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February 28, 2014

나이팅게일과 백의천사의 상징, 수선화(Daffodill), 그곳에 전운이 감돌다니.....


http://www.nytimes.com/2014/03/19/world/europe/ukraine.html?emc=edit_th_20140319&nl=todaysheadlines&nlid=59843044&_r=0

http://news.bbc.co.uk/2/hi/uk_news/england/2915241.stm

http://news.bbc.co.uk/2/hi/uk_news/713923.stm



크리미아 반도가 다시 전쟁에 휩싸일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아름다운 흑해(Black Sea)남단에 자리하고 있는 기후좋은, 그러나 쏘련방 시대에는 쏘련 흑해 함대의 젖줄역활을 했던 곳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 곳이다.

그러나 또다른 큰 뜻이 그곳에 담겨져 있음을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1853년부터 1856년까지 약 3년간 일어난 Crimean War 동안에 백의의 천사 Florence Nightingale 여사에 대한 얘기다.  간단히 얘기하면 그녀는 가슴과 등에 빨간 십자표시를 한 하얀천을 달고, 전장을 뛰어다니면서 적군, 아군 구별하지 않고 부상병들을 치료해 준 천사의 역활을 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병원과 기타 간병이 필요한 곳에서 천사의 역활을 하는 간호사에 대한 인식은 그때 부터 시작되였다는게 정설이다.

당시 러시아와 지금의 터키인 오토만제국과 불란서 영국 연합군이 Crimea 반도에서 싸웠는데,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었다고 한다.  불란서는 당시 오토만제국의 통치를 받고 있는,지중해 동쪽 연안에 있는 예루살렘에 카톨릭의 특혜를 오토만제국의 왕에게 요구하자, 러시아는 러시아의 Orthodox로 충분하다는 비판을 가한데서 싸움은 시작됐다고 한다.

한반도의 6/25전쟁도 3년간 지속됐었고, 2백만명 이상의 목숨이 사라지게 했었다. 6/25전쟁을 경험한 세대는 전쟁의 참혹함을 알기에 Crimean War 처참함에 대한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란 나의 생각이다.

Crimean Peninsula는 몇달전부터 내전(Civil war)중에 있는 Ukraine의 한 주(Province)로 세상사람들의 이목속에서 잊혀져 가고 있었는데, 오늘 아침 러시아를 지지하는 반란폭도들이 정부청사를 점령하여 사태가 악화 되면서 다시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이들 반란폭도들의 지지를 공공연히 선언하고 나섰으며,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는 강력히 비난하고 있다.

지금 영국의 Derbyshire지방에는 백의천사를 뜻하는 수선화(Daffodil) 꽃이 한농부의 수고로 그지역의 색갈을 노랗게 변하게 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지역은 원래 다포딜꽃의 원산지는 아니다.  크리미안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온 나이팅게일이 이곳에 다포딜을 심은게 그유래가 됐다고 한다.  전쟁이 종식될 무렵 그녀로 부터 부상치료를 받은 한 러시아병사가 그녀에게 감사의 선물로 그꽃을 바쳤는데, 그녀는 소중이 간직했다가 고향으로 가져와 심어 번창시켰다고 한다.

지금 Derbyshire지방 정부는 그농부에게 지원금을 매년 지급하여 지역을 노랗게 변화 시키면서 그녀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고 있다고 한다.  그녀의 업적을 높게 그리고 오랫동안 기리고져 하는 연민의 마음인것 같다.

다포딜 꽃에 대한 유래만을 봤을때는 목숨을 잃어버릴수 있는 포화속에서 이리저리 뛰어 다니면서 부상병 치료에 헌신하고 있는 Nightingale을 생각하게되고, 지금은 평화를 구가하고 있는 곳으로 여겨왔는데, 폭도들이 정부청사를 불법 점령하고 있다니, 이무슨 청천병력같은 소리인가.

사방이 눈(Snow)으로 뒤덮혀 있는 이곳 토론토에도 2주 정도후에는 맨먼저 수선화가 얼었던 지표를 뚫고 지상에 나타나 청순하고 노란 꽃봉우리를 우리에게 보여줄것이다.  제발 그이전에 평온이 Crimean 반도에 다시 안착 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Thursday, February 27, 2014

현 방식에서 이산가족 상봉은 득보다 상처를 더 깊게 할뿐이다.

왜 이산가족상봉은 알맹이가 없이 겉치레만 번지르하게 하는 쇼로 끝맺음 해야 하는가. 그리고 왜 매번 숨소리한번 제대로 내지 못하고 Kim's Regime에 끌려 가야만 하는가.

금강산 상봉장소에서 조차 가족간에 상봉도 정해져 있는 시간에만 허용되고, 그나머지 시간은 갈라져 있다가 다시 시간이 되면 만나는 북한 김정은과 그 Regime의 치밀한 계획아래서 행해지는 또 다른 이산가족의 아픔을 다시 한번 확인해주는 것 외에는 얻는게 아무것도 없다.  이산가족 상봉이라고 해서 금강산 호텔 만남의 장소에 가면 체류하는 동안은 흩어졌던 가족이 정해진 기간동안 한방에서 동거동락 하는것으로 생각했었다.


