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새벽 하늘을 가르고 우리 부부같은 여행객(?)들을 태운 비행기가 비행운을 남기면서 날아가는 모습이 안스럽고, 힘겨워 보인다. 마치 우리 부부의 여행길의 굴곡을 보여주는것 처럼.
호텔의 Sky lounge에 있는 식당에서 Breakfast를 하면서 Sunrise를 보는, 무심코 지나친 해돋이가 오늘 아침에는 뿌연 안개에 덮혀 신기스럽게 나의 눈과 마주친다. 시선을 발아래로 보이는 길거리로 돌렸다. 노점상들과 잘정돈되지 않은 이곳 주민들의 삶의 상태를 한눈에 볼수 있는 헝클어진, 그러면서도 바쁘지 않게 움직이는 삶의 Pattern을 느낄수 있었다.
한구룹의 Monks들이 아침 공양을 위해 시장통의 사람들과 가게에 들려 그들의 양식을 시주받는 모습은 특별한 상황이 아닌 Daily Routine 이지만, Nanny(여성 Monks)들도 아침 시주를 다니는 흔치않은 광경도 목격됐다. 그녀들이 입은 Uniform은 여성임을 금방 알수 있는 Pink빛으로, 어린 소녀(?)로 부터 오랜 수도생활을 한것으로 보이는 Monks들도 뒤따르고 있었다.
Guide의 설명에 따르면, 불자인 주민들은 아침 이시간대면 거의가 다 가정집이든 시장의 상점이든 이들, Monk에게 시주하기위해 밥을 비롯한 음식들을 준비하고 대기한다고 한다. 또한 주민들은 공양하기전에는 음식을 먼저 먹지도 않는다고 했다. 불교의 나라, 그래서 토론토에서 말다툼끝에 총을 나사하는, 총성도 안들리고, 경찰의 도움없이도 조용한 Society속에서 살아가는, 치안에 대한 의구심은 눈꼽 만큼도 걱정할 필요가 없음을 느낄수 있었다.
거의 모든 Merchandise는 local Grown Produce로, 모양은 없지만, 재래토종의 맛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을것 같아 보였다. 바로 옆의 River에서 잡아온 Fish들도 신선하게 보였다. 얼마전 북한과 중국의 국경지역에서 북한 주민들이 집안의 텃밭에서 자란 채소들과 Produce들을 팔고 있는 시장이 열리고 있다는 뉴스를 접한 기억이 있는데, 아마도 이런 형태의 재래 시장이 아닐까?라는 엉뚱한 생각이 들게도 했다.
Monk들이 아침문을 연 상점에서 공양을 받아 나오고 들어가고..... Monk들은 시주를 나갈때는 항상 Bare Foot이다. 고난을 체험하는 하나의 훈련인것 같다.
통닭감으로 보이는 갖 가공된 닭과 채소류, 그리고 Grounded meat, 비위생적으로 나의 눈에는 비쳤지만, 이들에게는 유통과정에서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Trade된다. 50 여년전의 고국에서 살던 기억들이 Overlap된다. 환경의 변화가 이렇게 엄청나게 생각을 바꾸고 있는것이다.
이얀마 여성들은 얼굴에 나무에서 추출한, '띠나까'라는 천연 화장품을 바르는데, 옅은 노랑색 또는 하얀색에 가까운 색갈로 보인다. 외부에서온 내가 볼때는 전연 이쁘지가 않아 보이는데, 이들의 설명에 따르면 여성들의 얼굴피부를 보호하는 목적이 더 많다고 한다. 거의 여성들이지만, 간혹 남자들도 이런 화장한경우를 본다.
노점상을 하는 상인들이 거두어 들인 오늘 아침의 장사수입을 곧바로 시주나온 Monk에게 바치는 그정성에서, 이들의 삶은 고달퍼도 항상 웃는 얼굴을 하고 살아가는 이유를 알것 같았다.
Taung Thaman Lake를 가로질러 세워진 Timber (Teak Tree)Bridge를 보기위해 재래시장 구경을 마치자 바로 차를 Lake로 달렸다. 제대로 이다리의 운치를 보기위해서는 석양녘에 Sunset과 함께 보는게 제격이라고 하는데, 우린 꺼꾸로 이른 아침부터 가는 것이다.
