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August 22, 2016

사드 배치 반대와 남한의 그림자 정부 - 쪽집게로 집어서 북쪽으로 보내버리자.

항상 좋은 소식을 전해 주시는 친지분이 또 고국의 실정을 고발하는 내용을 보내줘서 여기에 옮겨서, 이블로그를 읽어보는 친지들과 함께 나누고져 옮겨 놓았다.

요즘 "대륙의 딸들"이라는 제하의 중국의 모택동 지배하에서 문화혁명을 한답시고, 십대의 아직 철도 안들은 어린 아이들을, 모택동이 꼬득여, "장유유서"도 없이 짐승 잡듯이 나이든 사람들을 부르조아 구룹이라고 구타하고, 자아비판시키고...., 결국에는 열성 공산당원들로 충성했던 자들마져도 나중에는 없는 구실을 부쳐 자아비판시키고, 파멸의 용광로 속으로 밀어 넣는, 끔찍한 현대사의 일부분을 읽으면서,  몸서리를 치지 않을수 없었다. 지금 중국에서 추앙받고 있는, 근대 중국경제의 기초를 닦은 등소평까지도 철저히 모택동은 이단자로 몰아부쳐 실각시킨 끔찍한 모택동의 공산주의 본모습을 보았다.  상상만 해도 끔직하다.

이북의 김일성 왕조의 3대가 지금 이북에서 벌이는 작태가 모택동이 했던, 인간 이하의 철저한 공포정치와 마음에 들지 않은 족벌들을 다른 사람들을 시켜 비난하도록 선동하여 결국 자신의 손에는 피한방울 묻히지 않고, 처리해 버리는 어머어마한 음모들이 난무하고 있는데, 남한의 철부지 좌파들과 종북 국케의원들의 행동을 보면서, 그들에게 당부하고 싶은게, 다름아닌 "대륙의 딸들(Wild Swans)" 소설을 읽어 보라고 하고싶다.  작자는 장융으로 그가 3대에 걸쳐 직접보고, 참가하고, 당했던 모택동과 그일당의 모략을 느껴보라고 권하고 싶다. 특히 "사드"설치를 반대하는 못된 인간들은 꼭 읽어 보기를 권한다.

대한민국의 오늘이 어떻게 이룩된 결과인데.... 언론들이 자꾸 부추기는 그의도 뭣인지를, 정말로 가슴을 조리게 하고 있구나.  여기에 옮겨논 내용이 그나마 그일부라도 파헤쳐 국민들에게 알리려는 그노력을 깊이 사고 싶다.


- [이주천의 추적] 국내의 지하에 그림자 정부(Shadow Government) 존재하는가?


대한민국 내에는 레닌의 볼셰비키, 월남의 베트콩 같은 ‘그림자 정부’(Shadow Government) 존재할 수도
사드 배치. 그것은 절체절명의 안보위기에 처한 최고 통치자로서 박근혜 대통령의 고독한 결단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사드 배치 걸정으로 인한 남남(南南) 갈등의 고질병이 재발되었는데, 이것은 북한 공산집단이 쌍수를 들어 환영하는 분위기에 다름 아니다.


▲ 이주천 원광대 사학과 교수·미래한국 편집위원
그 신속한 조직력과 맹렬한 반대, SNS를 통해 퍼지는 괴담 등으로 미뤄 볼 때, 국정 운영을 교과서에서 가르친 민주적 방식으로 하기 어려운 한계점에 도달했다는 느낌은 필자만의 소회는 아닐 것이다.

벌써 한두 번이 아니다. 이런 사태의 악화는 악의적인 선전선동과 함께 상당한 자금력과 막강한 조직력을 동원하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이다. 추정이지만, 남한 내에는 이런 일을 지시하고 지령하는 지하의 그림자 정부(Shadow Government)가 존재한다는 심증을 굳히게 만들었다.

그림자 정부는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한 체제 전복을 목표로 정치·경제·사회적 혼란을 조장, 혁명적 상황을 유발하여 이를 기회로 친공 연북(聯共)정권을 수립하려는 반체제적 성격을 띠는 것이다.

해외의 역사적 사례를 보면 대표적인 두 나라로 ①20세기 초 볼셰비키 혁명 전야의 러시아와 ②패망한 베트남을 들 수 있다.

1917년 봄 짜르 전제정이 무너지자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사회민주주의 세력이 정권을 잡았을 때, 거리의 치안은 공산주의 계열인 볼셰비키-멘셰비키와 일파들이 장악하여 러시아는 2중 정부형태를 띠었다. 이 때 각 지방의 소비에트가 행동대 역할을 했으며 레닌이 이끈 볼셰비키가 그림자 정부로 영향력을 행세했다.

