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November 02, 2014

둘째날,Hanoi 시내 관광, 그리고 Sapa로. (10월 30일,2014.목요일)



9시정각에  어제밤에 만났던 Tour Guide Tao가 호텔로비에 도착해 있었다. 그의 안내로 먼저 Hanoi City Complex인에 있는 대통령궁, Ho Chimin Mousoleum, One pillar temple 그리고 박물관으로 안내 되였다.  우선 교통편에 구애 받지않고 하고 싶을때 하고 가고 싶을때 마음데로 움직일수 있어 좋았다.   



 월남 국기가 휘날리는 이곳은  Ho Chimin Complex바로 밖에 있는 통일된 월남의 국회의사당이라고 한다.  공산당 의회의 정확한 숫자는 잘 모르고 약 500명 이상이라고만 하고 자세한 내용은  Guide는 살짝 비켜간다.

 

날씨가 무척 덮고 후덥지근하여 땀이 짧은팔의 T-Shirt를 젖는다. 
대통령궁은 외벽이 노락색으로 칠해져 있다. 불란서가 그들의 Colony로 월남을 지배하고 있을때 총독이 사용할려고 건축한 집이라고 하는데 3층건물이다.  호치민이 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입국한1945년부터  1969년 그가 운명할때까지 이곳에서 기거 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이곳보다는 Complex 맨끝쪽에 있는 별도의 사가에서 지냈다고 한다.


이사가는 바로 뒷쪽에 파놓은 깊은 동굴로 연결되여 있어, 외부로 부터 적의 침략이 있다는 징후가 있으면 금새 사가를 빠져나와 동굴로 들어 갈수 있도록 되여 있다고 했다.  내부는 구경을 할수 없는게 아쉬웠다.


 사거리 교차로처럼 딱 붙어있는 서로다른 두나무 줄기가 중간에 붙어 같이 한뿌리에서 난것 처럼 살고 있는데, 호지민이, 월남이 서로 하나로 통일되여 살았으면 하면서 간절한 염원을 나타낸뒤 부터 떨어져 있던 두나무 줄기가 하나로 붙어 이렇게 잘 자라고 있다고 설명해주는 가이드의 허풍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를 잠시 머믓 거리기도 했다.  쇠뇌교육의 무서움을 또다시 한번 절감 한 순간이기도 했다.
호지민은 생전에 3대의 고급 차량을 사용 했었다고 하는데, 3대 모두가 진열되여 있었다.

호치민이 대통령으로 있을때 대통령궁에서 첫번째로 맞이한 외국의 정상은 인도의 네루 수상이라고 했다. 1954년도에 그가 방문했을때 이곳에서 회담을 하고,  호치민으로 그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후에 제 3세계의 리더가 되면서, 서방세계보다는 당시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쏘련과 중국에 더 깊은 외교 관계를 맺어, 인도가 서방세계에서 감시의 대상이 됐던것 같다.



Guide, Tao는 26세로 이미 결혼하여 귀여운 20개월된 딸이 있다고 했다.  그의 아내는 아기를 낳으면서 직장을 그만 두었는데, 이곳은 현재 직장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워 현재는 아이와 함께 집에 있다고 했다.  그는 현재 여행사로 소속된게 아니고 이번 우리 여행을 안내하기위해 여행사와 계약을 맺었다고 하면서 천진난만하게 웃는다.



 "1958년 5월 17일" 표시판을 집 기둥위에 부착시켜 놓았다.  그가 이곳 사가에서 거주하기 시작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 라고 했다.


게릴라전을 지휘 하면서도, 자기로서는 Supreme생활을 했던것 같다.   당시의 상황과 비교 했을때 그를 따르는 서민들의 생활과는 동떨어진 고급 생활 Pattern이었던것을 볼수 있었다.


 호치민의 사가옆의 호수에는 보리수나무들이 아름들이 크게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는데 신기한것은 그나무 뿌리들이 마치 동굴속의 석순들이 자라듯 지상으로 올라와 또하나의 구경거리를 만들고 있었다.  큰나무들의 대부분이 이러한 모습들이었다.