만약에  남한에서 수십년 동안 소식이 끊겼던 부모,형제, 또는 가족을 만났는데  어렵게 수소문하여 만났다고 했을때, 한호텔에 묶으면서 같은방에 기거하지 못하게하고 정해진 시간에만 만날수 있게 당국이 간섭한다면 당장에 여론의 폭격으로 그정권은 즉사하거나 옷벗고 나가야 할것이다.  그러한 섭리가 보편적인 상식일것이다.

TV에 비친 북쪽의 가족들은 상봉의 만남자리에서 나눈 첫마디가 "위대한 김정은 동지의 은덕으로....." 시작되는것을 보았다.  그분들이 진정으로 마음속에서 우러나서 한 언행이라고 믿을 사람은 김정은과 그 Regime외에는 없다.  반대로 남쪽에서 올라간 이산가족들은 우선 가족들의 안녕여부를 묻는다.  그렇게 안부 묻는것이 순리이다.

2차에 걸친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끝나고 북측 관계자들의 하는말이 더 가관이다.
"이런 이산가족 행사를 자주 갖고, 헤어진 가족들의 고통을 덜어 주어야 한다." 마치 남쪽에서 그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기에 생사여부 확인이 안된채 여기까지 온것 처럼 떠벌리는 모습에 할말을 잊어 버렸었다.

북으로 되돌아간 가족들은 바로 고향집으로 가지 못하고 평양에서 다시 모여 사상훈련을 받고 남측가족으로 부터 받은 선물 보따리를 전부 검열 받았다고 하는 후속 뉴스에 충격뿐이다.  이런 만행을 그들은 앞으로도 얼마나 더 계속 할것인가?  상봉시 그들 Regime의 지침에 거슬리게 언행을 한것이 비밀 경호원에 발각된 경우는 정신무장이 해이혀졌다는 이유로 보복이 따를테고, 선물 보따리도 가족에게 되돌려진다는 보장도 없는것으로 이해된다.

북한 김정은 Regime하에서 살아가는 동포들이 굶주림에 허덕이고, 철저한 사상교육에 그들이 시키는데로 앵무새처럼 외쳐대는 꼭두각시 행동을 한다는것을 지구상의 모든 인류는 다 알고 있다.  그런데도 굳이 "잘먹고 요순시대의 평화를 즐기고 있다. 이는 오로지 김정은 동지의 은덕"이라고 떠벌리는 쇼를 볼때는 그분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그이상의 원망과 김정은 Regime을 무너뜨리려는 강한 복수심으로 꽉 차 있다는것을 쉽게 읽을수 있게된다.

김정은 Regime이 앵무새 처럼 읊어대는 먹을것 풍부하고 자유가 보장된 사회속에서 그들이 삶을 살아간다면, 무조건 이산가족들간에 최소한 연결고리가 될수 있는 편지교환,전화통화 그리고 상시 만날수 있는 만남의 장소를  편리에 따라 남쪽에서도 할수 있도록 아무런 조건없이 제공하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선결 조건들을 열고 안열고는 전적으로 김정은 Regime에게 달려 있다.  이럴경우 남측뿐만이 아니고 전세계의 사람들은 그들의 말을 믿게 될것이고 귀를 기울이게 될것이다.

이번 상봉행사에 참가하고 남측으로 돌아온 실향민들의 마음은 좋았다기 보다는 마음깊은곳에 무거운 납덩이를 하나 얻어갖고 왔다는 실망감에 많이 괴로워 할것이다.  이런 거짖쇼는 앞으로는 없어야 한다.

이곳 북미에 사는 상당수의 이산가족들도 개인적으로는 이미 1980년 중반부터 이북에 다녀왔다.  그러나 그들중 한사람도 이북에 다녀오기를 잘했다고 하는 사람은 없다.  모두가 후회뿐이다.  그분들이 다녀온후로 가끔씩 날아오는 편지에는 항상 김씨왕조의 덕택에 우리는 잘살고 있다..... 그리고 편지 말미에는 구실을 부쳐 돈을 부쳐 달라는 내용들이다.  그들이 돈이 필요 해서가 아니고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안되기에 앵무새 노릇을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들은 알면서도 돈을 보내준다.  행여나 부탁을 거역할경우 가족들이 김씨 Regime에게 당하게될것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코를 낀 셈이다.

오죽 했으면 미국에서 심장병 전문의로 유명한 Donald Chung 같은분은 북한의 어머님과 누이동생들을 만나러 수없이 드나들면서 많은 돈을 갖다 주었는데, 끝도 없이 계속해서 요구하는 편지내용에 용단을 내리고, 그실상을 고국 한국을 포함한 전세계에 폭로 했었겠는가?
잘은 몰라도 그폭로이후 살아있는 북측의 가족들은 아오지 탄광 아니면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 어려운 지옥생활을 하던가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이산가족 상봉을 원하는 남북한의 가족들 숫자는 정부 통계에 따르면 12만명이 넘는다고 하는데 이제 겨우 1만2천명 정도만이 그나마 만날수 있었다고 한다.  그분들의 인생 시한도 이제 막바지에 달하고 있다. 이런점을 생각해 볼때, 하루가 급한 사항임을 김씨 Regime은 깊이 뉘우치고 더이상 미끼로 사용하지 말기를 간곡히 주문하고 싶다.

