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April 04, 2010

Caravansary와 유명한 Sarhatli지하도시및 교회의 돌문 그리고 식당 Cook의 미소



































March13th,2010. 오전관람.

Cappadocia를 향해 다시 뻐스는 아침부터 우리 일행을 태우고 달리기를 잘한다. 어제 오후에 운전수 아저씨께서 먼지가 앉지도 않았는데도 또 물세차를 해주더니.... 그래서인지 더 잘 달리는것 같은 기분을 준다.
주로 13세기의 Celcuk(Seljuk Empire)시대에 번성했던 Caravan Saray(낙타를 끌고 주고 Silk road를 달려 장사하던 아랍인들)(Caravansary))들이 머물렀던 Agzikarahan Celcuk Inn을 둘러보기위 위해 달린다.
이러한 대상들을 위한 여관은Celcuk(Celsjuk)Empire영토내에는 모두 55개가 있었는데, 대상들의 출발지는 중국본토의 남서부에서 시작하여 이루어진 Silk road를 따라 Afghanistan, Pakistan, Iraq, Iran등의 나라를 거쳐 터키의 Ephesus에서 끝나는 장거리 여행 이었다고 한다. 대상들의 규모는 한팀이 보통 150-200마리의 낙타에 50여명정도의 상인들이 집단을 이루어 행군을 했다고 한다. 사고팔고한 상품은 주로 털제품이 주를 이루었고, Urns 그리고 당시의 사람들이 생활에 필요로 하는 물품들이었다고 한다. 대상들의 하루 이동거리는 지형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었지만, 보통 15-22마일 정도 였다고 한다. 대상들의 장사는 13세기부터 17세기까지 약 400여년 이어졌다고 한다.
대상들은 각나라의 국경을 넘을때마다, 오늘날의 보험이나 마찬가지인, 일종의 통과세를 그지역의 토후들에게 지불해야만 안전한 여행이 보장됐다고 한다. 그지역의 토후 Sultan들은 자기구역내에서 대상들의 안전과 여관 그리고 낙타들의 먹이등 모든것을 일체 책임지고 보호해 주었다고 한다. 특히 Celcuk에서 대상들은 가장 안전한 통과를 보장 받았었단다. 대상들이 여관안으로 낙타와 함께 다 들어오면 여관의 Main gate는 문이 굳게 잠긴다고 한다. 거대한 집단을 다 수용했어야 하니 여관의 규모는 무척 컸었다고 한다. 여관은 모두 석조건물로 규모가 웅대했다. 그안에는 겨울에 거처하는 방과, 여름용 방이 따로 구분되여 있었고, 여관방의 한가운데는 넓은 운동장처럼 공간이 있고, 그중앙에 조그만 Mosque가 있다. 대상들은 그곳에서 Worship를 했고, 또 때로는 대상들이 넓은 공간에서 간이 Market도 운영했었다고 한다. 겨울용 방은 햇볕이 잘 들어오는 왼쪽에 10여명 정도가 함께 잘수있는 규모로 벽을 쌓아 별도의 방에다, 천장바로 밑에 구멍을 내여 햇볕과 환기를 시킬수 있도록 구조가 되여 있었다. 그러한 방이 10여개정도 나란히 붙어 있었고, 여름용 방은 구분없이 Arch형의 돌로 쌓아만든 긴 Corridor처럼 반대편에 설치되여 있었다. 여관에서는 남녀가 쓰는 방이 구분되여 부부간에는 같은 방을 사용할수가 없었다고 한다. 수백년이 지난 오늘에도 여관건물은 거의 원형에 가깝도록 잘 보존되여 있었다. 석조건물의 특징이라고 할수 있을까? 우리 일행이 관람하고 있는사이 또다른 많은 팀들이 합류하여 여관의 광장에는 북적대기 시작한다. 터키하면 Hammam로 통하는것 처럼, 이곳 여관에도 Hammam설비가 되여 있어, 대상들이 즐겼었다고 한다. 대상들은 이곳에 묶는 동안에도 습관데로 하루에 몇번씩 메카를 향해 기도를 했다고 한다. Muslim의 5계명을 외우면서....

첫째: 하루에 5번씩 내자신과 그들이 믿는 God을 향해 기도.
둘째: 내가 얻은 수입의 일부를, 나보다 못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그들도 나와 같은 삶을 누리게 한다.
셋쩨: 해뜨면서 부터 해질때까지 30일 동안 금식한다.
넷쩨: 양이나 낙타를 잡아 제물로 드리고 고기는 같이 나누어 먹는다. 특히 양은 7등분하여 똑같이 나누어
먹는다.
다섯쩨: 일생에 한번에 메카순례를 한다.