그러다 군부 쿠데타가 실패로 끝나자 무장한 소비에트는 레닌과 트로츠키의 설득으로 무장봉기를 결행, 케렌스키 임시정부를 무력으로 전복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그림자 정부가 실질적 정부로 개편된 것이다.

그 당시 러시아에서 좌익, 소위 공산주의-사회주의 계열은 러시아 총인구의 4%에 불과했다. 물론 서구식 의회민주주의가 발전하지 못하고 공산주의가 득세하게 된 이유는 짜르 전제정의 폭압정치도 있었지만 러일전쟁과 1차 세계대전의 패인도 좌익 득세의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4%에 불과한 공산주의자들이 혁명 성공

패망한 월남의 경우도 베트콩은 민족해방전선의 구호로 임시정부 행세를 했고 특정지역(구치)의 주민들을 땅굴을 파서 지하에 숨겨 투쟁을 계속했고 결국 하노이의 공산화 전략에 큰 역할을 수행했다. 베트콩은 월남에서 10여 년 그림자 정부 행세를 한 것이다.

소비에트와 베트콩의 공통점은 현존 정치체제에 대한 혁명적 전복을 의도하면서 무장력을 갖췄고, 확고한 지지계층(주민)과 아지트(근거지)가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러시아나 월남의 경우처럼 남한에도 이와 같은 그림자 정부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는가? 실마리를 1987년부터 제시해 볼까 한다.

1987년 6월 항쟁, 소위 넥타이 부대의 저항 이후 우리 사회는 민주화가 급진전되었고, 그 이후 특별하게 민중항쟁이 발생할 소지는 거의 없었다. 대통령 직선제 및 5년 단임제와 도지사 및 시장들의 직선제 실시로 선거민주주의가 무난하게 정착되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 일본계 3세 미국인 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한국 사회를 바라봤다면,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완성되었으니 그야말로 역사의 종말(The End of History)이라고 침이 마르게 찬양했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 당시 한국인들은 민주화의 완성이 역사발전단계의 마지막 단계라고 신봉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사회는 축제 분위기였고 국운(國運)이 날로 상승하여 온 세계가 우리를 축복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축제의 들뜬 분위기에 난데없는 경고장이 날아들었다. 양동안 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사상 전공)가 ‘우익은 죽었는가?’(1988)라는 충격적인 글을 <현대공론>에 게재하여 사회적 풍랑을 일으켰다.

당연히 대부분의 국민들은 민주화가 발전되어 가는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반문했지만, 나라의 앞길을 염려하는 우익 인사들에게는 심각한 성찰을 안겨줬다. 핵심 내용은 우리 사회에서 좌익세력의 위험성이 도외시되면서 각계각층에서 좌익의 힘이 매우 커졌기에 사회적 통제가 어려워져 좌익 정권의 등장은 시간 문제라는 경고였다.

양 교수의 지론은 볼셰비키 혁명의 경우 좌익세력이 러시아 총인구 4%가 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공산혁명이 성공한 것으로 미뤄 우리 사회는 좌익세력이 인구의 4%가 이미 넘어섰다는 주장이었다. 언제든지 좌익세력이 평화적으로 집권에 성공할 수 있다는 경고의 메시지였다.

설마 그렇게 될 리가 있을까? 그러나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속담이 있듯이 설마가 역시 문제였다. 그로부터 꼭 10년 뒤인 1997년 말 여당 이회창 대선 후보가 야당인 김대중 후보에게 패배하는 믿어지지 않는 일이 벌어지자 ‘우익이 죽었다’는 양 교수의 예언이 공염불이 아니란 점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좌익세력에게는 평양의 6·15 공동선언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2002년 대선에서 재집권이 필수적이었지만, 집권당 노무현 후보는 여론조사에서 시종일관 고전을 면치 못했다. 튀는 발언을 서슴지 않는 촌티 나는 ‘경상도 사나이’는 대통령감이 아닌 것처럼 보였고, 재수생 이회창의 복수극은 달성되는 것처럼 보였다.

▲ 사드 배치에 대한 국내 좌익들의 조직적이고 신속한 반대 움직임은 대한민국 내에 이런 일을 배후조종하는 그림자 정부가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심증을 갖게 한다. 과연 이자들이 6/25를 겪었거나 알고 있을까?
그런데 그해 6월 13일 훈련 중이던 주한미군 장갑차에 여중생 두 명이 우연히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교통사고는 효순이 미선이 미군 장갑차 사건으로 불거지면서 전국적인 ‘반미 촛불시위’로 번졌으며, 급기야 “백악관에 사진을 찍으러 가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은근히 반미감정을 선동한 노무현 후보의 당선을 성공적으로 지원하는 효자 노릇을 톡톡히 했다.

