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고 아끼는 친지로 부터 이메일을 받고, 읽고 또 읽었었다.
이글은 이미 인터넷이 세계 최고로 발달된(?) 고국에서 사는 사람들은 많이 읽었으리라 믿는다. 이글을 쓰신분은 나보다 약 2년쯤 먼저 세상에 태어난분 같다.
70년대 중반에 이민와서, 삶의 터전을 닦느라 눈물을 흘려본일이 없었던 내가 글내용을 읽으면서, 얼굴에 두줄기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리는 내자신을 보면서 깜짝 놀랐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게 어려운 고생을 하면서 오늘의 잘사는 대한민국의 Foundation을 만들어 주신 위대한 Leader에 대한 한국민들의 배은망덕한 오만함과, 그래도 현재의 조국 대한민국의 앞날이 평탄해 지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에서 였다.
1970년대초, 지하철 1호선과 서울 인천간, 서울 수원간에 지하철과 전철을 건설할때, 나는 박봉의(내기억으로는 8,000원 월급. 신사복 한벌값 25,000했었다) 말단 공무원신분으로 철도의 모든 차량을 정비하는 시설 개량을위해, 일본에 파견됐었다.
그때 일본에 가서 놀란 첫번째 기억은, 한번도 듣도 보지도 못했던 "스카치 테이프"의 사용이 일상화 되여 있는것에, 한번 잘라서 붙이면, 착 달라붙는 그신기함이었다. 그리고 두번째로는 젊은이들의 장발족이 유행하는것을 본것이다.
말단 공무원 신분이었지만, 당시에는 외국출장가는데도, 국무총리의 서명이 있어야만 가능했었고, 일반 시민들은 큰 종합상사(대우, 삼성, 현대정도)의 Salesman정도였었다. 그만큼 당시 나라는 가난해서 외화 단 1달러라도 아껴야 할때였었다. 숙소는 호텔은 생각도 못했었고, 겨우 료깐(여관, 여인숙)에서 묶으면서, 밥은 길거리에서 값싼 "규동"이라는 국물에국수를 버무려 만들어진 식사로 허기를 때웠었다.
그래도 열심히 배우고, 출장비를 자린고비처럼 아껴, 돌아가면, 친척, 동료들에게 선물할 볼펜, 스카치테이프 같은것들을 구입했었다. 그리고 2년도 안돼 서울시 지하철 1호선, 경인, 경부선 전철이 개통되여, 그해 8월 15일 국립극장에서 박통이 경축사를 읽는중에, 다 아는것 처럼 북괴의 간첩(문세광)이 쏜 총에 대한민국은 국모를 잃어 버린다.
이글을 쓴 필자처럼, 20대 중반의 나자신도 일본에 가서 기술를 전수받기위해 일본이라는 나라땅을 밟기전까지는, 박통을 무척 비난하고, 심지어는 군바리가 국방은 내팽개치고, 쿠테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더니, 국민들을 무척이나 못살게 몰아친다고 "군바리 개새끼들"이라고 거침없이, 퇴근후에는 선술집에 선배, 동료들과 어울려 소주 마시면서, 혹시 주위에 요원들이 있나 없나 살피면서, 비난했었다.
일본에서 기술연수를 시작하면서, 왜 이들이 이렇게 잘사는가를 직접 눈으로 보고 겪으면서, 나의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었다. 성실히 일하면서, 물건 하나라도 정성드려 다루면서, 내것처럼 아끼는 그들의 정신에 스스로 탄복하면서, "아 우리도 이들처럼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절대로 부강한 나라가 될수 없겠다"라고 말이다.
당시 시골은 비교 대상이 되지도 않았었지만, 문화면에서 앞섰다고 하는 서울의 주부들은 대부분 남편 출근 시키고 나면, 가까운 친지끼리 만나 세월을 죽이는게 Daily life pattern이었었다. 왜냐면, 여성들의 사회진출의 문턱도 높았었지만, 그만큼 일자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잘산다고 하는 일본 여성들, 특히 우리가 묶었던 여관에서 일하던 여성의 손과 무릎을 우연히 보고 놀랐었다. 서울에서 봤던 여성들처럼 손이 매우 고울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조금 과장을 한다면, 거북의 등처럼 굳은 살이 훈장처럼 장식되여 있었다. "이렇게 일을 열심히 하지 않으면 살기 힘듭니다"라는 그여성의 대답이 화살처럼 가슴에 꽂였던 기억이 새삼 떠오른다.
https://lifemeansgo.blogspot.ca/2011/05/516-50.html
세계 여러나라를 여행하게되면 맨먼저 발을 내딧는 곳이 그나라의 얼굴격인 국제공항들이다.
공항 명칭이, 대부분 그나라의 위대한 지도자들의 이름을 따서 불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대열에 서 있는 지도자로, 오늘의 잘사는 한국의 Foundation을 만드신 박정희, 그리고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 전 대통령을 오래전부터 주장해왔었다. 그러나 감사해 할줄을 모르는 한국의 정치꾼들과 좌파 세력들의 반대로 현재까지도 깜깜 무소식이다. 대신에 북괴 김정은에게는 꼭 "김정은 국방위원장"의 존칭을 써대는 한국의 언론들, 한국의 대통령에 대해서는 어떤 호칭을 부쳤었나 한번 되돌아 보시라.
정권에 붙어서 비열하게 아부해 사리사욕을 채리는 그사람들의 속마음을 한번 보고 싶다. 박정희 탄생 100주년 기념우표를 인쇄단계에서 좌절시켰고, 이제 문통 취임 100일 기념우표를 발행 한다니.... 이게 나라냐? 이아침 너무나 서럽다.
https://mail.google.com/mail/u/0/?tab=wm#inbox/15df57364b979f43
이글은 이미 인터넷이 세계 최고로 발달된(?) 고국에서 사는 사람들은 많이 읽었으리라 믿는다. 이글을 쓰신분은 나보다 약 2년쯤 먼저 세상에 태어난분 같다.
70년대 중반에 이민와서, 삶의 터전을 닦느라 눈물을 흘려본일이 없었던 내가 글내용을 읽으면서, 얼굴에 두줄기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리는 내자신을 보면서 깜짝 놀랐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게 어려운 고생을 하면서 오늘의 잘사는 대한민국의 Foundation을 만들어 주신 위대한 Leader에 대한 한국민들의 배은망덕한 오만함과, 그래도 현재의 조국 대한민국의 앞날이 평탄해 지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에서 였다.
