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November 08, 2011

10월 17일, 삼십사일째,구리시 코스모스공원, 명성황후생가, 박달재, 쌍곡계곡, 선우동계곡, 화양계곡,보은 양지촌 대추농장 방문.












































10월 17일, 삼십사일째,구리시 코스모스공원, 명성황후생가, 박달재, 쌍곡계곡, 선우동계곡, 화양계곡,보은 양지촌 대추농장 방문.

구리시의 한강변 코스모스공원은 활짝핀 각종색갈이 어울려 끝없이 펼쳐진 한장의 그림처럼 아름답고 잘가꾸어, 보는 사람들의 마음과 눈을 시원하게 해주었고, 꽃밭 군데 군데에 원두막까지 세워놓아 분위기가 옛생각을 할수 있도록 어우러져 있었고, 원두막지붕위에는 하얀박이 매달려 있어 어렸을적에 그러한 풍경속에서 살았고, 즐겼던 옛정취를 흠뻑 느낄수 있게 해주어 한참동안을 멍청하다싶을 정도로 초점을 떼지않고 응시하면서, 50년전으로 Time machine을 뒤로돌려보는 순간을 갖도록 했었다. 이른 아침부터 친구부부, 우리부부 그리고 친구부부와 친한분이 한차에 올라타고 구리시에서 잘가꾸어, 시민들에게 휴식을 즐길수 있도록 해놓은 남한강 하구의 강변에 가꾸어 놓은 코스모스 공원에 도착한 시간은 아침 9시반경이었다. 코스모스꽃밭앞에는 허수아비들도 즐비하게 세워져 있어 수확의 계절에 참새떼와 싸웠던 생각도 나게 했었는데, 자세히 보니 Effigy contest를 거쳐 잘된것들을 뽑아 display 해놓은것으로 보였다. 일꾼들이 계속해서 공원을 정비하고 청소하고 있어, 그들이 있어서 이렇게 좋고 깨끗한 코스모스 공원에서 휴식을 취하고 즐길수 있음에 고마움을 느꼈고, 조국이 그만큼 살기가 여유로워졌다는 느낌을 깊이 받았다. 코스모스만으로 장식된 공원은 처음 접하는 경험을 한셈이다.

다시 차를 달려 도착한곳은 여주에 있는 명성황후의 생가였다. 생가기념관에 첫발을 들였을때의 느낌은 생가를 제외한 다른 건물들은 새로 꾸며진것으로 짐작이 들었다. 어려서는 민비에 대한 생각이 독살스러운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후에 황후에 대한 재조명한 사극을 보면서 쓰러져 가는 조선왕조를 일제로 부터 지키려는 여장부였음을 어렴푸시 알게 되였는데, 오늘 친구의 Guide로 생각지도 않게 생가를 방문하게 된것이다. 마침 curator로 일하시는분의 안내로 기념관에 전시된 각종 자료들을 보고 설명을 들으면서 내가알고 있었던 단편적인 지식이 한쪽으로 편견되여 있었고, 무지 했음을 확실히 느낄수 있었다. 설명해준 많은 자료를 다기억할수 없었음이 안타까웠을 뿐이다. 명성황후는 조선왕조의 26대왕 고종황제의 부인으로 궁에 들어와 쓰러져 가는 왕조의 재건을 위하여 노력하다 결국 일본제국주의 침략자의 하수인에게 칼부림을 당해 1895년 10월 8일 최후를 마친 불운한 여인으로 이해 되였다. 시해당시에 사용되였던 칼도 기념관에 전시되여 있었지만, Mockery였고, 진짜는 일본의 후쿠오카 구시다 신사에 전시되여 있다고 했다. 황후가 거쳐하는옥호루 방에 침입한 하수인이 황후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해 시녀를 황후로 알고 칼을 내려치려 할때, 무의식적으로 황후를 검객으로 부터 보호하기위해 이를 저지 하려다 양팔이 짤렸던 충신은 '이경직'이었다고 했다. 그칼잡이는 바로 황후를 향해 칼을 내려쳐 시해 했다고 한다. 황후는 옥호루에서 시해 당한후 남아있는 유골일부를 청량리 홍릉으로 옮겨 국장을 치른지 24년이 지난 1919년에 고종께서 승하 하시자 남양주 금곡으로 묘지를 정하고 국장을 치르면서, 이때 명성황후도 청량리 홍릉에서 금곡으로 이장해 합장을 하게되지만, 릉의 이름은 그대로 홍릉으로 존속시킨다.