김정은 Regime은 이산가족 상봉을 빌미로 또 다른 남북 협상을 재개 하자고 떠들어 댈것이다.  금강산 관광재개, 개성공단 운영문제,남북 경협문제,정상회담 등등..... 가축 구제역으로 시달리고 있는 북한에 남측에서 구제약품을 제공하겠다고 Offer낸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들은 무응답이다. 대신에 엉뚱하게도 다른 Source찾고 있다는 뉴스를 접하면서.... 탄식뿐이다.

개성공단의 "례"에서 남측은 많은것을 배웠다.  아무런 투자보장도 없는곳에 Kim's Regime이 거짖으로 둘러댄 말을 액면 그대로 믿고 수천억원의 투자를 적의 아구리에 쳐넣은 코를 꿰었으니, 그들이 하고싶은데로 공단의 문을 열고 닫고 해도 남측은 아무런 상응조치를 못하고 6개월넘게 끌려 다녔다.  아니 할수가 없었다. 그리고 국민들의 세금으로 손해본 회사에 보상을 해주었다.  지금도 개성공단의 가동상황은 풍전등화 같은 분위기속에서 그들의 눈치를 보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남측의 전쟁세대 이후의 젊은층들은 한반도가 쳐해 있는 현실을 직시해야할 의무가 있다.
개인간의 관계는 물론이고, 더 나아가 국가간에 교류를 이루는데는 먼저 신뢰(Trust)를 전제로 한다.  김대중과 김정일의 정상회담때 이루어진 협약, 즉 김정일이가 답방 형식으로 남한을 방문하기로한 약속,  노무현이 이러한 균형을 깨고, 다시 북에 들어가 김정일을 만난후  남한 답방을 약속했지만, 약속 이행은 커녕 대신에 연평도 포격사건, 천안함폭침 등등의 만행을 저질르는 인간이기를 포기한 악마의 짖만 계속하고 있는 집단이다.  북한 동포의 배고픔을 해결해주기 위해 무조건 퍼주어야 한다는 망상은 버려야 한다.  그래도 고집을 부려 도와주겠다면, 최소한 인원이 북측에 파견되여 분배되는 상황을 직접확인 할수 있는 조건을 받아 낸후 해야 한다.

이제 남한정부는 이들 Regime의 술수에 더이상 끌려 다니지 말고,  우리가 인간으로서 살아가는데 보편적으로 행할수 있는 조건을 강하게 내걸고 협상에 임하여 최소한 위에 열거한 조건들을 충족 시키는 터전이 마련 됐을때 실시 하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이유들을 김씨 Regime이 이해 할수 있도록 온갖 노력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지금까지 해온 이산가족 상봉 방식은 절대로 다시 용납되여서는 안된다.  남측에서 Initiative 를 쥐고 끌어가야 한다.
특히 정치꾼들 정신차려야 한다.

Wednesday, February 26, 2014

큐바,Varadero 휴양지,Havana 관광및 골프 여행 Feb10,2014 부터

2월17일(월요일),2014

오늘은 짐을 싸서 다시 동토의 땅 토론토로 돌아가는 날이다.  화살처럼 지난 7일 동안이 눈깜짝 할 사이에 흘러갔음을 느낀다.  아쉽지만 순리이니 따라서 움직여야 한다.
이곳 호텔에서 뻐스를 타고 공항을 향해 떠나는 시간은 저녁 6시 30분.  그러나 Check-out은 낯 12시이다.  많은 휴가객들이 이 6시간 때문에 곤욕을 겪는 경우가 많다.  바로 Luggage 때문이다. 거의 매일 호텔 로비는 그래서 Luggage가 즐비하다.

Lunar가 그동안 쌓아온 Fellowship이 진가를 발휘하여 우리 일행은 Favor를 얻었다.  저녁에 뻐쓰에 오를때까지 우린 Check-out을 연장 시킨것이다. Luggage를 옮기는등의 번거로움을 덜게 된것이다.  고마웠다.


이제 편한 마음으로 골프장을 향한다.  오늘은 9홀만 라운딩하고 오후에는 떠날 차비를 해야한다.  C 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어제 미리 얘기한데로 회의에 참석하기 때문에 오후 늦게 출근한다는것을 알고는 있었다. 그래도 뭔가 허전하다.  지난 며칠간이라도 정들었기에 다음 만남을 기약하는 인사라도 나누어야 하는데......

결국 이번 여행에서는 M은 못만나고 내년을 기약해야 한다.  C 가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녀 역시 우리 일행을 몹시 보고 싶어 했었다고 한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하얀 이빨을 드러내면서 슬며시 미소를 짖는 그녀의 모습이 기억에 생생하다.  그녀의 어머님이 쾌유하시기를 빌어드릴뿐이다.



1번홀에서 라운딩 하기전에 우리 일행과 현장에서 수고하고 있는 스탶들과 작별을 의미하는 사진을 찰칵했다.  형제 자매처럼 또는 나를 아저씨나 삼춘처럼 만나면 반가워하곤 했었는데.  오늘 헤여지면 다시 최소한 365일이 지난후에 재회가 가능한 것이다.