1970년대초, 지하철 1호선과 서울 인천간, 서울 수원간에 지하철과 전철을 건설할때, 나는 박봉의(내기억으로는 8,000원 월급. 신사복 한벌값 25,000했었다) 말단 공무원신분으로 철도의 모든 차량을 정비하는 시설 개량을위해, 일본에 파견됐었다.
그때 일본에 가서 놀란 첫번째 기억은, 한번도 듣도 보지도 못했던 "스카치 테이프"의 사용이 일상화 되여 있는것에, 한번 잘라서 붙이면, 착 달라붙는 그신기함이었다. 그리고 두번째로는 젊은이들의 장발족이 유행하는것을 본것이다.
말단 공무원 신분이었지만, 당시에는 외국출장가는데도, 국무총리의 서명이 있어야만 가능했었고, 일반 시민들은 큰 종합상사(대우, 삼성, 현대정도)의 Salesman정도였었다. 그만큼 당시 나라는 가난해서 외화 단 1달러라도 아껴야 할때였었다. 숙소는 호텔은 생각도 못했었고, 겨우 료깐(여관, 여인숙)에서 묶으면서, 밥은 길거리에서 값싼 "규동"이라는 국물에국수를 버무려 만들어진 식사로 허기를 때웠었다.
그래도 열심히 배우고, 출장비를 자린고비처럼 아껴, 돌아가면, 친척, 동료들에게 선물할 볼펜, 스카치테이프 같은것들을 구입했었다. 그리고 2년도 안돼 서울시 지하철 1호선, 경인, 경부선 전철이 개통되여, 그해 8월 15일 국립극장에서 박통이 경축사를 읽는중에, 다 아는것 처럼 북괴의 간첩(문세광)이 쏜 총에 대한민국은 국모를 잃어 버린다.
이글을 쓴 필자처럼, 20대 중반의 나자신도 일본에 가서 기술를 전수받기위해 일본이라는 나라땅을 밟기전까지는, 박통을 무척 비난하고, 심지어는 군바리가 국방은 내팽개치고, 쿠테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더니, 국민들을 무척이나 못살게 몰아친다고 "군바리 개새끼들"이라고 거침없이, 퇴근후에는 선술집에 선배, 동료들과 어울려 소주 마시면서, 혹시 주위에 요원들이 있나 없나 살피면서, 비난했었다.
일본에서 기술연수를 시작하면서, 왜 이들이 이렇게 잘사는가를 직접 눈으로 보고 겪으면서, 나의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었다. 성실히 일하면서, 물건 하나라도 정성드려 다루면서, 내것처럼 아끼는 그들의 정신에 스스로 탄복하면서, "아 우리도 이들처럼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절대로 부강한 나라가 될수 없겠다"라고 말이다.
당시 시골은 비교 대상이 되지도 않았었지만, 문화면에서 앞섰다고 하는 서울의 주부들은 대부분 남편 출근 시키고 나면, 가까운 친지끼리 만나 세월을 죽이는게 Daily life pattern이었었다. 왜냐면, 여성들의 사회진출의 문턱도 높았었지만, 그만큼 일자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잘산다고 하는 일본 여성들, 특히 우리가 묶었던 여관에서 일하던 여성의 손과 무릎을 우연히 보고 놀랐었다. 서울에서 봤던 여성들처럼 손이 매우 고울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조금 과장을 한다면, 거북의 등처럼 굳은 살이 훈장처럼 장식되여 있었다. "이렇게 일을 열심히 하지 않으면 살기 힘듭니다"라는 그여성의 대답이 화살처럼 가슴에 꽂였던 기억이 새삼 떠오른다.
https://lifemeansgo.blogspot.ca/2011/05/516-50.html
세계 여러나라를 여행하게되면 맨먼저 발을 내딧는 곳이 그나라의 얼굴격인 국제공항들이다.
공항 명칭이, 대부분 그나라의 위대한 지도자들의 이름을 따서 불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대열에 서 있는 지도자로, 오늘의 잘사는 한국의 Foundation을 만드신 박정희, 그리고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 전 대통령을 오래전부터 주장해왔었다. 그러나 감사해 할줄을 모르는 한국의 정치꾼들과 좌파 세력들의 반대로 현재까지도 깜깜 무소식이다. 대신에 북괴 김정은에게는 꼭 "김정은 국방위원장"의 존칭을 써대는 한국의 언론들, 한국의 대통령에 대해서는 어떤 호칭을 부쳤었나 한번 되돌아 보시라.
정권에 붙어서 비열하게 아부해 사리사욕을 채리는 그사람들의 속마음을 한번 보고 싶다. 박정희 탄생 100주년 기념우표를 인쇄단계에서 좌절시켰고, 이제 문통 취임 100일 기념우표를 발행 한다니.... 이게 나라냐? 이아침 너무나 서럽다.
☆이 글은 박정희씨 스토리가 아닙니다.
조금 긴 글 이지만 우리 모두 알고는 가야합니다.
대한민국의 앞날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글입니다.☆
■아! 박정희!
(내가 기억하는 박정희)
우정사업부는 7월에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주년 기념우표 발행을 취소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몇일 전 문대통령 취임 100일 기념투표를 8월 17일 발행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이 무슨 망녕된 짓인가?
조국 근대화를 치열한 투혼으로 혼자서 거의 이끌었던 영웅의 기념우표를 취소하다니!
그러면서 한편으로 문대통령 취임 기념우표를 발행하면서 쓰레기언론들이 얼마나 문비어천가를 불러댈 것인가?
아 사실이 공표된 8월 10일자 조선일보에
‘책 읽는 사무라이, 일 근대화를 이끌다’라는 제목의 칼럼이 실렸다.
에도 막부시대를 끝내고 명치유신을 이끈 것은 250년 평화시대를 맞으면서 전시에 무공을 세울 기회를 상실한 수만명의 사무라이들이 책을 읽어 지식과 경륜을 쌓음으로써 메이지 유신을 열었다는 내용이다.
이 글의 말미에는 수만명의 사무라이들이 나서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 일본의 근대화는 이루어졌지만 우리는 한 사람이 거의 다 끌고 갔고 올해는 그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라고 필자 남정욱씨는 말하고 있다.
박대통령 기념우표 발행 취소는 한편으로 생각하면 분기탱천할 일도 아니고 놀랄만한 것도 아니다.
어차피 결말은 그렇게 흘러가게 되어있었다.
