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February 10, 2013

마음속에 더 깊이 와 닿는 설날 아침에 생각나는 기억들.

아침에 일어나면 Laptop 컴퓨터를 켜고 이멜을 체크하는것은 이제는 Routinely 되다시피한, 하루일과의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까치까지 설날은 어제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잘 알고 지내는 친지 P로 부터 설날 축복을 기원하는 메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마운 친지분이다.
양력 설날보다는 그래도 음력설날을 맞이 하는게 더 마음에 와 닿는것은 나와 동시대의 사람들에게는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그러면서 깊은 추억이 그속에 항상 존재함을 느끼기 때문일것이다.   어제 일어났던 일들 같은데.....어느새 시간이 흘러, 노년연금을 타기 시작한지가 벌써 일년 하고도 4개월이 지나, 그때의 기억으로 부터  반세기가 훌쩍 넘은 긴세월을 살아왔음을 새삼 이아침에 느낀다.

섣달 그믐날밤이면 동네 어른들은 농악놀이기구들( 징, 꽹가리, 장구, 북 등등)을 보관해 두는 사랑방에서 꺼내여,  농악팀을 즉석구성하여 동네 각 가정을 돌면서, 각가정의 건강과 축복을 비는 굿놀이를 하곤 했었다.   섣달 그믐날이면 날씨는 항상 추웠었다.   얼어버린 손가락을 입김으로 녹이면서, 농악꾼들의 뒤를 졸래졸래 따라 다니면서 같이 즐기고,  설날에 사용할 떡이나 기타 특별 음식을 요기 하라고 막걸리를 곁들여 차려 주면 우리 꼬마들은 어른들의  허락이 떨어지면 우루루 몰려들어 인절미 떡을 조청에 찍어서 입이 터져라 밀어넣고,  시원한 동치미 국물도 마시고...... 막걸리는 어른들 몫이라고 감히 손댈 생각도 못했었다.

굿놀이가 끝나면 우리 꼬마들은 다시 친구집에 몰려가  동네 꼬마들은 호롱불을 켜놓고 새벽까지 윷놀이를 했었고, 조금 더 커서는 화투놀이도 했었다.  섣달 그믐날 잠을 자면 눈섭이 하얗게 변해 버린다는 형과 누나들의 거짖말?)을 진실로 믿고 눈섭이 하얗게 변하는것을 피하기위해 그렇게 동네 꼬마들은 긴밤을 지샜었다.   호롱불꽃 끝에서 밤새  피어나온 끄름 때문에, 아침에 헤여질때 서로의 얼굴들을 쳐다 보면서, 코구멍이 새까맣다고,  내코구멍은 아무렇치도 않은것처럼 착각을 하면서, 상대방 꼬마들의 코구멍의 검댕이를 보면서 깔깔대고 웃어댓던 그때가 엇그제 같은 기억인데......그때의 나이가 갖 국민학교 졸업때였거나 중학교 1학년 때쯤으로 기억된다.

아침 일찍 엄마나 누나가  가마솥에 물을 잔뜩 채워서 찬바람이 휭휭 불어대는 부엌에서 장작불을 피워 데워논 물과 찬물을 반반씩 놋대야에 채워서 세수를 했었다.  굴뚝처럼 새까만 코구멍을 손가락으로 후벼파서 씻어내곤 했지만, 목과 손등에는 겨울내 목욕을 못해 때가 더덕더덕 붙어 있기도 했었다.  그래도 그때는 그것이 위생에 좋은지 나쁜지도 몰랐었고, 남이 보았을때도 흉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마냥 몰려 다니는것만이 최상으로 생각 했었다.

아침 일찍이 각자의 집에서 설날 제사가 끝나면 우리 우리 쪼무래기들은 다시 모여서, 삼삼오오 때를 지어 동네 각가정을 방문하여, 어른들께 새배를 드리고 나면,   설차례를 차리기위해 준비해둔 산해진미(?)를 답례로  인절미, 유과, 잡채, 동치미 등등의 음식을 한상 차려주면 우린 개눈 감추듯 금방 다 먹어 치우곤 했었다.   그리고 다시 다른 집으로   갔었다.  내가 자란 시골에서는 떡국은 정월 대보름에 주로 준비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오직 배부르게 먹을수 있는 기회가 일년중 설날뿐이었기에...... 우린 기회를 놓칠수 없었기 때문에 배가 불러도 계속해서 세배를 다녔었다.    모두가 어렵게 살았었지만, 인심은 그래도 후해서 인정을 배풀었던 것이다.

살림 형편이 낳은집을 우린 골라서 새배를 다니곤 했던 기억도 있다.   진정으로 어른들을 공경하기 때문에 세배를 다녔다기 보다는  음식한상 차려주는 그것을 노렸기에, 형편이 어려운집은 피해서 건너 뛰었던 기억도 떠오른다.   설날때 부터는 춘궁기가 시작되기에  배고픔의 서러움과 어려움을 견디어 내기가 어려웠었던 어린시절의 기억이 이아침에 떠오른다.
내고향에서는 새뱃돈을 주는 풍습은 없었다.  대신에 정성을 담아 음식상을 차려 주셨었다.
후에 학교 다니기위해 서울에서 살면서 새뱃돈을 주고 받는것을 알았었다.

아내가 준비해준 떡국의 맛이 어렸을때 먹었던 것보다 훨씬 더 영양도 많고 맛이 있지만,   건강식이니 영양식이니 따지고 먹는 요즘과는 달라,  배를 채우는게 목적이었던 그때에 먹었던 떡국의 맛을 느끼지는 못한다.   물질이 풍부해서 좋긴 하지만,  배를 채우기위한 절박함속에서 입에 정신없이 털어 넣던 그때에 느꼈던 맛은 이제는 더이상 느낄수가 없음이 궨히 마음 한쪽에 서운함으로 남는다.  고마움도 그때에 비해 더 느끼는것같다.

아이들은 신정에 새배하고 해야할 도리를 했기에 오늘 진짜 설날 아침에는 우리 부부만이 아침을 먹었다.  아이들은 영원히 내가 어렸을때의 기억을 상상도 못하리라.  시대의 변천을 탓해야 옳은가?   그래서 기회만 되면 짐을 꾸려,  형편이 어렵게 사는 다른 나라로 여행을 떠나게되는 이유가 있다.   풍습은 다르지만 그들의 어려운 삶을 보면서, 옛날 코흘리개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오늘의 물질 풍부한 삶에 감사함을 잊지않게 하고져 함이다.

그때는 지금의 내나이가 되면 동네에서 가장 나이 많이 먹은 노인층에 속해,  안방 아랫묵에 좌를 틀고 앉아 어린 쪼무래기들의 새배를 받는 맛을 즐기시고, 덕담도 해주셨었는데......

오랫만에 조국 고향을 방문하여 시골고향에 찾아가 친구들을 만나면, 그동안 살아왔던 사회적 지위라든지, 부에 상관없이 코흘리개 꼬마시절로 금새 돌아가 이름부르기 보다는 그때 불러대면서 놀려 먹었던 별명이 더 정겹게 들리는 정감이 흐름을 느끼곤 한다.  벌써 세상을 하직한 친구들도 여러명 있었다.
이아침 설날에 그친구들은 자식들과 손자손녀들의 새배인사를 받고 있을까?  궁금해 진다.



뱀띠 새해에 모든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그리고 그위에 인간미를 풍부하게 느끼면서 새로운 한해를 맞이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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