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층방에서 내려다 본 희안한 광경이다. 3바뀌가 달린 인력거 부대에 관광객들이 자리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유럽에서 온 Senior 부부들로 보인다. 아마도 Hue시내 구경을 나서는, 낭만을 즐기려는가 보다.
9시에 Guide와 만나 Lady Pagoda(사찰)로 가기위해 약 5분 거리에 있는 Perfume River 선착장으로 향하면서, 지나치는 시장 진열대에서 빨간 Chinese Lantern 모양의 열매가 Artichoke라고 한다. 토론토에서 본 것과는 색갈과 모양부터가 다른데....Guide가 하는말이니 믿어야지.
또하나의 진풍경을 보았다. 어깨에 매고 물건을 나르는 여인을 보면서 그냥 지나칠수 없었다.
Perfume River는 Hue시내를 관통하고, 이곳으로 부터 약 15킬로미터를 흘러 넓은 남태평양으로 흘러 들어 간다고 한다. 물은 황토물로 깨끗해 보이지는 않으나, 옆나라인 Laos에서 부터 흘러 들어온 물을 따라 토사가 몰려 오기 때문이라고 한다.
선착장에는 수많은 통통배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데, 특이한것은 뱃머리에 전부 용머리로 장식해 있다는점이다. 부축을 받아 배에 오른다. 배는 Ha Long Bay에서 본 것 처럼 많이 낡아 금방이라도 물이 새어 들어 오지 않을까라는 염려를 떨칠수가 없었다.
Lunar가 월남인들, 특히 여인네들이 상용하고 있는 삿갓을 쓰고 환한 웃음과 함께 월남 여인네가 된 기분을 부려본다. 복장 마져도 그렇게 보였다. 배안에는 젊은 부부가 살고 있는것 같고, 어린 아이도 하나 있었는데, 배바닥에 손님을 상대로 팔려고 진열시키고 있는 물건중의 하나인 삿갓을 Lunar가 잠시 빌려 사용해 본 것이다.
젊은 Guide는 시간만 나면 전화기를 들여다 보는게 습관같아 보인다. 어찌 이친구뿐이겠는가.
전세계의 젊은이들이 똑같이 그런환경속에서 생활하고 있다는게 신기하기만 하다.
강을 가로질러 Da Nang쪽으로 놓여있는 다리위로는 여전히 자동차 보다 Scooter의 행렬이 더 바삐 움직인다. 다른 나룻배와 조우한다.
젊은 부부의 꼬마가 투정을 부린다. 그런데 그모습이 예뻐 보이기만 했다. 내가방속에서 조그만 캔디 한봉지를 꺼내 주었더니 눈만 말뚱말뚱거리고 선뜻 받을려는 모습이 아니다. 엄마가 꼬마와 통하는 눈빛으로 OK하는 시늉을 하니 손을 내민다. 고달픈 삶이 여기서도 보인다.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지만, 만약에 배가 문제가 생기면 구명조끼를 입어야 하는데, 그러한 안전장비는 아예 처음부터 없던채로 오늘까지 이어오고 있는것 같았다. 그래도 운전실 앞유리에는 안전검사필증으로 보이는 딱지가 붙어있다.
이들은 하루에 몇명의 손님과 몇번의 Cruise를 하는지? 과연 충분한 생활비를 벌수 있을지? 괜히 신경이 쓰인다. 선착장에서는 승객이라곤 우리 부부뿐이었다. 약 25분 정도 달려서 도착한 곳은 Lady Pagoda로 올라가는 선착장이었다.
밑에 있는 선착장을 빠져나와 바로 길건너편에는 Pagoda로 올라가는 계단과 수호신격인 높은 기둥이 두개가 우리를 환영하고 있었다. Guide의 제안으로 그가 사진사가 돼고 우리 부부는 모델이 되여 보았다. 뒤에 7층의 탑이 조화를 이룬다.
7층 파고다 옆의 담벼락에서 Perfume River를 배경으로 한컷해 본다. 무척 평화스러워 보인다.
종각도 있었다. 무게가 자그만치 10톤이라고 한다. 전에는 타종을 주기적으로 스님이 이곳에서 했지만, 지금은 더 안쪽으로 있는 법당에서 하고, 단지 전시용일 뿐이라고 한다. 소리가 묵직하고 은은하다. 종에는 전부 한자로 뭔가를 표시해 놓았는데 그뜻을 어찌 무식한 내가 알수 있겠는가? 한자문화의 영향은 동남 아시아를 오래전에 석권했었다는 증거라고 이해했다.
