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February 24, 2013

18대 대통령의 안타까운 반쪽 취임식

이곳 시간으로는 저녁 8시경이지만, 고국의 시간으로는 25일 오전 9시경쯤 되는, 경사스런 날임을 뉴스를 통해 본다.

이시간 현재 18대 대통령의 취임식은 아직 행해지지 않고는 있지만, 새로운 대통령으로서의 임무는 벌써 시작됐었다고 한다.  취임식날인 새벽 0시를 기해 대통령직을 인수받고, 바로 조국의 현실상 가장 중요하고, 한순간도 정신 팔수 없는 국방에 대한 보고를 합참의장으로 부터 받는것을 첫번째로 했다는 뉴스는 멀리 태평양 건너 지구반대편에서도 긴장감을 돌게 했었다.

대통령을 보좌하여 국가를 운영할 국무총리와 국무위원들에 대한 국회인준은 한건도 해결된게 없이, 새대통령 혼자서  국정을 운영해야할 이상한 나라,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면서, 정치꾼들에 대한 증오가 내가슴속에서 무럭무럭 피어오르는것을 깊이 느낀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새대통령이 주관하는 국무회의는 전정부에서 봉사했던 MB내각의 국무위원들과 하게 된다고 한다.   세상에 이런놈의 대통령 인수인계를 아직까지 세계어느나라에서도 있었던 경우를 들어본것도,  본일도 없다.    며칠후면 자리를  떠나게 되는 국무위원들에게 대통령이 어떤 업무를 협의 할수 있을까?  그렇게 까다롭다고 하는 미국에서도 이런 경우가 있었다는 얘기를 들어본 일을 없다.

새로 신설되는 미래창조부와 해양수산부를 두기위한 입법안을 국회에 의뢰한지가 몇달이 지났는데도, 여당과 야당의원들이 자기네 밥그릇 계산하느라, 아직까지도 통과 시키지못해 장관지명자들은 허공에 뜬 외로운 기러기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한다.

국무총리, 장관은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국회에서 인준을 받아야 되는 절차, 즉 청문회를 통과해서 정식으로 총리와 장관이 되는 것이다.  아마도 미국의 장관임명 절차를 도입해서 한것같다.   그런데 미국에는 총리제도가 없다.  대신에 부통령이 있다.

고국의 헌법은 대통령 그리고 총리를 두도록 되여 있다고 한다.   총리는 의회주의를 지향하는 민주국가에서 주로 활용하는 제도이다.   대통령제에서는 부통령이 있다.   고국의 정부제도는 내생각으로는 독특한 정체성이 있다기 보다는, 여당과 야당의 정치꾼들의 밥그릇 싸움에서, 짜깁기식으로  얼버무려 만든 제도인것 같다.  고국의 대통령 임기는 5년 단임제다.   툭하면 정치꾼들은 갖다 부치기를 좋아한다.    미국은 어떻고, 유럽의 그 나라는 어떻고....  라는 식으로.

조국이 해방이후로 어렵게 살던 보릿고개를 이겨내고 오늘날 처럼 먹는것 걱정하지 않고, My Car시대를 즐기면서 삶다운 삶을 살기 시작한지는 불과 40년도 안된다.   오늘이 있기까지 고국의 사회는 부정과 아부, 시기, 질투등등의 부조리속에서 모두가 그러려니 하면서, 그렇게 어울려 살아왔고, 그런분위기속에서 가장 득을 보면서 특혜를 얻고, 부를 챙긴 계층은 정치꾼들이었었다.   수억원을 쳐 먹으면서도, 어쩌다 걸리면 정치자금이라는 명목을 들어 미꾸라지처럼 법망을 빠져 나가고,  어쩌다 서민이 잘못 걸리면 불과 몇십만원의 부정에 연루되면 가차없이 철창속으로 처 넣는 악순환이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총리나 장관후보자들을 대통령이 선택하여 국회의 청문회에 보내면, 자질과 능력이 있는지의 검증보다는 개인의 뒷조사를 해서,  부동산 투기, 위장전입,  전관예우등등의 예를 들어 적격자가 아니라고, 심한경우에는 청문회 자체를 보이코트 시키는 국회의원들, 특히 야당 정치꾼들의 공세는 시셋말로 "똥묻은걔가 겨묻은개를 나무란다"라는 말이 무색하고도 남은, 심장에 털난 사람이라는것을 자랑이라도 하듯, 혼자서 깨끗한척하는 두꺼운 얼굴들의 소유자들, 옆에 있으면 뺨이라도 후려치고 싶은 울화가 치밀게 한다.

야당의 대통령후보자였던 야당정치꾼은, 부산에 있다는 핑계를 대고, 대통령 취임식에 초대된 영광을 단칼에 뿌리쳤다는 뉴스는,  벼룩의 간보다도 적은 마음을 갖인 쫄다구임을 분명히 국민들에게 알려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런자가 대통령으로 선출안된게 조국의 장래운명을 위해 천만 다행인것으로 안도의 숨을 쉰다.   그런자가 대국민 성명에서는 대통령을 비롯한 여당과 협조하여 조국에 봉사하겠다는 거짖말을 서슴없이 해대곤 했었다.   며칠전 뉴스에 보면, 노통 정부때는 NLL을 그정치꾼도 합세하여, 없앨려고 했었다는 망국적 행동은 그정치꾼의 정체가 어느쪽에 서있는지를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도 법의 저촉을 교묘히 벗어나서, 검찰이나 공권력이 전연 작동을 못하고 있다.  이것이 민주주의는 아닐텐데....
적어도 그들의 눈에는 국가의 안위따위를 걱정하는 모양새는 하나도 찾아 볼수 없다.

총리, 장관인준에 대한 청문회 일정까지도 확실히 잡혀 있는게 없다고 한다.   대통령의 손발을 다 이런식으로 꽁꽁 묵어 놓은 정치꾼들은 양심이 도대체 있는것일까?   입따로 행동따로 얼굴색 붉히지않고 태연하게 연극, 아니 대국민 사기를 치는 정치꾼들.....이제는 보기조차 지겹다.

만약에 이북과 무력충돌이 발생 한다고 했을때,  대통령의 작전명령이 국방장관을 통해서 군수뇌부에 하달될텐데...... 이렇게 국가운명을 좌우하는 위치에서 일할 사람을 일하게 도와주는 행동은 뒷전이고 후보자의 개인비방과 흠집내기에만 열올리고...... 몇명의 정치꾼들 때문에 5천만 국민들의 운명이 경각이 달려 있다고 생각해 보기는 하는지?  자기네들 세비 올리는데는 여야가 없이 짝짜쿵이 잘 이루어진다고 한다.

대통령 취임식에 각국의 정상들과 외교사절이 많이 참석한다고 한다.   5천만 국민들이 뽑아논 대통령을, 세계를 향해서 절름발이로 만들고 있다는 엄청난 대역죄를 짖고 있음을 정치꾼들이여 지금이라도 깨달으라.   일초가 아깝게 국정을 살펴야 하는 대통령의 심정을 그들은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정치꾼들이 분명히 알아야 할 첫번째 사안은,  오늘 조국의 사회현실속에서 결격사유가 한점도 없는 총리나 장관후보깜은 없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내가 이런 표현을 하기전에 그들 자신이 먼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왜냐면 자기네 자신들을 총리 또는 장관 후보자를 점검하는 잣대에 마추어서 길고 짧음을 재보면 쉽게 나올수 있기 때문이다.

취임식의 잔치가 끝나는데로 바로 식장뒤에 있는 국회 토론장으로 들어가 행정부의 책임을 지고 대통령과 일할 후보자들의 청문회를 개최해서 결정을 지어라.   향연장으로 향할 생각접고.

조국이 스위스 이상으로 경제적으로 부강하고, 또 인생을 즐길수 있는 충분한 조건은 다 갖추어져 있고, 이를 기술적으로 뒷받침할 인재들은 다 양성되 있는데,  이를 법적으로 뒷받침해줄 국회를 운영하고 있는 정치꾼들이 뒤에서 역으로 끌어내리기 때문에  그꽃을 더디게 피우고 있다는것을 깨달아라.   18대 대통령의 취임식이 진정으로 축제의 장이되는 분위기를 만들어라.    그길은 당신네들 자신을 저울질 할수 있는 잣대를 더도말고 덜도 말고 있는 그대로 총리, 장관 후보들에게 사용하세요.  만사 해결이 금방 될것이외다.  이길이 진정 대통령 취임 축제의 장을 빛나게 하는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앞장서서 신용이 설 자리를 스스로 만들어 보시요.  그런 사회 분위기속에서 추려진 후보자들이 청문회에서 비리나 사기죄 같은 발목잡힐 흠이 나타날수가 없겠지요.