이다리는 이미 여러번 TV를 통해서 보아온 것이기에 기대가 무척 크고 관심도 많았다. 이다리는 총길이가 2.2킬로미터이고, 170년의 긴역사를 갖고 있었는데, 나무로 만든 다리가 이렇게 오래 견딜수 있었던 것은, Teak Tree를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Teak Tree의 수명이 길고 단단함은 앞서 탐방한 궁전의 기둥에서도 확인 했었다.
일명 Ubain Wooden Bridge 라고도 불리는데, 이다리를 그옛날에 건설한 사람의 이름이 Ubain였었다. 그의 업적을 후세에 까지 기리기위해 부쳐진 이름이라고 했다. 이Bridge 를 탐방하기위해 Myanmar를 여행코스로 택하게된 이유중에서 약 50%는 된다. 이곳에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다른 50%는 Pagoda, Stupar, Temple들을 보기위해서 였다.
다리의 규모나 넓이가 생각보다는 넓어 보이고 Post로 사용된 Teak Tree의 크기도 무척 큰 통나무들이었다. 이른 아침인데도 많은 관람객들과 Local People들이 모여 들고 있었다.
170여년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에 비바람에 견디지 못하고 썩어서, 교체가 시급해 보이는 교각이 보였지만, 사람들을 개의치 않는것 같았다. 다리 아래에서는 곡물을 생산하는 Farm이 넓게 펼쳐져 있고, 한농부가 밭을 갈고 있는 광경에서, 관광객들과 농부로 살아가는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것처럼 유유자적이다.
그옆에서는 Duck들이 떼를 지어 먹이를 찾고 있었고, 다리위에서 쉴새없이 지나치는 관광객들에 대해 경계심은 전연 없는것 같아 보였다. 그만큼 관광객들이 그들을 헤치지 않을것이라는 믿음이 그들의 삶에 깊이 박혀 있는것 같았다. Toronto의 China Town의 Restaurant에서 Peking Duck 요리를 맛있게 먹었던 생각이, 연관되여 진다.
다리를 받치고 있는 교각을 보면 정교한 설계에 의해 건설된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다리위에서 노점상을 벌이고는 있지만, 그냥 모두가 지나치는것 같아 보여, 진열된 물건들이 관람객들의 관심을 끌기에는 너무나 평범한 상품이거나 조잡한것들인것 같았다.
여름철 우기에는 강물이 범람하여 수위가 높아진다고 한다. 안전을 위해 Guard rope같은것이 둘러 쳐져 있어야 할텐데, 그런 것은 아예 사치스런 발상인것 같다. 모두가 제 스스로 알아서 대처 하는것 같다. Toronto 시내의 Bloor와 Danforth를 갈라놓은 Don River위로는 아주 육중한 Bridge가 있다. 2층으로 건축된 다리의 아래쪽은 Subway가 선로가 있고, 윗쪽은 넓은 도로위를 차들이 쉴새없이 달린다. 이다리에는 Guard Rail겸 보호 울타리가 있지만, 이것으로도 안전이 불안하여 높은 철망을 설치해놓고 Suicide 를 막기에 안간힘을 쏟고 있는 관계당국의 고충을 잘 알고 있다. 이곳에서 그런 얘기를 한다면, 이들이 그뜻을 이해할수 있을까?
다리아래의 잔듸광장에는 관람객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할것으로 보이는 식당 겸 Entertainment 시설이 아담하게 꾸며져 있었다. 지붕은 Palm Tree Leaf로 덮혔고......
다리 중간 중간에 쉼터가 별도로 있어, 관람객들이 쉬어 가도록 하는 배려도 보였다. 쉼터에서 반대편 River의 끝부분에 있는 다리는 아스라히 점점으로 보인다. 똑 같은 위치에서 사진을, 석양녘에 찰칵했다면 더 운치가 사진속에 스며들것 같다는 아쉬움이 일어난다.
Lunar가 예쁘게 그리고 우아하게 보이도록 Pose를 취해 준다. 강물에 건너편에 있는 가옥들의 Reflection이 어우러져 잔잔하게 흔들리는 순간이 Lunar와 Balance를 잘 이끌어 내는것 같다.