반대편에는 또다른 큰 비문이 거북이 등을 타고 서 있다. 내용은 역시 한문인데, 이절이 서게된 역사와 관련내용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Guide가 거북이 머리를 쓰다 듬어 장수무병을 빌어 보라고 권했다. 거북이의 머리가 번들번들 했다.
Lady Pagoda의 유래가 흥미를 끈다. 그옛날 지금의 월남, Hanoi에는 Ching, Le 왕조가 번성하고 있었다. 남쪽 Hue에 쪽에 영토를 확실히 하기위해, 당시 고위관리로 있던 Nugenyen을 파견하여 영토를 지키도록 했다. 그러나 그를 보낸 내막은, 영토를 지킨다는 것보다는 그가 곁에 있음으로 해서 권좌에 위협을 느꼈기에 아예 그런 근심을 없앨려고, 파견했다는 것이다.
Hue에 온 Nugenyen은 주위 사람들의 신망을 얻어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고 한다. 그의 자손또한 많이 번성했다. 그의 자손들이 Perfume River을 건너 이곳에 새로운 터전을 만들어 거주하면서, 1585년부터 1601년사이에 자손들중 한명이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한여인이 천상에서 내려와 현몽하기를 "너의 자손이 앞으로 크게 번성할것이다"라는 내용이었다.
그자리에 지금의 Pagoda를 신축하게 됐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그후 약 200여년이 지난후 그약속에 따라 그의 자손이 세운 나라가 Nugenyen Dynasty라는 사실이 결코 우연만은 아닌것 같은데, 그로부터 정확히 9대가 지난후인 1802년에 창업돼여 1945년 패망할때까지 13명의 왕이 통치 했었다.
많은 관광객, 특히 유럽에서 온 Senior Group관광객들이 많이 보였다. 그들은 Lady Pagoda가 건설된 전설에 대한 설명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나는 동양권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이 이해하는것 보다는, 더 쉽게 받아 들인다.
이곳 월남에서 탐방해본 Pagoda와 Temple의 뒷뜰 정원에는 분재원이 거의 있었다. 분재 또한 아주 잘 가꾸어 관심을 끈다. 토론토 콘도 리빙룸 창가에 하나쯤 놓아두면 창너머로 평화스럽게 보이는 Lake Ontario와 잘 어울릴것 같다는 망상(?)을 순간적으로 해본다.
Trunk가 수백년된 나무처럼 무척 뚱뚱하다. 안정감이 있어 더 어울린다.
습기가 너무나 많아 땀이 물줄기 배어 나오듯 등줄기를 흘러 내린다. Pagoda 탐방을 마치고 나와서 우리차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나무그늘에서 땀을 식힌다. 불과 2분도 안기다렸는데, 등에 땀이 흘러서 인지 오랜시간을 기다린것 같은 기분이다.
금새 땀이 식는다. 지금부터는 Danang으로 달린다. 차창을 통해서 보이는 주위경관은 여전히 평화 스러워 보이고, 이런곳에서 전쟁이 과연 있었던가? 할정도로 아름답기만 하다.
Danang으로 통하는 길은 2개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우리가 지금 달리고 있는 옛길이고, 또 다른 하나는 2005년도에 완성된 고속도로라고 하는데, Hue와 Danang의 경계선을 이루고 있는 높은산, 그래봤자 겨우 해발 496미터지만, 을 뚫어 Tennel을 만들었는데 그길이가 7킬로 미터라고 한다. 아시아에서는 최장의 턴넬이라고 한다.
해안선을 따라 이어진 비탈길 언덕의 중간지점에서 전망대가 있어, 잠시 구경을 했다. 산세가 무척 험하다. 가이드의 설명은, 이길은 처음에 불란서가 점령했을때 Lane하나를 건설, 겨우 차 한대가 서로 비켜갈수 있을 정도로 만들었는데, 그후 1962년에 미국이 월남전쟁에 참여 하면서 Lane하나를 더 건설하여 지금은 좀 여유롭게 자동차 운전을 할수 있다고 했다. 이비탈길은 현재는 주로 관광객들이 주로 이용하고, 새로 건설된 도로는 물동량의 운송수단으로 사용된다고 설명해준다. 정말로 화물차는 전연 안보이고 관광차와 가끔씩 Scooter들이 헐덕이면서 달리는게 보일뿐이다.
산정상에 올라 쉬었다. Guide가 우리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바삐 끌고 길너에 있는 다 부서져 가는 벽돌문쪽으로 안내한다. 식민지의 슬픈삶과 전쟁의 참상을 잠깐 설명해 준다.
불란서가 점령했을때, 감시초소로 만든 벙커를 설명한다. 지붕이 평면인점이 특징이다.