점심시간에 우리 테이블을 시중들던 P 가 어렵게 부탁을 한다.  그동안 우리 부부가 골프장에 들고 다녔던 조그만 물병(보온이 되는)을 갖고 싶다고 어렵게 표현한다.  지난 며칠 사이에 유독히 살펴 보았었나 보다.  Lunar가 웃으면서 "그래 걱정하지마, 그렇치 않아도 너에게 넘겨줄려고 네의향을 물어 볼려고 했었다"라고 하면서 그의 손을 꽉잡았다.  물병에 Ice를 넣고 찬물을 매일 아침 그가 담아 주었었다.  Button을 누르면 흘러나오는 물을 받아먹는 그모습이 무척이나 부러웠었나 보다. 그는 물병을 집에 가지고 가서 사랑하는 아들 아니면 식굳들에게 들려 줄것임을 나는 안다.  조금은 걱정스러웠던 그의 얼굴이 환해진다. 우리가 도와줌으로 인해 그들이 편하고 잘살수 있는 방법만 있다면 우리 역량껏 해주고 싶은 마음은 항상 있다.  그래서 어쩌면 매년 굳이 큐바, 그것도 같은 호텔을 찾아가는 이유이다.






식당을 나오면서 Liuva를 찾았다.  웬일인지 보이지 않는다. 아직 퇴근 시간은 아닌데....
Head Cook인 Enesto에게 사유를 말하고 그녀에게 인사를 대신 전해 달라고 부탁을 하고 식당을 나와 수영장을 따라 호텔 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수영장 끝쪽에 있는 호텔방에 거의 다달았는데 누눈가가 우리일행을 뒤에서 부른다. 바로 Liuva였다. 되돌아가 Lunar는 그녀와 깊은  hugging을 하고 나머지는 인사로 악수를 하고.....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인다. 두툼하고 이쁘고 정많은 여자, 지나가는 여행객인 우리 일행을 가족이상으로 돌보아 주고 이제는 헤여지는 아쉬움에 눈가에는 눈물이 고이고 있다.  주방장 Enesto도 같이 헤여짐을 아쉬워 하고 있다.  이것이 서로간에 계산없는 인정인것이다.  이들의 아쉬움을 달래주기 위해서라도 내년에 또 와야 한다는 생각이 마음속에 자리잡는다.  순간을 사진으로 포착했다.

시간이 되여 Check-out을 마치고 뻐쓰를 기다린다.  기다리는 시간만큼 지루한게 없는것 같다.  불과 몇분이 안지났는데도 자꾸 시간을 잰다. 뻐스가 호텔 정문으로 들어 오는게 보여 우르르 달려갔다.  기다리던 뻐스가 아니고, 하바나 여행 나갔던 뻐스가  되돌아 온것이다.
약속 시간은 거의 40분이 지났다.  그때서야 뻐스가 도착하여 Luggage와 골프클럽을 짐칸에 넣고 ....

공항 터미날에서 10시경에 떠나는 비행기를 기다리면서 낯에 준비해온 햄버거를 꺼내 먹는다.  준비안하면 꼼짝없이 저녁을 굶는다. 매년 해온 경험이기에 Lunar는 큰 플라스틱 그릇에 우리 일행이 먹을 양의 햄버거를 호텔안의 Beach쪽에 있는 Snack Bar에서 만들어온 것이다.  처먹을 양념이 없어 대신에 A-1 소스를 넣었기에 맛이 좀 그렇다.



공항에 내려 Custom Clearance를 통과 하는데 S 여사가 신경 쓰인다.  그녀는 캐나다거주인이 아니다. 방문객이기에 혹시나 필요 이상의 질문을 받을 경우를 대비하여 그녀의 앞뒤로 Lunar와 내가 섰다.  생각보다 통관은 쉽게 간단한 질문, 즉 큐바 여행을 같이 다녀온다라는 내용을 설명듣고 내 보내주었기 때문이다.

토론토 공항은 여전히 동토의 찬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Mr.Choi부부는 예약된 한국인이 운영하는 택시를 타고 먼저 떠났고, 우리 일행 4명은 긴줄뒤에 차례를 기다리면서 발을 동동 굴려야 했다.  Luggage가 많기에 공항 리무진으로는 안돼 공항 미니 택시를 타야 한다. 여행객들이기에 거의가 다 우리와 형편이 같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기에 시간이 오래 걸렸다. 약 한시간을 기다린후 마침내 우리 차례가 되여 허겁지겁 짐을 싣고 시내를 향해 달린다.  도로는 눈으로 뒤덮혀 조심스럽게 운전수는 운전을 한다.  오후 늦게 부터 다시 눈이 날리기 시작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집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잠자리에 들무렵 시간은 새벽 4시경을 가르키고 있었다.  몸은 좀 고달펐어도 이번 여행은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어 기억에 오래 남을 것이다. 감사.
 



2월16일(일요일),2014.

오늘은 처음보는 여행객들과 새로운 Fellowship을 즐긴 하루다.

오늘은 팀을 다시 짰다. Mr.Choi부부와 Lunar, 그리고 나와 Lyon. 한결 쉽게 골핑할수 있을것 같다.  먼저 Mr.Choi부부팀이 Tee off 하고, 그뒤를 이어 우리 차례가 됐다.
Tee Box에 올라 준비를 하고 있는데, Eddie가 나에게 와서, 다른 두명과 같이 Playing 할수 있겠느냐고 물어와, Yes했다.  그는 젊잖은 두명의 신사들이라고 소개를 해준다.

