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April 03, 2019

위선자 "박영선"을 보면서, 영원한 ‘국민 엄마’ 故'김영애'가 그리워진다.

인간은 미완성인 존재이기에,항상 흠이 있게 마련이다.  흠한점없는 사람이라면 그는 인간이 아닌 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짐승과 인간이 다른점,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와 그렇치 못한 사람이 다른점은 양심이 있고, 잘못을 했을때는 이를 솔직히 인정하고 양해를 구하고, 다음부터는 똑 같은 염치없는 짖이나 비슷한 거짖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요즘 문재인 정부에서 각료 7명의 후보자를 검증받기위해, 여의도 국회에서 청문회 중이라고 한다.
국민들의 여론을 들어보면, 모두가 불량품 투성이고, 또 이흠집을 솔직히 인정하고, 겸양의 덕을 표현한 후보자는 한명도 없었다고 하며, 그원인을 전부 사회적 분위기가 그런데....라는식으로 넘겼다고 한다.

그들 후보중에서 여자한명이 유난히 돋보였다. 바로 "박영선"이다.
그녀가 야당국회의원으로 있을때, 그녀의 독설은 유명했었다.  그중에서도 박영선 하면 "재벌저격수, 삼성저격수"라는 대명사로, 모르는이가 없었다. 그녀의 남편이 미국변호사로 있을때 태어난 그아들은 여전히 미국시민, 한국시민 이중국적자이다. 서민들의 일년월급보다 훨씬많은,3200만을주면서 외인학교에 보냈었고, 입으로는 서민의 편에 서 있다고 했다. "내돈으로 내가 쓰는데 무슨상관이냐"라고 항변 한다면, 더이상 할말은 없다. 또한 국민을 위해서 일한다라고 할 자격도 없는 위선자일뿐이다.

청문회에서 그녀는 한마디의 잘못을 시인하지 않고,거짖말로 일정표까지 만들어 당시 황교안과 점심을 했다고했다. 실제로는 고엽제전우회 간부들과 점심을 한것이다. 그모임에서 박근혜 정부를 얼마나비난했을까?는짐작은쉽게 간다. "내로남불,후안무치, 남탓"으로 돌리고,독야청청의 상징으로 행동한 그녀의 얼굴이  징그럽기까지 하다.


김영애 국민배우는, 자기의 실수를 했을때는 변명하지 않고 솔직히 밝혔고, 한때는 사업을 해서 부도 누렸으나, 이를 시기한 어느 치한의 폭로가 사실인양 미디아는  검증도 없이 보도하여, 사업은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말았는데, 그뉴스는 사기였음이 밝혀졌었다. 그래서 국민들은 그녀의 짧은 인생을 더 아쉬워 하면서, 한국이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진실된 토론의 장이 여의도에서 이루어지기를 더 간절히 바라는것 아닐까?

그래서  이아침에, 국민배우 김영애, 자격도 없는 여자, 박영선이 장관 한자리 해먹겠다고, 있는 거짖말 다 동원해서 국민들 우롱하는 그녀를 비교하면서,  한국의 앞날을 걱정 하는것이다.

 국민배우 김영애의 별세 소식을 보도한 뉴스 내용을  옮겨 봤다.

원로배우 김영애가 향년 66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췌장암이 재발한 상태에서 입원 치료를 받으면서도 드라마 촬영을 모두 마치며 연기 투혼을 불살랐다. 그는 말했었다. “다음 생에 태어나도 다시 배우가 되고 싶다”고.
‘국민 엄마’라 불리며 지난 46년간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오간 배우 김영애가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 4월 9일 오전 10시 58분, 향년 66세.
영결식은 11일 오전 10시 서울 서대문구 신촌 연세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유족과 지인 등이 참석한 가운데 기독교 예배 형식으로 치러졌다. 고인의 아들 이민우 씨는 영정사진을 들고 침통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며느리를 비롯한 가족들도 계속해서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11시 빈소를 떠난 고(故) 김영애 배우의 운구함은 봄 햇살이 따듯하던 오후 3시께 장지인 분당 메모리얼파크에 도착했다. 추모공원 전역에 만개한 벚꽃과 적당히 불어오는 바람이 고인의 넋을 기리는 듯했다.