그후 미군이 진주했을때는 그들의 벙커는 지붕이 둥그럽다는점이 다르다고 한다. 지금은 페허가 돼여 귀신이 나올것 같은 모습이다. 관리를 잘해서 후손들에게 보여주면 좋을텐데, 아직까지는 월남 당국이 이런곳 까지 신경쓸 여유가 없는것 같아 보인다.
폐허가 된 성벽과 성문의 일부다. 벽의 일부가 파괴되여 허물어져 있는 자국이 뚜렷한것으로 보아 옛날 왕조시대에는 성벽이 있었다는 증거라고 한다. 건너편 산 언덕에도 그런 자국이 보이긴 했다.
정상의 주차장에는 어김없이 상점들이 들어서 있다. 우리가 들어가 본곳은 여성용 목걸이들을 비롯한 장신구들이 즐비하다. 안내하는 점원에게 미안할 정도로 우리 부부는 Gift사는데는 관심이 없다. 점원이 어느나라에서 왔느냐고 묻는다. 모자에 부착된 Canada마크를 가르키면서 이곳에서 왔다고 했더니 의아해 한다. 한국 아니면 일본 사람같다는 것이다. 이들이 생각하는 캐나다사람들은 코가큰 White People을 연상하는것 같았다.
Danang외곽에 들어 서면서, 눈에 띄게 다른점은 시가지의 전경이 현대도시같아 보였다는 점이다. 도시 계획이 잘된것 같아 보였다. Guide의 설명은 Danang은 월남의 중간 지점에 있는 항구도시, 산업도시로 새발돋움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북쪽은 Hanoi, 중앙은 Danang, 남쪽은 Ho Chimin City(사이공)이다. 따라서 Danang은 관광지로서는 볼것이 없어, 약 40킬로 떨어져 있는 Hoian으로 간다는 것이다.
Da Nang 신시내에서 Marble Mountain으로 가는 큰길이 해변가를 따라서 뻗어 있다. 해안가와 도로 사이에는 커다란 유락 시설이 있고 그중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회전목마(?)가 있었다. 직경이 20미터는 족히 되는것 같았다.
차창으로 보이는 해변가는 무척 아름답게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Danang은 'China Beach'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그영화가 이곳에서 촬영됐기 때문이란다. 원래 이름은 An Nam Beach였었고, 미군이 주둔 하면서 Red Beach로도 불렸었다고 하는데, 현재 공식적인 명칭은 Eastern Beach라고 한다. 새로 신축됐다고 하는 Suspension Bridge의 윗부분의 Cable색갈이 빨갛다. 이나라 정치색을 나타낸 것일까? 아니다면 왜?
Local Restaurant에 들려 점심을 해결했다. 이곳 지방의 독특한 음식인 국수발이 넓직한 국수에 닭고기와 해산물이 가미된 국수다. 막상 먹을려고 하니 국물이 예상했던것 보다 없어, Guide를 통해 들은 얘기로는 이곳의 전통국수로 국물이 적은게 특징이란다. 그래도 국물을 더 달라고 했더니, 아예 다른 국수로 만들어 온다. 그래도 여전히 국물은 적다. 시원한 국물을 먹고 싶었는데..... 맛은 일품이다. 별로 거부 반응이 없이 잘 먹었다. 값도 무척 쌌다. 불과 US 1.5달러다.
이곳 Hoian의 관광명소인 Cham Museum에 들렀다. 차에서 내리니 건너편에 용의 형상으로 장식된 긴 다리가 금색으로 시선을 끈다. 개통된지 불과 몇개월이 됐단다.
Cham 왕조는 3세기경부터 14세기경까지 있었고 번성했던 나라였으나, 아깝게도 그흔적이 전연 없었다고 한다. 이유는 그들의 문화를 전수할수 있는 고유문자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월날 사람들도 그존재 여부를 모르고 지내다, 불란서가 점령하면서 우연히 그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했단다. 고고학자들이 Excavating 하면서 Cham 문화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단다.
그들의 문화는 캠보디아의 앙코르왓트와 비슷한 문화 형태라고 했다.
그래서 인지 전시된 작품들의 대부분이 사암(Sand Stone) 조각품들이다. 앙코르왓트를 2000년대 초에 탐방했을때 보았던 내용들과 비슷함을 탐지할수 있다. 종교또한 힌두교가 널리 전파됐었던것을 알수 있었다.