이들은 우리와는 달리 Blue Tee에서 치겠다고 한다. 고집을 피울필요가 없기에 " If you guys like to play from blue tee, go ahead" 라고 사인을 보냈다.

볼을 때린후 Fair way를 걸으면서 얘기가 시작됐다.  나와 아들의 소개가 끝난후 자기네 소개를 해준다.  자기네들은 동업으로 현재 Havana에서 International Trading(수출, 수입)을 하고 있다고 했다.  주로 의료기구들을 취급한다고 했다.  오늘 아침 일찍 Havana에서 출발하여 이곳에 도착 했다고 한다.

일본국적의 Mr. Dakahashi씨는 현재 37년째 이사업을 큐바와 하고 있으며, 일년중 절반은 일본에서,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Havana,Cuba에서 생활하고 있다는것이다.  큐바생활을 무척 좋아 한다고 자랑(?)이다.  또한 친구는 알젠틴 출신으로 나이가 더 어려 보인다.  그의 이름은 Gregorio란다. 다카하시는 영어도 잘했다. 그러나 Greg은 완전 절벽이다.  주로 다카하시와 대화를 자연적으로 많이 하게됐다.  골핑도 다카하시가 더 잘 하는것 같다. 나와 연배가 비슷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반 9홀은 골프가 잘됐다. 4 Pars, 4 boggies, 그리고 버디 한개, 나로서는 굉장히 좋은 프레이다. 아들 Lyon은 많은 경험이 필요로 하는 Novice임을 오늘도 보여주는 골핑이다.  그래도 내가 아는데로 훈수를 해주면 곧바로 Correction이 돼여 볼의 Distance가 길어지는것을 금새 느낄수 있었다. 역시 젊은이는 힘이 있다는것을 본다.

Back 9 홀에서 Lyon은 Give up하고 바로 호텔로 되돌아 갔다.  끝까지 같이 했으면 좋았을텐데....Blue Tee로  옮겨 그들과 합류해서 플레이를 했다.  white tee에서 갑자기 Blue Tee로 옮겨 볼을 때리니 약간 Pressure가 있었던 것을 느낀다. Tee off에서 약간 흔들렸다.  아마도 이들과 같은 Distance를 해야 겠다는 마음이 생겼던것 같다.

두개 Hole을 지난후부터는 안정을 되찾아 내 Pace를 찾아 즐긴다.  최소한 이들과 라운딩 하는데 못쳐서 피해를 주지는 않는것 같아 좋았다.  Tee Box에서 때린 볼의 Distance도 거의 비슷했고,.......


Greg은 오늘 이곳에서의 골핑이 처음이지만, 다카하시는 자주 이곳에 온다고 했다.  큰 사업은 아니지만 그래도 불만은 없다고 이곳의 생활을 담담해 얘기 해준다.  캐나다에 대한 이모저모를 그도 물어본다.  나의 이민역사를 끼워서 살아온 얘기와 현재 캐나다에서 살아가는데 만족하고 있다는 내용으로 .......

정들자 이별이라더니 어느덧 18홀 라운딩이 끝나, 아쉬운 작별을 해야 했다.  우린 다시 카트를 타고 호텔로 돌아가지만, 이들은 다시 택시를 불러 Havana까지 되돌아 간단다.
지구는 좁다는것을 느꼈다.  우린 이곳으로 부터 북쪽의 동토의 나라에서, Greg은 멀이 남쪽에 있는 알젠틴에서, 다카하시는 조국한반도 바로 옆의 일본에서 이곳을 날아와 Fellowship을 한것이다.  발달된 문명의 덕택으로 봐야 할지?

오후에 Beach로 Lyon, Lunar 그리고 S 여사화 함께, 그동안 해왔던데로, 수영을 갔는데, Beach한복판에 삼각형의 조그만 Yellow기가 꽂여 있었다.  파도가 어제와는 다르게 커 보인다. 그래서인지 어제 보다는 피서객들이 적은것 같아 보인다.  Lyon은 수영보다는 책을 읽는데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는 이번 피서기간동안에 5권의 책을 읽는다고 했다.  그러나 그에게서 종이로 된 책은 전연 볼수 없다.  그가 소유하고 있는 전자기기안에 다 입력해서 필요할때 꺼내 읽기때문이다.  벌써 Palm Tree잎으로 지붕을 씌원 만든 원두막(?)안의 Beach 침대에 드러누워 독서 삼매경에 빠져 있다.



수영과 책읽기도 잠깐으로 끝났다. 바람이 더 세지더니 모래가 흩날리기 시작하여 더이상 머무는것은 무리였다.  금새 모래사장에는 피서객들의 모습이 많이 사라진다.





2월15일,2014.

아침 일행이 골프가는 시간에 맞추어 Lunar와 S 여사는 Havana 여행을 떠나기 위해 같이 호텔정문에서 뻐스를 기다렸다.  시간이 되자 뻐쓰가 와서 Guide가 문을 열고 들고 있는 여행자 명단에서 두사람의 이름을 확인한다. 둘은 뻐쓰에 올랐다.  S 여사가 좋은 기억을 만들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매일 해왔던데로 남아있던 일행은 골프장 Gate를 향해서 걸었다. Chain-link로 된 울타리안의 골프장안에는 Cart가 벌써와서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는게 보였다.  우리 일행이 그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우리일행을 보고, 쏜살같이 Gate로 와서 열쇠로 물을 열고 우리를 반긴다. 우리 일행 4명을 카트에 태우고 그는 다시 클럽 하우스를 향해 달린다. 마치 자가용 운전수를 고용한 기분이다. 고맙다는 생각뿐이다.