여관 밖에는 상가지역이 형성되여 각종 물건들을, 관람객들을 상대로, 판매하고 있었다. 영화에서는 가끔씩 본 아랍대상들이 이곳에서 하루를 쉬어 갔던 곳이라니.... 내가 마치 그대열에 끼여 낙타등을 타고 작열하는 태양빛을 피하기위해 그들이 머리에 쓰는 두건을 두르고 정처없이 고삐를 잡고 앞서가는 낙타의 꼬리만 보면서 낙타의 발걸음에 온몸이 출렁이는 여행을 하고 있는 기분을 느끼는것 같다. 다시 뻐스를 달려 약 40여분 달리니 해발 11,000 피트나 되는Mount Hasan이 눈에 보인다. 봉우리는 만년설처럼 항상 흰눈으로 덮여있다고 한다. Roman Empire시대에 큰 화산이 폭발했었다고한다. 지금은 이지역을 Aksaray라고 한다.

Cappadocia로 가는 도중에 수많은 양떼들은 여러명의 목동들이 지키면서 풀을 뜯기는 장면을 목격했다.
바로 그옆에는 지하도시가 있었다. 지질은 Tufa(Lava와 거기서 나온 화산재)로 형성돼 있다고 한다. 옛날 비잔틴과 Roman Empire시대에 이지역의 주민들은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었다. 인근의 Syria와 또 다른 지역의 무사들의 끝도 없이 이어지는 침탈에 이곳 주민들은 지하 동굴을 만들어 그곳에 피신하곤 했었단다. 오부의 침략이 있을때마다 보통 2-3주씩 그안에 숨어 지내면서 생활을 해야만 했고, 길게는 3개월도 동굴안에서 지내곤 했다 한다. 동굴안에도 약간의 넓은 공간이 있는데, 그곳에서 어린아이들이 Play하면서, 부엌에서 만든 음식들을 그의 부모들에게 배달을 해주어, 좁은 공간에서의 행동의 제약을 그렇게 아이들이 일부 도와 주었었단다. 또한 변소는 Living Quarter에서 멀리 떨어지게해 위생도 신경썼다고 한다. 또한 통풍장치도 구멍을 뚫어 환기를 시켰고, 난방용으로 불을 지펴 발생하는 연기를 이 환기구멍을 통해서 해결 했다고 Guide는 설명했다. 지하도시의 군데 군데에는 만약에 적이 지하도시까지 침략해 올것에 대비하여 큰 돌을 동전처럼 깎아, 오늘날 집안에 미닫이식의 문을 이용하듯, 평상시에는 안으로 밀어넣었다, 필요시에는 그돌을 밀어서 통로를 차단 했었다고 한다. 또한 이Stone Gate는 동굴밖의 적의 상태를 살피기위한 Watch tower역활도 해주어, 필요시 이문을 열고 밖의 상황을 정찰 하기도 했다한다. 지하동굴로 피난할시에는 기르고 있던 가축들도 함께 피신 했다고 하는데, 이는 적들에게 사람들이 살았었다는 흔적을 줄이기위한 방책에서 였다고 한다. 지하도시 군데군데에는 우물도 있었다. 이지역 Sarhatli 에는 6개의 지하도시가 있었다고 한다. 지하도시의 규모와 형태를 잘보여주는 도면은 마치 개미집처럼 보였다. 독일의 한 고고학자의 주장에 따르면 이지하도시는 BC7-8세기 경부터 있었다고 한다. Celcuk Empire때에는 군대의 작전용으로 사용되기도해,Caravansary와 깊은 관계를 맺기도 했단다. 이지하도시의 특성은 모든 출입문이 북쪽을 피하고 남쪽을 향해 설치되여 있는데, 이는 추운 겨울을 피하기위한 지혜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후 세상이 바꾸이 지하동굴을 사용하지 않게 되자, 그대로 버려 두어 지하동굴은 비바람에, 그리고 밀여온 토사에, 주위의 돌들과 겨울에 내려 쌓인 눈으로 인해 입구가 다 막혀 오랫동안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져 버린채 세월이 흘렀다. 다시 사람들이 같은곳에 집을 짖기 시작하면서, 집의 기초를 만들기위해 땅을 파내면서 지하에 구멍이 뜷려 있느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상히 여겨 계속 파고 들어가 결국 지하도시 였음을 확인하게됐다고 한다. 이곳 Sarhatli지역은 우리가 오늘 오후에 방문코져 하는 Cappadocia에서 가까운 농장지역이다. Nevsehir 휴계소 식당에서 점심을 간단히 했다. 라마존피자와 Ayran을 곁들여 허기를 때웠다. 몇명의 Cook이 열심히 우리가 먹는 얄은 피자를 밀가루 반죽부터 화덕에 넣어 구어내는 모습이 나의 시선을 끌었다. 서로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웃음과 눈빛으로 뜻이 통해 Kitchen으로 들어가 같이 사진도 찍고, 덤으로 여분의 Salad도 얻는 행운(?)을 얻었다. 사진을 꼭 보내 달라고 매일 주소를 적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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