이들 문화의 상징은 3단계로 요약된다. 여기서 보는 조각품도 자세히 보면 3단계로 나뉘어져 있다. 맨밑부분은 Siva 로 생명체의 창조, 중앙은 Visnu로 재건 또는 보존 즉 Restore, 그리고 맨위는 Brama로 모든 파괴를 의미한다고 한다. 3단계의 모양을 인체에 비교한다면 남성의 심볼을 나타내는 Linga로 불려지며, 이기둥을 받치고 있는 Foundation은 Groove를 만들어 흘러나온 물줄기가 여성의 심볼처럼 된곳을 통해 밑으로 흘러 내리는 Yoni 로 표현된다고 한다.
모양은 다르지만, 앞서 보았던 Linga, Yoni의 또 다른 형상으로 중앙의 Visnu부분은 연꽃으로 조각되여 있는 정교한 모습이었다. 동양의 모든 문화 철학은 음,양으로 대별되는 것을 쉽게 여기서 이해할수 있었다.
전시된 조각품들의 머리가 전부 없다. 설명에 따르면, 불란서가 패망후 물러나면서 얼굴부분만 떼어가 현재도 파리 루블 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단다. 이유는 머리는 모든것을 지배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머리를 없앰으로써 후일에 일어날 좋치 않은 일들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는 일졸의 Superstition에서 그이유를 찾을수 있을것 같았다.
벽에 걸려 있는 사진을 Copy한 것인데, France가 점령시 Cham 왕조의 흔적을 탐사하기위해 Excavating하는 모습이다. 불란서 점령으로 수백년동안 숲속에 파묻혀 있었던 Cham Civilization을 되찾을수 있었다는 점은 인정해주어야 할것 같다.
달리는 차창을 통해 보이는 옛날 미군들의 비행기 격납고로 사용했던 Hangar가 보인다. 아직 철거를 미쳐 못한것인지? 아니면 기념으로 보존하고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기분이 씁쓸하다.
멀리 보이는 Marble Mountains의 형상이 마치 임신부가 반듯히 두러누워 있는 모습으로 보였다. 그옆에는 산에서 캐낸 Marble을 이용하여 만든 석고상들을 전시하고 또 제작하기도하는 Factory가 있는데 그규모는 세계에서 제일 크다는 설명이다.
Happy Buddah 와 수정체들이 들어 있는 돌 조각품들이 눈길을 끈다. Happy Buddah는 거의 모든 차량들의 Dash Board에 모셔져 있는 것을 보아왔었다. 행운이 염원데로 이루어지를 나도 기원해 본다.
오늘의 마지막 탐방지는 바로 Marble Factory의 바로 옆에 있는 Holy Pagoda on Marble Mountain 였다. 입구로 가는데 도로를 한참 건설하느라 불도져들이 바삐 움직이는 그틈새를 빠져 나와 절 입구에 도달해야만 했다. 산정상에 있는 Pagoda까지는 150개나 되는 돌계단을 올라야 했다. Lunar는 입구쪽에서 상점들을 구경하기로 하고 나와 Guide만 올랐다.
이곳의 불상은 다른곳에서 본것과는 다르다. 중앙의 Main 불상뒤에 3개의 불상이 있는게 정상(?)인데 하나만 있다. 자세히 살펴보니 좌 우로 또 다른 불상이 대칭으로 있는데, 이들이 그의미를 나타내고 있다는 설명이다. 여기의 사찰지붕의 용마루에도 어김없이 상징물들이 멋지게 장식되여 있다. 전부가 살아움직이는 생명체, 그중에서도 유난히 용(Dragon)을 많이 인용했는데, 이처럼 이지붕안에 사는 사람들도 모든면에서 번성하기를 바란다는 뜻이 있단다.
3개의 석탑속에는 입적한 3명의 스님에게서 나온 재(Ash)가 모셔져 있다고 한다. 그런점으로 보아 이절의 역사는 길지 않다는 표시같다.
대웅전 뒤로 있는 산속의 동굴에는 또 다른 불상들이 이곳 저곳에 많이 있었다. 불심이 깊다는 증거일까?
불상들이 모셔져 있는 동굴 입구는 하늘이 보일 정도로 뚫려 있었다. 월남전때 베트콩들이 이곳을 거점으로 하여 게릴라식 싸움을 했기에, 미군이 폭격하여 굴의 입구쪽 동굴이 부셔져 버렸기 때문이라고 했다.
정상에서 내려다 본 Hoian시내의 일부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해안가의 모습이다.
대웅전에서 왼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는 커다란 석탑이 있었다. 각층마다 불상이 모셔져 있다는 설명이다. 믿어지지 않게 이탑은 시멘트로 건축되였다고 한다. 불교석탑하면 돌을 깍아 맞춘 석탑으로 생각해온 나의 상상은 여기서 그끝을 본것 같다. 석탑은 돌을 깍아 만든것만이 아니고 시멘트석탑도 있다는 것을...