여러모로 골핑하는데 편리를 봐주는 Staff들의 호의에 다시한번 고맙고 감사하다는 생각이 오늘따라 깊이 든다. 첫번째 Tee Box에서 다른 골퍼들에 대한 엄격한 체크를 하는것을 보면서, 우리팀에 대한 그들의 대하는 태도에서 확실히 많이 느꼈다.




18홀 모두가 Layout자체는 토론토 어느 골프장에 비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기자기하게 잘 설계되여 있지만, 그중에서도 Par 3 인 8번홀과 Par 4인 18번홀의 경관은 말로 표현 할수 없을 정도로 주위경관이 환상적이다.  Tee Box에서 Putting Green을 바라보면, 왼쪽으로는 광대한 대서양의 푸르다 못해 검은색을 띄는 바닷물이 바람에 넘실거리고, 오른쪽으로는 파란 Green으로 덮혀 있는 골프코스들이 한장의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아들녀석은 초보자이기에 이홀에서 더 많이 헤매고, Mr. Choi Couple또한 열심히 해 보지만 마음데로 되지는 않는것 같다. 대신에 우리 모두는 주위 경관의 황홀감에 빠져 감탄 뿐이다.

8번홀의 Tee Box에서 그린까지의 거리는 약 130야드정도이다.  그러나 클럽은 최소한 2개 정도 높혀서 선택해야 한다.  나같은 경우에는 아이언 7번을 잡고 때린다. 그래야 130야드정도 맛바람을 헤치고 공이 그린에 안착할수 있다. 그러나 방향이 왼쪽으로 틀어지면 대서양으로 날아가 버리고, 오른쪽으로 날면 다른 홀들의 Fairway로 또는 입을 딱벌리고 볼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Sand Bunker에 떨어지기 일수이다.  볼을 날려 보내는 정확한 실력 보다는 오히려 운에 맏기고 때리곤 하는 경우가 더 많았었다고 하는게 옮은 표현일것 같다.
오늘은 믿기지 않게 운이 좋아 날아간 볼이 Green에 안착하여 어려운 Par를 했다.  하늘을 높이 날아 올라갈것 같은  지상 최고의 기분이다.

동계 올림픽이 한창이지만, 이곳에서는 TV시청 상태가 좋치도 않지만, 어쩌다 중계방송을 보아도 거의가 다 스페인어로 설명되기에 귀머거리같은 기분이다.  캐나다팀이 선전하는 광경을 볼때는 기쁘지만, 그래도 두고온 조국이 더 잘 하기를 바래는 마음은 어쩔수 없이 나는 한국인임을 말해 준다고 하겠다.  그러나 TV에서는 메달을 놓치는 아까운 순간만 보인다.  다음 4년후에 평창에서 열리게 된다는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잘 해야 할텐데....
세계의 유명한 미디아들이 피겨 스케이팅의 여왕 Yuna Kim은 금메달 획득할것에 의심이 전연없다라고 연일 알리고 있기에 나도 그렇게 믿고 있다.

아들과 함께 다시 Beach로 나갔다.  수영도 했지만 Sun Tan을 약 한시간정도 했을때다. 피부가 벌겋다.  피부가 간지럽고 약간 불편한감이 든다. 아마도 Burn한것같다.  더이상 Sun Burn을 화상을 입을것 같아 서둘러 Beach를 나왔다.




Beach바로 옆에 있는 Snack Bar에 들렸다. 그곳에서는 hamburger, Hotdog, Pizza 그리고 Rum이 들어있는 음료수 등을 제공한다.  이름을 기억못하는 두툼한 Cook은 뭐가 그리도 좋은지 계속 흥얼 흥얼대면서 피자를 굽고 햄버거를 만들어 준다.  그런데 오늘은 못보던 Pop Corn 기계가 열심히 팦콘을 튀기고 있는게 아닌가.  내옆에는 배가 나보다 더 많이 튀어나온 사내가 겨우 가릴곳만 가린채 주문한 햄버거를 기다리고 있다.  휴양지이기에 이런 광경을 보아도 시선을 끌지 않는다.

저녁 먹을 시간이 되여 식당에 가서 앉아 있는데도 아직까지 Lunar와 S 여사는 눈에 안보인다.  한창 Dish를 채워 먹고 있는데 드디어 두여인이 앞에 우뚝 나타났다.  "구경은 어땠어?"
"길거리에 꽉찬 차량에서 나오는 매연 때문에 숨을 제대로 쉴수가 없었어" 그러면서 구경한 내용을 벌려 놓는다.





큐바 정부의 규제가 작년부터 완화된뒤, 개인 상점들이 눈에 띄게 많아졌지만 쓸만한 물건은 아직없고, 길거리가 깨끗히 정화되여 있었단다.  그렇게 많던 길거리의 Prostitute들도 말끔히 없어졌고, Flea Market도 겨우 명목만 유지할 정도로 정리 됐다고 한다.







