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erald Resort Hotel에서 Receptionists와 아침 작별 인사를 하면서 한컷 한것이다. 아가씨들은 모두가 전통의상인 아오자이를 단정하게 차려 입고 근무하는 모습이 귀여워 보였다.
어제 Nugeyen이 얘기한데로 아침에 다른 Guide와 Driver가 왔다. 이들은 현지 가이드 들이고, Nugeyen은 Hue에서 같이 왔기에 아침에 우리부부를 공항까지 데려다 주기위해 하룻밤 호텔비를 지불하는것 보다는 그들을 보내고 현지 가이드를 고용하면 경비를 절감할수 있어서 그렇게 한것 같다. 어쨋던 시간이 되여 새로운 가이드를만나, 8시 정각에 Da Nang 공항으로 달렸다.
Vietnam Airways 는 Air bus 320 시리즈로 아주 깨끗하게 정돈되여 있었고, 우리 좌석은 맨뒷줄의 끝에 있었다. 여행을 많이 해 보았지만, 끝줄의 좌석에 앉아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오히려 더 편하고, 특히 착륙하여 서로 나갈려고 하는 혼동도 우린 피할수 있어 편했다.
사이공 공항에는 Guide Thong이 나와 있었다. 인사를 나누는데 Communication이 시원찮아 보여 약간 걱정이 됐었다. 속단은 금물이기에 그를 지켜보고 있는데, 호텔에 가는길에 먼저 Ben Thanh 시장에 들려 구경시켜 주겠다고 하면서 대화를 나누었는데, 이제는 확실히 그가 하는 영어가 대화 가능한 영어가 아니고, 또 내가 하는 얘기를 이해하는것 같지가 않음이 파악됐다.
날씨는 무척 더워 32도라고 하는데, Guide 까지 문제가 있으니 구경을 편하게 하기는 어려울것 같이 느껴 졌다. 사이공은 서울의 교통체증이나 토론토의 교통혼잡과는 비교가 안되게 자동차와 Motor Cycles들 그리고 그사이에 가끔씩 자전거까지 합세하여 자칫하면 위험에 처할수 있을것만 같이 보였다. 거리에는 교통신호들이 있기는 하나, 내가 보기에는 거의 무용지물처럼 지켜지지가 않아 모두가 써커스단의 곡예사 같이 길을 달린다. 그러나 고속질주는 거의 없어 보여 그나마 다행이었다.
차가 차량들을 비껴나와 길가에 서더니 여기가 Ben Thanh 시장이라고 내려 구경하게 된다고 설명이다. 같이 하는줄 알았는데, 자기는 여기서 약 40분 후에 다시 오겠다고 하고 Driver와 함께 떠나고 우리 부부는 시장 구경을 시작했다. 무척 더워 땀이 줄줄 흐른다. 이렇게 더운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지금의 심정으로는 신기해 보이기까지 했다.
시장안은 마치 서울의 평화시장(?)같이 복잡하고 시끄러웠다.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겼다.
눈을 두리번 거리면서 상점앞을 지날때는 호객행위를 하는것도 평화시장에서 처럼 비슷했다.
음식점도 시장의 한 Section을 차지하고, 한그릇 먹고 가라고 손짖과 몸제스처를 써서 우리를 부른다. 한곳에 시선에 멈춰 그곳에서 점심을 먹을 생각으로 자리에 앉았다. 토론토에서 월남 국수를 먹어 보았기에 그맛을 상상하면서 주문을 했다. 막상 받아놓고 보니 국물이 없다. 쌀국수와 튀긴 베지타불 롤과 기름에 튀긴 두부조각 그리고 그들고유의 Hot Sauce 전부다. 국물이 없어 난감해 하고있는데, Lunar가 먼저 맛을 보더니, 괜찮으니 그냥 먹으라고 눈총을 준다.
노점상같은 식당에서 국수 한그릇 사먹은 사이 정(?)이 들었다고 Lunar가 Cook아줌마에게 캐나다 국기가 그려진 손수건 하나를 건네 주면서 아쉬운 작별을 한다.
Guide가 기다리고 있는 장소에는 벌써 그가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차를타고 달리면서 다음 구경지인 reunification Palace로 가는 대신에 호텔로 가자고 제안했다. 더워서 그냥은 안될것 같아서 였다. 호텔에서 Check-in을 하고 그와 다시 만나기로 하고 우린 방을 찾아 10층으로 올라가 바로 샤워를 하고 몸을 식혔다. 이제는 좀 살것 같다. Air cond.돌아가는 방은 시원하다.
Reunification Palace라고 해서 어떤 궁인가 궁금했었는데, 현지에 도착해서 보니, 월남이 패망하기전까지 당시의 대통령 '티우'가 있었던 대통령궁을 명칭을 바꾸어 그렇게 부르고 있다는것을 알았다. 현재는 당시 대통령이 기거 하면서 사용했던 가구와 살림도구를 그대로 진열하여, 관광객들에게 관람을 시키고 있었다.
