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July 29, 2015

“5.18은 北특수군이 개입한 내란” 진실은? 언제쯤이면 이진실공방에 종지부가 찍힐까.

35년이 훌쩍 흘러간 광주사태의 진실은 무엇인가?

한친지로 부터 이멜을 하나 받았다.  그내용을 혼자 보고 지우기에는 너무도 어마어마해서 여기에 옮겨 놓았다.  이러한 진실공방이 조국이 처한 오늘의 현실이란점을 모른척 지나칠수 없었기 때문이다.  소름이 끼치기까지 했다.  지금시대가, 일제의 식민지로 부터 해방돼면서, 온나라가 '찬탁' 아니면 '반탁'으로 나뉘에 데모가 쉴날이 없었던, 그때가 연상될 정도로 국론이 분열되여 있다는것은 참으로 걱정스러운 일이다.

특전사 군인들이 투입되여, 무고한 광주 시민들을 마구잡이로 학살 했다는, 공식적인 기록이 정설로 되여 있는것으로 나와 있고, 이들의 지휘 통솔계통에 있었던 당시 국가권력기관의 사람들이 무참히 언론의 포화를 맞고, 우리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사라진지 오래됐고, 당시에 희생된 사람들은 국가유공자로 인정받고, 애국자로, 그리고 국가 연금까지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고, 당연한 귀결로 여겨지고 있다.

http://lifemeansgo.blogspot.ca/2013/05/518-33.html

광주사태의 잘못알려진 진실을 밝혀내기위해 그동안 많은 고통과 비난을 받아가면서, 자료를 찾아 외로운 싸움을 해왔던 또다른 전문가들의 자료공개가 하나씩 둘씩 세상에 밝혀지고 있음을 본다.  유감스럽게도 이들이 발표한 자료는 언론이나 정부당국의 공감을 얻지못해, 전국민들에게 홍보가 돼지 않고 있는점, 또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이들이 밝혀낸 자료들은 그내용으로 봐서, 천지가 개벽될 정도로 엄청난 내용들이고, 지금까지 공식적으로 알려진 "광주사태"의 내용을 완전히 뒤엎는 것들이다.  그리고 엄청난 누명(?)을 쓰고 고통속에 살아가고 있는 당사자들이나 유족들에게 채워진 족쇄를 풀수 있는 열쇠가 될수있을것 같다.

밝혀진 내용중 일부는 유감스럽게도 제대로 전달돼지 못해, 끝까지 읽어볼수 없었던점도 안타깝게 느껴졌었다.  언제쯤이되면 밀고 당기는 진실공방이 속시원하게 밝혀질수 있을까?  어느 누구의 안위를 위해서가 아니고 5천만 국민들의 안위를 위해서 말이다.

요즘 고국의 일부 언론들이,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 전 대통령, 한국현대화의 기초를 만든 박정희 전대통령"에 대한 재조명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좋은 현상을 보면서, 광주사태 역시 조속히 그렇게 진실된 명암을 밝혀내야 할때가 된것으로 보여진다.
그만큼 조국 대한민국이 모든면에서 성장했기 때문이다.  국민들간에 이간질은 그만해도 될때까 됐고, 또한 국제사회에서도 그수준에 맞는 품격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5.18은 北특수군이 개입한 내란” 진실은?




1980년 5.18 광주사태 당시 무기고를 습격하고, 일사분란한 행동으로 정예 계엄군에 대항한 '600명의 연고대생'이 북한에서 보낸 특수군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이를 뒷받침 하는 군 출신 탈북자들의 증언과 함께, 북한에서 공개한 '광주인민봉기 30돌 행사' 사진 속 인물들이 1980년 5월 언론사 사진기자들이 촬영한 일부 시민군의 얼굴과 일치한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대한민국대청소 500만 야전군>;(대표 지만원)2일 오전 한국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에서, 5.18 광주작전에 참전한 북한특수군의 사진을 공개하겠다며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날 지만원 박사는 5.18에 대해, “북한정권에 의해 남파된 600명 정도의 북한특수군이 국가전복을 목표로 광주시민을 선동해 일으킨 게릴� �폭동”이라며, “5.18은 여적사건이라는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났으며 숨길래야 숨길 수 없는 역사적 진실”이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5.18 당시 계엄군으로 광주에 있었던 11공수특전여단 출신 최 모씨(65)와 문 모씨(62)의 증언도 이어졌다.
당시 특전여단 중대장이었던 최모씨는 “중대원의 1/3 정도가 전라도 출신이었고 광주가 고향인 사람도 몇 명 있었다”며, “당시 광주에서 떠돌던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씨를 말리려고 한다’는 말은 억지를 넘은 유언비어”라고 증언했다.
통신 부사관이었던 문 씨는 “부대원들이 광주에 도착한 뒤 M-16 소총의 ‘공이’를 빼서 반납한 기억이 있다”며, “진압장비는 헬멧과 진압봉 뿐이고 소총은 등에 매고 있을 뿐이었다. 고층건물 밑으로 지나가다가 시위대가 던지는 축대 쌓는 돌에 맞아 죽은 동료도 있었다”고 밝혔다.




