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November 14, 2018

"아무도 관심 없다가..지금은 '적폐 청산'으로 몰아가니 기가 막힙니다" - 옮겨온 글.

참으로 더러운 한국이 돼버린것 같아, 참담하다.
이렇게 역사적 의미가 많은 농장을 지금 내 놓으라니...
박정희 대통령의 치적을, 박정희 대통령의 때가 묻어나는, 국가재건을 위한 간절한 염원이 담긴 이 조그만 시골농장이 그렇게도 문통 좌파와 주사파 적와대 애들의 걸림돌이 됐었단 말이냐?

봉하 마음에  이와 비슷한 농장이, 노무현 대통령의 흔적을 갖고 있는 곳이라면, 감히 리스가 끝났으니 비워 달라고, 그래서 그흔적을 없애겠다는, 갑질이 있었겠는가?

하는짖들이 어찌도 이렇게  국민들 패가르기를해서 국력을 분열 시키나.
아프리카 대륙의 애티오피아 애집트, 동남아시아, 또 중국을 가 보아라.  이미친 적와대 애들아.

그나라 주민들중, 50대 이후의 사람들은  거의가 다 박정희 대통령을 잘 알고, 훌륭한 지도자라는 말을 참으로 많이 들었었다.  어떤 나라들은  고위직 관리들을, 새마을운동에 대한 교육을 받기위해 한국에 파견도 했었다는 얘기들을 많이 들었었다.  그때마다 이들나라에 여행 오길 참 잘했다는 라는 자긍심을 느꼈었다.

잘한것은 잘한것데로, 못한것은 못한것데로  역사적 평가를 받아야 객관적이지  않나?

대통령도 아닌게, 대통령 휘장을 달고, 국민들의 혈세를 낭비해가면서 여행을 다니는 대통령 부인의 행동은 과연 국익에 도움이 되기라도 했었던가? 선물로 받은 전통의상을 맘데로 뜯어고쳐 입고 자랑을 했던, 영부인이라는 여자의 행동은 과연 국격을 높인 행동이었던가?

세계 역사를 봐도,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를 채택했던 나라들은 하나같이 다 국민들 골병들게는 했을 지언정, 경제적으로 잘살게 했던 기록은 아직까지는 보지 못했었다.  한국이 지금 그꼴이 돼가고 있다.



입력 2018.11.05 03:12 [최보식이 만난 사람]

철거 위기에 놓인 '박정희 농장'… 47년 관리인 이병화씨

이병화(73)씨는 과거에 '농민학교'를 운영했고, '월간 상업농경영' '계간 기계화농업' 등 농업 전문 잡지를 펴냈던 인물이다. 그가 '미리 써놓는 유언장'이라는 제목으로 이런 이메일을 보내왔다.

"저는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 새마을 1호 농가주택과 대통령이 사용하던 모든 집기를 보존해 국가 또는 지방문화재로 등록해주길 믿고 지내왔으나 누구도 관심을 가져 주지 않았고 지금은 오히려 '적폐 청산' 대상으로 몰아가고 있는 현실에 기가 막힙니다…."

요약하면 자신이 47년간 관리해온 농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관련된 역사적 현장인데 철거 위기에 놓였다는 것이다. 이 농장 부지의 소유권을 갖고 있는 산림청이 그 전까지 전혀 문제가 안 됐던 사항을 지금 와서 '규정 위반'이라며 사용 허가를 취소했다고 한다. 이에 '유언장'을 써놓고 맞설 수밖에 없다는, 얼마간 과장스러움이 느껴지는 그런 내용이었다.

경부고속도로 기흥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좌회전을 두 번 하니 대형 태극기와 함께 농장 입구가 보였다. 대형 비닐하우스 4동에 주택 3채가 딸려 있었다. '깍두기' 머리의 그가 검정 고무신을 끌면서 나왔다.

"1972년 2월 박 대통령께서 '새마을 농가주택' 모형 설계도를 주시며 지으라고 한 겁니다. 슬레이트 지붕, 시멘트블록 벽, 수세식 변기와 샤워실, 레일식 연탄 아궁이의 부엌 등 당시에는 첨단 개량 주택이었습니다. 농장의 비닐하우스에는 국내 처음으로 스프링클러가 설치됐습니다."

―지금 모습이 47년 전의 모습 그대로입니까?

"제가 관리인으로 살면서 겨울에 너무 추워 연탄 보일러를 온수 보일러로 바꾸고 테라스를 덧붙였습니다. 영애(박근혜)에게 다 보고하고 고쳤습니다. 슬레이트 지붕과 창고는 안 바뀌었습니다. 박 대통령이 썼던 응접세트와 책장, 농기구도 그대로입니다. 대통령 내외분의 사진 액자를 걸어놓았지만 영애께서 수감되자 아내가 강원도 절에 불공드리면서 그 사진을 모두 태웠습니다."

