com/Main/3/all/20150522/71426033/1#replyLayer
내가살고 있는 이곳 토론토 한인 Community의 초기 형성은, 독일에 파견됐었던 광부와 간호원들의 이민자로서의 피땀흘려 이룩한 형설의 공을 빼놓고는 토론토의 한인 이민사를 얘기할수 없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지난해에 이곳 토론토 한인회 주관으로 "한인 이민사" 를 발간 했었는데, 이들에 대한 얘기는 한마디의 언급도 없었다. 한마디로 졸작이고 한인이민사를 적었다고 할수 없는, 실적없이 이름내기 좋아하는 몇사람들의 작난에 온 토론토 한인회가 놀아나고 만 것이다. 이점을 지하에 계시는 박통이 알고 계신다면, 부강한 조국을 만들기위해 불철주야 뛸때, 방해꾼들에게 겪었던 고통과 감회에 젖어 한숨을 쉴것같은 생각이 든다.
Former President,김대중에 대한 나름데로의 느낀점은 본국에 있었을때나, 삶의 터전을 옮겨 살아가면서 관심있게 지켜보곤 했었다. 그의 행적은 한국 현대사에서 빼놓을수 없는, 애증을 많은 국민들에게 심어놓고, 가버린, 아주 유능한 광대꾼으로 나는 감히 평가한다.
얼마전 동아일보의 자료사진을 보면서, 지금은 돌아가신 박통께서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위해 투입한 건설장비 Catapillar 앞에 드러누어 공사를 방해하고 있던 모습이었다. 그후 그분이 고속도로를 가장 많이 이용했던 사람중의 하나였고, 대통령 전용 전동차도 가장 많이 애용했던 전직 대통령중의 하나였음을 알게 되면서, 그분의 주장은 전부 선동적이고, 능숙한 배우의 Performance에 다를게 없었다는 것을.
김영삼씨에게 선거에서 패배하고, 정치에서 손떼고, 영국으로 떠나면서 국민들에게 했던 말의 내용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내생애에서 다시는 정치에 손대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그약속은 채 일년도 안되여 손바닥 뒤업듯이, 그의 특기를 살려, 국민들을 선동하여, 동정을 얻어 드디어 청와대에 입성하는 집념을 보여 주기도 했었다.
그분이 대통령이 되여, 고향 광주를 찾았을때, 나는 그래도 개인적으로 많은 기대를 했었다. 야당의 Leader 로 있으면서 정부정책을 수를 셀수도 없을 정도로 비난하고, 방해했기 때문에, 같은 호남출신으로 관직에 있던 당대의 사람들은 직, 간접으로 승진하는데 영향을 많이 받아서 불이익을 당하고, 운이 더 나쁘면 능력이 있어도, 일찍 옷을 벗어야 하는 불이익을 당한 고향사람들을 향해 최소한 예의를 갖추어 위로의 말한마디 언급할것이라고 말이다.
즉 "나로 인해서 관직에 있던 고향사람들중에서 직, 간접으로 차별을 받아 승진에서 늦어지거나 탈락하고, 또는 옷을 벗게된 분들에게, 진정으로 감사와 위로의 말을 이자리를 빌어 전해 드린다"라고.
그러나 나의 기대는 완전히 180도 빗나가 버렸다. 자화자찬으로도 부족하여, 광주에 새로 건설된 체육관(Arena)에 자기의 이름을 부쳐 '김대중 체육관', 연세대에는 '김대중 도서관' 그외에 여러곳에서 그의 이름을 기리는 상징물들이 세워졌다는 뉴스를 보았다. 그리고 국립묘지에서 휴식하고 있다. 건국의 아버지로 여겨지는 대통령이나, 보릿고개를 없애고, 오늘의 발전된 조국을 만들기위한 Foundation을 굳건히 만들어준 대통령을 기리는 기념관이나 명칭은 대한민국 어디에도 찾아볼수 없는점과는 너무나 대조가 된다.
