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February 17, 2013

한반도의 지세, 그60년의 역사속에 나도 있었음을 발견.

http://www.youtube.com/watch?v=QJN6pgyYFnU

http://www.youtube.com/watch?v=2vCDNxJZt-w

http://www.youtube.com/watch?v=6ZVzEtSeRhU

http://www.youtube.com/watch?v=vLisuYJ2Unw

http://www.youtube.com/watch?v=JpueK4rM9fQ


http://news.donga.com/Main/3/all/20130216/53075672/1

하늘에서 내려다 본 조국 대한민국은 무엇이든 다 포용할것 같은 지세로 보였다.
오손도손, 할아버지 할머니를 중심으로 3대의 식구들이 욕심없이 주어진 여건속에서
삶을 즐기고,  이웃과는 한가족처럼 인심속에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그런 삶을 살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도 남을 조용한, 그러면서도 의기 꼿꼿한 기상을 잃지 않는, 민족이 살고 있는
땅으로 여겨졌다.   

1960년도 초반, 아직 어린 중학생이었을때,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동원하여, 전국의 모든 산이 민둥산으로 , 장마때 비가 조금만 내려도 흙탕물로 씻겨 내려가는, 높고 낮은 산에 식목을 하러
수업을 빼먹으면서, 선생님의 인솔하에, 등교할때 집에서 가지고온 삽과 호미를 들고, 인근 산야로 다녔던 기억이 어스라히 이아침에 떠오른다.  식목하는 묘목의 종류는 단순했다.   오리봉나무, 아카시아 등등이었다.  이런 나무들은 성장이 빨라 몇년새에 민둥산을 푸르게 바꾼다는 것이, 인솔하신 선생님의 설명이었던 기억도 떠오른다.  산에서 자라는 나무 하면 의례히 소나무를 생각하지만,  그때의 기억으로는 소나무는 성장이 더디어서  식목한 기억이 없다.  5/16 혁명이후의 일들이다.

지난 60년의 과거사를 동영상을 통해서 보는것은 내가 그속의 한곳에서 내할일을, 아니 살아남기위해서,  사회생활을 하던때를  다시 연상케 하고도 남았다.   사회생활의 첫시작은 공무원으로 철도에서 시작했었다.   그직업이 좋은지 나쁜지도 모른채 우선 호구지책을 면할수 있었다는데 그의미를 두었었다.

철도청이 서울역과 인천사이, 서울역과 수원역사이를 전철화하고, 서울시는 1호선 전철을 서울역에서 청량리역까지 건설한다고 그렇치 않아도 교통이 혼잡했던 서울의 좁은 종로통을 땅속깊이 파헤치면서 쿵쾅 거리는 기계소리를 한창 내뿜을때로 기억된다.

서독으로 기술연수를 위해 파견됐었다.   철도에서 필요한 선반(Lathe)을 구입하는데, 운좋게(?)내가선발되여 짧은 기간이었지만 독일의 뒤셀도프 근처의 조그만 중소도시 "에어클렌스"에 있는 "하이겐 샤이트"중공업 회사에 기술연수차 파견됐었던 기억이 동영상을 보면서 overlap 된다.  동영상에서 본것 처럼 당시의 조국은 보릿고개를 없애고 후손들을 배고픔에서 탈피 시키기위해 위해 주야로 산업전선에서 한창 뛰고있던 때였었다.

지금도 그렇치만, 영어도 잘 할줄 모르는 내가, 그것도 혈혈단신으로 독일의 뒤셀도프 공항으로 날아간 것이다.  수중에는 US$200달러가 전재산이었다.  당초 집에서 김포공항으로 출발할때는 주머니에 단돈 1달러도 없었었다.  달랑 초청회사에서 보내온 왕복 비행기표가 다였었다.
지금 같으면, 무서워서라도, 주머니에 돈한푼없이, 지구의 반대편에, 그것도 모든게 완전히 다르고, 언어도 제대로 소통이 안되는 그곳에 가라고 등을 떠밀어도 안갔을 것이다.   오직 젊다는 패기, 그것이 무기였었다.   지금 생각해 봐도 굉장히 무모한 도박같은 독일기술연수였었다.
만약에 독일에 도착하여 공항에서 만나기로한 초청회사직원을 만나지 못했을때는 어떻게 됐었을까?  지금 상상만 해봐도 아찔한 기분이다.