'이것이 바로 이 나라 국민의 수준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기적적인 경제성장 정책의 이면에는 그 분의 엄청난 고뇌와 투혼이 스며있다.
1960년 4.19 학생의거가 성공하여 민주당 장면정권이 들어서고 사회는 계속되는 데모로 지극히 혼란하였다.
당시 중 1이었던 필자도 선배들에게 이끌려 거리를 행진하면서 뜻도 모르는 구호를 선배의 선창에 따라 외치곤 하였다.
중2였던 1961년 5월 16일 아침 조회시간에 담임선생님이 근엄한 얼굴로 ‘지금 서울에서는 군인들이 한강다리를 건너서 서울로 진입하고 있습니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왜, 무슨 이유로 군인들이 탱크를 앞세우고 한강 다리를 건넜는지 필자는 전혀 알지 못했다. 세상을 알기에는 중학교 2학년생은 너무 어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군정 후 민정이양을 거쳐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포함하여 의욕적인 경제성장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이는 후일 ‘한강의 기적’으로 이어졌다.
경제성장 추진과정에서 전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진정 박대통령을 뒷받침하고 따랐던가?
전혀 아니다.
필자는 고교시절, 대학시절 신문을 차분히 읽은 경험이 많이 있다.
당시 이른 바 대학교수를 비롯한 지식인들, 언론은 거의 예외없이 이 외로운 지도자를 한없이 폄훼하고 빈정거리며 조롱하였다.
조선조 500년 추상적인 이념과 명분론, 가난이라는 숙명 속에서 잘 살아본 기억이 없으며 청빈(淸貧)이라는 허울좋은 관념 속에서만 지나온 먹물들은 무식한 군인이 사농공상(士農工商)의 맨 아래 계급인 상인들 (지금 ‘재벌’이라고 불리는 대기업집단)과 힘을 합쳐
‘조국근대화’, ‘잘 살아보세’를 외쳤을 때
사사건건 냉소와 비난으로 맞섰고 실현불가능한 구호를 내세워 정권유지에 이용하고 있다고 비아냥거렸다.
당시 언론과 지식인들의 비난에 시달리던 그는 오죽 답답했으면
‘사람이 일하다 보면 잘하는 것도 있는데 잘하는 것은 왜 잘한다고 말하지 않느냐?’고
말하기도 하였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성장에 온힘을 기울여도 힘겨운 싸움인데 이들과 맞서 설득하고 때로는 어르기도 하면서 북한의 위협에 맞서 ‘싸우며 건설하자!’라고 국민들을 독려하였다.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후진국에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달성한 거의 유일한 국가이다.
이 과정에서 시대를 앞서간 두명의 선각자가 있었다.
지금 좌익들이 그토록 폄훼하고 난도질하는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이다.
조선조에서 임금과 사대부 양반들의 착취에 시달리며 가난과 복종을 천명처럼 여기고 살아온 이 땅의 백성들은 민주공화국이 어떤 것인지 자유가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이미 상해임시정부의 강령 삼균주의(三均主義) 때부터 이 땅에 공산주의의 싹이 만연하였고 당시 배웠다는 사람들 머리에는 사회주의의 망령만이 가득하였다.
공산주의의 정체를 누구보다도 정확히 꿰뚫고 있었으며 바다건너 미국이라는 보화(寶貨)를 일찍이 간파한 이승만 대통령의 선견지명이 아니었더라면 이 나라의 운명은 어찌 되었을까?
1965년 당시 한일국교 정상화 무렵 언론과 정치권은 모질고 끈질기게도 대일청구권 자금 협상을 위한 국교정상화를 ‘굴욕외교’라고 비난하였다.
대학생들도 서울거리를 투쟁의 현장으로 삼아 하루도 쉼 없이 데모대가 휩쓸다시피 하였다.
필자가 기억하기로는 평화선에 대한 협상을 두고 ‘분노의 바다’,
‘현해탄의 바다는 말이 없다’는
등의 사람피를 들끓게 하는 논조의 기사를 쓰면서까지 언론은 한일협정에 대하여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불굴의 의지가 아니었더라면 한일 국교정상화협정은 체결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당시 청구권 자금 (한국은 일본과 전쟁 당사국이 아니었다.
배상금 명목으로 돈을 받을 수는 없었다) 무상 3억,
유상 2억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1965년 한국의 총수출액이 건국이후 처음으로 1억불에 달하였다고 기뻐하던 때였다.
세계 7대 무역대국인 대한민국의 오늘날의 계산으로 본다면 수출액 5천억불의 다섯배가 되는 2.5조억불에 해당한다.
물론 경제후진국인 당시의 한국과 세계적인 무역대국인 오늘의 한국이라는 사실로 본다면 비유가 적절치 못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한 나라의 경제에 끼치는 의미를 생각한다면 어찌되었건 한해 총수출액의 다섯 배에 해당하는 돈을 일본으로부터 받아들인 것이다.
고속도로를 건설하고자 할 때
잘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당시 야당 지도자였던 김대중은
‘부자들 주말에 자가용타고 놀러 다니라고 고속도로 닦느냐?’고
하면서 고속도로 건설현장에서 드러 누었던 정치지도자였다.
당시 야당의 발목잡기에 지친 박대통령은
‘야당이 국회에서 찬성한 것은 국회의원 월급(세비)올리는 것밖에 없었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은 지금도 ‘독재정치의 화신’으로 그를 매도하게 만든 ‘10월 유신’을 단행한다.
그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는 말이 뜻하듯
그는 후세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평가되든 신경 쓰지 않았다.
오로지 국가, 민족을 위한다는 그 분의 신념이 어찌 보면 무모한,
이러한 정치적 결단을 가능하게 하였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1972년 필자가 군에 복무할 때 유신에 대한 국민투표가 행해졌다.
당시 필자는 부대 내에서 압박을 이겨내고 유일하게 유신에 대하여 반대표를 던졌다.
필자 생각으로는 ‘경제 성장은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이루어 낼 수 있는데 무리하게 이승만 박사처럼 장기독재의 길을 꼭 걸어야 되는가?’라는 생각을 가졌다.
필자 또한 대학재학 시절 당시 많은 대학생들이 그러했듯 천지를 모르고 데모대에 휩쓸려 거리를 누빈 적도 있었다.
당시 선친께서 ‘박정희 대통령은 애국자다’고
말씀하실 때에도 아마 지금의 젊은 사람들이 나이 많은 사람들의 훈계를 생각하듯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참새가 대붕의 뜻을 알 수 없다.