문씨는 1980년 5월 21일 시민군이 도청 으로 행진하던 상황을 설명하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군용 P-77 무전기에서 지휘관이 ‘여기서 밀리면 다 죽는다’고 절박한 목소리로 말했는데 정말 다 죽었다”며, “당시 도청 앞 분수대 주변은 사망한 진압군의 피로 물들었고 살려달라고 절규한 전우들의 목소리는 지금 이 시간에도 귀에 쟁쟁하다”고 말했다. 이어 문씨는 당시 광주에서는 귀를 의심케할만한 연설과 구호가 등장했다고 설명했다.
아수라장이 된 광주시내에서는 각종 선전문구와 함께 "이제 우리의 혁명은 끝났다. 진압군은 투항하라. 인민전선의 시민군은 해방됐다. 인민전선 지원군이 도착했다. 조선인민군만세"라는 내용의 귀를 의심케 하는 연설 구호가 이어졌다. 

지만원 박사는 1995년 7월 18일 서울지방검찰청과 국방부가 공동으로 발간한 ‘5.18관련사건 수사결과’와 1985년 안기부가 작성한 ‘광주사태 상황일지 및 피해현황’, 2006년 5.18 기념재단에서 발간한 ‘5.18의 기억과 역사’ 등의 문건을 검토해 18개의 ‘스모킹 건(Smoking gun)’을 찾아냈다고 강조했다.
‘스모킹 건’은 어떤 범죄나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는데 쓰이는 ‘결정적 증거’를 의미하는 단어다.
특히 지만원 박사는 1980년 5월, 광주에서 불과 4시간만에 5,400여정의 총기를 탈취하고 다이너마이트 폭탄 2,100여개를 조립해 전남도청 지하실에 설치하는 등 게릴라 폭동을 주도한 ‘600명의 연고대생’이, 실제로는 북한이 6개월여에 걸쳐 침투시킨 특수군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만원 박사는 “계엄군이 광주시내에 있었을 때는 이들 600명이 활약했지만 군이 시 외곽으로 철수한 22일부터는 증거를 남기지 말아야 한다는 철칙 때문에 복면을 하고 광주시민들과 어울리지 않았다”며, “당시 광주에는 ( 시민군이 탈취한) 4대의 장갑차를 운전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고, 장갑차를 운전해 유공자가 된 사람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지만원 박사는 위에서 언급한 각종 보고서를 인용해 “총상으로 사망한 광주시민의 70%가 무기고에서 꺼낸 총에 의해 숨졌다”며, “이는 남남갈등을 조장하기 위한 북한의 술책이었다”고 설명했다.
지만원 박사는 80년대 서울과 광주에서 발생한 시위 기록을 보면, 북한책에 기술돼 있는 시위 전략·전술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점도 지적했다.
1982년 ‘조국통일사’가 발행한 대남공작 역사책 ‘주체의 기치따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에는 북한의 대남 시위전략이 나온다. 주요 내용을 요약하면 ▲주력시위는 시내 중심부에서 벌여야 한다 ▲성토대회와 성명발표, 교내시위, 농성투쟁 등을 통해 공격을 실시한다 ▲모든 시위대는 집중과 통일된 행동을 통해 정치적 효과를 높여야 한다 등이다.
이 책에는 ‘광주 반파쇼민주화투쟁에 대한 교훈’ 이라는 5.18 관련 글도 실려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광주인민봉기는 새로운 단계의 반파쇼민주화투쟁을 위해 귀중한 교훈을 남겼다.
그 교훈은 첫째로 남조선인민의 해방투쟁 승리는 반미투쟁과 결합될 때만 확고한 것으로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청년학생운동과 로동운동과의 결합을 새로운 높은 단계로 심화 발전시켜야만 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보다 광범위한 대중적 지반 위에서 반파쇼민주역량을 형성하고 그것을 조직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지만원 박사는 “1980년 5월에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시위들은 그저 산발적으로 발생한 시위가 아니라, 시위전략과 전술에 의한 북한 시위작전사령부의 일사불란한 지휘 하에 이뤄진 작전이라는 믿음을 갖게 한다”고 말했다.

