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July 24, 2019

<역사단상> 이런 일본 외교관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조국이가 뭘 안다고 편가르나.

친지가 보내온 아래의 역사적 단상을 읽으면서, 박정희 장군이 5.16혁명을 일으킨후 무려 8명의 대통령들이 (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그리고 문재인), 박정희 대통령의 뒤를 이어 대한민국의 통치자로 군림하면서, 과연 그들이 정말로 박정희 대통령처럼 국가와 민족 그리고 경제적 발전을 위해 얼마나 헌신했을까?를 되돌아 봤었다.  어떤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처럼 독재자라는 오명을 씻지 못하고 소위  진보라는 자들로 부터 욕을 많이 먹고 있고, 5/18발포자라고 욕먹고 있다.  그러나 그분은 어수선한 시기에 국가를 위기에서 구해냈고, 무역흑자의 첫기록을 세운 대통령으로 나는 기억하고 있다. 후세에 역사가들은 그분에 대한 재평가를 할것으로 믿고 있다.

또 다른 두대통령은 경제적 기초를 다지기보다는 민주주의의 화신인양 인권을 앞세워 나라를 통치했었다고,국민들의 뇌리에 자리하고 있지만, 그분들은 김일성독재 정권에 남한의 국민들이 힘들게 벌어들인 외화를 국민몰래 퍼주어, 결과적으로는 오늘날 남한 국민들의 머리에 핵을 올려놓고 불안한 삶을 살아가게 한 이적질을 한 대통령으로 낙인찍혔다고 생각된다. 현대통령을 포함한 두명의 좌파 대통령은 Populism으로 국민들의 관심을 끌고,  이북까지가서 정상회담을 하고, 남한 답방약속까지 받았으나, 한번도 실현된 기록이 없는데도, 여전히 못퍼주어 안달을 하고 있다.  이런 대통령들과 아래에 간단히 명시된 주한 일본대사의 대사로서의 본분을 잘 지키면서, 한국의 경제발전에 숨은 공로자로 활동한 외교관의 자세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한다.



청와대 민정수석, 조국이는 지금 대일외교실패에서, 할일은 내팽개치고, 국민들을 편가르기에 동원하느라, Facebook에 기고한 글을 보면, 한숨만 나올뿐이다. 지금 이시간에 한국의 기업들, 특히 대기업들은 앞으로대한민국의 살길을 찾기위해 밤잠을 설쳐가면서 협의중인데, 한가하게 풍월을풀 때인가싶게 국민들간에 이간질시키는 짖을 하고 있다.  그좋은 머리를 지금처럼 한국경제가 기둥채 뿌러져 내려앉고 있을때, 회생시키는데 사용했으면 모두로 부터 칭찬 받을텐데....

아래에 친지가 보내온 글과 함윤식씨가 쓴 글을 옮겨놓았다.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뇌조리에 자리 잡은 하늘묘원.
야트막한 구릉 지대에 천주 묘지가 조성돼 있다.
이곳에 제2대 주한 일본 대사를 지낸
가나야마 마사히데(金山政英·1909∼1997년)의 묘가 있다.
묘역 관리는 비교적 잘 돼 있었다. ‘제2대 주한 일본국 대사,
金山 아우구스티노 政英님의 무덤’이라고 또렷하게 쓴 묘비석이
우뚝 서 있었다
주한 일본 대사를 지낸 인물의 묘가 일본 땅이 아니라
한국 땅에 들어선 자세한 사연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우여곡절 끝에 1965년 한·일 국교가 정상화되면서
양국 관계는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수교 협상을 전후한 임시대리대사 체제가 끝나고
66년 3월 기무라 시로시치(木村四郞七)
초대 주한 일본 대사에 이어 가나야마(金山政英)가 68년 7월 15일
제2대 대사로 서울에 부임한다.
72년 2월까지 3년7개월간 주한 대사로 일하면서 한국의 산업화 초기에
한·일 관계 발전을 위해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활동했던 대사라는 평가를 받는다.