원래 이Palace는 1868년에 당시 월남을 점령하고 있던 프랑스가 월남의 총독 거주용으로 건설된 것으로 지하가 요새화 시켰었다고 한다. 그후 1967년도에 당시 월남 대통령이었던 티우가 대대적인 Renovation을 한 그모습으로 관광객들에게 전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티우 대통령은 집권했을때 부터 그의 나라가 결국 패망할것을 알기라도 했었나 보다싶게 Fortified된 궁을 더 강화 시켰었나 보다. 도망갈 궁리를 다 해 놓았기 때문이다.
Guide의 설명을 힘들게 종합해보면, 이대통령궁은 요새화된, 그것도 모든것이 적의 공습에 대비하여 처음부터 건물은 불란서 총독의 관저및 집무실로, 지하는 요새화한것임을 알수 있었다.
1954년도에 프랑스가 물러나면서 남북으로 갈린 남쪽의 월남은 1963년도까지 '고딘디엠'대통령이 통치하고 있었으나, 1963년도에 그가 암살당하자, 군대가 계엄령을 선포하여 3년간 통치 하다가 1967년도에 '티우' 대통령이 되고, Palace를 대통령 관저로 사용하기위해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했다고 설명하는데, Guide의 영어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 때때로 옆에서 영어로 설명해주는 다른 관광팀에 끼어 들어 듣곤 하는 촌극도 있었다.
자꾸 되묻고, 또 옆의 관광팀에 끼어 설명을 듣는 나를 알아 차리고 미안해 하긴 했었는데, 그렇타고 의사 소통이 잘되는것도 아니고..... 오래전에 죽은 DJ가 미국의 ABC대담방송에 나와 돼지도 않는 소리로 동문서답할때, 이를 알아차리고 당시 Anchor였던 Ted Kopple이 중간에서 포기하고 대담을 끝낸 방송을 시청하고 있던 내자신이 더 부끄러워 했었던 기억이 떠올라, 약도 오르고 정말로 힘들었었는데, 오늘 그꼴이 나고만 곤욕을 치른 것이다.
세계각국에서 온것으로 보이는 관광객들이 매우 많다. 그틈에 끼어 우리 부부는 그래도 Guide, Thong을 따라 궁 내부를 구경해야만 했다. 위의 Green 색갈의 Carpet이 깔려 있는 방은 당시 대통령이 국무회의를 주제하던 방이라고 한다. 옛모습 그대로 전시되여 있다한다.
복도를 건너 맞은편에 있는 이곳 회의실은 Military leader들이 모여서 회의를 했었던 곳이라고 한다. 월남전을 할때 군실세들이 득시글 거렸을 장면이 연상되고도 남는다.
이방은 외교 사절들을 맞이 하여 대통령이 함께 축배도하고 외교활동을 하던 Banquette Hall이었다고 한다. 현재 앞쪽벽에는 공산당기와 통일된 월남 Flag가 붙어 있었다. 안내표시판에 있는 사진역시 당시 티우대통령이 주최했던 사진이 아니고, 통일후 호치민이 중심이된 세력들이 주관하는 외교사절맞이 행사를 촬영한 사진이었다.
대통령의 집무실과 그아래 사진은 대통령이 외국정상들과 만나 국사를 처리할때 사용했던 집기들과 장식이 그대로 재현되여 있다.
이방은 대통령이 외교사절을 맞이 했던 방건너편에 있는 이공간은 대통령의 집무실보다 오히려 더 커보였는데, First Lady가 사용했던 집무실겸 외국의 정상부인들과 만났던 곳이라고 한다.
외교행사중 큰 신임장 제정하는 곳으로 쓰였던 방이라고 설명서에 기록되여 있어 알수 있었다. 1975년 월남 패망전까지 월남에는 세계 여러곳에서 파견된 외교관들이 많았었다고 한다. 신임장 제정을 할때의 모습도 상상된다.
Guide의 설명에 의하면, 월남인들이 원치 않았는데, 미군들이 임의로 남부 월남에 고문관을 파견하기 시작하여 결국 전쟁이 커지고, 결과적으로 국민들만 희생양이 된셈이라고 돼지도 않은 영어와 High tone으로 쏟아낸다. 배은망덕을 이런때 쓰는게 아닐까?
분명히 Hanoi에서 만났던, Hue에서 만났던 Guide들은, 프랑스가 물러난후 남북으로 갈라진후 남부 월남에서 민주정권을 세워 국민들의 생활은 자유가 보장된 체제속에서, 의무보다는 국가에 요구만 하는, 자유를 만킥하면서 지내는 동안, 북부 월남은 공산게릴라들이 남부를 무너뜨리기위해 인접국 라오스 캠보디아의 국경지역을 이용하여 남부를 괴롭히고 공략했다고 한다.
