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아침일찍부터 어제 탐방하지 못한H mong, Dzao, Dzay Tribe가 살고 있는 Village 방문하기위해 바삐 서둘러야 했다. 험한 가파른 산어덕의 좁은 길은 걸어야 하는 어쩌면 고행의 길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이곳까지 그들을 보기위해서 날아왔는데, 내눈으로 그들의 생활 터전을 본다는것은 큰 의미가 있을것 같다.
Trekking으로 그들 부족동네에 가기전에 다시 어제 잠깐 들렸던 재래시장에 다시 들렀다. Lunar와 Mao가 좋아하기 때문이다. 물건들이 어제보다 더 많은것 같다.
자기 집에서 손수 재배한 채소류와 과일종류들..... 망고도 눈에 들어온다. 물건값은 관광지라서 인지 무척 비싸다. 후진국의 생활수준에서 이를 보통 시민들이 사 먹는다는것은 어쩌면 많은 부담이 될정도로 비싸고, 우리에게 그들의 돈 단위는 무척 높아서 머리를 어지럽힌다.
1US 달러는 21,250 Dong이다.
꽃을 파는 아낙네의 정성을 그녀가 진열해 놓은 장미꽃송이에서 느낄수 있다. Bud하나하나를 다 종이로 단단히 싸매서 더운 날씨가 봉우리를 금방 활짝 피우는것을 방지하는 지혜를 발휘하고 있다. 이새벽녘에 다 팔리면 좋으련만.... 괜히 마음이 그렇게 그녀를 향해 빌게된다.
Sapa주민들의 오직 운동장이라고 할수 있는 넓은 광장에서 각종 행사가 벌어지고 있었는데 어재 밤에는 Music Festival이 있었다고 한다. Lunar가 광장 앞쪽에 있는 Podium에 올라서서 바라보는 자세는 휘하의 부리는 사람들의 작업동태를 살피는 모습이다.
노점상을 보면서 괜히 남의 일처럼 보이지 않고, 옛날 우리 부모님 세대를 다시 보는것 같아 마음이 아렸다. 이분들도 이렇게 자신을 불태우면서 자식들 키우기위해 팔다리가 아픈줄도 모르고 손님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빨간 두건을 두른 부족은 또 다른 Tribe라고 한다. 이름도 기억 못한다. 한 동네처럼 보이는 산비탈에서 살고 있지만 서로 다른 Dialect를 사용하기에 때로는 서로 이해를 못하는 경우가 많단다. 다행인것은 국가 정책으로 Vietnamese Language를 국가 언어로 지정하여 학교에서 가르치기 때문에 요즘은 크게 문제 되는것을 없다고 한다. 다행한 일이다.
베트남에는 54개 부족이 살고 있지만, 그중에서 약 94 %는 베트남족이고 나머지 약 6%가 몇천명씩 모여 사는 부족들이라고 한다. 중국만큼이나 인종 분포가 복잡한 나라인것 같다.
우리 부부가 하룻밤 묵었던 호텔의 정문이다. 호텔은 산중턱을 깍아 지은 집이기에 내가 묵었던 방창문을 통해서 본 뒷면은 무서울 정도로 가파른 절벽이었다.
여기까지는 약 2키로는 자동차로 내려 왔지만 지금 부터는 산 비탈길을 따라 걸어가서 부족동네를 찾아 가는 것이다. 상당수의 관광객들이 우리처럼 부족을 구경하러 먼저 와서 준비를 하고 있었다. 큰길을 따라 갈수 있는것과 Short Cut를 이용하려면 비좁은 산비탈길을 걸어야 하는데 Mao우리의 의견을 물어온다. 산비탈길을 택해서 걷기로 하고 시작한다.
Mao와 같은 부족에서 아침부터 Sapa에 올라왔던 여인들이 빈손으로 우리와 동행하여 뒤따라온다. Mao의 설명에 따르면 호텔에서 묵은 관광객의 일정을 물어 그들이 부족동네를 구경할거라고 하면 부족동네 알려, 혹시나 Home Stay를 하게 될경우를 바라고 아침 일찍부터 발길을 재촉하여 올라왔는데, 운이 없게도 그들은 예상과는 계획이 맞지않아 빈손으로 내려가는 있으면서 우리와 동행하게 된것이다.