비상사태가 벌어진다면,  목숨바쳐 조국을 지킬 정치꾼들은 몇명이나 될까?   자기만이 애국자인양 거품을 내뿜으면서 열변을 토하는 정치꾼들,  미안 하지만 거의 다 먼저 자기네 식솔 거느리고 외국으로 도망칠 길이나 찬스를 찾느라 또 거짖말의 향연을 피울것이다.  미운사람들의 순서를 열거 하라고 하면,  나는 정치꾼들이 첫번째임을 거침없이 말 할것이다.   여야 정치꾼들을 통털어서,  본인이나 자식들이 외국의 영주권을 소유하고 있지않은 숫자가 얼마나 될까?
5천만 국민들이 풀어야 할 큰 숙제이기도 하다.

정치꾼들이나, 언론이 가장 많이 인용하여 자기네들의 정치적 야망이나 미디어들의 역량을 직간접으로 나타내는 표본으로 쓰이는 나라로 미국을 꼽는다.   미국은 특히 언론에서 새로운 대통령이 백악관에 입성하면, 최소 100 일동안은 대통령을 비롯한 새행정부의 정책에 비판을 자제해 오면서 밀월(?)을 지켜온 깊은 역사가 인상깊다.  그기간동안에는  새로 조각된 행정부가 업무파악을 위해 정신없이 뛸 기간이기 때문이다.   고국의 언론이나 비평가들도 이런 면도 좀 인용해서 서뿌른 비평이나 발목잡기식 때리기는 자제 하고, 지켜 보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http://www.youtube.com/watch?v=VTAVjCocJ1Y

http://www.cnn.com/2013/02/24/world/asia/south-korea-female-president/index.html?hpt=hp_t1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2/25/2013022500906.html?news_Head1

http://www.nytimes.com/2013/02/26/world/asia/south-koreas-park-geun-hye-warns-north-against-nuclear-pursuits.html?ref=asia&_r=0

Thursday, February 21, 2013

캐네디언들에게 쉽게 이해 안되는 13개의 미국법...

언뜻 볼때는 많은 캐네디언들이 미국과  캐나다는 모든게 비슷한 것으로 생각할수 있다.
그러나 북위 49도 이북에 있는 캐나다에서는 합법적인 법이 남쪽 미국에서는 불법으로 법으로 만들어져, 적발시 벌금을 물거나  감옥살이를 할수도 있다.   여기에 미국 여행시 꼭  알아 두어야할 13개 법조항에 대해 열거해 본다.  왜냐면 무심코 당하면 미국 여행시 큰 낭패를 볼수 있기 때문이다.   농담으로 흘려 버리기에는 뭔가 마음이 편치 않을것 같다.

1. 죠지아주 Albany의 주의회는 경찰관들도 최신유행을 닮은 제복을 입히는 법까지 제정했다.

그러나  만약에 바지( 여자의 경우 스커트)를 3인치 이상 궁뎅이 아래로 걸쳐 입어 속팬티를 보일경우, 경찰에 적발되면 $25USD의 벌금이 부여된다. 한번 적발됐다가 다시 또 적발되면 벌금은 $200USD로 껑충뛴다.   바지를 제대로 올려입고, 벌금낼돈을 주머니에 간직 하시기를...

2. 택사스주에서는 꿀꺽꿀꺽 술을 들이 마시지 마라.

택사스주에서는 캐네디언들이 즐기는 5월달의 2-4번째 주말을 흥청망청 보내지 않는다.
택사스주에서는 한곳에서 병채로 맥주나 다른 알코홀을 3모금 이상 연속 들이키는것은 불법이다.   택사스주에서는 엄격한 법을 적용하고 있다.  술마실때는 이런법이 있다는것 기억하라.

3. 여성들이여, 클리브랜드에서 신발 구입시에 선택에 신중을 기하라.

오하이오주, 클리브랜드에서 신발을 구입할때, 자칮하면 큰 손해를 볼수 있다.
클리브랜드에서는 여성이 번쩍번쩍하는 가죽구두 착용은 불법이다.   이유는?   광이 나는 구두를 신으면 치마를 입은 여성의 속옷이 거울에서 처럼 비쳐질수 있어 모든 사람들이 시선을 그곳에 집중할수 있기 때문이다.   캐나다여성들이여  이점 꼭 명심 하시기를.....

4.  버지니아주에서는 연인사이에서도 간지럼 태우지 마십시요.

이곳에서는 여성에게 간지럼 태우는것이 불법으로 간주된다.  다만 Elmo를 간지럽히는것은 허용된다.

5.  오클라호마주에서는 접시의 음식을 나누어 먹어서는 안된다.

우리 캐네디언들은 큰 접시에 담겨져 있는  음식을 서로 나누어 먹는 아름다운 습관이 오클라호마주에서는 금지되여 있다.  이곳에서는 하나의 햄버거도 나누어먹는 것도 금지되여 있다.

6.  뉴멕시코주에서는 종아리의 털이 보이지 않도록 조심하라.

캐나다 여자들이여, 뉴멕시코주의 카리죠죠를 여행 할때는  종아리에 자라고 있은 털에 신경을 써라.  이곳에서는 여성의 종아리에 표시나게 자라고 있는 털(Hair)을 깍지 않은채로 노출 시킨다면 불법으로 간주된다.

7.  다코다주에서는 잠깐 낯잠잘때도 신발을 벗어야 한다.

만약에 다코다주 여행시 졸려서 잠깐 눈을 부칠때는 꼭 신발을 벗어라.
신발신고 낯잠을 자거나 졸리는것을 경찰이 발견하면 벌금을 부과 할것이다.

8.  Las Vegas 에서는 이른 아침에만  개와 산책하는것이 허용된다.

라스베가스에서 애완용개와 같이 산책을 하고 싶으면 당신은 이른 아침에 일어나 해야 한다.
2012년 3월, Clark County의회는 라스베가스의 중심가에서 애완용개를 대동하는것을 금하는 법안을 승인 했기 때문이다.   다만 개중에서 Fido는 아침부터 점심때까지 같이 산책하는것은 예외 규정을 두었다.  사막위에 건설된 도시, 라스베가스에서는 당신 주머니안의 돈은 환영하지만 당신의 개따위는 안중에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9.  뉴햄프셔에서는 몸 흔들지 마라.

뉴햄프셔에서 음식점에서 식사할때는 조심할것이 있다.  발을 음악에 맞추어 들썩 거린다든가, 머리를 흔들다든가 하는것은 법을 어기는것이기 때문이다.

10.  플로리다주의 해변가에서 노래하는것은 불법이다.

긴겨울을 피해 Florida주의 해변가에서 Sun Bathing을 즐기는 캐네디언들은 주의 팻말을 조심해라.   이곳에서는 수영복 차림으로 해변가에서 고성방가는 불법이다.

11.  Wyoming에서는 Easter Bunny의 사진촬영은 위법이다.

캐네디언들은 Easter day는 캐나다에서 즐기는게 안전할 것이다.  와이오밍주에서는 토끼 사진을, 1월부터 4월까지 사이에는, 허가증을 소지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촬영은 불법이다.
Easter Bunny가 이를 보고 뭐라고 입을 움직일까?

12.  인디애나주, 마늘을 먹는것은 흡혈귀에 비유?

저녁후 영화감상?  사치한 생각임을 명심하라.  인디애나에서 마늘을 식사시에 먹었을때는 그시점부터 최소한 4시간은 호텔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라.   만약에 마늘을 먹은후 4시간이 지나기전에 영화감상이나 연극을 관람한다든가 또는 Street Car를 타러 나간다면 그것은 바로 "나는 벌금을 내러 갑니다" 라는 포함한 행동이다.

13.   뉴욕에서는 상대방을 응시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사실을 널리 알려라.   뉴욕시에서는 상대방 특히 여성을  응시하는것을 불법이다.  Big Apple에서는 아직도 그효력을 갖고 있는 낡은 법조문은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다.
만약에 남성이 여성을 응시하면 그는 $25달러의 벌금을 물어야 한다.  계속해서 반복하면 당신은 벌칙금을 뿌리고 다니는것과 다름없다 라고.
아칸소주의  '리틀록'에서 이런일을 한다면 결과는 최악이 될수 있다.  만약에 여성을 뚤어져라 응시한다면 당신은 30일간 감옥살이를 각오해야 한다. 캐나다의 남성들이여, 여성을 응시할때면 벌칙금 각오를 하고 응시 해라.

