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ke에서 한참을 creek을 따라 올라왔던 지류를 따라 다시 되돌아 가는길이다. 지류의 물은 갈색으로 겨우 2대가 서로 비켜갈 정도로 좁았지만, 능숙한 뱃사공들의 Navigationg Skill 은 나를 편하게 하고도 남았다. 우기때 밀려 내려올 토사로 지류의 밑바닥이 높아질텐데......
그럴때는 어떻게 이를 극복하는지가 궁금했다. Guide의 설명은 토사를 파내는 일은 전연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토사가 흘러 들어오는 일은 지금까지 없었기에 앞으로 염려는 없을것이라고 설명을 한다.
호숫물에 세탁하여 널어놓은 옷들에서 하얀색의 옷은 보이지 않는것으로 보아 이곳을 흐르는 물은 년중 갈색임을 짐작할수 있게 해줬다. 지붕의 한쪽끝에는 태양열판이 설치되여 필요한 전기를 생산하는것으로 보였다.
Indein Pagoda Complex는 이곳 부족들의 족장이 중심이 되여 Pagoda를 포함한 수많은 Stupar를 건설했는데, 지금은 모든게 파괴되여 방치된채로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Temple의 벽은 그당시에 정교한 벽돌로 쌓아 올려져있어 당시의 Brick Layer 들의 기술을 짐작케 하고도 남는 걸작품인것을 Guide의 설명에서 느낄수 있었다. 벽돌의 두께는 현재 사용되고 있것 보다 약 1/2정도 두께로 매우 얇았다.
Pagoda와 Stupar의 구별은 의외로 쉽게 할수 있었다. 항상 혼동이 되였었는데, 구별하는 방법이 있었다. Pagoda는 건축물안이 불공을 드릴수 있는 공간이 있는 구비되여 있고, Stupar는 그와 반대로 그런 공간이 없이 탑처럼 건축되여 있는 구조물이다. 크기만으로 보아서는 혼돈이 많이 생길수 있는 구별 방법이라고 이해 했다. 윗사진은 Pagoda이다.
Shan주에 있는 부족장들과 그들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한마음이 되여 무려 1054개의 Indein Pagoda complex를 축조 했었다고 한다. 아직도 축조물 위에는 Umbrella들의 Original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여 있는것도 많이 있었다. 거의 천년이상의 세월의 풍상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을 계산해 보면서 옛선조들의 신에 대한 깊은 경외심을 확인해 보는것 같았다.
설명을 들을수록 의문은 더 생기게 마련이다. 열심히 질문해 보곤 했지만, 그럴수록 더 의문은 커져서, 괜히 Guide를 곤욕스럽게 하는게 아닌가?라는 자문도 해보곤 했다. 왜 벽돌로 쌓고 다시 석회석으로 다시 단장을 했을까?라는 질문에....
Pagoda안의 불상은 아직도 본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것도 있고, 파괴된것도 있고, 입구에 조각되여 있는 수호신은 오히려 더 윤곽이 뚜렷해 보였는데, 오랜세월동안 풍상을 직접 겪었을텐데..... 원래의 모습이 정교하게, 한손에는 기록용 종이같은것이 올려져 있고, 다른 한손에는 필기구같은것이 새겨져 있는것을 보면서 그옛날에 이곳을 드나들던 불도들의 신상을 적었던것으로 이해 된다는 설명에서 과연 그랬을까?라는 의문만 더 커졌었다.
아까운 파괴현장을 보면서, Guide의 설명으로는 도벌꾼들에 의해 자행된 것으로 설명만 할뿐, 당국의 어떤 보호정책같은것은 현재로서는 없다고 무덤덤하게 설명했다. 그도벌꾼들은 불심깊은 버마인들은 아닐것 같이 느껴졌는데, 그렇타면 외부의 원정 도벌꾼들일것 같았다.
Stupar는 오랜세월동안 나무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하고 같이 공존하고 있었다. 마치 Vase에 꽃아놓은 한뭉치의 꽃다발 처럼..... Crack이가고..... 앞으로 얼마나 더 버티고 있을수 있을까?
Pagoda위의 Umbrella부분에도 나무들이 침략하여 같이 공생하고 있다. 뿌리를 깊이 Umbrella에 박을수록 Crack이 커지고 결국 무너질터인데, 오래전에 Cambodia의 Siem Reap소재 Ankor Wat 탐방시 커다란 보리수나무들이 사원의 벽을 에워싸고 있는데도, 오히려 그나무를 제거하지 않고 정성들여 보호하고 있다는 설명에, 그럴수도 있겠구나 라는 이해를 했었던 기억이 교차됐다. 나무를 자르게 되면 그뿌리가 죽어 벽이 허물어질수 있다는 논리였었다. 여기서는 그런 논리가 반대로 작용하는것 같아 탐방내내 가운데 갈라진 틈새에서 눈길이 멈추었었다.