멀리 보이는 다리위의 쉼터 지붕이, 몇년전 중국의 Great Wall 탐방시 산위의 성곽에 세워져 있었던 Watch tower를 연상하게 했다. 그곳에서는 적의 침입을 탐지하는 임무를 띈 병사들의 눈어 번득였지만, 이곳에서는 관광객들이 다리위를 걸으면서 피곤한 발걸음을 쉬어 가도록하는, 목적이 전연 다른 구조물인것이다. 그래서 이곳의 쉼터모습이 더 정겹다. 여유롭다.
오늘 나와 Lunar 가 다리위의 나무상판을 걸으면서 남겨진(?) 그발자국이 오래오래 남아 있기를 기원해 보지만.... 그래서 더많은 사진을 만들기위해 정신을 쏟았나 보다.
여러 각도에서 사진을 찍고 또 찍어도 만족감은 없었다. 뭔가 아쉽기만 한 느낌이었다.
Tour Guide가 나의 이런 마음을 읽었는지, 슬쩍 Lunar 곁에서 나를 위해 Pose를 취한다.
한젊은 부부가 원두막같은 쉼터를 다리아래에서 짖고 있다. Business가 잘되기를 빌어줬다.
참으로 오랫만에 이곳에서 지하수를 퍼올리는 Water Pump와 길게 연결된 Pipe를 보면서, 또 그옛날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지금 나의 눈에는 골동품쯤으로 보이지만, 이들에게는 생활의 필수품으로, 이들의 곁을 잠시도 떠날수 없는 귀중한 품목이다. 이런 환경이 지속되는한 말이다.
마침 내아들 또래의 젊은 수도승이 같이 걷게되여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Monk도 오늘 이곳을 처음 탐방한다고 했다. 캐나다에서 왔다는 말에 조금 의아해 하는 자세였다. 아마도 서양먼곳에 있는 나라이기에 캐나다에서 온 관광객들은 코가 큰 서양사람으로 Preoccupation 됐었나 보다. Tour Guide와 Driver들을 통해서 들어온 Monk생활에 대한 내용을 알기에, 이젊은 Monk도 과연 몇일, 또는 몇년의 수도생활을 할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멀리 River의 한켠에 흰색의 Stupar가 세워져 있고, 그위에는 황금색의 Umbrella가 하늘을 향해 솟아 있는 모습이 강물에 Reflection되여 깨끗하게 보였다.
아스라히 Bridge의 선율이 보이고, Palm Tree로 덮힌 식당, 그리고 그앞에서는 Local People이 Angling을 하고 있다. Bridge를 떠받치고 있는 Posts들의 키가 그만그만하다. Bridge탐방을 거의 마쳤을때는 많은 관광객들이 모여 들어 입구가 복잡해 지기 시작했다. 아침 일찍 탐방하는것은 한가하기 때문에 탐방하는데는 여유가 있었으나, 석양녘에 봤을때 느낄수 있는 운치는 덜했다.
이번 Myanmar여행의 큰 뜻이 담겨있는 Bridge탐방을 마치고 인근에 있는 Weaving Village를 방문했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천으로 곱게 옷을 만들어 입고, 모델이 되여 촬영한 부부의 사진과 개인의 사진에 대한 설명을 Guide가 Lunar에게 한다. 바로 전통 결혼식 복장이라고.
날줄을 놓기위한 실타래의 색갈이 얼른봐도 20여개는 넘는것 같다. 이여인들은 Design에 따라 색갈이 다른 실타래의 frame을 씨줄속에 집어넣어 한뜸한뜸 넣고 당기고 하면서 곱고 고운 천을 만들어 내는 마술사로 보였다. 시골 고향에서 어렷을적에 본 어머니나 할머니들이 베틀에 앉아 천을 짜던 그런 기술보다 훨씬 정교하고 색상이 화려한것을 느낄수 있었다.
피부보호를 한다는 그들 특유의 화장을 한 아가씨(?)들이 베틀에 앉아 고운 색상의 Threads를 손빠르게 Design에 따라 움직이는 손길이 무척 빠르다. 실을 뽑는 물래의 Wheel은 내가 보기에는 자전거의 Rim을 이용한것 같아 보였다. 보기 드물게 초로의 남성이 실을 뽑고 있다.