―당초 여기에 왜 박정희와 관련된 농장이 조성된 겁니까?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면서 이곳에 큰 웅덩이가 여러 개 생겼습니다. 시찰 나온 박 대통령이 웅덩이를 메워 농장을 만들어보라고 지시한 겁니다. 1972년 내가 농장을 맡아 셀러리, 양상추, 무, 배추 등을 재배해 청와대와 미8군 장성급 식당에 공급했습니다. 청정한 채소 재배 단지로 비공개 지역이었지요."

―선생은 어떻게 농장 관리를 맡게 됐습니까?

"청와대에서 여러 경로로 농장 관리자를 추천받았어요. 최종 면접에서 다섯 명이 남았는데 제가 끼였습니다. 저는 태권도 유단자에다 운전도 잘하고 농사지을 줄도 알았으니까요, 하지만 영어 시험에서 0점을 받아 꼴찌로 떨어졌어요. 낙담한 마음으로 영화 한 편을 본 뒤 서울역에서 열차를 기다리는데 '김해에서 온 이병화를 찾습니다'라는 구내 방송이 나왔어요. 청와대에서 찾는다며 3시간째 방송했다고 하더군요."

다음 날 청와대에 들어가니 박진환 경제특보가 '일본어는 좀 아시오?'라며 일본어 테스트를 했다고 한다. 그가 영어 시험에서 떨어진 걸 보고받은 박 대통령이 '농사짓는 사람에게는 일본어가 더 필요하지 않소?'라며 언질을 줬던 대로였다. 순위가 앞선 지원자들은 다른 민간기업에 추천해 취직시키고 그에게 농장을 맡겼다. 그런 시절이었다.

박정희와의 인연은 그가 김해농고를 자퇴하고 농사를 돕던 시절인 1961년 5월 16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남 김해에서 토마토 농사를 짓던 그의 부친이 불법 개조한 군용 트럭으로 납품하러 가다가 혁명군에 붙들려 옥고를 치렀다. 그는 울분을 못 이겨 박정희 국가재건회의의장 앞으로 '기아 선상에 허덕이는 민생고를 해결하지 못할망정 생사람 잡는 엉터리 혁명 하지 말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 뒤 도청으로 출두 요구서를 받았다.

당시 군 장교는 그의 배짱에 오히려 호감을 느껴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고, 그는 "대학 진학이 소원"이라고 대답했다. 그해 검정고시에도 떨어진 그는 이듬해 건국대에 영농 장학생으로 들어갔다.

"학위 없는 청강생으로 3년간 다녔어요. 1967년 군 제대 후 고향에서 당수 도장을 하면서 삼륜차 2대를 구입해 요즘 말하는 '농산물 유통 개혁'을 했지요. 주민들에게 비닐하우스로 당근, 우엉, 토마토, 셀러리 등을 짓게 한 뒤 수확하면 제가 수거해 미 8군이나 도매시장에 팔아줬어요."
그의 활약으로 마을에는 초가집이 기와와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고 골목길은 차가 진입할 수 있을 정도로 넓어졌으며 전기도 들어왔다. 이런 내용이 당시 '대한뉴스'에 세 차례 방영됐다.

"1968년 김해 비닐하우스 농장에 시찰 나온 박 대통령이 저를 찾았습니다. 그때 삼륜차를 몰고 있었는데 '깍두기'형 머리에 물들인 군복과 워커 차림이라 경호원이 못 내리게 했습니다. 대통령이 다가와 운전석에 앉은 제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몇 년 전 자신에게 항의 편지를 쓴 사실도 나중에 보고받았을 테고요. 아마도 이 녀석이 무식하게 생겨도 '진국'이라고 판단했던 모양이지요. 그랬으니 농장을 맡겼겠지요."

―박 전 대통령이 가끔 농장에 들렀나요?

"주말에 관악골프장에서 운동을 한 뒤 들르곤 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정부 통계보다 진솔한 민성(民聲)을 듣고 싶어 했지요. 그래서 대통령 면담을 눈치채지 못하게 '시멘트와 요소 비료를 주겠다'며 농촌 지도자들을 여기로 불러 모았어요. 사전에 막걸리를 먹여 취하게 해서 대통령을 만나게 했습니다. 박 대통령이 '그쪽 새마을은 잘 돌아가나?' '이장(里長) 하기 어렵지 않나?' 하고 물으면, 할 소리 안 할 소리 다 했습니다."

―그런 현장 사진이나 기록이 남아있습니까?