췌장암 합병증으로 사망
입원 상태서 외출증 끊어가며 촬영 마쳐


인은 췌장암에 따른 합병증이다. 김영애의 소속사 스타빌리지엔터테인먼트는 “고인은 2012년 췌장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했으나, 2016년 겨울 건강이 악화되어 연세 세브란스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사랑하는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과 이별을 고했다”고 밝혔다.
김영애는 작년 10월 췌장암이 재발해 병원에 입원한 상태에서도 일주일에 한 번씩 외출증을 끊어가며 KBS 2TV 주말드라마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 촬영을 마무리했다. 화면 속 확연히 야윈 모습에 많은 시청자들이 놀라긴 했지만, 특유의 강인함으로 깐깐하고 고집 세지만 살가운 엄마 최곡지 역을 완벽하게 연기해냈다. 유가족에 따르면 췌장에서 시작된 암이 간과 림프 등으로 전이됐다고 한다.
고인의 아들 이민우 씨는 “암 환자들은 마약성 진통제를 맞아야 하는데 어머니는 연기에 방해가 된다고 맞지 않고 촬영장에 갔다”며 극심한 통증에도 연기 혼을 불태운 어머니의 모습을 회상했다. 김영애는 주치의가 더 이상의 촬영은 무리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50부 약속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촬영현장에서 마지막 에너지를 쏟아냈다.
드라마는 시청률 36%를 웃돌며 인기에 힘입어 4부가 연장됐다. 오로지 김영애만이 양복점 안주인 역할을 할 수 있다며 고인을 캐스팅한 제작진은 당초 예정이던 50부 분량을 모두 채운 그를 배려해 마지막 4회에서는 최곡지 부부가 지방으로 요양을 간 것으로 극을 마무리했다.
고인은 생전 마지막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었다.
“죽음을 앞두고 아까운 건 없어요. 그런데 연기는 좀 아깝긴 해요. 그거 말고는 미련도, 아까운 것도 없어요.”
아들 이민우 씨는 “어머니가 남기신 유언 중 한 가지는 본인이 돌아가시고 나서 허례허식에 돈을 쓰지 말라는 것”이었다며 “배우라는 직업이 그런 게 아니라고 하셨다”고 전했다. 고인은 인공호흡이나 심폐소생 같은 연명치료도 원치 않았다. 본인이 영정사진과 수의도 직접 준비했다. 이민우 씨는 “어머니의 삶에서 연기를 빼앗아가면 너무나 큰 부분을 뺏긴 것이다”라며 “사람에게 심장을 뺏으면 죽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머니에게 연기는 그냥 일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암 발병 후 출연한 작품만 약 20편


“다음 생에도 다시 배우가 되고 싶다”
췌장암이 처음 발병했던 2012년, 고인은 MBC 드라마 <해를 품은 달>을 촬영하고 있었다. 당시 황달 증세로 병원을 찾았다가 췌장암 선고를 받았지만 이 사실을 숨긴 채 병원을 왕래하며 연기를 계속했다. 해외유학 중이던 아들에게조차 자신의 몸 상태를 알리지 않고 만약을 대비해 안사돈에게만 몰래 일렀다고 한다. 그는 이후 당시를 떠올리며 “고통을 참으려 허리에 끈까지 조여 매고 연기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암 판정을 받은 후 출연한 작품만 약 20편에 달한다. 드라마로는 <내 사랑 나비부인>(2012), <메디컬 탑팀>(2013), <라이어 게임>(2014), <미녀의 탄생>(2014), <킬미, 힐미>(2015), <마녀보감>(2016), <닥터스>(2016), 그리고 유작이 된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2016) 등이 있고,
영화로는 <내가 살인범이다>(2012), <실연의 달콤함>(2013), <변호인>(2013), <현기증>(2014), <허삼관>(2014), <카트>(2014), <우리는 형제입니다>(2014), <특별수사: 사형수의 편지>(2015), <판도라>(2016), <인천상륙작전>(2016) 등이 있다. 치료와 수술, 완치와 재발을 겪으며 지난 5년 동안 한 해에 3~4편의 작품을 해왔던 것이다.
김영애는 2015년 코리아 드라마 어워즈에서 MBC <킬미, 힐미>로 공로상을 받은 후 “배우인 게 정말 좋다. 가능하다면 다음 생에 태어나도 다시 배우가 되고 싶다”며 “인생을 살아가면서 때로는 진흙탕에 빠지기도 하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저를 일으켜준 건 연기였다”고 수상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빈소 찾아 오열한 동료 배우들존경과 애도 이어져




