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April 17, 2018

고 최은희, 당대 톱배우의 미투…"나를 욕보인 사람은 아군", 언론은 조국이 지켜주지못한점을 탓했어야.

한국에서 영화를 논할때는 최은희와 신상옥을 빼놓고는 영화계의 역사를 논할수 없을 것이다라는데 토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특히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 스토리는 아마도 60대 이후의 Senior들에게는 삶의 한부분처럼 가깝기도 했고,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했었다.

언론의 보도 내용이 맞는지? 아니면 그녀의 표현이 맞는지는 알길이 없으나, 그녀의 표현중 "나를 욕보인 사람은 아군"구절은 그녀의 표현이 와전된것이 아닐가?라는 생각을 들게한다.

아군이던, 적군이던, 그녀가 당한 시련은 조국이 그녀뿐만이 아니라 국민들을 지켜주지 못한 슬픈 지난날을 오늘을 사는 모두는 커다란 교훈으로 삼아야 할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오늘의 한국사회의 상황은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변화된것 같지 않아 안타까울 뿐이다.

부디 하늘나라에서는 그녀가 생전에 당했던 어려운 삶이 아니고, 눈물과 한이 없는, 평안한 삶이 이어질것으로 기원 드리는 바이다. 편히 가십시요. 그녀의 서거기사가 아래에.


92세를 일기로 16일 별세한 영화배우 최은희(92)의 삶이 재조명받고 있다. 다른 사람의 삶을 연기하는 배우였지만, 자신의 인생 자체가 영화보다 더 영화같아서다.

1926년 경기 광주에서 태어난 최은희는 1943년 극단 '아랑' 연구생이 됐다. 21세 때인 1947년 신경균 감독의 '새로운 맹서'로 데뷔했다. 이 영화에 출연하면서 촬영기사 김학성과 사랑에 빠지고, 결혼했다.

그러다가 1950년 6·25동란이 발발했다. 그때 최은희는 전남 목포에서 영화 '사나이의 길'을 찍고 있었다. 제작진과 배우들은 부산으로 피란을 떠났다. 하지만 최은희는 결핵을 앓던 남편 김학성이 걱정돼 기차를 타고 상경했다. 서울 남산동 집에 있던 최은희는 인민군 장교 심영에게 납치됐다. 북한 내무성 소속 경비단 협주단에 소속돼 낮에는 공산당을 찬양하는 연극을 연습하고, 밤에는 북한 영화로 사상 교육을 받았다.

 9·28 서울 수복 후 인민군이 후퇴할 때 평남 순천에서 구사일생으로 탈출했다. 이때 '최은희가 인민군들에게 몹쓸 짓을 당했다'는 소문이 돌았고, 가정 폭력을 일삼던 김학성과도 자연스럽게 헤어진다.생전의 최은희는 "하지만 정작 나를 욕보인 사람은 아군이었다"고 폭로했다. 

8년 전 '[나와 6·25]북 선전극 공연하다 국군 위문공연 영화보다 더 영화같았던 내 인생'(조선일보)이라는 글에서 "하루는 헌병대에서 내가 북측에 부역한 것을 조사하겠다며 불렀다. 헌병대원은 잔뜩 겁먹은 나를 한적한 민가로 데려갔다. 술상 앞에 헌병대장이 앉아있었다. 그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얼굴만 반반한 줄 알았더니 피부도 곱구먼'이라며 다가왔다. 그를 확 밀어젖혔다. 하지만 그는 씩씩거리며 권총을 겨누더니, 내 몸 위로 쓰러졌다. 발버둥을 치고 비명을 질렀지만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한겨울에 숙소로 돌아오면서 한없이 흐느껴 울었다"고 고백했다.

요즘으로 치면 '미투'다. 더욱이 톱스타의 미투였다. 

이후 최은희는 1953년 다큐멘터리 '코리아'를 계기로 만난 신상옥(1926~ 2006) 감독과 이듬해 결혼했다. 운명의 동반자이자 영화적 동지였다. 23년 동안 연출자와 배우로 호흡을 맞춰 130여편의 영화를 제작하면서 한국 영화의 중흥기를 이끌었다. 

최은희는 '꿈'(1955),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 등을 통해 주연 배우로서 입지를 공고히 했다. '어느 여대생의 고백'으로 국산영화제(현 대종상) 여우주연상, '민며느리'(1965)로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백사부인'(1960), '성춘향'(1961),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등 출연하는 영화마다 흥행성공을 이어가면서 1950~1960년대 대표 여배우로 활약했다. 1965년에는 우리나라 3번째 여성감독으로 이름을 올리며 총 3편의 작품을 연출했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슬하에 자녀가 없어서 아이 둘을 입양해 키우는 상황이었는데, 신 감독이 배우 오수미와 사귀고 혼외자까지 낳았다.결국 1976년 파경을 맞이했으나, 이들의 인연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안양영화예술학교 해외 자본 유치차 1978년 1월 홍콩으로 갔다가 북한 공작원에게 납치됐다.

최은희를 찾으러 간 신 감독도 같은해 7월 납북됐고, 두 사람은 1983년 북한에서 재회한다. 이들은 김정일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북한에서 신필름 영화 촬영소를 세우고 체제 선전용 영화를 만들었다.'돌아오지 않는 밀사'(1984), '사랑 사랑 내 사랑'(1984) 등 모두 17편을 제작하며 전성기를 재연했다. 최은희는 북한에서 '소금'으로 1985년 모스크바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도 거머쥐었다. 
김정은의 신임을 받던 두 사람은 1986년 3월 오스트리아 빈을 찾았다 미국 대사관에 은신을 요청,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이후 10년 넘는 망명 생활을 하다가 1999년 영구 귀국했다. 

귀국 직후 신 감독은 1987년 11월29일 일어난 대한항공 858기 폭파 사건을 다룬 영화 '마유미'(1990)를 만들었다.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영화를 제작하던 신 감독은 2006년 4월 80세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최은희는 국내에서 극단 '신협' 대표, 경기 안양신필름예술센터 학장 등을 지냈다. 2002년 뮤지컬 '크레이지 포유'를 기획·제작했다. 

신 감독이 별세한 뒤 건강이 악화된 최은희는 경기 용인시 요양병원에서 투병하다가 2016년부터 서울 화곡동 자택에서 아들 신정균(55) 감독의 간병을 받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유족은 신 감독과 상균(미국 거주)씨, 딸 명희·승리씨 등 2남2녀다. 빈소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 12호실, 발인 19일 오전 8시, 장지 경기 안성시 천주교 추모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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