이곳 Hoian 의 특산물중 하나는 명주실로 만든 Textile Industry임을 알았다. 전시장에 들러 막 알에서 깨어난 어린 누애로 부터 중간 크기의 누애까지 전시하고 있었다. 이곳의 누애는 한국에서 본것과는 다르게 색갈이 노랗다. 캠보이아의 앙코르왓트 탐방시에도 보았던 누애역시 노란색갈이었는데....
호텔에 도착했다. 마치 우리가 그들의 상전인양 모두가 달라붙어 우리의 Luggage를 들어서 우리방까지 운송해 주어 고마웠다. 그냥 지나칠수는 없는 수고료를 지불해야 했지만, 아침부터 강행군한 후의 피곤함을 느낄때 이들의 도움은 그져 고마울 뿐이다. 감사.
Lunar는 사물을 보는 각도가 나와는 다르다. 서로 보완해주는 협조자의 역활이 돋보인다.
Lunar는 자연, 특히 분재에 대해 항상 애착이 많다. 젊어서는 분재를 주재로 한 사업을 할려다 여런 조건에 부딪혀, 특히 Fund면에서 확신이 서지 않아 주져 않고 그꿈을 이루지 못하게 한게 내가 무능했기 때문인것으로 나는 생각하기 때문에 안타까움이 있다.
Marble Mountain에 있는 Holy Pagoda를 탐사 하는데는 두가지 길이 있었다. 하나는 내가 걸었던 계단을 밟고 한발씩 옮겨 올라가는 방법이고, 또하나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길이 있었다. 아마도 Senior들과 Disabled들을 위한 배려차원에서 새로 건설해 놓은것 같다.
9시에 Guide와 만나 Lady Pagoda(사찰)로 가기위해 약 5분 거리에 있는 Perfume River 선착장으로 향하면서, 지나치는 시장 진열대에서 빨간 Chinese Lantern 모양의 열매가 Artichoke라고 한다. 토론토에서 본 것과는 색갈과 모양부터가 다른데....Guide가 하는말이니 믿어야지.
또하나의 진풍경을 보았다. 어깨에 매고 물건을 나르는 여인을 보면서 그냥 지나칠수 없었다.
Perfume River는 Hue시내를 관통하고, 이곳으로 부터 약 15킬로미터를 흘러 넓은 남태평양으로 흘러 들어 간다고 한다. 물은 황토물로 깨끗해 보이지는 않으나, 옆나라인 Laos에서 부터 흘러 들어온 물을 따라 토사가 몰려 오기 때문이라고 한다.
전세계의 젊은이들이 똑같이 그런환경속에서 생활하고 있다는게 신기하기만 하다.
강을 가로질러 Da Nang쪽으로 놓여있는 다리위로는 여전히 자동차 보다 Scooter의 행렬이 더 바삐 움직인다. 다른 나룻배와 조우한다.
젊은 부부의 꼬마가 투정을 부린다. 그런데 그모습이 예뻐 보이기만 했다. 내가방속에서 조그만 캔디 한봉지를 꺼내 주었더니 눈만 말뚱말뚱거리고 선뜻 받을려는 모습이 아니다. 엄마가 꼬마와 통하는 눈빛으로 OK하는 시늉을 하니 손을 내민다. 고달픈 삶이 여기서도 보인다.
이들은 하루에 몇명의 손님과 몇번의 Cruise를 하는지? 과연 충분한 생활비를 벌수 있을지? 괜히 신경이 쓰인다. 선착장에서는 승객이라곤 우리 부부뿐이었다. 약 25분 정도 달려서 도착한 곳은 Lady Pagoda로 올라가는 선착장이었다.
밑에 있는 선착장을 빠져나와 바로 길건너편에는 Pagoda로 올라가는 계단과 수호신격인 높은 기둥이 두개가 우리를 환영하고 있었다. Guide의 제안으로 그가 사진사가 돼고 우리 부부는 모델이 되여 보았다. 뒤에 7층의 탑이 조화를 이룬다.
7층 파고다 옆의 담벼락에서 Perfume River를 배경으로 한컷해 본다. 무척 평화스러워 보인다.
종각도 있었다. 무게가 자그만치 10톤이라고 한다. 전에는 타종을 주기적으로 스님이 이곳에서 했지만, 지금은 더 안쪽으로 있는 법당에서 하고, 단지 전시용일 뿐이라고 한다. 소리가 묵직하고 은은하다. 종에는 전부 한자로 뭔가를 표시해 놓았는데 그뜻을 어찌 무식한 내가 알수 있겠는가? 한자문화의 영향은 동남 아시아를 오래전에 석권했었다는 증거라고 이해했다.