황후가 태어 났을때 그녀의 아버지는 53세였다고 한다. 16세에 간택되여 왕비가 된다. 명성황후의 생가는 본래 명성황후의 6대조부인 연현황후(숙종의 계비)아버지 민유중의 묘소관리를 위해 1687년에 지은 묘막이었다고 한다. 민유중의 직게후손인 민치록은 조상의 묘를 관리하며 이곳에서 살다가 1851년 9월 25일(양력 11월17일) 부인 한산이씨에게서 명성황후(민자영)을 낳았다. 어린 소녀는 대대로 훌륭한 가문인 여흥민씨로 비록 8살때 아버지를 여의었지만 현숙한 어머니의 가르침아래 훌륭한 양가의 규수로 성장하게 된다. 고종3년인 1866년 대원군부인의 추천을 받아 16세에 왕비로 책봉된 황후께서는 대궐안의 수많은 서적들을 탐독하면서 전통과 현대에 대한 많은 지식을 얻었고, 마침내 시아버지 대원군의 10년 섭정이 끝나자 고종임금을 내조하시면서 본격적인 조선왕조의 근대화 작업에 손을 댔었다고 한다. 1876년 일본과의 수호통상을 시작으로 1881년 신사유람단을 일본에 파견하고, 청나라에 영선사를 보내 서구유럽과 이웃나라의 선진문물과 기술을 배워오게 했으며 1882년 영국과 미국에 문호를 개방하고,1884년 프랑스와 수교이후 개신교의 포교를 허락했고, 1886년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의 이름을 하사하시는등 외교적 노력과 개화를 위한 업적을 이루었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계기로 일어난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하면서 개혁을 구실로 조선의 왕권과 국권을 침탈하기위해 혈안이 되여 있을때 이를 견제하기위해 이이제이(적을 이용하여 적을 치게하는 병법)의 뛰어난 국방외교전략을 강구 했었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외교력으로 대 러시아 외교 관계가 급진전을 보이자 당황한 일본이 마침내 음력으로 8월20일(양력 10월8일)새벽 경복궁내 건청궁(옥호루)에서 명성황후를 무참하게 시해당하므로써, 4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됐다고 한다.

지금까지 명성황후에 대한 인물평가를 보면, 사치가 심하고 시아버지 흥선대원군과 정쟁만을 일삼는등 부정적시각으로 전해진 이유는 조선근대사를 쓴 사람이 일본인데다 철저하게 역사를 왜곡한데서 비롯됐었다는 설명에, 국가의 안위는 말로만 지켜지는게 아니고 ,더욱히 힘이 없으면 사실데로 기록되어야할 역사마져 바뀌어 버리는 비극이 뒤따른다는것을 터득했다.

기념관에 모셔진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어진은 3짝으로 나위어진 자기(porcelain)에 그려진것으로, 1,300도의 고열에 2번이나 구워서 완성된 것이라고 한다. 앞으로 큰 천재지변이 없는한 이들 어진은 색갈이 거의 불변할것이라고 설명해 준다. 명성황후는 일본인들의 암살을 피하기위해 비밀의 여인으로 행동을 하여,시해될때까지 정확한 얼굴을 아는 사람들이 없었다고 한다. 다만 알려진부분은 키가크고, 예뻣고, 하얀얼굴빛과, 병서를 특히 많이 탐독했었다는것외에는 알려진게 없어, 주위인물들의 고증을 들어 이에 가장 적합한 초상화를 그려 맞춘것이라고 했다. 명성황후의 주치의를 했었던 당시의 선교사 Underwood씨의 고증이 많이, 황후의 초상화를 만드는데, 참고됐었다고 했다. 기념관 왼쪽뒷편에 있는 생가는 현재 수리중에 있어, 인부들께서 정성스럽게 기와지붕을 손질하고 있었다. 마당에서는 벽에(?)바를 흙을 Mix하고 있기에 물었더니, 황토흙이라고 설명해 준다.

고종황제는 민비외에도 장상궁으로 부터 의친왕을 낳았고, 양상궁으로부터는 덕혜옹주를 낳았고, 엄상궁에서 영친왕등의 자손을 보았다고 설명들었다. 오래전에 신문에서 정신이상의 와병중이던 덕혜옹주가 일본으로 부터 귀국하였었다는 뉴스를 본 기억이 떠올랐다. 조선왕조의 역대 임금에 대한 명칭에 대한 새로운 사실도 오늘 알게 됐다. 적통에서 나온 왕은 '종'으로, 직계적통이 아닌쪽에서 왕이 됐을때는 '조'로 이름이 부쳐 지는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내가 잘못알고 있었음을 Curator의 설명을 듣고 알았다. 그녀의 설명에 의하면, 성군으로 덕을 많이 쌓은 임금에 대해서 후세에 '종'을 부쳤고, 새로 나라를 건국했거나 변란등을 통해 왕이 된때는 '조'를 부쳤다고 Curator Mrs. Seo는 자세히도 설명해주셨다.