큐바에서는 여전히 혁명전사, "체게바라"에 대한 큐바인들의 열망은 아직도 펄펄 끓고 있음을 보았다고 설명해준다.  혁명은 카스트로와 같이 했어도 그는 다시 고향인 알젠틴으로 되돌아갔기에 그에 대한 아쉬움이 이상속에서 헤메고 있다는 증거인것 같다.

휴식시간에는 유명한 소설가 헤밍웨이가 이곳 하바나에 머물면서 즐겨 찾았다고 알려진 Bar에 들려 그가 즐겼다고 전해지는 "모이또"를 한잔씩 마셨다고 자랑이다. 전에 맛을 보았을때는 별로 였던거 같았었는데....역시 느끼는 감정은 남자인 나와  많이 다른것 같다.









각종 역사적 건물, 혁명탑, 미국의 국회의사당을 닮은 건물, 그리고 Catholic Church, 카스트로가 혁명시 하바나항에 타고 왔다는 Boat가 진열된곳 등등 여러곳을 보았다고 설명해준다. S 여사에게는 다시 올 기회가 없는 큐바 여행이었기에 Havana여행은 기억에 오래 남아있을 것이다.

Monday, February 24, 2014

Lunar의 영원한 짝 S 여사, 짧은 2주간의 만남 마치고 아쉬움속에 딸네집으로 귀환

2주간의 시간들이 눈깜짝 할사이에 지나가 버렸다.  14일전 공항에서 만났을때는 많은 시간동안 Lunar와 S 여사는 원없이 동거 동락하면서 그동안의 살아온 생의 얘기들을 나누면서 꿈많았던 십대후반의 소녀들로 돌아가 기억을 되찾을려고 했었을 것이다.

나는 S여사를 이곳에 70년대 중반에 이민온후, 90년대 초에 우연한 기회에 이곳 토론토에서 처음 만나 친교를 나누어 왔었다.  Lunar의 경우와는 많이 다르다.  S여사와 Luanr는 꿈많은 소녀시절부터 거의 55년지기 친구이다.

서울을 방문할때는 거의 그녀의 집에 머물면서 같이 기억에 남을 시간들을 많이 만들었었다.  최근기억으로는 2년전 우리 부부가 고국방문했을때, 그곳에서 또다른 3 couple의 친구부부들과 어울려 이름도 생소한 청산도를 방문하여 "Slow City"라는 이미지를 피부로 느꼈고, 또 영화 서편제 촬영지가 이곳이라는 새로운 사실도 알았었다.

토론토에서 머무는 마지막날, 즉 일요일 뉴욕행 비행기는 오후 3시라서 교회 예배에 참석할수 있었다. 그녀로서는 무척 마음이 편한 교회참석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우리와 달리 교회에서의 삶이 생활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꾸준한 신앙인이었기에  Lunar의 마음도 같은 느낌이었으리라.  교회에서의 친교시간은 짧을수밖에 없었다. Lunar의 친지들도 반가히 인사하고 반가워 한다. 이민자들의 교회생활의 이모저모를 S여사는 환한 웃음을 띠면서 교제하고, 또색다른 분위기속에서 생활상을 눈여겨 느꼈을 것이다.

미국행 비행기를 이용하는 절차는 항상 까다롭다는 것을 잘알고 있기에 2시간 이상을 남겨놓고 짐을 꾸려 공항으로 달렸다.  정작 S 여사의 친구인 Lunar는 공항에 갈수 없는 조그만 사고 가 터지고 말았다. 냉장고의 상태가 안좋아 어제 오후에 Repair를 요청했었는데 공항을 향해 떠나야할 그시간에 Technician이 도착하여 나혼자만 S 여사와 같이 차를 공항으로 몰았었다.  Terminal 1의 구조는, 미국행 또는 국내선 여행객들이 이용하기에 생소한 편이었다.  보통때는 주로 Terminal 3를 주로 이용했었기에, 주차장에 Parking 부터 시작하여 생소한 곳을 찾아 헤매는 혼잡이 일어났었다.

지정된 Check-in counter를  찾아 줄을 서고, 다시 차례가 되여 S 여사와 함께 Counter 앞에 서서 여권, E-ticket등을 보여 주고, Clerk에게 S 여사의 검색대 통과를 돕기위해 내가 그녀의Interpreter로 Custom Clearance Point 까지 동행을 할수 있도록  협조를 설명했더니 Application에 나에 대한 ID를 기록하고 작성해 준다. S여사 혼자 까다로운 검색대 통과를 마음속에 걱정을 했었는데 의외로 쉽게 풀려 같이 검색대가 있는 안으로 들어갈수 있어 마음이 가벼웠다.



Custom Clearance Counter에서 미국측 검색원은 나와 S여사와의 관계, 토론토에서 머무른 기간, 미국에서 머물곳, 휴대한 돈액수, 그리고 마지막에는 검색원이 나에게 확답을 요구한다. "지금부터 내가 묻는말을 그대로 S 여사에게 전하세요."다.   그대로 S 여사에게 전달하고 다시 답해주고.....질문내용은 Perspective에 따라 방향이 달라질수 있겠지만, "과일반입 있는가?, 농장방문했었는가? 미국에 들고 들어가는 돈액수....등등" 극히 평범한 질문이다.  관련 입국서류에 도장을 꽉 찍으면서 건네주고, 이곳까지 동행가능하고 지금부터는 탑승Gate를 향해 혼자 가야 한단다.  아쉬운 작별과, 제대로 대접해 드리지 못한 미안함이 갑자기 엄습해 온다. 그러나 오래 기다릴수가 없었다. 바로 뒤에 또다른 승객들이 줄을 서 있기에.... 기억에 남겨둘 사진한장 만들지 못하고 그녀는 출국장으로, 나는 주차장을 향해 되돌아 왔다.  서로가 가던 발길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눈빛이 마주쳤을때 손짖으로 잘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갑자기 마음이 허전해 진다. 그래도 그녀가 무사히 가는것을 직접 목격하여 마음이 가볍다. 집에서 이곳에 신경을 쓰고 있을  Lunar에게 전화해 상황을 설명하고, 차를 집으로 달렸다.