각나라마다 고유의 법이 있다.  언뜻 봐서는 미국과 캐나다가 차이가 뭐가 있겠느냐?라고 생각할수 있겠지만,  각지역에 따라서 상상을 초월하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상식을 벗어난 법들이 존재하고 있음에, 국경을 넘을때 미리 한번 생각해 보는것이 좋을것 같다는 생각이다.
아니면 Joke정도로 치부해 두어도 괜찮을까?




Sunday, February 17, 2013

한반도의 지세, 그60년의 역사속에 나도 있었음을 발견.

http://www.youtube.com/watch?v=QJN6pgyYFnU

http://www.youtube.com/watch?v=2vCDNxJZt-w

http://www.youtube.com/watch?v=6ZVzEtSeRhU

http://www.youtube.com/watch?v=vLisuYJ2Unw

http://www.youtube.com/watch?v=JpueK4rM9fQ


http://news.donga.com/Main/3/all/20130216/53075672/1

하늘에서 내려다 본 조국 대한민국은 무엇이든 다 포용할것 같은 지세로 보였다.
오손도손, 할아버지 할머니를 중심으로 3대의 식구들이 욕심없이 주어진 여건속에서
삶을 즐기고,  이웃과는 한가족처럼 인심속에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그런 삶을 살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도 남을 조용한, 그러면서도 의기 꼿꼿한 기상을 잃지 않는, 민족이 살고 있는
땅으로 여겨졌다.   

1960년도 초반, 아직 어린 중학생이었을때,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동원하여, 전국의 모든 산이 민둥산으로 , 장마때 비가 조금만 내려도 흙탕물로 씻겨 내려가는, 높고 낮은 산에 식목을 하러
수업을 빼먹으면서, 선생님의 인솔하에, 등교할때 집에서 가지고온 삽과 호미를 들고, 인근 산야로 다녔던 기억이 어스라히 이아침에 떠오른다.  식목하는 묘목의 종류는 단순했다.   오리봉나무, 아카시아 등등이었다.  이런 나무들은 성장이 빨라 몇년새에 민둥산을 푸르게 바꾼다는 것이, 인솔하신 선생님의 설명이었던 기억도 떠오른다.  산에서 자라는 나무 하면 의례히 소나무를 생각하지만,  그때의 기억으로는 소나무는 성장이 더디어서  식목한 기억이 없다.  5/16 혁명이후의 일들이다.

지난 60년의 과거사를 동영상을 통해서 보는것은 내가 그속의 한곳에서 내할일을, 아니 살아남기위해서,  사회생활을 하던때를  다시 연상케 하고도 남았다.   사회생활의 첫시작은 공무원으로 철도에서 시작했었다.   그직업이 좋은지 나쁜지도 모른채 우선 호구지책을 면할수 있었다는데 그의미를 두었었다.

철도청이 서울역과 인천사이, 서울역과 수원역사이를 전철화하고, 서울시는 1호선 전철을 서울역에서 청량리역까지 건설한다고 그렇치 않아도 교통이 혼잡했던 서울의 좁은 종로통을 땅속깊이 파헤치면서 쿵쾅 거리는 기계소리를 한창 내뿜을때로 기억된다.

서독으로 기술연수를 위해 파견됐었다.   철도에서 필요한 선반(Lathe)을 구입하는데, 운좋게(?)내가선발되여 짧은 기간이었지만 독일의 뒤셀도프 근처의 조그만 중소도시 "에어클렌스"에 있는 "하이겐 샤이트"중공업 회사에 기술연수차 파견됐었던 기억이 동영상을 보면서 overlap 된다.  동영상에서 본것 처럼 당시의 조국은 보릿고개를 없애고 후손들을 배고픔에서 탈피 시키기위해 위해 주야로 산업전선에서 한창 뛰고있던 때였었다.

지금도 그렇치만, 영어도 잘 할줄 모르는 내가, 그것도 혈혈단신으로 독일의 뒤셀도프 공항으로 날아간 것이다.  수중에는 US$200달러가 전재산이었다.  당초 집에서 김포공항으로 출발할때는 주머니에 단돈 1달러도 없었었다.  달랑 초청회사에서 보내온 왕복 비행기표가 다였었다.
지금 같으면, 무서워서라도, 주머니에 돈한푼없이, 지구의 반대편에, 그것도 모든게 완전히 다르고, 언어도 제대로 소통이 안되는 그곳에 가라고 등을 떠밀어도 안갔을 것이다.   오직 젊다는 패기, 그것이 무기였었다.   지금 생각해 봐도 굉장히 무모한 도박같은 독일기술연수였었다.
만약에 독일에 도착하여 공항에서 만나기로한 초청회사직원을 만나지 못했을때는 어떻게 됐었을까?  지금 상상만 해봐도 아찔한 기분이다.

공항에서 시내로 달릴때, 난생 처음으로 고속도로위를 달렸었다.  그때 조국에서는 막 경부고속도로건설을  끝날때였었다.  그러나 서민들이 고속도로를 My Car로 달린다는것은 꿈속에서만 가능했던 때였었다.   막힘없이 총알처럼 달리는 벤쓰 리무진차를 타보는 스릴도 느꼈었다.
모든게 신기하게만 보였고,  키가 훤칠하고 잘 생긴 서양사람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촌뜨기의 티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의 한젊은 청년이 이런대접을 받는다는것에 마치 세상이 꺼꾸로 돌아가는 착각을 할 정도로 실감이 나지 않았었다.  서울에서 택시를 타본 경험은 있었지만 자가용 승용차를 한번 타본일이 거의 없었던 촌뜨기가 자가용 그것도 당시로서는 삼성의 이병철 회장 정도가 타고 다닌다는 리무진 벤츠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렸었다.

그때의 고국은 외화가 단 1달러라도 경제건설에 보태야 했을때였기에,  출장비는 엄두도 없었고,  그래서 초청받은 경우에만 해외에 파견 시키는때였었다.  초청받았다고 해서 다 보내는 것도 아니었었다.  서울대와 연세대에 있었던 어학연수원에 가서 영어로 인터뷰를 하고, 합격을 해야 내 보내는, 극히 폐쇄적인 정책을 펴고 있을 때였었다.   운좋게 합격하여 수속을 밟고,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평상시 업무관계로 알고 지내던 한 Offer상의 주인이 갑자기 내앞에 나타나서, 봉투 하나를 꺼내 주었다.  박봉에 허덕이는 공무원사회를 그분은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속에는 미화 $200.00가 들어 있는게 아닌가.  "가다가  간식이라도 사 잡수십시요. 이기사님" 이라고 하면서,  공항까지 달려온 사유를 전하면서, 잘 다녀오시라고 한 그마음이 너무나 감사 했었다.  그분이 구세주같은 기분이 들었었다.

당시의 조국은 일반인의 외국여행은 상상도 할수 없었고, 공무원들의 외국출장도 국무총리의 결재를 받아서만이 떠날수 있는, 외화를 지금처럼 마음데로 사용할수가 없었던, 너무도 가난한 나라였었다.   그런 분위기였기에 주머니에 돈이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니라 기회만 주어지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비행기 트랩을 올랐던 때였었다.   공항대합실에는  외국여행을 떠나는 여행객이 아니라 환송하러 나온 사람들로 항시 들끓었었다.  나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었다.
같이 근무하는 동료들, 집안 식구들 그리고 친지들......핑계대고 공항이라는데를 한번 구경삼아 나들이를 하는때였었다.

대한항공을 타고, 일본 하네다 공항에서 다시 독일의 "루푸트한자" 비행기로 바꾸어 타고 좌석에 앉았는데 마침 옆좌석에는 장발의 젊은 내나이보다는 몇살 더위일것 같은 장발의 일본 청년이 자리를 했다.  그는 무역회사에서 근무하는데, 지금 폴란드로 무역을 하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폴란드'는 분명히 공산국가인데.....라고.   우린 그때 공산국가사람들은 이마에 뿔이나고,  우리와 같은 정상적인 사람들이 아니고, 괴물정도로 어렴푸시 인식하고 있을때였었다.  그런데 그나라로 장사를 하러 간다니.... 이젊은 친구가 살아서 다시 자기 나라로 되돌아 올수 있을까?라는 엉뚱한 상상을 한참동안 했었다.  장발을 하고 있는 그젊은 친구의 외모는 불량하기 그지 없어 보였었다.  서울의 거리에서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가끔씩 보이는 장발족들을 경찰이 붙잡아  강제로 현장에서 가위로 머리를 자르던 생각을 대입시켜보면 그젊은이는 분명 불량한 부류로 인식될수 밖에 없었었다.