대통령궁뿐만이 아니고 이곳에 있는 모든 건물은 내부 Tour가 금지돼여, 멀리서온 관광객인 우리같은 사람들에게는 좀 아쉬운면이 있었다. 
Mousoleum에는 호치민의 방부처리된 시체가 진열되여 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시체가 멀리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 있다고 설명하면서, 그의 시체가 혹시라도 부패하지 않을까 염려해서, 매년 한번씩 방부처리를 위해 모스크바로 옮겨진다고 했다.
그는 죽어서도 최상의 대접을 받는것 같았다.  공산주의 체제이기에 가능한것으로 이해 됐다. 박물관역시 개방이 안됐고, 오직 One Pillar Temple만이 개방되여 구경할수 있었지만  현재 수리중이어서 지저분했다.

조그만  Temple은 가운데 기둥 하나가 전체 Temple을 떠받치고 있어 가이드역시 그런면에 더 Focus를 맞추어 설명해 줬다.  그래서 One Pillar Temple이라고 명명됐다고 한다.
1049년 당시의 Lee Dynasty의 왕 LyTai Ta는 늙도록 자손이 없어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One Pillar Temple로 이동중에 이상한 나무를 발견했다. 보리수나무 줄기에서 기생충 처럼 자라고 있는 야자수나무를 본것이다.  Guide역시도 이광경을 신기해 한다고 하면서, 여기서도 Ho Chimin의 혼이 통해서 두나무가 하나로 살게된것이라는 해설을 해주었다.

One Pillar Temple에는 요란한 장식들이 꾸며져 있어, Temple이 원래 뜻하는 내용과는 다른 의미로 이곳에서는 사용되고 있지는것 같아 보였다.



Temple 조금만 연못속에 있었고, 연못에는 많은 Lotus 가 자라고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없이 썩은물만이 고여 있을 뿐이었다.  하루는 그가 꿈속에서 신령님을 만났는데 앞으로 많은 자손들이 번성할거라는, 엉터리 같은 꿈을 꾸었는데 정말로 그다음부터 자손이 번성하기 시작하여, 마치 성경 창세기에서 믿음의 조상 Abraham이 하나님으로 부터 자손번창에 대한 언약을 들은것과 흡사하게 이해가 됐다.  그현몽이 있은후 왕은 지금의 자리에 조그만 Temple 건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Ho Chimin시에는 호수가 여러개 있는데, 오늘 우리가 탐방하는 Temple Traian Duoc Pagoda도 바로 호수가에 자리하고 있었다.





사당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높은 문턱을 넘어야 했다.  그이유가 무척 의미가 있다 싶었다.
관광객들이 Temple안으로 들어갈때 발을 들어 안으로 옮길때 높은 턱때문에 자연적으로 몸을 앞으로 숙이면서 고개를 숙이게 하려는 뜻이 있다고 했다.  바로 경건의 표시가 자연적으로 문턱을 넘으면서 이루어 진다는 것이다.




일명 호국탑(Defending Country Pagoda)이 이 Temple의 상징물처럼 높이 솟아 있었고, 뜰 한가운데는 커다란 보리수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인도수상 네루가 Ho Chimin시를 방문했을당시 이곳을 방문하여 조그만 묘목을 기념식수 했는데, 지금은 웅장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곳으로 부터 약 700미터를 걸어서 간곳은, 한국의 성균관과 비슷한, Temple of Literature(The Quan Thanh Temple)이 크게 자리고하고 있었다.  마침 대학을 졸업하기전의 많은 학생들이 Gown을 입고, 기념촬영을 하기에 여념이 없어 보였고, 같이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했는데 대환영이다.



이곳은 옛날 왕조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는데, 공자의 상이 모셔져 있는 맨안쪽 사당까지 가는데는 3개의 통과문과 Path가 있었다.  가운데길은 오직 왕이 사용했고, 양쪽길은 일반 평민들이 사용 했었다고 한다.  Ho Chinmin시에서 본 Temple들은 건물을 중심으로 외곽은 전부 직사각형 아니면 정사각형으로 이루어져 있고 담을 쌓은게 특징으로 보였다.

 Literature Temple안의 정원에는 한문으로 6개의 글짜가 꽃으로 단장되여 관람객들에게 관심을 끌고 있었다.  좀 아쉬운것은 그래도 나는 한자의 뜻을 어렴푸시 알수 있었지만, 한자권이 아닌 서구에서 온 많은 관광객들에게는 하나의 장식용으로만 보여질수 있다는게 아쉽다.