노름에 미치면 무릎썩는줄도 모른다는 식으로, 천하태평세월을 누리고 있는사이 남부 월남은 서서히 병들어 가고, 결국 미군에게 협조를 요청하기 시작한 것이 월남전의 전초가 됐었다고 들었던 얘기들과 전연 상반된 설명을 한다. 사상적으로 무너지면 백약이 무효가 된다는것을 나는 월남전을 통해서 이해하고 있었다. 오늘 조국 한국의 경우를 잠시 비교해 보기도 했다.
대통령의 침실과 영부인의 침실이 따로 구분되여 있었는데....그점은 이해하기가 좀 힘들었다.
부부생활은 언제하고, 왜 또 따로 침실을 사용해야 했는지에 대한 답은 없었기 때문이다.
한쪽벽에는 Bronze로 새겨진 월남인들의 모습을 조각해 놓았다. 벼농사 짖는 농민, 손으로 탈곡하는 모습, 주요 가축물인 소와 그위에서 평화롭게 노래부르는 모습 등등으로 월남민들의 민족성을 볼수 있었다.
티우가 집권시 외국 정상들로 부터 선물받은 물건들을 진열해 놓았는데, 어찌 이것 뿐이겠는가? 진열해 놓은 대부분의 선물들이 주민들에게 티우대통령과 당시의 남부월남의 정권이 국민들은 내팽게치고, 자기들만의 호화생활을 했었다는, 그래서 북부월맹이 남쪽과 전쟁하여 통일된 월남을 세웠다 라는 뜻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음을 파악할수 있었다.
First Lady의 집무실도 대통령의 집뭄실과 같은 규모로 꾸며져 있었고, 많은 권력을 대통령 못지 않게 향유 했었던 것 같다. 한참 연합군이 월남군들과 합세하여 게릴라들을 격퇴하는 싸움을 하고 있을때, 대통령궁 앞에서는 데모와 승려들이 분신 자살했었던 당시의 기사를 신문과 방송에서 듣고 보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국가 지도자와 국민들이 서로 다른 생각을 할때는 나라의 존속이 어렵다는 뜻이다.
대통령을 비롯한 고위관리들의 전용 극장도 있었다. 그뒷방에는 당시에 사용됐었던, 지금은 고물이나 괴물처럼 보이는 영사기 시설도 그대로 진열되여 있었다.
대통령궁의 뒷쪽 이층 지붕에는 Heliport가 있고, 당시 티우대통령이 전용으로 사용했던 Huey헬기가 그대로 진열되여 있었다.
어느 공군조종사가 이들의 부패상에 항의하여 헬리포트에 폭격을 가해서 두군데에 구멍이 났었다고 하는데 그흔적이 빨갛게, 하얗게 표시되여 있기도 했다.
http://lifemeansgo.blogspot.com/2014/07/huey.html
4년전에 새로 건축된 고층빌딩이 지금은 월남에서 제일 높다고 한다. 68층이라고 하는데 주로 외국인들 전용 아파트로 사용하고 맨꼭대기 층에는 Coffee Shop이라고 하는데....
지하 벙커로 안내 됐다. 당시 월남전에 참여 했던 연합군의 파병된 숫자가 월남어로 적혀 있었다. 여러나라가 있었지만, 내가 지금 기억하는것은 미국과 한국군의 숫자이다. 미군은 전부 541933명이었었고,한국군은 50355 명으로 기록되여 있었다. 전연합군의 합계는 604,481로 기록해 놓았다. 이것은 분명히 현공산정부에서 내놓은 기록같았다.
대통령이 항시 군수뇌부들과 대화를 하거나 지시할수 있는 통신실의 장비들이다.
지하 벙커에 비치되여 있는 대통령의 개인 침실이다. 과연 티우가 이곳에서 전쟁지휘를 해보긴 했었을까? 그리고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는 했었을까? 수많은 젊은 청춘들이 자기네 나라도 아닌 이곳에서 목숨을 잃어 가면서 싸우고 있을때 말이다.
통일이 돼서,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선지가 벌써 40 여년이 흘렀다. 달라진게 뭐가 있는가?
Saigon은, Guide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에는 대통령궁이 제일 높은 건물이었었으나 지금은 고층건물들이 즐비하다고 자랑(?)스럽게 얘기 했지만, 서민들의 생활은 오히려 소비성향의 생활 Pattern으로 발달됐다는것을 느낄뿐이다. 그리고 공산주의의 근본 이념인 모두가 평등하게 잘 살아 보자는 구호는 허구임을 스스로 보여주는 증인이 되고 있는 현장을 만들고 있었다.
있는자와 없는자의 빈부의 격차는 하루가 다르게 벌어지고 있다고 했다. 있는자들은 캐나다, 미국에서도 타보기 힘든 고급차량들을 즐기고, 서민들은 아직도 두부장수가 메고 다니는 어께에 매는 운반기구를 이용하여 삶의 전쟁터에서 뛰고 있다. 내가 타고 다니는 기아 Sodrento와 같은 모델이 이곳에서는 거의 두배 더 비싸다. 있는자들에게 부담이 돼지 않는단다. 처음 여행시작하면서 Guide해 주었던 Tao의 5가지 꿈이 생각난다.