H'mong족들의 삶의 터전이요, 농산물을 생산하는 다랭이논. 이지역의 다랭이 논은 지금은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관광코스가 되고 있다고 한다.
Mao가 속해있는 H'mong족들은 장단지에 검은 천을 두르고 회색및 여튼 파란색의 띠로 동여매는 풍습이 있다고 했다. Mao도 오늘은 그들의 전통의상을 입었다. 이들의 신발은 플라스틱제품의 슬리퍼다. 이걸신고 산비탈을, 그것도 맨발로 왕복 약 20킬로를 걸어 다닌다. 그래서 인지 자세히 그녀들의 발뒤꿈치를 살폈더니 가죽같이 보이고 어떤이들은 가죽에 금이 가서 보기 흉칙한 정도를 지나 혹시라도 아프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도 생겼었다.
산비탈길은 끝도없이 내리막 길이다. Lunar가 조금은 염려가 됐다. 그녀는 약 1년전 길을 걷다가 힘없이 평지에서 넘어진 경력이 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는 OK다.
이부족의 남자들은 거의 낯에는 활동을 안하고 집에 있다고 하는데, 그이유는 잘 모르겠다.
꼬마들이 많은것을 보면 그들의 종족보존을 위해서 그냥 먹고 시간만 죽이는 놈팽이 노릇만 하는것은 아닌것 같기도 한데..... 더러는 Buffalo(소종류)거두는 일을 하는 남편들도 있다고 한다.
계곡을 이어주는 이현수교는 유일한 동맥역활을 하고 있었다. 자동차가 통과하는것을 보았는데 다리를 바치고 있는 기둥간격이 좁아 운전수는 양쪽의 Side Mirror를 접고 겨우 빠져 나가는 묘기를 보이기도 해서 아찔했다.
드디어 동네 어귀에 당도했나 보다. 길가의 상점에서 진열된 상품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순간 다시 되돌아갈 생각을 하니 끔찍했다. Mao에게 물었더니 걱정 말란다. 다른길을 이용하여 동네를 다 구경하고 지나서 다시 계속에 세워져 있는 또 다른 다리를 건너게 되면 그곳에서 우린 차를 타고 쉽게 호텔에 돌아갈수 있다고 안심 시켜준다. 다리가 조금 힘들다.
흔한 물줄기를 하나 잡아 디딜방아의 원동력으로 이용하고 있는 광경에서 옛모습을 또 기억해 낸다. 주민들은 벼를 절구통에 넣어 찧고 있었다. '온고지신'
Black Mong 부족의 집에 들렸다. 집앞에는 그들의 부족 표시와 영어로 Home Stay가 표시되여 있었다. 집안에서는 나이든 아넥네가 우리를 반긴다. 그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캐나다를 알고 있는것 같았다. 갑자기 바느질 하던 손을 멈추고 벽에 걸려 있는 비닐백에서 여러장의 사진을 꺼내 보인다. 우리보다 먼저 어느 캐나다 관광객이 들렸다 가면서 같이 사진찍은것을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굉장히 자랑스러워 한다.
아이들과 아낙네의 구별이 얼핏보아서는 잘안된다. 키가 너무나 작아 멀리서 봤을때는 쉽게 구별이 안된다는 말이다. 어딜가나 꼬마들은 많다. 그런데도 4개 부족이 사는 이산골작은 마을에는 인구가 전부해서 약 2천명 정도란다. 내계산으로는 이해가 안간다.
이곳 부족마을을 방문하는데, 동네입구에 도달하기 훨씬전에서 우리는 동네방문 입장료를 냈었다. 어제도 마찬가지였었다. 이들이 그들 고유의 전통을 얼마나 보존해 가면서 지켜낼지? 그것이 나를 잠깐 혼동되게 만든다. 문명이 발달한 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관광이라는 명목을 부쳐, 하루에 최소한 150명이상이 이들의 생활터전을 침략(?)해 대는데 과연 얼마나 버틸까?