반대편에는 또다른 큰 비문이 거북이 등을 타고 서 있다. 내용은 역시 한문인데, 이절이 서게된 역사와 관련내용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Guide가 거북이 머리를 쓰다 듬어 장수무병을 빌어 보라고 권했다. 거북이의 머리가 번들번들 했다.
Lady Pagoda의 유래가 흥미를 끈다. 그옛날 지금의 월남, Hanoi에는 Ching, Le 왕조가 번성하고 있었다. 남쪽 Hue에 쪽에 영토를 확실히 하기위해, 당시 고위관리로 있던 Nugenyen을 파견하여 영토를 지키도록 했다. 그러나 그를 보낸 내막은, 영토를 지킨다는 것보다는 그가 곁에 있음으로 해서 권좌에 위협을 느꼈기에 아예 그런 근심을 없앨려고, 파견했다는 것이다.
그자리에 지금의 Pagoda를 신축하게 됐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그후 약 200여년이 지난후 그약속에 따라 그의 자손이 세운 나라가 Nugenyen Dynasty라는 사실이 결코 우연만은 아닌것 같은데, 그로부터 정확히 9대가 지난후인 1802년에 창업돼여 1945년 패망할때까지 13명의 왕이 통치 했었다.
이곳 월남에서 탐방해본 Pagoda와 Temple의 뒷뜰 정원에는 분재원이 거의 있었다. 분재 또한 아주 잘 가꾸어 관심을 끈다. 토론토 콘도 리빙룸 창가에 하나쯤 놓아두면 창너머로 평화스럽게 보이는 Lake Ontario와 잘 어울릴것 같다는 망상(?)을 순간적으로 해본다.
Trunk가 수백년된 나무처럼 무척 뚱뚱하다. 안정감이 있어 더 어울린다.
금새 땀이 식는다. 지금부터는 Danang으로 달린다. 차창을 통해서 보이는 주위경관은 여전히 평화 스러워 보이고, 이런곳에서 전쟁이 과연 있었던가? 할정도로 아름답기만 하다.
Danang으로 통하는 길은 2개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우리가 지금 달리고 있는 옛길이고, 또 다른 하나는 2005년도에 완성된 고속도로라고 하는데, Hue와 Danang의 경계선을 이루고 있는 높은산, 그래봤자 겨우 해발 496미터지만, 을 뚫어 Tennel을 만들었는데 그길이가 7킬로 미터라고 한다. 아시아에서는 최장의 턴넬이라고 한다.
해안선을 따라 이어진 비탈길 언덕의 중간지점에서 전망대가 있어, 잠시 구경을 했다. 산세가 무척 험하다. 가이드의 설명은, 이길은 처음에 불란서가 점령했을때 Lane하나를 건설, 겨우 차 한대가 서로 비켜갈수 있을 정도로 만들었는데, 그후 1962년에 미국이 월남전쟁에 참여 하면서 Lane하나를 더 건설하여 지금은 좀 여유롭게 자동차 운전을 할수 있다고 했다. 이비탈길은 현재는 주로 관광객들이 주로 이용하고, 새로 건설된 도로는 물동량의 운송수단으로 사용된다고 설명해준다. 정말로 화물차는 전연 안보이고 관광차와 가끔씩 Scooter들이 헐덕이면서 달리는게 보일뿐이다.
산정상에 올라 쉬었다. Guide가 우리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바삐 끌고 길너에 있는 다 부서져 가는 벽돌문쪽으로 안내한다. 식민지의 슬픈삶과 전쟁의 참상을 잠깐 설명해 준다.
그후 미군이 진주했을때는 그들의 벙커는 지붕이 둥그럽다는점이 다르다고 한다. 지금은 페허가 돼여 귀신이 나올것 같은 모습이다. 관리를 잘해서 후손들에게 보여주면 좋을텐데, 아직까지는 월남 당국이 이런곳 까지 신경쓸 여유가 없는것 같아 보인다.
폐허가 된 성벽과 성문의 일부다. 벽의 일부가 파괴되여 허물어져 있는 자국이 뚜렷한것으로 보아 옛날 왕조시대에는 성벽이 있었다는 증거라고 한다. 건너편 산 언덕에도 그런 자국이 보이긴 했다.