불란서 파리에 있는 Notre Dame 천주교 건물을 모델삼아 지었다는 오래된 천주교건물이 지금은 외국인들의 관광코스가 됐다. 금요일 오후라서 약 10여명정도의 신자들이 모여 본당안의 한쪽에서 예배를 보고 있는 모습도 목격했다.
내가 보았던 파리의 교회건물 지붕의 뒷쪽이 돔형식으로 둥글게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곳의 뒷쪽꼬리 부분의 지붕이 앞쪽과 똑같아 다시 Guide에게 물었더니, 이번에는 성당안의 내부구조가 같다는식으로 대답을 해준다.
성당에서 바로 길건너 왼편에는 국제 우체국 건물이 있었다. 이곳역시 관광코스중의 하나다.
프랑스 점령시 지어진 건물로 지금도 건물안에서는 우체국 직원들이 업무를 보고 있었다.
우체국 내부의 일부이다. 가운데 Hall을 중심으로 양쪽에는 업무 창구가 있었고 맨뒷쪽에는 Parcel들을 받아 운송하는 부서가 있었다. 맨끝쪽의 중앙 벽에는 Ho Chimin초상화가 천안문광장의 대문앞에 걸려 있는 모택통처럼 걸려 있었다. 자유사상에 흠뻑 젖어 있었던 사이공 시민들이 정신개조를 하기위한 여러 조치들 중의 하나임을 느낄수 있었다.
성당과 우체국앞의 바쁜 거리에서 한신혼 부부가 결혼기념사진 촬영에 정신이 없었다. 차량의 물결이 지나고 순간적으로 빈틈이 생기면 번개처럼 길로 뛰어들어 촬영을 했다. 내가 보기에는 꼭 저렇게 까지 해야 하나? 였으나, 본인들에게는 평생에 한번있을 기회이기에 모든 지혜를 동원하여 사진속에 담는것 같다. 그들이 잘 살았으면 했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이곳에도 이혼 풍조가 만연하여 결혼 4년을 못넘기고 이혼하는 비율이 34%라고 한다. 현대 젊은이들의 흐름인가? 아니면 결혼과 가족의 개념이, 향락과 발달된 통신 장비의 후유증의 산물일까?
사이공의 인구가 천만명이 넘는다고 Guide는 설명하면서, 6백만대 이상의 Motor Cycle들이 거리를 밤낯없이 누리고, 더해서 헤아릴수 없는 숫자의 자동차까지 합치면 Saigon땅바닥이 주저앉지 않고 있는게 신통해 보일 정도였다. Motor Cycle들의 간격이 불과 10쎈티미터 거리도 안되는것 같은데도 부딪치지 않고 잘도 달린다. 모두가 써커스단의 곡예사들 처럼 보인다.
거리의 신호등은 있으나 마나한 존재로 전락된지 오래인것 같다. 거의 무시되고, 순간순간의 형편에 따라 차량과 Motor Cycle들의 함대가 밀치고 네거리를 달린다. 다행인것은 폭주족이 없다는점이다.
더이상은 걸을수가 없는 괴로움이 뒤따랐다. 매연이 나의 손을 코를 감싸게 한다. 많은 Motor Cycler들이 마스크를 착용하는 이유를 알것 같았다. 발길을 돌려, 원래 계획했었던 Local 식당에서, 토론토에서 많이 먹어 보았던 월남국수의 따뜻한 국물맛을 볼려고 했던 계획은 취소하고, 대신에 Chain Store로 보이는 Convenience 상점에 들려, 따뜻하고 수증기를 발산하고 있는 큰찐빵 두개를 구입해서 들고 호텔로 들어와 저녁으로 대신했다. 설명서에 의하면 매추리알과 고기를 들어 있다고 해서 구입했는데 맛이 딱 입맛에 좋다.
자동차는 이곳에서는 부의 상징으로 통한다. 처음 만났던 Guide Tao가 했던 다섯가지의 소원이 생각난다. 내가 타고 다니는 것과 똑같은 기아 Sorento의 차값이 내가 지불했던것 보다 거의 두배 정도 비싼것 같다. 공동소유한다는 공산주의의 허구성은 여기서도 여지없이 나타난다. 있는자와 없는자의 Gap은 하루가 다르게 더 벌어지고 있다고 Guide는 투덜 댔었다. 있는자에게 비싼 자동차 한대는 소비에서 관심의 대상이 아닌것으로 이해됐다.
이많은 숫자의 차량들과 Motor Cycle들과, 사람들은 지금 그들이 향하고 있는 Final Destination은 어디일까? 자못 궁금해 진다. 우린 호텔속의 방한칸으로 들어 가는데....
내가 살고 있는 토론토의 주거환경이 최적이라는것을 이곳에서 다시한번 비교감사한다.