공항에서 시내로 달릴때, 난생 처음으로 고속도로위를 달렸었다.  그때 조국에서는 막 경부고속도로건설을  끝날때였었다.  그러나 서민들이 고속도로를 My Car로 달린다는것은 꿈속에서만 가능했던 때였었다.   막힘없이 총알처럼 달리는 벤쓰 리무진차를 타보는 스릴도 느꼈었다.
모든게 신기하게만 보였고,  키가 훤칠하고 잘 생긴 서양사람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촌뜨기의 티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의 한젊은 청년이 이런대접을 받는다는것에 마치 세상이 꺼꾸로 돌아가는 착각을 할 정도로 실감이 나지 않았었다.  서울에서 택시를 타본 경험은 있었지만 자가용 승용차를 한번 타본일이 거의 없었던 촌뜨기가 자가용 그것도 당시로서는 삼성의 이병철 회장 정도가 타고 다닌다는 리무진 벤츠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렸었다.

그때의 고국은 외화가 단 1달러라도 경제건설에 보태야 했을때였기에,  출장비는 엄두도 없었고,  그래서 초청받은 경우에만 해외에 파견 시키는때였었다.  초청받았다고 해서 다 보내는 것도 아니었었다.  서울대와 연세대에 있었던 어학연수원에 가서 영어로 인터뷰를 하고, 합격을 해야 내 보내는, 극히 폐쇄적인 정책을 펴고 있을 때였었다.   운좋게 합격하여 수속을 밟고,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평상시 업무관계로 알고 지내던 한 Offer상의 주인이 갑자기 내앞에 나타나서, 봉투 하나를 꺼내 주었다.  박봉에 허덕이는 공무원사회를 그분은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속에는 미화 $200.00가 들어 있는게 아닌가.  "가다가  간식이라도 사 잡수십시요. 이기사님" 이라고 하면서,  공항까지 달려온 사유를 전하면서, 잘 다녀오시라고 한 그마음이 너무나 감사 했었다.  그분이 구세주같은 기분이 들었었다.

당시의 조국은 일반인의 외국여행은 상상도 할수 없었고, 공무원들의 외국출장도 국무총리의 결재를 받아서만이 떠날수 있는, 외화를 지금처럼 마음데로 사용할수가 없었던, 너무도 가난한 나라였었다.   그런 분위기였기에 주머니에 돈이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니라 기회만 주어지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비행기 트랩을 올랐던 때였었다.   공항대합실에는  외국여행을 떠나는 여행객이 아니라 환송하러 나온 사람들로 항시 들끓었었다.  나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었다.
같이 근무하는 동료들, 집안 식구들 그리고 친지들......핑계대고 공항이라는데를 한번 구경삼아 나들이를 하는때였었다.

대한항공을 타고, 일본 하네다 공항에서 다시 독일의 "루푸트한자" 비행기로 바꾸어 타고 좌석에 앉았는데 마침 옆좌석에는 장발의 젊은 내나이보다는 몇살 더위일것 같은 장발의 일본 청년이 자리를 했다.  그는 무역회사에서 근무하는데, 지금 폴란드로 무역을 하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폴란드'는 분명히 공산국가인데.....라고.   우린 그때 공산국가사람들은 이마에 뿔이나고,  우리와 같은 정상적인 사람들이 아니고, 괴물정도로 어렴푸시 인식하고 있을때였었다.  그런데 그나라로 장사를 하러 간다니.... 이젊은 친구가 살아서 다시 자기 나라로 되돌아 올수 있을까?라는 엉뚱한 상상을 한참동안 했었다.  장발을 하고 있는 그젊은 친구의 외모는 불량하기 그지 없어 보였었다.  서울의 거리에서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가끔씩 보이는 장발족들을 경찰이 붙잡아  강제로 현장에서 가위로 머리를 자르던 생각을 대입시켜보면 그젊은이는 분명 불량한 부류로 인식될수 밖에 없었었다.