이제는 전직 대통령들에 대한 과, 오를 객관적으로 평가해서 후손들에게 정확히 알려 주어야할때가 이미됐다고 믿는다. 당리 당략과 지역 감정을 앞장세워 편가르기를 하면서 국력을 소모하기에는 경제적, 정치적,기술적인면에서, 한국이라는 나라의 일거수 일투족은 세계적 뉴스가 되고 있음을 5천만 국민들이 인식을 제대로 한다면, 수긍이 갈것이라 생각된다. 더늦기전에.....
오늘 친지로 부터 이멜을 받았다. 그내용이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분석기사였다. 여기에 옮겨 놓았다. 이기자는 한국분이 아닌, 영국 출신의 중견 기자같았다.
사리사욕에 눈 멀었던 김대중
(Henry Scott-Stokes 전 뉴욕 타임즈 동경. 서울 주재 특파원이 저술한 한 저서 중에서)
카메레온과 같았던 정치인 김대중
김대중 한국 대통령은 2000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이 해에 한국의 대통령 중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 남북간의 긴장 완화에 공적을 남겼다는게 수상 이유였다.
그런데 오늘날 남북관계가 조금이라도 개선되었다고 말할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어떻든 노벨 평화상이란 상은 적당히 주고 받는 상인 모양이다.
2009년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이 상을 받았었다. 대단한 인기를 안고 대통령에 취임한 그는
취임 8개월반만에 이 상을 수상했다. 독일 베르린에서의 연설에서 핵무기 근절을 호소 했다는게
수상 이유였다. 그렇다면 <지상에서 병마를 영구히 추방한다>고 큰 소리를 쳤어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할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하게 한다.
2013년의 노벨 평화상은 화학무기 금지조약에 의해서 설립된 화학무기 금지기관인 OPCW가 수상했다. 시리아가 화학무기를 포기하겠다고 약속한 직후였기 때문에 주목을 받았었다. 그러나 시리아의 독 가스 무기의 제거작업은 다만시작만 했을 뿐 그 작업이 성공적으로 진행될 것인가의 여부는 의심스러웠을 따름이다.
그 전 해에는 유럽 공동체가 수상했다. 그런데 유럽 공동체 역시 경제 파탄의 소용도리에 휩쓸려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나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취재를 위해 30회 이상 단독으로 만났다. 아마도 내가 인터뷰한 아시아의 요인들중에서 가장 횟수가 많았던것 같다.
김대중씨는 한국의 서남부 전라남도 하의도 출신이다. 그는 매스컴이 자신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민감하게 신경을 쓰는 사람이었다. 코미디언들 처럼 장면 장면 마다 화장을 바꾸며 , 상황에 따라 자신을 변신하는 카메레온(chameleon, 주위의 환경에 따라 몸의 색갈을 자유자재로 변화시키는 새의 총칭)과 같은 변신의 달인이었다. …
전 생애를 통해 가장 극적으로 연출한 것은 그가 한국의 현직 대통령으로 북한을 처음 방문했을때의 일이었다. 바로 이 북한 방문이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민주화 운동의 투사를 가장한 김대중
내가 그를 처음 만난것은 그가 아직 야당생활을 하던 70년대 였다. 그는 미국과 일본에 체재하면서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추진하는 한편 인권활동가로서도 활약 해 주목을 받았다.
73년 8월 김대중씨는 동경의 구단시타에 있는 그랜드 팔레스 호텔에서 행방불명이 되었다. 한국 중앙정보부가 그를 납치한 것으로 뒤에 밝혀 졌다. 일본의 한 항구를 출항한 화물선에서 그를 수장하려 했지만 바로 그 시각에 군용기가 상공에서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살해의도는 중지되었다. (역자 주:이 주장은 김대중씨의 증언에 의한 것이지만 관계자들의 증언으로 이 수장계획은 사실 무근으로 판명되었다)
그 뒤 그는 서울의 자택에서 연금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76년에는 <민주 구국 선언>을 발표, 다시 체포되었다. 80년 2월 사면되었지만 5월에 재 구금되었다. 바로 이 사건이 원인이 되어 광주 사태가 발발했다. 군부가 민주화 요구의 데모를 진압했고 유혈의 참사로 진행되었다.