메일을 열어보니, 아들에게 연락이 왔다. 엄마,아빠 안부를 묻는 내용이다. 이런것이 피로 맺어진 혈육만이 느끼는 삶의 의미인것을 또한번 깊이 느낀다. 감사.
어제 Nugeyen이 얘기한데로 아침에 다른 Guide와 Driver가 왔다. 이들은 현지 가이드 들이고, Nugeyen은 Hue에서 같이 왔기에 아침에 우리부부를 공항까지 데려다 주기위해 하룻밤 호텔비를 지불하는것 보다는 그들을 보내고 현지 가이드를 고용하면 경비를 절감할수 있어서 그렇게 한것 같다. 어쨋던 시간이 되여 새로운 가이드를만나, 8시 정각에 Da Nang 공항으로 달렸다.
Vietnam Airways 는 Air bus 320 시리즈로 아주 깨끗하게 정돈되여 있었고, 우리 좌석은 맨뒷줄의 끝에 있었다. 여행을 많이 해 보았지만, 끝줄의 좌석에 앉아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오히려 더 편하고, 특히 착륙하여 서로 나갈려고 하는 혼동도 우린 피할수 있어 편했다.
사이공 공항에는 Guide Thong이 나와 있었다. 인사를 나누는데 Communication이 시원찮아 보여 약간 걱정이 됐었다. 속단은 금물이기에 그를 지켜보고 있는데, 호텔에 가는길에 먼저 Ben Thanh 시장에 들려 구경시켜 주겠다고 하면서 대화를 나누었는데, 이제는 확실히 그가 하는 영어가 대화 가능한 영어가 아니고, 또 내가 하는 얘기를 이해하는것 같지가 않음이 파악됐다.
날씨는 무척 더워 32도라고 하는데, Guide 까지 문제가 있으니 구경을 편하게 하기는 어려울것 같이 느껴 졌다. 사이공은 서울의 교통체증이나 토론토의 교통혼잡과는 비교가 안되게 자동차와 Motor Cycles들 그리고 그사이에 가끔씩 자전거까지 합세하여 자칫하면 위험에 처할수 있을것만 같이 보였다. 거리에는 교통신호들이 있기는 하나, 내가 보기에는 거의 무용지물처럼 지켜지지가 않아 모두가 써커스단의 곡예사 같이 길을 달린다. 그러나 고속질주는 거의 없어 보여 그나마 다행이었다.
시장안은 마치 서울의 평화시장(?)같이 복잡하고 시끄러웠다.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겼다.
눈을 두리번 거리면서 상점앞을 지날때는 호객행위를 하는것도 평화시장에서 처럼 비슷했다.
음식점도 시장의 한 Section을 차지하고, 한그릇 먹고 가라고 손짖과 몸제스처를 써서 우리를 부른다. 한곳에 시선에 멈춰 그곳에서 점심을 먹을 생각으로 자리에 앉았다. 토론토에서 월남 국수를 먹어 보았기에 그맛을 상상하면서 주문을 했다. 막상 받아놓고 보니 국물이 없다. 쌀국수와 튀긴 베지타불 롤과 기름에 튀긴 두부조각 그리고 그들고유의 Hot Sauce 전부다. 국물이 없어 난감해 하고있는데, Lunar가 먼저 맛을 보더니, 괜찮으니 그냥 먹으라고 눈총을 준다.
노점상같은 식당에서 국수 한그릇 사먹은 사이 정(?)이 들었다고 Lunar가 Cook아줌마에게 캐나다 국기가 그려진 손수건 하나를 건네 주면서 아쉬운 작별을 한다.
Guide가 기다리고 있는 장소에는 벌써 그가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차를타고 달리면서 다음 구경지인 reunification Palace로 가는 대신에 호텔로 가자고 제안했다. 더워서 그냥은 안될것 같아서 였다. 호텔에서 Check-in을 하고 그와 다시 만나기로 하고 우린 방을 찾아 10층으로 올라가 바로 샤워를 하고 몸을 식혔다. 이제는 좀 살것 같다. Air cond.돌아가는 방은 시원하다.
Reunification Palace라고 해서 어떤 궁인가 궁금했었는데, 현지에 도착해서 보니, 월남이 패망하기전까지 당시의 대통령 '티우'가 있었던 대통령궁을 명칭을 바꾸어 그렇게 부르고 있다는것을 알았다. 현재는 당시 대통령이 기거 하면서 사용했던 가구와 살림도구를 그대로 진열하여, 관광객들에게 관람을 시키고 있었다.
원래 이Palace는 1868년에 당시 월남을 점령하고 있던 프랑스가 월남의 총독 거주용으로 건설된 것으로 지하가 요새화 시켰었다고 한다. 그후 1967년도에 당시 월남 대통령이었던 티우가 대대적인 Renovation을 한 그모습으로 관광객들에게 전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티우 대통령은 집권했을때 부터 그의 나라가 결국 패망할것을 알기라도 했었나 보다싶게 Fortified된 궁을 더 강화 시켰었나 보다. 도망갈 궁리를 다 해 놓았기 때문이다.