김영애는 동료와 선후배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생전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 50회 마지막 촬영을 마친 김영애가 현장을 떠나는 모습이 담긴 영상만 보아도 그를 향한 동료들의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다. 함께 출연한 배우 차인표가 찍은 영상에서 고인은 말을 잇기 어려울 정도로 몸 상태가 악화된 것으로 보여 안타까움을 더했다. 그는 동료 배우, 스태프들로부터 뜨거운 포옹을 연거푸 받았고 수많은 이들의 배웅 속에 촬영장을 떠났다.
차인표는 “드라마가 시작할 때부터 과연 끝까지 하실 수 있을까 걱정을 했는데 매주 보여주시는 모습에서 연기자를 떠나 인간으로서 존경하게 됐다”며 “마지막 순간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자로서 맡은 바 책임과 소임을 다하신 김영애 선생님 같으신 분이야말로 이 시대에 귀감이 되는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극에서 부부로 호흡을 맞췄던 배우 신구도 “녹화하러 와서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며 포옹을 하면 너무 앙상해 안타까웠다.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참고 입원한 상태에서도 녹화를 위해 촬영장으로 왔다. 경의를 표하고 싶다”고 했다. 고인의 빈소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조문이 이어졌다.
송강호, 정우성, 전도연, 하지원, 신구, 나문희, 김혜자, 김용건, 이동건, 조윤희, 라미란, 오현경, 최강희, 박신혜, 김원해, 고두심, 금보라, 정동환, 엄효섭, 조성하 등이 장례식장을 찾아 깊은 애도의 뜻을 표했다.
최불암은 “(고인이) 배우 아니면 다른 것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이 직업을 좋아했었다”며 “세상이 어지러우니까 혼자 쉬러 간 모양”이라고 말했다. 임현식은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며 “작은 체구에 불타오르는 열정이 있는 배우”였다고 추억했다. 채시라는 “엄마 같았고 굉장히 정이 많으셨다. 그냥 많이 그리울 것 같다”고 했다. 송일국은 “저는 아직까지 그렇게 몰입한 적이 없다. 작품을 같이 하면서 정말 배울 게 많고, 늘 저를 반성하게 만드셨다”고 말했다.
한 방송사 피디는 자신이 입봉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당시의 일화를 전하며 고인을 향한 존경심을 드러냈다. 그는 “연출자를 굉장히 존중해주셨다. 무리한 요구를 해도 현장에서 일단 완벽하게 연기를 해내신 다음 사석에서 많이 가르쳐주셨다. 그때 배운 것들이 제 연출의 바탕이 됐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발인에는 개그우먼 이성미, 배우 나영희와 오달수, 임현식, 염정아, 문정희, 윤유선 등이 참석해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켰다. 오달수는 오열하는 지인들의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를 전했고, 나영희는 유족들과 함께 장지까지 동행했다.
천생 배우의 46년 연기 인생출연 영화와 드라마 150여 편
“배우답게 마지막까지 연기하다 무대에서 쓰러지고 싶다.”
46년 연기 인생을 마감한 김영애가 생전 자주 했던 말이다. 그는 뜨거운 모정으로 보는 이들의 눈시울을 붉히게 만들기도 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악역을 완벽하게 소화해내기도 하며 드라마와 영화 150여 편에 출연했다.
김영애는 1951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부산여자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1년 MBC 공채 탤런트 3기로 데뷔했다. 그해 MBC <수사반장>으로 처음 작품에 출연한 뒤 <당신의 초상>, <엄마의 방>, <빙점>, <가을여자>, <아버지>, <형제의 강>, <파도>, <장희빈>, <달려라 울엄마>, <황진이>, <로열 패밀리> 등의 드라마를 통해 꾸준히 안방극장에서 정상의 자리를 지켰다.
1974년 드라마 <민비>로 제10회 백상예술대상 TV부문 여자신인상을 받았고 1987년에는 KBS <사랑의 시작>과 1999년 SBS <파도>를 통해 백상예술대상 최우수연기상으로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영화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섬개구리 만세>, <왕십리>, <비녀>, <설국>, <절정>, <로맨스 그레이>, <미워도 다시 한번>, <겨울로 가는 마차>, <아내>, <하와의 행방>, , <비내리는 영동교>, <겨울 나그네>, <연산일기> 등의 작품에 출연하며 1970~80년대 스크린을 풍미했다.
한동안 드라마에만 전념하던 그는 2009년 <애자>로 영화계에 복귀했고 투병을 하는 도중 다시 충무로의 주요 배우로 떠올랐다. 영화 <변호인>으로 2014년 맥스무비 최고의 영화상에서 최고의 여자조연배우상, 부일영화상 여우조연상, 대종상 여우조연상, 청룡영화상 여우조연상 등을 휩쓸었다.
순탄치 않았던 개인의 삶연기로 극복하고 연기로 마무리