이들도 외부의 문화를 접하게 되면 편한 삶을 누릴수 있다는것을 깨닫는데는 그리 오랜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임을 나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후진국에서의 관광사업은 고유문화를 지킨다는 관점에서 볼때는 병주고 약주는 이중적 태도인것을 부인할수가 없을것 같다. 나도 오늘 부족마을을 방문 명목으로 침략을 한셈이다. 이들이 반격을 한다는것은 바로 전통이 없어진다는 뜻이다.
거의 다 동네를 돌고나서 잠깐 쉬고 있는데, 부족의 아낙네들이 그들이 항상 메고 다니는 망태기에 길가에 쌓여져 있는 시멘트 벽돌을 옮겨서 담더니 등에 메고 이곳으로 부터 500여미터 떨어진 곳으로 이동시킨다. 그곳에서는 지금 새로 집을 짖고 있는데 이들이 운반해주고 대가로 약간의 수고료를 받는다고 한다. 왜 남자들은 어디가고...... 밤새 밤일해서 힘들어 아직도 잠을 자고 있는것으로 밖에 이해를 달리 할 방법이 없다. 남자들이 등에 짊어지고 간다면 더많이 그리고 빨리 할수 있을텐데...... 이러한 삶의 방식이 수천년 내려 왔기에 여인네들은 아무런 불평도 없이 묵묵히 자기 본분을 다하는것으로 보인다.
Sapa에서 모든 공식일정을 마치고 다시 밤열차를 타고 Hanoi로 가기위해 Lao Cai로 가는 도중에 중국과 베트남의 국경지역을 둘러 보았다. 경계선이 되고 있는 Red River에는 황토물이 흐르고, 강건너 중국에는 고층건물과 또 눈으로 봤을때 뭔가 활기를 띄는 느낌을 받았지만, 이곳 베트남쪽은 가난함이 그대로 묻어난다.
이쪽에서 본 중국쪽 다리입구에는 간단한 아치형의 모형이 세워져 있었지만, 이곳 베트남쪽에는 마치 파리의 개선문처럼 큰 Gate모양의 조형물이 대조를 이룬다. 서로 기싸움을 하는것 같아 마음속으로 "부질없는 짖들을 하고 있구나"라고 피식 웃음을 금할수 없었다.
국경 구경을 마치고 옆에 있는 식당에 들려 저녁을 먹어야 했다. 기차를 타게되면 내일 새벽까지 먹을것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토론토에서 외식할때 들어가는 값과 거의 맞먹는 비용이든다. 값자체로 보았을때는 비싸지 않지만, 이들의 생활수준을 기준해서 봤을때 무척 비싸다는 것이다. 마실물도 써비스 하지 않아 별도로 돈을 주고 사먹어야 하는 이들의 풍습은 어떻게 이해을 해야 하나.
우리가 식사하는 사이 Mao는 이미 지불된 바우처를 들고 기차역에 들려 Ticket으로 바꾸어 와서 우리가 탈 침대칸까지 들어와서 안내해주고 Lunar와 작별인사를 했다. 귀여운 꼬마 아가씨 같은 아줌마, 그녀의 이멜과 웹싸이트까지 건네 주면서 연락하자고 아쉬움을 달랜다. 인생은 헤여지기위해서 만난다고 누가 말했던가. 이경우 불과 2박 3일간 생면부지로 만나 헤여질때는 아쉬움이 더해진다. 약간의 팁과 준비해간 캐나다 국기가 그려진 스카프겸 손수건을 한장 건네 주면서 헤여졌다.
Lunar의 앵글잡는법은 수준급이상이라서, 귀한 여행기록으로 더 값진 순간들을 많이 포착한다. 설명은 위의 사진들과 글을 참조해서 보면, 이다음에 다시 방문해 볼때 기억을 선명하게 해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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