필자의 생각은 틀렸고 그분이 옳았다.
1970년 경 대한민국의 신발수출액은 전 세계에서 1위였다.
신발수출 분량을 지상에 쌓으면 남산의 높이와 부피에 해당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 돈으로 겨우 미국의 신예 전투기 한 대 반을 살 수 있었다.
1973년 필자가 대학원생 신분으로 일본의 산업견학단에 포함되어 미쯔비시 조선소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4만톤 규모 배의 거대한 스크루 프로펠러를 보면서 입이 벌어지는 경험을 했는데 당시 필자의 생각으로
‘내가 살아생전에 우리나라가 이러한 배를 만드는 것은 못보고 죽겠구나.’고 생각하였다.
흔히 왕회장으로 호칭되는 정주영 회장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경영스타일로 일본 경제계의 연구대상이 된 적이 있다고 한다.
돌다리도 조심스럽게 두드리며 건너는 일본의 경영스타일로 보면 현대는 사실 망해야 하는데 하는 사업마다 승승장구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왕회장도 박대통령이 조선업 진출을 권하였을 때
‘각하, 못하겠습니다.’고
발을 뺐다고 한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누구인가?
그가 강권하다시피 하여 왕회장이 조선업에 진출하자 당시 이름 석자만 대어도 사람들이 아는 경제관료가
‘만약 현대의 조선업이 성공한다면 내가 열손가락에 불을 켜고 하늘로 오르겠다’고
비아냥거렸다.
그러나 현대는 성공하였고 지금도 그 경제관료는 하늘로 오르지 아니하고 지상에 머무르고 있다. (정주영 저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현대를 위시하여 대우, 삼성도 조선업에 진출하였고 필자가 1973년 살아생전에 우리나라는 제조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였던 거대선박은 불과 10여년 후 대한민국의 조선업이 기술과 규모 면에서 세계 1위에 오름으로써 그보다 더 큰 배도 만들게 되었다.
이것이 과연 일요일에 그림이나 그리러 다니던 유약한 정치인이나 고속도로 위에서 드러눕던 정치인이 행할 수 있었다고 생각되는가?
이병철 회장이 정부의 중화학 공업화에 호응하여 반도체 진출을 결정하였을 때 많은 경제 전문가들이 삼성이 이제 무덤을 파고 있구나 생각하였다.
반도체가 엄청난 장비산업이고 설비하나에 몇조원을 쏟아 부어야 할 뿐 아니라 후발주자로 반도체를 해서 일본, 미국을 따라 잡는다고 누가 생각했다면 아마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 한국의 반도체 산업에 대하여는 필자가 굳이 증언부언할 필요는 없다.
필자는 단언한다.
IMF를 일으켜 수많은 가정을 파탄으로 내몰았던 YS같은 경제문외한이 만약 70년대 집권하여 외자도입을 중단하고 정경유착을 끊는다는 미명으로 재벌 갈구기에 나섰다면 이 나라는 지금도 섬유, 가발이나 팔려 다니는 산업후진국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한국이 중화학 공업화를 추진한 것은 늘어나는 해외로부터의 빚과 무역적자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다.
다만 지도자의 불굴의 신념과 불퇴전의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가 관건이었다.
한국이 경제성장계획을 세웠을 때 이 나라는 돈도 없고 기술도 없었다.
그러니 부품과 소재를 가까운 이웃, 주로 일본에서 수입하여 싼 임금으로 조립하여 인건비를 따먹고 미국 같은 선진국에 수출하였다.
이에 더하여 조립을 위한 기계도 저수준의 기계공업으로 인하여 거의 해외에서 도입하였기 때문에 무역수지는 언제나 마이너스였다.
필자가 산업은행 조사부에 근무하던 1980년대 초반 한국산업의 고도화를 위하여 노래를 부른 것이
‘부품 • 소재산업 발전’이었다.
그러나 부품과 소재가 어디 맨입에 되는 게 아니다.
막대한 연구투자와 과감한 설비투자, 기계공업의 발전이 필수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후대에 욕먹을 각오를 하고 비판세력을 긴급조치로 잠재우고 과감한 결단으로 밀어붙인 것이 바로 중화학공업화를 가능하게 한 ‘10월 유신’이었다.
지금 대한민국은 부품 • 소재산업의 강국이다.
중국이 사드배치를 트집 잡아 소비재 수입을 비토하고 있어도 중국도 어쩔 수 없이 수입해야 하는 것이 부품(반도체 등)과 소재(석유화학 공업의 생산물)이므로 대 중국 무역흑자는 별반 영향을 받지 않고 있다.
또한 세계1위의 원자력 발전기술이 나타내듯이 한국의 기계공업도 이미 세계 정상급의 수준을 지닌다.
지금 한국이 유일하게 뒤처지고 있는 부분이 설계 및 소프트웨어 기술이다.
이 모든 것이 그냥 하늘에서 떨어져서 어느날 자고 일어났더니 한국이 중화학 선진국이 되었는가?
절대 아니다. 한 지도자의 땀과 눈물과 결단, 고뇌가 있었다.
지금 우리나라는 순채권국이 되었으며 계속 대규모 경상수지 흑자가 이어지고 외화가 남아돌아 휴가철에는 국제공항이 출국하는 여행객으로 장사진을 이룬다.
이 외화는 누구의 피와 땀인가?
박정희 대통령이 ‘잘살아보세!’를 외쳤을 때
이 나라 지식인과 언론인들은 끝없는 비아냥과 조롱,
정경유착비난 등으로 날밤을 지새웠다.
다만 배운 것 없고 배고픈 공원들, 여공들, 독일로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 등이 박대통령의 지도력에 호응하고 따랐다.
시골의 촌부와 아낙네들은 박대통령의 지도력을 믿고 ‘새마을 운동’에 적극 호응하였다.
당시 공원들은 구로공단에서 교대 근무하면서 벌집으로 불리는 좁은 공간에서 다리가 열십자로 포개질 정도로 새우잠을 자면서 삼시 세끼를 라면으로 때웠다.
비록 말할 수 없이 고생하였지만 그들은 회고할 때
‘그 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원자재와 기계를 수입하여 인건비나 따먹는 산업구조에서 이익이 나면 다시 투자하여 산업구조를 한단계 한단계 높여가는 과정에서 이들의 희생이 나라를 일군 것이다.