독일회사에서 직원들과 일을 하면서,  놀랄사건을 하나 발견 했었다.   위에서 부터 말단 직원에 이르기까지 책상에는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그위에 유리를 덮어 필요시 세계 이곳저곳을 점찍어 가면서 자기네 회사의 제품을 팔고 있는 그모습에 그들이 부러운것은 물론이지만, 우리는 언제 이들처럼 세계를 상대로 기술을 팔고 무역을 해서 잘살아 볼수 있을까?라는 상상을 하면서,  하면된다라는 오기 보다는 처해진 조국의 현실을 생각해 볼때 좌절감과 절망감이 내자신속에 꽉차있는, 불쌍한 대한민국의 한 젊은 청년이 독일의 현지에서 가슴속 깊이 느끼는 현주소였었다.

평상시 친절하게 그리고 자세히 가르켜 주던 회사직원들도 모두 가정으로 되돌아가, 주말이면 나혼자서 외로히 지내야 했었다.   "주말에는 집에서 아내와 아이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야 한다.  좋은 주말 보내기를 빈다"라고.   주중에는 같이 일하다가 퇴근후에는 같이 식사도 하고,  구경도 시켜주곤 하지만, 주말에는 냉정하리만치 가정위주의 시간을 집에서 즐기는것을 그때 보고 느끼면서,  주말을 집에서 식구들과 함께 보낸다는 그말뜻이 쉽게 이해가 되지않았었다.

요즘이야 신기술도 아니기에 신기할것도 없었지만,  그때 내가 배운 기술은 철도기관차(Locomotive)의 바퀴를 repair하기위해 기관차 몸체를 Dismantling 하지 않고,  차고안에 설치된 전삭반( Wheel Lathe)에 올려놓고 마모된 바퀴의  Tread를 적당한 Tapper를 두고 깍아내는 기술을 배우는 것이었다.  당시의 조국의 철도기술은 마모된 바퀴표면을 깍아내기 위해서는 몸체전부를 해체해서 하나씩 Lathe에 고정시켜서, 선반공이 수동조작하여 Cutting하던 때였었다.  이에 비하면 통채로 올려놓고 바퀴표면을 깍는다는것은 문자 그대로 신기술이었었다.  일종의 Industrial revolution 같았었다.   이러한 최신 기계설비를 이곳 독일에서 수입하여 서울과 영주 그리고 부산에 설치하는, 일종의 기술연수이자 감독관자격으로 파견됐었다.  이곳에서 기술연수를 하면서,  막연히 독일보다 더 잘 살고 있다는 북미 대륙의 미국이나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갖게 하는 계기를 마음속에 간직하게 됐었다.

당시 새로 개통한 서울시 지하철에서도, 아직은 정비시설이 미비하여,  최신기계설비가 완료된 철도에 의뢰하여 바퀴표면을 깍아 운영했었다.    그로 부터 약 40여년 정도가 지난 지금, 조국은 너무나 상상할수 없을 정도로 발전하여 세계무대에서 당시의 선진국들과 어깨를 겨누면서 선두다툼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자랑스럽지 않을수 없다.   조국의 경제건설과 잘살아 보자는 의지 하나로 온 국민이 매진하는 그격동의 시대속에서 내가 있었다는것을, 오늘 지난 60여년의 조국의 지내온 발자취를 동영상을 통해보면서, 새삼 지난세월을 주마등 처러 절감하면서,  오직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하지 않은것은 정치판에서 활개를 치고 있는 정치꾼들의 망국적 행동에 대해 전혀 자각을 하지 못하고 앞으로 전진할려고 하는 국가라는 수레를 뒤로 끌어 내려고 온갖 꽁수를 쓰면서 헤매고 있다는 점이 걱정되고 무척아쉽기만 하다.    






Thursday, February 14, 2013

Canada에서 해서는 안될말 7가지( 그들의 자존심)

어느나라국민이고 간에 자기민족과 조국자랑을 하는것은 부모와 자식간, 또는 형제자매지간의 피로맺은 인연과 같은 이치로, 추겨주는것은 마음 흐믓하나, 비난하는 소리를 들을 때는 기분이 언짢아지고,  사실은 그렇치 않다는 설명을 하려고 하는 본능이 있다.

캐나다인들이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 많은 사항중에는 제 3자의 입장에서 보았을때는 극히 편협적이고, 논리적이지 못한 내용들이 여러개 있는데, 그중에서 7곱가지를 꼽아 보았다.
이러한 내용은 캐나다인들과 대화 할때 가능하면 삼가는게 서로에게 좋을것 같아서 이다.

첫째: 문학작가 Margaret Atwood의 작품에 대해서는 평을 금하는게 좋다.  캐나다에서는 그녀가 문학에서는 여왕같은 존재로 존경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그녀만큼 각종문학상을 많이 수상한 작가가 캐나다에는 존재치 않을 정도이고,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또한 그녀에 대한 행적을 물어보는것도 기분을 거스리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들은 대개가 내용이 감동적이지 못해 읽기가 지루하고, 마음을 무겁게 하는 내용들이다.  그러나 어느누구도 이러한 진실을 말하려 하지 않는다.  왜냐면은 그녀 때문에  세계지도상에 자랑스럽게 "캐나다"라는 나라를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둘째: 재활용은 시간과 돈의 낭비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전에는 쓰레기 버리는게 쉬웠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반대이다.  쓰레기수거법이  무척이나 까다롭기 때문이다.   온집안식구들이 쓰레기 버릴때 마치 쓰레기 수거인이 된것처럼, 신경써서, 병, 종이 등을 포함하여 조심스럽게 분리하여 쓰레기통에 넣어야하는 어려움이 있다.  심지어는 Dryer에서 나오는 Lint까지도 어느통에 버려야 적법인지를 고민할 정도이다.

포도주병을 적당히 쓰레기담은 백에 넣어 버릴려는 생각은 아예 접는게 났다.  분리수거나 재활용은  막대한 시간과 경비를 낭비하는것일뿐 환경보존에는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린 아이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얘기해서는 안된다.  왜냐면은 실상을 설명해줘도 믿지 않을 정도로 쓰레기수거에 대해 쇄뇌되여있기 때문이다.

셋째: 개인진료소에서만이 진정한 국민건강 치료가 가능한 실정이다.
CBC의 유명한 앵커 Tommy Douglas가 국가가 국민건강을 책임지고 진료해 준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하면서, 엄지발가락이 안으로 파고 드는것까지도 전부 국가에서 보살펴 준다고 자랑이지만, 그진정한 의미는 건강과 치료비 때문에 진료받지 못하는 사람이 없다는것을 설명하기위함이다.    요즘은 실제로 환자 치료보다는  소요되는 비용절감에 더 초점을 마추고 있는터라, 진료사정이 더 악화되고 정체되고 있을 뿐이다.

토론토같은 대도시에서는, 일례로, 백내장수술을 받기위해서는 기약없는 대기를 하고 있어야할 정도이다.   정부는 국민건강진료를 책임지고 있다는것을 실제로 보여주기위해,  환자들을 병원으로 보내기 보다는 개인 진료소로 보내고 있다.  정부에서 지불하는 진료비용은 똑같다.
그러나 캐나다에서는 "개인 진료소"라는 의미는 정부의료정책을 비하하는 불쾌한 표현으로 인식된다.   따라서 정부는 개인진료소에 가는 사람들에게 확실한 정보를 주지않고 마치 국가진료시설을 이용하는것 처럼, 국민들을 오도하고 있다.

넷째: David Suzuki는 환경보호론자가 아니고 오히려 망치고 있다.
지구온난화로 부터 시작하여 양식된 연어와 변종시킨 농작물들에 대해서 David Suzuki는"환경 보존의 종말"이라고 악평하는 사람이다.  그는 인간들의 가장 기본적 사악함을 강연하면서 종말을 부르짖은 캐나다산 예언자이다.  현대판 Savonarola가 되여, 우리 현대인들이 소유하고 있는 물질들을 불태워 없애지 않으면 우리모두는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예언을 하고 있다.  지구파멸을 예언하는 그의 발언은 사람들을 그렇게 생각하도록 유도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천문학적인 예산이 소요되여 도저히 그성취가 불가능한 Kyoto협약을, Suzuki는 실제로는 그렇게 많은 투자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합심하여 매연방출을 줄리고 환경오염지역을 청소하면 된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참고: Savonarola는 15세기초기의 이태리의 유명한 예언자임.