일본 재계 총리 이나야마도 두 손 들어
특히 그는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만나면서
“기백이 넘치는 훌륭한 분”이라고
평가하면서 각별한 존경을 표시했다. 박 대통령도
그를 격의 없이 대하며 아꼈다.
최서면(89) 국제한국연구원 원장은 58년부터 30년간 도쿄에 체류하면서
한국연구원을 설립하고 독도와 한·일 관계 연구에 일생을 바쳐온
원로 역사학자다. 박 대통령과 가나야마 대사의
친분 관계를 가까이서 지켜본
최 원장은 “포항제철은 박태준씨가 주도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 이면에는 가나야마(金山政英) 대사의 숨은 공로도 있다”며
비화를 공개했다.

어느 날 박 대통령이 “술이나 먹자”며 가나야마 대사를 청와대 쪽으로
불렀다. 박 대통령이 돌발 질문을 던졌다.
▶박정희=“가나야마 대사, 당신은 누구요.”
▶가나야마(金山政英)=“예, 일본국 주한 특명전권대사입니다.”
▶박정희=“거꾸로는 안 되겠소? 대한민국의 주일 특명전권대사 역할
한번 해주시오.”
박 대통령은 이날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당시 일본 총리에게 보내는
친서를 가나야마(金山政英) 대사에게 건넸다. 친서에는 포항제철소를
만들고 싶은데 일본 측이 기술 협력을 해달라는 요청이 담겨 있었다.
일본 외무성에는 알리지도 않고 가나야마 대사는
조용히 도쿄로 건너가 사토 총리를 만났다.
▶사토=“(한국의 제철소 건설을 지원하는) 그 문제는 안 된다고 했는데
또 해달라고 가져왔군.”
▶가나야마(金山政英)=“박 대통령께서 저에게 이 친서에 답이 없으면
한국에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일·한 관계가 끝장납니다.”
▶사토=“이거 큰일 났네.”
사토 총리는 그 자리에서 이나야마 요시히로(稻山嘉寬)
신일철 회장 겸 일본 경제단체인 게이단렌(經團連)
회장에게 전화를 돌렸고 그날 밤 세 사람이 만났다.
▶이나야마=“나사도 제대로 못 만드는 한국이 무슨 제철소야.”
▶가나야마(金山政英)=“그런 말씀 마십시오. 1897년
야하다(八幡) 제철소(신일철 전신)를 만들기 전에는
우리도 나사조차 못 만든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변명보다는 도와줄 방법을 찾아주세요.”
가나야마(金山政英)는 마치 주일 한국 대사로 부임한 사람처럼
집요하게 이나야마 회장을 설득했다.
당시까지 ‘일본의 재계 총리’로 불리던 이나야마 회장은
결국 마음을 돌렸고 포항제철소 지원의 길이 열렸다.
“광복절 행사에도 참석 못 할 이유 없어”
기억할  만한 일화는 또 있다.
대사 부임 이후 처음 맞은 69년 3·1절 기념식에
가나야마(金山政英)는 주한 일본 대사로서 사상 처음 참석했다.
이후 지금까지 어떤 후임 대사도 엄두를 내지 못한 기록이다.
당시 본국의 질책을 받자 가나야마(金山政英) 대사는 “과거를 청산하고