Temple에 모셔져 있는 좌상들을 보기기위 들어가는데는 높은 문턱이 있다.  왜냐면 문턱을 넘기위해 발을 옮기면서 자연적으로 몸을 앞으로 숙이는데, 그자세가 앞에 있는 Statue에 인사를 한다는 뜻이 담겨 있게 하기위해서 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 Confucian사상의 시조 공자의 좌상이 있는곳의 문턱은 3개인데 가운데 문턱은 양쪽의 문턱보다 더 높았다.  설명에 의하면 문턱을 넘을때 발을 더 높이 들어 넘어야 하기 때문에 고개를 더 숙이게 하기 위해서 였다고 한다.  관광객들이 참 많다.

월남의 소수민족들의 삶의 옛모습을 진열한 박물관을 방문하기위해 큰길의 Side Walk을 잠깐 걸었다.  길거리 노점상들이 군데 군데 눈에 띄었다.  내가 이민오기전 서울에 있을때 서울역에서 부터 염천교 다리 부근까지의 Side Walk에는 많은 아주머님들이 소가죽을 부드럽게 처리하여 만든 설렁탕같은 간단한 식사를 팔았던 모습과 Overlap되기도 했다. 우리부부를 포함한 한국인들의  삶은 지금은 천국에서 살고 있다해도 과장이 아님을 젊은 세대들이 알고 있는지? 

노점상지역을 지나니 벌써 우리의 자가용차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운전수 Feng씨는 59세의 중년인데 말수가 적고 항상 웃는 낯으로 인사를 할뿐이다.  그는 차를 굉장히 깨끗하게 관리하는것 같았다.  박물관에는 여러옛모습들이 사진으로 진열되여 있었으나, 가장 눈에 띄는것은 실제의 크기로 그들이 살던 집들을  Replica해 놓은 두곳이 눈에 띄었다.

첫번째는 초가지붕의 긴 집이 있는데, 그곳에는 여러세대가 살고, 그안에는 창고, 개인방 등등 생활터전이 있고, 집들은 높이 올려져 있었는데 이는 파충류의 침투와 침수를 막기위한 수단에서 였다고 한다.  그안을 직접 걸어가 보았다.  올라가는데는 통나무를 깍아만든 계단을 이용 했는데 간단하게 보였다.  안에는 칸을 막아 필요한 데로 사용하는 모습이 재현돼고 있었는데, 창고에는 항아리들이 많았고, 침실에는 아주간단하게 바닥만 있었다. 신기하게도 바닥은 전부 대나무를 역어 만든것이다.
더위를 식히기위해 시내 번화가의 높은곳에 있는 커피숖에 들려 맥주를 Guide와 함께 마시면서 거리를 내려다 본 광경이다.  수많은 차량과 Scooter가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데 보기에도 아찔하다. 길을 잠시라도 걷게 될때는 "꼭 차량조심하세요"를 가이드는 입에 달고 있다.  그래도 Collision은 한번도 못봤다.  신호등은 물론 없고, 가는 방향 오는 방향은 대개 정해져 있으나 때로는 마음데로 밀려오는 Traffic을 역행해서 아무렇치도않게 달리는 광경도 이곳에서만 볼수 있었다.

저녁에는 월남 전통의 한 인형극을 관람했다. 여행사측의 관광코스중의 하나이다.  수중무대는 나오는 인물들이 주로 용(Dragon), 옛날 왕족의 삶의 모습 그리고 큰 상상의 새들인것같다.
인형극의 명칭은 "Lotus Water Puppet" 였다.  피곤함 때문에, 또 그의미를 잘 이해못해 잠시 졸기고하고, 또 눈뜨면 보기도하고....
특히한것은 무대가 물로 전부 채워져 있어 호수에서 Performance를 펼치는 것 같아 보였다.  이런 수중 인형극은 처음 보는것으로, 수중극은 월남으로 기억될것 같다.


월남 소수민족들의 삶의 모습을 인형극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그들의 Folk song과 그들의 전통악기들이 동원되는 쑈였다



인형극이 끝나고 Performer들이 수중무대와 나와 감사의 인사를 하고 있다.  그들이 입은 의상은 옛날 월남 부족들의 전통의상이라고 한다.  어떤 부족들을 대표하는 옷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침에 Lao Cai기차역에서 내려 Guide Mao와 함께 Sapa로 가기위해 높은 산길을 구비구비 달려 정상에 이르렀을때, Watch Tower에서 주위경관을 찍을 것이다.  계단식 논이 눈에 뚜렷이 각인된다.   UNESCO에 등재된 인류 문화유산으로 보호되고 있다고 설명한다.