김대중씨는 미국에 대해 강한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다. 미군이 한국에 계속 주둔하고 있어야 하는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김대중씨의 항의 주장은 과격했고 주목을 끌었다. 한국 국내에서 그만큼 강력한 항의를 주장한 지도자는 아무도 없었다.
나의 인터뷰 요청을 받아 들인 김대중씨는 민주화 운동의 투사로서의 이미지를 빈틈없이 연출했다.
70년대 후반에 이르러 박정희 대통령이 돌연 암살되었다. 박 대통령은61년 부터 70년대까지 정권을 유지했다. 박대통령의 암살 사건 후 권력은 곧바로 신 군부에 넘어갔고 군부가 모든것을 장악했다. 당시의 군부는 김대중씨를 반 군정의 중심인물로 간주, 적대시하고 제거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나는 김대중씨의 자택을 방문했다. 그는 자택 연금 상태에 놓여 있었고 군에의해 엄중한 감시를 받고 있었다.
뉴욕 타임스 특파원으로 자택을 몇차례 방문하면서 나는 김대중씨가 뉴욕 타임스 지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음을 알수 있었다. 다른 모든 언론 매체와 나를 대하는 태도가 눈에 띄게 달랐다.
김대중씨의 자택 밖에는 언제나 보도진으로 둘러 쌓여 있었다. 그러나 뉴욕 타임스의 특파원이 취재를 위해 방문한 것을 알면 곧장 집안으로 안내되었다.
그의 이 같은 특별한 배려가 미국으로 하여금 김대중 자신의 생명을 구하도록 하는데 큰 역할을 감당하도록 한 것이었다.
미국의 민간 조직과 언론이 김대중의 보호세력으로 등장했다. 뉴욕 타임스는 그 선두에 선 모습이었다.
나는 1980년 봄에 서울을 거점으로 해서 동경을 오가며 특파원의 업무를 할수 밖에 없었다. 김대중씨가 가장 위험한 상황에 부딧쳤을 때에 직접 만나 취재활동을 한 나는 김대중씨를 한국의 민주화 활동의 중심인물로 치켜 세웠고, 사설을 통해서도 김대중씨는 어떤 이유에서든 쳐형되어서는 안된다는 주장을 거듭했다.
광주 사건을 사주한 장본인
그러나 김대중이란 인물은 가짜(fake)인물이었다. 진짜 인물(real person)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사기꾼(imposter)이었고 위선자(pretender) 였다. 언제나 술수를 노리는 연기자였다. 사람들의 속 마음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뒤에서 조종하는데 몰두 했다. 측은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다.
나도 그의 연기에 놀아난 한 사람이었다. 수많은 한국인들도 그에게 속아 넘어 갔다. 김대중씨의 대단한 능력은 이 같은 그의 술수가 오랜동안 발각되지 않은채 계속되었다는 점이다.
김대중씨가 저지른 최대의 범죄 행위는 민주주의의 대의를 그의 속임수의 소재로 이용했다는 것이다.
광주 사건이야 말로 김대중씨의 기만행위를 그대로 들어낸 사건이었다. 1980년 5월, 김대중씨는 신 군부의 정점에 있던 전두환 세력에의해 체포되었다. 광주에서 소란 사태가 발생하자 김대중씨는 그 배경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김대중씨가 탐한것은 권력이었다. 그는 항상 자신의 입장만을 생각했다.광주 사태가 발생한 시기에 그가 가장 마음을 쏟은 것은 자신이었고 이 광주 사태를 이용해서 자신이 권력을 장악하는 일이었다.
광주 사건으로 부터 20주년을 맞은 2000년에 광주 봉기(kwangju Uprising)란 책이 뉴욕의 출판사에서 간행되었다. 이 책은 내가 편집한 책인데 당시의 사건 취재에 임했던 10명의 유럽 및 미국의 기자와 10명의 한국인 기자가 집필했다.