앞으로
한국과 잘 지내기로 해놓고 한국의 기념일을 축하하는 것이 문제가 되나.
8·15 광복절 행사에도 못 갈 이유는 없다”고
항변하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가나야마 대사가 일관성 있게 한국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주자 일부에선
창씨개명한 한국인 김씨의 후예로 오해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가나야마(金山政英)  대사가 “나는 원래 구보타(久保田) 가문 출신인데
가나야마(金山政英) 가문의 양자가 됐다”
고 해명하자 해프닝으로 끝났다. 대신 그는 김해김씨 명예회원으로
명부에 올랐다.
이처럼 한국을 누구보다 사랑한 것은 사실이라지만 그렇다고 대사까지
지낸 일본인이 사후에 한국 땅에 묻힌 곡절을
충분히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일본이 조선을 강제병합하기 한 해 전인 1909년 도쿄에서 태어난
가나야마(金山政英)는 97년 11월 1일 미수(米壽·88세)를 넘겨 타계한다.
도쿄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25세 때 외교관이 된 이후
38년간 바티칸 주재 참사관, 칠레·폴란드 대사 등
직업 외교관으로 일했다.
도쿄의 천주교 성당에서 열린 장례미사에 생전 그를 아끼던 한·일 양국의
지인들이 몰려들었다.
가나야마(金山政英)의 자녀 12명 중에서 장남은 장례식에 참석하러
한국에서
온 노신사에게 다가가 “최서면 원장님이십니까”라며 인사를 건넸다.
장남은 “부친께서 ‘내가 죽으면 유골을 최 원장께 맡겨달라’고
유언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부친께서 최 원장님께 말씀 드리면 알아서 해주실 것이라고
말했다”고 덧붙였다.
절친 최서면 원장에게 “한국에 묻어달라”
자신의 유골을 부탁할 정도로 최 원장과 돈독하게 된 사연이 있다.
72년 귀국한 가나야마(金山政英) 대사에게 일본 외무성은 유럽일본관장
자리를
대사급으로 격상해 맡기려 했으나 가나야마(金山政英) 대사는 사양하고
바로 은퇴했다. 그에게는 다른 뜻이 있었다.
그해 11월 도쿄에 있던 한국연구원으로 최 원장을 찾아갔다.
당시의 심정과 각오를 대사는 88년 발표한 ‘최서면과 나’라는 글에서
토로했다. 그는 “한국에서 대사로 있으면서 일·한 관계가 중요하다는
신념을 품었고 제2의 인생을 일·한 친선을 위해
노력할 것을 결심했다”고 썼다.
최 원장은 “가나야마(金山政英) 대사가 기회 있을 때마다 ‘일본 사람들은
미국·소련(러시아)·중국·영국과 외교를 잘하면 일본 외교의 성공이라고
생각하지만 한국에서 일하면서 보니 이들 4개국과의 외교를
아무리 잘해도 한국과의 관계를 잘못 처리하면 일본 외교의 실패라는
인식을 하게 됐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전했다.