다섯째: 국가 정책인 day care 운영 프로그람은 실질적으로 가난한 아이들을 돕지 못한다.
국가에서 운영하는 비현실적인 Daycare Centre에 대해 누가 감히 반대 하겠는가?
이프로그람은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구만리 같은 어린 아이들에게 더 좋은 삶을 살아가게하는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아무도 이목적에 반대할자는 없다.   그러나 이런 프로그람이 맨처음 시행된 Quebec주에서는 이러한 프로그람이 실제로는 생활이 넉넉한 중산층 이상의 부모들에게 보조비를 지불해 주는것 외에는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형편이 가난한 부모들은 이를 이용할 엄두도 못낸다.  편리한 Daycare Centre프로그람은  돈벌이를 위해서 꼭 유용한 시설임을 부인하는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Daycare Centre를 거쳐온 아이들이  상급학교에서 또는 인생살이 하는데 더 잘하고 있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   고로 아이들 성장과 교육을 돕기위해 수십억 달러를 투자하고져 한다면, 차라리 그돈을 경제적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사용하는편이 훨씬 효과적이라고 생각되지 않을까?

여섯째: Group 7의 화가에 대한 평가는 많이 과장된것이다.
A.Y. Jackson의 작품은 나도 굉장히 좋아한다.   특히 그의 작품은 내가 어렷을적에 Summer Camp에 가서 즐겼던 때를 많이 생각케 해준다.   우리집 거실에는 내가 어려서 부터 Group 7에 속하지않은  Tom Thomson의 작품 "The West Wine"의 복사본이 걸려 있다.

Group 7화가들은 첫째로 캐나다의 자연을 소재로 그림을 그렸고,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이라할수 있는 장르화가로 평가 됐었다.  그러나 그때는 80여년전이었고,   오늘날에는 오래살아오신 어머니들이 보시기에 알맞는, 겨우 포스트카드에나 사용되는 정도이다.   더이상 추겨 세우는것은  식상이다.  대신에 다른 신선한것을 찾아 전진해야 할때이다.

일곱째: 미국은 영원히 세계 최강국이다.  특히 저녁밥을 식구들이 모여 먹으면서 미국에 대해 논하는것은  충격일수 있다.   좋은 뜻에서 미국에 대한 험담을 하는것은 어쩌면 나는 캐나다인임을 나타내는뜻이기도 하다.   우리는 미국인들은 건방지고, 육중한 몸을 던져 돌진하는 황소와 같이 본다.   나쁜뜻에서는 미국인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사악한 민족이자 국가이다. 그러나 지금은 서서히  수억명의 인도 또는 중국인들은  수천년동안  받아온 고통과 하류계급의 신분에서  풀려나고 있다.  왜냐면 미국은 그러한 나라들뿐만 아니고 전세계에 경제적 자유를 전파하고  또 구매해 주기 때문이다.


이내용을 보면서,  잘못 알려진 사실이 진실인양,  당연한것 처럼 사람들에게 인식되여져 있는
Preoccupation화된 관념속에서 벗어나지 않을려고도 하고,  알면서도 바꾸려 하지 않는 경향이 각자의 저변에 깔려 있음을 다시 발견한 것이다.   시대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받아 들여야 하는 이유가 그래서 필요한것 같다.




Sunday, February 10, 2013

마음속에 더 깊이 와 닿는 설날 아침에 생각나는 기억들.

아침에 일어나면 Laptop 컴퓨터를 켜고 이멜을 체크하는것은 이제는 Routinely 되다시피한, 하루일과의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까치까지 설날은 어제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잘 알고 지내는 친지 P로 부터 설날 축복을 기원하는 메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마운 친지분이다.
양력 설날보다는 그래도 음력설날을 맞이 하는게 더 마음에 와 닿는것은 나와 동시대의 사람들에게는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그러면서 깊은 추억이 그속에 항상 존재함을 느끼기 때문일것이다.   어제 일어났던 일들 같은데.....어느새 시간이 흘러, 노년연금을 타기 시작한지가 벌써 일년 하고도 4개월이 지나, 그때의 기억으로 부터  반세기가 훌쩍 넘은 긴세월을 살아왔음을 새삼 이아침에 느낀다.

섣달 그믐날밤이면 동네 어른들은 농악놀이기구들( 징, 꽹가리, 장구, 북 등등)을 보관해 두는 사랑방에서 꺼내여,  농악팀을 즉석구성하여 동네 각 가정을 돌면서, 각가정의 건강과 축복을 비는 굿놀이를 하곤 했었다.   섣달 그믐날이면 날씨는 항상 추웠었다.   얼어버린 손가락을 입김으로 녹이면서, 농악꾼들의 뒤를 졸래졸래 따라 다니면서 같이 즐기고,  설날에 사용할 떡이나 기타 특별 음식을 요기 하라고 막걸리를 곁들여 차려 주면 우리 꼬마들은 어른들의  허락이 떨어지면 우루루 몰려들어 인절미 떡을 조청에 찍어서 입이 터져라 밀어넣고,  시원한 동치미 국물도 마시고...... 막걸리는 어른들 몫이라고 감히 손댈 생각도 못했었다.

굿놀이가 끝나면 우리 꼬마들은 다시 친구집에 몰려가  동네 꼬마들은 호롱불을 켜놓고 새벽까지 윷놀이를 했었고, 조금 더 커서는 화투놀이도 했었다.  섣달 그믐날 잠을 자면 눈섭이 하얗게 변해 버린다는 형과 누나들의 거짖말?)을 진실로 믿고 눈섭이 하얗게 변하는것을 피하기위해 그렇게 동네 꼬마들은 긴밤을 지샜었다.   호롱불꽃 끝에서 밤새  피어나온 끄름 때문에, 아침에 헤여질때 서로의 얼굴들을 쳐다 보면서, 코구멍이 새까맣다고,  내코구멍은 아무렇치도 않은것처럼 착각을 하면서, 상대방 꼬마들의 코구멍의 검댕이를 보면서 깔깔대고 웃어댓던 그때가 엇그제 같은 기억인데......그때의 나이가 갖 국민학교 졸업때였거나 중학교 1학년 때쯤으로 기억된다.

아침 일찍 엄마나 누나가  가마솥에 물을 잔뜩 채워서 찬바람이 휭휭 불어대는 부엌에서 장작불을 피워 데워논 물과 찬물을 반반씩 놋대야에 채워서 세수를 했었다.  굴뚝처럼 새까만 코구멍을 손가락으로 후벼파서 씻어내곤 했지만, 목과 손등에는 겨울내 목욕을 못해 때가 더덕더덕 붙어 있기도 했었다.  그래도 그때는 그것이 위생에 좋은지 나쁜지도 몰랐었고, 남이 보았을때도 흉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마냥 몰려 다니는것만이 최상으로 생각 했었다.

아침 일찍이 각자의 집에서 설날 제사가 끝나면 우리 우리 쪼무래기들은 다시 모여서, 삼삼오오 때를 지어 동네 각가정을 방문하여, 어른들께 새배를 드리고 나면,   설차례를 차리기위해 준비해둔 산해진미(?)를 답례로  인절미, 유과, 잡채, 동치미 등등의 음식을 한상 차려주면 우린 개눈 감추듯 금방 다 먹어 치우곤 했었다.   그리고 다시 다른 집으로   갔었다.  내가 자란 시골에서는 떡국은 정월 대보름에 주로 준비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오직 배부르게 먹을수 있는 기회가 일년중 설날뿐이었기에...... 우린 기회를 놓칠수 없었기 때문에 배가 불러도 계속해서 세배를 다녔었다.    모두가 어렵게 살았었지만, 인심은 그래도 후해서 인정을 배풀었던 것이다.

살림 형편이 낳은집을 우린 골라서 새배를 다니곤 했던 기억도 있다.   진정으로 어른들을 공경하기 때문에 세배를 다녔다기 보다는  음식한상 차려주는 그것을 노렸기에, 형편이 어려운집은 피해서 건너 뛰었던 기억도 떠오른다.   설날때 부터는 춘궁기가 시작되기에  배고픔의 서러움과 어려움을 견디어 내기가 어려웠었던 어린시절의 기억이 이아침에 떠오른다.
내고향에서는 새뱃돈을 주는 풍습은 없었다.  대신에 정성을 담아 음식상을 차려 주셨었다.
후에 학교 다니기위해 서울에서 살면서 새뱃돈을 주고 받는것을 알았었다.

아내가 준비해준 떡국의 맛이 어렸을때 먹었던 것보다 훨씬 더 영양도 많고 맛이 있지만,   건강식이니 영양식이니 따지고 먹는 요즘과는 달라,  배를 채우는게 목적이었던 그때에 먹었던 떡국의 맛을 느끼지는 못한다.   물질이 풍부해서 좋긴 하지만,  배를 채우기위한 절박함속에서 입에 정신없이 털어 넣던 그때에 느꼈던 맛은 이제는 더이상 느낄수가 없음이 궨히 마음 한쪽에 서운함으로 남는다.  고마움도 그때에 비해 더 느끼는것같다.