이 책의 출간으로 사건 당시에 쓸수 없었던 사실들이 햇볓을 볼수 있었다. 공동 집필자들은 모두 기꺼히 옛 일을 되색여 볼수 있었다.
광주 봉기의 참 모습은 <김대중 폭동>이었다. 광주 사건은 김대중씨 자신이 민주화의 기수라는 가면을 쓰고 폭동을 사주해서 대통령이 되고자 했던 폭동이었다. 우리 저널리스트 들도 그의 연출에 영낙없이 속은 꼴이었다. 우리들은 꼭두각시(puppet)에 불과했다.
나의 처는 전업주부이지만 예리한 감성을 지니고 있었다.당시에 그녀는 김대중씨가 깔아 놓은 연극에 놀아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나에게 주의를 주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광주 봉기는 그 발단부터 김대중씨가 깔아놓은 연극이었다.
광주는 김대중씨의 근거지였고 이곳 주민들은 군사정권의 압정에 시달려 왔다. 김대중 때문에 압정에 시달린 것은 아니지만 이 점이야 말로 그의 집권 전략에 꼭 들어 맞는 환경이었다. 광주 사태는 김대중씨가 의도해 온 그대로 였다.
나는 <광주 봉기>가 출판 되었을 당시 까지도 김대중씨의 역할이 그렇게 큰것으로 상상할수 없었다.김대중은 봉기가 폭발했을 당시에 투옥된 상태에 있었고 그 이후의 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었기 때문이다.
김대중씨의 생명을 구한것은 그 뒤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로날드 레이간의 측근 관계자들이었다. 1980년 가을, 군을 장악한 전두환 한국 대통령과 레이건대통령의 측근들 사이에 한 밀약이 맺어졌다. 레이건 신 대통령을 만나는 최초의 외국원수로 전두환 대통령이 되도록 워싱턴행 초대장을 받는 것과 수감중인 김대중을 처형하지 않는 다는 것을 서로 교환키로 한 약속이 밀약의 내용이었다.
레이건 대통령이 사형수 김대중을 처형하지 못하도록 노력한 것은 미국의 일반인들이 당시의 김대중씨가 한국의 민주화운동의 기수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광주에서의 광란사태가 김대중 파의 리더들에 의해 일어났고 광주가 점거되었을 때에 서방측 미디어가 한결같이 김대중을 한국의 민주화를 추구한 착한 동아리 (good guys)로 치켜 세웠었다. 물론 당시의 군부는 사악한 무리(bad guys)로 그려졌다.
이 같은 <착한 동아리>와 <사악한 무리>의 단순한 2분법은 수년간 지속되었다. 아마 아직까지도 이 2분법이 여전히 살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 까지도 미국에서는 김대중이 한국의 민주화를 꽃피운 영웅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흔히 있어 보인다.
그러나 김대중은 착한 동아리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나는 지금도 후회막급일 뿐이다. 광주에서 300명 이상이 학살당했다. 시민뿐만 아니라 군인도 살해되었다. 그 책임은 김대중이오직 혼자 져야할 일이었다.
광주사태를 일으킨 사람들, 김대중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김대중이 얼마나 세속적인 지위와 돈에 집착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일족의 축재를 위해 돈줄 만드는데에 혈안이 되어 있었는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 서방측 져널리스트들에게는 이런 사실을 숨겨왔던 것이다.
져널리스트로서의 과오를 부끄러워 할 뿐
그런데 그의 죄상은 개인 축재보다 훨씬 더 무거운 국가반역죄에 해당되는 매국행위였다. 그것은 말할것도 없이 북한과의 관계에서 뚜렷하게 들어났다.
김대중씨는 뼈속 깊은곳 까지 부패해 있었다. 한국의 서민들 사이에서 그가 대통령에 취임한 후 얼마되지 않아 그의 본명은 김대중이 아니라 돈(금)을 너무 많이 사랑한다는 뜻의 금대호로 불리어야 한다는 죠크가 나돌기까지 했었다.