1960년대, 70년대 섬유산업에 매달리면서 선진국에 와이셔츠를 한 타스에 10불 정도에 팔아가며 인건비를 아껴 경제를 일군 것이다.
그때 산업현장에서 그토록 고생한 사람들이 아무 소리를 하지 않는데 그 과실을 향유하면서 고생이 무언지도 모르고 배고픈 것도 경험하지 못한 인간들이
‘임금착취’, ‘노동착취’ 운운하면서
지도자를 폄훼하고 있고 그러한 논리가 먹히는 것이 바로 이 나라의 국민 수준이다.
앞서도 말하였지만
박대통령 탄신 백주년 기념우표는 발행되건 발행되지 않건 상관할 일이 아니다.
그분의 업적을 알고 그분의 고뇌를 아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박정희 대통령은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역사 이래 가장 위대한 대통령을 맞고 있다.
다만 이에는 단서가 붙는다,
‘원래 대한민국의 국민수준에 가장 잘 들어맞는’ 지도자로서 말이다.
이승만 박사나 박정희 대통령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고 분노하고 가슴 칠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대한민국 국민의 수준이 원래 그것 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그 분들은 대한민국의 국민보다 훨씬 앞서 갔던 선각자들이었다.
이승만 박사와 박정희 대통령이 위대한 것은 국민들이 무어라고 하건 신념과 결단으로 이 나라를 이끌어 자유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고 산업화의 기적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국민소득 60불의 적빈, 전쟁으로 전파된 산업시설, 돈과 기술이 전무한 상황, 패배주의에 빠져 끝없이 뒷다리를 잡는 언론과 정치인, 이러한 상황에서 세계 최정상의 중화학 공업화라는 5천년 한반도 역사상 전례가 없는, 아니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이 어마어마한 기적을 박정희 대통령은 이루어 내었다.
이러한 엄청난 일을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어찌 무리수가 없었겠는가?
그런데 공은 모두 깔아뭉개고 과실만 부각시켜 대통령 탄신 100주년 기념우표마저 취소하는 이런 국민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지금 우리나라는 그렇게 사정이 좋은 편이 아니다.
5천만 인구, 10만 평방키로의 좁은 국토에 산지가 7할이고 나머지 3할의 평지에 공장짓고 도로건설하고 집짓고 살아야 한다.
이태리나 스페인처럼 관광자원이 많은 것도 아니고 기름 한방울 나지 않고 다른 광물자원도 거의 없다.
지금 죽자 살자 미래 먹거리에 모든 힘과 역량을 모두 쏟아 부어도 모자라는 지경에,
문재인대통령은 미래의 먹거리 산업인 원자력 산업을 이상하게 말아먹고 있다.
‘판도라’ 인지 ‘핑돌아’ 인지 이상한 영화한편 보면서 눈물을 찔찔 짜다가 나와서는 (우리 대통령 각하께서는 전에도 광해군인지 뭔지 하는 영화보시면서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셨다고 한다. 참으로 감성이 풍부한 분 같다.)
세계에서 안전성 1위라는 고리 원자력 발전소 5,6호기 건설을 중단시켰다.
그런가 하면 헬리콥터에서 돈을 뿌리는 것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정책을 ‘소득주도성장’이라는 멋진 이름을 붙여 무상시리즈로 한번에 10조, 30조씩 돈을 뿌려대고 있다. (대선 공약 자금 178조와는 별도로)
빈대잡자고 초가삼간 태우는 촛불사태,
그리고 대통령이 말 한마디 할 때마다 30조씩 날아가는 이 나라의 곳간...
요새 베네주엘라를 보면 중산층이 식료품 살 돈이 없어 쓰레기 통을 뒤지고 80%국민의 체중이 평균 7.8키로가 줄었다고 한다.
그나마 석유매장량 세계 1위인 나라가 이 지경인데,
석유 한방울 없고 평지 3만평방 키로에서 5천만이 복닥거리고 사는 이 나라에서 그나마 박정희 대통령이 그토록 노심초사해서 중화학공업화를 일으키면서 쌓아놓은 나라살림을 장롱에서 곶감 빼먹듯 전부 빼먹고 나면 이제 남은 것은 베네주엘라처럼 국민들이 쓰레기 통 뒤지는 일만 남아있다.
하지만 베네주엘라는 기름매장량 세계 1위이다.
우리는 무얼로 먹고 살 것인가?
돈 떨어지면 해외에서 식료품 사다먹을 돈도 떨어지고 그때 우리의 딸들이 필리핀처럼 해외에 나가서 식모노릇하면서 외화벌어 송금해야 하는가?
지금 문대통령의 지지율이 80%이고 어떤 지역에서는 99%라고 한다.
아마도 김일성도 이런 지지율을 누려보지 못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구원하시겠다고 다시 오셔도 아마도 99% 사람들이 지지하지는 않을 것 같다.
조금도 이상할 것 없다.
바로 그것이 대한민국 국민들의 수준이기 때문이다.
비록 국민들이 고달팠지만 근면과 노력을 외쳤던 지도자의 100주년 탄생기념우표는 깔아뭉개고
대중혁명을 외치고 대중인기영합에만 올인하는 이런 지도자에게 80%가 열광하는 나라에 무슨 미래가 있겠는가?
우리 같은 70노인이야 조금 살다가 세상뜨면 그만이지만,
이제 젊은 세대들이 김정은의 핵무기 공갈과
비어가는 곳간이라는 이 엄청난 비극을
우선 헬리콥터에서 떨어지는 돈 줍는 재미로 잊고 있다.
대한민국의 어리석은 국민이여!
앞으로 이 난국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 진정 생각이나 하고 있는가?
(2017. 8. 12. 김원율)
조금 긴 글 이지만 우리 모두 알고는 가야합니다.
대한민국의 앞날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글입니다.☆
■아! 박정희!
(내가 기억하는 박정희)
우정사업부는 7월에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주년 기념우표 발행을 취소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몇일 전 문대통령 취임 100일 기념투표를 8월 17일 발행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이 무슨 망녕된 짓인가?
조국 근대화를 치열한 투혼으로 혼자서 거의 이끌었던 영웅의 기념우표를 취소하다니!
그러면서 한편으로 문대통령 취임 기념우표를 발행하면서 쓰레기언론들이 얼마나 문비어천가를 불러댈 것인가?
아 사실이 공표된 8월 10일자 조선일보에
‘책 읽는 사무라이, 일 근대화를 이끌다’라는 제목의 칼럼이 실렸다.