저녁 6시반경이 지나서 전화가 왔다. 물론 S 여사로 부터다. 무사히 도착하여 딸네집에 도착했단다.  마음이 이제는 완전히 놓인다.

http://www.youtube.com/watch?v=bcm3UFKcNk0

공항으로 떠나기 40분전에는 콘도 뒷뜰로 나가 호숫가에 모여 있는 백조와 갈매기떼들을 상대로 빵을 던져주는 마지막 급한 외출을 해서 또다른 추억을  만들었었다.  이빵은 큐바에서 되돌아오던날 저녁식사용으로 만들어 온 것들이다.  큐바공항에서 스낵이 있지만, 너무도 비싸고 또 맛도 없어 준비를 해왔던 것인데, 먹고남은것을 버리기 아까워 지금까지 냉장고속에 보관 했었던 것이다.
갈매기떼들이 금새 구름처럼 모여들어 재잘거리면서 멀리 던지는 빵조각을 나꿔챈다.  자유자재로 날개를 펴고 날아가면서 빵을 쪼고, 멀리 사라져가는 그여유로움(?)이 부럽게 느끼기도 했었다.  소녀시절의 그천진난만한 모습으로 되돌아가 경쟁적으로 빵조각을 허공에 날리면서 까르르 웃어제끼는 그모습에서 나자신도 까까머리 소년때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세월의 무상함도 뒤따라 엄습해 왔었다.

S여사와 같이 있는 동안에는 식탁에 더 많은 음식이 올려지곤 했었다.  나는 " 여기에 오래 계세요. 덕택에 식탁이 풍부해 지곤 하니까요 그동안 식탁이 빈약했었거든요"  그러면 " 얘 네 남편 잘 봉양해", " 속모르는 소리 말아라. 하루3끼 차려먹는집은우리집 말고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S야"  그래서 또한번 웃곤 했었다.

오늘 이시간 이후부터는 S 여사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여운 손자 손녀들과 어울려 또다른 세상의 시간을 보낼 것이다.  미국에 머무는 동안 건강 하시기를 빈다. Lunar가 무척 허전해 하는 눈빛이다.  특별했던 우정의 만남으로 또 그런 기회를 기다릴것이다. 아니 기회만 있으면 많이 만들어야 한다. 더 늦기 전에.


Saturday, February 22, 2014

Clappison Wood AreaTrail Walk on Saturday(2월22일)

































하늘은 마치 천고마비 지절의 하늘처럼 맑고 파랗다.  IKEA에서 반갑게 만나 대원들이 모여 이른 아침을 먹고, 두대의 차에 분승하여 고속도로를 달렸다.  바람이 무척세다. 차가 많이 흔들린다.  대원들은 오랫만에 걷게 되는 오늘의 Trail Walk에 대한 기대감이 상당했었나 보다.
한대원은 며칠전 구입한 Crampon과 Gaiter를 밤새 끼워보고 하느라 잠을 설쳤다고 오늘의 산행에 기대감을 많이 보인다.
아직도 많이 쌓인 눈때문에  길가 Shoulder Parking장을 그냥 지나치고 한참을 더 달렸는데, 주위 환경이 너무도 판이하여 뒤늦게 다시 차를 돌려
되돌아 오면서 천천히 주위를 살펴 겨우 찾을수 있는 어려움도 있었다.  차의 한쪽 바퀴는 눈속에 처박고, 다른 한쪽은 아스팔트끝쪽에 세우고 주차완료.  K여자 대원님의 오늘 산행의 일정을 무사히 마칠수 있도록 간구가 곁들인 창조주와의 소통을 함으로 산행을 시작한다.
오늘은 특별한 대원 한분이 참석했다. Lunar의 55년지기 친구인 S 여사가 서울에서 날아와 같이 Trail Walk에 동참한 것이다.
그녀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한국에서는 겨울 등반을 거의 안해보다 이곳에서 겨울 등반의 경험을 얻게 되는 것이다.

Trail은 눈이 녹기 시작하면서 자칫하면 미끄러지기에 안성마춤으로 긴장감을 갖게 한다.  대원들은 Crampon을 발에 끼우고, 바지가랭이의 보호를 위해 Gaiter를 입고, 안전하게 발걸음을 내딛는다.   계곡을 오르내리면서 언덕을 오를때는 내딛는 발이 미끄러지는 아찔함도 연출한다.  내리막길에서는 미끄럼을 타듯 미끄러지는 와중에서도 중심을 잡고 무사함은 그동안 쌓아온 등산의 Know-how를 대원들이 한껏 활용한 결과인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