아이들은 신정에 새배하고 해야할 도리를 했기에 오늘 진짜 설날 아침에는 우리 부부만이 아침을 먹었다.  아이들은 영원히 내가 어렸을때의 기억을 상상도 못하리라.  시대의 변천을 탓해야 옳은가?   그래서 기회만 되면 짐을 꾸려,  형편이 어렵게 사는 다른 나라로 여행을 떠나게되는 이유가 있다.   풍습은 다르지만 그들의 어려운 삶을 보면서, 옛날 코흘리개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오늘의 물질 풍부한 삶에 감사함을 잊지않게 하고져 함이다.

그때는 지금의 내나이가 되면 동네에서 가장 나이 많이 먹은 노인층에 속해,  안방 아랫묵에 좌를 틀고 앉아 어린 쪼무래기들의 새배를 받는 맛을 즐기시고, 덕담도 해주셨었는데......

오랫만에 조국 고향을 방문하여 시골고향에 찾아가 친구들을 만나면, 그동안 살아왔던 사회적 지위라든지, 부에 상관없이 코흘리개 꼬마시절로 금새 돌아가 이름부르기 보다는 그때 불러대면서 놀려 먹었던 별명이 더 정겹게 들리는 정감이 흐름을 느끼곤 한다.  벌써 세상을 하직한 친구들도 여러명 있었다.
이아침 설날에 그친구들은 자식들과 손자손녀들의 새배인사를 받고 있을까?  궁금해 진다.



뱀띠 새해에 모든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그리고 그위에 인간미를 풍부하게 느끼면서 새로운 한해를 맞이 했으면 좋겠다.    


Friday, February 08, 2013

티벳인들의 분신자살이 독립을 앞당길수 있을까?

요즘 중국의 자치령인 Tibet에서, 특히 수도인 Lhasa에서는 심심찮게 승려 또는 젊은남자들사이에서 분신자살을 하여 보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는 뉴스가 간간히 흘러나와 전세계로 퍼지고 있다.   그들의 분신자살 목적은 중국의 불법점령과 억압된 자유를 되찾기위한 목적이라고 하는데, Tibet의 독립을 세계에 알리는 유일한 방법중의 하나로 여겨지고있는것 같다.

이러한 분신자살은 2009년도 부터 시작되여 오늘 현재 99명의 티벳 젊은이들이 분신 자살을 한것으로 통계는 보여주고 있다.  언론의 탄압으로 외부에 알리는것도 쉽지는 않지만, 요즘은 e-Mail등의 방법을 통해서 은밀히 티벳밖으로 이러한 분신자살 뉴스를 알리고 있다고 한다.

1959년도에 중국은 당시 왕정이던 Tibet을 점령하고, 하나의 자치주(Self-governed Province)로
합병 시켜 오늘에 이르렀는데,  Tibet인들의 끊임없는 독립요구가 커지자, 아예 군대까지 상주시켜, 이들을 감시하고, 언론을 탄압하고, 개인의 자유까지도 제한하는 강경정책에 티벳인들의 저항과 중국정부의 마찰이 계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2011년도 9월에 티벳여행을 하면서 Potala 궁전과 그주위의 역사적 불교사원들을 비롯한 역사적 Site를 구경할때도, 조캉사원(Jokang Temple)의 넓은 광장의 많은 여행객들과 불교의식이 강한 수많은 원주민들이 불교사원앞에서 108번뇌의 절을 하고 불공을 드리는 전경을 볼때도,  사이 사이로 1개 분대단위로 구성된 중국군인들이 정기적으로 광장속의 여행객들과 원주민들 사이로 순찰도는것을 보았었다.

오래전, 월남전이 한창일때, 자유세계의 영향권에 있던 남부 월남에서, 특히 사이공의 번화한 시내한복판에서는 심심찮게 승려들과 젊은이들이 몸에 휘발유를 뿌려 분신자살하는 장면의 사진과 신문기사가 전세계를 향해 전파 됐었고, 나도 그런 뉴스를 여러번 보았던 기억이 지금도 기억속에 살아 있다.

당시에 하노이에 공산정권을 갖고 있던 월맹과 남쪽의 사이공의 민주정부사이에는 전쟁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는데,  민주주의 정권으로 자유를 누리고 있던 남부월남인들중에는 부정부패에 만연돼 있는 정부는 물러나라는 데모가 매일의 행사처럼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남부월남은 데모대와 그리고 북쪽의 호지민공산세력과 싸우는 이중고속에서,  데모대들은 공산정부와 맞서 싸우는 정부에 자유를 달라, 부정부패 척결하라는등의 사치스런 구호를 외치면서, 거침없이 분신자살을 했었던 기억이 있다.

결국 자유월남은, 서방세계의 여러나라들이 파병해서 같이 월맹군들의 공격을 맞서 싸운 노력도 허사로 공산월맹에 1975년도에는 나라를 통채로 넘겨주고 말았었다.   자유월남인들은 그후에야 자유가 얼마나 중요하고 산소같은 것이었던가를 공산정권치하에서 허덕이면서 뼈저리게 느끼면서 고통을 받으면서,  방어할 힘이 없이 감상에 젖은 자유만을 부르짖는 행동들이 얼마나 어리석었던가를  지금도 느끼면서, 제한된 자유사회속에서 살아가고 있는것으로 알고 있지만, 공산정권에 함락된 이후로는 사이공 거리에서 독재정권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분신자살했다는 뉴스를 들어본 기억은 없다.  이는 무엇을 의미 하는가?   요즘 조국 대한민국에서는 지구상에서는 어느나라 국민도 누릴수 없는 자유(?)를 누리면서, 주적인 이북을 찬양하는 이적 행위를 알면서도 당국은 동태만 살피고 있을 정도로 감상에 빠져 있는 조국 한반도에서 돌아가는 오늘날의 사회환경을 당시 월남의 사이공 거리와 비교해 보면,  한반도의 앞날이 꼭 밝지만은 않게 마음을 안타깝게 하는, 이런 나의 염려어린 생각을 고국에서는 어떻게 이해할까?

조그만 미물이라도 생명이 있는한, 살생을 해서는 안된다는 불교의 나라, Tibet에서는 이러한 불교의 가르침과 현실사이에서 생기는 괴리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분노가 치솟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살 행위를 뒤에서 부추기고 있는, 인도에서 활동하고 있는 Tibet의 망명정부 대변인은 "분신자살은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오직 Non Violent라는 점을 이용해서 전세계에 Tibet의 독립을 알릴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다"라고 항변한다.

중국의 Tibet 불법 점령에 항거하는 뜻으로 2009년도 부터 시작된 "분신자살"로 아까운 생명을 희생한 숫자는 99명이라고한다.  망명 Tibet의 의회대변인 Penpa Tsering씨의 설명에 의하면 "99명의 분신 자살자들은 과격한 행동으로 주위 사람들, 특히 중국인들에게 해를 끼친적이 없으며,  Tibet의 독립을 외부세계에 알릴려는 자신을 분신자살의 방법으로 사용됐을 뿐이다"라고 한다.  중국은 이러한 참상을 외부세계에 알려지는것을 방지하기위해 온갖 물리적 행동을 사용해 왔기에 지금까지는 외부세계에 이들의 분신 자살뉴스가 통제되여 조용한듯이 보여졌었으나, 지금은 발달된 Social Media덕분에 쉽게 그내용이 당국의 눈을 피해 외부세계로 알려질수 있게 된것이다.  e-Mail이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다한다.

중국당국은 티벳의 정신적 지도자 Dalai Lama를 강력히 규탄하고 있다.  내용은 앞서 언급한 망명정부의 지도자들이 주장한 것과 대동소이하다.   즉 젊은 Tibet인들을 부추겨 분신자살을 선동한 장본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중국의 주장을 받아 들이는 Tibet인들은 아무도 없다고 한다.  대신에 중국의 탄압이 분신자살에 이르게 한것이다라고 맞받아친다.

지난 50여년 동안 인도(India)는 Tibet의 망명정부를 인도영토내에 구성하고 활동하도록 허가했으며, 뒤에서 많은 뒷받침을 해준것으로 알려져 있다.  넓게 보면 인도와 중국관계가 편치 않았다는 해석으로 연결된다.

서방세계의 뉴스 미디어는 이런 분신자살에대한 뉴스를 거의 외면하고 있는것 같다.   미국이 주동이 된 월남전때는 거의 매일 사이공 거리에서 분신 자살하는 내용의 뉴스를 사진과 함께 서방세계의 언론은 긴급 타전 했었다.    Tibet에서의 분신 자살뉴스는 거의 외면 당하고  있다.
이유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뉴스를 타전해서 전세계로 보냈을때 그뒤에 발생할 후유증을 놓고, 뉴스 미디아와 서방 세계는 저울질 하고 있는것 같다.   지금 우리가 일상용품으로 사용하고 있는 99%의 물건들은 Made in China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세계는 지금 중국의 생산품에 의존하여 살아가고 있다는 얘기도 될수 있다.   즉 중국은 이미 세계 각나라에 그만큼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뜻이다.   감히 그큰 간접세력의 뜻을 거스릴수 있을 용감한 서방세계가 지금 지구상에 있다고 할수있을까?

