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March 28, 2010

Ephesus & Virgin Mary's living quarter, 전통마을 탐방.









































March 8th,2010. Monday

Ephesus의 옛날 이름은 Celcuk(Celjuk)이라고 한다. 날씨는 구름이 잔뜩끼고 쌀쌀했다.

이도시는 Roman Empire의 점령전인 BC 4세기경에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아침에 Kusadasi를 출발하여 Ephesus를 향해 달리는데 오른쪽에 높이 솟아있는 산꼭대기에 성벽과 Watch tower를 쌓았던 흔적이 보인다. BC 7세기경의 옛날에는 Ephesus가 교통의 요충지인 항구였었는데, 이곳을 출입하는 모든 선박을 관리 했었다고 한다.

 후에 Alexander The Great가 Ephesus를 점령하여 통치를 시작했을때, 뜻하지 않은 유행병이 창궐하여, 많은 사상자를 냈는데 그를 지켜주던 군대가 이 유행병에 심한 타격을 받아 결국 통치권을 잃게 되고 그는 죽고 말았다고 한다. Ephesus에는 도시로 진입하는 3개의 대문이 있었단다. 즉 Harbour Gate, Symener Gate, 그리고 Eastern Gate였는데, 그중에서 Harbour Gate는 오직 왕을 비롯한 왕족들만이 이용이 가능했다고 한다. 지금은 옛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오직 폐허만이 옛날의 영화를 말해 주고 있었다. 유행병으로 왕마져 사망하자, Alexander 대제의 충복이며 장군이었던 Lymachos와 다른 장군들이 로마제국을 분활하여 자신들이 통치하기로 합의 하고, 이때 Lymachos 장군은 Ephesus를 차지하여 도시를 더 증축하였었는데, 그중에서 특히한것은 물의 중요성을 인지한 그는 Irrigation System을 개발하여 농업을 육성시키고, 도시민들의 식수를 해결 했다고 한다. 

도시의 맨윗쪽에서, 수로를 통해 끌어 들인 물줄기가 도시의 가운데에 건설된 main 수로를 통해 도시 끝까지 흘러 가면서 지류와 연결시켜 필요한 곳에 물을 보냈다는 Guide의 설명이 Clear하게 이해가 된다. 그 흔적이 아직도 뚜렷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공동 목욕탕과 빨래터는 무척 커 보였다. Roman Empire시대에 건설한 Ephesus는 양쪽 산맥의 계곡사이의 깊숙한 곳에 거대한 도시를 건축했었고, 산꼭대기에는 Watch tower같은 요새를 건설하여 외부에서의 움직임을 감시 했었다고 한다. 풍수지리에 문외한인 내가 봐도, '좌청용 우백호'를 옛어른들이 많이 하신 말씀이 이런사황을 두고 한 것이 아닐까? 할 정도로 자리를 잘 잡은것을 느낄수 있었다. 

도시를 관통하는 당시로서는 큰 길은 모두 돌로 포장되여 있고, 경사진 길을 따라 도시로 들어가는 왼쪽 길옆에는 돌로된 관들이 아직도 그대로 있었는데, 물론 왕족들의 tomb으로 이용됐었다고 한다. 도시입구에서 한참을 돌로 포장된 도로를 따라 들어오면 오른쪽에 Marble로 건설된 웅장한 도서관이 있다. 그옛날에 읽을 책이 얼마나 많았기에 이렇게 큰 도서관을 건축했단 말인가? 각기둥에는 로마제국의 건축양식인 문양도 화려하게 새겨져 있다. 

당시에는 말이나 낙타가 교통수단의 전부 였을텐데 어덯게 이렇게 많은 큰 Stone들을 운반 했을까? 의문은 계속 이어진다. 기둥에, 또 벽에 새겨논 문양들은 지금봐도 참 정교하고 아름답다. 또 재미있는것은 공동변소였다. 편하게 볼일을 볼수 있도록 설계되여 정교하게 Marble을 사용하여 집단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가이드의 설명이 더 유머스럽다. 신분이 얕은 사람이나 군인졸병들이 먼저 볼일을 보고나면 차거웠던 돌바닥이 따뜻해지면 윗사람이 다시 앉아 차거움을 덜 느끼면서 볼일을 보았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모두가 한번씩 그곳에 앉아 마치 큰 일을 보듯 자세를 취해 보기도 하고 ...... 자꾸만 이렇게 화려한(?) 그뒷면의 고통을 나는 자꾸 생각하게 된다. 그럴 필요가 없는데 말이다.

도시의 입구쪽에서 아래쪽으로 내려다 보면 옛 Ephesus의 항구를 한눈에 볼수 있도록 시야가 확틔여 있음을 확인할수 있었고, 그오른쪽으로는 25,000명을 수용할수 있는 거대한 원형 극장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의 도시 인구는 150,000명이었다니 과히 도시규모를 상상하고도 남을 것 같다. 이곳에서는 지금도 Turkey의 생산품중의 하나인 Carpet생산 공장이 성업중에 있다고 했다. 한 카펫공장에 들렸다. 모두가 여성공원들이 열심히 carpet을 짜고 있었다. 전부 손으로 한 Knot씩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바늘을 움직여 쌓아 간다. 몇년전 이집트 여행시 들렸던 카펫생산 공장은 많은 어린소녀,소년(Minors)들이 그여린 손으로 카펫짜는것을 본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때 이집트의 카펫 공장입구에 높이 걸어둔 간판이 기억에 떠오른다. 그들은 법망을 피하기 위해서 였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Carpet School'이라고 간판을 걸어두고, 어린이들을 그렇게 생산직으로 투입한것이다. 아주 질이 좋은 카펫은 누애고치에서 뽑아낸 실을 사용한다고 그과정을 보여준다.