Indein Pagoda 입구에서 부터 시작된 Corridor는 규모가 엄청나게 커서, 그옛날에 선조들의 불심에 대한 정성을 엿볼수 있는 증거같이 보였다.
이렇게 많은 Stupar는 불심이 깊은 불도들이 Donation해서 건축하고, Donor의 이름판을 옆에 조그맣게 새겨 부착시켜 놓았었다. 이곳에서 뿐만이 아니고 이번 동남 아시아 여러나라를 탐방하면서, 목격한 Stupar들을 보면서, 어렷을적 시골에서 수도 셀수 없이 보았던 성황당, 동네 입구에 세워져 있었던 '천하대장군', '지하 여장군' 같은 조형물을 세우고 막연히 그곳에 소원을 빌었던, Concept과 같다는 생각을 하게됐다. 고국에서는 근대 문명이 들어오면서, 그러한 조형물은 미신이기에 타파해야 한다는 미명하에 지금은 거의 다 자취를 감추고 말았는데, 여기에서는 그대로 보존되여 있는것을 보면서, 이곳 사람들이 더 현명(?)하다는 생각도 해 보았다.
이렇게 큰 Stupar을 만든 선조의 소원은 이루어 졌을까? 지금은 Aloe가 무성하다. 그위에는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 있는것 처럼 보이는 잡풀의 줄기가 뒤덮고 있고, 그위로는 Umbrella가 넘어지지 않을려고 발버둥치듯이 버티고 있었다. 그무엇인가에 인생살이를 의지할려고 했던 선조들의 막연한 믿음...... 우리 인간들의 나약한 일면을 보는주는 증거로 이해를 하고 싶었다.
지역주민들이 산나물을 채취하여 흐르는 골짝물에서 정돈을 하고 있고, Lunar는 그들이 이용하는 Container 를 직접 어깨에 짊어지기위해 Main rope를, Guide 가 설명해준데로 이마에 걸치는 실습을 해보고 있다. 익숙치 않기에 옆에서 보기에도 매우 불안해 보였다.
낡은 추럭 한대가, Guide의 설명에 따르면, 아침에 시장을 보러 갔던 지역주민들이 구입한 물건들을 싣고 동네로 되돌아 오고 있다는 것이다. Stupar들 만큼이나 오래된 추럭인데, 물건과 사람들이 그안에 마치 콩나물시루에 있는 콩나물처럼 빽빽하게 올라있다.
이곳은 호숫가 옆의 Cat Monastery로 1800년대에 이지역의 주민들이 건축했다고 한다.
Monastery안에 모셔져 있는 불상은 Bamboo로 만들어졌다고 했다. 4개의 같은 크기의 불상이 Temple 안의 4 방향에 보셔져 있다. 이들중 하나는, 18일 동안 축제가 이어지는 기간동안에, 하룻밤 다른곳으로 모셔지고, 그빈자리에 순회전시되는 4개의 미니 불상을 하룻밤 모시게 된다고 설명한다.
여기의 Stupar들은 아직도 모습이 원래그대로다. Donor들의 이름이 선명히 그대로 Stupar앞에 부착되여 있다. 어떤 바램이 현실로 나타났을까? 버마인들의 불심은 현재도 진행형이다.
한가족으로 보이는 식구들이 Monastery안의 넓은 공간에서 밥상을 펴고 점심을 하고 있다. 주위를 오가는 관광객들을 개의치 않는다. 이들은 이곳이 생활터전이라고 한다. 이런 상황을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Monastery에 연결된 Corridor의 길이는 자그만치 약 1키로미터라고 했다. 이역시 잘 유지되여 있었고, Corridor를 받치고 있는 Pillar를 중심으로 수많은 장사꾼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탐방을 마치고 포구로 향하는 오솔길에는 주민들이 짠 천들을 이용하여 만든 Scarf들이 팔려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의 부족들은 머리에 두른 두건으로 보아 또 다른 Tribe인것으로 이해됐다. 꼬마들이 두른 두건이 무거워 보인다.
Teak Tree와 Bamboo가 Bridge 건설에 없어서는 안되는 건설재료라고 한다. 이건널다리는 지붕까지 씌워져 있다. Boat도 Teak Tree로 만들어 졌는데, 고국에서는 Teak로 만든 가구가 최고가로 팔리고 사랑받기도 하는 이유를 알것 같다.
Monastery안에는 수많은 Buddha Statue들이 모셔져 있었는데, 모든 불상들은 Shan 주(Province)에 거주하는 각 마을의 족장들이 Donation한것이라고 했다.
'NGA PHE CHAUNG Monastery' 간판이 포구에 있는 한 가옥의 벽에 보인다.
탐방을 마치고 호텔로 되돌아가는 우리배와 또 다른 주민들의 배위를 갈매기들이 환송해주고 있는것 같이 정겹게 보였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