약 6대의 베틀만이 작동하고 있는것으로 보아, 대량생산을 목적으로 한다기 보다는 관광객들에게 보여주기위해 운영되고 있는것으로 이해됐다.
Display Room에는 색상이 화려한 수많은 종류의 천들이 진열되여 있었다. 공장의 생산규모로 봐서는 이곳에서 전부 생산된 천이라고 수긍하기에는 뭔가 좀 석연치 않게 느꼈으나, 그것은 오직 나의 생각일뿐이다.
약 1,000명의 Monks들이 기거하면서 수도하는 거대한 Monastery, Amarapura 탐방이 있었다.
Monks가 기거하는 Dormitory라고 했다. 현대식 건축양식으로 아주 깨끗해 보였다.
이곳에서 수도하는 Monks는 다른곳의 Monks들 처럼 아침일찍 시주를 나가지 않고 오직 수도와 공부에만 열중한다고 설명한다. 많은 불자들로 부터 Donation이 이어져 그렇게 시주를 나가야할 필요를 느끼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거대한 밥솥이 매우 친근하게 느껴졌다. 막 20대 초반이었을때, 나를 포함한 당시의 대한민국 젊은이들을 3년간의 국방의무를 완수하기위해 군대생활을 해야만 했다. 현재도 그런 국방의무는 진행형이지만, 당시는 나라가 가난하여 병사들의 생활여건이 열악했었다. 그때 취사반에서 취사병이 밥을 할때 이렇게 큰 솥에서 밥을 했었고, 삽(Shovel)을 이용하여 밥통에 옮겼던 밥을 다시 취사병이, Wicket에 내밀은 병사의 양은그릇에 퍼서주면 그다음 Wicket에서는 그위에 콩나물이 몇가닥 떠다니는 멀건 된장국을 부어주면 히기진 배를 채우기위해 그것도 맛있게 먹었던 추억이 이밥솥을 보면서 떠나지 않는다. 다른게 있다면 여기솥안의 밥은, 북한의 김일성 왕조가 꿈꾸어 오고 있는 흰쌀밥이고, '꽁보리 밥'으로 불렸던 점이 다르다.
밥을 하기위해 불때는 아궁이도 어쩌면 거의 똑같을까. 소요되는 장작을 당시에는 부대의 병사들이 자급자족을 했었다. 즉 산위로 올라가 나무들을 베어와서 취사를 했다는 말이다. 그대서 전방의 산들은 민둥산이 태반이었었다. 지금은 나무가 너무나 많이 자라 들어갈수가 없도록 사방사업이 잘되여 있지만.....여기서는 장작걱정은 전연없다. 주위가 전부 밀림이나 다름없는 나무가 풍부한 나라이기에.
Monks들이 수시로 이용하는 공동 목욕탕이다. 마침 우리가 탐방하는 시간에 몇명의 Monk들이 마음속에 가라앉아 있는 찌꺼기들을 닦아내고 있었다.
10시30분이 되자 Dormitory로 부터 Monks들이 줄을 지어 학교의 Cafeteria처럼 넓은 식당으로 아침을 먹기위해 걸어가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이순간을 보기위해 수많은 관광객들이 모여 들었는데, 그속에 우리 부부도 끼어 있었다.
Monk들은 자기 밥그릇을 항상 몸에서 떼어놓치 않는것 같다. 이광경 역시, 옛날 군생활할때 내 양은밥그릇을 손에 들고, 커다란 '미제숫갈'을 마치 보물처럼 윗옷의 단추안쪽에 걸고 다녔던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에는 고통으로 여기곤 했었는데, 이곳에서 Monk들을 보면서 '아 그게 바로 고통을 이겨내는 수양'이었고나, 라는 오히려 감사의 마음으로 변하게 한다.
간혹 몇명의 Monk들은 식당에서 음식을 배식받아, 그곳에서 먹지 않고 바로 Dormitory로 되돌아가는 광경도 보았다. 그사유는 알수 없었지만, Dormitory에서 당장에 해결해야할 다른 일들때문에, 아니면? 그들만의 사유가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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