한·일 관계의 중요성에 공감한 두 사람은 이날 만남을 계기로 의기투합
했다.
최 원장은 한국연구원에 국제관계공동연구소를 새로 만들어
가나야마(金山政英) 대사에게 초대 소장을 맡겼다.
같은 천주교 신자인 데다 공교롭게도
영세명(아우구스티노)이 같은 두 사람은 일가(一家)처럼 서로를
아끼고 존중했다
75년 4월, 가나야마(金山政英)는 최 원장의 모친 3주기를 맞아 방한한다.
지금은
가나야마 대사 자신이 묻힌 파주 천주교 하늘묘원을 찾아 참배했다. 차를
마시면서 가나야마 대사가 대뜸 최 원장에게 깜짝 제안을 했다.

▶가나야마(金山政英)=“나도 죽으면 이 땅에서 묻히고 싶다.
최 원장과 이 세상에서 일·한 관계에 대해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최서면=“정말인가.
그럼 내가 여기에 묏자리를 만들 테니 나중에 오시겠나.”
최 원장은 자신이 매입한 가족묘지 공간에
가나야마 대사의 가묘(假墓)를 만들어줬다.
그 후 가나야마 대사는 자신의 가묘를 찾아
“영혼의 집이 마련됐다”고 기뻐하면서 자신의 가묘에 성묘까지 했다.
지금은 가나야마 대사의 묘 바로 옆에 최 원장의 가묘가 만들어져 있다.
유해 봉환식 때 일부 반일 단체 술렁
가나야마(金山政英) 대사가 97년 11월 타계한 뒤 그의 유골이
실제로 한국 땅에 묻히기까지는 시간이 다소 걸렸다.
이듬해인 98년 8월 가나야마 대사의 6남 가나야마 세이기치(金山成吉·
전 NHK 기자)가 아버지의 유골을 들고 방한했다.
하얏트 호텔에서 조촐한 유골 봉안식이 있었다.
국회의장으로서 그날 행사를 주관한 김수한(87)
한일친선협회중앙회 회장은 당시 경찰로부터 특이동향 소식을 접했다.
주한 대사를 지낸 일본인이 한국 땅에 묻힌다고 하니
일부 반일 단체가 술렁거린다는 내용이었다.
김 회장은 “한·일 관계를 위해 고향도 아닌 한국 땅에
묻히겠다는 가나야마(金山政英) 대사의 정신이 얼마나 고마운가.
우리가 환영해야지 소란을 피워서는 절대 안 된다”며
사복 경찰을 배치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다행히 불상사는 없었다. 최 원장은 “한국에 유골의 대부분을 묻고
그중 극히 일부를 가나야마(金山政英) 대사의 아들에게 줬다”고
비화를 공개했다.

(시인 구상(具常·1919∼2004)이 쓴 가나야마(金山政英) 대사의 비문에는
“나는 죽어서도 일·한 친선과 친화를 돕고 지켜보고 싶다”고 다짐했던
가나야마(金山政英) 대사의 유언이 기록돼 있다.)
1 가나야마 마사히데 (金山政英)전 주한 일본 대사(오른쪽)와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왼쪽)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공교롭게도 같은 영세명(아우구스티노)을 쓴
두 사람이 1970년대 로마 교황청에서 교황 바오로 6세와 함께 만났다.

2 1969년 12월 3일 가나야마(金山政英) 당시 주한 일본 대사(오른쪽)가
김학렬 부총리와 포항제철 차관 도입 관련 서명을 하고 있다.
이로써 한국의 숙원사업이던 일관제철소 건설에 속도가 붙었다.
[중앙포토]
한·일 모두 기억해야 할 ‘가나야마 정신’
벳쇼 고로(別所浩郞) 주한 일본 대사는 지난해 11월 최서 원장, 김수한
회장과 동행해 가나야마 대사의 파주 묘지를 직접 참배했다. 그 자리에서
벳쇼 대사는 “한국 분들이 따뜻한 온정을 베풀어 선배 대사의
유골을 모셔주셔서 뼈에 사무치게 감사 드린다”고 각별한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김수한 회장은 “가나야마 (金山政英)대사는 딸을 한국인에게
시집 보낼 정도로 한국인과 한국 문화를 좋아했고,
겉치레가 아니라 마음속 깊이 한국을 사랑한
일본 외교관이었다”고 기억했다.
이어 “한·일 관계를 큰 각도에서 바라본 가나야마 대사의 정신을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도 이어받아야 한다”면서
“우리도 종전 70주년을 맞아 과거에 너무 집착하거나 편협한 반일 감정
에서 벗어나 미래지향적 관계로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2010년  이라크 부흥대사를 끝으로 은퇴한 오가와 고타로(小川鄕太郞)
전 주한 일본대사관 문화원장(공사)은 “후배로서
가나야마 대사를 존경한다”고 말했다.
그는 “한·일 관계와 역사를 잘 모르는 일본인들이 한국을 오해하고
비방한다”며 “일본에서는 가나야마 대사의 정신을 잊고 있는데
그분의 정신을 기억하고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최서면  원장은 “한국에서는 ‘아베는 왜 그래’라는 말을 자주 듣고,
요즘 일본에 가면 ‘한국은 왜 그래’라는 말을 듣는다”면서
“한·일 관계의 중요성을 일찍이 역설한 가나야마(金山政英) 대사의
정신이 요즘 같은 때 더 각별하게 다가 온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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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교동 24시 저자 함윤식씨 “DJ 숨겨놓은 딸 생모는 J요정 종업원”