Sapa지역은 지금은 관광지로 많은 외지 사람들이 몰려든다고 한다. 평균 하루에 약 150 여명의 외국관광객들이 모여든다고 한다.   H'mong Tribe Village를 방문하기위해 비탈길을 내려가면서 주위를 보이는 주변의 상가와 민가들이다.

한상점에 진열된 대나무 뿌리로 만든 인상좋은 옛날 할아버지들의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어떤것은 삼국지에 나오는 장비처럼 무서운 수염을 하고 있고,  관광상품으로서의 개발하는 그생각은 끝이 없는것 같다.  이지역은 대나무들이 잘 자라고 있어 집짖는데 많이 활용하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기붕이 무척 높게, 급경사로 만들어져 있었다.  이집은 족장이 살고 있다는 뜻으로 높게 지붕을 했고, 또 다른 목적은 그지역 사람들이 농사일이나 가축을 기르면서 숲속을 헤매다 길을 잃었을때, 멀리서 지붕을 보고 찾아 오는 등대역활도 했다고 한다.  이집역시 침수나 짐승들의 습격을 막기위해 높이 올려져 있는데, 그곳에는 넓은 광장같이 꾸며져 있고, 이곳에서 족장과 주민들이 함께 모여 회의도 했었다고 한다.










바로 옆에는 지붕도 낯은 조그만 부속집이 있었다.  그곳의 집둘레에는 울타리같은 Fence가 있고 그곳에는 남녀나상의 조각이 세워져 있었는데, 사람사는 곳은 결국 남녀간의 조합이 최고의 목적인것은 이곳에서도 마찬가지임을 알수 있는 남자의 심볼이 크게 조각되여 있었다.  이집은 평상시에는 부족원이 죽었을때 장사지내는 3일 또는 4일간 관을 보관해 두는 일종의 창고구실을 했다고 한다.


하노이시내는 여전히 많은 차량과  Scooter(소형 Motorcycle)들이 쉴새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넓은 도로를 달리고 있었으며 교통질서는 한마디로 표현 한다면 무법천지로 보였고, 때로는 같은 길에서 오는차 가는차들이 엇갈려 용케도 잘 통과하는 모습은 마치 곡예를 하는것 같아 보였다.  신기한것은 이런데 익숙해서인지, 아무도 소리를 치는 사람도 없었고, 다만 Honk만 해 댈 뿐이었다.

자동차를 소유한다는것은 이곳에서는 부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보여진다고 Guide는 설명해준다.  자기도 곧 그런 자동차를 갖게 되기를 원하기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저녘은 베트남의 전통 음식점에서 9코스를 차례대로 맛을 보는 곳으로 안내해주었다.  중국 남부지방을 여행시 그들 음식의 향이 너무나 독해 고생했던것에 비하면 크게 나를 괴롭히지는 않아 먹을만 했고, 맛있게 다 먹어 치웠다.  이곳에서도 역시 Guide는 안내만 해주고 자기는 따로 식사를 한다고 하면서 합석하기를 사양하기에, 이미 애티오피아 여행시 경험이 있었기에, 간단하게 ‘식사후 다시보자’라는 인사를 나누었다.

베트남의 최북단 관광지  Sapa로 가는 야간 침대열차를 타기위해 Le Tonkin Station으로 우리는 안내 되였다.  역사는 지저분하고 Local들이 잠옷을 입고 열차를 기다리는, 1960년대 후반의 조국을 연상케 할수 있는 민도낯은 풍경이었다.  개찰구도 없다.  


침실 하나에 4개의 침대가 있어 2부부가 함께 투숙할수 있는 규모였는데, 우린 여행사측에서 4장의 표를 다 구입해서 우리 부부만 쉬면서 갈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어 편안하게 됐다.  문제는 Air Cond.이 너무도 세게나와 추워서 못견딜 지경이 되여 근무자로 보이는 여자분에게 조절해 달라고 했는데, 도대체 대화가 통하지 않아 소귀에 경읽는 꼴이 되어, 할수 없이 윗쪽 침대의 모포를 꺼내 두겹으로 덮고 잠을 잘수밖에 없었다.  약 10시간 달린다고 하는데 실제 거리는 약 350 킬로밖에 안된다고 했다. 굉장히 느린 속도로 관광객을 위해 주로 운행 되기에 하룻밤을 차에서 보내게 하는 계산에서 인것 같았다.   써비스로 4병의 마실물병이 준비되여 있어 갈증을 쉽게 해소할수 있었다.  아침부터 강행군해서 곧 깊은 잠에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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