Guide의 설명을 힘들게 종합해보면, 이대통령궁은 요새화된, 그것도 모든것이 적의 공습에 대비하여 처음부터 건물은 불란서 총독의 관저및 집무실로, 지하는 요새화한것임을 알수 있었다.
1954년도에 프랑스가 물러나면서 남북으로 갈린 남쪽의 월남은 1963년도까지 '고딘디엠'대통령이 통치하고 있었으나, 1963년도에 그가 암살당하자, 군대가 계엄령을 선포하여 3년간 통치 하다가 1967년도에 '티우' 대통령이 되고, Palace를 대통령 관저로 사용하기위해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했다고 설명하는데, Guide의 영어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 때때로 옆에서 영어로 설명해주는 다른 관광팀에 끼어 들어 듣곤 하는 촌극도 있었다.
자꾸 되묻고, 또 옆의 관광팀에 끼어 설명을 듣는 나를 알아 차리고 미안해 하긴 했었는데, 그렇타고 의사 소통이 잘되는것도 아니고..... 오래전에 죽은 DJ가 미국의 ABC대담방송에 나와 돼지도 않는 소리로 동문서답할때, 이를 알아차리고 당시 Anchor였던 Ted Kopple이 중간에서 포기하고 대담을 끝낸 방송을 시청하고 있던 내자신이 더 부끄러워 했었던 기억이 떠올라, 약도 오르고 정말로 힘들었었는데, 오늘 그꼴이 나고만 곤욕을 치른 것이다.
세계각국에서 온것으로 보이는 관광객들이 매우 많다. 그틈에 끼어 우리 부부는 그래도 Guide, Thong을 따라 궁 내부를 구경해야만 했다. 위의 Green 색갈의 Carpet이 깔려 있는 방은 당시 대통령이 국무회의를 주제하던 방이라고 한다. 옛모습 그대로 전시되여 있다한다.
복도를 건너 맞은편에 있는 이곳 회의실은 Military leader들이 모여서 회의를 했었던 곳이라고 한다. 월남전을 할때 군실세들이 득시글 거렸을 장면이 연상되고도 남는다.
이방은 외교 사절들을 맞이 하여 대통령이 함께 축배도하고 외교활동을 하던 Banquette Hall이었다고 한다. 현재 앞쪽벽에는 공산당기와 통일된 월남 Flag가 붙어 있었다. 안내표시판에 있는 사진역시 당시 티우대통령이 주최했던 사진이 아니고, 통일후 호치민이 중심이된 세력들이 주관하는 외교사절맞이 행사를 촬영한 사진이었다.
대통령의 집무실과 그아래 사진은 대통령이 외국정상들과 만나 국사를 처리할때 사용했던 집기들과 장식이 그대로 재현되여 있다.
이방은 대통령이 외교사절을 맞이 했던 방건너편에 있는 이공간은 대통령의 집무실보다 오히려 더 커보였는데, First Lady가 사용했던 집무실겸 외국의 정상부인들과 만났던 곳이라고 한다.
외교행사중 큰 신임장 제정하는 곳으로 쓰였던 방이라고 설명서에 기록되여 있어 알수 있었다. 1975년 월남 패망전까지 월남에는 세계 여러곳에서 파견된 외교관들이 많았었다고 한다. 신임장 제정을 할때의 모습도 상상된다.
Guide의 설명에 의하면, 월남인들이 원치 않았는데, 미군들이 임의로 남부 월남에 고문관을 파견하기 시작하여 결국 전쟁이 커지고, 결과적으로 국민들만 희생양이 된셈이라고 돼지도 않은 영어와 High tone으로 쏟아낸다. 배은망덕을 이런때 쓰는게 아닐까?
분명히 Hanoi에서 만났던, Hue에서 만났던 Guide들은, 프랑스가 물러난후 남북으로 갈라진후 남부 월남에서 민주정권을 세워 국민들의 생활은 자유가 보장된 체제속에서, 의무보다는 국가에 요구만 하는, 자유를 만킥하면서 지내는 동안, 북부 월남은 공산게릴라들이 남부를 무너뜨리기위해 인접국 라오스 캠보디아의 국경지역을 이용하여 남부를 괴롭히고 공략했다고 한다.
노름에 미치면 무릎썩는줄도 모른다는 식으로, 천하태평세월을 누리고 있는사이 남부 월남은 서서히 병들어 가고, 결국 미군에게 협조를 요청하기 시작한 것이 월남전의 전초가 됐었다고 들었던 얘기들과 전연 상반된 설명을 한다. 사상적으로 무너지면 백약이 무효가 된다는것을 나는 월남전을 통해서 이해하고 있었다. 오늘 조국 한국의 경우를 잠시 비교해 보기도 했다.
대통령의 침실과 영부인의 침실이 따로 구분되여 있었는데....그점은 이해하기가 좀 힘들었다.