에도 막부시대를 끝내고 명치유신을 이끈 것은 250년 평화시대를 맞으면서 전시에 무공을 세울 기회를 상실한 수만명의 사무라이들이 책을 읽어 지식과 경륜을 쌓음으로써 메이지 유신을 열었다는 내용이다.
이 글의 말미에는 수만명의 사무라이들이 나서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 일본의 근대화는 이루어졌지만 우리는 한 사람이 거의 다 끌고 갔고 올해는 그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라고 필자 남정욱씨는 말하고 있다.
박대통령 기념우표 발행 취소는 한편으로 생각하면 분기탱천할 일도 아니고 놀랄만한 것도 아니다.
어차피 결말은 그렇게 흘러가게 되어있었다.
'이것이 바로 이 나라 국민의 수준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기적적인 경제성장 정책의 이면에는 그 분의 엄청난 고뇌와 투혼이 스며있다.
1960년 4.19 학생의거가 성공하여 민주당 장면정권이 들어서고 사회는 계속되는 데모로 지극히 혼란하였다.
당시 중 1이었던 필자도 선배들에게 이끌려 거리를 행진하면서 뜻도 모르는 구호를 선배의 선창에 따라 외치곤 하였다.
중2였던 1961년 5월 16일 아침 조회시간에 담임선생님이 근엄한 얼굴로 ‘지금 서울에서는 군인들이 한강다리를 건너서 서울로 진입하고 있습니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왜, 무슨 이유로 군인들이 탱크를 앞세우고 한강 다리를 건넜는지 필자는 전혀 알지 못했다. 세상을 알기에는 중학교 2학년생은 너무 어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군정 후 민정이양을 거쳐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포함하여 의욕적인 경제성장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이는 후일 ‘한강의 기적’으로 이어졌다.
경제성장 추진과정에서 전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진정 박대통령을 뒷받침하고 따랐던가?
전혀 아니다.
필자는 고교시절, 대학시절 신문을 차분히 읽은 경험이 많이 있다.
당시 이른 바 대학교수를 비롯한 지식인들, 언론은 거의 예외없이 이 외로운 지도자를 한없이 폄훼하고 빈정거리며 조롱하였다.
조선조 500년 추상적인 이념과 명분론, 가난이라는 숙명 속에서 잘 살아본 기억이 없으며 청빈(淸貧)이라는 허울좋은 관념 속에서만 지나온 먹물들은 무식한 군인이 사농공상(士農工商)의 맨 아래 계급인 상인들 (지금 ‘재벌’이라고 불리는 대기업집단)과 힘을 합쳐
‘조국근대화’, ‘잘 살아보세’를 외쳤을 때
사사건건 냉소와 비난으로 맞섰고 실현불가능한 구호를 내세워 정권유지에 이용하고 있다고 비아냥거렸다.
당시 언론과 지식인들의 비난에 시달리던 그는 오죽 답답했으면
‘사람이 일하다 보면 잘하는 것도 있는데 잘하는 것은 왜 잘한다고 말하지 않느냐?’고
말하기도 하였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성장에 온힘을 기울여도 힘겨운 싸움인데 이들과 맞서 설득하고 때로는 어르기도 하면서 북한의 위협에 맞서 ‘싸우며 건설하자!’라고 국민들을 독려하였다.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후진국에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달성한 거의 유일한 국가이다.
이 과정에서 시대를 앞서간 두명의 선각자가 있었다.
지금 좌익들이 그토록 폄훼하고 난도질하는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이다.
조선조에서 임금과 사대부 양반들의 착취에 시달리며 가난과 복종을 천명처럼 여기고 살아온 이 땅의 백성들은 민주공화국이 어떤 것인지 자유가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이미 상해임시정부의 강령 삼균주의(三均主義) 때부터 이 땅에 공산주의의 싹이 만연하였고 당시 배웠다는 사람들 머리에는 사회주의의 망령만이 가득하였다.
공산주의의 정체를 누구보다도 정확히 꿰뚫고 있었으며 바다건너 미국이라는 보화(寶貨)를 일찍이 간파한 이승만 대통령의 선견지명이 아니었더라면 이 나라의 운명은 어찌 되었을까?
1965년 당시 한일국교 정상화 무렵 언론과 정치권은 모질고 끈질기게도 대일청구권 자금 협상을 위한 국교정상화를 ‘굴욕외교’라고 비난하였다.
대학생들도 서울거리를 투쟁의 현장으로 삼아 하루도 쉼 없이 데모대가 휩쓸다시피 하였다.
필자가 기억하기로는 평화선에 대한 협상을 두고 ‘분노의 바다’,
‘현해탄의 바다는 말이 없다’는
등의 사람피를 들끓게 하는 논조의 기사를 쓰면서까지 언론은 한일협정에 대하여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불굴의 의지가 아니었더라면 한일 국교정상화협정은 체결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당시 청구권 자금 (한국은 일본과 전쟁 당사국이 아니었다.
배상금 명목으로 돈을 받을 수는 없었다) 무상 3억,
유상 2억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1965년 한국의 총수출액이 건국이후 처음으로 1억불에 달하였다고 기뻐하던 때였다.
세계 7대 무역대국인 대한민국의 오늘날의 계산으로 본다면 수출액 5천억불의 다섯배가 되는 2.5조억불에 해당한다.
물론 경제후진국인 당시의 한국과 세계적인 무역대국인 오늘의 한국이라는 사실로 본다면 비유가 적절치 못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한 나라의 경제에 끼치는 의미를 생각한다면 어찌되었건 한해 총수출액의 다섯 배에 해당하는 돈을 일본으로부터 받아들인 것이다.
고속도로를 건설하고자 할 때
잘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당시 야당 지도자였던 김대중은
‘부자들 주말에 자가용타고 놀러 다니라고 고속도로 닦느냐?’고
하면서 고속도로 건설현장에서 드러 누었던 정치지도자였다.
당시 야당의 발목잡기에 지친 박대통령은
‘야당이 국회에서 찬성한 것은 국회의원 월급(세비)올리는 것밖에 없었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은 지금도 ‘독재정치의 화신’으로 그를 매도하게 만든 ‘10월 유신’을 단행한다.
그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는 말이 뜻하듯
그는 후세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평가되든 신경 쓰지 않았다.
오로지 국가, 민족을 위한다는 그 분의 신념이 어찌 보면 무모한,
이러한 정치적 결단을 가능하게 하였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1972년 필자가 군에 복무할 때 유신에 대한 국민투표가 행해졌다.