그 이후부터는 국정의 중요 사안이나 대형사고 때마다 언론이 지원, 충동질하고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과 조계종 승려들이 반정부 선동 미사와 법회를 하고, 교육계에서 청소년을 동원하는 지원사격이 이어졌다. 그럴 때마다 대규모 시위에서 복면을 쓴 전문 시위꾼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두 번째 터진 미국산(産) 쇠고기 광우병 사건은 2008년 초 이명박 정부가 막 출범한 시점으로 국정 운영에 큰 타격을 안겨줬다. “미국산 수입 쇠고기를 먹으면, 뇌에 구멍이 뚫리는 광우병이 걸린다”는 해괴망측한 괴담이 여과 없이 전파매체를 타고 전국에 방영되면서 국민들을 흥분시켰다.

세 번째로 터진 2014년 세월호 사건은 안개로 인해 날씨가 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주도 항해를 강행하다가 부주의로 사고를 당한 일종의 해상안전사고였다. 선장과 선원들의 무책임과 부주의로 사망자가 증가했을 뿐 박근혜 대통령의 잘못은 아니었다. 박 대통령이 안산 단원고 학생들의 제주도 수학여행을 권장한 것도 아니었다.

광우병 사태에는 MBC가 국민 선동의 선봉장이 되었는데, 이번에는 공영방송 KBS가 앞장서서 침몰하는 배를 24시간 생방송하면서 무슨 대란(大亂)이 일어난 것처럼 대중을 충동질했다. 그리고 한 달 이상 언론들은 세월호 사건을 경쟁적으로 대서특필했다.

그 뒤에는 천주교 신부와 조계종을 위시한 성직자들이 신자와 신도들을 선전선동하고, 일부 전교조 교사들의 시국선언이 줄을 이었다. 여론에 몰린 국회는 청문회를 열고 특별법을 제정하고 특조위를 구성하는 등 난리법석을 떨었다.

네 번째, 사드 배치 문제도 광우병 사태와 유사한 행태를 보이고 있다. 어김없이 SNS 상에서 괴담이 유포되었다. 유해한 전자파로 인해 성주 참외밭이 농사를 망친다는 둥, 반경 몇 ㎞ 내에 돼지 두 마리만 살아남았다는 둥, 비용을 국민들이 다 부담한다는 둥, 중국을 자극하여 무역 제재를 받거나 화장품 장사가 안 될 것이라는 둥, 성능이 형편없을 것이라는 둥 별별 의혹이 제기되었다.

또 흥분한 주민들 집회에도 외부 불순세력이 침투하여 주민들을 선전선동했다. 국무총리 일행을 6시간 이상 감금하고 폭력 행사를 하여 경찰청장의 이마가 터지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사드 배치는 2년 전부터 주한미군에서 우리의 위중한 안보 상황을 고려하여 강력하게 권고한 것을 박 대통령이 결단을 내린 것이다.

시기적으로 졸속 결정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결정이 늦은 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민이나 국민들과 충분히 협의나 공감대를 형성하지 않았다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북한의 핵미사일을 막는 데 있어 막대한 시간이 허비되는 주민투표나 국민적 공감대를 위해 끊임없는 토론이 필요한 것인가? 아니면 헌법에 의해 국민들로부터 위임받은 국권 수호에 대한 의무를 신속하게 수행하는 것이 더 중요한가?

좌익이 ‘진보’로 미화찬양되는 세상
해방 이후 무장봉기를 통해 대한민국의 전복을 기도한 좌익세력은 6·25 동란으로 일단 대청소가 되었다. 그 이후부터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7년 IMF 때까지 근 40여 년 간 좌익의 선전선동으로 나라가 뒤집어질 만큼 혼란에 빠진 일들은 거의 없었다.

그 시절이 크고 작은 대형 사건사고들이 없었거나, 태평성대를 구가한 한가로운 시절은 결코 아니었다. 대연각 화재 사고,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있었고, 성수대교 붕괴나 IMF 외환위기를 맞은 적도 있다. 그럼에도 국민들이 공권력에 행패를 부리거나 생떼를 쓰는 일이 많지 않았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집단적으로 억지 논리와 궤변, 온갖 괴담이 인터넷상으로 신속히 유포되면서 대중을 선전선동하여 대규모 시위를 하는 현상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특히 노무현 참여정부가 들어서면서 사회적 분위기는 좌익을 ‘뺄갱이’, 혹은 ‘악’으로 보는 기존의 전통적 분위기에서 좌익을 ‘민주화 세력’ 내지 ‘진보’로 정당화·미화하는 분위기로 뒤집어졌다.