김대중 전 대통령의 숨겨놓은 딸 논란으로 정치권이 시끄럽다.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얽힌 음모설부터 진승현게이트의 연루설, 사생활 보호 논란 등 DJ의 딸이라는 김모(35)씨를 둘러싼 진실공방이 한창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한 동교동계 인사들은 한결같이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18년간 김대중 전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경호해왔던 함윤식씨가 DJ의 딸이라고 주장하는 김씨의 생모에 대해 구체적인 증언을 하고 나서 주목된다. 함씨는 지난 1969년부터 김 전 대통령의 경호 및 수행비서로 활동해 왔으나 1987년 6월, 김 전 대통령과 결별을 선언한 뒤 "동교동 24시"란 책을 펴내 정치권에 파문을 일으켰던 인물이다.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6개월쯤 앞두고 나온 이 책을 둘러싸고 국정원(당시 안기부) 사주를 받은 전형적인 ‘DJ죽이기’ 책이란 오명이 따라 다녔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의 경호책임자로 누구보다도 가까운 거리에서 그를 보좌하면서 김 전대통령의 주변사람들에 대한 은밀한 대화 내용 및 사생활부분이 소상하게 기록돼 있어 위·변조 논란에도 불구, 관심을 끌어 왔다. 문제는 87년도에 완성된 <동교동 24시>에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DJ 숨겨놓은 딸’과 관련, 이 여인의 생모인 김모여인에 대한 짤막한 언급이 있다는 점이다. <일요서울>은 지난 22일 2시간에 걸쳐 이 책의 저자인 함씨(현재 모 교회 장로)를 만나 ‘DJ 숨겨놓은 딸’의 생모인 김여인에 대한 함씨의 주장을 들어보았다

.- <동교동 24시> 발간 이후 심적으로 힘들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활해 왔나.▲<동교동 24시>가 발간된 후 한 목사의 전도로 기독교를 받아들여 현재는 집 근처의 교회에서 장로로 활동하고 있다. 벌써 18년전 일이다. 모든 것에 감사하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 최근 김 전 대통령의 ‘숨겨진 딸’ 논란으로 정가가 시끄럽다. 함씨는 이미 87년도에 이와 관련된 내용을 책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데.▲그때가 1971년 4·27 대통령선거 때로 기억한다. 제 7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씨는 박정희 후보에게 94만6,928표차로 패했다. 4월 29일 김대중씨는 대통령 선거 후 첫 성명을 발표하고 크게 낙담한 가운데 며칠간 호텔에서 쉬면서 총선구상을 한다며 내게 광화문 근처의 E호텔에 예약을 맡겼다.

- 그때 김 전 대통령이 김모 여인을 만나게 된 것인가.▲만난 건 아마 그 이전부터였던 것 같다. 다만 한 사건으로 인해 김대중씨와 김여인의 관계를 알게 된 것이 그때였다는 것이다.

- 그 사건이란 무엇인가. ▲그날 김대중씨가 아래층에 손님이 찾아왔다고 하면서 두시간 가량 아래층으로 내려간 적이 있었다. 나는 예정에 없던 출타였기 때문에 서둘러 나가서 수행하려고 했는데 잠깐이면 된다고 하면서 (같이 안가도) 괜찮다고 했다. 전에도 가끔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중요한 손님을 만나시는가 보다’고만 생각했다.