어렸을적 시골집에서 누애(Silk worm)를 키워 명주옷을 해 입었던 어른들의 모습이 기억에 떠 오른다. 그때 명주실을 누애 고치로 부터 다 뽑고 나면 그안에 번데기를, 실을 뽑던 동네 아주머니들이, 얻어 먹겠다고 기다리고 있던 쪼무라기들에게 하나씩 주면 맛있게 받아먹으면서 허기진 배를 채우고, 다시 실컷 뛰어 놀다가 다시와서 또 얻어 먹곤했던 기억이 새롭다. 일행중 한부부가 몇천불을 지불하고 고급품인 중간크기의 카펫 한장을 구입한다. 나의 판단으로는 이집트 재품이 더 질이 좋은것 같고, 값도 훨씬 저렴 했던것 같다.

이번에는 옵션으로 약 400년된 터키의 전통마을을 방문했다. 다행히도 일행 모두가 참가했다. 기대가 컸다. 이동네에는 현재 약 1,000명의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동네 이름은 Sirince. 그러나 막상 현장을 둘러 보았을때는 실망이 컸다. 특수한 전통냄새는 거의 맡지를 못하고, 많은 집들이 페허가 되여 있고, 문은 자물쇠로 잠겨 있고.... 단하나 눈을 끈것은 동네 사람들이 공동으로 그들 고유의 빵을 굽는 큰 화덕이 군데 군데 있음을 본것 뿐이다.

전통 Market거리에는 아직도 가게들이 문을 열고, 관광객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Guide의 안내로 한 Wine Shop에 들렸다. 중년의 주인이 반갑게 Guide를 맞이 하면서 우리에게도 인사를 건넨다. 그는 곧바로 와인 시식을 우리에게 제공했다. 포도로만든 와인, 뽕나무열매로 만든 와인, 석류로 만든 wine.....종류가 상당히 많다. 값이 무척 싼것 같다. 우리 부부는 석류와인 한병을 샀다. 기념으로 갖고 싶어서 였다. 세계 어느곳을 가봐도 적은 시골 동네에는 젊은 사람들이 없고 거의가 다 노인들뿐임은 하나의 현대문명의 Pattern이 되가고 있다. 젊은이들은 일자리가 많고, 또 경제적으로 쉽게 자립할수 있는 기회가 많은 대 도시로 흘러 들어가기 때문인데, 이곳도 예외는 아니였다. 거의 모든 가옥들이 옛날 Original을 간직하고 있어, 파손된곳도 많아 보였다.

이번에는 Virgin Mary가 거주 했었다는 집을 산속으로 찾아 가기로 했다. 현재의 Ephesus로 부터 약 50 킬로쯤 떨어진 산속에 있었다.
당시에 로마 제국의 헤롯왕이 Jesus Christ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기독교를 믿는 신도들에 대한 박해가 심해 일부는 이집트로 피난하여 목숨을 구했고, 일부는 이곳 Ephesus로 피난나와 삶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때 Virgin Mary도 그대열에 끼어 이곳에 왔었다고 한다. 그런데 Ephesus도시에 거주하는것을 위험하다고 판단한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Virgin Mary를 모시고 다시 더 안전한 곳으로 피신한곳이 오늘 우리가 방문한 산속의 조그만 오두막 집이라고 했다. 그녀는 그곳에서 약 17년을 살다가 다시 4개월의 긴여정을 거쳐 에루살렘으로 돌아가서 그곳에서 생을 마감 했다고 설명해준다. 얼마나 심신이 피곤하고 힘들었을까? 동정녀 마리가가 누구와 같이 길을 걸어 갔었는지는 모르나 그에 따른 어려움을, 오늘은 사는 나자신을 포함한 믿음의 후배들이 한번 깊이 짚고서 신앙생활을 해야 하지 않을까? 라고, 내위주로 모든 믿음의 Issue에 대한 Interpretation을 한것을 죄스럽게 생각한다. 지금은 관광명소로 많은 관람객들이 줄을 서서 집안으로 들어가 구경한다. 집안에는 마리아상이 있고 재단이 있다. 사진촬영은 절대 금지로 그점이 아쉬웠다. 밖에서 몇장 찰칵했는데 글쎄다. 이곳에서 마리아가 살고 있는동안에 사도 바울이 한번 다녀 갔다고 전해 준다.

지금은 매년 8월 15일이 되면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곳을 방문하여 그의미를 되새긴다고 한다. 성모마리아의 집을 탐방하고 나오는 길에 마침 경비를 서고 있는 키큰 군인과 함께 한컷도 했다. 그는 혼쾌히 응락하면서 자세를 취해 줬다.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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