반공 친미 성향의 우익이 ‘보수꼴통’ 혹은 ‘극우’로 매도당하고 연공 친북 성향의 좌익이 ‘진보’로 미화, 찬양되는 세상이 된 것이다. 이런 용어의 사용은 좌편향 언론·방송이 주도한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제2의 건국’ 운운하면서 마치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을 못마땅해 하는 자세를 취했으며, 노무현 참여정부는 “기회주의가 득세하고 정의가 패배한 역사”라는 주군의 역사인식 노선에 따라 좌경화로 나아갔다.

과거 무장반란사건들, 간첩 및 공안사건에 연루된 사건들을 재평가할 수 있는 과거사위원회와 이를 법적으로 재심사할 수 있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마지막으로 보상기준을 마련한 민보상위원회 등을 만들었다.

그리고 대부분이 증거 불충분이나 과잉취조의 불법성, 공권력의 과잉진압 등으로 판정받아 무죄로 재판결을 받았고 작게는 수천만 원에서 많게는 수억대의 보상금을 지불하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지면서 국가재정의 부채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인민혁명당 사건(1964)-통일혁명당 사건(1968)-민청학련(1972)-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1974) 등이 연이어 터졌는데, 검거된 대부분의 인물들이 재심을 받고 상당수가 무죄로 판결을 받았다. 그리하여 북한을 위해 일한 인물은 간첩이 아니라 남한의 군부독재에 항거한 인물인 동시에 통일운동가이자 민족민주주의자를 신봉한 ‘민주화 인사’ 혹은 ‘진보 인사’로 신분세탁, 격상되었다.

문제는 출소하여 자신의 과거 행위를 참회하고 대한민국의 정제성을 확립하기 위해서 고군분투한 인물은 극소수에 불과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대부분 전향을 거부하면서 북한과 연계하여 대한민국을 전복하려 했던 자신의 행위를 미화, 정당화했다.

심지어 어떤 주모자들은 대학에 겸임교수로 임명되어 청소년과 시민들에게 깊은 사상적 영향을 심어주고 자신의 사상을 출판하기도 했다. 이것은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좌경 민주화’가 급속도로 진행된 결과 나타난 부작용으로 볼 수 있다.

이제 좌익들은 사회가 동정, 대접해줌에 따라 과거 행적을 부끄러워하거나 전향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오히려 전향자가 배신자요 비겁자가 된 것이다.

이들이 사회에 진출하여 젊은 대학 시절에 가졌던 종북·반미·반일 대외관을 신봉하고 ‘한국이 미제(美帝)의 식민지’라는 철지난 종속이론을 청산하지 못하는 점은 검거된 통진당 이석기 의원의 좌편향 친북 행각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헌재의 통진당 해산 판결에도 불구하고 사드 배치 반대시위에서 재발된 공권력 훼손과 불순세력의 발호와 준동은 돌이켜보면 통진당 잔당세력에 대한 정부와 국회의 후속조치 부재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날로 기승을 부리는 북한의 대남 사이버 공작과 그림자 정부의 활동을 제대로 억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림자 정부의 활동 제대로 알고 있나?

과거 20세기 그림자 정부가 지하당 수준으로 구멍가게를 운영하는 수준이었다면, 이제는 지하당 규모에서 벗어나 정부 형태를 갖추고 대선 후보를 지목하는 정도로까지 세력이 확대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정부 수반뿐 아니라 내각의 부처 장관도 임명할 수 있을 만큼 각계각층의 전문가들을 포섭하여 인재풀이 풍부해진 것이다.

이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인력과 규모에서 한국 경제의 규모가 커진 것과 궤를 함께하는 것이다. 그림자 정부의 핵심요원들은 거대한 시민단체의 요직을 점령하고 막강한 자금력과 조직력을 바탕으로 수많은 지자체 선거에 개입하여 당선자를 내면서 특정지역에 탄탄한 교두보를 마련했으며 불변의 계급적 지지 기반(노동계, 교육계, 정계, 문화계, 사법계) 등을 갖춘 것으로 보인다.

그림자 정부는 친북반미노선을 흉중(胸中)에 품고, 대외적으로는 자주적 민족민주주의를 천명하면서 다양한 계층의 동원력을 자랑하고 있는 바, 이는 인터넷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시위와 집회에 가담, 반정부 행동을 지령, 고무, 선전선동하는 것이다.

사드 사태는 광우병 사태처럼 번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날이 갈수록 암세포처럼 커져가는 그림자 정부의 암약과 발호에 대해 어떤 위기감을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 그들과 맞설 것인가?

우선 정부는 사드가 배치되는 지역 주민들의 불안감을 씻어주기 위해 소통을 위한 혼신의 노력을 다해야할 것이지만, 떼를 쓴다고 해서 과분한 정부 지원을 무작정 약속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 이 기회에 그림자 정부의 핵심세력들의 범법행위를 조사, 추적, 검거하는 데 배전을 노력을 다 해 줄 것을 당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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