부부생활은 언제하고, 왜 또 따로 침실을 사용해야 했는지에 대한 답은 없었기 때문이다.
한쪽벽에는 Bronze로 새겨진 월남인들의 모습을 조각해 놓았다. 벼농사 짖는 농민, 손으로 탈곡하는 모습, 주요 가축물인 소와 그위에서 평화롭게 노래부르는 모습 등등으로 월남민들의 민족성을 볼수 있었다.
티우가 집권시 외국 정상들로 부터 선물받은 물건들을 진열해 놓았는데, 어찌 이것 뿐이겠는가? 진열해 놓은 대부분의 선물들이 주민들에게 티우대통령과 당시의 남부월남의 정권이 국민들은 내팽게치고, 자기들만의 호화생활을 했었다는, 그래서 북부월맹이 남쪽과 전쟁하여 통일된 월남을 세웠다 라는 뜻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음을 파악할수 있었다.
First Lady의 집무실도 대통령의 집뭄실과 같은 규모로 꾸며져 있었고, 많은 권력을 대통령 못지 않게 향유 했었던 것 같다. 한참 연합군이 월남군들과 합세하여 게릴라들을 격퇴하는 싸움을 하고 있을때, 대통령궁 앞에서는 데모와 승려들이 분신 자살했었던 당시의 기사를 신문과 방송에서 듣고 보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국가 지도자와 국민들이 서로 다른 생각을 할때는 나라의 존속이 어렵다는 뜻이다.
대통령을 비롯한 고위관리들의 전용 극장도 있었다. 그뒷방에는 당시에 사용됐었던, 지금은 고물이나 괴물처럼 보이는 영사기 시설도 그대로 진열되여 있었다.
대통령궁의 뒷쪽 이층 지붕에는 Heliport가 있고, 당시 티우대통령이 전용으로 사용했던 Huey헬기가 그대로 진열되여 있었다.
어느 공군조종사가 이들의 부패상에 항의하여 헬리포트에 폭격을 가해서 두군데에 구멍이 났었다고 하는데 그흔적이 빨갛게, 하얗게 표시되여 있기도 했다.
http://lifemeansgo.blogspot.com/2014/07/huey.html
4년전에 새로 건축된 고층빌딩이 지금은 월남에서 제일 높다고 한다. 68층이라고 하는데 주로 외국인들 전용 아파트로 사용하고 맨꼭대기 층에는 Coffee Shop이라고 하는데....
지하 벙커로 안내 됐다. 당시 월남전에 참여 했던 연합군의 파병된 숫자가 월남어로 적혀 있었다. 여러나라가 있었지만, 내가 지금 기억하는것은 미국과 한국군의 숫자이다. 미군은 전부 541933명이었었고,한국군은 50355 명으로 기록되여 있었다. 전연합군의 합계는 604,481로 기록해 놓았다. 이것은 분명히 현공산정부에서 내놓은 기록같았다.
대통령이 항시 군수뇌부들과 대화를 하거나 지시할수 있는 통신실의 장비들이다.
지하 벙커에 비치되여 있는 대통령의 개인 침실이다. 과연 티우가 이곳에서 전쟁지휘를 해보긴 했었을까? 그리고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는 했었을까? 수많은 젊은 청춘들이 자기네 나라도 아닌 이곳에서 목숨을 잃어 가면서 싸우고 있을때 말이다.
통일이 돼서,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선지가 벌써 40 여년이 흘렀다. 달라진게 뭐가 있는가?
Saigon은, Guide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에는 대통령궁이 제일 높은 건물이었었으나 지금은 고층건물들이 즐비하다고 자랑(?)스럽게 얘기 했지만, 서민들의 생활은 오히려 소비성향의 생활 Pattern으로 발달됐다는것을 느낄뿐이다. 그리고 공산주의의 근본 이념인 모두가 평등하게 잘 살아 보자는 구호는 허구임을 스스로 보여주는 증인이 되고 있는 현장을 만들고 있었다.
있는자와 없는자의 빈부의 격차는 하루가 다르게 벌어지고 있다고 했다. 있는자들은 캐나다, 미국에서도 타보기 힘든 고급차량들을 즐기고, 서민들은 아직도 두부장수가 메고 다니는 어께에 매는 운반기구를 이용하여 삶의 전쟁터에서 뛰고 있다. 내가 타고 다니는 기아 Sodrento와 같은 모델이 이곳에서는 거의 두배 더 비싸다. 있는자들에게 부담이 돼지 않는단다. 처음 여행시작하면서 Guide해 주었던 Tao의 5가지 꿈이 생각난다.
불란서 파리에 있는 Notre Dame 천주교 건물을 모델삼아 지었다는 오래된 천주교건물이 지금은 외국인들의 관광코스가 됐다. 금요일 오후라서 약 10여명정도의 신자들이 모여 본당안의 한쪽에서 예배를 보고 있는 모습도 목격했다.