당시 필자는 부대 내에서 압박을 이겨내고 유일하게 유신에 대하여 반대표를 던졌다.
필자 생각으로는 ‘경제 성장은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이루어 낼 수 있는데 무리하게 이승만 박사처럼 장기독재의 길을 꼭 걸어야 되는가?’라는 생각을 가졌다.
필자 또한 대학재학 시절 당시 많은 대학생들이 그러했듯 천지를 모르고 데모대에 휩쓸려 거리를 누빈 적도 있었다.
당시 선친께서 ‘박정희 대통령은 애국자다’고
말씀하실 때에도 아마 지금의 젊은 사람들이 나이 많은 사람들의 훈계를 생각하듯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참새가 대붕의 뜻을 알 수 없다.
필자의 생각은 틀렸고 그분이 옳았다.
1970년 경 대한민국의 신발수출액은 전 세계에서 1위였다.
신발수출 분량을 지상에 쌓으면 남산의 높이와 부피에 해당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 돈으로 겨우 미국의 신예 전투기 한 대 반을 살 수 있었다.
1973년 필자가 대학원생 신분으로 일본의 산업견학단에 포함되어 미쯔비시 조선소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4만톤 규모 배의 거대한 스크루 프로펠러를 보면서 입이 벌어지는 경험을 했는데 당시 필자의 생각으로
‘내가 살아생전에 우리나라가 이러한 배를 만드는 것은 못보고 죽겠구나.’고 생각하였다.
흔히 왕회장으로 호칭되는 정주영 회장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경영스타일로 일본 경제계의 연구대상이 된 적이 있다고 한다.
돌다리도 조심스럽게 두드리며 건너는 일본의 경영스타일로 보면 현대는 사실 망해야 하는데 하는 사업마다 승승장구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왕회장도 박대통령이 조선업 진출을 권하였을 때
‘각하, 못하겠습니다.’고
발을 뺐다고 한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누구인가?
그가 강권하다시피 하여 왕회장이 조선업에 진출하자 당시 이름 석자만 대어도 사람들이 아는 경제관료가
‘만약 현대의 조선업이 성공한다면 내가 열손가락에 불을 켜고 하늘로 오르겠다’고
비아냥거렸다.
그러나 현대는 성공하였고 지금도 그 경제관료는 하늘로 오르지 아니하고 지상에 머무르고 있다. (정주영 저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현대를 위시하여 대우, 삼성도 조선업에 진출하였고 필자가 1973년 살아생전에 우리나라는 제조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였던 거대선박은 불과 10여년 후 대한민국의 조선업이 기술과 규모 면에서 세계 1위에 오름으로써 그보다 더 큰 배도 만들게 되었다.
이것이 과연 일요일에 그림이나 그리러 다니던 유약한 정치인이나 고속도로 위에서 드러눕던 정치인이 행할 수 있었다고 생각되는가?
이병철 회장이 정부의 중화학 공업화에 호응하여 반도체 진출을 결정하였을 때 많은 경제 전문가들이 삼성이 이제 무덤을 파고 있구나 생각하였다.
반도체가 엄청난 장비산업이고 설비하나에 몇조원을 쏟아 부어야 할 뿐 아니라 후발주자로 반도체를 해서 일본, 미국을 따라 잡는다고 누가 생각했다면 아마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 한국의 반도체 산업에 대하여는 필자가 굳이 증언부언할 필요는 없다.
필자는 단언한다.
IMF를 일으켜 수많은 가정을 파탄으로 내몰았던 YS같은 경제문외한이 만약 70년대 집권하여 외자도입을 중단하고 정경유착을 끊는다는 미명으로 재벌 갈구기에 나섰다면 이 나라는 지금도 섬유, 가발이나 팔려 다니는 산업후진국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한국이 중화학 공업화를 추진한 것은 늘어나는 해외로부터의 빚과 무역적자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다.
다만 지도자의 불굴의 신념과 불퇴전의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가 관건이었다.
한국이 경제성장계획을 세웠을 때 이 나라는 돈도 없고 기술도 없었다.
그러니 부품과 소재를 가까운 이웃, 주로 일본에서 수입하여 싼 임금으로 조립하여 인건비를 따먹고 미국 같은 선진국에 수출하였다.
이에 더하여 조립을 위한 기계도 저수준의 기계공업으로 인하여 거의 해외에서 도입하였기 때문에 무역수지는 언제나 마이너스였다.
필자가 산업은행 조사부에 근무하던 1980년대 초반 한국산업의 고도화를 위하여 노래를 부른 것이
‘부품 • 소재산업 발전’이었다.
그러나 부품과 소재가 어디 맨입에 되는 게 아니다.
막대한 연구투자와 과감한 설비투자, 기계공업의 발전이 필수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후대에 욕먹을 각오를 하고 비판세력을 긴급조치로 잠재우고 과감한 결단으로 밀어붙인 것이 바로 중화학공업화를 가능하게 한 ‘10월 유신’이었다.
지금 대한민국은 부품 • 소재산업의 강국이다.
중국이 사드배치를 트집 잡아 소비재 수입을 비토하고 있어도 중국도 어쩔 수 없이 수입해야 하는 것이 부품(반도체 등)과 소재(석유화학 공업의 생산물)이므로 대 중국 무역흑자는 별반 영향을 받지 않고 있다.
또한 세계1위의 원자력 발전기술이 나타내듯이 한국의 기계공업도 이미 세계 정상급의 수준을 지닌다.
지금 한국이 유일하게 뒤처지고 있는 부분이 설계 및 소프트웨어 기술이다.
이 모든 것이 그냥 하늘에서 떨어져서 어느날 자고 일어났더니 한국이 중화학 선진국이 되었는가?
절대 아니다. 한 지도자의 땀과 눈물과 결단, 고뇌가 있었다.
지금 우리나라는 순채권국이 되었으며 계속 대규모 경상수지 흑자가 이어지고 외화가 남아돌아 휴가철에는 국제공항이 출국하는 여행객으로 장사진을 이룬다.
이 외화는 누구의 피와 땀인가?
박정희 대통령이 ‘잘살아보세!’를 외쳤을 때
이 나라 지식인과 언론인들은 끝없는 비아냥과 조롱,
정경유착비난 등으로 날밤을 지새웠다.
다만 배운 것 없고 배고픈 공원들, 여공들, 독일로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 등이 박대통령의 지도력에 호응하고 따랐다.