정상의 주차장에는 어김없이 상점들이 들어서 있다. 우리가 들어가 본곳은 여성용 목걸이들을 비롯한 장신구들이 즐비하다. 안내하는 점원에게 미안할 정도로 우리 부부는 Gift사는데는 관심이 없다. 점원이 어느나라에서 왔느냐고 묻는다. 모자에 부착된 Canada마크를 가르키면서 이곳에서 왔다고 했더니 의아해 한다. 한국 아니면 일본 사람같다는 것이다. 이들이 생각하는 캐나다사람들은 코가큰 White People을 연상하는것 같았다.
Danang외곽에 들어 서면서, 눈에 띄게 다른점은 시가지의 전경이 현대도시같아 보였다는 점이다. 도시 계획이 잘된것 같아 보였다. Guide의 설명은 Danang은 월남의 중간 지점에 있는 항구도시, 산업도시로 새발돋움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북쪽은 Hanoi, 중앙은 Danang, 남쪽은 Ho Chimin City(사이공)이다. 따라서 Danang은 관광지로서는 볼것이 없어, 약 40킬로 떨어져 있는 Hoian으로 간다는 것이다.
Da Nang 신시내에서 Marble Mountain으로 가는 큰길이 해변가를 따라서 뻗어 있다. 해안가와 도로 사이에는 커다란 유락 시설이 있고 그중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회전목마(?)가 있었다. 직경이 20미터는 족히 되는것 같았다.
차창으로 보이는 해변가는 무척 아름답게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Danang은 'China Beach'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그영화가 이곳에서 촬영됐기 때문이란다. 원래 이름은 An Nam Beach였었고, 미군이 주둔 하면서 Red Beach로도 불렸었다고 하는데, 현재 공식적인 명칭은 Eastern Beach라고 한다. 새로 신축됐다고 하는 Suspension Bridge의 윗부분의 Cable색갈이 빨갛다. 이나라 정치색을 나타낸 것일까? 아니다면 왜?
Local Restaurant에 들려 점심을 해결했다. 이곳 지방의 독특한 음식인 국수발이 넓직한 국수에 닭고기와 해산물이 가미된 국수다. 막상 먹을려고 하니 국물이 예상했던것 보다 없어, Guide를 통해 들은 얘기로는 이곳의 전통국수로 국물이 적은게 특징이란다. 그래도 국물을 더 달라고 했더니, 아예 다른 국수로 만들어 온다. 그래도 여전히 국물은 적다. 시원한 국물을 먹고 싶었는데..... 맛은 일품이다. 별로 거부 반응이 없이 잘 먹었다. 값도 무척 쌌다. 불과 US 1.5달러다.
Cham 왕조는 3세기경부터 14세기경까지 있었고 번성했던 나라였으나, 아깝게도 그흔적이 전연 없었다고 한다. 이유는 그들의 문화를 전수할수 있는 고유문자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월날 사람들도 그존재 여부를 모르고 지내다, 불란서가 점령하면서 우연히 그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했단다. 고고학자들이 Excavating 하면서 Cham 문화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단다.
그들의 문화는 캠보디아의 앙코르왓트와 비슷한 문화 형태라고 했다.
그래서 인지 전시된 작품들의 대부분이 사암(Sand Stone) 조각품들이다. 앙코르왓트를 2000년대 초에 탐방했을때 보았던 내용들과 비슷함을 탐지할수 있다. 종교또한 힌두교가 널리 전파됐었던것을 알수 있었다.
이들 문화의 상징은 3단계로 요약된다. 여기서 보는 조각품도 자세히 보면 3단계로 나뉘어져 있다. 맨밑부분은 Siva 로 생명체의 창조, 중앙은 Visnu로 재건 또는 보존 즉 Restore, 그리고 맨위는 Brama로 모든 파괴를 의미한다고 한다. 3단계의 모양을 인체에 비교한다면 남성의 심볼을 나타내는 Linga로 불려지며, 이기둥을 받치고 있는 Foundation은 Groove를 만들어 흘러나온 물줄기가 여성의 심볼처럼 된곳을 통해 밑으로 흘러 내리는 Yoni 로 표현된다고 한다.
모양은 다르지만, 앞서 보았던 Linga, Yoni의 또 다른 형상으로 중앙의 Visnu부분은 연꽃으로 조각되여 있는 정교한 모습이었다. 동양의 모든 문화 철학은 음,양으로 대별되는 것을 쉽게 여기서 이해할수 있었다.
전시된 조각품들의 머리가 전부 없다. 설명에 따르면, 불란서가 패망후 물러나면서 얼굴부분만 떼어가 현재도 파리 루블 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단다. 이유는 머리는 모든것을 지배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머리를 없앰으로써 후일에 일어날 좋치 않은 일들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는 일졸의 Superstition에서 그이유를 찾을수 있을것 같았다.