Tibet의 문화는 중국과 다르다고 생각된다.  민족도 다르다.  오랫동안 독립국가로 생활해온 사람들이다.  한국이 일제하에서 독립을 외쳐대면서 신음했던 그때에도,  전세계는 2차 세계대전이라는 큰 대가를 치르고 그틈새에서 식민지 생활을 청산했으나, 반토막 신세가 되고 말았다.
지금은 그때와는 세계 정치판과 군사적 충돌면에서도, 특히 경제적 교류에서는 완전히 상황이 바뀌었다.   마음속으로는 Tibet의 독립을 지지하지만...... 과연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용기가있을까?  그것이 문제이고,   그다음이 중국 당국의 용단이다.  그러나 그럴 조짐은 현재까지는 전연 느낄수 없다.   아까운 젊은 생명이 얼마나 더 많이 희생되야만 그빛을 볼수 있을까?
99명의 분신자살이 있기 까지 그내용은 외부세계에 거의 알려진바 없었던것 같다.   100번째의 희생자가 발생할 이시점에서 겨우 서방세계는 눈을 돌리고 있는것 같지만,  이또한 일회성으로 끝날 조짐이 높다.   과연 이방법이 최상일까?




As Self-Immolations Near 100, Tibetans Question the Eff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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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DELHI — A crowd of Tibetans came here to India’s capital last week, bearing flags and political banners and a bittersweet mixture of hope and despair. A grim countdown was under way: The number of Tibetans who have set themselves on fire to protest Chinese rule inTibet had reached 99, one short of an anguished milestone.
Freetibet.org, via Associated Press
Ninety-nine Tibetans have set themselves on fire to protest Chinese rule, like this farmer last f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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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rico Fabian for The New York Times
Tibetan monks shout slogans as they take part in a rally during a four-day gathering billed as the Tibetan People’s Solidarity Campaign.
Yet as that milestone hung over the estimated 5,000 Tibetans who gathered in a small stadium, so did an uncertainty about whether the rest of the world was paying attention at all. In speeches, Tibetan leaders described the self-immolations as the desperate acts of a people left with no other way to draw global attention to Chinese policies in Tibet.
“What is forcing these self-immolations?” Lobsang Sangay, prime minister of the Tibetan government in exile, asked in an interview. “There is no freedom of speech. There is no form of political protest allowed in Tibet.”
Billed as the Tibetan People’s Solidarity Campaign, the four-day gathering featured protests, marches, Buddhist prayer sessions and political speeches in an attempt to push Tibet back onto a crowded international agenda. If the Arab Spring has inspired hope among some Tibetans that political change is always possible, it has also offered a sobering reminder that no two situations are the same, nor will the international community respond in the same fashion.
“The world is paying attention, but not enough,” Mr. Sangay added. “There was a self-immolation in Tunisiawhich was labeled the catalyst for the Arab Spring. We’ve been committed to nonviolence for many decades. And how come we have been given less support than what we witnessed in the Arab world?”
Yet even as the self-immolations have become central to the Tibetan protest movement, a quiet debate has been under way among Tibetans who are anguished over the deaths of their young men and who question how the acts reconcile with Buddhist teachings. Again and again, speakers emphasized that the Tibetan movement remains nonviolent and that the people who have self-immolated harmed only themselves.
“None of them have tried to harm anybody else,” said Penpa Tsering, the speaker of the Tibetan Parliament, which is based in Dharamsala, the Indian city that is host to the exiled Tibetan government. “None of the 99 people have tried to harm any Chinese.”
The Tibetan self-immolations began in 2009 as protests against China’s rule in Tibetan regions of the country. At least 81 Tibetans have died after their acts, and nearly all the self-immolations have occurred inside Tibet, with news smuggled out via e-mail or through networks of advocacy groups.
The Chinese authorities have responded by taking a harder line. Last week, a Chinese court handed down stiff sentences to a Tibetan monk and his nephew on charges that they had urged eight people to set themselves on fire, according to Chinese state news media. The monk was given a suspended death sentence, usually equivalent to life in prison, and the authorities have made it clear that committing or encouraging the act will be treated as intentional homicide. (Mr. Sangay said that six others in a different area of Tibet were also given harsh sentences.)
The Chinese government has blamed the Dalai Lama, the Tibetan spiritual leader, for inciting ordinary Tibetans to carry out self-immolations. Tibetans rebut the claim, saying the cause is Chinese repression.
“What are you left with?” Mr. Penpa asked. “The only thing you can do is sacrifice your life.”
With the Dalai Lama having ceded political control of the Tibetan government — and having encouraged the elections that elevated Mr. Sangay, a former lecturer at Harvard, to prime minister — the Tibetan movement is in flux. To some degree, last week’s events were part of continued efforts to establish Mr. Sangay and other democratically elected Tibetan members of Parliament as figures capable of rallying political support for a movement long dependent on the charisma and stature of the Dalai Lama. (He did not attend the gathering.)
For more than a half century, India has been the primary host of exiled Tibetans, and many of the people who flocked to New Delhi came from special Tibetan villages elsewhere in the country. Lobsang Thai, 28, who came from Mundgod, a Tibetan village in the Indian state of Karnataka, said the self-immolations reflected the desperate situation in Tibet. “I don’t think it is about right or wrong,” he said. “That is the only thing we can do without hurting other people. That’s the best way to get the world’s attention.”
Tenzin Losec, 42, who is from Mainpat, a Tibetan village in the Indian state of Chhattisgarh, agreed. “This is very sad for us,” he said. “But people inside Tibet, they have no other way. They have no rights. Outside Tibet, we are trying to raise awareness around the world.”
Tibetan leaders were determined to portray the week’s events as evidence that the global community, especially India, supported their aspirations. Lawmakers and other political figures from India’s leading political parties appeared at different events, though the government’s top leaders stayed away.
Mr. Sangay and others want the United Nations to push China to improve conditions in Tibet and also to allow inspectors to tour the region. “The Chinese government should feel pressure to do something,” he said. “This is leading to a vicious cycle: hard-line policies, protests, repression, more hard-line policies, more protests, more repression.”


Tuesday, February 05, 2013

열광속의 XL VII 번째 Super Bowl을 TV로 보면서...



Monday, February 04, 2013


어제 낯 11시부터 각종 미디어에서는 Super Bowl로 온통 난리 법석을 피우기에 과연 그만한 이유가 있나?를 이번에는 알아볼 심산으로 본 경기가 시작되는 오후 6시부터 TV앞에 앉아 화면을 지켰었다.

미국의 Foot ball 경기인데, 캐나다사람들도 그들과 똑같이 Super Bowl 을 준비 하기에 무척 바쁜시간을 보낸것으로 미디아는 전하고 있었다.   그예로 게임을 보면서 스낵을 먹는 습관에 따라 각 식당에서는 Chicken Wings를 Fry해서 준비 두어야 하는데, Stock이 부족해서 난리라고 법석을 떠들어 대는 뉴스가 계속 흘러 나왔었다.  토론토의 다운타운 지역에서만 약 2만개의 Chicken Wings가 필요한데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Chicken Wings대신 Mixed nuts와 맥주한병을 대기시켜놓았었다.

한판 결승에서 맞붙을 팀은 San Francisco의 49ers와 Baltimore의 Ravens라고 기억을 하고 있었다.  평상시에는 별로 관심이 없기에 그냥 듣고 흘렸지만, 미디아에서 며칠전부터 계속 전해 주었기에 자동적으로 입력이 되였기 때문이다.  QB의 이름도 나는 기억 못했었는데 게임 시작전에 겨우 Ravens팀의 Joe Flacco가 QB임을 알았고, 49ers것은 기억은 못하고  다만 고참이 아니고 신참이라는것을 겨우 알고 있었다.

나를 Super Bowl 경기에 묵어둘수있었던 요인중의 하나는 양팀의 Head Coach가 친형제간이라는점이었다.   Jim Harbaugh와 John Harbaugh.  한형제가 코치로 맞붙어 싸우는 경우는 수퍼볼 역사상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TV화면에서 본 두 형제의 얼굴은 정말로 쌍둥이 처럼 비슷했다.   다른면이 있다면 49ers의 코치는 motion이 큼과 동시에 계속해서 뭔가를 떠들어대는편이었고, Ravens의 코치는 좀더 과묵하고 말이 적어 보였던 점이다.