시골의 촌부와 아낙네들은 박대통령의 지도력을 믿고 ‘새마을 운동’에 적극 호응하였다.
당시 공원들은 구로공단에서 교대 근무하면서 벌집으로 불리는 좁은 공간에서 다리가 열십자로 포개질 정도로 새우잠을 자면서 삼시 세끼를 라면으로 때웠다.
비록 말할 수 없이 고생하였지만 그들은 회고할 때
‘그 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원자재와 기계를 수입하여 인건비나 따먹는 산업구조에서 이익이 나면 다시 투자하여 산업구조를 한단계 한단계 높여가는 과정에서 이들의 희생이 나라를 일군 것이다.
1960년대, 70년대 섬유산업에 매달리면서 선진국에 와이셔츠를 한 타스에 10불 정도에 팔아가며 인건비를 아껴 경제를 일군 것이다.
그때 산업현장에서 그토록 고생한 사람들이 아무 소리를 하지 않는데 그 과실을 향유하면서 고생이 무언지도 모르고 배고픈 것도 경험하지 못한 인간들이
‘임금착취’, ‘노동착취’ 운운하면서
지도자를 폄훼하고 있고 그러한 논리가 먹히는 것이 바로 이 나라의 국민 수준이다.
앞서도 말하였지만
박대통령 탄신 백주년 기념우표는 발행되건 발행되지 않건 상관할 일이 아니다.
그분의 업적을 알고 그분의 고뇌를 아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박정희 대통령은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역사 이래 가장 위대한 대통령을 맞고 있다.
다만 이에는 단서가 붙는다,
‘원래 대한민국의 국민수준에 가장 잘 들어맞는’ 지도자로서 말이다.
이승만 박사나 박정희 대통령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고 분노하고 가슴 칠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대한민국 국민의 수준이 원래 그것 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그 분들은 대한민국의 국민보다 훨씬 앞서 갔던 선각자들이었다.
이승만 박사와 박정희 대통령이 위대한 것은 국민들이 무어라고 하건 신념과 결단으로 이 나라를 이끌어 자유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고 산업화의 기적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국민소득 60불의 적빈, 전쟁으로 전파된 산업시설, 돈과 기술이 전무한 상황, 패배주의에 빠져 끝없이 뒷다리를 잡는 언론과 정치인, 이러한 상황에서 세계 최정상의 중화학 공업화라는 5천년 한반도 역사상 전례가 없는, 아니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이 어마어마한 기적을 박정희 대통령은 이루어 내었다.
이러한 엄청난 일을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어찌 무리수가 없었겠는가?
그런데 공은 모두 깔아뭉개고 과실만 부각시켜 대통령 탄신 100주년 기념우표마저 취소하는 이런 국민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지금 우리나라는 그렇게 사정이 좋은 편이 아니다.
5천만 인구, 10만 평방키로의 좁은 국토에 산지가 7할이고 나머지 3할의 평지에 공장짓고 도로건설하고 집짓고 살아야 한다.
이태리나 스페인처럼 관광자원이 많은 것도 아니고 기름 한방울 나지 않고 다른 광물자원도 거의 없다.
지금 죽자 살자 미래 먹거리에 모든 힘과 역량을 모두 쏟아 부어도 모자라는 지경에,
문재인대통령은 미래의 먹거리 산업인 원자력 산업을 이상하게 말아먹고 있다.
‘판도라’ 인지 ‘핑돌아’ 인지 이상한 영화한편 보면서 눈물을 찔찔 짜다가 나와서는 (우리 대통령 각하께서는 전에도 광해군인지 뭔지 하는 영화보시면서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셨다고 한다. 참으로 감성이 풍부한 분 같다.)
세계에서 안전성 1위라는 고리 원자력 발전소 5,6호기 건설을 중단시켰다.
그런가 하면 헬리콥터에서 돈을 뿌리는 것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정책을 ‘소득주도성장’이라는 멋진 이름을 붙여 무상시리즈로 한번에 10조, 30조씩 돈을 뿌려대고 있다. (대선 공약 자금 178조와는 별도로)
빈대잡자고 초가삼간 태우는 촛불사태,
그리고 대통령이 말 한마디 할 때마다 30조씩 날아가는 이 나라의 곳간...
요새 베네주엘라를 보면 중산층이 식료품 살 돈이 없어 쓰레기 통을 뒤지고 80%국민의 체중이 평균 7.8키로가 줄었다고 한다.
그나마 석유매장량 세계 1위인 나라가 이 지경인데,
석유 한방울 없고 평지 3만평방 키로에서 5천만이 복닥거리고 사는 이 나라에서 그나마 박정희 대통령이 그토록 노심초사해서 중화학공업화를 일으키면서 쌓아놓은 나라살림을 장롱에서 곶감 빼먹듯 전부 빼먹고 나면 이제 남은 것은 베네주엘라처럼 국민들이 쓰레기 통 뒤지는 일만 남아있다.
하지만 베네주엘라는 기름매장량 세계 1위이다.
우리는 무얼로 먹고 살 것인가?
돈 떨어지면 해외에서 식료품 사다먹을 돈도 떨어지고 그때 우리의 딸들이 필리핀처럼 해외에 나가서 식모노릇하면서 외화벌어 송금해야 하는가?
지금 문대통령의 지지율이 80%이고 어떤 지역에서는 99%라고 한다.
아마도 김일성도 이런 지지율을 누려보지 못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구원하시겠다고 다시 오셔도 아마도 99% 사람들이 지지하지는 않을 것 같다.
조금도 이상할 것 없다.
바로 그것이 대한민국 국민들의 수준이기 때문이다.
비록 국민들이 고달팠지만 근면과 노력을 외쳤던 지도자의 100주년 탄생기념우표는 깔아뭉개고
대중혁명을 외치고 대중인기영합에만 올인하는 이런 지도자에게 80%가 열광하는 나라에 무슨 미래가 있겠는가?
우리 같은 70노인이야 조금 살다가 세상뜨면 그만이지만,
이제 젊은 세대들이 김정은의 핵무기 공갈과
비어가는 곳간이라는 이 엄청난 비극을
우선 헬리콥터에서 떨어지는 돈 줍는 재미로 잊고 있다.
대한민국의 어리석은 국민이여!
앞으로 이 난국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 진정 생각이나 하고 있는가?
(2017. 8. 12. 김원율)
https://mail.google.com/mail/u/0/?tab=wm#inbox/15df57364b979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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