◆ 5.18에 북한 대남전략기구가 개입했다는 탈북자들의 증언
남한으로 망명한 故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와 김덕홍 전 여광무역사 총사장은 1998년 7월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김덕홍: 북한 통일전선부에서는 분기에 한 번씩 강연을 하는데 광주문제를 자기네들이 한 것으로 이야기 합니다. 
황장엽: 북한 내부에서 대남사업을 내용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상식화돼 있다.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생활수준이 높아가는 한국에서 왜 데모나 운동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 醍�북에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남정책의 두 가지가 달라졌습니다. 하나는 남로당때와 같이 조직을 노출시키지 말라는 것. 그래서 지하당을 이중 삼중으로 만들어 누가 지도하는지 모르게 합니다. 둘째, 노동자나 군인보다는 학생들 속으로 들어가라는 겁니다.  
김덕홍: 김일성종합대학 옆에 3호청사가 있다. 광주운동 이후에 3호청사 사람들이 표창을 많이 받았습니다. 
황장엽: 동생, 그런 얘기 했다가 또 혼이 나려고 그래?
김덕홍: 형님, 우리가 이런 얘기 하자고 남한에 온 것 아닙니까. 여기 남한에 와서 꼭 하고 싶은 얘기를 해야겠습니다. 3호청사에 소속돼 있던 사람들이 광주민주화운동이 끝난 후 일제히 훈장을 받았습니다. 

내 친구들이 그 부서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 친구들도 광주민주화 운동 후에 � 팀揚�탔다고 축하술을 함께 마시면서 그들에게 직접 들은 겁니다. 

2006년 여동생, 딸 등과 함께 탈북한 전 북한특수군 출신 김명국(가명)씨의 증언도 5.18 북한 개입설을 뒷받침 하고 있다. 다음은 그의 증언을 요약한 것이다.
“1980년 5월 19일 전남 광주시로 남파돼 작전을 수행하다가 5월 27일 북한으로 철수하던 도중 북한군 포 사격훈련장을 통과하다가 부상을 당했다. 1국기훈장 1급을 받고 5.18영웅대접을 받으면서 2003년까지 북한군 특전사 교관(중좌)으로 복무했다.

…(중략)…광주봉기에의 북한군 침투총화(결산)가 6월 15일 김일성과 김정일의 직접적인 참석 하에 평양에서 열렸다. 남한에 침투됐다가 살아서 귀환한 군인, 전사한 군인 모두에게 공화국 영웅 칭호가 수여됐고 분견대 대장 2명은 조선인민군 교도지도국(특수전사령부) 작전부에 승급 배치됐다. 김일성은 소좌급민 분견대장들에게 대좌의 군사칭호를 수여했다.”

◆ 북한서 열린 광� 聆菅觀윤�30돌 행사,
여기에 등장한 8명의 ‘광수(광주 침투 북한특수군)’



지만원 박사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2010년 5월 17일 광주인민봉기 30돌 행사가 평양 중앙노동자회관에서 열렸는데, 이날 행사장 로얄석에 앉은 3명과 1980년 5월 광주에서 사진기자들에게 찍힌 3인조가 동인 인물인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지만원 박사는 이어 “김정은이 지난해 4월 15일 태양절 때, 군 간부들과 함께 김일성과 김정일의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태양궁전을 방문해 참배한 사진에서도 5명의 ‘광수’가 추가로 발견됐다”며, 5.18의 실체적 진실 발견을 위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고 입장을 밝혔다.
이날 기자회견을 주도한 지만원 박사는 5.18에 북한 특수군 수백 명이 조직적으로 개입했다는 주장을 거듭해왔다.
지만원 박사는 이런 주장을 입증하기 위한 증거자료를 모으는데 상당한 공을 들였다. � 殮牟〈�광주사태 당시 침투한 북한 특수군을 뜻하는 이른바 ‘광수’를 찾기 위해, 1980년 당시 광주 시민군들을 촬영한 사진과 북한이 공개한 각종 자료 등을 비교 분석하기도 했다.
그 결과 지만원 박사는, 모두 8명에 이르는 ‘광수’를 찾았다고 밝혔다. 지만원 박사가 밝힌 ‘광수’의 정체에 관한 사진 자료는, 시스템클럽(http://www.systemclub.co.kr/)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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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9월 27일 북한인권운동가인 김주호 박사가 공개한 함경북도 청진시 낙양동에 있는 '인민군영웅들의 렬사 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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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들어서는 한국에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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