독일회사에서 직원들과 일을 하면서,  놀랄사건을 하나 발견 했었다.   위에서 부터 말단 직원에 이르기까지 책상에는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그위에 유리를 덮어 필요시 세계 이곳저곳을 점찍어 가면서 자기네 회사의 제품을 팔고 있는 그모습에 그들이 부러운것은 물론이지만, 우리는 언제 이들처럼 세계를 상대로 기술을 팔고 무역을 해서 잘살아 볼수 있을까?라는 상상을 하면서,  하면된다라는 오기 보다는 처해진 조국의 현실을 생각해 볼때 좌절감과 절망감이 내자신속에 꽉차있는, 불쌍한 대한민국의 한 젊은 청년이 독일의 현지에서 가슴속 깊이 느끼는 현주소였었다.

평상시 친절하게 그리고 자세히 가르켜 주던 회사직원들도 모두 가정으로 되돌아가, 주말이면 나혼자서 외로히 지내야 했었다.   "주말에는 집에서 아내와 아이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야 한다.  좋은 주말 보내기를 빈다"라고.   주중에는 같이 일하다가 퇴근후에는 같이 식사도 하고,  구경도 시켜주곤 하지만, 주말에는 냉정하리만치 가정위주의 시간을 집에서 즐기는것을 그때 보고 느끼면서,  주말을 집에서 식구들과 함께 보낸다는 그말뜻이 쉽게 이해가 되지않았었다.

요즘이야 신기술도 아니기에 신기할것도 없었지만,  그때 내가 배운 기술은 철도기관차(Locomotive)의 바퀴를 repair하기위해 기관차 몸체를 Dismantling 하지 않고,  차고안에 설치된 전삭반( Wheel Lathe)에 올려놓고 마모된 바퀴의  Tread를 적당한 Tapper를 두고 깍아내는 기술을 배우는 것이었다.  당시의 조국의 철도기술은 마모된 바퀴표면을 깍아내기 위해서는 몸체전부를 해체해서 하나씩 Lathe에 고정시켜서, 선반공이 수동조작하여 Cutting하던 때였었다.  이에 비하면 통채로 올려놓고 바퀴표면을 깍는다는것은 문자 그대로 신기술이었었다.  일종의 Industrial revolution 같았었다.   이러한 최신 기계설비를 이곳 독일에서 수입하여 서울과 영주 그리고 부산에 설치하는, 일종의 기술연수이자 감독관자격으로 파견됐었다.  이곳에서 기술연수를 하면서,  막연히 독일보다 더 잘 살고 있다는 북미 대륙의 미국이나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갖게 하는 계기를 마음속에 간직하게 됐었다.

당시 새로 개통한 서울시 지하철에서도, 아직은 정비시설이 미비하여,  최신기계설비가 완료된 철도에 의뢰하여 바퀴표면을 깍아 운영했었다.    그로 부터 약 40여년 정도가 지난 지금, 조국은 너무나 상상할수 없을 정도로 발전하여 세계무대에서 당시의 선진국들과 어깨를 겨누면서 선두다툼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자랑스럽지 않을수 없다.   조국의 경제건설과 잘살아 보자는 의지 하나로 온 국민이 매진하는 그격동의 시대속에서 내가 있었다는것을, 오늘 지난 60여년의 조국의 지내온 발자취를 동영상을 통해보면서, 새삼 지난세월을 주마등 처러 절감하면서,  오직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하지 않은것은 정치판에서 활개를 치고 있는 정치꾼들의 망국적 행동에 대해 전혀 자각을 하지 못하고 앞으로 전진할려고 하는 국가라는 수레를 뒤로 끌어 내려고 온갖 꽁수를 쓰면서 헤매고 있다는 점이 걱정되고 무척아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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