"골프 치고 비공개로 하는데 누가 카메라를 들고 오겠습니까.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있는 시절도 아니고. 당시 이득용 농림부 차관의 자서전에 '박 대통령의 농장'이라며 이렇게 막걸리 마시는 얘기가 나옵니다."

―농장 관리직은 정식 공무원이었습니까?

"청와대 별정직이었습니다. 하지만 청와대에서 근무한 적이 없고 일주일에 두세 번 기름과 월급을 타고 보고하러 갔을 뿐입니다. 대통령과 같이 농사짓는 '청와대 관리 시범 농장'의 원예 기술자가 정확한 제 직책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사무관, 마지막에는 이사관급 월급을 받았습니다."

―박 대통령이 서거한 뒤로는 어떻게 됐습니까?

"공무원 신분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 전까지 월급을 받고 농장에서 근무했지만 5공(共) 시절부터는 임차인이 됐습니다. 농장 부지가 산림청 소속 국유지였기에 사용료를 지불하는 대신, 경작한 채소를 청와대에 팔았습니다. 전두환·노태우·김영삼 대통령 시절은 물론이고, 김대중 대통령 취임 1년 때까지 무려 26년간 청와대 납품 농장이었습니다."

―청와대 채소 납품은 왜 중단됐지요?

"주위의 매연과 오염으로 청정 재배가 어려워졌습니다. 게다가 공시지가 상승에 맞춰 오르는 토지 사용료를 채소 작물로는 맞추기 힘들었어요. 그래서 분재·화훼 같은 경관(景觀) 농업으로 바꿔나갔습니다. 10년 전부터 한 조경학과 교수가 대형 비닐하우스 안에 연못과 수석(壽石), 500여 종의 자생식물로 '한국민속식물원'을 만들었습니다."

―산림청에서는 이를 '규정 위반'이라고 하더군요. 채소 재배를 위해 빌려준 땅을 다른 용도로 쓰고 있다는 것인데.

"민속식물원은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게 하려는 것이고 돈 한 푼 받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귀농·귀촌자를 위한 약초학교와 체험학습도 하고 있습니다. 산림청과 공동으로 산야초 기술 개발도 했습니다. 산림청 연구직 공무원들이 여기서 강의도 했습니다. 쭉 해오던 것인데, 지금 와서 '채소를 안 심으면 철거하겠다'고 나오는 겁니다. 식물원 연못에 키우는 금붕어와 비둘기만 한 은계·금계도 시비를 걸어 별 도리 없이 주변 사람들에게 줬습니다. 내가 무슨 축산업을 한 것도 아니고…."

―산림청 담당자는 당초 채소를 심겠다고 했으니 그 규정대로 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규정이라면 할 말이 없고, 산림청과 3년 단위로 계약을 연장해왔습니다. 제가 이 농장을 관리해온 햇수가 그 공무원의 나이보다 더 오래됐습니다. 규정 못지않게 관례가 중요하지 않습니까."

―어떤 관례를 말합니까?

"그전 공무원들은 농장에 나와 경관식물과 산야초를 심는 걸 보고는 칭찬했습니다. 채소 재배보다 소득이 높으니 사용료를 올려받았습니다. 작년에는 1700만원을 냈습니다. 지금 기준으로 하면 그전 공무원들은 직무 유기를 했다는 것인데, 답답해서 미치겠습니다. 이런 트집을 잡는 것은 적폐 청산 분위기에 편승해 박정희의 흔적을 지우겠다는 겁니다."

―산림청 담당자는 "이는 규정 위반의 문제일 뿐 박정희와 관계된 것은 알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답변하겠지만, 저도 듣는 얘기가 있습니다. 박 대통령 시절에도 영욕(榮辱)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잘한 일, 못한 일도 우리의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박정희의 농장이고 새마을 농가주택 1호라면서 왜 '지방문화재' 지정을 청원하지 않았습니까?

"그동안 경기도 지사들에게 청원했지만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박근혜 정부 시절에는?

"영애(박근혜) 주변 사람들이 '이병화가 농장 땅을 불하받아 수백억원 착복했다'는 식으로 청와대에 무고했습니다. 이런 억울할 데가 어디 있습니까. 내가 등기부등본과 모든 자료를 제출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사과 한마디 없었습니다. 영애가 주변 사람 때문에 국가 경영에 큰 문제가 생길 것으로 나는 그때 이미 내다봤습니다."

―산림청에서 11월 2일까지 철거하라는 공문을 보냈더군요. 날짜가 지났군요.

"얼마 전 철거반이 와서 현장을 둘러보고 갔습니다. 정말 이런 나라에 살면 뭐 하느냐 하는 마음밖에 없습니다. 누군가는 알아야 될 것 같아 '유언장'을 보낸 겁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1/04/201811040280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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