두 번의 이혼과 화장품사업 소송 시비로 개인사는 연기 인생만큼 순탄하지는 못했다. 20대 중반 밴드마스터 이종석 씨와 사랑에 빠져 1978년 결혼했고 연기생활을 활발히 이어가며 중견배우로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2001년, 결혼한 지 23년 만에 이혼했다.
같은 해 황토화장품업체 참토원을 설립한 그는 사업을 함께하던 5살 연하의 재미사업가 박장용 씨와 2003년 재혼했고 연 1천억원대의 매출을 올리며 부를 거머쥐었다. 2004년 <달려라 울엄마>를 끝으로 사업에 전념했지만 2007년 한 소비자 고발 프로그램이 황토팩에 대한 중금속 검출 의혹을 제기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식품의약품안전처의 공식 발표를 통해 참토원 제품에 “유해성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이 일로 마음고생을 크게 한 그는 사업에서 손을 뗐고 결국 2008년 박장용 씨와도 갈라섰다.
이후 김영애는 1년 정도 우울증을 겪으며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다시 연기활동을 시작하며 재기에 성공했고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오직 배우로서의 삶을 살았다. 과거 한 드라마 촬영현장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김영애는 “여기서 일하고 나이 먹고 늙어왔다”며 “카메라 앞에 서면 너무나 편안하고 좋다”고 했다.
고인은 유작이 된 드라마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 촬영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지인들에게 문자메시지를 남겼다. “연기를 하며 행복한 삶을 살았다. 덕분에 좋은 연기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감사하다”는 내용이었다.
다시 보고 싶은 故 김영애 배우
영화 대표작과 드라마 캐릭터 순위는?

드라마와 영화를 넘나들며 다작한 배우 김영애. 극 속에서 누군가의 엄마로 분한 모습이 기억에 가장 많이 남아 있지만 엄마를 넘어 한 인간의 내면을 밀도 높게 연기해내곤 했다. 그가 출연했던 영화 중 다시 보고 싶은 대표작과 잊을 수 없는 드라마 캐릭터는 무엇일까? 맥스무비 영화 연구소가 설문 수신에 동의한 전체 맥스무비 회원을 대상으로 4월 10~11일 ‘관객이 직접 뽑은 故 김영애 배우, 다시 보고 싶은 영화 대표작과 잊을 수 없는 드라마 캐릭터’ 설문을 진행했다. 총 502명의 응답자가 설문에 참여했다.
● 다시 보고 싶은 영화 대표작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4/26/201704260230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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