내가 보았던 파리의 교회건물 지붕의 뒷쪽이 돔형식으로 둥글게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곳의 뒷쪽꼬리 부분의 지붕이 앞쪽과 똑같아 다시 Guide에게 물었더니, 이번에는 성당안의 내부구조가 같다는식으로 대답을 해준다.
성당에서 바로 길건너 왼편에는 국제 우체국 건물이 있었다. 이곳역시 관광코스중의 하나다.
프랑스 점령시 지어진 건물로 지금도 건물안에서는 우체국 직원들이 업무를 보고 있었다.
우체국 내부의 일부이다. 가운데 Hall을 중심으로 양쪽에는 업무 창구가 있었고 맨뒷쪽에는 Parcel들을 받아 운송하는 부서가 있었다. 맨끝쪽의 중앙 벽에는 Ho Chimin초상화가 천안문광장의 대문앞에 걸려 있는 모택통처럼 걸려 있었다. 자유사상에 흠뻑 젖어 있었던 사이공 시민들이 정신개조를 하기위한 여러 조치들 중의 하나임을 느낄수 있었다.
성당과 우체국앞의 바쁜 거리에서 한신혼 부부가 결혼기념사진 촬영에 정신이 없었다. 차량의 물결이 지나고 순간적으로 빈틈이 생기면 번개처럼 길로 뛰어들어 촬영을 했다. 내가 보기에는 꼭 저렇게 까지 해야 하나? 였으나, 본인들에게는 평생에 한번있을 기회이기에 모든 지혜를 동원하여 사진속에 담는것 같다. 그들이 잘 살았으면 했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이곳에도 이혼 풍조가 만연하여 결혼 4년을 못넘기고 이혼하는 비율이 34%라고 한다. 현대 젊은이들의 흐름인가? 아니면 결혼과 가족의 개념이, 향락과 발달된 통신 장비의 후유증의 산물일까?
저녁시간에 시내 거리를 산책하기위해 호텔을 나섰다. 밤과 낯의 차이가 없이 거리는 차량과 Motor Cycle로, Side Walk은 상점들의 물건이 점령하고, Motor Cycle까지 주차되여 있어 Walker들은 꺼꾸로 복잡한 도로의 한끝을 찾아 헤맨다.
사이공의 인구가 천만명이 넘는다고 Guide는 설명하면서, 6백만대 이상의 Motor Cycle들이 거리를 밤낯없이 누리고, 더해서 헤아릴수 없는 숫자의 자동차까지 합치면 Saigon땅바닥이 주저앉지 않고 있는게 신통해 보일 정도였다. Motor Cycle들의 간격이 불과 10쎈티미터 거리도 안되는것 같은데도 부딪치지 않고 잘도 달린다. 모두가 써커스단의 곡예사들 처럼 보인다.
거리의 신호등은 있으나 마나한 존재로 전락된지 오래인것 같다. 거의 무시되고, 순간순간의 형편에 따라 차량과 Motor Cycle들의 함대가 밀치고 네거리를 달린다. 다행인것은 폭주족이 없다는점이다.
더이상은 걸을수가 없는 괴로움이 뒤따랐다. 매연이 나의 손을 코를 감싸게 한다. 많은 Motor Cycler들이 마스크를 착용하는 이유를 알것 같았다. 발길을 돌려, 원래 계획했었던 Local 식당에서, 토론토에서 많이 먹어 보았던 월남국수의 따뜻한 국물맛을 볼려고 했던 계획은 취소하고, 대신에 Chain Store로 보이는 Convenience 상점에 들려, 따뜻하고 수증기를 발산하고 있는 큰찐빵 두개를 구입해서 들고 호텔로 들어와 저녁으로 대신했다. 설명서에 의하면 매추리알과 고기를 들어 있다고 해서 구입했는데 맛이 딱 입맛에 좋다.
자동차는 이곳에서는 부의 상징으로 통한다. 처음 만났던 Guide Tao가 했던 다섯가지의 소원이 생각난다. 내가 타고 다니는 것과 똑같은 기아 Sorento의 차값이 내가 지불했던것 보다 거의 두배 정도 비싼것 같다. 공동소유한다는 공산주의의 허구성은 여기서도 여지없이 나타난다. 있는자와 없는자의 Gap은 하루가 다르게 더 벌어지고 있다고 Guide는 투덜 댔었다. 있는자에게 비싼 자동차 한대는 소비에서 관심의 대상이 아닌것으로 이해됐다.
이많은 숫자의 차량들과 Motor Cycle들과, 사람들은 지금 그들이 향하고 있는 Final Destination은 어디일까? 자못 궁금해 진다. 우린 호텔속의 방한칸으로 들어 가는데....
내가 살고 있는 토론토의 주거환경이 최적이라는것을 이곳에서 다시한번 비교감사한다.
메일을 열어보니, 아들에게 연락이 왔다. 엄마,아빠 안부를 묻는 내용이다. 이런것이 피로 맺어진 혈육만이 느끼는 삶의 의미인것을 또한번 깊이 느낀다.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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