달리는 차창을 통해 보이는 옛날 미군들의 비행기 격납고로 사용했던 Hangar가 보인다. 아직 철거를 미쳐 못한것인지? 아니면 기념으로 보존하고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기분이 씁쓸하다.
멀리 보이는 Marble Mountains의 형상이 마치 임신부가 반듯히 두러누워 있는 모습으로 보였다. 그옆에는 산에서 캐낸 Marble을 이용하여 만든 석고상들을 전시하고 또 제작하기도하는 Factory가 있는데 그규모는 세계에서 제일 크다는 설명이다.
Happy Buddah 와 수정체들이 들어 있는 돌 조각품들이 눈길을 끈다. Happy Buddah는 거의 모든 차량들의 Dash Board에 모셔져 있는 것을 보아왔었다. 행운이 염원데로 이루어지를 나도 기원해 본다.
오늘의 마지막 탐방지는 바로 Marble Factory의 바로 옆에 있는 Holy Pagoda on Marble Mountain 였다. 입구로 가는데 도로를 한참 건설하느라 불도져들이 바삐 움직이는 그틈새를 빠져 나와 절 입구에 도달해야만 했다. 산정상에 있는 Pagoda까지는 150개나 되는 돌계단을 올라야 했다. Lunar는 입구쪽에서 상점들을 구경하기로 하고 나와 Guide만 올랐다.
3개의 석탑속에는 입적한 3명의 스님에게서 나온 재(Ash)가 모셔져 있다고 한다. 그런점으로 보아 이절의 역사는 길지 않다는 표시같다.
대웅전 뒤로 있는 산속의 동굴에는 또 다른 불상들이 이곳 저곳에 많이 있었다. 불심이 깊다는 증거일까?
불상들이 모셔져 있는 동굴 입구는 하늘이 보일 정도로 뚫려 있었다. 월남전때 베트콩들이 이곳을 거점으로 하여 게릴라식 싸움을 했기에, 미군이 폭격하여 굴의 입구쪽 동굴이 부셔져 버렸기 때문이라고 했다.
정상에서 내려다 본 Hoian시내의 일부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해안가의 모습이다.
대웅전에서 왼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는 커다란 석탑이 있었다. 각층마다 불상이 모셔져 있다는 설명이다. 믿어지지 않게 이탑은 시멘트로 건축되였다고 한다. 불교석탑하면 돌을 깍아 맞춘 석탑으로 생각해온 나의 상상은 여기서 그끝을 본것 같다. 석탑은 돌을 깍아 만든것만이 아니고 시멘트석탑도 있다는 것을...
해안선과 어울려 자리를 하고 있는 시가지의 모습은 평화롭다. 앞쪽에 보이는 건설장비는 도로를 건설하는데 동원된 것들로 아까 내가 그가운데를 지나서 여기에 올라온 것이다.
이곳 Hoian 의 특산물중 하나는 명주실로 만든 Textile Industry임을 알았다. 전시장에 들러 막 알에서 깨어난 어린 누애로 부터 중간 크기의 누애까지 전시하고 있었다. 이곳의 누애는 한국에서 본것과는 다르게 색갈이 노랗다. 캠보이아의 앙코르왓트 탐방시에도 보았던 누애역시 노란색갈이었는데....
호텔에 도착했다. 마치 우리가 그들의 상전인양 모두가 달라붙어 우리의 Luggage를 들어서 우리방까지 운송해 주어 고마웠다. 그냥 지나칠수는 없는 수고료를 지불해야 했지만, 아침부터 강행군한 후의 피곤함을 느낄때 이들의 도움은 그져 고마울 뿐이다. 감사.
Lunar는 사물을 보는 각도가 나와는 다르다. 서로 보완해주는 협조자의 역활이 돋보인다.
Lunar는 자연, 특히 분재에 대해 항상 애착이 많다. 젊어서는 분재를 주재로 한 사업을 할려다 여런 조건에 부딪혀, 특히 Fund면에서 확신이 서지 않아 주져 않고 그꿈을 이루지 못하게 한게 내가 무능했기 때문인것으로 나는 생각하기 때문에 안타까움이 있다.
Marble Mountain에 있는 Holy Pagoda를 탐사 하는데는 두가지 길이 있었다. 하나는 내가 걸었던 계단을 밟고 한발씩 옮겨 올라가는 방법이고, 또하나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길이 있었다. 아마도 Senior들과 Disabled들을 위한 배려차원에서 새로 건설해 놓은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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