- 그 중요한 손님이 누구였나.▲당시에는 중요한 손님인줄만 알았는데, 김대중씨가 돌아온 후 방에서 좀 자겠다고 하여 당분간 시간의 여유가 있을 것 같고, 배도 출출해서 호텔앞의 분식집에 가서 칼국수나 한그릇 먹을 생각으로 호텔 로비로 내려갔다. 그런데 20대 초반의 아가씨가 호텔 직원들과 실랑이를 하고 있어 쳐다보니 내가 잘 알고 있는 여인이었다. 내가 아는 척을 하며 ‘웬일이냐’고 물으니까 ‘내가 선생님하고 같이 있다 나오는데 호텔방 값을 나보고 지불하라고… 이럴수가 있는거야’라며 불쾌해 하는 것이었다. 순간 당혹스러워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데 이모(DJ집사)씨가 후다닥 뛰어나오며 ‘그 방값은 내가 계산한다고 하지 않았냐’고 해서 사건은 일단락됐다. 그후 이씨가 내게 지금 있었던 일은 절대 입밖에 내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함씨는 이같은 내용을 이미 87년 발간된 <동교동24시>에서 밝힌바 있다>

- 그 여인은 누구였나.▲그 여인은 광화문 소재 N호텔 뒤에 있는 J 요정의 종업원이었다. 평소 김대중씨가 자주 가던 곳으로 늘 그 여인이 김대중씨의 수발을 들곤 했다. 내가 늘 보좌를 하곤 해서 서로 ‘오빠, 동생’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바로 이번에 논란이 되고 있는 김모씨다. (김 전 대통령의 딸이라고 주장하는 여인의 생모를 두고 SBS 뉴스추적에서는 한정식집 종업원이라고 하고 오마이뉴스 등 일부언론에서는 그 여인이 김 전 대통령의 비서라고 밝힌 바 있는데, 함씨가 주장하는 바로는 한정식(요정을 겸한) 집 종업원이 맞다고 한다)

- 당시 사건이 71년이면 김씨가 김 전 대통령의 딸을 낳았다고 한 시점과 맞지 않은데.(김씨의 딸은 1970년 7월 6일생이다)▲김씨가 딸을 낳았다는 얘기는 나도 이번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알게 됐지만 김대중씨는 이 여인과 이전부터 만나왔고, 이 사건 이후에도 계속 만났다. - 김씨는 어떤 여인이었나.▲그런 곳에서(요정) 일할 정도의 여인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유명 대학교 출신에 지성과 미모를 갖춘 여인이었다. 163cm 키에 마르지도 뚱뚱하지도 않은 적당한 체구로 전형적인 한국 여인상이었다. 또 약간의 경상도 사투리를 섞어 쓰면 애교가 넘치는 목소리였고 특별히 김대중씨에게 관심을 보였었다.

- 김 전대통령은 박정희 정권 때 뿐만이 아니라 역대 정권에서 요주의 인물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다시피 해왔다. 정보기관에서 이를 정치적으로 활용할 만도 한데.▲그건 김대중씨를 잘 몰라서 하는 소리다. 워낙에 자기관리가 철저했기 때문에 김여인에 대한 것도 당시에는 지근에서 보좌해 온 몇 명만 알 뿐이었다. 당시 정보기관에서 이를 사전에 알았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동교동 24시>를 쓰고 나서 주위의 시선이 곱지 않았는데.▲그 책을 쓰고 나서 개인적으로 미안한 마음이 든 사람은 김홍업 밖에 없다. 책 나온지 5~6년 후에 강남의 모 호텔에 조찬을 하러 갔다가 우연히 홍업이를 봤는데 ‘너한테는 정말 미안하다’고 했다. 홍업이가 ‘이해한다’고 말하더라.

- 오랜 기간동안 김 전 대통령을 모셔왔는데 결별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처음에는 존경심과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차츰 김대중씨를 보면서 실익에 밝은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임기응변이 능하고 절대 자기가 손해 볼 일은 안한다. 말로만 민주와 평등을 외치는 사람이란 걸 알게 되면서 너무 실망스러웠다.

- 일각에서는 함씨가 85년 신민당 연수국장으로 내정돼 있다가 김홍일씨와의 불화로 다른 사람이 임명된 것에 대한 불만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는데.▲나는 그런데 욕심이 없는 사람이다. 나의 철학과 신념을 믿고 살아왔고, 그래서 여러 차례의 감옥살이 중에도 반성문 한번 써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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