청량리의 홍릉에는 고종황제와 합장으로 명성황후가 모셔셔 있다고 했으나, 시해된후 시신을 찾지 못해, 대신에 평소에 사용하시던 유품과 기타 황후의 릉이라는 증표가 될만한 사물들을 모셨다고 하는 설명에는 후세를 살아가는 국민들이 그이유를 분명히 알고 앞으로의 조국관에 대한 새로운 각오와 헌신의 자세가 요구된다는점을 교훈으로 남겨주는 사례라고 생각되였다.

잘뚫린 고속도로, 국도를 달리면서, 충청북도역시 산악지대라는 사실을 재확인하게 됐다. 꾸불꾸불한 길이 잘 뚫려 자동차로 이동하기에 큰 불편없이 단풍으로 변해가고 있는 산하를 즐기면서 운전하고 있었지만, 옛날에는 고립된 지역이었을 것이라는것쯤 짐작하는것은 어렵지 않았다. 길을 따라 산세가 변하고 이렇게 아기자기한 경치를 어디서 또 볼수 있을까라는 감탄을 하지 않을수 없었다. 해방직후부터 국민들 사이에 애창되였던 '울고넘는 박달재' 노래가 탄생하게 됐던 현장인 박달재 고개를 난생 처음으로 자동차로 넘어보는 경험을 하게됐다. 이고개의 정상에서 잠시 차를 멈추고, 여러개의 동상들이 세워져 있음을 보았는데, 이곳에서는 조국독립을 하기위해 귀중한 목숨을 바쳤던 애국지사들 여러분이 탄생한 지역이기도 했음을 알았다. 나와 Lunar에게 더 많은 곳을 보여주기위해 친구는 운전하기 편한 고속도로를 피하여, 옛구도로 아니면 국도를 달리면서 생전 들어보지도 못했던, 쌍곡계곡을 달리고 그곳에서 폭포를 구경하고, 다시 산허리를 빙글빙글 돌아 선우동계곡을 돌아 넘고, 이번에는 다시 심산계곡을 넘어 화양계곡속을 달렸다. 사진으로 경관을 찰칵찰칵해 보았지만, 마음에 들게 찍히지는 않은점이 아쉽다.

보은시내를 지나 산중턱에 있는 꼬불꼬불한 길오른쪽에 세워져 있는 '양지촌농원'간판을 보더니,그곳으로 핸들을 돌린다. 차가 서로 비켜서기도 좁은 내리막길을 돌고돌아서 농장에 도착했다. 개량종 대추를 생산하는 농장이라고 했다. 대추(Dates)알이, 캐나다에서 먹었던것과 같은 큰 대추였다. 친구는 3년전부터 이곳을 알게되여 매년 수확시즌초가 되면 들려서 먹을만큼 사곤 했었는데, 이번에는 마침 우리부부가 고국방문한 때와 맞아 떨어져 오늘 이곳에 들리게 된것이다. 내가 먹어본맛은 캐나다에서 먹어본 대추들과 크기도 같고 맛도 같았다. 값이 캐나다보다 약 5배 이상은 비싼것같았았다. 그래도 물량이 없어서 못팔정도라고 한다. 농장주인의 말에 의하면, 청와대에도 납품한다고 하여 더 유명해진것 같다. 며칠후에는 농림부장관실에서 이곳에 온다고 귀뜸해줬다. 농장실태와 앞으로의 계획에대한 의견교환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곳에 도착했을때는 벌써 주위가 어두어지고 있는 6시30분이 지났었다. 구리시 코스모스공원을 구경한것 빼고는 하루종일 충청북도와 강원도 남부일대의 산악지대 경관을 구비구비 돌면서 산세의 아기자기한 Scene에 도취되여 시간가는줄을 몰랐던 것이다.

주인장은 오늘밤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다고 하는데, 그에 대한 걱정이 태산같았다. 기온이 떨어지면 대추가 얼게되여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일년내내 피땀흘려 이제 막 첫수확을 하고 있는중인데 자연의 변화에 이렇게 마음을 조리고 있는 그심경을 듣고, 괜히 그말에 나도 오늘밤이 걱정된다. 과연 내가 걱정할일인가? 농사꾼들은 항상 자연과 함께 해야 하기 때문에 무척 민감하게 날씨에 대처 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음을 알것 같았다. 오늘밤이 무사하게 잘 지내기를 바래면서 발길을 서울로 재촉했다.

참고: Curator의 연락처, e-mail - seomoran@naver.com

http://www.youtube.com/watch?v=n4EkOkClaH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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