2nd Quarter가 끝날때까지 게임은 싱겁게 이끌려 가고 있었다.  Ravens가 28점,  49ers가 겨우 6점,  이런 점수가 Super Bowl에서나오다니.....  객석을 꽉 메운 7만6천여명의 관중들은 행여나 One sided 게임으로 끝나는것은 아닌지?   TV 해설에서도 10점 이상의 점수차이가 났을때 역전해서 이겨본 기록이 없다고하면서 역전의 가능성이나, 근접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고 했었다.   이때 갑자기 Black out이 된것이다.   경기는 자동적으로 정지된것은 물론이다.
고국의 앞서가는 한 언론은 정전사태를 미국의 체면을 구겼다고 비꼬는 기사를 써서,  진정성을 잃어 버리는 가십성 기사를 내 보내는 철없는 짖을 보면서,  남의 어려움을 감싸 안을줄 모르는 철저한 Selfish의 근성을 보여 주어, 한심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현지의 언론은 정전사태가 악화될 경우 관중들의 소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기사를 내보내고 있는판에.....

정전동안 Ravens의 John Harbaugh는 여유를 갖고 선수교체를 시키고, 선수들은 경기장의 절반만 비추고 있는 불빛속에서 잔듸위에 드러누어 쉬고 있고,  Cheer Girls들은 댄스를 계속하고 있었고,  관중들은 허둥대지않고 조용히 다음 순서를 기다리면서 앉아 있었다.   잠깐 49ers의 QB의 얼굴이 보이면서 앵커가 설명하는 속에서 그의 이름이 Colin Kaepernick이라는것을 용케도 알았다.




정전사태가 있기전, 49ers의 공격실패로 볼을 상대편으로 넘겨주는 long shoot을 했는데 Ravens의 공격수 Jocoby Jones가  Touch down line 뒤에서 볼을 받아 상대편 방어선을 뚫고 109야드를 돌진하여 Touch down시킨것은 나도 모르게 49ers를 향해 "얼간이들아 뭐하는거야"라고 소리를 치고 말게 했었다.  두팀다 나에게는 낯설은 얼굴들이지만, 웬지 49ers가 밀리는것을 보면서 그쪽을 응원하게 됐었던 것이다.  아마도 반대로 Ravens가 밀렸었다면 그쪽을 응원했었을 것이다.  게임이 끝난후 MVP로 뽑힐것으로  생각까지 했었다.  어디에선가 이경기를 보고 있을 아들녀석에게 Text message를 보냈다. "49ers들 얼간이들 아냐?"라고,  일분도 안되여 답장이 왔다. "하하하 우습지" 라고....

경기가 개최된곳은 Baltimore도, San Francisco도 아닌,  양팀과는 전연 연관이 없는곳으로 미국의 남쪽 끝에 있는 New Orleans의 Super Dome에서 였다.   몇년전 그곳은 태풍 Kartrina로 초토화 되다시피 한 곳이다.  이번 경기를 그곳에서 개최함으로써 지역경제에 도움을 주기위한 차원에서 채택된 곳으로 알고 있다.  깊은 배려의 뜻을 조금은 이해할것 같다.

Half Time에서 세계적인 가수 Beyonce와 일행들의 Performance는  노래뿐만이 아니고 무대장치와 율동 등등 모두가 화려하고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마술적인 그녀의 노래와 춤은 무대앞에서 옆에서 그리고 뒤에서 같이 한팀이 되여 물결이 치듯 흔들어대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이무대는 Pepsi가 스폰서였음을 쉽게 로고를 보면서 알수 있었다.  그녀가 입은 의상은 젊은층을 겨냥했음을 쉽게 느낄수 있었고,  아주 발랄해 보였다.  믿어지지않게 그녀의 Apron은 젊은 남자가 맡았었다는것을 알았다.

35분간 지속된 정전이 끝나고 Power가 복구되여 다시 3rd Quarter가 시작되면서, 경기는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아마도 49ers의 Head Coach인 Jim이 작전을 바꾼것으로 이해됐는데, 저돌적인 공격을 펴 거의 Ravens 따라잡는가 할정도로 추격했으나,  49ers에 운이 따라주지 않은 아쉬움도  있구나라는 아쉬움이 있었다.  3번이나 QB, Colin이 던진 볼을 다 놓치고  결국 볼을 넘겨주고 마는 실수를 하는것을 보면서,  과욕은 화를 부른다는 뜻을 이해할것 같았다.
49ers의 QB, Colin이 볼을 넘겨줄 찬스를 찾지 못하자 그대로 돌진하여 First Down을 시킨점도 Super Bowl 경기 사상 처음 있었던 일이라고 앵커는 설명을 하면서 감탄 했었다.  본인 자신이나 방어진역시 심하게 대쉬 하지 않고, 슬쩍 라인밖으로 밀어내어 더이상 전진못하는 하는 것으로 방어를 끝내는것을  보면서 그들도 QB에 대해서는 과격한 공격을 피하는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해 보기도 했었다.

MVP는 내가 생각했던 Jacoby가 아니고 Ravens의 QB, Joe Flacco가 받았다.  전문가들의 보는 시각이 뭔가 다른가 보다.  최종 Score는 34대 31로 Ravens가 가까스로 이겼다.  게임이 끝난후 형제 감독은 만나서 서로 악수를 하고 형제애를 나누는 모습은 보기 좋았다.  그들의 기분은 어땠을까?   공식적인 행사가 끝나고 형제로서 만났을때는 또다른 형제간의 본래모습으로 돌아갈것이다.  

선수들이 공격을 막기위해 육중한 육체를 총알처럼 던질때는 그들의 젊음이 부럽기도 했었다.
경기가 끝나고, 축제가 시작될때 천장으로 부터 뿌려지는 Confetti는 화려와 축제의 극치를 보여줬다.  과연 미국의 자존심을 나타내는것 같기도 했다.  그순간 만큼은 모든삶의 근심을 털어 버리고 오직 이축제에 all-in하는 삶이 브라질의 삼바축제를 연상케 했었다.   과연 우리세대가 젊었을때 그런 젊음을 구가 했었던가?   그들이 부러울 뿐이었다.   American Football경기 rule은  나는 잘 알지는 못한다.  다만 게임의 돌아가는 윤곽만을 알뿐이다.   그러나 4시간 반 이상 지속된 경기전체를 하나도 빼지 않고  TV화면에서 눈을 떼지않았었다.  나같은 문외한도 그정도 였으니..... 전체 미국민들이 열광속에 빠진 이유를 알려고 하는 설명이 필요할까?

Monday, February 04, 2013

오늘은 penny가 사라지는날, 2월4일,2013년.


오늘은 캐나다에서 통용되는 Currency중, penny가 공식적으로 통용에서 사라지는 날이다.
copper를 만들기위해서는 3센트의 비용이 들어, 실용성이 없기에 없애고, 이제부터는 물건을 사고 팔때, 끝전이 2센트로 나타날때는 사사오입해서 0센트로 3센트로 끝날때는 5센트로 계산된다고 한다.    결국은 소비자가 그부담을 다 떠맡게 될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캐나다와 다른 나라와의 무역관계에서는 어떻게 계산할것인가?   서류상에서는 아직도 그대로 종전데로, 특히 Income Tax Return 에서는 유지될것이라고 한것 같은데, 이론상으로는 1cent까지 계산되지만, 현금 거래에서는 결론적으로 소비자만 불리해질것 같다.

캐나다는 잘사는 서방세계여러나라중의 하나로 개발도상국가에 많은 경제적 원조를 해 주고 있다.  같은 이치로 자국민들을 보호해야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된다.   Penny coin을 제작하는데 약 3cents가 소요된다는 통계를 본 기억이 있다.   유통되는 coin을 생산하는데 드는 비용은 불과 몇 Million달러가 소요 된다고 한다.  다른 나라와 형평을 유지한다는 차원에서도 Penny통용을 Face out 시키는것은 뭔가 짧은 생각의 발상 같아 보인다.   차라리 수천만 달러씩 원조해 주는 액수를 조금 삭감해서 제작에 필요한 비용으로 전용하면서 자국민들 보호한다면 더 의미가 있을것 같은데..... 정치꾼들의 생각은 다른것 같다.   정부는 단서를 부치고 있다.  의무조항은 아니고 Voluntarily 국민들에게 협조해 달라는 식으로 말이다.   협조의 의미가 뭔가?  그것은
끝전의 사사오입을 소비자인 국민들이 다 흡수하라는 말같이 들린다.  어리석기는....