한국은 어디까지나 중국 문화권에 속해있는 나라이다.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을 포함해서 역대의 중국과 조선의 권력자들은 횡령이나 착복에 깊숙히 빠져들어 있었다. 김대중씨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었다. 민주화의 기수라는 간판 외에 노벨 평화상이란 명예를 얻고자 그의 부하들을 동분서주케 했다. 그는 물욕과 명예욕을 주체할수 없었다. 말 그대로 사리사욕의 화신 그 자체였다.
내가 1968년처음 한국을 방문했을 때에 한국은 아직 가난한 국가였다.박정희 대통령이 현재의 한국을 만든 기초를 구축했다. 박정희 장군은 일본국내에서 훈련을 받고 만주국의 군 장교가 되어 있었다. 그는 20년 만에 한국을 현대 국가로 변신시키는데 성공했다. 만약 그가 이때에 암살되지 않았더라면 더 많은 업적을 쌓을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60년대에서 80년대에 걸쳐 한국은 끊임없이 위험한 상황의 연속이었다.실제로 나도 암살 대상자의 리스트에 올라 있었다. 특파원의 입장에서 한국의 정계와 군 관계에 관한 공개되기를 꺼려한 많은 것들을 보도해 왔기 때문이다.
한국의 중앙정보부는 나를 총이나 칼로 해치는 것이 아니라 사고를 가장한 환경을 조성해서 죽이려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의 마이크 맨스필드 주일 미국대사는 내가 한국을 방문할 때 마다 보디 가드의 역할을 담당할 대사관 경호원들을 동행토록 하겠다고 제의하기도 했다. 그 제의를 나는 거절했지만 암살 위협은 광주 사태 이후 상당기간 계속되었다.
오늘날 이런 위험은 이미 사라졌다. 서방측 져널리스트의 생명이 총구의 표적이 된다는 것은 어불성 설이다. 하지만 당시의 한국에는 독기(toxic air)가 충만해 있었다.
나의 주변 인사중의 한 사람이 오래 전 부터 “김대중은 신용할수 없는 사람이다. 북조선의 포켓속에 있는 사람이다. 그는 북한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지 한국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아니다.”라고 말해 왔다. 나는 “그런 바보같은 소리가 어디 있어. 그는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해 온 정치지도자이다. 크리스쳔이며 선량한 사람이다”라고 반론을 제기해 왔다. 하지만 김대중에 대한 나의 당시의진단은 과녁 밖으로 한참 빗나 가 버렸다.
대통령에 당선 되어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그는 자신이 북한의 괴뢰임을 스스로 들어 내었다.
나는 져널리스트로서 자신의 불민했음을 부끄럽게 여길수 밖에 없다. 정말 부끄럽고 죄송하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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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주
이 글을 쓴 헨리 스캇 스토우크스 기자는 어떤 사람인가, 간단한 설명이필요할것 같아 부연한다. 그는 영국에서 태어나 옥스포드 대학에서 수학, 1962년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즈에 입사해서 언론인 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도 옥스포드 졸업생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옥스포드 제1호 여자 졸업생으로 알려져 있다). 64년 동경 지국 초대 지국장으로 임명되었고 67년 영국의 더 타임즈 동경 지국장, 78년 뉴욕 타임즈 동경. 서울 특파원을 역임했다. 드 타임즈 특파원 시기에 김대중 전대통령의 납치 사건이 발생한 후 집중적으로 이 사건을 취재 했고 뉴욕 타임즈 특파원에 임명된 뒤에는 동교동 취재를 거의 독점적으로 취재한 외신 기자로 명성을 날렸다. 내 외신 기자들의 동교동 접근이 거의 불가능 한 시기에 그만이 김대중씨와 자유스럽게 독점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언론계에서는 그를 동교동 통으로 부른 시기가 있을 정도였다. 일본의 김대중 지지세력에게는 둘도 없는 고마운 파랑눈언론인으로 사랑과 존경을 받았었다. (라디오 코리아 고문 양준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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